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읽는 주제통합 영어 수업 - 학생들의 삶과 연결되는 교사 교육과정과 범교과 프로젝트
김치원 지음 / 에듀니티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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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고등학교 영어 시간이라면 무엇을 연상하시는가. 학생의 참여 없이 교사 혼자 떠드는 설명 일변도의 문법-번역식 수업? 공부는 학원에서 하는 거라며 학교에서 학원 숙제하는 학생? 초등학생 때 이미 영어 포기자가 되어 무기력하게 책도 없이 앉아있거나 엎드려 자는 아이들? 그 와중에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는 소수의 성실한 학생들? 아마도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인터넷 환경과 세련된 멀티미디어 기기 그리고 확연히 줄어든 학생 수 아닐까.

 

본래 어학이란 잡학이고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학문은 없다. 영어 시간에는 영어라는 언어 자체를 배우기도 하지만, 영어로 표현되는 세상을 공부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단지 언어만 다를 뿐 인간 세상의 모든 학문이 그 속에 들어가며, 조금 민감할지는 몰라도 정치와 종교를 비롯한 사회 분야 역시 다루게 된다. 그런데도 수업 중에는 시험을 전제로 한 지문 풀이가 수업 중 영어 교사가 하는 일의 대부분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들 때가 있다. 예전 성립 자체가 어불성설 같은 학생들의 서술형 교원평가에서, 우리의 현실 정치에 관심이 필요함을 강조했더니 정치 이야기 좀 그만하시고 교과목을 사회로 바꾸는 게 낫겠다는 내용도 접해보았다. 그렇게 자란 학생들이 국민을 속이고 국고를 탕진하는 정치인들을 뽑아주었는지 모르겠으나, 그래서 요즘처럼 진학과 시험을 위한 영어 공부에 매몰된 학생들에게 사회를 읽어내는 힘 키우기는 어느 때보다 절실한지도 모른다.

 

흔히 학교를 사회의 축소판에 비유한다. 그렇다면 학교는 얼마나 사회적인가? 학교 담장을 벗어나 세상으로 나아갈 아이들에게 영어 시간에 해줄 수 있는 게 무엇일까를 고민만 하고 있다면, 이 책에서 부분적이나마 해답을 얻을 수 있을 듯하다. 고등학교 수준에서 절실한 제도인지 아직도 확신이 부족하지만, 선택형 교육과정과 고교학점제로 학생들이 배울 교과목을 학생들이 선택하는 시대가 왔다. 학교 역시 공급자 위주에서 수요자 위주로 급변하는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데, 절대평가와 학생의 학습 선택권으로 여타 지식 과목보다 특히 어학 도구 과목은 더욱 큰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동종 업종의 현직 영어 교사다. 오랜 세월 자신만의 방식에 굳어져 살아왔기 때문인지 그에게서 일종의 개혁가 같은 모습이 보인다. 그의 수업 철학과 학생들의 좋은 삶을 위한 생각을 접해보니, 같은 학교 울타리 내에서조차 수업 내용과 각종 고민을 공유하지 않던 불문율 뒤에 안주하던 우리의 민낯을 보는 듯하다. 저자가 제시하는 수업 방법은 오랜 세월 동안 더 나은 수업과 학생들을 위한 진지한 고민에서 나온 정공법이다. QR 코드로 제공되는 수업 자료를 당장 나의 수업에 도입하여 시도해볼 만한 여지가 무척 많다. 물론 저자의 방식이 온전히 내 것이 될 수는 없음을 안다. 진정한 고수는 하수에게 자신의 비결을 공개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하수가 고수의 비결을 손에 넣는다고 하더라도 시행착오를 거듭하여 자신의 방식으로 거듭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기고사에 대비한 팍팍한 진도 확보와 수업 중에만 실시해야 하는 수행평가에 떠밀려 교사와 학생이 인생이 만날 시간은 좀처럼 확보하기 쉽지 않은 우리 현실을 고려해볼 때, 이 책은 단순한 비결 그 이상의 것이다. 우리의 영어교육은 생각과 감정을 주고받는 소통을 목적으로 한 외국어가 아닌, 대학 입학시험의 한 교과목으로 전락(?)하였다는 서글픈 지적을 우리는 매일 접하고 살아간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학생들에게 영어라는 언어를 통하여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우도록 학생들의 삶을 담아내는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고 실천하고 결과를 얻어낸 보고서라 할 수 있다. 한편 수업 중 교사와 학생이 주고받는 대화문은 현실 세계의 남자 고등학교에서라면 매우 이례적일 것이라는 상상도 해본다.

 

흔들리는 영어교육에 대한 걱정과 희망을 말하며, 영어라는 그릇에 삶을 담는 방법을 고민하고, 삶을 가꾸는 데 도움이 될 영어 수업을 다루는 본문보다 더 인상적인 부분이 있다. 바로 책 끝에 제자들이 저자에게 보내온 편지와 감사의 글이다. 단언컨대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제자들의 감사와 인정을 받는 이상의 보상은 없을 것이다. 사람을 키워냈다는 보람 하나가 모든 어려움을 상쇄하는 게 교직이기도 하지만, 모든 교사가 그러한 보람을 오롯이 느끼지 못하는 것 또한 현실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이라는 단어의 본래 의미처럼 학생들이 가진 잠재력을 밖으로 끌어내는 방법에 목말라 있는 영어 교사라면 이 책을 반드시 읽어보시라 추천해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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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인문학 - 위태로운 존재들을 위한 견고한 철학적 기초
마틴 하글런드 지음, 오세웅 옮김 / 생각의길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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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철학계의 주목받는 스타이자 예일대학의 젊은 인문학과 교수인 마틴 하글런드의 이 책은 매우 광범위하고 견고한 인생 철학 영역을 다루는 야심작이다. 40쪽이 넘는 장황한(?) 도입부만 보더라도 그가 철학적인 삶의 의미와 이론을 제시하려는 시도를 눈치챌 수 있다. 서론에서 언급하듯 그의 이론적 기초와 구조는 다른 여러 사상가로부터 끌어낸 밀도 있고 심오한 성찰로 가득하며, 주로 카를 마르크스와 헤겔의 연구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그의 이론의 주요 구성 요소 중 하나는 고정성 개념이다. 의미 있는 삶을 위해 필요한 조건으로 최종결정을 강조한다. 우리는 죽음이 임박해서야 비로소 우리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게 되고,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묻는 어려운 질문에 맞설 의욕을 가지게 된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소중하기 때문에 최대한 잘 활용하려 한다. 우리가 함께한 시간은 영원히 지속할 수 없고 우리의 삶은 연약하다는 깨달음 덕분에 서로를 잘 보살펴야 한다는 생각이 빛을 발하게 된다. 저자는 이러한 생각을 떠받드는 두 개의 큰 줄기를 통속적 믿음과 정신적 자유로 구별 지어 말한다. 이 용어는 정신과 육체, 또는 신앙과 경제학으로도 바꿔 말할 수 있다.

 

1부에서 저자는 도덕적이거나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 고차원적 질서나 현세의 초월이 필요하다는 종교인들의 일반적인 주장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그 반대를 말한다. 영원함과 비교했을 때 우리 인간의 삶은 실로 하찮아 보인다. 우리의 삶은 무능하고, 낭비된 시간은 결코 회복할 수 없으며, 죽음이 영원한 종말이라는 것을 깨달아야만 우리가 하는 일에 진정한 신념을 갖게 된다. 이처럼 위험과 무능함에 얽매인 사람들이 일에 전념하는 것, 이것이 바로 그가 정의하는 통속적 믿음이다. 종교적 믿음은 영원함에 기초하기에 영원한 시간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으며 인간이 그 유한함을 경험하는 순간 곧 종말을 의미한다. 무엇이든 시작과 끝이 있다는 긴장감이 없으면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다.

2부에서는 우리 삶의 목표가 정신적 자유의 확장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가진 시간으로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당위가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우리 자신에게 물어볼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우리는 자신에게 할 일을 물어볼 수 있는 시간적 여유와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부를 축적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배고픈 새는 먹이를 찾느라 지저귈 여유가 없으며, 등 따시고 배부를 때 노래를 흥얼거리는 법이다. 저자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경제사상으로 독자를 이끌기에 앞서 카를 마르크스, 존 스튜어트 밀, 메이나드 케인스의 사상에 대한 실질적인 토론을 제공한다



그의 사고의 주된 추진력은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견해다. 자본주의는 사람을 자본 획득 수단인 임금 노동에 의존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정신적 자유를 저해한다고 말한다. 역설적이게도 임금 노동은 이윤을 창출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임금 노동에 대한 우리의 의존도가 자유 시간을 줄이고, 우리가 가진 자유 시간의 양이 우리의 정신적 자유를 결정한다. 그는 이윤 창출이 필요하지 않게 됨으로써 더 많은 자유 시간과 정신적 자유를 얻게 되는 민주사회주의 경제 모델을 옹호한다. 사실 부와 가치에 대한 이런 개념은 현행 자본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케인스의 예측과는 달리 자본주의는 결코 주 15시간 노동을 실현하지 못할 것이며, 사회민주적 재분배 정책은 그들이 재분배하려는 부의 총량을 감소시킨다는 이유로 수용되기 어렵다. 저자는 진정한 사회적 부를 지향하는 민주사회주의라야 우리가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과정에서 키르케고르, 크노스가르, 헤겔, 마르크스,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저서들을 통해 깊은 생각을 엿본다.

자본 축적의 역사와 함께 자본주의는 인류에게 필요한 체제였지만, 지금은 극복할 가능성을 지닌, 한편으로는 극복해야 하는 역사적 삶의 형태가 되었다. 자본주의가 겪는 내부 갈등은 가치에 대한 개념과 전체 자본 부를 최대화하려는, 미리 정해진 목표와 관련이 있다. 자본주의 하의 가치 척도는 왜곡되고 자기 모순적이다. 가치의 본질적인 척도는 일찍이 마르크스가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 시간이라고 정의하였는데, 본질적으로 잉여가치의 원천인 생활 노동 시간을 뜻한다. 인간의 노동이 창출하는 잉여가치가 이익으로 전환될 때 자본의 성장을 불러올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가치 개념 때문에, 필요한 노동 시간 감소로 이어지는 기술의 사용을 통한 발전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 시간의 감소는 모두에게 더 많은 자유 시간을 가져다줄 수 있지만, 자본주의에서는 잉여 시간이 잉여 노동으로 전환되어야 하므로 불가능하다. 대신 노동 시간 단축이나 실업 증가는 자본주의식 문제로 여겨진다. 이러한 요소들은 저소득 인구의 구매력을 낮추기 때문이다. 기술을 통한 보다 효율적인 생산으로 시장에는 상품이 넘쳐나고, 실업률 증가로 시장이 상품을 수용할 충분한 수단이 없어지면 과잉생산의 위기가 다가온다. 이것이 자본주의에 내재한 치명적 모순이다.





저자가 옹호하는 것은 '가치 회복'이다. 가치는 사회적으로 자유로운 시간으로 이해해야 하며 우리의 목표는 자본의 성장이 아니라 자유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가치를 이해한다면, 더욱 효율적인 생산을 유도하는 기술의 발전은 자본주의 체제처럼 인간의 노동력을 착취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회적으로 이용 가능한 자유 시간의 증가를 목표로 한다면, 우리의 삶을 어떻게 영위하겠느냐는 질문을 허락함으로써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그렇다면 국가가 가치의 재평가와 정신적 자유에 대한 우리의 헌신을 반영할 수 있으려면 어떤 변혁을 겪어야 하는가? 저자는 '민주사회주의'라는 제목의 마지막 장에서 이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그는 마르크스의 민주주의 헌신이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에 필수 불가결하며 자본주의는 실제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이에 대한 한 가지 예는 부의 분배에 관한 우리의 모든 민주적 결정들이 지속적인 폭리를 촉진할 필요성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자본주의하에서는 사회를 위해 부를 창출할 힘을 가진 자본가의 이익이 임금노동자의 이익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는 사실 때문에 평등이라는 민주적 원칙이 훼손되고 있다. 따라서 저자는 민주주의가 평등과 자유라는 고유의 원칙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가 극복되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그는 또한 민주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를 구분한다. 거의 모든 좌파 정치인과 활동가들이 표방하는 사회민주주의는 자본과 부의 재분배를 통해 사회 정의를 이루겠다는 목표를 표방한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는 본질적으로 모순된다. 복지정책과 국가규제가 생활노동력 착취를 막을수록 잉여가치를 추출하는 데 제약이 심해져 사회에서 재분배할 수 있는 부가 줄어든다. 사민주의 정책이 신자유주의 비판(경제 침체를 초래하고 가장 필요한 국민의 일자리를 없앤다는 것)에 항상 취약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근본적인 문제는 사회민주주의가 자본주의 생산 방식과 여전히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경제 위기의 시기에 복지 정책은 자본주의 경제의 인질이자 걸림돌인 셈이다. 사민주의적 접근법에서 놓치고 있는 것은 생산 방식의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놓고 다투어야 한다는 점이다.



올해 지금까지 접한 책 중 가장 어려운 상대를 만났다. 내용 자체가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지만, 저자가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설명하려 든다는 느낌을 받았다. 길고 지루한 산문으로 쓰여 있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집중하기 힘든 데다 게다가, 그러므로, 그리고처럼 불필요한 부사로 시작하는 문장도 부지기수다. 한 단락에서 비슷한 내용을 두세 번씩 언급하여 때로 읽기 성가시다. 적잖은 분량으로 보아 각기 다른 주제의 책 두 권을 한데 합친 것 같다. 읽을수록 저자보다 번역자의 노력과 인내심을 높이 사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많은 장점을 지녔다. 내용이 굉장히 밀도 있고 심오하며 주제별 접근성이 매우 좋다. 독자의 깊은 철학적 배경을 가정하지도 않지만, 전형적인 무신론자의 경솔한 논쟁도 아니다. 독자에게 무언가 이해를 요구하면서도 일견 심오하고 감동적이다. 꼼꼼한 독서가 요구되지만, 우리가 누구인지를 묻는 인류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많은 통찰과 관점으로 보상받는다. 이 책의 마지막 공헌은 종교의 지배로부터 신앙'을 되찾고 그 위에 해방 정치와 사회 정의라는 근본적으로 세속적인 구조를 구축한다는 데 있다. 자본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나 삶의 의미에 대한 세속적 이론, 그리고 우리 사회를 모두가 추구할 수 있는 사회로 변화시키기 위한 원칙을 찾고 있다면 진심으로 이 책을 추천한다.

 

#교양인문학 #내인생의인문학 #민주적사회주의 #마틴하글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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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인문학 - 위태로운 존재들을 위한 견고한 철학적 기초
마틴 하글런드 지음, 오세웅 옮김 / 생각의길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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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 자본주의의 모순을 지적하고 민주사회주의로 대안을 제시하는 예일대 스타 철학자 마틴 하글러의 최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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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가 안전한 세상 - 세계질서의 위기와 자유주의적 국제주의
G. 존 아이켄베리 지음, 홍지수 옮김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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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정치에 공헌하는 아이디어를 냈다고 칭찬할 만한 정치학자는 찾아보기 어렵지만, 프린스턴 대학의 교수이자 저자인 존 아이켄베리와 동료 다니엘 듀드니에게는 그들이 함께 1999년 ‘자유주의적 국제질서’ 개념을 세운 공이 있다. 세상에 선보인 뒤 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이 문구는 서구의 외교 정책 엘리트들이 건설하고 방어하고자 하는 세계를 상징하는 말로 채택되었다.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의 개념은 강대국들이 국제기구를 통해 상호 이익을 위해 협력하기로 동의하는 상황을 뜻한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말과 마지막 인간>을 펴낸 이후 수십 년 동안, 세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질서의 핵심을 강타한 비자유주의 정권의 부상과 세계적 위기를 보아왔다.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대내외적 도전으로 얼룩진 가운데 전문가들은 이 독트린의 장기적인 지속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해왔다. 저자는 이 책에서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와 국제 질서를 열렬히 옹호한다. 그는 이 교리의 발전 과정과 그것이 자신을 진단하는 현재 상황, 권위주의적인 중국과 같은 외부 위협 및 대중영합주의와 같은 내부 위협에 직면하여 어떻게 진화할 수 있는지를 추적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에 대한 현실주의자들과 수정주의 비평가들의 도전을 다룬다. 이 책은 이미 많은 이들에게 교리를 옹호하는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독자들에게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과거와 미래에 대한 많은 의문을 남긴다.

20년 전, 이 개념은 세계 정치와 경제를 운영하는 합리적인 설명인 동시에 기후변화와 같은 새로운 과제들을 다루어 줄 그럴듯한 열망처럼 들렸다. 그러나 지난 5년간의 세상은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의 신봉자들에게 친절하지 못했다. 지금의 세상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두 거인 미국과 중국 모두 국제공조 개념에 반기를 들었다고 볼 수 있다. 트럼프 행정부 시절 미국은 세계보건기구(WHO)와 파리 기후협정 등 여러 국제기구와 협정에서 탈퇴하고 중국에 무역전쟁을 일으켰다. 한편 중국은 남중국해에서 히말라야에 이르는 안보 문제에 대해 점점 더 일방적이고 공격적인 접근법을 취했다. 함께 어울려 지내기에 버거운 이웃을 자임한 모양새다.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에 관한 생각은 세 갈래 방향, 즉 민족주의 우파, 반제국적 좌파, 그리고 서구 밖의 비자유주의 국가들로부터 지속적인 이념적 공격을 받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중심으로 뭉친 '미국 우선주의' 민족주의자들에게 진보적 국제주의자들은 미국의 이익을 팔아먹은 '글로벌리스트'에 불과했다. 현재 세계 질서는 착취적인 신자유주의의 방어와 제국주의 시대에 뿌리를 둔 국제적 권력 구조와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비판 일부는 자유주의적 세계 질서가 단지 미국의 주도권을 위한 코드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중국, 러시아 등의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채택되었다. 저자는 이 무시무시한 정치적, 지적 공격에 대응하고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를 방어하려는 뜻에서 이 책을 써냈다. 그는 2세기에 걸친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진화를 추적함으로써 이것이 냉전 승리 이후 생산된 승리주의 풍미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뿌리 깊은 사상의 집합임을 보여준다.

저자는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다양한 측면을 설명하는 매우 명확한 공식을 개발하였고 이 용어를 ‘자유민주주의의 안보, 복지, 진보를 강화하고 촉진하는 방식으로 국제 질서를 조직하고 개혁하려는 생각과 행동의 전통’으로 정의한다. 그는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광범위한 의견을 아우르는 한편, 두 가지 핵심을 꾸준히 강조해왔다고 설명함으로써 이를 더욱 세분화한다. 여기에는 국제적 개방성(무역 및 외교 측면), 다자간 규칙 기반 기관, 민주적 연대 및 협력적 안보, 진보적 사회 목표 등이 포함된다. 나아가 서구 민족국가, 자유민주주의, 기술변화, 영미 패권주의라는 독특한 역사적 이념적 결합을 인정한다.

이 책은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에 대한 현실주의와 수정주의 비판 모두를 다루고 있다. 현실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의 싸움으로 서술하지는 않지만, 그들을 지적인 경쟁자로서 인정한다. 국가의 무정부 상태 대처 방법으로 현실주의에 초점을 맞추는 한편,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근대성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사고학파로 정의한다. 역사를 가로지르는 권력과 질서의 순환을 중시하는 현실주의자들과 달리, 자유주의 국제주의자들은 진보와 재난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과학·기술 진보와 사회 변혁이라는 계몽주의 프로젝트의 계승자들임을 명쾌하게 밝히고 있다.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기술, 사회, 정치혁명과 함께 현대 세계의 결과로 생겨난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된다.



저자는 주요 용어와 매개변수를 설정하고 정의한 후, 18세기와 19세기 초기 기반을 발판삼아 현대로 진입하는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역사적 과정을 도표로 보여주면서 이 책의 두 주연급 배우인 우드로 윌슨과 프랭클린 루즈벨트에게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윌슨의 이상주의적 비전과 전쟁 사이의 혼돈을 통해 국제주의의 진로를 도표화한 그는 프랭클린 루즈벨트와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른다. 국제질서가 훼손된 근본적인 원인을 냉전 종식 이후 자유 질서의 세계화로 규정하면서 냉전 시대에서 나타난 전후 질서와 복잡한 현대 국제주의의 위기를 탐구한다. 그러나 자유 질서의 세계화는 실제로 성공적이지 못했고, 그 실패는 질서의 지배기반뿐 아니라 정당성과 사회적 목적 또한 훼손했다고 지적한다. 그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의 공동의 이익을 하나로 묶는 실용주의적 접근 아래 교리의 활성화를 지원하면서 국제질서가 직면한 문제들이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지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시하며 책을 마무리한다.

이 책의 강점 중 하나는 저자가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이념적으로 복잡한 현실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적 국제주의 이론가들은 자신들의 교리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다양한 견해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교리의 실제 적용은 다른 외부 교리에 의해 영향을 받아왔음을 인정한다. 예를 들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질서의 복잡성을 논하고 그것이 어떻게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와 현실주의의 결합에서 생겨났는지를 설명할 뿐 아니라,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와 연관된 복잡한 인종적, 제국주의적 유산 역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에 대한 이념적 비판을 다루기 위한 저자의 강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종종 역사적 문제를 덮고 지나친다. 예컨대 1800년대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를 규정하는 데 도움을 준 파머스턴 경은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이라크 전쟁과 같은 현대 사건을 직접적으로 다루지만, 주요 인물인 우드로 윌슨과 프랭클린 루즈벨트에 관련된 역사적 사건 역시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윌슨의 결점, 그중에서도 인종적 관점을 거리낌 없이 논하면서도 대통령의 전체적인 모습을 다루지는 않는다.

저자는 ‘민주주의가 안전한 세상이어야 한다’는 윌슨의 이상적인 호소에 대해, 이는 서구 자유민주주의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전후 국제 질서를 개혁하자는 요구이며 민주주의의 생존을 위태롭게 하는 위험에 맞서라는 외침이라 말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대서양 헌장에 구체화된 루스벨트의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와 4가지 자유의 세계적 ‘보편성’에 대한 찬사에도 불구하고, 그는 많은 역사적 질문들을 회피하고 있다. 미국이 2차 세계대전 중 일본, 독일, 이탈리아 시민들을 수용하는 동시에 소련을 인정했던 것과 비교할 때,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상반된 측면을 독자들은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괜한 트집 잡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그것을 정당화하기에는 충분한 역사적 공백이 있는 것 같다. 또한, 이데올로기의 역사를 추적할 때에도 주요 이론가들의 행동이 이데올로기와 일치하는 정도는 언급할만하다.




한편, 독자의 이념적 선호에 따라 이 책은 세간의 호불호에 영향을 미칠 것 같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국제 개방, 다자간 제도, 협력적 안보 협정을 통한 민주적 연대는 일반적으로 현대 외교의 기반이라고 여겨졌다. 심지어 현실주의 비평가들도 일반적으로 이러한 원칙들의 일반적인 건전성에 대한 저자의 평가에 동의할 것이다. 대부분 국가는 독특한 자국 환경에 따른 사소한 변화에도 이러한 일반적인 원칙에 동의할 것이다. 다만 저자는 진행 문제를 논할 때 다소 난관에 봉착한다. 이 책은 정부가 사회경제적 진보의 아바타로서 자유민주주의의 역할을 해내는 매개체 정도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누구에 의해 그리고 무엇에 의해 정의되는 진보란 말인가?

그가 칭찬하는 많은 경제적, 사회적 개혁들은 그가 앞서 인용한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자들에게는 모욕일지 모른다. 저자가 거듭 인용하는 1848년 혁명 이후 노동권과 국가 워크숍을 비난한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 루스벨트의 뉴딜을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짐작만 할 뿐이다. 역사적 의미를 넘어, 저자의 진보에 대한 의견은 정부의 역할과 국가가 이러한 불만을 해결할 책임이 어느 정도인가에 대한 정책적 의문을 제기한다. 진보국가의 비전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면 저자가 정부의 역할에 얼마나 열정을 쏟을지 궁금하다. 대외정책 측면에서 세계가 인식된 진보의 전조, 즉 서구를 지속해서 추격할 가능성을 남겨둔 것으로 보인다. 대체로 개방 무역, 다자 기관, 집단 안보를 지지하는 중동, 아프리카, 아시아 지역의 민주주의 국가가 지닌 진보 개념이 독일, 프랑스, 미국이 가진 진보에 대한 최신 개념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계속 배척되어야 마땅한 것인가?

만일 바이든 정부가 이 책의 의미와 적용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면, 이 책이 말하는 철학을 미국 국외는 물론 국내에서도 미국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바꿀 기회는 국정 실무자들의 손에 달려있다. 따라서 미국 행정부는 저자의 실용주의, 어쩌면 약간 현실주의적인 비전을 따르는 것이 현명할 것 같다. 미국 정부는 자신을 이상적인 사회를 향한 세계적 행진의 원대한 비전이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를 안전하게 만들기 위한 실용주의적이고 개혁 지향적인 접근법으로 정의해야 한다.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를 건설하고 수호하려는 노력은 유별난 이상주의적 행위가 아니라, 자유와 번영과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꼭 필요한 노력이다. 결국, 절대자의 도시가 아닌 ‘인간’의 도시에 사는 우리가 천국을 땅으로 끌어 내릴 도리는 없다는 말이다.

#사회사상 #민주주의가안전한세상 #존아이켄베리 #국제정세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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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가 안전한 세상 - 세계질서의 위기와 자유주의적 국제주의
G. 존 아이켄베리 지음, 홍지수 옮김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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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과거와 현재를 바로 보게 해주는 정통 진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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