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디서 살아야 하는가 - 인문학자가 직접 고른 살기 좋고 사기 좋은 땅
김시덕 지음 / 포레스트북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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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가 걸려 왔는데 목록에 저장되지 않은 낯선 번호다. 조금 불안하지만 일단 받아본다.

,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사장님, 기가 막히게 좋은 토지를 소개해 드립니다.”

웬 여성이 배우 전도연처럼 코 먹은 소리로 다짜고짜 나를 사장님으로 부르는 전화라면 일단 주의할 대상이다.

, 일단 저는 사장님이 아니고요, 아니 그렇게 좋은 토지라면 직접 사시지 왜 저한테 전화를 거셨어요? 그리고 이 전화번호는 또 어떻게 아셨데요?”

“..... 딸깍.”

이런 뻔한 내용으로 투자를 권유하는 기획부동산의 스팸 전화는 업계의 유명 인사 김미영 팀장이 은퇴한 이후 서부지검 검찰수사관 다음으로 자주 온다. 투자 소리에 혹할 만도 한데 워낙에 금전 다루는 감각도 젬병인데다 부채도 자산이라며 대출만 잔뜩 받아 둔 나는 빚 부자다. 요즘처럼 금리가 올라 월급에서 더 많은 액수의 이자가 공제될 때면 마치 몸속의 혈액이 빠져 나가는 기분이다. 업자들에게 당하고도 속이 상해 말을 안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의외로 이런 묻지마 투자에 혹해서 거금을 날린 사람들이 주위에 전혀 없지는 않다. 글쎄, 나 같은 유리 지갑 월급쟁이한테는 해당 없으니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가?


좋은 정보는 절대로 나에게까지 순서가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세상에 공짜는 없다라는 말은 만고의 격언이다.(27)

 

일어일문학과 유학생 출신으로 일본에 정통하고 한국의 미래에 관심 많은 인문학자이자 자칭 도시 문헌학자인 저자는 부동산 투자자들에게 소위 전문가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방법을 상세히 일러주기 위해 작심하고 이 책을 썼다고 한다. 특이하게도 그는 지방이든 도심지든 자가용 말고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주로 급변의 조짐이 보이는 현장을 탐방하며, 그렇게 해서 택지개발, 재개발, 재건축 예정지를 답사한 그의 기록은 투자자들에게 훌륭한 보고서 역할을 해왔다고 한다. 투자자가 가장 확실하게 매물을 확인하는 방법은 직접 땅을 둘러보는 것일 테지만, 친절하게도 그럴 시간과 여력이 없는 이들을 위해 저술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경인 운하, 부천 항, 아라뱃길, 세종시 이전, GTX 건설 등 저자가 제시하는 굵직한 국책 개발사업 사례들은 사실 부동산을 잘 모르는 필자 같은 사람에게도 낯설지 않다. 국책사업 자체가 단시일 내에 이루어지지도 않거니와 국민에게 의무적으로 정보를 공개해야 하기에 지역 개발의 역사나 동향까지는 모르더라도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귀동냥 수준이 아니라 내 집 마련을 위해 주거지를 옮겨야 하거나 자본 증식을 위해 투자하는 처지가 되었을 때는 얘기가 전혀 달라진다는 점이다. 정확한 정보의 확보가 매우 중요해지는 시점이다.



땅의 가치를 읽어내는 다섯 가지 시선을 부제로 부동산 투자자를 위한 큰 그림 안내서인 이 책은 전체 25장으로 구성되었다.

 

1부 국가 프로젝트로 읽어내는 부동산의 역사

1장 도시기본계획의 탄생과 변화에서는 지도상에 나타나지 않는 정보 때문에 불이익을 당할 일은 없어야 할 것이라면서, 독도법을 익히고 임장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은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도심 정비사업에 익숙하지 않은 경우라면 식민지 시기와 현대 한국의 각종 개발계획 평면도를 살펴보면서 현재의 개발 추진 상황과 비교해 볼 것을 추천한다. 또한, 군사시설이 포함된 지역의 경우 주변에서 호재라고 부추기는 정보들의 진위를 어렵잖게 파악할 수 있음을 조언한다.

2장 경인 운하 및 행정수도 계획의 변천사에서는 오래전부터 공론화되었던 경인 운하, 한강 다목적댐, 행정수도 백지화 계획이 실제로 아라뱃길, 신곡보, 세종특별자치시의 형태로 실현되는 등 현실화하는 경우가 잦기 때문에 기획 부동산에게 속기 쉬운 소재임을 경고한다.

 

2부 살기(living) 좋고 사기(buying) 좋은 부동산의 조건

3장 남북관계와 부동산의 상관관계에서는 행정수도 이전계획의 경우 남북한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냉전 시대의 산물이며 북한의 장사정포 사거리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였음을 알려준다. 당시 여건상 국토의 균형적인 발전보다는 북한의 안보 위협이 우선순위였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전국 곳곳의 지하상가와 터널은 방공호와 진지였으며, 강남 일대의 오래된 아파트에는 소총 사격이 가능한 총안이 아직도 남아있으며 서래 마을에는 벙커를 짓기도 했다. 서울의 주요 건물 옥상에는 방공포대가 설치되었고, 반포대교 아래 잠실대교는 폭격에 대비한 예비교량이었으며 과천 서울대공원의 넓은 땅은 본래 무기 개발 연구소 부지였다가 공원으로 바뀐 것이 그 사례다.

 

역시 호재가 아닌 곳은 소비자와 투자자가 몇 번이고 발품을 팔아서 확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은 각자도생 사회입니다.(182)

 

4장 삶과 집값을 붕괴하는 재난 위험에서는 주거와 토지를 위협하는 요소로 산사태, 지진, 지반침하, 토양오염, 공해, 상습침수, 상수도 공급난 등에 주의할 것을 주문한다. 이런 재난 요소를 안고 있더라도 행여나 집값과 땅값이 떨어질까 봐 쉬쉬하는 분위기가 있으며 현장을 확인하는 발품을 팔지 않고서는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움을 상기시킨다.

 

국립재난안전연구원에서 2021년에 작성한 <시나리오로 본 우리나라 미래 재난 전망>을 보면, 재난 연구자들은 한국에서 특히 발생 위험이 높은 재난으로 풍수해, 폭염, 감염병, 미세먼지, 정보통신, 화재, 산업재해 등을 꼽았습니다.(225)

 

5장 재개발과 교통망 호재의 실체에서는 대도시 외곽이나 농촌 지역에서 발생하는 대표적인 두 가지 문제로 부실한 대중교통과 도보권에 편의시설이 없어 심각한 식량 곤란을 겪는 현상인 푸드 데저트를 지적하는데, 그 원인은 심각한 인구 감소에 있다.

 

신도시나 택지를 개발할 때 구역 안의 모든 원도심을 일괄적으로 철거하지 말고, 신도시 속의 원도심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일부 남겨두는 정책적 배려가 좀 더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269)

 

도시 개발의 역사를 배우고 이런저런 상식도 넓히고 부동산의 개념을 새로이 하는 것도 좋지만, 결국 이 지침서의 결론은 살기 좋고(good to live) 사기 좋은(good to buy) 땅을 사려면 땅을 잘 보고 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현장에 가서 땅을 밟고 다니면서 높낮이를 확인하고, 공기 냄새도 맡아보고, 지역을 운행하는 버스와 열차를 타보면서 자가용이 없을 때 어떤 불편함이 있는지 겪어보시라 조언한다. 당장 내 가족이 사는 집 한 칸 마련하는 것만도 일평생의 노력과 수입이 필요한 처지에 땅 투자가 웬 말이냐 싶지만, 이 책이 주는 조언이 절대 헛되지 않을 날은 꼭 오리라 믿어본다.

  

#경제 #우리는어디서살아야하는가 #토지거래 #부동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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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디서 살아야 하는가 - 인문학자가 직접 고른 살기 좋고 사기 좋은 땅
김시덕 지음 / 포레스트북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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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학 개론 교과서로 낙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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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 나는 이제 다르게 읽는다 - 도스토옙스키부터 하루키까지, 우리가 몰랐던 소설 속 인문학 이야기
박균호 지음 / 갈매나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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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사회생활 출발점을 스무 살이라 치고, 그가 얼추 삼십 년 동안 무엇인가 한 가지에 천착한 결과물(여기서는 책이 되겠다)을 접한다면 어떤 심정일까. 일면식도 없던 사이지만 나이, 대학의 전공, 직업, 그리고 책을 좋아하는 점까지 나와 많이 닮은 듯하니 없던 친근감이 생기는 것 같다면 좀 억지일까. 심지어 그의 책을 통해 SNS상으로 친구가 되었다.

 

그러나 단순히 닮은 점이 좀 있다는 이유로 동질감을 주장하기에는 좀 뜬금없다. 엄청난 독서와 저술 활동으로 다져진, 내가 미처 몰랐던 그만의 넘사벽내공까지 퉁 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실 저자와는 정반대로 나는 어렸을 적 내 딸아이에게 머리맡 책 읽기를 해준 적이 다섯 손가락에도 안 꼽히고, 책은 읽었으되 고전 소설보다는 최신 정보의 대중 서적 위주였으며 읽은 책은 십 수년간 책장에 전시용으로 묵혀두었다가 이사할 때가 되어서야 급히 처분했던 적이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20권의 소설 가운데 겨우 <분노의 포도> 한 권을 그나마도 학부생일 때 읽어봤을 뿐이라 예시 작품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는 참으로 난망하다.

 

소설은 이야기를 누리는 즐거움과 함께 역사, 사회, , 종교, 그리고 한 시대를 관통한 문화를 읽는 즐거움도 누리게 해주며, 좋은 소설 한 권을 읽으면 뛰어난 인문 서적 여러 권을 읽는 것과 같다고 저자가 서문에서 밝힌 생각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인문 서적이라면 나 역시 적지 않은 분량의 책을 읽어왔다고 자부하는 순간, 머릿속에 아차~! 싶은 아픈 기억이 떠오른다. 결혼 이후 출산과 육아로 인해 변변한 책 한 권 읽지 못하던 아내에게 이제는 책 좀 읽을 때가 되지 않았냐는 듯 사 모은 책을 보란 듯이 책장에 꽂아놓고 무언의 시위를 벌이며 못난 모습을 보였다. 제대로 소화도 못 시킬 책을 그렇게 많이 사 모으면 무얼 하나.

 

사실 아내는 이미 10대 문학소녀 시절 수백 권의 소설책을 섭렵한데다 직장 생활을 일찍 시작하여 사회경력도 앞선 은둔 고수였으니, 어눌한 영어 몇 마디 주워섬길 줄 안다고 뻐기면서도 감정에 쉽게 휩쓸리기 일쑤이던 나는 이순신 장군 앞의 일개 왜장에 불과한 셈이었다. 앞서 말한 넘사벽 수준을 이렇게 설명하면 이해하기 쉬우려나? 저자는 때로 사소한 일로 옆지기에게 혼쭐이 나거나 특유의 카리스마에 압도당하는 등 마치 나의 결혼 생활을 보는 듯한 상황을 주저 없이 공개하고 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 사는 4 k 모습인가. 그야말로 인간적으로 브로맨스를 유발하는, 유부남들의 키워드는 역시 동병상련인가 싶다.

 

문학 장르가 대개 그렇긴 하지만 소설이야말로 남의 이야기를 듣거나 나의 이야기를 전하고픈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예술적으로 가장 잘 승화시킨 도구이다. 어느 작품이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것은 바로 그 시대의 가장 큰 화두를 이야기로 풀어냈음을 말한다. 희로애락과 같은 인간의 감정, 사상, 역사 등 전반적인 문화를 읽어내는 핵심어를 담고 있으므로 작품에 대한 이해는 곧 작가가 시대를 이해하는 방식을 읽어낸다는 뜻이다. 세월이 흘러도 고전 소설이 꾸준히 읽히는 이유는 인간 본성과 내면에 대해 이보다 더 세밀하게 묘사하는 장치가 없기 때문 아닐까.

 

이 책은 전체 3부로 구성되었다.

1역사의 단면을 다룬 벽돌책 도전하기에서는 러시아의 시베리아가 죄수들의 유형지로 선택된 것은 험지 개척을 위한 국가 시책 때문이었으며, 1930년대 농부들이 미국 서부를 향해 고향을 등져야 했던 이유는 대공황 때문이며, 춘향전에 등장하는 조선 시대의 과거제도 역시 오늘날의 입시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일본 에도 막부 시대에 과거의 유물로 남은 사무라이들이 칼을 버린 것은 시대 흐름에 적응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다는 등 소설의 시대적 배경을 설명한다.

 

2복잡한 인간의 내면의 소우주 이해하기에서는 예술의 불멸하는 재료이자 가장 강력한 인간 본성인 질투, 음식, 금서, 영국의 사교계, 도박 등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특히, 댄디즘으로 압축되며 영국 빅토리아 여왕 시대를 풍미했던 무도회가 사실은 귀족들로 대표되는 상류사회의 정략적 결혼과 연계를 위한 치열한 각축장이었음을 알게 되며, 사교계에서 밀려나는 것을 죽기보다 두려워했던 인물들의 면면을 볼 수 있다.

 

3아는 만큼 빠져드는 일상의 인문학에서는 신의 대리인인 동시에 악마의 상징으로 그려진 고양이, 조상은 야생동물 늑대였으나 인간에게 반려동물로 길든 개, 아내 없이는 살아도 술에는 너무나 진심이었다가 결국 요절한 작가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책 수집가들의 로망인 고서점, 종교에서 시작하여 문화가 된 요가, 본래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다이어트, 신들이 머물다 간 장소이자 고객이 곧 규칙이라는 호텔 등 일상적이지만 알고 보면 매우 흥미로운 소재의 작품을 소개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행여나 직업상 밥벌이에 도움이 될까 봐 최근 지식의 흐름과 동향을 파악한답시고 그간 심리학이나 과학, 어학, 자기 계발과 같은 실용 서적을 위주로 접해왔지만, 생각보다 책 내용은 오래도록 기억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유토피아나 올리버 트위스트처럼 일정한 이야기의 기승전결 형식을 갖춘 고전 작품의 내용과 작품이 주는 권선징악 교훈이 더 잘 생각난다. 비록 한 장면 한 페이지를 모두 다 떠올리지는 않지만, 우리는 단 한 번만이라도 작품을 접하게 되면 오랜 시간이 흘러도 전체 줄거리를 어려움 없이 회상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이야기가 지니는 위력이 아닐까.

 

그런데 갑자기 퇴직금 중간 정산도 아니고 왜 하필 저자가 말하는 나이는 오십일까. 그것은 아마도 인생 백세 시대의 중간을 맞아 이십 대에 읽었던 문학 작품을 다시 읽으면서 수십 년간 나의 삶에 일어났던 일과 비교해보는 경험을 통해 새로이 다가오는 느낌을 제대로 가져보자는 의도일 것이다. 소설에서 전개되는 줄거리를 감상하기 바쁘던 시절이 이십 대였다면, 인생의 진득한 체험을 통해 소설이 인생 같고 인생이 소설 같아지는 때가 오십 대이다. 스무 살 가슴 뛰는 낭만은 아니어도 조금은 느긋한 마음으로 지나온 인생을 돌아보고 앞으로 다가올 여생을 채비할 수 있다. 인생이라는 고지를 향해 넘어지고 엎어지며 정신없이 올라왔다면, 이제부터는 넘어지면 일어서기가 만만치 않으니 예전보다 더 주위를 살펴 가며 내리막을 향해 갈 때다.

 

힘들고 어려웠지만 내가 그래도 용케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하는 자긍심과 안도감을 느끼는 동시에, 이제는 예전과 같지 않은 몸과 마음을 추스르며 또다시 가야 한다는 서글픔이 겹쳐온다. 이쯤 되면 소설과 현실이 서로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소설 속 주인공의 심정이 이러했을까를 나의 일상에서 체험하는 순간이다. 하긴, 인생의 그럴싸한 모든 일이 다 소설의 소재 아니었나.

 

결국, 오십에 다시 읽는 고전 소설은 예전과 사뭇 다른 느낌일 수밖에 없다. 조금 늦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에 소개된 작품들을 이제라도 읽어 볼 생각이다. 칠십 대가 되어 오십 대에 읽지 못한 걸 후회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오십나는이제다르게읽는다 #박균호 #갈매나무 #인문학 #소설 #문학 #인문 #인문에세이 #책 #독서 #책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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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균호 2022-08-01 14: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선생님이야 말로 집필을 하셔야 할 정도로 필력이 탁월하십니다. 자세하고 따뜻한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샛별클럽연대기 - 조용한 우리들의 인생 1963~2019
고원정 지음 / 파람북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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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한국동란이 끝나고도 십여 년이 흘렀지만 남과 북이 한참 서슬 퍼런 이념의 냉전 시대를 관통하던 1963년부터 시작하여 비교적 최근의 오늘에 이른다. 제목이 연대기인 만큼 일어난 일을 시간 순으로 서술한다. 하지만 저자보다 한참 늦게 태어나 75년에 국민학생이 된 필자에게 이 작품 도입부의 시대적 배경은 전혀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1963년이면 아무리 인심 후하다는 시골에서도 막걸리 술안주로 대통령을 흉보던 누군가가 감쪽같이 사라지거나 돌아오더라도 아주 몹쓸 지경이 되곤 하던 때다. 국민학생은 시험을 쳐야 중학교에 진학했고, 집안의 장정 한둘쯤은 국가 시책으로 월남에 파병되는 누군가의 삼촌이자 아들이자 남편이었으며, 극장에서는 상영작 앞머리마다 대한늬우스를 통해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고등학교에는 예비역 장교가 상주하며 교장 부럽지 않은 위세를 부렸고 유사시 남학생은 총알받이로, 여학생은 위생병으로 전방에 투입될 운명이었다. 북한의 가정에서는 김일성 사진을, 남한의 가정에서는 박정희의 사진을 안방에 걸어놓고 아침저녁으로 인사를 올리던 때였다.

 

가장 큰 도시인 서울에서도 통행금지가 있었고 이를 어기다 걸리면 파출소에 잡혀가 유치장 찬 바닥에서 하룻밤 신세를 져야 했다. 장발족 청년과 미니스커트 처녀는 단속하는 경찰을 피해 다녀야 했고 저녁 여섯 시면 어김없이 울리는 애국가 사이렌 소리에 가던 길을 멈추고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서 있곤 했다. 그러던 시대에 구국의 열사 김재규 장군의 총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쓰러지자 철부지 동생은 다음 박정희는 누가 하느냐고 물었다. 17년간의 장기 독재로 그 기간에 태어난 아이들에게 그의 또 다른 이름은 대통령이었다. 그는 파월 장병들에게 지급할 월급을 중간에 가로채 비자금을 만들어 후대에 남겼고, 낮에는 새마을 운동에 한창인 농촌에서 모내기에 막걸리를 걸치는 성군이었지만 밤이면 딸 같은 여대생을 곁에 앉히고 양주를 마시다 심복에게서 최후의 심판을 받았다. 민간에 정권 이양의 약속을 어기고 대통령을 가업으로 만들려던 군부독재 유신은 그렇게 무너지는 듯하더니 또다시 신군부에 의한 독재를 이어갔다. 물질에 매몰되고 반공 이념에 피폐해진 정신세계는 생각 못 하면서 웬만큼 먹고살게 해주어 기본권 문제를 해결해주었다며 아직도 박정희와 그의 딸을 그리워하더니, 군부가 사라지자 이제는 부자를 편들며 왜 나는 늘 가난한가 한탄하는 세상이 되었다.

 

이렇듯 하 수상한 시절을 함께 출발했지만 수십 년 세월이 지나 생긴 틈새를 함께 메웠거나 더 이상 메울 수 없게 된 한 동네 초등학교 아홉 동창생과 이들을 지켜보며 세월의 증인으로서 기록을 써 내려온 주인공 문인호의 인생을 일인칭 시점에서 다루고 있다. 등장인물들의 집안 내력을 이해하려면 가계도를 그려가며 요약할 필요가 있을 만큼 많은데, 저자는 이를 전설이라 칭한다. 모두 이야기의 배경을 설명하는 장치로 설정하였다.


초등학교 강창성 선생의 제안으로 이들 동창생은 샛별 클럽을 만들게 되고, 졸업을 기념하여 10년마다 학교 운동장을 찾기로 하는데 안타깝게도 그 다섯 번째에는 단 한 사람도 나타나지 못한다. 강창성 선생의 꿈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다. 이 동창들의 어린 시절 순수함은 일찌감치 이념의 희생자가 된다. 예컨대 일명 반공 소년으로 웅변대회에서 열변을 토하던 장윤태는 자신들의 선생님과 친구들을 빨갱이라 고발하여 샛별 클럽을 와해시키고, 커서는 공안 검사가 되어 유신체제에 반대하던 동창의 죽음에 일조했으나 목회자로 거듭난다. 군 장교가 된 박광도는 정치 사상범으로 몰린 의리의 주먹파 김광춘을 죽음으로 몰았으나 이후 정계에 발을 디뎠다가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수감 생활을 마치고는 고향의 발전에 공헌한다. 천재라 칭송받던 한요섭은 머리가 뛰어난 만큼 비범한 삶을 살지만 제 생각과 재능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의 벽에 부딪히자 고민 끝에 자동차로 공덕비를 들이받는 정면 대결을 택한다.

 


한요섭의 죽음에 이어 주인공 문인호는 군대 시절 자신의 이름과 비슷한 사병 문인오의 사망에 연루되어 힘든 시간을 보낸다. 사건의 진실을 부정 또는 묵인함으로써 역설적인 편안함에 몸서리친다. 목숨을 부지하거나 자신의 의지대로 살게 되는 친구가 거의 없는, 이런 격변의 시대에 그는 어떻게든 살아남아 기록을 전달하며 역사의 증인으로 남는다. 주인공의 지배적인 감성은 누군가 자기 뜻을 펼치게 되면 반드시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게 되는 시대를 거쳐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읽힌다. 그러나 길을 가다 우연히 만난, 그가 평생을 짝사랑하던 여자 동창의 입에서 흘러나온 자신의 이름을 듣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그는 드디어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동창을 통해 파란만장한 인생의 보상인 인정과 구원을 얻는다. 오랜만에 문단으로 돌아온 고원정 작가의 흡입력 넘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국가안보와 경제개발에 가려 정작 국민은 대우받지 못했던 해방 이후 세대의 애환과 그 시절을 관통했던 주인공의 발자국을 통해 숨죽여 살아야 했던 선배 세대의 아픔을 진하게 공감할 수 있었다

 

#소설 #샛별클럽연대기 #민주화 #근대화 #고원정 #과거를돌아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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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별클럽연대기 - 조용한 우리들의 인생 1963~2019
고원정 지음 / 파람북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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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온 이야기는 언제나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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