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할머니에게
윤성희 외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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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라고 하면왠지 한때는 고왔을 터인데 생계를 위한 고된 농사일로 주름지고 투박해진 손으로 어린 손주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허리춤 주머니에서 사탕을 내미는 모습이 그려질 것 같다그러나 할머니에 관한 우리들의 기억은 천편일률적이지 않다사실 그럴 수도 없다여기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여자 어른의 이야기를 주제로 여섯 작가가 저마다 다른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분명 아름다운 젊은 시절을 보냈을 할머니들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혈육들조차도 의식하지 못하고 세월의 무게에 반비례하여 흩어지는 존재감이 아닐까 싶다.


할머니의 존재를 소재로 한 이 소설집을 읽는 내내 필자는 늘 황동 비녀로 쪽 찐 머리에 옥색 치마와 흰 저고리를 즐겨 입으시던 외할머니를 떠올렸다경북 왜관에 사시다 열여덟 꽃 같은 나이에 연애도 아닌 중매로 김천으로 시집을 오셨고 당시 교정 공무원이셨던 외할아버지와의 사이에 일곱 남매를 두셨다할머니는 당시 평균적인 여성 신장의 기준보다 키가 매우 크셨고 인근 마을에서 일부러 키 큰 새댁을 구경하러(?) 오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취학연령에 아직 닿지 않았을 무렵 필자의 아버지는 청주에서 과수원과 농장을 하셨다당시는 수도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우물을 긷고 호롱불을 사용하며 제대로 된 가옥도 없어 황토 흙벽 집에서 생활했다이런 열악한 환경에도 외할머니는 둘째 사위네 식구들을 보살피느라 함께 지내셨던 것으로 기억한다도심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어머니는 농사일이라면 머리부터 내저으셨기 때문이었다.


아련한 기억 속의 외할머니는 필자의 생명의 은인이시기도 하다당시 농장의 부엌은 전통 한옥식으로 지어져 어른 키의 1/3 정도 되는 층계참을 내려서야 했다층계 바로 옆에는 저녁참으로 잡아놓은 닭과 오리의 털을 뽑기 위해 끓여 둔 물이 커다란 가마솥에 가득했다새끼 원숭이처럼 빙글거리던 부엌 문짝에 올라타 장난을 치던 필자는 그만 손이 미끄러지면서 가마솥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순간 아궁이에 불을 지피시던 외할머니는 놀랄 새도 없이 필자를 바로 건져 올려 우물가로 달려가셨고 온몸에 뜨거운 김을 내뿜던 외손자에게 찬물을 들이부으셨다단 몇 초만 늦었어도 전신 화상을 입었을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그날 저녁 내내 부모님의 눈에서 뿜어나오는 레이저 광선을 피해 할머니의 옥색 치마 뒤에 숨어다녀야 했다말썽꾸러기 손자에게 피난처가 되어 준 그 옥색 치마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큰 키에 비해 일찍 허리가 굽으셔서 유난히 구부정한 모습의 할머니는 심한 사투리로 말씀하셔서 서울 토박이인 손주들과 가끔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셨다치약이 귀해 굵은 소금으로 양치를 하던 시절에도 그 흔한 충치 하나 없이 건강한 치아로 사셨고 일가친척이 다 모인 자리에서 여든다섯 천수를 누리다 가실 때 임종했던 순간이 늘 기억난다할머니를 그리워하는 세상의 모든 손주에게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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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먼 빈센트 필의 긍정적 사고방식 - 어떻게 자신의 행복을 창조할 것인가, 개정판
노먼 빈센트 필 지음, 이갑만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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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내용을 초 간단 압축하자면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신과 대화하고, 성경 구절을 암기하라로 말할 수 있다. 저자에 대한 사전 정보가 전혀 없었고, 제목이 긍정적 사고방식의 힘이라 하여 자기계발 분야일 것으로 이해하고 책장을 열었다. 그러나 지극히 개인적인 저자의 경험과 풍부한 목회 활동 사례에도 불구하고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인한 영향을 입증하는 과학적 고찰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긍정적 사고방식에 대한 저자의 과학적이고 확고한 신념을 기대했건만, 신을 경배하고 기도함으로써 얻는 혜택을 성가시도록 권유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이 책을 더 나은 삶을 위해 실생활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실제적인 안내서라고 소개하며 생활 속에서 실천한다면 인생에서 큰 승리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종교적이지 않은 독자들에게 혹시라도 이 승리라는 어휘는 세속적 성공의 다른 표현으로 다가갈 수 있음을 저자는 모르는 것일까? 종교적인 독자라면 뭐라도 도움이 될만한 내용을 접하겠지만, 필자와 같은 범신론자 혹은 무신론자에게는 일상생활 속에 그다지 녹아들 만하지도 않은 종교적 조언이 범람하는 강을 간신히 헤엄쳐가는 느낌이 들었다.

 

저자는 우리의 머리를 성경 구절로 가득 채우면 부정적 사고가 자랄 틈이 없다고 말하지만 이는 자발적 세뇌에 가깝다. 자신에 대한 부정적 믿음으로 자신을 기만하지 말라면서, 대신 이번에는 신이 자신을 통제 조절한다는 긍정적 믿음으로 자신을 기만하라고 한다. 이 책이 쓰인 1950년대에는 이 같은 전략이 먹혔을지 모르겠지만, 지난 70년간 사람들의 관심사는 다양한 분야로 넓고 깊게 성장하였으며 눈부시게 발전한 심리학은 투자에 의한 자산 증식이나 도서관 방문을 더 권장하고 있다.

 

자기계발서로 치장한 이 책은 도입부에 일부 좋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지만, 끊임없는 기도와 성경 구절, 신앙의 언급으로 필자의 지속적인 탐구의식을 흐리고 독서 의욕을 지치게 한다. 자기계발 내용의 대부분은 처음에는 자신과의 대화 방법을 그리고 결국에는 자신만의 사고방식을 바꾸게 되는 자기암시와 기교에 대한 설명이다. 그러나 만일 독자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면 이 책은 성경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생활 윤리이자 실용서로 만들어 줄 유용한 도구임이 분명하다.

 

저자는 종종 자신의 일화적 경험담을 회상하며 자신의 가르침을 과학적이라 칭하지만, 접근법이나 참고한 이야기들에는 과학적 방법론을 동반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수많은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무명씨에 이야기의 주제도 명확지 않아 연관성이 거의 없어 신뢰할만한 근거를 얻지 못한다. 자기계발 부류의 책을 종교적 설교의 매개체로 활용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으며 놀랍게도 전 세계 42개국에서 2,500만 부가 팔려나갔음을 자랑하고 있다.

 

가장 위험스러운 지점은 믿음으로 병을 고칠 수 있다고 말하는 11장이다. 최근 전 지구적 재앙이라 할만한 코로나 바이러스의 창궐에 치유는커녕 무기력했을 뿐 아니라 정부의 자제 권유를 무시하고 집회를 강행하여 전염의 확대 재생산에 공헌하는 반사회적 모습을 보여주었다. 왜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교회를 떠나고 있으며 왜 교회는 점점 더 이웃 없는 그들만의 종교가 되고 있는지 통렬히 반성할 부분이다


저자의 훌륭한 인생 조언은 겸허히 받아들일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굳이 이 책의 저자가 아니더라도 자신을 믿음으로써 인생의 변화가 온다는 확신을 주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다. 성공적인 인생과 행복을 위해서라면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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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drl32 2021-10-07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교회랑 가져다 이야기하는건 맞지 않음 그런행동을했던 사람이 문제있는사람이었고 성경에서 말하는 것들을 정말 지켰다면 그런일을 벌였을까요 ?? 이 책을 비판하는근거로는맞지않네요
 
[전자책] 누구도 혼자가 아닌 시간
코너 프란타 지음, 황소연 옮김 / 오브제(다산북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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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22세의 나이로 이 책의 전작 진행중인 일’(A Work in Progress)를 출간했을 당시 뉴욕 타임스와 가졌던 인터뷰에서, 저자는 중서부 시골 마을의 소년이 환상적인 인터넷 세상을 접하게 된 여정을 공유한 바 있다. 유머와 놀라운 통찰로 그의 과거를 탐험하면서, 저자는 유투브와 사랑에 빠진 이유와 함께 그를 처음 알게 된 이들에게 수백만의 헌신적인 팔로워들을 거느리게 된 과정을 보여주었다.

 

이후 2년이 지나 저자는 그동안 카메라에 비치지 않던 자신의 가려진 모습을 드러낼 준비가 되었고, 사진과 시를 기반으로 우울증, 사회 공포증, 이별, 자기애를 자기 내면의 목소리로 들려주려 한다. 여기에는 나눔을 소중히 여기고 진정한 연대를 사랑하는 세상에서 진실한 자아를 지켜가고픈 욕구, 사랑과 이별의 몸부림, 자신은 물론 타인들과 함께 현재에 머무르고 싶은 반복적인 노력 등이 담겨있다.

 

저자 스스로 이 책은 짧은 수필, 과거와 미래의 자신에게 쓰는 편지, , 무보정 사진을 종이 위에 쏟아놓은 공개 일기장이라 말한다. 앞날을 향해 달려가며 자신을 돌아보고 있는 젊은 크리에이터의 환상적 내면세계를 있는 그대로 들여다본 순간이기도 하다. 또한, 특정 시기의 자기 생각과 느낌을 되돌아봄으로써 자신을 좀 더 잘 이해하고, 자신은 물론 독자들과 닮은 점을 공유하여 모두가 세상을 더 잘 이해하기를 원한다.



 

그는 이미 10대 초반에 자신의 성 정체성은 동성애자임을 밝힌 이후 삶이 더 나아졌음을 솔직히 말한다. 약간의 키스가 언급되기는 했으나 성적인 내용은 비교적 적으며, 방송가의 부정적인 중계 문화와 자살에 관한 생각 역시 잠깐 언급한다. 정신질환 치료에 관한 오해가 없기를 바라며 독자들로부터 적극적으로 치료를 옹호 받고 싶어 한다. 질풍노도 시기의 10대 문제와 술집 출입에 관하여는 의외로 무덤덤한 편이다. 무엇보다 저자가 던지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는 사람들과의 진솔한 감성적 연대 그리고 보편적 감정과 경험을 통한 타인과의 연결이다.

 

인생 초반이라 가진 것 없으니 후회할 것도 없다지만, 스물 언저리의 청춘들은 자신에게 진실하고 싶은 열정으로 가득하면서도 앞으로 인생의 기복과 결정적 시기와 변화를 어떻게 맞이하고 견뎌야 할지 늘 더 고민할 수밖에 없다. 저자의 공개 일기장을 통해 막 성인이 되는 젊은이들은 이제 곧 맞닥뜨릴 삶의 기쁨과 도전을 받아들이는 데 도움을 얻게 될 것이며, 삶의 원숙기에 접어든 독자들은 자신의 지나온 젊은 날들을 예전보다 성숙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되돌아볼 기회로 삼을 것이니, 특정 연령대의 구별 없이 모두에게 좋은 읽을거리이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괜찮은 작가다. 슬프고, 즐겁고, 신나고, 우울한 그 모든 감정 사이에서 나오는 그의 목소리는 솔직 담백하다. 각각의 짧은 글에 곁들인 사진과 시는 저자가 겪었던 순간에 대한 깊은 통찰과 재미를 주며 이해를 돕는다. 이 책의 독자들 역시 자신들의 경험과 감정을 연결할 수 있고 마침내 타인과 연대하는 힘을 얻게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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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원칙 - 인간 역사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무기
카민 갤로 지음, 김태훈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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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적인 자리에서 단 한 차례 형식적인 인사만 나누었을 뿐, 수년간 별다른 교류도 없던 사람이 당신에게 전화를 걸어와 몸에 그렇게 좋은 건강 보조식품을 소개할 테니 20분만 허락해 달라 부탁한다면? 누구라도 이런 상황을 호의적으로 받아넘기기란 매우 쉽지 않을 것이다. 십중팔구 로부터 자신보다는 호주머니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 약장수라는 인상을 받을 테고 필자 역시 그러한 생각에 더 이상의 대화를 흔쾌히(?) 거절하고 말았다. ‘는 필자를 상대로 이득을 취할 아이디어만 있었을 뿐, 그의 의도대로 움직여 줄 명분이나 친분을 쌓아두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의 말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수사법적 수단인 logos(논리적 구조), ethos(인격과 품성), pathos(감정적 유대)를 활용하여 주장을 뒷받침했어야 한다. 그는 뛰어난 약효와 안전성을 부각한 로고스만 호소하였을 뿐, 서로 알고 지내며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에토스와 약효의 경험담을 공유하여 공감을 일으키는 파토스를 갖추지 못했다. 그 결과 돌아오는 것은 날 언제 봤다고 어디서 약을 팔아?’라는 반발뿐이다.


+

지인을 상대로 다단계 약을 팔든, 거창한 사업을 하든, 괜찮다는 아이디어가 저절로 팔리는 법은 없다. 기업이라는 이름의 세계화 집단, 시스템 자동화 그리고 인공지능이 결합하여 거의 모든 영역의 직업군에 교란을 초래하는 이 시대에, 단순히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기만 해서는 무용지물이다. 아무리 훌륭한 아이디어라도 상대가 이에 감화 감동할 여지가 있어야 한다. 남들보다 앞서가며 탁월함을 성취하려면 역설적이게도 예부터 전해지는 고전적 설득술에 통달할 필요가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득술을 풀어쓰며 오늘날 청중에게 더 나은 의사소통을 위한 영감 방법을 제시한다. 문명의 발달로 일의 본성 자체가 변화하고 뛰어난 기술력으로 전 세계의 사물들을 순식간에 교류할 수 있게 되면서 의사소통 기술은 더욱더 중요해졌다. 그는 또한 신경과학자, 경제학자, 역사학자, 억만장자 그리고 구글, 나이키, 에어비앤비 같은 세계적 기업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우리의 상상력을 사로잡고 미래의 꿈에 불을 지르는 현장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전체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우선 남다른 언변으로 인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들을 돌아보고(1), 과학자와 사업가, 금융인, 의사와 병원 등 실제 세상에서 나타난 설득의 성공사례들을 소개하며(2), 설득에 통달한 인물들에게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말의 기술을 상세히 알려준다(3). 특히 각 하위 장의 끝에 파이브 스타 원칙소제목으로 요약본을 제시하여 가독성을 높여놓았으며, ‘상위 1퍼센트가 사용하는 독보적인 말의 기술은 아래와 같이 요약된다.


+

  1. 파토스 원칙을 기억하라. 설득에는 감정에 호소하는 파토스가 있어야 하며 이를 구축하는 최고의 언어적 수단은 이야기이다. 개인적 경험, 자신이 겪은 변화, 나를 대표하는 시그니처 이야기를 활용하라.
  2. 설정-갈등-해소의 3막 구조를 따르라. 긴장-고난-행복한 결말이 있는 영웅의 이야기가 전수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3. 단 한 줄로 승부하라. 하나의 주제를 영화의 로그 라인처럼 한 문장에 담아 15초 안에 핵심을 제시하라.
  4. 최소한의 단어만 써라. 청중의 집중력은 기껏해야 15분이다. 요점 제시는 신속하게, 어려운 내용은 쉬운 말로 다듬어 전달한다.
  5. 비유로 요리하라. 언어의 아름다움을 부각시키는 유추를 적절히 제시하면 대개 원하는 성과를 내는 데 성공한다.
  6. 잠든 뇌를 깨워라. 세상을 다르게 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이전에 접하지 못했던 것들을 뇌에 쏟아붓는 것이다.
  7. 두려움을 조절하라. 탁월한 의사소통 능력은 타고난 자질이 아니다. 자신과 경험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는 재해석과 반복적 연습인 리허설을 통해 압박감을 극복할 수 있다.

 

의사소통은 마치 다섯 개 만점의 별점 매기기와 비슷하다. 별의 개수에 따라 만족도가 달라지기는 하지만, 아무리 문명이 발달하고 세상이 좋아져도 인간인 이상 우리는 의사소통을 중단하거나, 거부하거나, 인류가 최첨단기술로 개발한 결과물인 인공지능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 기계가 인간의 감정을 읽는 법을 배울 수는 있지만, 인간의 감정을 느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과거 지식의 시대에는 정보 보유량이 우리의 가치였으나,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 설득술의 재발견과 적용을 통해 우리가 평범과 비범 사이의 격차를 좁히고 자동화 시대에도 인간다움을 잊지 않는 의사소통의 회복을 바라고 있다. 애플 부사장 안젤라 아렌츠의 말처럼,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우리가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고 서로의 손을 만질 때 받는 느낌을 대체할 수는 없으므로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적 유대를 이루는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데 공감하는 독자라면 특히 일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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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침입자들
정혁용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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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상경한 듯주머니에 단돈 10만 원뿐인 초라한 행색의 사내가 강남 버스터미널에서 전화로 택배 일자리를 얻는다그가 맡게 된 택배 구역의 동네 이름을 따 행운동이라는 이름으로 통하게 된다.


- 사실 이 바닥이 바닥까지 떨어진 사람들이 많이 오긴 하죠.

- 바닥이 있다면 아직 진짜 바닥은 아닌 거죠. (16p)

택배기사를 구인하던 택배업체 사장 바나나 형님과의 첫 통화를 보면 그는 몸을 팔아 살아가는 삶의 바닥까지 내려온 것 같다그러나 자신을 건사할 만한 능력과 생각을 지닌 그로서는 적어도 정신세계만큼은 아직 바닥까지 내려오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 하지만 이 일에서 배운 게 있다면 버나드 쇼의 말이 맞다는 거다돼지와 뒹굴어서는 안된다는 것함께 더러워질 뿐이고 심지어 돼지가 그걸 좋아한다는 사실.(70p)

비 오는 날 배송 물품의 포장이 물에 젖었다며 안 받겠다고 갑질하는 옷가게 사장을 그는 이런 생각으로 바라본다갑과 을을 지나 병이 정을 하대하는 환경에서도 그는 스스로 돼지와 동급이 되기를 거부하는 장면에서 작품이 점점 흥미롭게 다가온다.


- 하지만 감정노동에 대한 대가 따위는 없다이런 걸 착취라 하고눈 뜨고 당하고 있는 걸 바보라고 한다가난하게는 살 순 있어도 바보로 사는 건 싫다. (75p)

배송한 물품을 창고 안쪽으로 옮겨달라며 갑질하는 다단계 회사 안내 여직원에게 배송과 운송의 차이점을 참교육하는 장면에서자존심은 이렇게 지켜야 한다는 듯한 매력을 발산한다우리가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접어두고 퇴근해 집에 와서야 겨우 꺼내 확인해보는 그 자존심 말이다.




- 현대 교육의 핵심은 야성의 제거에요노예에게 야성이 있으면 다루기 힘드니까집에서 기르는 개와 마찬가지죠먹이를 주고 쥐꼬리만 한 안정감을 쥐여주면 나머지는 원하는 대로 부려 먹을 수 있죠교육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아요경쟁을 시키고 서열을 주면 알아서 서로를 증오하며 끌어내리고 밟고 올라서기 바쁘죠그러면서 태연한 얼굴로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건 자유라고 말하죠자유가 어떤 건지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도 모르고 말이죠. (223p)

한 달간 택배 업무를 대신 뛰어준 보답으로 술을 사는 남현동과의 대화를 통해약자를 밟고 올라서야 약자 취급을 받지 않는 학습된 권력 구조의 모순과 이에 순응하도록 의도된 제도권 교육의 어두운 면을 적나라하게 들추고 있다경쟁이 아닌 협력과 상생의 교육이 필요한 이유를 이렇게 상기시킬 수 있다니.


- 되도록 사람과 연은 맺지 않지만 어떤 식으로든 연이 맺어지면 어떤 식으로든 매듭을 지어야 편해지는 성격이다이상한 데 결벽증이 있고 역시 다른 성격처럼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184p)

- 희망이란 게 사람에게 힘을 주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자신을 괴롭히기만 할 뿐인 것 같아요그럴 땐 포기하면 편하죠정말 그래야 할 일은 살면서 한두 가지 정도인 것 같아요대개의 일은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도망갈 수 있다면 도망가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그런 마음이 드는 건 자신에게 맞지 않는 일이라는 뜻이니까. (189p)

- 사람이란 한계치에 다다르면 나뭇잎 한 장이 얹혀도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법이다한계치는 사람마다 다르며 죽는 것보다 사는 게 힘들기 때문에 선택하는 것이다타인이 그 무게를 어찌 알겠는가설명 부부라고 해도 말이다. (204p)

이 부분은 주인공의 성격을 드러내는 독백으로 뽑았다인연은 물론 부부와 같은 최소 가족 단위에도 기름기 뺀 미니멀리즘적 태도를 보인다특수한 상황에 이르는 인간의 한계치를 경험해 본 이력을 엿볼 수 있으며어떠한 대인관계도 언급되지 않는 데 대한 우회적인 설명으로 읽힌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작품에 영향을 준 소설영화미드팝에 대한 오마주를 표방하였음을 밝히면서하고 싶지 않은 일은 하지 말자는 인생관을 가졌다고 한다그러나 우리 인생이 어디 그런가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만 하는 경우는 물론마주치고 싶지 않은 인간인데 마주해야 하는 상황도 부지기수다.


한 번 만날 때마다 백만 원을 받고 시키는 대로 하자고 제안하던 억만장자 회장님의 손녀인 춘자수학 천재였지만 동네 바보가 되어버린 마이클과 경제철학 강의를 고집하는 그의 할아버지세상의 소리를 감상할 수 있어 좋다며 폐지를 줍는 마스크도박 중독으로 택배기사들 월급을 들고 달아난 바나나 형님동료 기사인 아파트와 청림술만 마셨다 하면 사고 치는 주창이와 시비 거는데 도가 튼 조 따거게이 바 코카인의 마약 유통업자인 제니관악 경찰서 강력3계 형사인 유도 등이 그러한 인간들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의 제목이 왜 침입자들인가 생각해 보았다하고 싶지는 않지만 단지 생계를 위해 택배기사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주인공 행운동은 택배기사라는 직업의 특성상 수많은 인간 군상들과 어쩔 수 없이 엮여야만 한다본인이 선택할 여지도 없이 그는 주변인들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배송 물품의 수화인이기 때문에 그들의 일상 속으로 먼저 침입해야 한다그를 맞이하는 주변 인물들 역시 행운동의 일상 속으로 침입하게 된다저자는 서로의 경계를 넘어서는 침입자들의 세계에서는 무례를 범하지 않는 선에서의 예의와 불친절하지 않은 선에서의 친절이면 충분하다고 말한다.




또한행운동은 타인에게 무례하지도 않지만 무례한 일을 당해서도 안 된다는 생각으로 때로는 냉소적이고 자조적이지만 쉽게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물질과 권위 등 타인과의 관계에 쉽사리 영향을 받아 자신의 본 모습을 기만하거나 잊어버리는 굴욕감을 맛보아야 하는 데 반해그는 마약밀매 조직에 납치를 당해 고문을 당하는 순간에도 무척 당당하고 초연한 농담으로 자신을 객체화할 줄 안다무척 남다르다경호원의 넥타이를 순식간에 잘라내는 칼솜씨와 knife의 줄임말인 K라는 별명티모센코라는 교관의 이름 등으로 고도로 잘 훈련된 전직 특수전 요원임을 암시하기도 한다그의 주변인들이 의외로 신선한 호감과 매력을 느끼게 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의외성에 있으며일상에 찌들어 관계성에 무감각해진 독자들은 물질과 권위를 가볍게 조롱하며 털어버리는 행운동에게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맛볼 수 있다.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는 저자의 이력으로 보건대 택배기사도 그 가운데 하나이리라 충분히 짐작된다낯선 국내 작가의 작품이라 전혀 기대하지 않고 읽었으나 웬만한 외국 스릴러 작품보다 더 흥미롭고 전개가 빠른 데다 택배 세계를 소재로 한 찰진 소설이란 점이 더욱 신선하고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세계문학상 최종심 후보작에 오른 데에는 다 그만한 저력이 있었음을 공감하며 하드보일드 소설 장르라면 엄지 척 추천해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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