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파리 - 생물학과 유전학의 역사를 바꾼 숨은 주인공, 개정판
마틴 브룩스 지음, 이충호 옮김 / 갈매나무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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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일이면 암컷 초파리 한 마리가 지구 전체 인구보다 더 많은 자손을 퍼트릴 수 있다. 과학자들이 켄과 바비라고 이름 붙인, 생식기 없이 태어난 돌연변이도 있고 어떤 녀석들은 머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다리를 이고 태어난다. 초파리에 관해 미처 알지 못했던 흥미로운 사실들은 이뿐만이 아니다. 연구를 목적으로 이들은 인간에 의해 집단 처형(?)당하기도 하고 맛난 과일로 훈련받은 대가를 보상받기도 한다. 사람과 매우 비슷하게 하루 24시간을 기준으로 일과 휴식 시간을 따로 갖는다. 마약 성분에 중독되어 마이클 잭슨처럼 뒤로 걷거나(Moon Walking) 빙빙 돌다 어지럼증 아니면 배고픔으로 죽는다. 수컷의 정액에는 독성분의 단백질이 있어 암컷의 뇌 속에서 행동을 조종하며 너무 잦은 짝짓기로 일찍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외부와 단절된 하와이 제도의 초파리는 무려 1,000종이 넘는다.

 

초파리가 실험실에 정식으로 데뷔한 때는 1900년이고, 장소는 하버드대학교 교수 윌리엄 캐슬의 실험실이었다. (중략) 박물학의 굴레에서 벗어난 생물학은 동물행동학, 진화론, 생리학 등의 전문 분야로 분화해 가기 시작했다. 생물학자들은 수많은 새로운 개념들을 검증하기 위해 실험용 생물로 적합한 동물을 찾기 시작했다. 그 결과 초파리가 가장 적합한 후보로 입증되었다.(p.22-23)

 

오늘날 초파리의 영향을 받지 않은 생물학 분야는 거의 없다. 암 치료법을 찾는 방편으로, 지구 온난화와 기후 변화에 대한 조기 경고 시스템으로, 알츠하이머병과 헌팅턴병 같은 신경성 장애 연구법으로, 알코올과 약물 중독, 수면 장애, 시차증 등 유전학을 이해하는 데 사용된다. 100년도 넘게 초파리 연구는 유전학의 주요인으로 확립되었다. 과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이 정도 사실쯤은 알고 있어야 한다는 듯한 이 책은 초파리를 실험 재료로 이용해온 과학사를 다룬 매력적인 소개서이다. 벌써 20년쯤 전에 출간된 책이라 과학이 고리타분하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저자가 구사하는 유머는 요즘 말로 아재 개그 같지만, 다행히도 이야기의 큰 흐름을 건드리지는 않는다.

 

저자는 연구자로서 평생 실험실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어쩌다 학회에서 공짜로 보내주는 여행에 미소를 참지 못하는 자신을 웃음의 소재로 삼고, 초파리들만의 은밀한 성생활을 가벼운 어조의 농담으로 승화시킨다. 곤충학 관련 서적이 큰 소리로 자주 웃게 만드는 분야는 아니지만, 읽다 보면 익살스러운 표현을 자주 발견한다. 과일이 부패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알코올 성분의 효모를 섭취해 날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걷는 초파리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묘사하면서 인간이 그들에게 선사하는 고통에 유감을 표하기도 한다. 유익한 정보가 가득하여 과학에 진지한 관심을 둔 특정 독자층뿐 아니라 일반인 누구든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과거 과학적 사고를 추동했던 초파리 연구의 틀을 통해 20세기 생물학적 사고가 어떻게 진화되었는가를 설명하면서, 여러 초파리 연구자들의 숨은 이야기와 함께 유전학이 진화론의 허점을 어떻게 보완해 왔는지를 소개한다. 그 결과 우리는 유전학의 탄생을 둘러싼 역사, 과학, 연구자들 사이의 대인관계 드라마에 대해 소소하지만 매우 흥미로운 배울 거리와 함께 진화와 자연철학이 서로 화해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

 

초파리(small fruit fly)는 세계 전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파리목 초파리과로 분류된다. 종류에 따라 서식지가 매우 다양하고 번데기 과정을 포함한 갖춘탈바꿈을 통해 자라며 한 세대가 매우 짧은 것이 특징이다. 초파리가 주목받는 가장 큰 이유는 과학적으로 다양한 활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토마스 모건 (Thomas Hunt Morgan)의 돌연변이 연구로 유명한, ‘배가 검고 이슬을 사랑하는 동물이란 뜻의 노랑초파리Drosophila melanogster는 유전학을 비롯한 다양한 생물학 분야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실험 재료로 취급되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그 활용 폭이 더욱 넓어지고 있으며 특히 의료계에서는 알츠하이머, 헌팅턴병, 하반신 마비, 각종 암, 소아비만 등 치료가 어려운 병을 대상으로 치료법 개발을 위한 다양한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다.

 

초파리 실험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쥐나 개·원숭이와 같은 동물 실험은 물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과 비교해 가성비가 압도적이기 때문이며, 동물 실험을 반대하는 단체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윤리적 비난을 잠재울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초파리 연구의 선구자로 1933년 노벨 생리학상을 받은 토머스 모건을 빼놓을 수 없다. 1910~1915년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초파리를 연구하던 그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염색체의 유전적 특징을 파악해낸다. 생물의 유전형질을 나타내는 유전자가 쌍을 이루어 염색체에 선상배열을 하고 있다는, 기본적인 유전 메커니즘인 염색체지도를 초파리의 실험으로 입증했다. 그의 공로로 이전까지 방향을 잡지 못했던 유전자 연구가 튼튼한 기반 위에서 발전할 수 있었다. 모건 학파의 일원이었던 허먼 멀러(Hermann J. Muller) 역시 초파리 연구의 중요 인물이다. 그는 X선에 의한 인공 돌연변이 발생이 가능함을 최초로 입증하였으며 돌연변이 유발 효소를 결정화한 공로로 1946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러시아 출신의 생물학자 도브잔스키(Theodosius Dobzhansky)는 유전학 연구에 집중되던 초파리의 세계를 진화와 결합해 진화유전학을 발전시킨 인물이다. 그는 진화의 개념을 통하지 않고서는 생물학의 그 무엇도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 바 있으며, 작은 유전적 변화가 축적되어 발생하는 생식형 불일치가 종 사이의 경계를 정의한다고 보았다.

 

도브잔스키는 두 개체군 사이에 유전적 차이가 축적되면서 몸 크기, 색깔, 생식기 구조, 행동 특이성, 그리고 그 밖의 수천 가지 특징에도 차이들이 축적되어 결국에는 두 종이 서로 짝짓기하길 싫어하거나 불가능해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는 이렇게 뚜렷이 구별되는 유전적 특징의 차이들을 보면서 자신이 종의 기원이 발생하는 장면을 보고 있다고 믿었다.(p.145)

 

사람의 유전형질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는 점 때문에 초파리는 유전학은 물론 의료 현장에 없어서는 안 될 실험용 동물이다. 초파리 연구의 전성기였던 1970년대에는 유전자 돌연변이로 인해 사람에게 발생하고 있는 질병들을 규명하였고, 마치 사람이 연가를 부르는 것과 같은 수컷과 암컷 사이의 애절한 구애 습성을 알아내기도 하였다. 초파리 유전자 연구를 통해 기대하는 분야는 불치병 치료로, 특히 헌팅턴병처럼 근육 간의 조정 능력, 인지능력이 저하되고 정신적인 문제가 동반되는 진행성의 신경계 퇴행성 질환과 관련해 치료의 실마리가 되는 원인을 찾는 중이다. 초파리는 유전학 이외에도 종 분화 과정과 같은 진화 연구, 행동과 생태에 관한 연구, 생리학, 세포 생물학과 발생에 관한 연구 등 생물학의 다양한 분야에서 매우 적절한 실험 대상으로 주목받고 있다. 초파리는 심리학 연구에도 동원되고 있다. 초파리를 대상으로 유전자가 어떻게 행동을 조절하는지, 시간과 공간 감각을 조절하는 유전자를 찾는 연구 등 행동 유전학에 활용되고 있다.

 

초파리는 몸집이 작고 다양한 환경에 쉽게 적응하기 때문에, 좁은 장소에서 간단한 먹이로 많은 개체를 쉽게 기를 수 있다. 또한 돌연변이를 식별하는 방법이나 사육하는 기술이 어렵지 않다. 초파리 애벌레의 침샘에 있는 다사염색체(polytene chromosome)는 핵분열 없이 염색체가 반복적으로 복제되어 상당히 크기 때문에, 유전자의 관찰이 쉽고 유전자의 작용을 연구하기에 적당하다. 유전학 연구에 있어서 교배를 통한 실험은 필수적이기 때문에 한 세대가 짧고 번식을 많이 하는 초파리는 좋은 연구재료가 되고 있다. 생쥐나 예쁜꼬마선충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최고의 만능 실험 동물로 남아있는 초파리를 통해 또 어떤 사실이 밝혀질지 지켜볼 일이다.

 

신체가 맡은 주 임무는 생식을 할 때까지 충분히 오랫동안 개체를 살아있게 하는 것이다. 생식에 성공하고 나면 체세포는 돌연변이가 누적되고 늙어 갈 수 있다. 맡은 임무를 이미 완수했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면, 진화는 우리가 유성 생식을 하도록 만듦으로써 우리의 신체를 소모품으로 만든 것이다.(p.253)

 

결국, 이 놀라운 초파리는 과학 발전사에 큰 공을 세운 숨은 영웅이었다. 그런데도 금세기의 많은 위대한 발견물 가운데 초파리의 선구적인 역할에 대한 대중적 설명은 거의 없었다. 이 책은 유전학에서 진화학, 생리학에서 생태학, 의학에서 심리학에 이르기까지 초파리의 짧고 굵은 삶을 통해 현대 생물학사를 들려줌으로써 부패한 음식물을 좋아하는 조그맣고 성가신 존재일 뿐이라는 대중적 이미지를 바로잡아준다. 저자는 매우 독창적이고 재미있는 화법으로 초파리의 생애 주기를 단계별로 알려주며 생물학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중요한 의의를 찾는다. 배아에서 성체에 이르는 놀라운 여정부터 기억과 학습의 본질 그리고 노화의 이론적 배경에 이르기까지, 짧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이들의 삶이 인간 존재의 거의 모든 측면에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 알 수 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는 초파리 연구자가 별로 없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초파리의 명성은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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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 땐 별을 봅니다 - 우리 시대의 명상록
김인현 글, 권오철 사진 / 메이트북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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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이 되기 전 살았던 청주 산골의 황토집은 전기와 수도가 공급되지 않아 식수는 우물물을 길어다 먹어야 했고, 어둑한 호롱불 흔들리는 불빛에 매캐한 그을음 냄새를 맡으며 해가 지기 무섭게 이른 저녁밥을 먹었다. 뱃속이 조금 가벼워지면 널찍한 마당의 평상 위에 펼쳐진 모기장 안에 드러누워 참외를 까먹으며 은하수 뿌연 밤하늘의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을 세다가 까무룩 잠들곤 했다. 오랜 도회지 생활에 익숙해진 나머지 어릴 적 생각은 안 날 줄 알았는데, 나이가 들수록 당시의 기억은 도심지의 빛 공해만큼이나 선명해진다. 그런데 참, 삶에 지쳐 하늘 대신 자기 발끝만 보며 걷게 된 오늘의 우리가 마지막으로 별을 본 것이 언제였더라?

 

엄청나게 커 보이는 지구도 결국,

우주 안에선 작고 파란 하나의 별일 뿐이다.

남의 삶이 대단해 보여도 결국 작디 작은 지구에 사는

똑같은 생명체일 뿐이다. (p.138)


대자연의 일부로서 우리가 별을 바라볼 때 느끼는 심정은 누구 할 것 없이 거의 다 비슷해지는 것 같다. 바로 경건함이다. 지구가 광대무변한 우주의 셀 수 없이 많은 별 가운데 한낱 행성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인간이 아무리 잘나고 대단한 것 같아도 먼지 속의 티끌일 뿐이라는 자각에서 오는 그 경건함 말이다. 그래서 얇고 작고 짧은 글이지만 이 책이 주는 여운은 제법 길게 오래 갈 듯하다.

 

아무 때나 볼 수 있다면 간절하지 않다.

누구나 만날 수 있다면 그립지 않다.

좋은 풍경은 간절한 사람 앞에서만 모습을 보인다. (p.214)

 

수려한 별 사진을 곁들인 명상록을 표방하는 이 책은 차례와 관계없이 아무 곳이나 펼쳐 들어도 인생의 묘미가 담긴 짤막한 글을 감상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특히, 사진마다 그 한 장면을 담는 데 필요한 기술적인 문제와 천체과학, 지리학 등 알토란 같은 설명 이외에도 오랜 세월을 계획하고, 기다리고, 실패하고, 다시 준비하고 이루어낸 시간의 흔적을 읽어낼 수 있다. 그럼으로써 독자는 기술에 시간이 쌓이면 예술이 되는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또한, ‘ㅇㅇㅇ님의 소중한 미래를 위해 이 책을 드립니다라고 인쇄된 표지 문구처럼 이 책은 천체 사진만으로도 훌륭한 소장본이며 선물용으로도 손색이 없겠다. 그저 친구 같은 별을 바라보며 별 하나에 따뜻한 위로를 얻고 별 하나에 희망을 품으며 힘들 땐 별을 보자는 순수한 마음 선물을 누가 마다하랴



#에세이 #힘들땐별을봅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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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 땐 별을 봅니다 - 우리 시대의 명상록
김인현 글, 권오철 사진 / 메이트북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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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고 외로울 때면 고개들어 하늘을 봐 저 별들이 그대의 친구가 되어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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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의 이해 - 세계는 어떻게 다르고, 왜 비슷한가?, 해외지역연구 입문
이윤.도경수 지음 / 창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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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의 기회가 늘어나면서 외국을 방문했을 때 한국과 판이하거나 유사한 풍습을 겪어 본 일, 분명히 있을 것이다. 가장 가까운 이웃 나라 일본만 해도 차량이 왜 좌측으로 통행하는지, 미국인들은 왜 걸핏하면 대형 사고를 내면서도 총기 소유를 긍정적으로 보는지, ··일 삼국 모두 젓가락을 사용하는 국가이지만 재질과 길이는 왜 다른지 등이다. 지리 과목에 만점을 받아 지리라면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는 필자라도, 세계가 어떻게 다르고 왜 비슷한지를 설명할 자신이 없다. 지리는 환경에 지배받거나 혹은 환경을 극복한 인간 역사의 다른 이름인 동시에 인문과학과 자연과학 또한 아우르는 광범위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문화는 인간만이 지닌 삶의 형태이자 타 지역과 다른 독특한 하나의 행동양식인 동시에 서로 다름을 만들어내는 주요인이기도 하다. 역사적 산물이자 일종의 집단적 유전자로서 어느 집단에 더 낫고 못 한 기준을 부여할 수 없으며 상호 존중을 원칙으로 한다. 문화 차이에 관한 흔한 사례로 타 문화권 국가에서 언어장벽으로 인해 이방인과 현지인 사이에 일어나는 오해와 실수는 극복할 수 있지만, 문화의 차이에서 비롯된 경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을 든다. 극복하지 못한 문화 차이의 좋은 예로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독일영화 화이트 마사이(The White Massai, 2005)를 소개해본다. (출처:네이버 블로그)



주인공이자 스위스인인 카롤라는 남자 친구와 함께 케냐 해변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귀국 바로 전날 우연히 만난 마사이족 청년 레말리안에게 한눈에 반한다. 난생처음 겪는 감정에 충실하느라 카롤라는 케냐에 남고 남자 친구는 혼자 돌아간다. 레말리안을 찾아 무작정 오지로 향한 그녀는 현지인과 결혼하여 정착한 백인 여성 엘리자베스의 도움을 받아 마사이족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레말리안과의 재회를 기다린다. 열흘을 기다리자 레말리안이 그녀를 찾아오고 레말리안의 마을로 따라 들어간 카롤라는 마사이 마을에서의 생활에 적응해 나간다. 이들의 사랑은 더욱 깊어지고 카롤라는 스위스 고향을 찾아 주변을 정리하고 결혼을 결심한 채 다시 돌아온다. 둘은 오로지 사랑으로 결합하지만 이를 지켜보는 마을에 사는 백인 신부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게다가 모든 것이 낯선 카롤라에게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할 수 없어 답답하기만 하다. 생업을 위해 레말리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식료품 가게를 개업하여 대성공을 거두지만 그가 외상거래로 이웃들에게 물건을 마구 퍼주는 방식은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카롤라의 독립적인 생활 방식은 전형적인 가부장 사회의 남성인 레말리안에게 심각한 위협으로 다가오고 신부와의 관계를 의심하는 의처증까지 생긴다. 결국 가게 운영을 망치게 되자 둘 사이는 제대로 금이 가기 시작한다. 남편의 폭력과 의심 협박, 여성 할례, 가축인 염소보다 더 낮은 여성의 지위 등 현격한 문화 차이를 더 이상 수용할 수 없게 된 카롤라는 딸이 할머니를 보고 싶어 한다는 핑계로 스위스로 도망간다. 떠나는 그녀와 아이를 보며 이것이 마지막임을 예견한 레말리안이 돌아올 것인지를 묻지만 끝내 대답을 듣지 못한다. 먼지 풀풀 나는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버스의 뒷모습을 비추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이 책은 전체 4부로 구성되었다. 1부에서는 해외지역을 이해하는 기본 틀로서 경제발전 정도가 비슷한 단계의 지역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유사한 현상을 가리켜 일반성으로, 반면에 경제발전 단계가 비슷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지역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해당 지역에서만 독특하게 나타나는 현상을 특수성을 제시한다. 2부에서는 자연지리, 인문 지리, 그리고 문화 특성 기저 요인의 사례들을 소개한다. 3부에서는 특수성으로 여겨지는 여러 사례를 일반성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4부에서는 문화와 비즈니스의 연관성 사례와 더불어 한국 사회의 최근 큰 이슈인 신뢰와 공정이 시사하는 바까지 다룬다.

 

이 책은 일반 독자들을 위하여 고양 수준에서 이루어진 연구임을 밝히고 있다. 문화의 사전적 정의와 문화이론을 설명하면서 일반 교양서적보다는 학술서적에 가까운 화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책의 머리말은 마치 논문의 국문 초록을 연상시킨다. 아마도 지리를 이해하는 데 가장 크게 나뉘는 일반성과 특수성 개념 설명에 집중하고 탄탄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려는 의도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문화 간 유사성은 일반성이, 문화 간 차이는 특수성이 지배적인 요인이다. 다시 일반성은 의, , 주와 같은 인간 행위의 가장 기초적인 조건을 충족시켜주는 경제적 조건, 즉 경제발전 단계의 높낮이로 설명하며, 특수성은 지리나 기후 같은 자연지리와 역사와 제도 같은 인문지리 및 고맥락 문화, 집합주의 같은 문화특성으로 설명된다.

 


일반성과 특수성을 과거사에도 적용할 수 있는지를 놓고 1차 동아시아 전쟁으로 불리는 임진왜란을 그 대상으로 한 분석은 매우 흥미롭다. 임진왜란이 16세기 당시 기준으로 세계 대전으로 불릴만한 요건을 갖춘 전쟁이라는 근거로 첫째,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명나라까지 참전한 국제전이었으며 둘째, 정명향도를 표방했던 일본의 국서가 참전의 명분이었으며 셋째, 당시 조선, , 왜 삼국의 인구와 경제력이 대규모 전쟁을 치르는 데 필요한 수준을 충분히 갖추었으며 넷째, 무기와 전투 능력도 대규모 전쟁을 수행하는 수준이었음을 밝힌다. 또한, 이 전쟁에서 일본이 패한 이유로 전쟁 초기 강세였던 일본의 화력이 점차 약해졌고, 일본에 비해 명나라의 경제 규모가 더 컸기 때문이며, 대포와 화약으로 대표되는 과학기술의 격차에 있음을 지적한다.

 

도입부에 제시한 궁금증을 이 책은 이렇게 설명한다.

- 좌측 통행과 우측 통행의 차이는 국가의 소득 수준에서 오는 게 아니라 특정한 수행 방식이 익숙해져서 그 방식에 의존한다는 경로 의존성 때문이다.

- 미국의 합법적 총기 소유는 역사적, 제도적 산물로서 영국 시민혁명과 미국 독립 쟁취의 전통을 계승하는 유산이며 부패한 정부나 독재에 맞서는 국민의 기본권이자 저항권으로 인식되어 합법화된 것이다.

- 젓가락의 재질과 길이는 각 나라의 고유한 식탁 문화로, 기름진 음식이 많은 중국은 끝이 뭉툭하고 두꺼우며, 생선과 야채를 주재료로 사용한 밥상의 일본은 짧고 뾰족하며, 죽이나 국, 탕 같은 습성 음식을 먹는 한국은 얇고 무딘 금속제 젓가락과 숟가락을 사용한다.

 

이 책은 이 외에도 풍부한 참고문헌을 바탕으로 다양한 문화적 특수성을 잘 설명하고 있어 목차만 읽어도 매우 가성비 높은 메뉴판을 보는 듯하다. 책 제목은 지리의 이해이지만 그 저변에 깔린 역사와 제도, 시사 상식, 통계 자료 등 읽기만 해도 도움 될 내용이 그득하다. 중요한 문장마다 산뜻한 색상을 입히고 점선 밑줄을 그어 요점을 정리하기 쉬우며 시각적으로도 매우 편안하게 구성하였다. 세상을 이해하는 교양서적으로 손색이 없는 양질의 문화 수업 교재로 추천해 드린다.


#인문 #지리의이해 #문화교양 #창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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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의 이해 - 세계는 어떻게 다르고, 왜 비슷한가?, 해외지역연구 입문
이윤.도경수 지음 / 창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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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은 지리의 이해이지만 그 저변에 깔린 역사와 제도, 시사 상식, 통계 자료 등 읽기만 해도 도움 될 내용이 그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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