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있는 요일 (양장) 소설Y
박소영 지음 / 창비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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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정원이라는 노래를 아시나요? 에니메이션 한국판 <이누아샤>OST입니다. <네가 있는 요일>(이하 <요일>)의 띠지 문구를 보는 순간, 공중정원이 떠올랐습니다. “몸을 빼앗기고 기억을 잃어도 너를 다시 알아볼 수 있을까?” 이 문구를 보고 공중정원의 가사 중목소리 듣지 않아도, 지금 보이지 않아도 또 다른 세상의 끝쯤에서 타인의 모습이라도 널 찾아 낼 거야라는 부분이 떠올랐습니다. 소중한 를 찾아가는 여정을 같이 걷고 싶었습니다. 거기에 재미있게 읽었던 <스노볼>의 작가, 박소영의 작품이라는 점도 <요일>을 읽게 만들었습니다.

 

<요일>의 세계관에서 사람의 신체와 영혼은 분리됩니다. 하나의 신체를 다수의 영혼이 요일을 바꾸어가며 살아갑니다. 요일마다 영혼이 바뀝니다. 타이밍은 다음 요일로 넘어가기 전의 영혼이 정합니다. 어떤 영혼과 지내느냐에 따라 자신의 하루 시작이 좌지우지되는 셈이지요. 수인 울림을 한 번 지켜볼까요? 화인 지나가 늘 제정신이 아닌 상태 혹은 곤란한 상황에서 영혼을 바꿉니다. 지나는 늘 울림을 괴롭힐 새로운 수단을 찾아내기 때문에 울림의 아침은 늘 새롭습니다.

 

이 시스템을 우리에게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일상을 반복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정말로 그럴까요? 하루 동안 무수히 많은 선택을 합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 습관처럼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고민하며고릅니다. 그 결과를 당장 알 수도 있습니다. 혹은 몇 시간, 며칠, 몇 달 시간을 두고 드러나기도 합니다. , 선택의 결과가 적용된 또는 선택의 결과를 적용해야 할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는 셈입니다. 이렇게 시작되는 하루를 어제와 똑같은 하루로 치부한다면 오늘 하루를 시작할 내가 꽤 섭섭해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고 제가 하루하루를 늘 새롭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일정표를 보면 늘 같은 일이 적혀 있어서 반복된다고 생각할 때가 더 많습니다. 튀고 싶다고 여길 때도 많고요. 다만,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무언가를 선택할 때, 우선순위가 달라지는 걸 보면, ‘어제와 다른 내가 오늘을 처음살아가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일상이 새롭게 보이는 이유입니다.

 

여러분의 일상에 늘 처음이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P.S. 작가님, 뇌 과학 분야라면 환장하는 그 연구소 이야기가 궁급합니다. 스핀오프로라도 어딘가에 발표해 주시면 진짜 고마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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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들리는 편의점 2 바다가 들리는 편의점 2
마치다 소노코 지음, 황국영 옮김 / 모모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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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1권을 읽었기 때문에 2권도 구매해서 읽었습니다. 편의점에 들르는 다양한 사람들의 일상이 따듯하게 풀리는 과정이 인상 깊었던 작품이었습니다. <바다가 들리는 서점 2>(이하 <바다>)에는 어떤 사연이 담겨 있을지 궁금해 하며 읽었습니다. 역시 모든 챕터가 따듯한 분위기를 전달합니다. 그중에서 제일 인상 깊었던 챕터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미쓰에는 아들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버리고 아들 가족과 같이 지냅니다. 나이가 든 만큼 타지에 적응하기는 힘들지요. 그랬던 미쓰에의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챈 사람이 아들도 며느리도 손녀도 아닌 편의점을 운영하는 시바입니다. 그래서 시바가 있는 편의점에 가는 겁니다. 시바의 잘생긴 모습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바와 대화를 나누려고 방문하는 겁니다. 가족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자신의 사소한 변화를 시바는 알아주고 꼭 말로 표현해 줍니다. 긍정적 마음을 들게 해 주는 그 찰나를 많이 좋아합니다. 같은 이유로 편의점을 들르는 동년배도 만날 수 있게 됐으니, 이 동네에 적응하게 해 준 고마운 존재이기도 하고요. 그런 사람을 어떻게 안 좋아할 수가 있을까요? 싫어하는 방법이 궁금하네요.

 

이즘 되면 독자도 대체 시바가 어떤 인물인데?? 이런 호기심이 생기겠지요. 저도 그렇고요. 시리즈 2권까지 읽고 나니 시바 점장님에 대한 호기심이 생깁니다. 점장이 직접 행동하거나 말하는 장면이 최소한으로 표현됩니다. 다른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통해서 점장은 이런 사람이겠거니 추측할 따름입니다. <바다>의 마지막은 다음 시리즈를 예고하는 형식으로 끝났습니다. 3권이 출간될 확률이 높습니다. 3권에서는 시바를 더 깊이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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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물질적인 밤 - 이장욱 산문집 문지 에크리
이장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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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와 어두워진 빛들에게>의 감상문에 표지만 보고 2권을 구입했다고 적었지요. 또 다른 1권이 바로 <영혼의 물질적인 밤>(이하 <영혼>)입니다. 나무가 빽빽한 숲을 전면에 내세웁니다. 나무의 몸통은 아예 보이지 않고, 어렴풋이 보이는 나뭇잎의 형태를 통해 간신히 숲 속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숲은 마치 하나의 작품 같습니다. 독자는 작품을 끝까지 읽어야 비로소 보이는 하나의 주제-저자의 의도에 부합한다는 확신이 없지만-를 발견해냅니다. 그 때 느끼는 감정들은 숲속을 헤매다 길을 발견한 나그네의 심정 아닐까요? 저도 나그네처럼 <영혼>의 숲을 떠돌았습니다.

 

이 책의 핵심 챕터는 ‘3-2 문학의 집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 작가 가와카미 미에코의 비유에서 모티브를 얻어서(151) 쓴 이 챕터는 독자가 적극적 독서를 해야 하는 이유를 탁월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문학의 집에는 위대한 체류자가 있습니다. 위대한 체류자는 문학의 집에서 자신이 체류하는 곳을 하나의 방으로 만든 이들을 뜻합니다. 복도라든가 좁은 통로였는데 이들이 체류하면서 방이 된 것이라고 합니다.(161)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자신만의 방을 마련하는 모습을 적극적 독서에 빗대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독서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사람에게 현실세계와 책을 읽는 자신을 분리하라고 조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책 속 가상세계는 저자가 컴퓨터가 되어 정밀하게 설계한 시스템입니다. 그 시스템을 가동하면서 현실세계를 같이 운영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가상과 현실을 오가면서 겪는 정보들이 혼돈됩니다. 그 혼란을 방지하려면 책에만 열중해야 합니다.

 

그렇게 독자는 책의 세계를 유영합니다. 같은 책을 읽어도 사람마다 경험치가 다르기에 이해도와 공감대가 다릅니다. 그 의미를 인정하며 다양한 견해를 접하면서 자신만의 깊이를 더 깊게 형성합니다. 문학에게 자신의(독자의) 집에서 위대한 체류자의 자격을 주고 머물 수 있는 방을 줍니다.

 

그렇다면 독자도 문학에게서 방을 얻은 것일까요? 제 생각에는 아닙니다. 독자가 어떤 목적으로 책을 읽더라도 읽는 과정에는 독자의 경험이 투영됩니다. 그 경험이 문학 뒤에 있는 저자의 경험과 같지는 않을 것이며, 설령 비슷하다 해도 오롯이 알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독자는 그저 문학의 집에 있는 방문을 두드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네가 내게 한 이야기는 이런 거였다고 말하기 위해서. 여기서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메모도 하고 노트도 쓰니 문을 열어달라는 뜻으로. 그렇게 기다리며 찾은 의미에 의미가 덧붙어 방이 된 것이지요. 독자의 적극적 독서로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신분, 위대한 체류자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문학과 독자의 사이에서는 결국 독자의 적극성만이 양쪽의 간격을 좁힐 수 있는 방법이 됩니다. 그 적극성에 학교 국어 시간에 배웠던 시대 분석, 캐릭터 분석, 문단별 주제 요약이 포함된다는 걸 이제야 깨닫습니다. 객관적 분석이란 정답을 찾는 게 아니라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뜻하는 걸. ‘국어에 정답이 어디 있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는지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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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와 어두워진 빛들에게 문지 에크리
하재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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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미디어에서 표지만 보고 2권의 책을 구매했습니다. 그 중 1권의 책이 <내게 와 어두워진 빛들에게>(이하 <내게 와>)입니다. 창가에 어떤 사람이 앉아 있습니다. 주위는 어두컴컴하고 창문을 통해 흰 빛이 내리쬐고 있습니다. 빛은 주로 희망을 뜻하는데 이 표지에서는 왠지 영원히 닿을 수 없는 미지의 빛 같습니다. 빛을 바라보며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할까요? 그 생각을 탐험하는 기분으로 이 책을 펼쳤습니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희미한 빛은 걸을 수 있도록 해 주는 원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걷다 보면 더 환한 빛을 보리라는 기대를 품고. 그러나 그 빛이 햇빛인지 달빛인지 어떻게 분간할 수 있을까요? 만약 달빛이라면 평생 어둠 속에서 달빛이 일러주는 길만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 놓입니다. 한 걸음씩 내딛을 수 있는 공간만이 보이는 곳에서, 우리는 달빛을 잃지 않도록 신경을 곤두세우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저자는 그 한 걸음을 내딛고 싶어 합니다. 어둠 속에서 빛을 찾지 못해서 한치 앞을 보지 못하는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곁에는 자신의 고통을 들어주고 이해해 줄 어른이 없습니다. 그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려줄 어른의 부재는 저자를 어둠 속에서 갈 길을 잃은 어린 아이로 둔갑시킵니다. 그 어린아이가 버티어 낼 수 있었던 이유를 시에서 찾습니다.

 

저자는 시를 쓰면서 나에게 행해졌던 어떤 폭력으로도 나의 존엄은 훼손되지 않았으며, 살아남아 증언하는 나 자신의 언어로 인해, 바꿀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것(91)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시를 쓰는 행위가 변화의 여지를 제공한 셈입니다. 그렇게 스스로 빛을 내는 방법을 익히며 자신만의 길을 지금까지 걸어왔으리라 생각합니다.

 

문득 저는 무엇을 원동력으로 삼아서 길을 걸었는지 돌이켜 봅니다. 여전히 빛을 찾으려고 제자리에서 두리번거립니다. 이해받고 싶은 감정이 표류하는 지금, 글을 읽고 쓰는 행위로 제 마음을 붙잡아 보려고 노력합니다. 이 과정이 원동력이 될 수 있을까요? 저는 아직도 변화의 여지를 줄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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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꿈 트리플 16
양선형 지음 / 자음과모음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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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날개절제술>을 읽었습니다. 자음과모음 출판사에서 기획한 트리플 시리즈 중 하나였습니다. 꽤 흥미롭게 읽어서 다른 책도 구경해 보자는 마음으로 검색을 했습니다. 그 중에서 <말과 꿈>의 표지가 절 사로잡았습니다.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티셔츠를 입고 있는 누구, 그 누구는 표정도 몸도 드러내지 않습니다. 마치 태양처럼 형태를 이루며 어딘가를 비춥니다. 과연 어디를 향해서 빛을 비추고 있을까요? 소설을 읽으면서 그 빛의 도착지를 찾고 싶은 마음에 읽었습니다.

 

이 책에 실린 단편 소설 중에서 무엇을 골라 이야기해야 할지 많이 고민했습니다. 빛의 도착지가 비교적 선명하게 들어나는 <말과 꿈>을 다룰지 <퇴거와 나중에 함께 묶인 다른 산문들>(이하 <퇴거>)을 다룰지를. 전자는 공감을 얻는 리뷰를 쓰기에 좋을 것 같고, <퇴거>는 메시지를 함께 찾는 리뷰를 쓰는데 적합해 보였습니다. 고민 끝에 <퇴거>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되도록 구체성을 띠는 리뷰를 쓰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므로 꽤 어려운 도전이 될 것 같습니다.

 

<퇴거>의 줄거리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는 내 친구를 향한 감정들입니다. ‘의 집에서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활동만 하는 친구를 보면 안타깝습니다. 추운 겨울 수도관이 얼었다며 밖에서 뜨거운 물을 붓는 친구를 보면 고맙습니다. ‘가 생계를 유지하려고 일하며 보내는 시간이 몇 시간인지 생각하면 집에만 있는 친구가 얄밉기도 합니다. 사람 대 사람의 관계에서 다양하게 감정이 탄생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아웃풋으로 이어지기는 어렵습니다. 친구는 가 그럴 수 있도록 해 주는 원동력이 되어 줍니다.

 

는 집에서만 글을 씁니다. 친구 옆에서는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왜 친구가 떠나지 않는지 걱정되고 궁금하기도 하지만, 글을 쓸 수 있다는 이점이 몹시 매력적이라서 가 먼저 이제 나가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대목에서 <아티스트 웨이>(줄리아 카메론 지음, 2012, 경당)라는 책이 떠올랐습니다. <아티스트 웨이>에서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억압받는 어린 아티스트가 존재하며, 그 어린 아티스트에게 주의를 기울이며 돌봐야 한다고 합니다. <퇴거>의 친구는 어쩌면 의 어린 아티스트가 아닐까요?

 

가 언제 어떤 이유로 친구를 만났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친구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와 비슷한 연령대라고 추측합니다. 그렇다면 어린 시절에 발견한 친구이겠지요. ‘는 그 친구를 지금까지 키워왔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루에 세 탕이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면서도요. 왜 그랬을까요?

 

는 고된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쉬고 싶은 마음과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의 비율이 늘 불규칙하게 변화합니다. 이런 일상을 반복하면서 는 친구가 자신처럼 활동하며 독립적 활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를 원합니다. 동시에 친구가 먼저 를 떠나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오랜 시간을 공들여 키워온 친구의 숨을 자신이 멎게 하는 형식을 갖추기 싫어서입니다. 나쁜 사람이 되기가 싫어서 친구가 먼저 떠나기를 바라는 가 진정 나쁜 사람일지도 모르겠군요.

 

어쩌면 는 줄곧 원했을지도 모릅니다. 친구가 무럭무럭 성장할 수 있었던 환경과 친구가 기뻐했던 활동을. 그러나 시간의 흐름 속에서 는 친구와 관계를 유지할 힘이 서서히 빠집니다. 애써 친구를 붙드는 이 선택이 옳은지 의문스럽기도 합니다. 이제 친구, 네가 날 붙잡아 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빛에 담겨 있지 않을까요? ‘간절한 기도처럼 느껴집니다.

내 상상 속에서 친구가 살았던 나의 방은 네 벽면이 유리로 만들어진 밀실이다. 나는 그 투명한 큐브 앞에서 친구의 사소하고 무기력한 생활을 온전히 관찰할 수 있다. 친구는 나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친구가 떠나버린 밤, 나의 세간들이 누구의 손길에도 어지럽혀지지 않고 정갈하게 비치되어 있는 바로 그곳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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