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속의 산
레이 네일러 지음, 김항나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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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tific Fiction에서 Speculative Fiction으로 한층 진화하는 신예 작가의 기염. 지구가 마치 자기 것인 양 구는 닝겐들, 당신들부터 대화를 나누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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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보다
셔우드 앤더슨 지음, 박희원 옮김, 김선옥 해설 / 아고라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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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가의 생애

셔우드 앤더슨(Sherwood Anderson, 1876~1941)은 미국 오하이오주 캠든에서 태어나 빈곤한 유년기를 보냈다.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며 경험을 쌓았다. 광고업과 비즈니스 분야에서 어느 정도 성공했으나 문학에 대한 열망으로 직장을 그만두고 글쓰기에 전념하였다. 그의 대표작인 단편집 와인즈버그, 오하이오(1919)는 미국 모더니즘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내면 심리의 복합성과 개인의 소외감을 탁월하게 묘사하였다.

 

2. 작품에 드러나는 작가의 세계관

앤더슨의 작품에는 20세기 초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에서 겪는 개인의 고립과 소외, 인간 내면의 억압된 욕망과 심리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는 사회의 관습과 억압적인 구조가 인간의 진정한 자아 발견을 방해한다고 보았으며, 작품 속 인물들은 대부분 내면의 혼란과 갈등 속에서 정체성을 찾기 위해 투쟁한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대한 관심을 중심으로 새로운 문체적·주제적 지평을 열었다는 점에서 한국 작가 김유정과 가장 흡사해 보인다.


3. 다른 미국 작가들에 미친 영향

앤더슨은 미국 문학의 중요한 전환점 역할을 하였으며, 특히 어니스트 헤밍웨이, 윌리엄 포크너, 존 스타인벡 등의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사실주의와 모더니즘의 결합을 통해 인물들의 심리 묘사에 중점을 둔 새로운 서술 방식을 제시했다. 헤밍웨이는 앤더슨으로부터 간결한 문체를, 포크너는 복잡한 내면세계 묘사를 배우는 등 각기 다른 측면에서 앤더슨의 영향을 받았다.

 

4. 오늘의 우리에게 건네는 작가의 위로

앤더슨의 이야기는 겉으로는 조용하지만 속에서는 열정이 끓어 넘치는 사람들의 일상을 잘 묘사한다. 잘나가는 성공담보다는 실패담을 통해 어딘가 마음이 비어있는 순간을 오래 들여다본다. 사람들이 서로 스쳐 가면서 말은 주고받지만 정작 마음은 잘 와닿지 못한다는 사실을 차분히 보여준다. 그래서 그의 단편을 읽고 나면 큰 사건이 없어도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다.

 

앤더슨의 글에서는 이야기의 한가운데에 물건을 놓아둔다. 달걀은 무언가 잘될 것 같은 기대를 품게 하지만 동시에 쉽게 깨질 수 있는 취약성을 드러내는 물건이다. 우유병의 반질반질한 표면은 깨끗하고 신선해 보이지만 한편으로 상하기 십상이다. 씨앗은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지만 흙과 날씨, 사람의 손길이 조금만 어긋나도 금세 자라지 못하는 물건이다. 이런 물건들은 우리가 믿는 하면 된다같은 말이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지 조용히 말해 준다.

 

등장인물들은 자주 자기 자신과 싸운다. 나는 바보다의 주인공은 이성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 때문에 괜한 허세를 부리다가 자신을 미워하게 된다. 여기서 바보 같음은 타고난 결함이 아니라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비뚤어진 결과일 뿐이다. 어느 현대인의 승리: 변호사 불러줘요에서는 얄팍한 승리감이 얼마나 빈약할 수 있는지 드러난다. 절차대로 이겼다고 말하는 순간, 정작 사람 사이의 의미는 사라진다. 겉으로는 승리처럼 보이는 일이 속으로는 패배일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예술과 말의 힘도 흔들린다. 슬픈 나팔수들에서 연주자들은 사람들을 즐겁게 하려 애쓰지만 그 소리에는 어딘가 외로운 기운이 섞여 있다. 소리는 관객에게 닿는 다리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마음을 숨기는 가림막이 되기도 한다. 앤더슨은 잘하고 못하고의 기준으로 사람을 재지 않는다. 끝까지 표현해 보려는 마음 자체가 이미 사람을 지탱해 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몸과 시선의 문제도 솔직하게 다룬다. 그 여자 저기 있네. 목욕중이야에서 목욕은 깨끗해지는 일이면서 숨기고 싶은 내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서로를 슬쩍 보거나 피하고, 욕망을 규칙의 말로 포장하려다 더 큰 침묵에 빠진다. 앤더슨은 누구를 어떻다고 먼저 판단하지 않는다. 그는 사람들이 외로운 마음을 어떻게 다루지 못해 엇나가는지를 찬찬히 따라간다.

 

장소도 사람의 어깨를 누른다. 어느 낯선 동네에서의 길은 자유의 상징이 아니라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다는 불안의 길이다. 형제에서는 견디기 힘든 외로움을 달래고 누구와든 이어져 있다는 위안을 얻기 위해 신문 속 인물들까지 자신과 같은 결핍을 지닌 형제라 사칭하는 고립된 노인의 이야기다. 전쟁은 총소리보다 먼저 사람들의 삶이 허물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멀리서 들려오는 구호와 소문이 사람의 마음을 먼저 소모시킨다는 점이 핵심이다.

 

앤더슨의 문장은 짧고 단정하다. 꾸미는 말이 적고, 망설임과 멈칫거림을 그대로 둔다. 그의 인물들은 완성된 사람이 아니라 아직 만들어지고 있는 사람이다. 실패는 낙인이 아니라 진실이 조금씩 드러나는 과정이다. 그래서 달걀의 껍질, 우유병의 유리, 씨앗의 작은 몸체는 허무의 표시가 아니라 우리가 손으로 만지고 돌볼 수 있는 삶의 크기로 느껴진다.

 

결국 앤더슨의 세계에서는 사람의 허물을 쉬이 나무라지 않는다. 그는 산업화 시대의 미국식 성공 이야기의 밝은 면만 보지 않고 그 뒤에 남는 빈자리와 그림자를 오래 바라본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어긋난 약속, 부끄러운 고백, 잘 깨지는 물건들 사이에서 그는 다시 시작하려는 작은 움직임을 발견한다. 그의 단편을 읽는 일은 실패가 많은 세상에서 그래도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 연습이다. 이 연습이 남기는 태도는 단순하다. 서로의 부족함을 알아도 등을 돌리지 않는 마음이다. 이것이 앤더슨 소설이 건네는 가장 조용하지만 단단한 힘이다.

 

그래서 책을 덮고 나면 깨닫게 된다. 나만 바보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사실 말이다. 다들 겉으로는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저마다 달걀 하나씩을 안고 조심조심 하루를 건너는 사람들이다. 소리 내어 말하지 않을 뿐 마음자리는 크게 다르지 않다. 실패와 수치의 순간도 나만의 흠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있는 사연이라는 점을 부각한다. 그 생각을 붙들면 숨이 조금 길어지고 어깨가 조금 펴진다. 오늘도 내 보폭대로 걸어가도 괜찮다는 용기가 생긴다. 앤더슨의 작품을 읽는 일은 결국 괜찮다, 너만 그런 게 아니다라는 말을 배우는 것이며, 그 말을 먼저 나에게 조용히 건네보는 연습이다.

 

#한달한권할만한데 #셔우드앤더슨 #나는바보다 #아고라출판 #벽돌책격파 #온라인독서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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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어떻게 민주주의를 배신하는가 - 우리가 법을 믿지 못할 때 필요한 시민 수업
신디 L. 스캐치 지음, 김내훈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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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같은 교직에 있는 대학 후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선배, 요즘 너무 힘들어요. 주위 선생님들이 저를 대놓고 무시하고, 이제는 법적으로 대응해서라도 벗어나고 싶습니다.” 순간 멈칫했다. 대학 시절 그 친구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단 혼자 있는 걸 좋아하던 내성적인 학생이었다. 그런 그가 교사가 되어 나에게 조언을 구하고 있다니. 평소 연락을 자주 하던 사이는 아니어서 잠깐 고민했지만, 결국 이렇게 말했다. “식사나 커피 한 잔이라도 같이하면서 진솔한 대화로 풀어보는 게 어때? 인간관계는 법보다 가까운 데서 작용하는 무언가가 있으니까.” 사실 나 자신도 확신이 있었던 건 아니다. 법이 분쟁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수단인 것은 분명하지만,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데 필요한 유일한 답은 아니지 않은가.

 

이 책의 저자도 이와 비슷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한다. 그는 헌법학자로, 전쟁이나 내전으로 무너진 국가(예컨대 이라크)에서 어떻게 하면 헌법을 제대로 세워 나라를 재건할 수 있는지 연구해온 사람이다. 오랫동안 그는 법과 헌법이야말로 사회 협력과 평화를 지키는 핵심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믿음이 얼마나 일방적이고 부족한 생각이었는지 깨달은 뒤에 쓴 반성문처럼 읽힌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법이 있다고 해서 공동체가 저절로 협조적이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협력의 문화가 먼저 있어야 법도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이라크의 사례를 보면 당연하게 들릴 수 있지만 그는 이 원리를 특정한 상황이 아닌 보편적인 원칙으로 확장한다.

 

더 많은 법률을 통해 사회를 고치자는 것이 아니다. 나는 전 세계를 가로질러 개인과 개인을 연결하는 기술이 전례없이 발전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법과 규칙, 위계질서에 기반한 리더십이라는 과거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민주주의가 작동하게 할 때라고 믿는다. 그러니까 시민을 한 명, 한 명씩 바꿔보자는 거다.” (33)

 

물론 그렇다고 법이 필요 없다는 건 아니다. 다만 법만으로는 사회 질서를 세울 수 없으며, 대신 공동체가 지켜야 할 여섯 가지 생활 원칙을 제시한다. 쉽게 말해 우리 서로 조금 더 잘 지내자, 배려하자는 이야기다. 얼핏 식상하고 순진하게 들릴 수 있지만 저자는 매우 진지하다. 과거 아리스토텔레스나 키케로가 강조한 공공선을 위한 시민의 미덕과 맞닿아 있다. 이 대목에서 떠오르는 말이 있다. 미국의 법관 러니드 핸드 판사는 이렇게 말했다. “사회의 화합이 깨지면 어떤 법정도 해결하지 못한다. 반대로 화합이 굳건하면 법정이 필요 없다. 모든 문제를 법정에 떠넘기면 결국 화합의 정신마저 사라진다.” 저자의 생각과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말이다.

 

현실의 갈등 대부분은 시민과 국가 간의 대립보다, 시민 집단끼리의 이해 충돌에서 비롯된다. 예컨대 집값 안정 정책은 기존의 주택 소유자에게는 유리해도 무주택자에게는 불리하다. 노인 연금 확대는 젊은 세대의 세금 부담으로 이어진다. 기후변화 대응 정책은 미래 세대에게는 필요하지만, 현재 세대에겐 불편함을 안겨준다. 이런 문제를 모두 법으로 해결하려 들면 정치는 결국 집단 이익의 힘겨루기로 변질한다. 이를 벗어나려면 개인적 이익을 넘어 사회 전체의 행복과 공공선을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최근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윤석열 전 대통령의 탄핵과 파면 사례는 오히려 법이 민주주의의 장애물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줬다. 자칭 법 전문가이지만 시민성을 결여한 그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라며 비상계엄 선포를 앞세워 국회와 정적을 압박하려 했고 그 결과 사회는 극도의 혼란을 겪어야 했다. 법적 형식이 앞세워지는 과정에서 신뢰와 협력은 오히려 사라지고 말았다. 법비들이 저지른 만행으로 법이 갈등을 해소하기는커녕 심화시킬 뿐이었다. 법적 절차는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도구이지만, 동시에 법체계 운용자가 법을 지키지 않거나 그 권한을 남용하면 정치권력의 정당성보다 법이 오히려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방해물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는 대표적 사례로 남는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협력을 필요로 하고, 협력은 공유된 지식을 필요로 한다. 공유된 지식은 광장을 필요로 한다.” (151)

 

저자는 법적 강제력에만 의존하면 공동체의 문제가 독재나 권위주의적 강압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한다. 그래서 법과 제도에만 기대지 않고 도덕적이고 자발적인 시민의 미덕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게 참 어려운 일이라는 것도 저자는 잘 알고 있다. 그가 제시하는 해결책이라는 것이 결국 지도자를 맹신하지 말고, 책임 있게 권리를 행사하며, 이웃과 적극 소통하고, 스스로 자급자족하려 하고 환경을 신경 쓰며, 다른 집단과 공감하자는 다소 추상적이고 도덕적인 권유 정도에 그치고 있다. 이런 조언들은 맞는 말이지만 실행하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저자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공공선을 논의하는 피아자(광장)’ 개념을 제시한다. 그러나 현대처럼 복잡하고 규모가 큰 사회에서 이게 얼마나 가능할까? 결국 그는 현실적으로 완벽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가 지적한 문제와 고민의 방향성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다.

 

저자는 놀이터에서 낯선 아이들이 힘을 합쳐 막힌 물펌프를 뚫는 모습을 보고 떠오른 아이디어에서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왜 어른들은 문제만 생기면 법부터 찾으려 하고, 아이들처럼 스스로 대화로 해결하려 하지 않는지 의문을 품었다. 그는 시민으로서 우리가 바꿔야 할 세 가지 태도를 강조한다. 첫째, 방관자를 죄 없는 존재로 보지 말고 어려움에 부닥친 이웃을 돕는 것을 도리로 삼아야 한다. 둘째, 관계망은 작을수록 건강하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지역 공동체 중심의 소규모 네트워크를 유지해야 한다. 셋째, 정기적으로 사람들이 모여 이름을 알고 신뢰할 수 있는 광장같은 공간에 참여해야 한다. 성공적인 작은 공동체는 구성원 간의 신뢰와 존중을 바탕으로 위계보다 대화를 중시하며, 개인의 어려움을 함께 짊어지는 민주적인 조직이다. 또한 법에만 의존하지 않고, 법이 허용하더라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선택하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 책이 독자들이 스스로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지역 사회를 위해 실험하고 변화시켜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법이 평등으로 나아가는 길목에 놓인 장애물을 제거할 수는 있어도, 그 길에 필요한 참여와 협력을 유도한다는 보장은 없다. 그 역할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215)

 

결론적으로 이 책은 완전한 해답을 주진 않지만, 우리가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완전할 수 없고, 그 불완전함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책장을 덮고 나니 앞서 후배 이야기가 떠올랐다. 법적으로 해결하겠다는 그의 말을 곱씹으면서, 관계의 회복은 법이 아니라 마음의 공간에서 시작된다는 메시지가 더 크게 와닿는다. 저자의 통찰은 결국 거창한 이론이 아니라, 우리가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따뜻한 제안이다.

 

#정치사회 #정치외교 #한국정치 #법치주의 #법은어떻게민주주의를배신하는가 #위즈덤하우스 #신디스캐치 #법이면다냐 #법만능주의 #리뷰어스클럽 #책추천 #법과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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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어떻게 민주주의를 배신하는가 - 우리가 법을 믿지 못할 때 필요한 시민 수업
신디 L. 스캐치 지음, 김내훈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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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따지기 좋아하고 법률 소송이 능사이지만 법대로 안 돌아가는 법치주의 국가 대한민국 국민이 꼭 읽어보면 좋은 어느 저명한 법학자의 가벼운 반성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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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역사 - 소리로 말하고 함께 어울리다
로버트 필립 지음, 이석호 옮김 / 소소의책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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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아늑한 카페에서 차 마시며 책을 읽는데 들릴 듯 말 듯 귀에 거슬리지 않을 만큼 기분 좋은 저음의 재즈 선율이 깔린다. 술기운에 떠드느라 왁자지껄한 선술집에서 강한 비트의 록 음악에 맞춰 심장이 쿵쾅거린다. 온갖 종류의 향기가 코를 자극하는 백화점 향수 판매장에 우아한 클래식 피아노곡이 흐른다. 주말에 가족과 함께 찾은 대형 할인 매장에는 신나는 힙합이 울려 퍼진다. 그런데 이처럼 매일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자연스럽게 접하고 살면서, 여태까지 음악의 역사에 대해 궁금해한 적이 있었던가?

 

이 책은 고전 기타리스트이자 음악학자인 저자가 집필한 음악사 입문서로, 고대에서 현대까지 서양 음악의 주요 흐름을 친절하고 쉽게 소개하고 있다. E.H. GombrichA Little History of the World 시리즈에서 영감을 받아 복잡하고 방대한 음악사를 일반 독자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그리스 시대의 음악 철학에서 시작하여 중세 교회 음악, 르네상스 다성음악, 바로크 시대의 대가들(바흐, 헨델 등), 고전주의(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낭만주의와 현대 음악까지 시대별로 정리되어 있으며 마지막에는 재즈, 영화 음악, 대중 음악, 그리고 세계 음악의 통합적 시선까지 확장되어 폭넓은 음악 문화의 역사적 맥락을 조망한다.


처음 이 책을 집어 들었을 때, 여느 음악사 서적처럼 유럽 중심의 고전 작곡가와 작품, 시대별 음악 양식의 발전사가 소개되어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음악사 계보를 떠올리며 어느 정도의 익숙함과 약간의 지루함을 감수할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었다. 이전에 접했던 음악사 책들이 대부분 그러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던 탓이다.

 

그러나 이 책은 처음 몇 장을 넘기기도 전에 내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유럽 고전음악에 대한 언급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며, 본질적으로 이 책은 음악이라는 인류 보편의 예술을 지리적·문화적 경계를 넘어 통시적 시선으로 풀어낸다. 선사시대부터 현대 대중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와 공간 속에서 음악이 어떻게 생성되고 확산되었는지를 폭넓게 탐구한다.

 

특히 인상적인 점은 단순한 시간순의 나열이 아닌, 음악이 인간 공동체와 맺는 관계를 중심으로 역사를 재구성한다는 것이다. 원시 부족의 의식에서 울려 퍼진 타악기의 리듬, 중세 종교와 함께 성장한 성가, 제국의 교역로를 타고 전파된 악기와 선율, 그리고 현대 대중음악의 산업화까지모든 흐름이 유기적인 하나의 서사로 엮인다.

 

문체는 서정적이고 설명적이며,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음악 이론에 대한 배경지식이 부족한 독자라도 부담 없이 내용을 따라갈 수 있을 만큼 친절하게 구성되어 있다. 특히 교차 수분(cross-pollination)’이라는 개념을 통해 서로 다른 문화권의 음악이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진화했는지를 조명하는 대목은 이 책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아프리카 리듬이 재즈와 블루스의 뿌리가 되고, 라틴 음악이 힙합과 결합되며, 인도 전통 음악이 영국 록 밴드에 영향을 미치는 등 장르 간 상호작용의 역동성이 실타래처럼 펼쳐진다.

 

저자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그리스의 의례에서부터 아랍의 마캄, 인도의 라가와 탈라, 중국의 금, 인도네시아의 가믈란, 아프리카의 폴리포니 등 주요 음악 전통을 폭넓게 조명한다. 이들은 각기 고유한 특색을 지니는 동시에 서로 교류하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해 왔다. 이러한 관점은 유럽 음악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유럽 음악은 고립된 전통 속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기보법의 발전, 지중해 문화의 융합 등 외부 문명과의 접촉을 통해 변화해 온 유기체적 존재로 그려진다.

 

악기의 발명과 개량, 오페라와 오케스트라의 등장, 연주회장과 극장의 확산은 사회 구조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교회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귀족과 중산층의 후원이 활발해지면서 음악은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닌 대중의 문화로 자리를 잡았다. 산업혁명과 기술의 진보는 음악 출판업과 교육 기관, 상설 공연장의 발전으로 이어지며 음악의 산업화를 가속했다.

 

20세기 이후, 음악은 예술을 넘어 사회적 메시지와 정체성을 표현하는 강력한 수단이 되었다. 흑인 공동체의 저항과 희망을 담아낸 블루스, 재즈, 이후의 팝, , 힙합은 억압받는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음악은 이제 누구나 만들고 소비할 수 있는 민주적 형태로 변모하였으며, 디지털 기술과 인터넷의 발달은 음악의 생산과 유통에 지각변동을 가져왔다. 음악 산업은 글로벌 자본시장의 중심축으로 부상하였고, 장르와 국경을 넘나드는 거대한 생태계가 형성되었다.

 

이 책은 위대한 작곡가들의 삶과 창작 활동 역시 놓치지 않는다. 힐데가르트 폰 빙엔, 헨리 퍼셀, 헨델, 바흐,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등 고전주의 음악가들의 실험은 음악사의 흐름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밥 딜런과 아레사 프랭클린이 대중성과 메시지를 동시에 추구하며 새로운 문화의 장을 열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음악사에서 오랫동안 소외됐던 여성 음악가들에 대한 조명이다. 피렌체의 귀족 여성, 19세기의 여성 피아니스트들, 클라라 슈만의 사례를 통해 여성의 음악 활동이 곧 사회적 금기와의 싸움이었음을 강조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음악사의 또 다른 축이자 오늘날 여성 예술가들의 기반이 되었다.

 

무엇보다 이 책은 단순한 음악사 개론서가 아니다. 음악이란 무엇인가, 음악은 왜 존재해왔는가, 음악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음악은 인간 감정의 언어이며, 역사와 문화의 기록이고, 저항의 목소리이며, 일상의 리듬이다. 책은 방대한 범위를 다루면서도 명료한 서술을 유지하며, 독자에게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음악의 자리를 되돌아볼 기회를 제공한다.

 

읽는 내내 지루할 틈이 없었다. 각 장은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처럼 구성되어 있으며, 독자는 시공을 초월한 문화 여행에 동참하는 듯한 몰입감을 경험하게 된다. 책을 덮고 난 뒤에도 음악에 대한 지식 이상의 것들이 남는다. 그것은 음악을 통해 인간과 문명을 새롭게 바라보는 시선이다.

 

이 책은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뿐만 아니라, 문명과 인간을 이해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유익한 독서가 될 것이다. 재미와 정보, 예술성과 학문성을 모두 겸비한 이 책은 애정을 담아 추천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음악은 언제나 인간과 함께 해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이 책은 그 긴 여정에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소중한 기록이다.

 

#인문학 #음악의역사 #바로크 #낭만주의 #소소의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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