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지능의 역사 - 유레카부터 인공지능까지, 지성사를 통해 인간을 다시 묻다
이은수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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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인간 지능의 역사』에서 이은수는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묻기 위해 먼저 과거를 돌아본다. 구술과 기억에 의존해 생존하던 인간이 어떤 경로를 거쳐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인터페이스와 마주하게 되었는지 차분히 짚어간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지 혁명을 겪은 인류가 환경에 적응하고, 그 적응을 다시 발전으로 밀어 올린 과정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풀어낸다. 그렇게 쌓아 올린 시선 위에서, 흔들리기만 하는 AI 시대를 사는 현대인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이은수의 『인간 지능의 역사』는 다섯 장, 발견하다·수집하다·읽고 쓰다·소통하다·재정의하다로 이루어진다. 호기심과 욕망에서 출발한 ‘발견하기’는 곧 권력자의 ‘수집하기’로 이어지고, 다시 '왜'와 '어떻게'를 묻는 수집으로 저장성의 한계 끝에서 AI로까지 확장된다. 이런 시대에 인간은 읽고 쓰고 소통하는 행위를 통해 두려움을 덜고 인공지능과 협력하는 법을 익힌다. 마지막 ‘재정의하다’에서는 지능 인터페이스가 바뀔 때마다 인간이 적응해온 것처럼 우리가 이 시대에 적응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AI 시대 인간이 나아가야 할 길을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다시 짚어내는 『인간 지능의 역사』는 기술의 시대 한가운데에서 인문학의 필요성을 또렷하게 드러내는 책이다. 이 책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끝없이 흔들리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도 인간은 결국 단단한 바닥에 다시 발을 붙일 수 있다는 것. 저자는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빠른 박자로 현대인의 불안을 가라앉힌다. 익숙한 인물에서 출발하는 구성은 독자에게 호기심과 몰입을 동시에 준다.



저자는 고대 이집트에서 오늘날까지 지능 인터페이스가 어떻게 바뀌어왔는지, 그 변화를 밀어붙인 환경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 틈바귀를 통과하며 인류가 어떻게 적응해왔는지를 펼쳐 보인다. 결국 그가 말하고 싶은 건 AI 시대에 인간이 취해야 할 태도다. 두려움에 떠밀려 “AI는 나쁘다”라고만 외치기보다 협력하는 방식, 그 협력을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사고와 행동을 짚어낸다. 그래서 먼저, 구술과 기억에만 의존해 생존을 이어가던 인류가 어떤 경로로 AI와 마주하게 되었는지를 따라가보자.


인간은 태생부터 호기심과 욕망을 품은 동물이다. 그런 인류 앞에 문자가 등장한다. 지금의 우리에겐 너무 익숙해서 특별할 것 없는 문자이지만, 당시에는 외부에 기억을 저장한다는 이유로 격렬한 반대가 있었다. 인간의 기억력이 약해질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결국 인류는 이를 넘어섰고, 단순한 상형문자를 지나 알파벳까지 발전한다. 기록이 가능해지자 사람들은 신이 만든 세계를 파헤치기 시작한다. 아르키메데스의 수학, 갈릴레이의 지동설 같은 외부 세계에 대한 새로운 시선은 곧장 대항해 시대의 문을 연다.


그러나 인간이 갈 수 있는 곳, 상상할 수 있는 곳을 거의 다 뒤집어놓고 나자 시선은 더 작은 곳, 내부로 향한다. 여기서 현미경이 등장한다. 지식의 확장은 단순히 바깥의 새로운 것들을 더하는 방식으로만 이어지지 않았다. 이미 존재하던 수많은 책들을 한데 모으고, 그 축적을 토대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도 발전한다. 그 결과 필사 문화와 도서관이 흥하고, 저장 매체는 파피루스에서 양피지, 그리고 코덱스로 이어지며 달라졌다.



수집의 영역은 책을 넘어 세계 곳곳의 기이한 것들까지 포함하게 된다. 독일어로 분더카머라고 불리는 공간, 오늘날 박물관의 조상이라 할 만한 곳이다. 처음엔 귀족의 취미와 권력의 상징이던 이런 수집이 지식의 보편화와 함께 현대 박물관으로 발전한다. 하지만 모든 것을 모으는 데는 공간의 한계가 있었다. 그 한계를 넘어가기 위해 인류가 선택한 것이 바로 인공지능이다. 이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몇 가지 뚜렷한 특징이 드러난다.



그 첫 번째 특징은, 인류는 발견하고 수집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반드시 이를 나누는 행위까지 이어왔다는 점이다. 이는 호기심과 욕망이라는 인간 본능의 결과다. 현대도 다르지 않다. 과학의 한편에서는 영생과 자연법칙에 대한 욕망이 지식의 끝단을 향해 나아가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호기심이 사라진 듯 모든 판단을 인공지능에게 넘겨버리는 아이러니가 벌어진다. 그리고 이런 자발적 포기의 밑바닥에는 ‘AI가 인간을 대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넓게 깔려 있다.



두 번째 특징은, 수많은 지능 인터페이스가 등장하지만 결국 같은 방향으로 흐른다는 점이다. 선형에서 비선형으로. 두루마리 양피지에서 코덱스로, 코덱스에서 인터넷 검색으로, 검색에서 인공지능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일관된다. 단계적이고 수동적인 탐색에서 적극적이고 연결적인 정보 관리로 넘어가는 진화다. 이 변화는 단순한 기술적 발전이 아니라 인간이 정보를 다루는 방식 자체가 확장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단계가 바뀔수록 구조는 복잡해지고, 원하는 지식에 더 빠르게 점핑하는 UI(인터페이스)로 확장된다.



세 번째 특징은, 지식 인터페이스가 바뀌는 순간마다 인류가 언제나 능동적 학습과 능동적 읽기를 고수해왔다는 점이다. 적극적으로 토론하고, 손수 필사하고, 책의 여백에 자신의 생각이나 질문을 적거나 밑줄을 긋는 방식으로 스스로 개입해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인류는 과거의 방식을 단절하지 않고, 현재의 것에 자연스럽게 섞어 혼종 형태로 유지해왔다. 구술 문화가 문자와 AI로 넘어왔어도 여전히 오디오북과 팟캐스트가 부상하는 것이 그 예다.


『인간 지능의 역사』를 되짚은 뒤, 이은수는 AI 시대에 인간이 나아갈 길이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인간 고유의 성향과 AI 고유의 성향을 똑바로 직시하고, 더 적극적으로 마주하라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하는지는 책에서 상세히 설명한다. 중요한 건, 인공지능을 무작정 두려워할 존재로도, 거꾸로 인간을 지배하는 상위 존재로도 상정하지 말라는 점이다. 저자는 말한다. 가장 인간다운 방식을 고수하며, 인류가 만들어온 지능 인터페이스를 적극적으로 사용할 때 오히려 인간은 더 강해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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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서 우리가 놓친 것들 - 예술가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31가지 방식
윌 곰퍼츠 지음, 주은정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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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윌 곰퍼츠의 『미술관에서 우리가 놓친 것들』은 예술가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서른한 가지 방식을 그린 책이다. 일반적인 예술 입문서는 대개 무엇을 표현하려 했는가, 이 작품이 무엇을 말하는가에 머문다. 하지만 이 책은 그보다 더 앞, 예술가의 시각 자체를 질문한다는 점에서 드물다. 저자는 여러 작가와 작품을 통해 특정한 해석을 제시하기보다, 작품이 태어나기 직전의 원초적 순간으로 독자를 데려간다. 그래서 우리는 보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해석 이전의 날것 같은 감각을 느끼게 된다. 이제 그 마법 같은 순간으로 들어가 보자.



예술가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서른한 가지 방식을 그린 윌 곰퍼츠의 『미술관에서 우리가 놓친 것들』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프리다 칼로, 폴 세잔, 렘브란트, 칸딘스키, 페테르 파울 루벤스부터 조금은 낯선 데이비드 호크니, 바스키아, 제임스 터렐까지 등장한다. 각 작가의 대표 작품을 함께 실어, 예술가가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총 서른한 명의 작가를 통해 이 책은 단순한 감상에 머물지 않고, 어떻게 볼 것인가에서 출발해 삶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으로까지 이야기를 확장한다.


『미술관에서 우리가 놓친 것들』에서 윌 곰퍼츠는 예술가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서른한 가지 방식을 보여준다. 이를 위해 각 작가의 성장 환경과 역사적 사건, 개인의 상처까지 폭넓은 배경을 함께 제시하며, 예술가를 작품 너머의 인물이 아니라 작품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존재로 소환한다. 책은 기원전 1500–500년으로 추정되는 메소아메리카 고대 조형물인 소치팔라 조각에서 출발해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을 호출한다. 그래서 이 책은 개별 예술가의 모음이 아니라,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아 온 시선의 연대기로 읽힌다.



저자는 단순히 여러 예술가를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각 인물은 고유한 주제와 함께 배치되며, 작품은 그 자체로 인류의 역사와 인간의 심리를 비추는 하나의 장면이 된다. 이 과정에서 예술은 특정 시대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이 세계를 이해해 온 방식의 기록으로 확장된다. 개별 작품들은 서로 느슨하게 연결되며, 독자는 그 사이를 오가며 시선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체감하게 된다. 『미술관에서 우리가 놓친 것들』이 설명서가 아니라 하나의 흐름으로 읽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저자는 예술가가 그 작품에 이르기까지 겪었던 상황과 선택의 순간을 먼저 꺼내 놓는다. 언제 어떤 환경에 놓여 있었는지, 무엇에 부딪혔고 무엇을 외면했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작품은 결과라기보다 결핍으로 허덕이는 한 인간의 필연으로 드러난다. 이 과정에서 독자는 해석을 강요받기보다 자연스럽게 예술가가 세계에 동참하게 된다. 작품 너머의 작가의 삶을 통해 그들의 시각을 처음 마주하면서, 머리로서의 이해가 아닌 감각에 가까운 인식으로 작품을 받아들이게 된다.


곰퍼츠가 보여주는 인물들은 모두 특정한 시대와 조건 속에 놓인 개인들이다. 그는 각 장에서 유명한 천재로서의 예술가가 아니라, 고립된 환경과 반복된 경험 속에서 선택을 강요받았던 한 인간의 모습을 먼저 드러낸다. 이러한 서술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는 예술가를 위대한 천재의 자리에서 내려놓고, 그 삶을 자연스럽게 자신의 경험과 겹쳐 보게 된다. 저자가 묘사하는 예술가의 시각은 고립된 영감의 산물이 아니라, 환경과 경험이 축적된 결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작품 속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인물은 프리다 칼로와 구사마 야요이다. 프리다 칼로는 의사를 꿈꾸던 소녀였으나, 교통사고로 인해 그 꿈을 강제로 포기하게 된다. 이후 그녀는 평생 신체적 고통과 함께 살아가야 했고, 그 고통은 작품 전반에 깊게 스며든다. 구사마 야요이 역시 어린 시절의 심리적 트라우마로 인해 시간의 무한함과 공간의 절대성에 사로잡힌 인물이다. 두 사람은 벗어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식으로 예술을 선택했다. 그래서 그들의 작품은 이해에 앞서 낯설고 기괴한 감각으로 먼저 다가온다.



그녀들의 공통점은 벗어날 수 없는 고통이 예술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데 있다. 두 사람 모두 신체적·심리적 결핍 속에서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으로 예술을 선택했고, 작품은 그 고통에 화장을 하기보다 처절할 정도로 날것을 드러낸다. 그러나 시선의 방향은 다르다. 프리다 칼로가 자신의 몸과 상처를 집요하게 응시하며 고통을 개인의 역사로 끌어안는다면, 구사마 야요이는 반복과 확장을 통해 그 고통을 공간 속으로 흩어버린다. 같은 고통에서 출발했지만 전혀 다른 시각으로 세계를 살아냈다는 점에서 이들은 특히 인상 깊다.


한 인물만 더 소개하자면 빛을 본 제임스 터렐이다. 저자는 그를 설명하기 위해 플라톤의 『국가』에 등장하는 동굴 이론을 꺼내든다. 외부의 빛을 본 죄수가 동굴 속으로 돌아와 친구들에게 자신이 깨달은 바를 말하지만, 친구들은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그를 죽일 음모를 꾸민다. 터렐의 작업은 바로 그 죄수가 다시 동굴로 돌아온 이후의 세계를 닮아 있다. 그의 작품은 무엇을 새롭게 보여주기보다, 우리가 이미 보고 있다고 믿어온 방식 자체를 흔든다.


그의 대표작인 스카이 스페이스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장 직접적으로 체험하게 만드는 작업이다. 천장에 난 사각의 틈을 통해 하늘을 바라보게 하는 이 공간에서 관객은 창문을 보고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열려 있지 않다. 하늘은 평면처럼 내려앉고, 빛은 시간에 따라 색과 깊이를 바꾸며 공간 전체를 지각의 대상으로 만든다. 터렐은 이 단순한 구조를 통해 우리가 현실이라 믿어온 감각이 얼마나 쉽게 흔들리고 편향될 수 있는지를 드러낸다.



예술가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서른한 가지 방식으로 『미술관에서 우리가 놓친 것들』을 풀어낸 윌 곰퍼츠는 우리가 전혀 모르는 새로운 세계를 무작정 들이밀지 않는다. 대신 아주 익숙한 것에서 출발해, 약간의 정보와 조금 비틀린 예술가의 시각에 접근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이는 단순히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태도에 머물지 않고, 미술을 넘어 다양한 창작 활동으로 확장될 수 있는 틈을 만들어낸다. 또한 점점 더 단조로운 시각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자신의 삶을 다른 경로로 바라보고 그 안에 풍성함을 더하는 가능성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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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임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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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욘 포세의 신간 『바임』은 수채 물감으로 그린 유화 그림 같다. 그의 기존 문학이 수채화 특유의 맑고 투명한 층위를 겹쳐놓은 이미지였다면, 이번 작품은 불투명한 미래를 유화처럼 두껍고 거칠게 덧칠한 느낌이 강하다. 그래서 선명함 대신 흐릿함으로 삶의 무게를 보여준다. 현실보다 초현실에 가까운 이야기지만 책을 덮고 눈을 감으면 그 모호함이 오히려 우리 삶과 더 닮아 있어 오래 남는다. 포세가 새롭게 쌓아 올린 이 낯선 질감 속으로 잠깐 빠져보자.



총 세 파트로 나누어진 욘 포세의 『바임』 줄거리는 단추 하나를 달기 위해 길을 나선 야트게이르가 오래전 사랑했던 여인을 예기치 않게 다시 마주치며 시작된다. 그녀는 이유를 말하지 않은 채 그의 삶에 다시 들어오고, 야트게이르는 그 흐릿한 인연을 받아들인다. 이어지는 두 번째와 세 번째 파트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나란히 이어지며 야트게이르·엘리네·프랑크 세 인물의 이름과 관계가 교차한다. 이야기는 바다와 항구를 오가며 세 사람의 인연이 어디에 닿는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수채 물감으로 그린 유화 그림 같은 느낌이 강한 욘 포세의 『바임』은 ‘바임 3부작’ 중 첫 번째 이야기다. 『샤이닝』 이전의 작품들이 투명하게 번지는 수채화 같았다면, 죽음을 강하게 다루기 시작한 그 지점부터 포세의 문장은 불투명해졌고 이 소설에서 그 효과가 가장 짙게 드러난다. 문장의 불투명함이 깊어지면서 그가 오래 다루어온 침묵과 여백도 함께 농도가 짙어졌다. 서사보다는 감각을 따라 읽어야 하는 작품인 만큼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은유들을 살펴보고, 그가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천천히 들여다보고자 한다.



가장 먼저 첫 에피소드의 단추, 바늘, 실이다. 언뜻 보면 어리숙한 주인공을 드러내려는 장치처럼 보이지만, 초반 분량과 세 인물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 부분이 이후 이야기를 암시하는 은유였음을 금방 알 수 있다. 오히려 포세가 독자에게 남겨둔 거의 유일한 힌트라고 해도 된다. 단추는 제자리를 잃은 야트게이르를, 바늘은 야트게이르와 프랑크 두 세계를 오가며 관통하는 엘리네를, 실은 남아서 모든 것을 묶어내는 프랑크를 떠올리게 한다. 사실상 이 소설은 이 삼분 구조가 전체 서사를 움직이는 키라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두드러지는 점은 각 파트마다 문을 두드리는 존재가 등장한다. 파트 1에서는 엘리네가 야트게이르의 삶을 다시 두드리고, 파트 2에서는 죽은 야트게이르가 친구 엘리아스의 집 문을 두드리며, 파트 3에서는 엘리네가 프랑크를 향해 문을 두드린다. 이 작품에서 문은 삶과 죽음, 바다와 육지, 떠나는 자와 남는 자의 경계를 상징한다. 그리고 문을 두드리는 존재는 그 경계를 넘어오거나, 넘어가거나, 다시 돌아오려는 자들이다. 결국 문 두드림은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건너오려는 징표이며, 경계가 흔들릴 때마다 나타난다.


세 번째로 바임에서 가장 이상하게 흔들리는 건 인물의 이름이다. 세 주인공 모두 하나의 고정된 이름을 갖지 못하고, 여러 개의 이름으로 불린다. 심지어 작중에서 본명은 누구도 부르지 않으며, 실제 이름이 오히려 자신과 가장 멀리 떨어진 이름으로 등장한다. 이는 이름의 고정성이 아니라 역할과 관계에 따라 이름이 바뀐다는 뜻이다. 즉,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 아니라 삶에서 만난 타자가 불러주는 이름이 실제 이름이 되는 세계다. 작중에서는 이름이 누구와 연결되느냐, 어떤 자리에 놓이느냐에 따라 끊임없이 달라진다.


이는 삶이 고정된 정체성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재배치되고 흔들린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진짜 이름은 거의 힘을 갖지 못하고, 대신 타인이 붙여주는 이름, 상황 속에서 즉석에서 만들어지는 이름이 더 강력하게 작동한다. 현대인이 역할에 따라 불리는 명칭이 달라지는 것과 비슷하다. 결국 바임의 이름들은 인물의 내면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누구에게 다가가고 누구로부터 떠나며 어떤 세계에 발을 들이는지를 나타내는 표식에 가깝다. 이름은 정체성이 아니라 관계의 등불이기 때문이다.


네 번째로 배경으로 등장하는 바닷가 마을이다. 이는 단순한 이미지적 상징이 아니라, 경계의 상태를 드러내기 위한 포세만의 장치다. 삶과 죽음, 육지와 바다, 붙잡힘과 떠남이 맞닿는 이 접점은 인물들의 흔들리는 존재감을 가장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바다는 이들이 표류하듯 살아가는 상태와 겹치고, 항구는 삶과 죽음 사이에서 잠시 발을 디딜 수 있는 유일한 공간처럼 반복해 등장한다. 포세에게 해안은 단지 풍경이 아니라, 인물들이 흔들리고 머물렀다가 다시 흘러가도록 허용하는 세계의 구조 그 자체이다.



이 지점까지 오면 바임이 왜 그렇게 흐릿한 결을 품는지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다. 흥미로운 건, 삶의 모든 과정은 안개처럼 번지는데 유독 죽음만은 또렷하다는 점이다. 무덤의 묘비에는 살아 있는 동안 여러 이름으로 흔들리던 인물들의 본명이 남고, 세상 누구도 알지 못했던 진짜 이름이 죽음 이후에야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다. 초현실에 가까울 정도로 모호한 이야기가 이어지지만, 정박한 자기 배 옆에서 죽음을 맞는 야트게이르의 장면만큼은 이상하리만치 선명하다. 마치 삶은 흐려지고 죽음만은 형태를 갖는 세계처럼.


죽음이 이토록 선명한 이유는, 이 작품의 시간 역시 흐릿하기 때문이다. 『바임』의 인물들은 과거와 현재의 경계에서 떠다니고, 인연은 맺어지는 순간보다 흐르는 과정이 더 길다. 만나고 떠나고 다시 돌아오지만 그 어떤 장면도 명확히 고정되지 않는다. 오직 죽음만이 흐름을 멈추고 형태를 만든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관계는 하나의 결말로 귀결되지 않고 오래 번지는 잔향처럼 남고, 인물들은 이름처럼 존재도 안정되지 못한 채 흔들린다. 그 흔들림의 끝에서 비로소 죽음이라는 단단한 지점을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욘 포세의 『바임』은 선명하게 설명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흐릿한 결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죽음의 형태만 또렷하게 드러나는 소설이다. 수채 물감으로 그린 유화처럼 번지고 덧칠된 문장 속에서 인물들은 이름도 삶도 쉽게 붙들지 못한 채 흔들린다. 그럼에도 이야기는 오래 남는다. 이해하는 순간보다 이해하지 못한 채 떠나보낸 장면들이 더 오래 손에 걸리고, 포세가 그린 세계는 마지막까지 설명되지 않은 채 묵묵히 남아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읽는 동안보다 다 읽고 난 뒤에 더 깊게 밀려오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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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 생존 - 지구상 가장 혹독한 환경에서 피어난 생명의 경이로움
알렉스 라일리 지음, 엄성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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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알렉스 라일리의 『극한 생존』은 지구상 가장 혹독한 환경에서 피어난 생명의 경이로움에 현미경을 들이댄 작품이다. 물·산소·빛이 전무한 환경, 생명체가 견디기 어려운 고압과 고온, 그리고 치명적인 방사능 속에서도 버티며 살아가는 존재들까지 다양한 동식물이 예로 제시된다. 라일리는 단순히 이런 기이한 생물들이 지구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이 아니다. 이제 각 사례가 드러내는 층위와, 그 뒤에 숨은 그의 메시지를 살펴보자.


생명의 경이로움을 글자로 옮긴 알렉스 라일리의 『극한 생존』은 총 3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에서는 물이나 산소, 먹이가 거의 없는 환경에서도 살아남는 생명체들과 그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다룬다. 2부는 극저온, 극고압, 극저압, 극고온 같은 물리적 한계를 버티는 동물들의 세계로 이어지고, 마지막 3부에서는 빛이 완전히 차단된 공간이나 강한 방사선 환경, 체르노빌 같은 오염 지역에서 살아가는 생물들을 소개한다. 이 기묘한 존재들은, 생명이란 말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다시 묻게 된다.


알렉스 라일리의 『극한 생존』은 매 페이지마다 신비한 생명체를 불러내 독자의 시선을 붙잡아 둔다. 이 책은 단순한 소개를 넘어서, 그 존재들을 발견하고 연구하는 과정과 그들이 어떤 진화를 거쳐 지금에 이르렀는지까지 차근히 짚는다. 그 생존 메커니즘은 인간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줄 가능성까지 품고 있고, 생김새와 습성은 흔히 떠올리는 ‘외계인 도감’과 닮아 있어 읽는 재미를 더한다. 초등학생부터 성인까지 가볍게 빠져들 수 있는 이 흥미로운 여정 속으로 천천히 들어가 보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존재는 물 없이 살아가는 물곰, 그러니까 완보동물이다. 이름은 낯설지만 지구 어디에나 있고, 심지어 우리가 사는 베란다에도 조용히 붙어 있다. 너무 작고 사람에게 해가 없어서 우리가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다. 이 생물은 물이 없어도, 먹이가 없어도 버틴다. 방사선에 노출되어도 멀쩡히 돌아온다. 그래서 현미경으로만 보이는 이 작은 동물이 지구상에서 가장 강인한 생명체로 인정받았고, 실제로 우주까지 다녀온 고대 무척추동물이 되었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 우주여행.


이들은 물기만 있으면 어디에서든 살아가지만, 극한의 열과 추위(남극), 강한 방사선, 높은 압력(해저)에서도 좀처럼 무너지지 않는다. 물이 사라지면 휴면에 들어가 체내 수분의 98퍼센트까지 밀어내고 단단한 껍질 같은 툰 상태로 변한다. 이렇게 몇 달, 몇 년을 버티다가 물 한 방울만 주어지면 다시 살아난다. 이 과정은 잠에서 깨는 것보다 ‘부활’에 가까워서, 18세기 이후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둘러싼 논쟁의 한가운데에 이 작은 동물이 천천히 고개를 내밀게 되었다.



이렇게 물이 없어도 버티는 존재가 완보동물만은 아니다. 남서아프리카 나미브사막의 웰위치아 미라빌리스, 그 사막에 사는 일부 딱정벌레, 가시도마뱀 역시 비슷한 능력을 지녔다. 특히 딱정벌레와 가시도마뱀은 안개를 모아 몸으로 물을 끌어들이는데, 이는 인간이 안개를 모으기 훨씬 전부터 이어져 온 생존 기술이다. 미국 남서부의 메리엄캥거루쥐나 킬리피시도 장시간 물 없이 살아남는다. 이들의 존재 자체도 기이하지만, 그 몸이 작동하는 방식은 더더욱 신비로워 독자를 책 속으로 고스란히 끌어당긴다.



2장으로 넘어오면 더 기묘한 생명들이 등장한다. 바로 산소 없이도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멋쟁이거북, 코끼리물범, 피놀로리쿠스 친치아이, 유공충, 붕어 종의 일부, 벌거숭이두더지쥐까지 생각보다 긴 목록이 나온다. 이들을 연구한 과학자들은 흥미로운 사실에 주목했다. 몇몇 종은 암에 대한 강한 내성을 지니고, 어떤 종은 손상된 신경 세포를 다시 자라나게 한다. 이들의 메커니즘을 정확히 밝힌다면, 인간의 생명을 위협해온 여러 질병과 맞서는 새로운 치료법이 나올지도 모른다.



책에 등장하는 생명체들은 일상에서 쉽게 볼 수는 없지만, 한 번쯤은 접한 적이 있다. 바로 우리가 상상 속에서 그려온 외계인이다. 형태를 가늠하기 어려워 상상으로만 만들어낸 기묘한 신체들. 그러나 리사 칼테네커의 『에일리언 어스』에 따르면, 실제 외계 생명이 존재한다면 우리가 떠올리는 거대한 몸집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미세하고 조용한 존재일 가능성이 높다. 『극한 생존』에 등장하는 동물들과 닮아 있는 것이다. 저자가 이 연상을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책을 읽는 내내 상상의 영역이 겹쳐지며 꽤 흥미로운 지점이 된다. 



『극한 생존』은 등장하는 동식물이 워낙 다양해, 이들의 종류와 특성만 따라가도 지식에 대한 갈증이 충분히 채워진다. 그러나 저자가 이 책을 쓴 목적은 단순한 소개에 머물지 않는다. 그가 진짜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다. 지구가 생겨난 뒤, 남세포 같은 미생물들이 산소를 만들어내며 수많은 생명체가 모습을 갖추었고, 그들이 이미 다섯 번의 대멸종을 견뎌냈다는 사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기온 상승이 계속되는 가운데, 결국 찾아올 여섯 번째 대멸종의 문턱에 서 있다. 



매번 대멸종 때마다 95퍼센트 이상의 종이 사라졌지만, 그 틈에서 살아남은 일부는 다시 진화했고, 새로운 생명들이 모습을 틔우며 오늘의 생태계가 만들어졌다. 저자는 이 과정이 앞으로도 반복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순간 인간은 당연히 사라질 것이다. 앞에서 보아온 생명체들과 달리 인간에게는 극한의 환경을 견딜 방어막이 거의 없다. 산소가 끊기고, 물과 먹이가 사라지고, 우주에 흐르는 방사선이 지표 위로 내려앉기 시작하면 인간은 그저 우아하게 멸종을 향해 걸어갈 뿐이다.


알렉스 라일리의 『극한 생존』은 이처럼 상상을 넘어서는 생명체들의 목록을 늘어놓으며 묻는다. 생명은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가, 그리고 인간은 그 경계 바깥에 선 예외는 아닌가. 이 기이하고도 아름다운 존재들은 우리가 얼마나 취약한 몸으로 살아가는지를 드러내는 동시에, 생명의 경이로움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결국 이 책은, 지구에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기적에 가까운지, 그리고 그 기적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조용히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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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슨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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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문학동네 해문 클럽 2기 두 번째 책은 이언 매큐언의 소설 『레슨』이다. 피아노 레슨이 만들어낸 인생의 파편들을 따라가는 이야기다. 그의 반자전적 소설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삶을 그대로 옮겨 적은 책은 아니다. 오히려 표면적인 서사는 그가 선택하지 못한 삶을 상상하며 쓴 소설에 가깝다. 다만 그 삶을 이끌어가는 연대기적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만큼은 몹시 자전적이다. 어린 시절 피아노 선생님께 당한 성추행과 성폭행으로 인해 인생 전체가 비틀린 한 남자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건네는지 차근차근 짚어보려 한다.



이언 매큐언의 『레슨』 줄거리는 주인공 롤런드가 어린 시절 피아노 레슨에서 여교사에게 성추행을 당한 기억을 떠올리며 열린다. 서른일곱 살, 결혼한 그는 어느 날 아내가 메모 한 장만 남기고 사라져 홀로 아이를 돌보는 편부가 된다. 아내의 실종은 경찰 수사로 번지고, 그는 느닷없이 살인 용의자로까지 몰린다. 그 뒤로 이야기는 전쟁과 문학, 사랑과 실패, 부모 됨과 시대의 격랑 속에서 롤런드가 어떻게 살아남아가는지를 따라가며 그의 인생 파편들을 한 겹씩 드러낸다.


이언 매큐언의 『레슨』에는 몇 가지 함정이 숨어 있다. 이건 빈틈이 아니라, 대작가만이 쓸 수 있는 정교한 트릭에 가깝다. 먼저 원제 Lessons는 복수형이다. 이를 단순히 ‘삶이 주는 교훈들’로 읽어버리면 반자전적 서사의 깊이가 납작해진다. 매큐언은 첫 장면부터 피아노 레슨에서 롤런드가 선생님에게 성추행을 당하는 순간을 심어두고, 그 뒤 그의 모든 선택과 삶의 파편들이 그 장면에서 번져 나오게 한다. 일도, 사랑도, 어떤 방향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도. 결국 제목이 가리키는 것은 피아노 레슨이 만들어낸 인생의 파편들 그 자체이다.



두 번째로, 이 작품은 롤런드 한 사람의 서사로만 읽으면 이야기가 지나치게 좁아진다. 그의 생애를 따라가다 보면 세계사적 사건들이 쉼 없이 등장하고, 인물과 배경도 끝없이 확장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개인의 삶에 시대의 사건들이 계속 스며드는 구성은 의도된 것이다. 저자가 부커 상까지 받은 대작가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소설의 중심축은 사실 다른 곳에 있다. 이언 매큐언이 세계대전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받아들였는지, 그 연대기적 시선을 롤런드라는 인물의 입을 빌려 펼쳐내는 소설이다.


저자는 롤런드의 삶을 따라가면서 체르노빌 사고, 베를린 장벽 붕괴, 사담 후세인 체포, 브렉시트, 코비드 19까지 현대사의 굵직한 장면들을 촘촘히 배치한다. 그러나 이 사건들은 배경이 아니라, 롤런드라는 한 개인의 감정과 선택, 실패와 망설임을 비추는 조명처럼 작동한다. 거대한 시대의 파고가 한 인간의 리듬에 어떻게 흔적을 남기는지, 그리고 그 흔적이 다시 시대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어떻게 바꾸는지. 결국 『레슨』은 롤런드라는 인물을 빌려 세계사의 흐름을 통과한 한 사람의 내면 연대기를 써 내려간 작품에 가깝다.


매큐언은 『레슨』을 두고 스스로 반자전적이라 말했지만, 그 말은 흔히 떠올리는 내 삶의 절반을 옮겨 적었다는 뜻은 아니다. 물론 그의 성장기에 실제로 존재했던 군인 아버지, 전쟁 직후의 영국, 냉전기의 공기 같은 요소들은 작품에 자연스레 스며 있다. 이런 배경만 보면 전형적인 자전적 소설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작품의 핵심은 그 표면적 사실에 있지 않다. 매큐언이 시대를 받아들이고 두려움을 견디고 세계를 이해하려 했던 내적 감각, 그 오래된 시선이 롤런드라는 인물 안에서 다시 자라난다는 데 더 가깝다.


그래서 『레슨』의 반자전성은 사실의 공유가 아니라 시선의 공유이다. 체르노빌 사고, 핵 위협, 베를린 장벽 붕괴, 브렉시트, 코비스 19 같은 거대한 사건들이 롤런드 앞에 놓이는 방식은, 매큐언이 실제로 그 시대를 살아오며 쌓아온 감정의 지층에서 나온다. 그의 삶이 그대로 복제된 것은 아니지만, 세계를 바라보는 그의 시각이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결국 이 작품은 현실의 작가와 허구의 인물이 서로의 그림자를 나누는 소설이다. 그래서 더 깊고, 그래서 더 정확한 의미에서 반자전적이다.



세 번째는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다. 롤런드의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그는 인생의 여러 챕터에서 계속 실패를 반복한다. 그 밑바탕에는 어린 시절 당한 성폭행이 놓여 있다. 언뜻 보면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한 남자의 삶을 어떻게 뒤흔드는지 보여주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 작가 자신을 겹치면 스케일이 달라진다. 인간은 누구나 삶에서 올바른 선택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선택도 반복한다. 잘났든 모자라든, 결국 각자의 그릇만큼 잘못된 선택을 할 뿐이다.


롤런드 또한 자신의 트라우마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하고 평생 상식에서 벗어난 선택들로 흔들린다. 하지만 결말에서 그는 이 트라우마의 본질을 마주한다. 지워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경험으로서 자기 안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이것이 이 작품의 메시지다. 단순히 어떤 사건이 남긴 교훈이 아니다. 손녀와의 대화에서 ‘좋은 이야기를 억지로 교훈으로 만들려 한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장면도 이를 드러낸다. 흔들린 삶을 성급히 해석하고 교훈으로 압축하기보다, 그 흔들림을 통과한 뒤에야 비로소 남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위의 세 가지 시선으로 작품을 들여다보면 이 소설의 구조가 폭발이 아니라 퇴적임을 알게 된다. 롤런드는 늘 흔들리고, 시대는 그의 인생을 계속 훑고 지나가며, 삶의 잔걱정들은 끝도 없이 쌓인다. 독자는 이 과정을 통해 한 가지를 깨닫는다. 개인은 누구나 세계의 흔들림 앞에서 완벽히 버티지 못한다는 것. 결국 지워지지 않는 과거의 파편과 시대의 진동 속에서 흔들리는 일은 롤런드만의 비극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자연스러운 모습임을 이 작품은 말해준다.



피아노 레슨이 만들어낸 인생의 파편들이 축적된 이언 매큐언의 『레슨』은 특별한 누군가의 일대기가 아니다.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향한 이야기다. 누구나 제 몫의 아픔이 있고, 저마다의 골칫거리를 안고 있다. 극단적 선택이 늘어나는 지금의 시대에 롤런드는 조용히 말한다. 괜찮다고. 끝까지 흔들리며 걷다 보면, 그 과정에 쌓인 것들이 어느 순간 모습을 드러낸다고. 그것은 결코 작은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 뒤지는 삶의 결과도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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