버나드 마넹의 <선거는 민주적인가>의 원제는 'The Principles of Representative Government'로, '대의민주정의 원리' 쯤으로 옮길 수 있다. '선거가 민주적인가'라는 논점은 이 책의 주제 중 하나일 뿐이며 번역본의 제목은 원저가 가지는 풍부한 함의를 협소화한다.


원서의 제목이 지시하는 것처럼, 이 책은 대의민주정이 작동하고 방식과 원리를 탐구한다. 현대 대의민주주의는 고대 아테나이인이 민주주의와는 대립되는 것이라고 이해했던 정치체제에서 발전되었다. 대의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는 '선거'이지만, 고대로부터 선거는 귀족정의 요소로 인식되었다. 민주정의 핵심 요소로 여겨진 것은 '추첨'이었다. 아테나이 민주정에서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평등하게 선출될 수 있어야 했다. 추첨은 이러한 체제에서 관직과 정치참여의 기회가 평등하게 돌아가도록 하는 기제였다. 우월한 사람들에게 통치를 맡기는 선거는 필연적으로 이러한 평등에 대한 고려를 약화시키기 때문에 아테나이에서 선거는 제한적으로만 시행되었다. 실제로 17~18세기 이후 근대국가와 함께 선거가 제도화되면서, '동의의 원칙'이 우선시되고 '대표는 자신을 선출한 사람보다 더 뛰어나야만 한다'는 원칙이 도입되었다. 이때 선거는 인민의 권리를 제어하는 수단으로 제도화되었으며, 귀족적 대의민주정은 인민의 통치를 인민의 동의 정도로 축소시켰다.


뛰어난 이론적 통찰에도 불구하고 정치사상 고전에 대한 마넹의 독해는 역사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가장 큰 문제점은 역자인 곽준혁도 지적하듯이, 마넹이 '선거'와 '추첨'이라는 주제와 관련된 부분 위주로 텍스트의 내용을 발췌하였기 때문에 정작 그 내용이 들어간 텍스트의 전후 맥락을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넹은 장 자크 루소와 미국 연방주의자들이 왜 그러한 논의를 하게 된 역사적 배경은 다루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마넹은 시대별로 정치사상가들이 선거와 추첨, 민주정을 대하는 입장이 바뀌었음을 지적하면서도 그러한 변화의 과정이나 역사적 원인 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따라서 마넹의 책을 읽고 대의민주정의 작동원리 뿐만 아니라 그것이 논의된 역사적 맥락과 과정까지 알고자 한다면 지성사 연구자인 존 던의 <민주주의의 수수께끼>와 김민철의 <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가>를 읽어서 지식을 보완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마넹의 책은 그럴 때 더 음미할 수 있는 책이다.


김민철의 <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가?>는 지성사적 방법을 통해서 민주주의/민주정의 개념이 근대 유럽에서 논의된 방식, 개념 자체가 변화하는 과정을 평이하게 그려낸다. 김민철의 책이 17~19세기 민주주의 담론에 대해 주로 논의한다면, 존 던의 <민주주의의 수수께끼>는 고대 아테나이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고르게 (그리고 매우 밀도 높게) 논의하여 민주주의 입문서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존 던은 당대의 맥락과 지적 전통을 통해 민주주의에 대한 서양의 논의들을 정리한다. 이런 책에서 흔히 저지를 수 있는 실수가 섣불리 과거 사상가의 논의에서 민주주의의 맹아를 발견해내어 '민주주의의 아버지'를 세우는 것인데, 지성사가답게 존 던은 그러한 단순화를 피하고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가 변화한 복잡한 과정을 그려낸다.


민주주의로 번역되는 demokratia를 원의에 가깝게 번역하면 민치정, 즉 인민이 직접 통치의 주체로서 참여하는 정치체제라는 의미가 된다. 이는 인민의 통치는 인민주권과는 구분된다. 주권이 인민에 있다고 하더라도 인민이 통치 과정에서 소외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민주권을 주장했던 서양의 사상가들도 민주주의를 주장하지 않았으며, 17세기에 민주주의는 무정부상태, 무질서와 동의어였다. 이는 인민의 직접 통치라는 민주주의의가 가진 함의 때문이었다.


프랑스혁명 이전까지 서양에서 민주주의를 옹호한 이론가는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특히 근대 초기 서양 지성계를 양분한 두 흐름인 공화주의와 자연법 전통에서도 민주주의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공화주의 정치사상가들은 덕성 있는 소수가 국가를 이끌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덕성이 낮은 다수의 인민을 참여시키는 민주주의는 국가를 곧바로 멸망에 이르게 하는 체제였다. 기독교적 자연법 전통에서는 신의 뜻을 분별하여 그에 따라 통치할 수 있는 지도자가 권력을 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러한 능력을 갖추지 못한 인민이 통치하는 체제는 용인할 수 없었다.


민주주의의 승리는, 민주주의가 정의롭거나 최선이기 때문이 아니라 의도적인 정치적 노력 때문이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 뒤바뀐 정치적 환경에서 민주주의는 하나의 실현가능한 대안이 되었다. 혁명기 민주파는 당대 기준으로 상당히 급진적인 민주주의 이론을 내놓았지만, 19세기 자유주의자들은 민주주의에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일부 세력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술어는 역사적 우연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대중민주주의는 집권과 정치적 입지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실현되었다. 19세기 자유주의적 개혁의 물결 속에서 투표권의 범위가 점차로 확대되어 정치인들은 성인 남성 유권자까지 고려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유럽 각국에서 보통선거권이 확대되면서, 민주주의적 개혁이 자유주의에서 상정하는 체제와 대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민주주의는 이전 시대와 달리 금기시되는 나쁜 단어가 아니었다. 자유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전적으로 거부하는 대신 그 단어에 담긴 위협적인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다시 말해 인민의 통치라는 의미를 약화시킴으로써 민주주의를 수용했다. 특히, 선거는 대의정부를 통한 과두 지배를 유지할 수 있는 기제였다. 실제로 프랑스의 새로운 유권자들이 루이 보나파르트의 제2제정을 투표를 통해 결정한 일은 보통선거권이 기존 체제에 대한 현실적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따라서 선거를 통해 대의를 제한하는 것이 전혀 필요 없는 일이었으며, 오히려 그런 대의를 널리 확장하는 것이 정치인과 시민 모두에게 이득이 된다. 이처럼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19세기 각국의 특수한 정치적 상황에 지식인들이 반응하면서 나온 결과였다. 이렇게 고대 아테나이에서 우연하게 등장한 이 단어는 2천 년 동안 불명예스러운 역사를 겪으면서도 오늘날의 정치적 상상력을 지배하게 되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민주주의는 인민의 통치를 뜻하는 것으로, 체제가 작동하는 방식을 지칭하지 특정한 이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때문에 존 던이 지적하는 것처럼 민주주의는 관념으로든 제도로서든 어떤 좋은 것도 보장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평화와 번영, 정의를 추구할 수도 있지만, 아테나이 민주주의처럼 무제한적 탐욕을 추구하다가 자멸할 수도 있다(아테나이 민주주의 혼란을 몸소 겪으며 자란 플라톤이 민주주의를 비판한 대표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민주주의 관념, 비판, 재수용의 역사를 통해서 민주주의를 절대화하지도, 무조건적으로 비판하지도 않으면서 '민주주의를 어떻게 활용할지' 그리고 '민주주의를 어떻게 발전시킬지' 묻고 그에 대한 답을 사유할 수도 있겠다.





*아테나이 민주주의/한국 민주주의에 관한 입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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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4-03-01 1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서 보기 힘든 좋은 글 감사합니다.
<민주주의의 수수께끼>는 바로 주문하게 되네요 ㅎㅎ

Redman 2024-03-01 13:58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존 던 책 절판이라 구하기 힘드셨을 텐데 말이죠. 김민철 선생님 책도 상당히 좋습니다!

추풍오장원 2024-03-02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행히 재고 한부 남아있는데가 있었습니다. 받아보니 진작 읽어야 했다는 생각입니다...
 
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가 - 지성사로 보는 민주주의 혐오의 역사
김민철 지음 / 창비 / 2023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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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9세기 서양에서 민주정이 어떻게 논의되었고, 왜 그렇게 두려워했으며, 오늘날과 같은 민주주의 개념이 나오게 되었는지 알차게 이해할 수 있는 꽤 유용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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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베버, 김덕영 옮김, <직업으로서의 과학/직업으로서의 정치>, 길


다른 글에서도 이 책은 언급했으니, 여기서는 바로 넘어가겠다.










유스티누스, <첫째 호교론 외>, 분도출판사

대 바실리우스, <단식에 관한 첫째 설교 외>, 분도출판사


분도출판사가 존경스러운 점은, 꾸준히 교부들의 저술을 출판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 출판사에서는 현재 '그리스도교 신앙의 원천'과 '교부문헌총서'를 통해 교부의 저술을 소개하고 있는데, 알라딘 세일즈 포인트를 보면 거의 사는 사람이 없어, 출판사에서도 어느 정도 출혈을 각오하면서 계속내는 거 같다. 그만큼 그리스도교인들이 시리즈 제목처럼 신앙의 원천이 되는 글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음을 반증하는 거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그러니 내가 계속 사야지.



미야자키 하야오, <책으로 가는 문>, 다우출판사


미야자키 하야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감독. 애니메이션의 영역을 뛰어넘어서도 내가 정말 좋아하는 감독 중 한 명이다. 특히 <이웃집 토토로>부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까지는 전부 걸작뿐이다.


이 책은 내용에 대한 기대보다는, 미야자키에 대한 팬심으로 샀다. 아이돌 팬이 굿즈를 사듯, 나도 좋아하는 인물의 책을 산다.






임경석, <역사논문 작성법>, 푸른역사


대학원 입학 준비 겸..겸사겸사


이 주제에 관해서는

움베르토 에코의 <논문 잘 쓰는 방법>

시미즈 이쿠타로의 <논문 잘 쓰는 법>도 좋은 책이다.









이상동, <중세 서유럽의 흑사병>, 성균관대학교출판부


한국에서는 정말 보기 드문, 국내 저자가 쓴 서양사 분야 학술서적.

대학원 수업에 쓰이는 책이라 구매했다.

흑사병 발발 당시의 정황들을 소상하게 서술한 것처럼 보인다.









토마스 쿤, <과학혁명의 구조>, 까치


이제서야 샀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명성에 비하면 너무 늦게 산 감이 있다.

수업에서 이 책도 참고문헌에 있어 구매했다.










제임스 루빈, <인상주의>, 한길아트


인상주의 그림을 좋아하는데, 괜찮은 도판집이 있으면 싶어서 하나 구매했다.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과 비잔틴>처럼 글은 설렁설렁 읽고 그림 위주로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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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기간 서구에서는 비서구 전통의 낯선 신들, 다른 민족의 신들을 그리스도교의 악마, 괴물로 만들곤 했다.


동아시아와 남아시아를 여행하다가 기괴한 형체를 맞닥뜨린 서구인들의 이야기는 적어도 13세기 말에서 14세기, 마르코 폴로와 포르데노네의 오도리코와 존 맨더빌까지 거슬러 간다. 이들은 일종의 판타지를 저술했고, 15세기 초에 나온 <세계의 불가사의>Livre des merveilles를 비롯해 삽화가 있는 여러 책에 그들의 글이 실렸다. 이 책들은 시각적 어휘의 상당 부분을 계시록으로부터 가져왔다. 예를 들어 마르코 폴로가 중국 카라잔 지방에서 보았다는 거대하고 게걸스러운 용은 커다란 날개를 가졌고 꼬리 끝에는 뱀 머리가 달렸다고 하는데, 이는 계시록 12장의 커다란 날개를 가진 용과 계시록 9장의 뱀 꼬리 달린 사자 얼굴 말에서 착안해 꿰어맞춘 것으로 보인다.

(...)

자신에게 친숙한 종말론적 심상을 낯선 종교의 심상과 관행에 투사하는 행위는 식민지 담론에서도 똑같이 나타났다. 호미 K. 바바가 지적하듯 이러한 투사는 어떤 문화적 타자를 "'타자'인 동시에 전적으로 가시적이고 인식 가능한 사회적 현실"로 만든다. 동일성과 차이, 끌림과 혐오라는 양면의 유희가 수반되는 이 역학을 통해 우리는 친숙한 악마의 심상을 낯선 종교 문화에 투사하고 다른 사람들이 예배하는 신을 괴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독특하고 단순화될 수 없는 차이를 단순화시켜 우리의 의미 체계 안에 집어넣는다. 유럽 그리스도교인들이 새로운 세계에서 마주한 다른 종교를 계시록의 괴물 신을 가지고 해석하는 과정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들은 '친숙한 타자성'을 지닌 심상을 만들어냈고, 동양 종교에 씌운 저 심상에 대항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그리스도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구축했다.

<계시록과 만나다>, pp. 20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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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책이 야마무로 신이치의 <만주국, 키메라의 초상>인데

국내에는 소명출판에서 2009년에 출간되었다가 절판되어 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소명출판은 절판도서라도 주문을 넣으면 소량제작으로 판매하여 저는 그렇게 구매했습니다.

2주쯤 전에 저 책을 중고로 내다팔았는데 이렇게 다시 복간되니 다시 사라는 시그널인가 싶네요.


표지갈이만 한 거 아니냐 싶지만 출판사 서평을 보니 일부 번역 오류를 바로잡았다고 합니다. (그 책을 산 분한테는 약간 미안해지네요)


만주국을 단순히 일본의 꼭두각시로 보는 것이 아니라 관동군, 마르크스주의 지식인, 만주인 등 여러 집단이 만주국 건설에 참여하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오족협화 등의 이념이 어떻게 작동했고 각 집단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등 만주국의 역사를 입체적이고 역동적으로 보여주는 역작입니다.


구 번역본에서 일부 내용 발췌

"이시하라가 만주국에 부임한 1937년에는 이미 만주국은 건국에 가담한 사람들의 손에서 훨씬 멀어져 능리형 군인, 행정 테크노크라트, 특수회사 경영자라는 철의 삼각추에 의해 운영되는 체제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체제를 상징하는 것이 '2키 3스케'라 불린 호시노 나오키, 도조 히데키, 기시 노부스케, 아유카와 요시스케, 마쓰오카 요스케이다." (242~243)


"제국주의적 지배에 대한 반발과 그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만주국 건국 이념에도 불구하고 만주국 통치의 정당성 근거는 결국 서양 근대가 낳은 법에 의한 지배에서 구해졌고, 그것이 또한 만주국의 문명화이자 근대국가로서의 표징이라고 여겨졌던 것이다. 즉 '문명을 보급시키는 사명(mission civilisatrice)'이 지배의 정당화 근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일본도 또한 자신이 비판한 바로 그 서양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와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244~245)


"일본과 만주국은 마치 마주보고 있는 거울상처럼 일본은 만주국의 상 속으로 만주국은 일본의 상 속으로 각각을 투영시켜 무한의 상을 겹쳐간다.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자기이고 그 모든 것이 타자인 것처럼 진위를 가리기 힘들게 되어 간다. 그렇게 하여 일본도 만주국에서 반사되는 빛에 의해 자신의 상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고 한다면, 만주국이라는 한쪽 거울 면이 파괴되어 사라짐으로써 일본도 또한 본래의 자기 모습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기왕에 더 추천해보는 만주국 관련 도서


프라센지트 두아라, <주권과 순수성>


래너 미터, <The Manchurian Myth>


한석정, <만주 모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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