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의 서재 - 가치상실의 시대, 교사에게 말을 거는 44명의 철학자
이한진 지음 / 테크빌교육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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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시험장의 하나로 아무런 대과 없이 엊그제 막 대입 수능을 치렀다. 순조롭게 별 탈 없이 지나가야 본전이다. 이 본전을 위해 온 학교 교직원들이 각자 맡은 일을 하느라 분주했다. 행사가 깔끔하게 잘 마무리되었다며 교육청에서 반색했다고 한다. 매년 이렇게 홍역을 한 차례씩 거치면서도 치를 때마다 느낌이 새롭다. 마치 오래된 컴퓨터의 하드디스크 드라이브를 정리하듯 학교는 1년 단위로 모든 과정이 포맷되므로 최근 몇 년 전의 일도 굉장히 오래된 일로 느껴진다.

 

수능 당일 수험생들에게는 수험 환경이 매우 중요할 텐데 아마도 책걸상은 거의 절대적일 것이다. 늘 수험 장소로 쓰이기도 하지만, 현재 3학년을 제외한 두 개 학년은 불과 3년 전부터 새로 도입한 책걸상을 쓰고 있다. 이 제품은 부품의 상당 부분에 플라스틱 소재가 사용되어 가벼운 데다 책상다리 앞쪽에는 바퀴가 달려있어 이동하기 쉽다. 게다가 좁은 공간에 책상을 접어서 보관할 수도 있다. 과거 제품의 결정을 앞두고 모둠 활동에 최적화되었다는 장점을 이유로 모든 학년 부장과 일부 교사들의 반대 의견에도 불구하고 교장은 결재자 권한으로 밀어붙여 이 제품을 선택하였다. 사실 고등학생들에게 매시간 모둠 활동이 필요하지는 않다. 게다가 학생 대표들을 불러다 세 가지 견본 제품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기회를 주었다는데, 확인해보니 사실무근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도 아닌 고등학생이 책상 옮길 힘이 모자라 굳이 바퀴 달린 제품이 필요했을까? 당연한 질문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의 난감함을 어찌 표현할까.

 

이 제품은 사용하기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교실을 청소하느라 책걸상을 한꺼번에 뒤로 밀어낼 때는 반드시 걸상을 책상에 끼워 넣는 형태여야 하고, 내구성이 약해 3학년이 사용하는 고정식 책걸상과 비교해 고장과 파손 비율이 높은 데다, 초등학생 체격에 맞는 규격으로 고등학생들의 체중을 견디느라 금속과 플라스틱 접합부의 삐걱대는 소음이 심하며, 무엇보다 학생들이 상판 위에 상체를 엎드려 휴식을 청하려면 자꾸 앞으로 밀려가 불편하기 그지없다. 책걸상은 학생들에게 학습과 휴식의 도구이자 종일 생활하는 가구인 셈인데, 왜 이런 불편을 감수시켜야 했는지 미안한 마음마저 든다. 다행히도 곧 교육청에서 새로운 모델의 책걸상으로 교체해 줄 예정이라 한다.

 

종종 위험한 아웃사이더도 있다. 자신의 생각은 모두 옳고 선을 추구하는 데 반하여 자신이 속한 집단은 미개하고 진리를 깨우치지 못했다고 착각하는 사람이다. (중략) 위험한 아웃사이더 교사와의 대화는 동료 교사들이 그다지 반기지 않는다. 싸우기 싫어서라기보다는 대화 자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각만 정답이라 여기고 타인의 관점을 거의 수용하지 않는 탓이다. (아웃사이더 교사. 79)


한편, 교사 한 사람은 곧 독립된 교육기관이라는 말이 곧잘 인용되고는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무기력한 일개 교육 공무원일 때가 많으며, 법제화도 되지 않은 기본 시수를 생각하면 학생-학부모-교사가 교육의 3주체라는 말은 공허하다. 교사에게 마지막 남은 힘은 알량한 평가권이라 할 수 있는데, 배우고 익힌 것을 중간 점검하고 학습 인지력을 높이려는 본래 목적과 왜곡된 형태의 성적 줄 세우기 사이의 경계선을 오간다. 책걸상 선정의 사례처럼 학생들의 입장에 서서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려는 시도는 너무나 쉽게 무력화되기 일쑤이고, 무슨 말을 하더라도 반영되는 적 없으니 그냥 입을 다물고 될 대로 되라는 냉소주의만 남는다. 관리자의 성향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학교가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교사를 보호해 줄 의지와 능력에 의문을 품게 되고, 따라서 내 밥그릇만 온전하면 그만이라는 태도가 지배적이라면 그 조직에 미래는 없다. 과거 진행형이었던 이 상황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는 좀 더 희망적인 미래진행형으로 바뀌었으면 싶다.

 

교육의 본질을 실천해 나가고, 스스로에게 인정받는 좋은 교사가 되는 일은 매우 어렵다. 교사로서 자신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반성을 시도하고 자기 삶의 사회적 가치를 이해하고 추구하는 사람만이 좋은 교사가 될 수 있다. (교사의 존재. 193)

 

이 책은 무엇보다 교사 됨의 기본을 말하고 있다. 때로 헛헛한 교사의 마음을 보듬어주고 위로하며, 학생을 가르치는 자가 아닌 평생 배우는 자로서의 마음가짐도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요리사 지망생이 요리책을 탐독하듯 섭렵한 철학책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고 이를 가르침과 배움의 과정에 녹여내고자 했음을 강조한다. 모두 4장으로 구성되었으며 장마다 11명의 철학자와 그들의 저서에서 나온 인용구를 통해 진정한 배움, 바람직한 가르침, 행복한 교육, 정의로운 교육이 무엇인가를 돌아보게 한다. 앞서 언급한 책걸상 선택이나 학교 운영의 참여 등은 교사라면 언제든 접하게 되는 소재일 것이다. 가장 현명한 결정 방법은 언제나 학생과 교사와 교육 활동에 도움이 되느냐는 질문에 제대로 답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따르는 것이다. 한 번의 선택이 수백 명 학생과 교사에게 최소 1년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퇴행 또는 선행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인공지능이 등장하고 세상이 아무리 첨단 시대로 변모하더라도 역시 사람은 사람 손에 커야 한다는 사실을 재확인한다. 교육을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문명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회는 그 막중한 임무를 일선의 교사들이 충실하게 잘 수행하도록 도움을 주어야 한다. 교사들 자신도 혼돈과 고민에 허덕이지 않고 꿋꿋이 나아갈 수 있어야겠다. 아무래도 그 바탕에는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 철학적 사고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학생들보다 아무리 우월한 지위라 하여도, 교실에서는 늘 절대 소수이자 외로울 수밖에 없는 우리 교사들에게는 지친 영혼을 달래 줄 따스한 위로의 한 마디가 절실하다. 교사로서 외롭고 힘들고 괴로울 때 날 위로해 줄 사람 누가 없을까를 묻는다면, 선생님의 선생님 같은 이 책으로 갈음하고 싶다. (2021-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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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진화 - 생물학적 진화에 맞선 바이오 기술의 도전 EBS 과학 교양 시리즈 비욘드
양은영 지음 / EBS BOOKS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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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의 3대 기능은 교양, 오락, 보도라고 한다. 외국보다 방송 비율이 가장 적기도 하지만 시청 비율 역시 가장 낮은 게 교양 부문이다. 이런 여건에도 불구하고 국민 교양 프로로 자리매김한 EBS에서 몇 년 전 <비욘드>라는 과학 교양 시리즈를 선보였는데, 이번에 방송 내용을 엮어 내놓은 것이 이 책이다. 일반 대중의 교양 진작을 위한 내용이므로 이해하기 어렵거나 현학적인 문구를 쓰지 않는 친근한 설명으로 술술 읽힌다.

 

이 책이 선사하는 재미는 생물학적 진화에 대해 무엇을 알고 모르고의 차이보다, 그 진화의 속도를 따라잡기 위한 바이오 기술 발전의 연대기적 비교에 있다. 우리의 신체는 20만 년 전 인류의 조상이 숲에서 나와 동굴에 기거하며 수렵 채집으로 삶을 이어가던 시기 이후로 이렇다 할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불로불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발버둥 치던 진시황이 겨우 49세에 세상을 하직한 것과는 반대로, 호모 헌드레드로 불리는 오늘날의 인류는 오히려 급격한 문명의 발달과 각종 의학의 혜택으로 어쩔 수 없이(?) 두 배 이상 연장된 수명을 잘 유지할 방법을 찾느라 바쁘다. 맹수들의 먹잇감으로 언제 희생되어도 이상할 것 없던 생태계 최고 약체이던 우리 조상들이 어떻게 하면 잘 죽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는 점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가장 최근의 바이오 기술을 다룬 이 책은 모두 6장으로 구성되었다. 1장은 진시황처럼 수명 연장과 부활을 꿈꾸며 스스로 냉동 상태에 들어간 사례 및 생체 시계의 척도인 텔로미어의 존재를 다룬다. 2장은 수렵 채집인의 몸으로 엄청난 문명의 변화를 이겨내느라 갖은 현대 명을 앓고 있는 우리 몸의 고난을 말한다. 3장은 과거 풍요와 부유함의 상징이었으나 이제 질병의 반열에 오른 비만 문제와 해법을 탐구한다. 4장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인체가 역설적이게도 거대한 미생물의 집합체임을 강조하며 이들과의 공생이 장수의 비결임을 말한다. 5장에서는 한때 신의 영역에 대한 도전이라는 오해를 샀던 유전자 기술과 이를 응용한 유전병 치료법을 살펴본다. 마지막 6장에서는 미래 공상과학 애니메이션인 공각기동대를 연상시키는 인공 장기 및 기계 장기로의 교체가 가능한 트랜스 휴먼과 이를 극복한 포스트 휴먼을 이야기한다.

 


기초과학,  생명공, 우주공학 등 다양한 기술력의 발전으로 인류는 숲에서 살던 태곳적 과거와는 매우 딴판인 세상을 살아가고 있으며 앞으로 상상 이상의 세상에 살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기술력 자체는 선악의 기준이 될 수 없으며 오로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력만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해답을 제시할 수 있다. ‘멋진 신세계의 저자 올더스 헉슬리가 인간이 발전시킨 기술에 의한 역차별을 우려한 것처럼, 기술력으로 급변하는 사회 환경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꾸준히 공부하여 세상 물정을 따라갈 정도는 되어야 한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우리 몸의 간략한 진화의 역사를 배우고, 건강을 유지하는 다양한 조언을 듣고, 최신 생명과학 상식을 접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을 좀 더 정확히 이해하고 무탈하며 멋진 내일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 #만들어진진화 #진화생물학 #비욘드 #EBS과학교양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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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진화 - 생물학적 진화에 맞선 바이오 기술의 도전 EBS 과학 교양 시리즈 비욘드
양은영 지음 / EBS BOOKS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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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적 진화는 멈췄지만 현대 생활 이후의 진화를 강요받는 인류의 새로운 진화를 모색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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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지혜 수업 - 78가지 사례로 배우는 행복과 성공을 위한 연금술
무천강 지음, 정은지 옮김 / 리드리드출판(한국능률협회)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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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와 관용은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저절로 얻어지는 덕목이 아닌 게 분명하다. 나이와 더불어 이런 덕목을 갖춘 이들이야말로 사회의 어르신으로 불려 마땅하건만, 사실 그런 어르신을 찾아보기도 쉽지 않거니와 스스로 어르신 노릇을 감당하려는 사람은 더욱 흔치 않다. 게다가 아무리 행복과 성공을 위한 금쪽같은 명언이라도 남의 이야기인 양 귀동냥하거나 생각 없이 읽기만 해서는 체화되기 어렵다. 그래서 실제 일어났던 사례로부터 지혜를 얻는 방법이 가장 와 닿기도 하여 선호되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서 말하는 지혜를 생각하니 최근 겪었던 일화가 생각난다.

 

어느 주말, 가족과 함께 교외의 단골 칼국숫집을 찾았다. 식사를 마치고 식대를 치르려다 보니 자동차에 지갑을 두고 왔음을 알게 되었다. 주차장에 다녀오는 동안 계산대에 잠시 올려두었던 계산서가 보이지 않아 이리저리 찾고 있던 사이, 옆자리에서 식사하던 60대 남성이 영수증을 한 손에 쥐고 씩씩대며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격분한 목소리로 어째서 두 사람의 식대가 사만이천 원이나 나올 수 있느냐, 이 업소는 장사를 이런 식으로 하느냐, 마침 영수증을 확인해보았기에 망정이지 바가지를 쓸 뻔했다는 등 가시 돋친 목소리로 주인에게 항의했다. 주인이 필자의 계산서를 그의 식대로 잘못 알고 결재했으니 항의받아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오류를 바로잡겠다는 생각을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필자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상황을 얼른 눈치챈 주인은 사과의 말과 함께 먼젓번 그의 결재를 취소하고 정확한 금액으로 다시 결재해 주었다. 옆자리의 그 남성에게는 결재 오류가 잠시 언짢았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그로서는 손해 보는 일은 생기지 않았으니 웃어넘기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그는 주인의 정중한 사과를 받아들이지도 않은 채 업소를 떠나는 순간까지도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으니 아마도 다른 손님들은 그의 으르렁 소리에 잠시나마 언짢았을 것이다. 출입문을 나서던 그 남성의 반백 머리 뒤통수가 왠지 가벼워 보였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다고 했던가, 그는 그렇지 못했다는 느낌을 필자 혼자만 받지는 않은 것 같다.

 

전체 열 개의 주제로 구성된 이 책은 올곧은 마음가짐, 좋은 습관과 인간관계, 시간 관리, 목표설정, 올바른 인성, 깊은 사고력, 자신에 대한 파악, 감정 조절, 행복은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요점의 기저에는 무엇보다 행복한 인생을 위하여 자신을 먼저 가다듬어 나갈 필요가 있다는 뜻으로 보이며,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가장 먼저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 책의 제목이 하버드 지혜 수업이라 해서 반드시 하버드 대학 정도를 졸업해야만 얻을 수 있는 지혜를 뜻하는 것도 아니며, 실제 하버드에서 지혜를 주제로 강연한 내용을 엮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런 제목을 붙이게 된 데에는 스스로 일정 수준의 도덕성과 기대 수준을 유지하려는 하버드 관계자들의 진지한 노력이 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고, 그런 노력의 영향으로 키워진 영재들 역시 지혜로운 삶을 살고자 노력한 결과를 살피다 보니 하버드 졸업생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사례별로 78개의 지혜를 전수해주는 이들은 실제 하버드 대학의 전·현직 교수이거나 총장인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가 갈수록 더 빨리 초고령화되는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주위에 인생의 지혜를 말해주는 어르신의 존재는 반비례하는 듯하다. 누구나 성공을 꿈꾸며 성공하리라 말은 하지만 실제 성공을 거둔 이들과 직접적인 교류를 나누기란 쉽지 않다. 차제에 이 책에 제시된 사례를 통하여 간접적이나마 지혜를 접할 수 있으니 다행이다. 지혜는 나이와 달리 저절로 얻어지지 않음을 상기하며, 지혜로워지려 노력하는 모든 독자에게 일독을 권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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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듀얼 - 최후의 결투
에릭 재거 지음, 김상훈 옮김 / 오렌지디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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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61229, 중무장한 채 말에 올라탄 두 기사가 파리 수도원 바깥의 결투장에서 마주 보고 있다. 이들은 각자가 주장하는 명분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는지를 증명하기 위해 죽을 때까지 싸울 참이다. 재판장인 찰스 6세와 다른 왕궁 신하들을 포함한 열렬한 관중들이 희대의 구경거리를 지켜보고 있다. 고소인은 장 드 카루주(Jean de Carouges), 대대로 저명한 노르만 가문 출신의 기사였다. 피고인은 지체는 낮아도 정치적 수완이 뛰어난 인물인 자크 르그리(Jacques Le Gris), 카루즈의 아내 마르그리트(Marguerite)를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되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구도 자체는 매우 간단해서 파경으로 치닫는 두 절친의 우정이라는 몇 개의 단어만으로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 르그리가 뛰어난 수완으로 카루주보다 훨씬 더 빨리 정치적 입지를 굳히고 재산을 불렸던 반면, 카루주는 자신의 부를 증식하려 애썼음에도 실패를 맛보게 된다. 이들 사이의 갈등은 점점 커지고 카루즈의 아내가 르그리가 자신을 성폭행했다고 고발할 때까지 그들의 관계는 악화 일로를 걷는다. 결국, 이들은 결투로 이어지는 모든 법적 조처를 강구하기 시작한다. 결투의 결과가 유죄 여부를 결정하는,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의 싸움이었다.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두 귀족의 결투가 가져올 엄청난 파장을 암시하듯 결투장 곳곳의 모습을 실감 나게 묘사한다. 카루주가 르그리의 목숨을 빼앗는다면 결투는 그것으로 끝나겠지만, 만일 그녀의 남편이자 챔피언(대리 대결자)이 결투에 진다면 마르그리트는 산 채로 화형에 처할 운명이었다. 사실 결투 결과와 관계없이 다수의 관중은 좀처럼 보기 드문 귀부인의 화형 장면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야기의 초점은 두 기사가 결투장에 마주하게 되기까지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결투는 한때 친구였으나 불구대천의 원수로 바뀐 두 남자의 갈등과 경쟁의 정점이었다.

 


앞서 1303, 프랑스의 필립 4세는 결투에 의한 재판을 금지했다. 귀족들은 고대로부터의 특권이 축소되는데 매우 분개하여 1306년 왕에게 결투의 복권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이 결투는 충동적인 절차가 아니었기에 실행되려면 까다로운 세 가지 법적 기준을 충족해야 했으며, 파리 고등법원에서의 논의와 왕의 승인을 거치는 복잡한 절차 때문에 이후 80년 동안 이러한 청원은 거부되었다. 그런데도 1386년 카루주와 르그리의 결투가 허용되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당시 국왕이자 재판장인 샤를 6세가 이러한 광경을 좋아했기 때문일 것이다. 충동적 성격의 찰스는 자신이 유리로 만들어졌으며 무언가와 부딪히면 산산이 조각난다고 믿는 유리 망상증으로 간헐적 발작을 사망할 때까지 지속했다고 한다.



1385년 카루즈는 기사로의 신분 상승과 재정확보를 목표로 잉글랜드 약탈 전쟁에 참여하고자 스코틀랜드로 향했으나 작전은 계획대로 잘 진행되지 않았다. 오히려 병들고 더 많은 빚을 진 채 노르망디로 돌아왔으나 아내 마르그리트가 옛 친구인 르그리스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결투는 말로 하는 재판으로 해결할 수 없을 때의 마지막 절차로, 양측은 신과 왕 앞에서 엄숙히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맹세한다. 피고와 원고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어야 하며 만일 결판이 나지 않는다면 다음 날로 이어져 다시 시작해야 한다.




카루주-르그리스 결투 사건을 전개하기 위해 저자는 10년 전으로 돌아가 결투와 관련된 법적 기록, 연대기, 그리고 다른 역사적 문서들을 그려낸다. 그는 또한 결투를 그 시대 맥락의 중심에 놓음과 동시에 14세기 프랑스 생활상을 생동감 있게 묘사한다. 예컨대 수많은 전투에서 일어났으며 종종 가혹한 방법으로 악명높은 범죄와 처벌, 종교적인 믿음과 관행이 중세법 제도에 미치는 영향, 프랑스 중앙 및 지방 권력의 위계질서와 토지의 중요성,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격동적인 외교와 침략 찬탈의 역사, 왕실의 풍습과 정치적 음모 등이 좋은 사례다.


 

쟝과 마르그리트 카루주 부부 사이의 관계는 또한 봉건적 결혼제도와 이 시기 여성의 권리 또는 지녀와 마땅한 권리의 부재를 보여준다. 가장 흥미로운 인물 중 한 명으로 떠오른 마르그리트는 르그리가 자신을 강간했다고 직접 고발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아내를 남편의 재산으로 간주하여 강간죄라고 해봐야 기물파손죄 정도로 인식되었으며 같은 범죄라도 남자보다 여자가 더 큰 처벌을 받는 시대였다. 마르그리트의 고발은 그 자체로 중세 프랑스 사회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한편으로 강간죄 처벌이 입증된다면 범인에게는 죽음을, 강간범 가족에게는 불명예를 의미했다. 무고죄에 대한 처벌도 화형에 의한 사형이었다. 따라서 남편의 귀국을 기다려 피해 사실을 알려야 했고 소송 이후 결투 직전까지 무거운 몸으로 힘겨운 신체적 정신적 압박을 견뎌야만 했다. 아마도 억울한 사정에 대해 침묵하기가 훨씬 쉬었을 테지만, 그녀가 정의를 위해 목소리를 내기까지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최근 리들리 스콧 감독에 의해 영화화된 이 작품은 결투 당사자와 마르그리트 세 사람의 시각에서 이 사건을 바라보고 있으며 혹자는 중세 판 미투 운동이라 일컫기도 한다.




단순한 결투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저자는 중세 생활의 여러 측면을 책 전반에 걸쳐 설명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그는 결투에 부여되는 모든 법적 의미를 해석하고, 강간이 어떻게 대중에게 인식되는지를 설명하며(강간 행위 중 여성이 오르가슴을 느끼지 않는다면 임신하지 않는다는 생각), 똑같은 범죄인데도 여성이 남성보다 얼마나 자주 더 가혹하게 처벌받았는지를 보여준다. 14세기 말 프랑스 사회에 대한 사실적인 그림을 보듯, 이러한 세부적인 내용은 저자가 실제 조사한 역사적 자료에서 나온 수많은 인용문으로 뒷받침된다. 그 당시 문제의 결투가 논란의 여지가 많았고, 사실 아무도 진실을 알지 못하는 오늘날임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전체적으로 가장 개연성 높은 시나리오를 제시해 주고 있다. 저자의 주장에 동의할 만한 증거는 충분해 보이며 실제로 방대한 사료를 바탕으로 충실하게 고증되었음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그리의 변호사 장 르코크가 그의 개인 일기에 적은 것처럼 이 사건의 진상을 정말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결투 재판의 중심에는 600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도 확실하게 풀리지 않은 역사적 미스터리가 남아 있다. 귀부인 마르그리트가 실제로 자크 르그리에게 성폭행을 당했느냐는 점이다. 그러나 저자가 지적하듯 미스터리 그 자체는 마르그리트의 이야기가 사건 이후 몇 세기 동안 변형되거나 거의 모두 사라진 데 있다. 다행히도 그녀는 남편이 고군분투한 결투의 결과로 귀족으로서의 명예와 법률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그녀의 삶이 어떻게 기록되고 역사 기록에 재구성되었는지에 관한 질문은 여전히 답변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 사건은 우리가 존경해 마지않는 역사가들조차도 역사에서 소외된 목소리들을 얼마나 쉽게 제거할 수 있는지, 또한 그러한 목소리들이 적절한 위치로 복귀하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대단히 흥미로운 소재를 다룬 작품으로 특히 중세 서양 역사에 관심 있는 독자들께 일독을 권하며, 아울러 이 사건을 바탕으로 최근 개봉한 영화를 관람하며 소설과 비교해 보실 것을 강력히 추천해 드린다

 


#영화소설 #라스트듀얼 #최후의결투 #역사실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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