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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파리를 불태운다
브루노 야시엔스키 지음, 정보라 옮김 / 김영사 / 2025년 5월
평점 :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브루노 야시엔스키의 나는 파리를 불태운다는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 혁명이 가능하던 시절의 뜨거운 상상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저자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의도하지 않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에 이 방식으로 외쳤다. 흑사병이 퍼진 파리, 붕괴되는 자본주의, 자치국을 세우는 이민자들과 무너지는 질서. 인간판 동물농장이라 불릴 만하다. 유토피아는 끝내 도달할 수 있을까? 파리의 몰락에서 다시 피어오르는 가능성이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놀랍도록 현재적이다.
경기 침체로 해고된 공장 노동자 피에르는 여자친구 자네트에게조차 실직 사실을 숨긴 채 거리로 내몰린다. 결국 자네트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장면을 목격한 그는 분노에 휩싸여 폭행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풀려나고, 노숙자로 전락해 굶주림에 시달리게 된다. 쓰레기통을 뒤지던 어느 날, 고향 친구 르네를 우연히 만나 그의 도움으로 시립 정수장 수압관리탑에서 일하게 된다. 르네는 세균 연구소에서 일하며 흑사병 균을 비롯한 치명적 병원체들을 돌보고 있었다.
르네는 흑사병 세균이 든 시험관을 보여주며 한 말에 피에르는 자극받아 결국 시험관을 훔쳐 정수장에 투입한다. 프랑스 혁명 기념일, 파리는 봉쇄되고 죽음이 도시를 휩쓴다. 이후 도시 곳곳에서는 각 민족과 이념 세력이 자치국을 선언하고, 지배 계급을 전복하려는 혁명이 시작된다. 판창퀘이는 황인종 공화국을, 유대인은 자치령을, 백계 러시아인은 제국의 재건을 꿈꾸며 파리를 세계 축소판으로 만든다. 혼란과 전복 속에서 유토피아는 폐허 위에 싹튼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은 문자 그대로 무너졌다. 전쟁으로 인프라가 파괴되었고, 경제는 회복되지 못했으며, 노동자들은 길거리로 쫓겨났다. 프랑스도 상황은 비슷했다. 공장은 일주일 중 이틀만 가동되었고, 일자리에서 쫓겨난 이들은 하루아침에 빈민이 되었다. 인간은 더 이상 존엄한 존재가 아니었다. 기계는 인간을 대체했고, 계급은 고정되었으며, 인종과 출신은 배제의 기준이 되었다. 구조조정은 한 사람의 삶이 아니라 체제를 위한 기술처럼 작동했다. 사람들은 숫자가 되었고, 일상은 생존을 위한 투쟁이 되었다.
그 혼란 속에서 정치적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었다. 러시아 10월 혁명 이후 유럽 각국은 공산주의 확산을 두려워했고, 프랑스 역시 우익과 좌익의 충돌이 거세졌다. 파업과 실업이 일상화되었고, 극우 정당은 대중의 분노를 자극하며 세를 넓혔다. 빈곤은 범죄와 연결되었고, 이념의 차이는 적대와 혐오의 언어로 바뀌었다. 이 불안정한 시기에 쓰인 『나는 파리를 불태운다』는 단지 허구가 아니다. 그것은 당대 현실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며, 문학이 가장 어두운 현실을 상상으로 직시하는 방식이었다. 불가능한 시대에 가능한 상상만이 남았다.
브루노 야시엔스키의 나는 파리를 불태운다 속 피에르는 그 모든 붕괴의 끝에 서 있었다. 일자리를 잃고, 월세를 내지 못해 집에서 쫓겨나고, 연인에게조차 버림받은 그는 더 이상 살아 있는 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배고픔에 쓰레기통을 뒤졌고, 벤치에서 노숙하다 우연히 친구 르네를 만난다. 그를 통해 정수장이라는 임시 일자리를 얻지만, 거기서 본 것은 인간보다 더 냉정한 실험실이었다. 흑사병을 담은 시험관을 본 순간, 피에르는 파괴라는 방식으로 세계에 말을 걸기로 한다. 아무도 듣지 않으니, 그는 도시 전체에 병을 뿌린다.
저자는 전염병을 병리학이 아니라 언어로 본다. 피에르가 흑사병을 뿌리는 장면은 단순한 복수극이 아니라, 세계에 남긴 하나의 메시지다. 제도는 그를 구제하지 않았고, 사회는 그를 잊었으며, 제시된 해답은 없었다. 그는 복수하지 않는다. 그는 증명하고 싶었다. 존재하고 있음을, 버려졌음을, 남겨졌음을 말이다. 전염병은 그가 던진 유일한 언어였고, 병든 도시만이 그 말을 들었다. 저자는 이 파괴를 미화하지 않지만 사회가 누군가를 얼마나 철저히 침묵시키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 결과, 파리는 응답한다. 죽음으로.
피에르의 죽음 이후 도시에는 기이한 변화가 일어난다. 각 인종과 계급, 이념이 모여 자치 정부를 선언하며 도시를 분할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인은 황인종 공화국을, 유대인은 자치령을, 앵글로색슨은 연합국을 세운다. 모두가 평등과 자치를 말하지만 결과는 새로 칠한 권력일 뿐이었다. 유토피아는 오지 않았고 단지 새로운 지배 구조가 탄생했다. 이 소설은 유토피아를 꿈꿨지만 도달한 것은 인간판 동물농장이었다. 각 세력은 이전의 억압을 답습하고 해방을 외치며 타인을 배제한다. 권력은 얼굴만 바꿔 반복되었다.
지금 우리는 바이러스가 아니라 알고리즘과 인공지능이 삶을 통제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플랫폼 노동자, 해고자, 디지털 문해력에서 밀려난 이들은 더 이상 시장의 주체가 아니라 배제된 잉여로 취급된다. 기술은 편리함을 가져왔지만 그 편리함은 배제된 자들의 생명 위에 세워진 것이다. 피에르가 흑사병을 퍼뜨린 이유는 단지 분노가 아니다. 지금의 우리는 다시 누군가의 절규를 외면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 이 순간에도 데이터 바깥, 체제 바깥에서 "나는 파리를 불태운다"라고 속삭이는 이들이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또 듣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유토피아를 말하지만, 그 안에는 언제나 배제된 타인이 존재해왔다. 평등을 외치면서도 구조 속에서 새로운 불평등을 복제하고, 해방을 주장하면서도 또 다른 억압을 정당화한다. 이 작품은 이러한 유토피아의 역설을 드러낸다. 유토피아는 실현 가능한 꿈이 아니라 실패할 수밖에 없는 구조의 또 다른 이름이다. 진짜 유토피아가 가능하려면 먼저 인간의 욕망부터 바꾸어야 한다. 이 소설은 우리에게 묻는다. 지금 우리가 만들려는 세상은 진짜 유토피아인가, 아니면 더 정교한 동물농장인가?
인간판 동물농장을 그린 브루노 야시엔스키의 나는 파리를 불태운다는 도시가 무너진 뒤에야 드러나는 진짜 얼굴들을 보여준다. 각자 평등과 해방을 말하지만 그 안에서 또 다른 질서와 배제가 생긴다. 이상을 말하면서 누군가는 밀려난다. 이 작품은 혁명이 어떻게 반복되는지, 구조가 어떻게 사람을 바꾸는지를 말한다. 또한 이 소설은 단순한 재난 소설이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체제도 인간의 욕망과 맞닿을 때 유토피아는 어려운 과제임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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