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동물이다
마르쿠스 가브리엘 지음, 전대호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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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이름이 낯설지 않게 느껴진 이유를 떠올려 보니, 전작 어두운 시대에도 도덕은 진보한다를 통해 이미 한 차례 만난 적이 있었다. 이 책은 인간이 과연 동물인가라는 흔하지만 매우 오래된 질문으로 시작한다. 인간은 신체적으로 보면 분명 동물과 다르지 않은 존재이다. 그러나 동시에 생각하고, 판단하고, 세상을 이해하려 애쓰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인간의 마음, 즉 정신은 도대체 어디에 속하는 것이냐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뒤따른다. 저자는 이 질문을 철학자들만의 난해한 사유 실험으로 남겨 두지 않는다. 오히려 기술은 빠르게 발전하는데 책임감은 그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는 현실, 자연이 훼손되는 상황,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는 극단적 갈등과 같은 동시대의 문제들과 이 질문을 밀접하게 연결한다. 결국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자연 속에서 어떤 존재인지부터 다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출발점이다.

 

먼저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사용하는 동물이라는 개념부터 다시 검토한다. 우리는 흔히 인간은 동물이지만 특별한 점도 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동물이라는 범주 자체가 이미 인간이 만들어낸 분류라고 지적한다. 즉 인간과 동물의 세계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이 과연 타당한지 의심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몸을 바라보며 자연과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그 사실을 불편하고 낯설게 받아들인다. 이 어색함을 정리하기 위해 우리는 동물적인 것이라는 이름을 붙여 그것을 떼어 놓으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오히려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한다. 저자는 내 안의 동물성을 분리해 따로 바라보려는 시도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이미 생명의 세계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을 자연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 제기는 곧바로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인간을 자연의 바깥에 세워 두고 자연을 정복하거나 관리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는 태도 자체가 위험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지구를 마음껏 사용해도 되는 자원 창고로 여기는 생각이 깔려 있다면, 자연은 점점 언제든 이용 가능한 대상으로만 인식된다. 그 결과 자원을 무분별하게 소비하고, 살아 있는 세계 전체를 인간의 의지대로 조정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영화 아바타에서 판도라 행성을 착취의 대상으로 여기는 RDA(Resource Development Administration)라는 초국적 자원 개발 기업을 생각해보라.) 저자가 보기에 이는 단순한 환경 문제를 넘어 인간이 자신을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분리된 사고의 결과이다. 자연을 외부의 물건처럼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그 자연 속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 대가는 감염병, 생태계 붕괴, 기후 위기와 같은 형태로 되돌아온다는 것이 저자의 핵심 주장이다.

 

책에서 또 하나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주제는 비이성적인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여야 한다고 말하지만, 저자는 인간이 본능이나 감정, 편견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이러한 요소들은 과거의 생존 환경 속에서 형성된 장치로서 위기 상황에서 빠르게 반응하도록 돕는 역할을 해 왔다. 문제는 이러한 비이성적 요소가 언제든 다시 표면으로 드러날 수 있으며 실제로 누군가가 이를 이용해 사람들을 조종할 수 있다는 점이다. 포퓰리스트나 극단주의자, 음모론을 퍼뜨리는 이들뿐 아니라 광고나 홍보와 같은 영역에서도 인간의 감정과 편견을 자극하는 기술은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저자가 보기에 인간 사회에는 애초부터 비이성적인 요소가 섞여 있다. 그렇다면 도덕적 진보란 비이성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이해하고 그것이 악용되지 않도록 대비하는 방향이어야 한다.

 

과학에 대한 저자의 시선 역시 인상적이다. 거짓 정보와 가짜뉴스가 넘쳐나는 시대에 과학을 믿자라는 구호는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 역시 조심해야 한다고 말한다. 과학은 하나의 통일된 정답 체계가 아니라 서로 다른 방법과 관점을 지닌 여러 학문이 각자의 방식으로 세계를 탐구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은 단수라기보다 복수에 가깝고, 더 중요한 것은 과학이 하나의 태도라는 점이다. 과학은 끊임없이 의심하고 검증하며, 지금 알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음을 인정하는 데서 힘을 얻는다. 따라서 과학이 말했으니 따르라는 식의 권위주의는 오히려 과학 정신과 어긋난다. 소크라테스를 예로 들며, 진정한 지성은 모든 것을 안다고 주장하는 태도가 아니라 자신이 모르는 것이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논의는 자연의 복잡성에 대한 인식으로 확장된다. 자연은 인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며,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과학적 모델은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단순화된 지도와 같다. 지도는 유용하지만 그 자체가 현실 전체를 대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종종 이 지도를 현실 그 자체로 착각하고 이제는 다 알았다고 믿는다. 그 결과 어떤 부작용이 발생할지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자연을 바꾸기 시작한다. 비료와 농약의 과도한 사용, 무분별한 벌목, 하천 정비, 과도한 개발과 끝없는 소비는 이러한 착각의 산물이다. 저자는 이 방식이 곤충 감소, 항생제 내성균의 확산, 숲과 강의 약화, 그리고 궁극적으로 기후 위기로 이어졌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모르는 것이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윤리, 즉 조심함과 겸손, 배려를 중심에 둔 윤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욕망을 내려놓을수록 오히려 더 책임감 있는 행동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인간을 시장 속에서 이익만을 계산하는 존재로 보는 시각 또한 강하게 비판한다. 인간을 결국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존재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인간의 모습을 지나치게 단순화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본래 혼자 존재할 수 없으며, 사회 속에서 타인과 함께 살아가며 형성된 존재이다. 우리가 누리는 문명, 즉 과학과 도시, 도로와 농업은 어느 한 개인의 힘만으로는 결코 만들어질 수 없다. 수많은 사람의 협력과 연대가 전제되어야만 가능하다. 따라서 저자가 강조하는 핵심은 인간다움은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일 때 비로소 성립한다는 점이다. 이 관점에서 도덕은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 공동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이자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토대이다. 인간을 효율과 이익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설명은 인간을 지나치게 속물적으로 만드는 해석이라는 것이다.

 

양심과 도덕에 대해서도 저자는 이상화된 관점을 취하지 않는다. 양심이 있다고 해서 언제나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양심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고, 망설이게 하며, 자신을 의심하게 만든다. 그러나 바로 그 불편함이 중요하다. 그 불편함이 있기에 우리는 섣불리 밀어붙이지 않고, 한 번 더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매일 접하는 뉴스 속 사건들 또한 같은 메시지를 던진다. 인간은 신이 아니며, 모든 것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도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할 때, 그 결과는 더 큰 문제로 되돌아온다.

 

결국 이 책을 통해 드러나는 저자의 결론은 비교적 분명하다. 인간과 자연을 단순히 구분하고 인간을 위에, 자연을 아래에 두는 사고방식은 위험하다. 과학을 절대적 정답을 제시하는 권위로 환원하는 태도 또한 위험하다. 기술 발전을 도덕과 분리한 채 가능하니 실행하면 된다는 식으로 밀어붙이는 습관은 더욱 위험하다. 저자가 말하는 도덕적 진보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 안에 속한 존재임을 제대로 인정하고 그에 걸맞게 기술과 사회를 보다 신중하고 책임감 있게 다루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는 주인이 아니라 생명의 세계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구성원이며, 그렇기에 더 겸손하게 사고하고 더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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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 난 영혼
조지 엘리엇 지음, 박희원 옮김, 김선옥 해설 / 아고라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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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과 부대끼며 살다 보면, 정작 사람을 안다는 감각이 오히려 흐릿해질 때가 있다. 말은 자주 섞지만 속은 쉽게 드러내지 않고, 관계는 이어져도 일정한 거리가 유지된다. 때로는 너무 정확히 알지 않으려는 태도, 적당히 모르는 척하는 기술이 관계를 굴리는 윤활유가 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조지 엘리엇의 벗겨진 베일(The Lifted Veil)(1859)제이컵 형(Brother Jacob)(1864)을 한 권으로 묶어 읽는 경험은 낯설지 않다. 두 작품은 겉으로는 결이 달라 보이지만 끝내 한 가지 질문으로 모인다. 진실을 너무 많이 알아도 사람이 부서지고, 진실을 끝까지 피하려 해도 사람이 망가진다는 것이다. 문제는 진실이냐 거짓이냐의 선택이 아니라 그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고 버티느냐에 있다.

 

벗겨진 베일에서 베일은 감춰진 비밀을 덮는 천이라기보다 사람 사이를 버티게 하는 얇은 막, 관계의 완충재에 가깝다. 누군가를 완전히 알 필요도 없고, 끝까지 알아내는 일이 늘 좋지만은 않다. 우리는 대개 상대의 표정과 말투, 말의 결을 보며 아마 이쯤이겠지하며 선을 긋고, 그 선 덕분에 관계는 굴러가며 생활은 유지된다. 주인공 래티머는 어느 순간부터 남의 마음이 읽히는 듯한 능력을 갖게 되는데, 그 능력은 특별함이 아니라 사람들 속에서 그를 고립시키는 재난으로 작동한다. 래티머가 보게 되는 것은 영웅적인 진실이나 숭고한 인간성의 핵심이 아니라 상대가 계산하는 순간, 무심한 위선, 자신을 합리화하는 습관, 남을 깎아내리면서도 죄책감은 최소화하려는 마음, 사소하지만 정확히 날카로운 잔인함 같은 것들이다. 이런 것들은 특별히 악한 누군가의 전유물이 아니라 누구나 조금씩 가지고 있는 것이기에 더 무섭고, 그래서 더 피하기 어렵다. 래티머의 세계에는 여백이 없다. 이해는 보통 저 사람도 그럴 사정이 있겠지같은 상상력과 여백 위에서 자라지만, 그는 늘 정답을 먼저 본다. 그 결과 관계는 깊어지지 않고 오히려 부서지며,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가능성은 점점 좁아진다.

 

이 작품이 불편한 이유는 우리가 기대어 살던 문장을 정면에서 흔들기 때문이다. “진실을 알면 자유로워진다는 말은 멋있지만, 실제 삶에서 진실은 해방보다 피로와 마비로 이어질 때가 많다. 래티머가 더 많이 알게 됨으로 얻는 것은 해방이 아니라 무력감이다. 남의 속마음을 알수록 친밀해지는 게 아니라 견디기 어려워지고, 미래를 어렴풋이 예감할수록 선택지가 좁아지고 선택의 의미가 사라진다. 결국 엘리엇은 진실은 언제나 선물인가, 혹시 어떤 진실은 알지 않음덕분에 인간을 인간답게 붙들어 두는 것은 아닌가를 묻는다.

 

반면 제이컵 형은 분위기가 훨씬 가볍고 현실적인데 그래서 더 씁쓸하다. 주인공 데이비드 포는 더 나은 삶을 원하지만 그 욕망을 실현하는 방식이 문제다. 그는 거짓으로 위장하고 자기에게 유리한 이야기로 삶을 꾸미는 데 익숙해진다. 여기서 거짓은 거창한 악행이 아니라 이 정도는 괜찮겠지라고 넘기기 쉬운 작은 타협에서 시작한다. 한두 번의 핑계, 체면을 위한 과장, 들키지 않을 것 같은 편법 같은 것들이 반복되면 습관이 되고, 습관은 곧 성격이 된다. 이 작품에서 삶의 고장은 폭발처럼 한 번에 터지는 사고가 아니라 천천히 녹이 슬어 무너지는 방식의 붕괴다. 무너지는 순간은 극적이지 않고 어느 날 문득 이게 내 삶이었나?” 하고 돌아봤을 때 이미 길이 너무 멀어져 있는 식으로 찾아온다.

 

제목 속 제이컵 형은 데이비드가 지우고 싶은 과거이자 숨겨두고 싶은 진실이며, 동시에 결국 돌아오는 부도수표다. 우리는 종종 과거를 정리했다고 믿고 싶어 한다. 환경을 바꾸고 관계를 끊고 마음가짐을 새로 하면 정말 새사람이 될 것 같지만, 정리했다고 사라지는 것은 생각보다 적다. 특히 내가 만든 균열은 내가 어디로 가든 따라오고, 이 작품이 보여주는 응보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벌이 아니라 자기기만이 내 삶을 안쪽에서부터 무너뜨리는 과정이다. 거짓은 당장 숨을 쉬게 해주지만 숨을 쉬는 방식 자체를 바꿔 버리며, 어느 순간에는 진실을 말할 능력뿐 아니라 진실을 감당할 체력까지 사라지게 만든다.

 

두 작품을 함께 읽을 때 더 선명해지는 것은 진실이 한 가지 얼굴만 가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래티머에게 진실은 빛이 아니라 소음이며, 남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통찰이라기보다 침입에 가깝다. 반대로 데이비드에게 거짓은 단순한 전략이 아니라 생활 방식이고, 자기기만은 잠깐 버티게 해주는 것 같지만 결국 삶 전체를 좀먹는 독이 된다. 하나는 과잉, 다른 하나는 회피로 망가진다. 방향은 반대인데 결과는 닮았다. 래티머는 타인의 마음을 너무 많이 알아서 함께 있을 수 없게 되고, 데이비드는 자신의 삶을 너무 많이 꾸며 결국 자기 자신과도 함께 있을 수 없게 된다.

 

여기서 조지 엘리엇이 인상적인 지점은 어느 한쪽만 손쉽게 꾸짖지 않는다는 데 있다. “진실만이 구원이다라고도 하지 않고, “모른 척하는 게 현명하다라고도 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이 필연적으로 진실과 착각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그 균형이 깨질 때 삶이 어떻게 작동 불능이 되는지를 도덕 교훈이 아니라 인간의 작동 원리처럼 차분히 드러낸다. 그래서 이 묶음이 남기는 질문은 단순하지만 무겁다. 진실을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겠느냐, 혹은 거짓으로 어디까지 버틸 수 있겠느냐를 묻는다. 우리는 이미 어느 정도의 진실을 모른 척하며 살고, 어느 정도의 거짓을 현실이라 부르며 버틴다. 문제는 그 선이 어디인지, 그리고 그 선이 무너지는 순간이 언제인지이다. 엘리엇의 결정타는 그 무너짐이 대개 요란한 폭발이 아니라 조용한 붕괴로 온다는 점을 끝까지 따라가게 만든다는 데 있다. 작품을 읽고 난 뒤에도 화려한 충격이 아니라 오래 지속되는 찝찝함이 남는다. “나는 지금 괜찮은가?”라는 질문이 너무 일상적인 얼굴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한달한권할만한데 #아고라 #독서모임 #조지엘리엇 #영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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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질서 - 의도를 벗어난 모든 현상에 관한 우주적 대답
뤼디거 달케 지음, 송소민 옮김 / 터닝페이지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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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겉으로는 운명과 삶의 법칙을 이야기하지만, 읽고 나면 머리에 남는 질문은 의외로 단순하다. 우리는 삶의 문제를 제거하려다 오히려 문제를 키우고 있는 건 아닐까? 심리요법 의사로 오랜 시간 사람들을 가까이서 지켜본 저자는, 운명을 속이려는 시도가 끝내 성공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신화·역사·종교의 사례까지 끌어오며 마지막 총결산에 이르면 결국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는다는 결론을 제시한다. 거창한 선언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책을 따라가다 보면 그 말이 신비주의적 위안이라기보다 삶의 패턴을 보는 관찰의 언어로 다가온다. 이 책이 말하는 질서는 우리가 무시한다고 사라지지 않으며, 회피할수록 다른 모습으로 되돌아오는 그 무엇이다.

 

읽는 동안 동양의 음양(陰陽)을 떠올리게 된다. 이 책의 세계는 선악을 재단하는 법정보다는 서로 반대되는 힘이 긴장을 이루며 균형을 만들어내는 무대에 가깝기 때문이다. 음양은 좋은 것/나쁜 것을 가르는 도덕의 선이 아니라 낮과 밤처럼 상반된 요소가 함께 있어야 세계가 굴러간다는 감각이다. 책이 말하는 대립의 법칙도 바로 그 지점에 닿아 있다. 문제는 대립이 존재해서가 아니라, 대립을 부정하거나 한쪽만 고집할 때 더 비틀어진다.

 

큰 것이 없다면 작은 것을 생각할 수 없고, 낮은 게 없으면 높은 것을 생각할 수 없다. 심지어 악이 없다면 선도 의미를 잃는다. 상대주의의 가벼운 구호라기보다 현실의 작동 방식에 대한 냉정한 진술로 읽힌다. 우리는 대립을 처치해야 할 장애물로 간주하곤 하지만 저자가 보기에 대립은 하나의 틀이다. 한쪽을 지워버리려는 순간 다른 한쪽도 함께 흔들리고, 그 흔들림은 결국 더 큰 혼란으로 돌아온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대립을 도덕의 문제로만 좁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음양에서 음이 양을 방해하는 악이 아니듯, 양 또한 음을 멸해야 하는 선이 아니다. 둘은 반대이면서도 서로를 떠받친다. 그래서 삶의 문제를 한쪽을 없애는 게임으로 만들면 해결이 아니라 더 큰 대가가 따라온다고 경고한다. 테러리스트를 제압하기 위해 더 큰 폭력이 요구되는 역설 같은 장면들이 여기서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결론으로 이어진다.

 

이 책이 반복해서 겨누는 대상은 문제는 없애면 끝난다는 태도다. 싸워서 제거하려 할수록 문제가 오히려 늘 수 있다고 말한다. 한 극을 제거하려는 집착은 그 극을 강화하고, 밀려난 것은 그림자가 되어 더 위험한 영역으로 숨어든다는 것이다. 이 설명이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것이 거대한 형이상학이 아니라 우리가 자주 겪는 심리적 경험을 정확히 겨냥하기 때문이다. 억누르면 커지고, 덮으면 돌아온다. 그러니 저자의 조언은 없애라가 아니라 보라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책이 말하는 질서는 억압적 규칙이라기보다 회피할수록 더 강해지는 학습의 구조처럼 느껴진다.


저자는 항상 빛에만 몰두하는 사람의 영혼은 반대로 움직여 평형을 유지하려 한다고 말한다. 이 문장이 주는 날카로움은 그것이 단순한 비관이 아니라 긍정 강박의 함정을 정확히 찌른다는 데 있다. 우리는 종종 밝은 것만 좋은 것이라고 믿으며 어둠을 억지로 밀어낸다. 그러나 그 결과는 자주 예상과 다르다. 억눌린 감정이 폭발하거나, 겉으로는 긍정적인데 속은 불안으로 잠식되거나, ‘착해야 한다는 강박이 오히려 공격성을 낳는 식이다. 책이 말하는 그림자는 이런 방식으로 독자를 붙잡는다. “긍정적으로만 생각하라는 쉬운 처방을 주는 대신 긍정만 고집할 때 균형이 깨지는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결국 필요한 것은 빛을 더 밝히는 일이 아니라 어둠까지 포함해 전체를 읽는 능력이라는 결론으로 수렴한다.

 

저자는 공명의 법칙을 통해 어떤 일에 충분히 준비되었을 때 관련된 사건과 사람을 연달아 만나게 되는 경험을 설명한다. <시크릿>에서 말하던 끌어당김과 닮았지만 이 책은 그 달콤한 결론에 머무르지 않는다. 공명은 작동하되 그 위에 대립의 법칙이 더 강하게 작동할 수 있다. 아름다움만 원하는 사람에게 자각하지 못한 그림자 문제가 균형을 맞추기 위해 개입할 수 있다. 이 대목이 흥미로운 이유는 공명을 소원 성취의 언어에서 꺼내 성숙의 언어로 옮겨놓기 때문이다. “원하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가 아니라 원하는 것이 불러올 반대편까지 보라고 한다. 왜 공명이 안 되는지 불만스럽다면 그건 공명이 멈춘 게 아니라 내가 외면하던 반대편이 균형을 잡으러 온 것이다. 독자는 달콤한 위로보다 정확한 조언을 얻는다.


또 하나의 축은 시작이다. 저자는 시작에 모든 것이 있다고 말하며 씨앗과 알의 비유를 든다. 이 말은 첫 단추를 강조하는 교훈으로도 읽히지만, 책의 흐름 안에서는 더 넓다. 시작은 단지 출발점이 아니라 이후에 마주할 반작용까지 포함한 구조의 설계처럼 다가온다. 태극 문양에서 한쪽 안에 다른 쪽의 씨앗이 들어 있듯, 처음부터 완전히 순수한 한쪽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런 일이 생겼지?”라고 묻기 전에 처음에 무엇을 설정했지?”를 먼저 돌아봐야 한다. 책은 그 질문을 끈질기게 요구한다. 시작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나중에 생기는 문제를 우연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저자는 그것을 질서라고 부른다.

 

심층심리를 더 깊이 들어가면 종교의 세계가 나오고, 결국 선과 악 같은 대립으로 수렴한다. 그런데 그 끝에서 다시 대립을 넘어서는 가능성이 암시된다. 최종적으로는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종교의 약속처럼 삶의 법칙 역시 단일성으로 가려는 경향을 보인다. 독자에 따라 과감한 도약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책 전체를 관통하는 맥락대립을 부정하지 말고 의식 위로 올려라에서는 자연스러운 결론이기도 하다. 그래서 저자는 삶을 학교에 비유한다. 운명의 노크를 무시하면 더 세게 두드리고, 계속 무시하면 문을 부술 정도로 강해진다. 결국 배우는 방식은 두 가지다. 자발적으로 배우거나, 억지로 배우거나. 삶이 잔인해서가 아니라 회피는 더 큰 수업료를 요구한다는 뜻으로 이 비유가 남는다.

 

이 책의 장점은 삶을 단순한 낙관으로 정리하지 않는 데 있다. “좋게 생각하면 다 된다로 끝내지 않고, 왜 그런 말이 자주 실패하는지(그림자, 반작용, 대립)를 구조로 설명하려 한다. 특히 공명을 말하면서도 그 위에 더 큰 법칙이 있다고 주장하는 대목은 낙관의 피로를 느낀 독자에게 꽤 신선한 관점을 준다. 다만 책이 제시하는 법칙들은 어떤 사람에게는 삶을 정리해 주는 틀이 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 틀이 지나치게 커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 모든 문제의 정답이라기보다, 내 삶에서 반복되는 패턴을 비추는 거울로 쓰는 편이 정신 건강에 더 이롭다. 음양이 세계를 완벽히 해석하는 공식이라기보다 변화와 균형을 읽는 렌즈인 것처럼.

 

결국 이 책이 독자에게 건네는 말은 하나로 모인다. 삶은 문제 제거의 연속이 아니라 대립을 인식하고 균형을 회복하는 과정이라는 것. 우리가 미워하거나 두려워하던 반대편은 불청객이 아니라 균형이 무너졌다는 신호이자 배움을 재촉하는 종소리일지 모른다. 운명을 신비화하기보다 삶을 더 냉정하고 정직하게 보라고 요구한다. 빛만 붙잡지 말고 어둠도 함께 보라고, 원하는 것만 말하지 말고 그 뒤에 따라오는 반대편까지 함께 감당하라고. 그래서 책을 덮고 나면 질문이 달라진다. “왜 내 삶은 늘 같은 자리에서 걸려 넘어지는가내가 회피해 온 균형은 무엇이었나로 바뀐다. 이 질문의 전환 하나만으로도 책은 제 역할을 충분히 한 셈이다.

 

삶의 문제를 빨리 없애야 할 것으로만 여겨왔다면, 일독을 권해드린다. 문제를 제거하기보다 어떤 균형이 무너졌는지를 묻게 만든다. 긍정, 끌어당김 같은 말에 지쳐 있거나 왜 자꾸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는지 설명이 필요했던 사람에게도 유효하다. “안 되는 이유를 도덕적 탓이 아니라 구조로 보여준다. 음양, 심리학의 그림자, 종교적 통합의 언어를 한 번에 엮어 읽어보고 싶은 독자라면 특히 흥미롭게 따라갈 수 있다. , 이것을 정답이 아니라 렌즈로 들여다볼 때 가장 빛난다.

 

#보이지않는질서 #터닝페이퍼 #뤼디거달케 #대립 #공명 #인생법칙 #통찰 #인생이왜이래 #음양 #구조 #심리 #책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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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유어 달링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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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피터 스완슨의 킬 유어 달링은 스릴러가 독자를 붙잡는 가장 익숙한 갈고리를 과감하게 내려놓는다. 보통의 추리소설은 누가 죽였는가라는 수수께끼를 끝까지 숨기며 페이지를 넘기게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반대로 첫 장부터 독자가 이미 결론을 알고 출발하는 구조를 택한다. 그래서 독자를 몰아붙이는 질문도 바뀐다. “범인은 누구인가가 아니라, “왜 그렇게 되었는가”. 정체를 숨기는 대신 동기의 층위를 끝까지 파고드는 방식은 독자를 속이려는 반전보다 더 집요하고 더 불편한 방식으로 심리를 건드린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이 작품을 관계의 소설로 읽히게 만드는 힘이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50대 부부 작가인 톰과 웬디 그레이브스가 있다. 겉으로 보자면 둘은 안정된 삶을 사는 중상류층 부부처럼 보인다. 집도 있고, 직업도 있고, 사회적으로도 문제없어 보이는외형이 있다. 하지만 소설은 그 외형이 얼마나 쉽게 균열을 숨기는지, 그리고 그 균열이 얼마나 오래전에 시작되는지 냉정하게 보여준다. 남편 톰은 술에 무너진 채 살아가고, 아내 웬디는 그의 말과 표정을 늘 경계한다. 둘 사이에 대화는 오가지만 진짜 정담은 없고, 함께 사는 시간이 있지만 서로에게 도달하지 못하는 고립이 있다. 이 부부의 공기는 싸움보다는 냉각에 가깝고, 그래서 더 현실적이다. 큰 사건이 없어도 이미 무너지고 있다는 느낌, 그 질식감을 이 작품은 절묘하게 포착한다.

 

그러다 웬디는 남편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중요한 건 그 결심이 어떤 격정적인 선언이나 거대한 광기로 포장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 장면이 가장 섬뜩한 이유는, 살인이 특별한 악이 아니라 일상의 연장선처럼 묘사되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악마가 씌어서가 아니라 지겨움과 혐오가 조금씩 축적된 결과로 살의가 만들어진다. 이 작품이 노리는 심리 스릴러의 핵심은 바로 여기다. 충격적인 장면 자체보다 그 장면이 만들어지는 과정의 자연스러움이 더 무섭다.

 

이 소설이 현실감을 극대화하는 방식 중 하나는 배경 장치다. 웬디가 톰을 밀어 떨어뜨리는 장소는 워싱턴 D.C. 조지타운의 엑소시스트 계단이다. 영화로 유명한 이 계단은 길고 가파르며, 소설 속에서는 단순한 랜드마크가 아니라 살인을 가능하게 만드는 합리적 조건이 된다. 집 안 계단으로는 부족했던 길이가 더 긴 계단을 향한 계산으로 바뀌는 순간, 살인은 충동이 아니라 계획으로 조립된다. 독자는 그 조립 과정이 놀라울 만큼 매끄럽게 이어지는 것을 보며 불편해진다. 그리고 그 불편함은 이 작품의 성취로 읽힌다. “이런 일이 소설이라서 가능한 게 아니라, 현실에서도 이렇게 만들어질 수 있겠다라는 감각을 남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진짜 핵심 장치는 공간보다 시간이다. 소설은 부부의 결혼 생활을 역순으로 들려준다. 파국의 현재에서 시작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며 둘의 관계가 어떤 경로로 망가졌는지를 하나씩 벗겨낸다. 보통의 서사는 시간을 쌓아 올리며 인물의 변화와 원인을 설명한다. 반면, 이 소설은 시간을 거꾸로 흐르게 하면서 현재의 균열이 어떤 과거를 전제하고 있었는지 보여준다. 말하자면 시간을 쌓는대신 벗기는서사다. 독자는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를 미래에서 과거로 추적한다. 그 과정에서 현재의 혐오가 과거의 사랑과 닿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고, 그래서 더 씁쓸하고 더 오래 남는다. 사랑이 단숨에 증오로 바뀐 게 아니라 사랑의 어떤 성분들이 서서히 변질되며 파국이 되었다는 걸 역순이 오히려 선명하게 드러낸다.

 

게다가 톰과 웬디가 작가라는 설정은 단순한 직업 배경이 아니라 관계를 좀먹는 방식 그 자체로 기능한다. 톰은 위대한 소설을 쓰고 싶어 하지만 초고 앞에서 자멸한다. 완성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의 자존심을 무너뜨리고, 그 무너짐은 술과 자기혐오로 연결된다. 웬디는 시인으로서 비교적 담담해 보이지만 그 담담함 안에는 현실을 계산하고 견딜 줄 아는 힘이 있다. 글쓰기는 이들에게 직업이면서 자존심이고, 동시에 수치심의 근원이기도 하다. 특히 톰의 미완성과 좌절이 결혼의 균열과 맞물리면서 부부 관계는 단순한 애정 문제를 넘어 자존감과 욕망, 실패의 감각이 뒤엉킨 전장이 된다. 이 설정 덕분에 독자는 두 사람이 그냥 성격이 안 맞아서망가진 것이 아니라 각자의 결핍이 어떻게 서로를 파괴하는 구조로 굳어졌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게 된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가장 오래 남는 주제는 결국 비밀이다. 두 사람을 오래 붙들어온 것은 함께 공유한 비밀이지만, 결국 두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은 각자가 따로 감춘 비밀이다. 연애 초기에 우리는 서로에게 거짓말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있었다고 해도 삶이 진행될수록 숨겨야 할 것들은 늘어나는 법이다. 문제는 숨김이 단순한 오해나 착각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구조 자체를 바꿔 버린다는 점이다. 죄책감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그것을 혼자 감당하려 드는 순간 관계는 고립된다. 결국 파탄은 어느 날 갑자기 터지는 사건이 아니라 말하지 않은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만든 결과라는 사실을 이 작품은 차분하게 증명한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의 살인은 클라이맥스라기보다 결과물에 가깝고, 독자가 진짜로 목격하게 되는 공포는 죽음이 아니라 사랑의 변질 과정이다.

 

물론 이 작품은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역순 서사는 독자에게 강한 몰입을 주지만 동시에 어떤 독자에게는 템포가 느리거나 반복적으로 느껴질 우려도 있다. 또한 톰과 웬디는 사람 냄새가 난다기보다는 차갑고 불편한 현실감을 가진 인물에 가깝다. 그런데 이 점이 오히려 이 작품의 장점일 수도 있다. 스릴러가 멋진 캐릭터에 기대어 달리는 순간, 관계의 붕괴가 종종 낭만화되거나 과장되기 쉽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 길을 택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 주변에서 충분히 볼 수 있을 법한, 그래서 더 불편한 민낯을 보여준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이 아니라 정말 있을 법한 인물이라는 사실이 이 작품의 온도를 낮추고, 그 낮은 온도가 끝까지 서늘함을 유지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는 질문은 단순하면서 강렬하다. “끝까지 솔직했다면, 우리는 달라질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은 소설 속 부부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독자는 읽는 내내 저 부부를 보다가, 어느 순간 우리의 관계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우리는 정말 서로에게 솔직한가, 아니면 솔직하다고 믿고 싶은가. 우리는 말하지 않은 것들을 언젠가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말하지 못한 채 관계의 구조를 바꿔 버릴까. 그래서 이 작품은 읽는 동안의 재미도 있지만 읽고 난 뒤의 잔상이 더 강하다.

 

결론적으로 이 작품은 반전으로 독자를 속이기보다 역행하는 시간과 심리의 층위로 독자를 끌고 가는 소설이다. 살인의 충격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랑이 변질되는 과정이며, 죽음보다 더 불편한 것은 함께 살면서도 서로에게 닿지 못하는 고립이다. 스릴러의 외피를 썼지만 결국 이 작품이 보여주는 것은 범죄보다 관계. “범인이 누구냐가 아니라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냐에 매달리게 만드는 흡인력, 그리고 비밀과 죄책감이 관계를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서늘하게 보여주는 힘 덕분에 심리 스릴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다. 특히 결혼/연애의 균열, 말하지 않은 것들의 무게, 관계의 피로가 폭발로 바뀌는 과정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이 소설은 꽤 오래 마음에 남을 것이다.

 

#피터스완슨 #킬유어달링 #가장사랑하는사람을죽일때가장완벽해진다 #부부의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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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유어 달링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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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행하는 시간과 심리의 층위로 독자를 끌고 가는 소설. 호불호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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