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 난 영혼
조지 엘리엇 지음, 박희원 옮김, 김선옥 해설 / 아고라 / 202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다 보면, 정작 사람을 안다는 감각이 오히려 흐릿해질 때가 있다. 말은 자주 섞지만 속은 쉽게 드러내지 않고, 관계는 이어져도 일정한 거리가 유지된다. 때로는 너무 정확히 알지 않으려는 태도, 적당히 모르는 척하는 기술이 관계를 굴리는 윤활유가 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조지 엘리엇의 벗겨진 베일(The Lifted Veil)(1859)제이컵 형(Brother Jacob)(1864)을 한 권으로 묶어 읽는 경험은 낯설지 않다. 두 작품은 겉으로는 결이 달라 보이지만 끝내 한 가지 질문으로 모인다. 진실을 너무 많이 알아도 사람이 부서지고, 진실을 끝까지 피하려 해도 사람이 망가진다는 것이다. 문제는 진실이냐 거짓이냐의 선택이 아니라 그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고 버티느냐에 있다.

 

벗겨진 베일에서 베일은 감춰진 비밀을 덮는 천이라기보다 사람 사이를 버티게 하는 얇은 막, 관계의 완충재에 가깝다. 누군가를 완전히 알 필요도 없고, 끝까지 알아내는 일이 늘 좋지만은 않다. 우리는 대개 상대의 표정과 말투, 말의 결을 보며 아마 이쯤이겠지하며 선을 긋고, 그 선 덕분에 관계는 굴러가며 생활은 유지된다. 주인공 래티머는 어느 순간부터 남의 마음이 읽히는 듯한 능력을 갖게 되는데, 그 능력은 특별함이 아니라 사람들 속에서 그를 고립시키는 재난으로 작동한다. 래티머가 보게 되는 것은 영웅적인 진실이나 숭고한 인간성의 핵심이 아니라 상대가 계산하는 순간, 무심한 위선, 자신을 합리화하는 습관, 남을 깎아내리면서도 죄책감은 최소화하려는 마음, 사소하지만 정확히 날카로운 잔인함 같은 것들이다. 이런 것들은 특별히 악한 누군가의 전유물이 아니라 누구나 조금씩 가지고 있는 것이기에 더 무섭고, 그래서 더 피하기 어렵다. 래티머의 세계에는 여백이 없다. 이해는 보통 저 사람도 그럴 사정이 있겠지같은 상상력과 여백 위에서 자라지만, 그는 늘 정답을 먼저 본다. 그 결과 관계는 깊어지지 않고 오히려 부서지며,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가능성은 점점 좁아진다.

 

이 작품이 불편한 이유는 우리가 기대어 살던 문장을 정면에서 흔들기 때문이다. “진실을 알면 자유로워진다는 말은 멋있지만, 실제 삶에서 진실은 해방보다 피로와 마비로 이어질 때가 많다. 래티머가 더 많이 알게 됨으로 얻는 것은 해방이 아니라 무력감이다. 남의 속마음을 알수록 친밀해지는 게 아니라 견디기 어려워지고, 미래를 어렴풋이 예감할수록 선택지가 좁아지고 선택의 의미가 사라진다. 결국 엘리엇은 진실은 언제나 선물인가, 혹시 어떤 진실은 알지 않음덕분에 인간을 인간답게 붙들어 두는 것은 아닌가를 묻는다.

 

반면 제이컵 형은 분위기가 훨씬 가볍고 현실적인데 그래서 더 씁쓸하다. 주인공 데이비드 포는 더 나은 삶을 원하지만 그 욕망을 실현하는 방식이 문제다. 그는 거짓으로 위장하고 자기에게 유리한 이야기로 삶을 꾸미는 데 익숙해진다. 여기서 거짓은 거창한 악행이 아니라 이 정도는 괜찮겠지라고 넘기기 쉬운 작은 타협에서 시작한다. 한두 번의 핑계, 체면을 위한 과장, 들키지 않을 것 같은 편법 같은 것들이 반복되면 습관이 되고, 습관은 곧 성격이 된다. 이 작품에서 삶의 고장은 폭발처럼 한 번에 터지는 사고가 아니라 천천히 녹이 슬어 무너지는 방식의 붕괴다. 무너지는 순간은 극적이지 않고 어느 날 문득 이게 내 삶이었나?” 하고 돌아봤을 때 이미 길이 너무 멀어져 있는 식으로 찾아온다.

 

제목 속 제이컵 형은 데이비드가 지우고 싶은 과거이자 숨겨두고 싶은 진실이며, 동시에 결국 돌아오는 부도수표다. 우리는 종종 과거를 정리했다고 믿고 싶어 한다. 환경을 바꾸고 관계를 끊고 마음가짐을 새로 하면 정말 새사람이 될 것 같지만, 정리했다고 사라지는 것은 생각보다 적다. 특히 내가 만든 균열은 내가 어디로 가든 따라오고, 이 작품이 보여주는 응보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벌이 아니라 자기기만이 내 삶을 안쪽에서부터 무너뜨리는 과정이다. 거짓은 당장 숨을 쉬게 해주지만 숨을 쉬는 방식 자체를 바꿔 버리며, 어느 순간에는 진실을 말할 능력뿐 아니라 진실을 감당할 체력까지 사라지게 만든다.

 

두 작품을 함께 읽을 때 더 선명해지는 것은 진실이 한 가지 얼굴만 가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래티머에게 진실은 빛이 아니라 소음이며, 남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통찰이라기보다 침입에 가깝다. 반대로 데이비드에게 거짓은 단순한 전략이 아니라 생활 방식이고, 자기기만은 잠깐 버티게 해주는 것 같지만 결국 삶 전체를 좀먹는 독이 된다. 하나는 과잉, 다른 하나는 회피로 망가진다. 방향은 반대인데 결과는 닮았다. 래티머는 타인의 마음을 너무 많이 알아서 함께 있을 수 없게 되고, 데이비드는 자신의 삶을 너무 많이 꾸며 결국 자기 자신과도 함께 있을 수 없게 된다.

 

여기서 조지 엘리엇이 인상적인 지점은 어느 한쪽만 손쉽게 꾸짖지 않는다는 데 있다. “진실만이 구원이다라고도 하지 않고, “모른 척하는 게 현명하다라고도 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이 필연적으로 진실과 착각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그 균형이 깨질 때 삶이 어떻게 작동 불능이 되는지를 도덕 교훈이 아니라 인간의 작동 원리처럼 차분히 드러낸다. 그래서 이 묶음이 남기는 질문은 단순하지만 무겁다. 진실을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겠느냐, 혹은 거짓으로 어디까지 버틸 수 있겠느냐를 묻는다. 우리는 이미 어느 정도의 진실을 모른 척하며 살고, 어느 정도의 거짓을 현실이라 부르며 버틴다. 문제는 그 선이 어디인지, 그리고 그 선이 무너지는 순간이 언제인지이다. 엘리엇의 결정타는 그 무너짐이 대개 요란한 폭발이 아니라 조용한 붕괴로 온다는 점을 끝까지 따라가게 만든다는 데 있다. 작품을 읽고 난 뒤에도 화려한 충격이 아니라 오래 지속되는 찝찝함이 남는다. “나는 지금 괜찮은가?”라는 질문이 너무 일상적인 얼굴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한달한권할만한데 #아고라 #독서모임 #조지엘리엇 #영국문학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이지 않는 질서 - 의도를 벗어난 모든 현상에 관한 우주적 대답
뤼디거 달케 지음, 송소민 옮김 / 터닝페이지 / 202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겉으로는 운명과 삶의 법칙을 이야기하지만, 읽고 나면 머리에 남는 질문은 의외로 단순하다. 우리는 삶의 문제를 제거하려다 오히려 문제를 키우고 있는 건 아닐까? 심리요법 의사로 오랜 시간 사람들을 가까이서 지켜본 저자는, 운명을 속이려는 시도가 끝내 성공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신화·역사·종교의 사례까지 끌어오며 마지막 총결산에 이르면 결국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는다는 결론을 제시한다. 거창한 선언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책을 따라가다 보면 그 말이 신비주의적 위안이라기보다 삶의 패턴을 보는 관찰의 언어로 다가온다. 이 책이 말하는 질서는 우리가 무시한다고 사라지지 않으며, 회피할수록 다른 모습으로 되돌아오는 그 무엇이다.

 

읽는 동안 동양의 음양(陰陽)을 떠올리게 된다. 이 책의 세계는 선악을 재단하는 법정보다는 서로 반대되는 힘이 긴장을 이루며 균형을 만들어내는 무대에 가깝기 때문이다. 음양은 좋은 것/나쁜 것을 가르는 도덕의 선이 아니라 낮과 밤처럼 상반된 요소가 함께 있어야 세계가 굴러간다는 감각이다. 책이 말하는 대립의 법칙도 바로 그 지점에 닿아 있다. 문제는 대립이 존재해서가 아니라, 대립을 부정하거나 한쪽만 고집할 때 더 비틀어진다.

 

큰 것이 없다면 작은 것을 생각할 수 없고, 낮은 게 없으면 높은 것을 생각할 수 없다. 심지어 악이 없다면 선도 의미를 잃는다. 상대주의의 가벼운 구호라기보다 현실의 작동 방식에 대한 냉정한 진술로 읽힌다. 우리는 대립을 처치해야 할 장애물로 간주하곤 하지만 저자가 보기에 대립은 하나의 틀이다. 한쪽을 지워버리려는 순간 다른 한쪽도 함께 흔들리고, 그 흔들림은 결국 더 큰 혼란으로 돌아온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대립을 도덕의 문제로만 좁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음양에서 음이 양을 방해하는 악이 아니듯, 양 또한 음을 멸해야 하는 선이 아니다. 둘은 반대이면서도 서로를 떠받친다. 그래서 삶의 문제를 한쪽을 없애는 게임으로 만들면 해결이 아니라 더 큰 대가가 따라온다고 경고한다. 테러리스트를 제압하기 위해 더 큰 폭력이 요구되는 역설 같은 장면들이 여기서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결론으로 이어진다.

 

이 책이 반복해서 겨누는 대상은 문제는 없애면 끝난다는 태도다. 싸워서 제거하려 할수록 문제가 오히려 늘 수 있다고 말한다. 한 극을 제거하려는 집착은 그 극을 강화하고, 밀려난 것은 그림자가 되어 더 위험한 영역으로 숨어든다는 것이다. 이 설명이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것이 거대한 형이상학이 아니라 우리가 자주 겪는 심리적 경험을 정확히 겨냥하기 때문이다. 억누르면 커지고, 덮으면 돌아온다. 그러니 저자의 조언은 없애라가 아니라 보라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책이 말하는 질서는 억압적 규칙이라기보다 회피할수록 더 강해지는 학습의 구조처럼 느껴진다.


저자는 항상 빛에만 몰두하는 사람의 영혼은 반대로 움직여 평형을 유지하려 한다고 말한다. 이 문장이 주는 날카로움은 그것이 단순한 비관이 아니라 긍정 강박의 함정을 정확히 찌른다는 데 있다. 우리는 종종 밝은 것만 좋은 것이라고 믿으며 어둠을 억지로 밀어낸다. 그러나 그 결과는 자주 예상과 다르다. 억눌린 감정이 폭발하거나, 겉으로는 긍정적인데 속은 불안으로 잠식되거나, ‘착해야 한다는 강박이 오히려 공격성을 낳는 식이다. 책이 말하는 그림자는 이런 방식으로 독자를 붙잡는다. “긍정적으로만 생각하라는 쉬운 처방을 주는 대신 긍정만 고집할 때 균형이 깨지는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결국 필요한 것은 빛을 더 밝히는 일이 아니라 어둠까지 포함해 전체를 읽는 능력이라는 결론으로 수렴한다.

 

저자는 공명의 법칙을 통해 어떤 일에 충분히 준비되었을 때 관련된 사건과 사람을 연달아 만나게 되는 경험을 설명한다. <시크릿>에서 말하던 끌어당김과 닮았지만 이 책은 그 달콤한 결론에 머무르지 않는다. 공명은 작동하되 그 위에 대립의 법칙이 더 강하게 작동할 수 있다. 아름다움만 원하는 사람에게 자각하지 못한 그림자 문제가 균형을 맞추기 위해 개입할 수 있다. 이 대목이 흥미로운 이유는 공명을 소원 성취의 언어에서 꺼내 성숙의 언어로 옮겨놓기 때문이다. “원하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가 아니라 원하는 것이 불러올 반대편까지 보라고 한다. 왜 공명이 안 되는지 불만스럽다면 그건 공명이 멈춘 게 아니라 내가 외면하던 반대편이 균형을 잡으러 온 것이다. 독자는 달콤한 위로보다 정확한 조언을 얻는다.


또 하나의 축은 시작이다. 저자는 시작에 모든 것이 있다고 말하며 씨앗과 알의 비유를 든다. 이 말은 첫 단추를 강조하는 교훈으로도 읽히지만, 책의 흐름 안에서는 더 넓다. 시작은 단지 출발점이 아니라 이후에 마주할 반작용까지 포함한 구조의 설계처럼 다가온다. 태극 문양에서 한쪽 안에 다른 쪽의 씨앗이 들어 있듯, 처음부터 완전히 순수한 한쪽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런 일이 생겼지?”라고 묻기 전에 처음에 무엇을 설정했지?”를 먼저 돌아봐야 한다. 책은 그 질문을 끈질기게 요구한다. 시작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나중에 생기는 문제를 우연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저자는 그것을 질서라고 부른다.

 

심층심리를 더 깊이 들어가면 종교의 세계가 나오고, 결국 선과 악 같은 대립으로 수렴한다. 그런데 그 끝에서 다시 대립을 넘어서는 가능성이 암시된다. 최종적으로는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종교의 약속처럼 삶의 법칙 역시 단일성으로 가려는 경향을 보인다. 독자에 따라 과감한 도약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책 전체를 관통하는 맥락대립을 부정하지 말고 의식 위로 올려라에서는 자연스러운 결론이기도 하다. 그래서 저자는 삶을 학교에 비유한다. 운명의 노크를 무시하면 더 세게 두드리고, 계속 무시하면 문을 부술 정도로 강해진다. 결국 배우는 방식은 두 가지다. 자발적으로 배우거나, 억지로 배우거나. 삶이 잔인해서가 아니라 회피는 더 큰 수업료를 요구한다는 뜻으로 이 비유가 남는다.

 

이 책의 장점은 삶을 단순한 낙관으로 정리하지 않는 데 있다. “좋게 생각하면 다 된다로 끝내지 않고, 왜 그런 말이 자주 실패하는지(그림자, 반작용, 대립)를 구조로 설명하려 한다. 특히 공명을 말하면서도 그 위에 더 큰 법칙이 있다고 주장하는 대목은 낙관의 피로를 느낀 독자에게 꽤 신선한 관점을 준다. 다만 책이 제시하는 법칙들은 어떤 사람에게는 삶을 정리해 주는 틀이 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 틀이 지나치게 커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 모든 문제의 정답이라기보다, 내 삶에서 반복되는 패턴을 비추는 거울로 쓰는 편이 정신 건강에 더 이롭다. 음양이 세계를 완벽히 해석하는 공식이라기보다 변화와 균형을 읽는 렌즈인 것처럼.

 

결국 이 책이 독자에게 건네는 말은 하나로 모인다. 삶은 문제 제거의 연속이 아니라 대립을 인식하고 균형을 회복하는 과정이라는 것. 우리가 미워하거나 두려워하던 반대편은 불청객이 아니라 균형이 무너졌다는 신호이자 배움을 재촉하는 종소리일지 모른다. 운명을 신비화하기보다 삶을 더 냉정하고 정직하게 보라고 요구한다. 빛만 붙잡지 말고 어둠도 함께 보라고, 원하는 것만 말하지 말고 그 뒤에 따라오는 반대편까지 함께 감당하라고. 그래서 책을 덮고 나면 질문이 달라진다. “왜 내 삶은 늘 같은 자리에서 걸려 넘어지는가내가 회피해 온 균형은 무엇이었나로 바뀐다. 이 질문의 전환 하나만으로도 책은 제 역할을 충분히 한 셈이다.

 

삶의 문제를 빨리 없애야 할 것으로만 여겨왔다면, 일독을 권해드린다. 문제를 제거하기보다 어떤 균형이 무너졌는지를 묻게 만든다. 긍정, 끌어당김 같은 말에 지쳐 있거나 왜 자꾸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는지 설명이 필요했던 사람에게도 유효하다. “안 되는 이유를 도덕적 탓이 아니라 구조로 보여준다. 음양, 심리학의 그림자, 종교적 통합의 언어를 한 번에 엮어 읽어보고 싶은 독자라면 특히 흥미롭게 따라갈 수 있다. , 이것을 정답이 아니라 렌즈로 들여다볼 때 가장 빛난다.

 

#보이지않는질서 #터닝페이퍼 #뤼디거달케 #대립 #공명 #인생법칙 #통찰 #인생이왜이래 #음양 #구조 #심리 #책추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킬 유어 달링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2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피터 스완슨의 킬 유어 달링은 스릴러가 독자를 붙잡는 가장 익숙한 갈고리를 과감하게 내려놓는다. 보통의 추리소설은 누가 죽였는가라는 수수께끼를 끝까지 숨기며 페이지를 넘기게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반대로 첫 장부터 독자가 이미 결론을 알고 출발하는 구조를 택한다. 그래서 독자를 몰아붙이는 질문도 바뀐다. “범인은 누구인가가 아니라, “왜 그렇게 되었는가”. 정체를 숨기는 대신 동기의 층위를 끝까지 파고드는 방식은 독자를 속이려는 반전보다 더 집요하고 더 불편한 방식으로 심리를 건드린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이 작품을 관계의 소설로 읽히게 만드는 힘이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50대 부부 작가인 톰과 웬디 그레이브스가 있다. 겉으로 보자면 둘은 안정된 삶을 사는 중상류층 부부처럼 보인다. 집도 있고, 직업도 있고, 사회적으로도 문제없어 보이는외형이 있다. 하지만 소설은 그 외형이 얼마나 쉽게 균열을 숨기는지, 그리고 그 균열이 얼마나 오래전에 시작되는지 냉정하게 보여준다. 남편 톰은 술에 무너진 채 살아가고, 아내 웬디는 그의 말과 표정을 늘 경계한다. 둘 사이에 대화는 오가지만 진짜 정담은 없고, 함께 사는 시간이 있지만 서로에게 도달하지 못하는 고립이 있다. 이 부부의 공기는 싸움보다는 냉각에 가깝고, 그래서 더 현실적이다. 큰 사건이 없어도 이미 무너지고 있다는 느낌, 그 질식감을 이 작품은 절묘하게 포착한다.

 

그러다 웬디는 남편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중요한 건 그 결심이 어떤 격정적인 선언이나 거대한 광기로 포장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 장면이 가장 섬뜩한 이유는, 살인이 특별한 악이 아니라 일상의 연장선처럼 묘사되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악마가 씌어서가 아니라 지겨움과 혐오가 조금씩 축적된 결과로 살의가 만들어진다. 이 작품이 노리는 심리 스릴러의 핵심은 바로 여기다. 충격적인 장면 자체보다 그 장면이 만들어지는 과정의 자연스러움이 더 무섭다.

 

이 소설이 현실감을 극대화하는 방식 중 하나는 배경 장치다. 웬디가 톰을 밀어 떨어뜨리는 장소는 워싱턴 D.C. 조지타운의 엑소시스트 계단이다. 영화로 유명한 이 계단은 길고 가파르며, 소설 속에서는 단순한 랜드마크가 아니라 살인을 가능하게 만드는 합리적 조건이 된다. 집 안 계단으로는 부족했던 길이가 더 긴 계단을 향한 계산으로 바뀌는 순간, 살인은 충동이 아니라 계획으로 조립된다. 독자는 그 조립 과정이 놀라울 만큼 매끄럽게 이어지는 것을 보며 불편해진다. 그리고 그 불편함은 이 작품의 성취로 읽힌다. “이런 일이 소설이라서 가능한 게 아니라, 현실에서도 이렇게 만들어질 수 있겠다라는 감각을 남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진짜 핵심 장치는 공간보다 시간이다. 소설은 부부의 결혼 생활을 역순으로 들려준다. 파국의 현재에서 시작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며 둘의 관계가 어떤 경로로 망가졌는지를 하나씩 벗겨낸다. 보통의 서사는 시간을 쌓아 올리며 인물의 변화와 원인을 설명한다. 반면, 이 소설은 시간을 거꾸로 흐르게 하면서 현재의 균열이 어떤 과거를 전제하고 있었는지 보여준다. 말하자면 시간을 쌓는대신 벗기는서사다. 독자는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를 미래에서 과거로 추적한다. 그 과정에서 현재의 혐오가 과거의 사랑과 닿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고, 그래서 더 씁쓸하고 더 오래 남는다. 사랑이 단숨에 증오로 바뀐 게 아니라 사랑의 어떤 성분들이 서서히 변질되며 파국이 되었다는 걸 역순이 오히려 선명하게 드러낸다.

 

게다가 톰과 웬디가 작가라는 설정은 단순한 직업 배경이 아니라 관계를 좀먹는 방식 그 자체로 기능한다. 톰은 위대한 소설을 쓰고 싶어 하지만 초고 앞에서 자멸한다. 완성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의 자존심을 무너뜨리고, 그 무너짐은 술과 자기혐오로 연결된다. 웬디는 시인으로서 비교적 담담해 보이지만 그 담담함 안에는 현실을 계산하고 견딜 줄 아는 힘이 있다. 글쓰기는 이들에게 직업이면서 자존심이고, 동시에 수치심의 근원이기도 하다. 특히 톰의 미완성과 좌절이 결혼의 균열과 맞물리면서 부부 관계는 단순한 애정 문제를 넘어 자존감과 욕망, 실패의 감각이 뒤엉킨 전장이 된다. 이 설정 덕분에 독자는 두 사람이 그냥 성격이 안 맞아서망가진 것이 아니라 각자의 결핍이 어떻게 서로를 파괴하는 구조로 굳어졌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게 된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가장 오래 남는 주제는 결국 비밀이다. 두 사람을 오래 붙들어온 것은 함께 공유한 비밀이지만, 결국 두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은 각자가 따로 감춘 비밀이다. 연애 초기에 우리는 서로에게 거짓말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있었다고 해도 삶이 진행될수록 숨겨야 할 것들은 늘어나는 법이다. 문제는 숨김이 단순한 오해나 착각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구조 자체를 바꿔 버린다는 점이다. 죄책감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그것을 혼자 감당하려 드는 순간 관계는 고립된다. 결국 파탄은 어느 날 갑자기 터지는 사건이 아니라 말하지 않은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만든 결과라는 사실을 이 작품은 차분하게 증명한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의 살인은 클라이맥스라기보다 결과물에 가깝고, 독자가 진짜로 목격하게 되는 공포는 죽음이 아니라 사랑의 변질 과정이다.

 

물론 이 작품은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역순 서사는 독자에게 강한 몰입을 주지만 동시에 어떤 독자에게는 템포가 느리거나 반복적으로 느껴질 우려도 있다. 또한 톰과 웬디는 사람 냄새가 난다기보다는 차갑고 불편한 현실감을 가진 인물에 가깝다. 그런데 이 점이 오히려 이 작품의 장점일 수도 있다. 스릴러가 멋진 캐릭터에 기대어 달리는 순간, 관계의 붕괴가 종종 낭만화되거나 과장되기 쉽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 길을 택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 주변에서 충분히 볼 수 있을 법한, 그래서 더 불편한 민낯을 보여준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이 아니라 정말 있을 법한 인물이라는 사실이 이 작품의 온도를 낮추고, 그 낮은 온도가 끝까지 서늘함을 유지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는 질문은 단순하면서 강렬하다. “끝까지 솔직했다면, 우리는 달라질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은 소설 속 부부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독자는 읽는 내내 저 부부를 보다가, 어느 순간 우리의 관계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우리는 정말 서로에게 솔직한가, 아니면 솔직하다고 믿고 싶은가. 우리는 말하지 않은 것들을 언젠가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말하지 못한 채 관계의 구조를 바꿔 버릴까. 그래서 이 작품은 읽는 동안의 재미도 있지만 읽고 난 뒤의 잔상이 더 강하다.

 

결론적으로 이 작품은 반전으로 독자를 속이기보다 역행하는 시간과 심리의 층위로 독자를 끌고 가는 소설이다. 살인의 충격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랑이 변질되는 과정이며, 죽음보다 더 불편한 것은 함께 살면서도 서로에게 닿지 못하는 고립이다. 스릴러의 외피를 썼지만 결국 이 작품이 보여주는 것은 범죄보다 관계. “범인이 누구냐가 아니라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냐에 매달리게 만드는 흡인력, 그리고 비밀과 죄책감이 관계를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서늘하게 보여주는 힘 덕분에 심리 스릴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다. 특히 결혼/연애의 균열, 말하지 않은 것들의 무게, 관계의 피로가 폭발로 바뀌는 과정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이 소설은 꽤 오래 마음에 남을 것이다.

 

#피터스완슨 #킬유어달링 #가장사랑하는사람을죽일때가장완벽해진다 #부부의세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킬 유어 달링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2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행하는 시간과 심리의 층위로 독자를 끌고 가는 소설. 호불호 있을 듯.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교육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64
게리 토머스 지음, 이우진.김자운 옮김 / 교유서가 / 202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국의 교육학자 게리 토머스는 교사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교육을 연구해온 학자다. 버밍엄대학교 명예교수로 소개되기도 하는 그는 포용교육과 특수교육을 다루는 한편, “교육 연구가 무엇을 측정하고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같은 방법론적 질문까지 함께 붙들어 왔다. 교육을 이상론으로만 띄우지 않고, 제도와 현실의 문제로 끝까지 끌어안아 온 사람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그래서 그의 글에는 현장을 아는 사람 특유의 감각이 있다. 교육을 말하되 학교를 미화하지 않고, 학교를 비판하되 교육 자체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 책은 얇고 빠르게 읽히지만 던지는 질문은 묵직하다. 책이 집요하게 붙드는 핵심은 뒤표지에 적힌 한 문장으로 요약될 듯하다. “학교는 답을 전달하지만, 교육은 질문하게 한다.” 우리는 시험과 경쟁, 성과를 교육이라고 부르며 익숙해져 왔다. 하지만 그 과정이 정말 사람을 키우는 교육인지, 아니면 줄 세우는 선별 장치인지 스스로 묻는 일에는 서툴다. 저자는 바로 그 지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교육은 왜 지금처럼 변했는가, 학교는 왜 좀처럼 변하지 않는가, 진보적 교육은 왜 번번이 실패하거나 왜곡되는가, 교육은 결국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리고 더 날카롭게는 나의 앎이 내 삶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독자 앞에 내놓는다.

 

이 책의 힘은 교육을 좁은 의미의 수업 기술로 축소하지 않는 데 있다. 고대 그리스부터 21세기 교육정책의 흐름까지 이어지는 긴 역사 속에서 교육의 두 흐름, 형식주의 교육진보주의 교육의 긴장과 충돌로 문제를 풀어낸다. 형식주의가 지식과 기술의 효율적 전수를 목표로 하며 교사 중심 수업, 시험, 규율을 중시한다면, 진보주의는 아이의 잠재력과 발견, 비판적 사고를 교육의 중심에 놓고 아동 중심·경험 중심의 학습을 강조한다. 문제는 학교가 이 둘을 충분히 소화해 내지 못한 채 어설프게 섞어 운영해 왔다는 점이다. 심리학의 성과가 진보적 교육에 힘을 실어줬음에도, 그 아이디어는 종종 표면만 차용되거나 입시 현실 속에서 활동만 남은 형식으로 굳어지기 쉽다. 반면 학교의 뼈대는 놀랄 만큼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토머스의 비판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학교가 왜 더 시험에, 더 측정에, 더 경쟁에 포획되었는지까지 파고든다. 그는 심리측정학과 지능검사의 역사, 그리고 고부담 시험이 교육을 지배할 때 벌어지는 왜곡을 짚는다. 지능을 타고난 특성으로 보고 선별을 정당화했던 논리가 어떻게 교육 제도 안에 구조적인 분리와 차별을 고착시키는지, 그리고 정책 환경 속에서 학교가 성과 중심의 논리로 재편될 때 시험 결과가 학교의 평가와 생존을 결정하는 절대 척도가 되어 버리는지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그 결과 교육은 질문을 키우기보다 정답을 빨리 찾는 훈련으로, 성찰을 넓히기보다 성과를 증명하는 경쟁으로 쉽게 왜곡된다.

 

이 대목에서 책은 한국 독자에게 특히 불편하고도 정확한 거울이 된다. 우리는 아이들을 왜 이렇게 치열한 학습으로 내모는가. 그 성취는 과연 진정한 성공인가. 그리고 그 성과를 위해 어떤 대가를 치르고 있는가. 우리 교실에서 점수 따기는 교육의 목적을 밀어내고 교육의 언어 자체를 바꿔버렸다. 배움은 성장의 경험이라기보다 통과의례가 되고, 이해는 사치가 되며, 학생은 한 사람이라기보다 등급과 백분위로 설명되는 존재가 된다. 이 구조가 더 단단해지는 방식은 교실 곳곳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수업이 끝나고 남는 질문보다 정답률오답 유형이 먼저 정리된다. 사고의 과정은 짧게 압축되고 요령과 속도가 실력처럼 취급된다. 수행평가조차 배움을 위한 과정이라기보다 어떻게 하면 감점 없이 점수를 받을 수 있는가로 재해석되기 쉽다. 루브릭은 성찰을 돕는 도구가 아니라 안전한 점수 확보를 위한 점검표가 되고, 발표·토론은 생각을 확장하는 장이 아니라 말문이 막히면 손해라는 불안 속에서 형식만 남는다. 내신과 모의고사, 비교할 수 있는 수치가 곧 능력이라는 신호가 반복될수록 학생은 더 빨리, 더 정확히 맞히는 쪽으로 몸을 맞추게 된다. 사교육의 존재 방식도 이 왜곡을 강화한다. 학교의 바깥이 아니라 학교의 뒤편을 떠받치는 것처럼 굳어지면서 학교는 교육하는 곳이라기보다 평가의 관문으로 인식되기 쉽다. 학원은 학교 진도를 앞서가며 미리 배워 두면 수업이 편해진다는 논리를 만들고, 컨설팅과 자료 시장은 평가에 최적화된 전략을 거래한다. 그 결과 학교는 더 조심스러워지고 교사는 더 많은 기준표와 증빙 속에서 움직이며 학생은 더 촘촘한 경쟁의 레일 위에 올라선다. 공정과 효율을 말하는 관행이 실은 교육을 교육이 아니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장치가 될 수 있다는 경고가 그래서 더 크게 들린다.

 

그럼에도 저자가 인상적인 이유는 절망을 진단하는 데서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학교가 있다고 해서 그곳에서 반드시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라는 불편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교육자들이 학교를 더 나은 배움의 터전으로 만들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 왔다는 점 또한 놓치지 않는다. 더 나아가 학교라는 제도 자체를 근본적으로 의심했던 이반 일리치의 탈학교론, 프레이리의 문제제기 중심의 대안적 교육철학 같은 논의를 불러오며 학교 밖의 배움가능성까지 함께 상상하게 한다. 코로나19 이후 확산된 혼합 교육과 학습 네트워크 같은 흐름도 단순한 기술 낙관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학교의 보수성을 넘어설 실마리를 찾으려는 시도로 읽힌다. 결국 그는 교육의 목표를 다시 묻는다. 기업과 조직에 잘 순응하는 인재를 길러내는 것이 교육의 목표여야 하는가. 아니면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창의성과 상상력을 발휘하며,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해 변화와 정의를 이끌 시민을 길러내는 것이어야 하는가. 혹은 우리는 이미 해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현실에 발이 묶여 이도 저도 못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이 책을 좋게 본 것은, 교육을 둘러싼 논쟁을 누가 옳다로 단순화하지 않고 우리가 교육이라고 부르는 것이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끝까지 묻게 만들기 때문이다. 다만 얇은 책의 숙명처럼 결론이 더 단단하게 정리되어 닫히지못하고 다소 급히 멈춘 듯한 느낌이 남을 수도 있다. 더 광범위한 사회학적 논의를 기대한 독자라면 갈증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책은 한국의 교육 현실을 생각하는 교사와 학생, 그리고 부모에게 유효한 질문을 건넨다. 점수와 줄 세우기가 너무 자연스러워져 교육의 목적을 말하는 순간조차 어색해진 지금, 이 책은 우리를 다시 질문의 자리로 돌려놓는다. 교실은 매일 답을 요구하지만, 교육은 매일 질문을 되찾는 일이라는 걸 이 얇은 책이 조용히 그러나 야무지게 일깨워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