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철학자열전 동서문화사 세계사상전집 50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지음, 전양범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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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들의 다양한 썰(?)을 보는 건 좋았지만 번역이 매우 좋지 않았다. 특히 이론 부분에선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수준의 번역을 해놨다. 추천하지 않는다. 차라리 비싸더라도 나남 출판사의 판본을 읽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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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에 Historie 12
이와키 히토시 지음, 오경화 옮김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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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부터 쭉 정주행 했다. 역시나 명작이다. 앞으로도 건강하게 쭉 연재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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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숨에 정리되는 그리스철학 이야기 - 고대 그리스철학 천년의 사유를 읽는다! 단숨에 정리되는 시리즈
이한규 지음 / 좋은날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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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 관심이 많은 주인장이 제일 좋아하는 철학 장르(?)가 있다. 바로 그리스 철학이다.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 철학이나 헤겔과 마르크스, 포이어바흐 같은 유물론 철학도 좋아하지만 확실히 그리스 철학이 더 재밌고 좋다. 그도 그럴 것이, 그리스 철학자들은 각각 저마다 재밌는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상상도 못한 기괴한 언행(ex. 디오게네스)을 보이거나 아니면 자신의 철학을 위해 온갖 고집(??) 아닌 고집을 부리기도 한다. 놀라운 건 이런 전래동화 같은 이야기를 통해서 그리스 철학자들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는 거다. 이들은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했다. 오늘날처럼 앉아서 고급 지게 철학한 게 아니라, 생활 속 실천으로 철학을 실현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비록 하찮은 사건이나 에피소드라도 이를 통해 우리들은 과거 그리스 철학자들의 철학을 접할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나라에선 그리스 철학자들에 대한 이야기나 관련 책들이 거의 없다. 있더라도 이미 수십 년 전에 절판되어 있기 일쑤다. 이런 점에서 이번에 읽은 <단숨에 정리되는 그리스 철학 이야기>라는 책은 귀하다. 이 책에서는 최초의 철학자라 불리는 '탈레스'부터 시작해 그리스 철학의 황혼기를 상징하는 철학자 '플로티누스'까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제목 그대로 그리스 철학의 계보를 쭉 다룬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쭉 철학자들을 나열하다 보니 어려울 것 같지만 본 책에선 심오한 얘기보다는 각 철학자들에게 얽힌 재미있는 사연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고 있어 읽기 쉽다. 내가 이 책을 선택한 것도 이런 재밌는 에피소드를 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 읽어본 결과, 꽤 만족스러웠다. 이전에도 그리스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책을 읽은 적 있었지만 이 책이 뭔가 더 자세하고 수록된 에피소드도 많았다. 이와 관련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단연코 헬레니즘 철학자들의 이야기였다. 이들은 다양한 문화가 얽힌 세상에서 '세계 시민'으로 살아갈 것을 추구했고, 철학을 일상생활에 적극적으로 반영하려고 했다. 그래서인지 온갖 괴이한(?) 에피소드가 전해지는데, 흔히 '견유학파'라 불리는 '디오게네스'라는 철학자가 유명하다. 그는 개처럼 사는 게 좋다고 생각해 평생을 거리에서 떠돌아다녔으며, 사람들에게 자신의 철학에 대해 몸소 보여준다. 워낙 많고 또 흥미로우니 자세한 건 꼭 책을 통해 읽어보시길 바란다! 이외에도 에피쿠로스나 에픽테토스 같은 에피쿠로스 학파, 스토아 철학 등등은 헬레니즘과 정치적 문제로 인해 복잡하고 소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내면의 평화를 추구했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이란 고통받지 않는 것이며, 소소한 쾌락(오늘날로 치면 '소확행')을 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여러 사람들과 정원을 가꾸며 공동체 생활을 했다. 스토아 학파는 고통이란 외부에서 오기보다는 자신의 인식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니까 어떻게 사물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거다. 그래서 스토아 학파는 자기 스스로의 내면을 수양하면서 동시에 세상을 움직이는 '이성(로고스)'에 따라 살라고 조언한다. 우리가 잘 아는 <명상록>도 스토아 철학자이자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쓴 것이다. 왜 명상록에서 아우렐리우스가 계속 자기 자신을 타이르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 밖에도 본 책에선 흥미로운 에피소드 외에도 해당 철학자들의 사상을 간략하게 소개하는데, 덕분에 나는 그 끔찍한 '파르메니데스'의 철학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주 조금이지만 말이다!(그리고 나는 여전히 헤라클레이토스가 짱이라고 생각한다 ㅎ) 그리고 그리스 철학 이야기를 쭉 읽으면서 의외였다고 느낀 것이, 그리스 철학자들은 저마다 우주를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는 거였다. 모두가 그랬다고는 장담할 순 없지만, 그리스 철학자들 대부분은 진리를 찾고자 했고, 그 진리란 변화하지 않은 절대적인 어떤 것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모든 것은 변한다(판테 레이)'라고 주장한 헤라클레이토스도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변화하지 않는 것'을 찾고자 했다. 하나의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한다고 봤다는 건데, 나는 철학자들이 저마다 다른 진리를 추장했다고밖에 알지 못했기 때문에 새로웠다. 그러면서도 옛날 사람들인 만큼 시대적 한계는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하튼, 결론적으로 <단숨에 정리되는 그리스 철학 이야기>는 어렵고 복잡한 그리스 철학을 쉽게 접하고 싶거나, 빠르게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하고픈 책이다. 다만, 아쉬웠던 점이 청소년 도서인 만큼 내용이 가벼운 편이고, '~습니다' 문체라 뭔가 낯설었다 ㅎ 아시다시피 대다수의 철학책들은 무겁고 딱딱하니 말이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저자의 생각이 약간 들어있어서 이것 역시 낯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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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광포한 이 세상에서 - 러시아대표단편문학선 세계단편문학선집 2
니콜라이 고골 외 지음, 최병근 옮김 / 써네스트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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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배송 조건을 맞추고자 다른 책을 찾던 중에 우연히 발견한 <아름답고 광포한 이 세상에서>. 인상적인 제목 + 러시아 소설을 좋아하던 내게 딱일 것 같아 바로 주문해 읽어봤다. 그렇게 완독한 결과,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좋은 독서였다. ‘푸시킨’이나 ‘고골’같이 유명한 작가의 작품들뿐만 아니라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여러 러시아 소설 작가들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어서 좋았다. 그중에서 인상 깊게 읽었던 몇몇 작품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


먼저 러시아 문학하면 빠질 수 없는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스페이드 여왕>이라는 작품이다. 예전에 읽은 적이 있지만 다시 봐도 늘 새로운 이야기다. 대략적인 스토리는 이렇다. 주인공 ’게르만‘은 젊은 공병 장교로, 다른 친구들과 달리 흥청망청 놀거나 도박에 빠지지 않고 나름 착실하게 살아가는 청년이다. 정확히는 실리적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러던 어느 날, 게르만은 파티에서 친구 ‘톰스키’가 자신의 할머니에 대해 말하는 걸 듣게 된다. 톰스키의 할머니인 ‘늙은 백작 부인’은 과거 젊었을 적에 전설적인 '생제르멩 백작'으로부터 카드 도박에서 무조건 이기는 방법을 전수(?) 받고 엄청난 금액의 돈을 도박판에서 따냈다고 한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백작 부인은 다시는 도박을 하지 않았고, 그 비밀 역시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조용히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믿지 않는 분위기였으나 이 말을 들은 게르만은 늙은 백작 부인으로부터 어떻게든 비밀을 알아내고자 결심한다. 겉으로는 도박하는 걸 꺼려 했던 게르만이었으나, 실상은 가능하다면 도박을 통해 한밑천 잡고 싶어 했던 것이다. 한편, 늙은 백작부인에게는 가난한 양녀 '리자베타 이바노브나' 라는 아가씨가 있었다. 늙은 백작 부인에 의해 자기 의지에 상관없는 구속된 삶을 살아가던 그녀는 하루빨리 자신을 이곳에서 구해 줄 누군가(신랑감)가 오기를 바란다. 그때 호시탐탐 늙은 백작부인에게 접근할 기회를 노리던 게르만은 리자베타를 발견하곤 거짓으로 그녀를 유혹한다. 이를 몰랐던 리자베타는 사랑에 눈이 멀어 게르만에게 집에 몰래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게르만은 기회를 틈타 밤에 몰래 늙은 백작 부인의 방에 잠입한다. 그리고 놀라는 백작 부인에게 제발 도박의 비밀을 알려달라고 애원하지만, 어째서인지 백작 부인은 앉은 채 몸을 뻣뻣해 굳힌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에 화난 게르만은 총구를 겨누며 위협을 하다가 그녀가 이미 죽었다는 걸 알아차린다. 그는 그대로 리자베타에게 달려가 사실을 말하나, 자기 때문에 노파가 죽었다는 것보다 끝내 도박의 비밀을 알아낼 수 없었다는 사실에 분해한다. 이런 그의 끔찍함에 우는 리자베타를 뒤로하고, 게르만은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난 늦은 밤, 깜빡 잠에 든 게르만 앞에 죽었던 백작 부인의 유령이 찾아오는데..

이게 <스페이드 여왕>의 대략적인 스토리이다. 푸시킨의 작품은 대체로 사실적이면서도 환상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물론 고골만큼은 아니지만 푸시킨의 작품에선 사실과 환상, 그리고 낭만이 느껴진다. <스페이드 여왕>에서도 마냥 현실적인 줄만 알았던 게르만이 백작 부인의 유령에 놀아나면서 결국엔 그 환상에 의해 붕괴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또한 리자베타와의 사랑이 아닌 돈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인간성을 상실한 물신주의 대한 비판을 엿볼 수 있다.


다음으로는 '안톤 체호프'의 <사랑스러운 여인>이다. 이것도 예전에 <귀여운 여인>이라는 이름으로 읽은 적이 있는데, 그때는 주인공 '올렌카'에 대해 그리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그냥 어느 여성의 전반적인 삶을 그려낸 작품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다시 읽어보니 올렌카의 삶이 다르게 보였다. 올렌카는 작중 여러 번 결혼한다. 결혼했던 남편들이 대부분 먼저 세상을 떴기 때문에 그런데, 올렌카는 그때마다 스스로를 남편과 동일시하며 그와 같이 행동하고, 말한다. 예를 들면 첫째 남편이 극장주였는데 이때는 마치 자기가 극장주가 된 것처럼 똑같이 연극일에 대해 걱정하는 건 물론이고, 연극의 유용성을 주변 사람들에 잔뜩 설파하며 극장일에도 거든다. 하지만 얼마 못가 극장주였던 첫째 남편이 병으로 사망하고, 이후로 토목일을 관장하던 둘째 남편과 결혼한 뒤로는 연극일에 대해 까맣게 잊고 남편처럼 토목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얘기하고 다닌다. 나중에는 자기는 토목을 관리하고 실용적인 사람이라며 연극 따위엔 신경 쓸 일이 없다고 말을 바꾼다. 놀라운 건 올렌카가 이런 짓을 아주 당당하게 하는 건 물론이고, 오히려 자랑스러워한다는 거다! 그럼에도 주위 사람들은 이런 그녀에 대해 '사랑스럽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둘째 남편과도 사별하고 혼자 남겨진 올렌카는 남편이 없자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몰랐기 때문에 점차 퇴색되어간다. 내가 봤을 때 올렌카가 사랑스러운 여인인 이유는 아마도 어린애처럼 자기 생각을 가지지 못한 채 그저 좋아하는 걸 졸졸 쫓아다니는 성격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당시 러시아에선 종종 '유로지비'라며 이상할 정도로 착하거나 어린애 같은 사람들을 '성인'이나 '귀여운 사람'이라며 좋게 봤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게 있어 올렌카는 사랑스럽다기보다는 생각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생계로 인해 남편 없이 살아야 한다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이라면 몰라도, 생각이 없어서 의지할 대상으로서 남편이나 제3자를 찾는다는 점이 무척이나 불쾌했다. 뭔가 체호프는 일상 속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갑갑함이나 불편한 점을 잘 꼬집는 것 같다.


푸시킨이나 체호프 외에도 본 책을 읽으면서 새로운 러시아 작가에 대해 알게 되었다. 바로 '이반 부닌'과 '콘스탄친 파우스토프스키'이다. 먼저 이반 부닌의 <추운 가을>이라는 작품이다. 아주 짧은 단편소설인데, 주인공인 '나(여성)'가 젊었을 적 약혼자와의 짧은 작별의 순간 하나만을 간직한 채 살아왔던 나날을 담담하게 풀어가는 게 특징이다. '나'와 약혼자의 서정적인 작별 장면은 물론이고 이후에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는 '나'의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다음으로 파우스토프키의 <눈>이라는 작품이다. 처음엔 사진 속 저자의 무시무시한(?) 인상에 전쟁이나 슬픈 소설일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읽어보니 이보다 서정적인 작품은 없었다. <눈>은 전쟁으로 인해 원래 살던 모스크바를 떠나 노인 홀로 사는 시골집에 피난하게 된 주인공 '타치야나'와 그 노인의 아들인 '포타포프 중위(전쟁 때문에 잠시 고향집을 떠나 있었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타치야나가 집에 있는 동안 노인은 곧 세상을 떠나고, 그녀는 우연히 노인의 탁자에서 포타포프 중위가 쓴 편지를 읽게 된다. 고향에 대한 향수를 이야기하며 집 대문에 달린 종소리 하며 눈길 사이로 난 정자로 가는 길, 오래된 촛불 냄새 등등을 얘기하는 걸 보며 타치야나는 묘한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포타포프가 잠시 휴가를 온다는 소식에 타치야나는 움직이기 시작한다. 한편, 포타포프는 고향 역에 도착하고나서야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과 낯선 여자가 자신의 집에 피난해 와서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되고 망연자실해한다. 아버지도 돌아가셨으니 집에는 낯선 사람만 있을 것이고, 가봤자 고향의 느낌은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포타포프는 끝내 집 근처에 도착하는데... 옛날처럼 누군가 정자로 가는 길에 눈을 치워둔 게 아닌가! 그리고 그 정자에서 집을 바라보던 포타포프를 타치야나가 발견한다. 그녀는 담담하게 포타포프에게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고, 얼떨결에 집에 들어선 그는 마찬가지로 예전처럼 울리는 대문의 방울들, 오래된 촛불 냄새, 피아노 소리 등등에 놀라워한다. 알고 보니 타치야나가 그를 위해 편지에 나왔던 그대로 고향집을 재현해냈던 것이다. 여기서 강조해야 할 점은, 시종일관 타치야나는 이를 아주 담담하게 행동한다는 거다. 하지만 그 담담함 속에 느껴지는 인간적인 정이 왠지 모르게 흐뭇함을 준다. 포타포프와의 묘한 분위기도 읽는데 한몫하니 꼭 한 번 읽는 걸 추천드린다!

전체적으로 <아름답고 광포한 이 세상에서>는 잘 알지 못했던 러시아 단편 소설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책이었다. ‘이반 부닌‘과 ‘레오니드 안드레예프‘, ‘콘스탄친 파우스토프스키’ 등등이 그랬다. 다만 앞서 말한 이반 부닌과 파우스토프스키의 작품을 제외한 다른 단편 소설들은 내게 큰 감명을 주지는 못했다. <석류석 팔찌>는 오늘날이었으면 스토커로 진작에 체포되었을 이야기가 로맨스적인 이야기로 표현되었고, <심연>은 너무 미사여구가 많았다. <아름답고 광포한 이 세상에서>와 <귀향>은 <구덩이>로 유명한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 최고였으나 <구덩이>나 <체벤구르>만큼의 여운이 없었다. 개인적으로 아쉬웠달까. 그래도 다른 사람들은 충분히 재밌게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러시아 문학에 관심이 많거나 가볍게 읽고 싶은 분이라면 추천드리는 바이다.

그러니까 그 열정적인 편지들, 불꽃처럼 격렬했던 애원, 그 대담하고 끈질긴 구애 등등.. 이 모든 것들이 사랑이 아니었던 것이다! 돈, 다름 아닌 바로 이것이 그의 영혼이 갈구했던 것이었다. 그의 욕망을 채워주고 그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아니었다! 이 가련한 양녀는 자신의 늙은 은인을 살해한 강도의 눈먼 공범자에 다름 아니었다! 그녀는 때늦은 고통스러운 참회의 심정으로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게르만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도 고통스러웠지만, 불쌍한 처녀의 눈물에도, 슬픔에 잠긴 그녀의 놀랄 만큼 매력적인 모습에도 그의 냉혹한 영혼은 흔들리지 않았다. 죽은 노파를 생각하면서도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오직 하나의 사실만이, 부자가 될 수 있는 비밀을 이제는 영원히 잃어버렸다는 그 사실만이 그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 P37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쁜 징조는 그녀에게 아무런 의견도 없다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보고 있으며, 주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다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의견도 내놓을 수가 없었으며,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아무런 의견도 없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 P94

이렇게 나는, 그 언젠가 견뎌낼 수 없을 것이라고 경솔하게 말했던, 그의 죽음을 견디어 냈다. 그러나 그 이후로 내가 겪었던 모든 일들을 회상하면서 항상 내 자신에게 묻곤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내 삶에는 무엇이 있었던가. 그리고는 스스로 답한다. 단지 그 추웠던 가을 저녁분이었다고. 그런데, 그 가을 저녁이 있기는 했었던가? 그래, 아무튼 있었다. 이것만이 나의 삶에 있었던 전부였고, 나머지 것들은 모두 부질없는 꿈이었다. 그리고 나는 믿는다. 뜨겁게 확신한다. 거기 어딘가에서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그날 저녁의 사랑하는 마음과 젊음을 간직한 채. ‘당신은 좀 더 살다가, 세상에서 조금 더 즐겁게 지낸 다음, 그리고 내게로 오면 돼’. 나는 좀 더 살았고, 조금 더 기뻐했다. 이제는 곧 그에게 갈 것이다. - P106

그녀는 발을 툭툭 굴러 장화에 묻은 눈을 털어 냈다. 그러자 출입구에서 대꾸하듯 방울소리가 울렸다. 포타포프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는 어색한 듯 뭔 말인가를 중얼거리며 집으로 들어갔다. 출입구에서 그는 외투를 벗었다. 자작나무 연기 냄새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고양이 아르히프는 소파에 앉아 하품을 하고 있었다.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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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본질 세창클래식 21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지음, 이서규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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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어바흐의 신작(?)이 나왔다. 우리나라에선 잘 알려지지 않은 철학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Ludwig Andreas Feuerbach, 1804년 7월 28일 ~ 1804년 7월 28일)'는 독일의 유물론 철학자 중 한 명으로, <자본론>을 쓴 것으로 유명한 '카를 마르크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이다. 포이어바흐는 자신만의 사상 - 즉 유물론적 시각으로 종교의 모순을 철저히 비판한다. <기독교의 본질(1841)>에선 기독교 깊숙한 곳에 숨겨진 인간 중심의 이기주의 사상을 폭로했으며, <종교의 본질에 대하여(1851)>에서는 원시적 종교부터 시작해 전반적인 종교가 사실은 자연에 대한 두려움과 존경심에서 비롯된, 인간의 무지에서 왔다고 주장한다. 포이어바흐는 자신의 저서에서 공통적으로 종교란 결국엔 ‘인간 숭배’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초창기 종교가 자연에 대한 경외심에서 비롯되었지만 문명이 발전해감에 따라 자연과 분리된 인간은 점차 자연이 아닌, 그 너머 피안의 세계에 있는 관념적인 '신'을 믿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어떻게 인간 숭배가 나올 수 있단 말일까? 스스로를 희생하고 신에게 의지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신 숭배 행위이지 않을까? 하지만 포이어바흐는 자신의 <종교의 본질>라는 저서를 통해 인간이 어떻게 신을 '창조'했으며, 그 과정에서 인간이 왜 종교라는 행위를 통해 인간 숭배를 실현하는지를 설명한다.


포이어바흐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로 종교의 본질을 이야기한다. 초기 원시 종교에서는 인간이 자연에 자기 자신을 투사하면서 만들어졌다. 무생물에 인간적 감성이 거의 없는 자연이 자신처럼 감정과 생각,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예를 들어 비가 내린다고 치자. 비는 단순히 구름 속에서 이루어진 여러 화학적 반응으로 인해 내린다. 여기엔 별다른 ‘인간적’ 의미가 없다. 구름이나 비는 딱히 의도를 가지고 내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날따라 우울하거나 시적 심상이 강한 사람들은 이걸 보고 ‘비가 나를 괴롭히기 위해 내린다’거나, ‘하늘도 슬퍼서 눈물(비)를 흘리는구나’라고 말한다. 이렇듯 인간은 자연 현상을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감동하거나 인간적인 감정을 느끼곤 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게 진실이 아니라 단순한 상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만 종교인들은 그렇지 않다. 하느님이든 알라든 우리 주위에 일어나는 온갖 자연현상 역시 신이 일으킨다고 생각하지 않은가. 포이어바흐는 이러한 종교적 특성이 인간의 상상에 불과할 뿐, 진리가 아니라고 일침을 가한다.


포이어바흐는 인간이 자연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현상이 발생한다고 봤다. 초창기 원시적인 인간은 자연 없이 존재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자연은 먹을 것과 곡식을 주는 등 고마운 존재였지만 동시에 천둥 번개를 비롯한 무시무시한 자연재해를 주는 무서운 존재였다. 예측 불가능하고 불가사의한 자연을 인간은 어떻게든 이해하고자 했고, 자기 자신을 투사하는 방식을 통해 자연을 이해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존재 이상의 것을 인지하고 이해할 수 없었기 때이다. 인간에게 이로운 것은 곧 신에게도 이로우며, 인간에게 해로운 것은 신에게도 해롭다. 잘 생각해 보면 신은 우리처럼 입이나 장기 같은 신체 기관이 없는데 고대 사람들은 소나 다른 가축들을 신에게 제물로 바쳤다. 그리고 이걸 신이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이게 과연 정상적인 일일까? 이외에도 고대 이집트와 고대 그리스 신들은 모두 인간처럼 생겼다. 인간처럼 감정을 가지고 있고, 인간처럼 먹고 마신다. 기독교의 신도 마찬가지다. 야훼는 질투하고 진노한다.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렇듯 종교에서의 신은 인간과 다른 존재지만 동시에 무척이나 인간 같다. 포이어바흐는 모든 종교는 자연이 자신과 같다고 생각하는 상상(투사)에 기초하고 있기에 그 자체로 허구이며, 이러한 신 안에 있는 인간적 특성을 찬양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인간 숭배 행위라 말한다.


하지만 포이어바흐가 경고한 것은 단순히 종교의 본질이 인간 숭배 행위라는 사실뿐만 아니다. 인간으로서 인간을 숭배하는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또는 일부로 모른 채 하며) 자꾸만 허상의 신에 매달리는 행동이다. 특히 관념적인 신에 매몰되어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포이어바흐는 인간이 인식한 '인간적인 자연' 또는 '인간적인 신'은 허구이며 보편적 진리가 아닌, 전적으로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인간 중심적인 종교관이라고 말한다. 또한 이러한 신들은 현실 속 실존하는 인간과 완전히 다른 관념적인 존재이기 때문에(인간의 추상적인 상상에만 의존하므로) 이에 매몰될 경우 현실 세계와 동떨어지는 '인간 소외'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고 봤다.


따라서 우리는 신이 있기에 인간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있기에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인간은 신을 통해 죽지 않은 영원함과 무한성을 바라지만 돌아오는 건 신의 침묵과 몇십 년 후 다가올 죽음이다. 하지만 이런 냉혹한 포이어바흐의 주장에도 판도라의 상자 이야기처럼 하나의 '희망'이 남아있다. 다름 아닌 '사랑'이다. 포이어바흐가 종교를 비판한 건 사실이지만, 그 목적은 종교의 완전한 소멸이 아니다. 그는 종교가 헛된 상상력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러한 종교가 '인간'을 찬양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제는 신이 아닌 '인간'을 사랑해야 할 때라고 말한다. 그것도 현실에 존재하는,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인간을 사랑하라고 말이다. 물론 이런 주장 역시 추상적이라 훗날 마르크스를 비롯해 다른 철학자들에게 비판을 받지만, 종교적인 시선이 아닌 유물론적인 시각으로 종교를 신랄하게 비판했다는 점에서 의미하는 바는 크다. 유물론 철학이나 마르크스 철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종교인이지만 따끔한 충고를 듣고 싶은 사람에게도 추천하고픈 책이다.



처음에 제목을 보고 <종교의 본질에 대하여>와 같은 책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종교의 본질>은 <종교의 본질에 대하여>보다 일찍 나온 책으로, 구성이나 내용도 다르다. 뭔가 <종교의 본질에 대하여> 초기 원고 같았달까. 구성 자체도 뭔가 명언집 같아서 좋았다.

인간의 본질 또는 신 -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인데 - 과 구분되는 독립적인 존재, 즉 인간적인 본질, 인간적인 성질, 인간적인 개성이 없는 존재는 실제로는 자연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종교에서의 인간의 악의 없는, 무의식적인 자기 기만은 자연종교에서는 하나의 분명한, 명백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인간은 그의 종교적인 대상들에게 눈과 귀를 달아 주고, 이러한 눈과 귀가 인위적인, 돌처럼 차갑고 어설픈 눈과 귀들이라는 점을 알고 목격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실제적인 눈과 귀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은 종교에서 보지 않기 위해, 완전히 눈을 멀기 위해 눈을 가지며, 사유하지 않기 위해, 매우 아둔하고 어리석어지기 위해 이성을 가진다. 자연종교는 표상과 현실성, 상상과 사실 사이의 명백한 모순이다. 현실에서 죽은 돌이나 통나무는 자연종교의 표상 속에서는 살아 있는 존재이며, 가시적으로는 신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지만, 비가시적으로는, 즉 신앙에 의해서는 하나의 신이다. - P80

그 대신에 성실하고 겸손하게, 전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나는 근거를 알지 못한다. 나는 나에게 자료, 재료가 없기 때문에 설명할 수 없다. 당신은 당신 생각의 이러한 결핍, 이러한 부정, 이러한 공허를 상상을 통해 실재적인 존재, 비물질적인 존재들, 즉 물질적이지 않고, 자연적이지 않은 존재들인 그러한 존재들로 변형시킨다. 왜냐하면 당신은 물질적인, 자연적인 원인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 P80

세계는 우리에게 사유를 통해, 적어도 형이상학적이고 초물리적인, 실제적인 세계를 추상화하는, 이러한 추상 속에서 그의 참되고, 최고의 존재를 정립하는 사유를 통해 주어지지는 않는다. 세계는 삶을 통해, 직관을 통해, 감각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다. 추상적인, 단지 사유하는 존재를 위해서는 어떠한 빛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존재는 결코 눈, 온기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존재는 감정을 갖지 않기 때문에, 어떠한 세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존재는 세계를 위한 어떠한 기관도 갖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존재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 P56

따라서 신은 그를 숭배하고 그에게 기도하는 인간을 전제로 한다. 신은 그 개념이나 표상이 자연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인간에 의존하는 존재이다. 기도의 대상은 기도하는 존재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신은 그 존재가 오직 종교의 존재와 함께, 그 본질이 오직 종교의 본질과 함께 주어져 있는 대상이며, 따라서 이러한 대상은 종교의 외부에 있지 않고, 종교와 구분되지 않으며, 종교에 의존하고, 이러한 대상 속에서는 종교에서 주관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것 이상의 것이 객관적으로 포함되어 있지 않다. - P130

자연 속에서 자연 자체가 아니라 다른 존재가 나타나며, 자연은 그와 다른 존재에 의해 이루어지고 지배를 받는다는 믿음은 근본적으로 유령들, 악령들, 악마들이 적어도 일정한 상황에서 인간을 통해 나타나고, 인간을 홀린다는 믿음과 같은 것이며, 실제로 자연이 어떤 낯선 초자연적인 존재에 의해 사로잡혀 있다는 믿음이다. 무론 또한 실제로 이러한 믿음의 입장에서는 자연이 어떤 정신에 의해 사로잡혀 있지만, 그러나 이러한 정신은 자연을 자신의 존재와 상징과 거울로 만드는 인간의 정신, 인간의 상상, 무의식적으로 자연 속에 스스로 집어넣는 인간의 심정이다.

"당신의 마음처럼, 그렇게 당신의 신이 존재한다"

인간이 원하는 것처럼, 그렇게 인간의 신들이 존재한다. -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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