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64
게리 토머스 지음, 이우진.김자운 옮김 / 교유서가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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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교육학자 게리 토머스는 교사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교육을 연구해온 학자다. 버밍엄대학교 명예교수로 소개되기도 하는 그는 포용교육과 특수교육을 다루는 한편, “교육 연구가 무엇을 측정하고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같은 방법론적 질문까지 함께 붙들어 왔다. 교육을 이상론으로만 띄우지 않고, 제도와 현실의 문제로 끝까지 끌어안아 온 사람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그래서 그의 글에는 현장을 아는 사람 특유의 감각이 있다. 교육을 말하되 학교를 미화하지 않고, 학교를 비판하되 교육 자체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 책은 얇고 빠르게 읽히지만 던지는 질문은 묵직하다. 책이 집요하게 붙드는 핵심은 뒤표지에 적힌 한 문장으로 요약될 듯하다. “학교는 답을 전달하지만, 교육은 질문하게 한다.” 우리는 시험과 경쟁, 성과를 교육이라고 부르며 익숙해져 왔다. 하지만 그 과정이 정말 사람을 키우는 교육인지, 아니면 줄 세우는 선별 장치인지 스스로 묻는 일에는 서툴다. 저자는 바로 그 지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교육은 왜 지금처럼 변했는가, 학교는 왜 좀처럼 변하지 않는가, 진보적 교육은 왜 번번이 실패하거나 왜곡되는가, 교육은 결국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리고 더 날카롭게는 나의 앎이 내 삶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독자 앞에 내놓는다.

 

이 책의 힘은 교육을 좁은 의미의 수업 기술로 축소하지 않는 데 있다. 고대 그리스부터 21세기 교육정책의 흐름까지 이어지는 긴 역사 속에서 교육의 두 흐름, 형식주의 교육진보주의 교육의 긴장과 충돌로 문제를 풀어낸다. 형식주의가 지식과 기술의 효율적 전수를 목표로 하며 교사 중심 수업, 시험, 규율을 중시한다면, 진보주의는 아이의 잠재력과 발견, 비판적 사고를 교육의 중심에 놓고 아동 중심·경험 중심의 학습을 강조한다. 문제는 학교가 이 둘을 충분히 소화해 내지 못한 채 어설프게 섞어 운영해 왔다는 점이다. 심리학의 성과가 진보적 교육에 힘을 실어줬음에도, 그 아이디어는 종종 표면만 차용되거나 입시 현실 속에서 활동만 남은 형식으로 굳어지기 쉽다. 반면 학교의 뼈대는 놀랄 만큼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토머스의 비판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학교가 왜 더 시험에, 더 측정에, 더 경쟁에 포획되었는지까지 파고든다. 그는 심리측정학과 지능검사의 역사, 그리고 고부담 시험이 교육을 지배할 때 벌어지는 왜곡을 짚는다. 지능을 타고난 특성으로 보고 선별을 정당화했던 논리가 어떻게 교육 제도 안에 구조적인 분리와 차별을 고착시키는지, 그리고 정책 환경 속에서 학교가 성과 중심의 논리로 재편될 때 시험 결과가 학교의 평가와 생존을 결정하는 절대 척도가 되어 버리는지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그 결과 교육은 질문을 키우기보다 정답을 빨리 찾는 훈련으로, 성찰을 넓히기보다 성과를 증명하는 경쟁으로 쉽게 왜곡된다.

 

이 대목에서 책은 한국 독자에게 특히 불편하고도 정확한 거울이 된다. 우리는 아이들을 왜 이렇게 치열한 학습으로 내모는가. 그 성취는 과연 진정한 성공인가. 그리고 그 성과를 위해 어떤 대가를 치르고 있는가. 우리 교실에서 점수 따기는 교육의 목적을 밀어내고 교육의 언어 자체를 바꿔버렸다. 배움은 성장의 경험이라기보다 통과의례가 되고, 이해는 사치가 되며, 학생은 한 사람이라기보다 등급과 백분위로 설명되는 존재가 된다. 이 구조가 더 단단해지는 방식은 교실 곳곳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수업이 끝나고 남는 질문보다 정답률오답 유형이 먼저 정리된다. 사고의 과정은 짧게 압축되고 요령과 속도가 실력처럼 취급된다. 수행평가조차 배움을 위한 과정이라기보다 어떻게 하면 감점 없이 점수를 받을 수 있는가로 재해석되기 쉽다. 루브릭은 성찰을 돕는 도구가 아니라 안전한 점수 확보를 위한 점검표가 되고, 발표·토론은 생각을 확장하는 장이 아니라 말문이 막히면 손해라는 불안 속에서 형식만 남는다. 내신과 모의고사, 비교할 수 있는 수치가 곧 능력이라는 신호가 반복될수록 학생은 더 빨리, 더 정확히 맞히는 쪽으로 몸을 맞추게 된다. 사교육의 존재 방식도 이 왜곡을 강화한다. 학교의 바깥이 아니라 학교의 뒤편을 떠받치는 것처럼 굳어지면서 학교는 교육하는 곳이라기보다 평가의 관문으로 인식되기 쉽다. 학원은 학교 진도를 앞서가며 미리 배워 두면 수업이 편해진다는 논리를 만들고, 컨설팅과 자료 시장은 평가에 최적화된 전략을 거래한다. 그 결과 학교는 더 조심스러워지고 교사는 더 많은 기준표와 증빙 속에서 움직이며 학생은 더 촘촘한 경쟁의 레일 위에 올라선다. 공정과 효율을 말하는 관행이 실은 교육을 교육이 아니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장치가 될 수 있다는 경고가 그래서 더 크게 들린다.

 

그럼에도 저자가 인상적인 이유는 절망을 진단하는 데서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학교가 있다고 해서 그곳에서 반드시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라는 불편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교육자들이 학교를 더 나은 배움의 터전으로 만들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 왔다는 점 또한 놓치지 않는다. 더 나아가 학교라는 제도 자체를 근본적으로 의심했던 이반 일리치의 탈학교론, 프레이리의 문제제기 중심의 대안적 교육철학 같은 논의를 불러오며 학교 밖의 배움가능성까지 함께 상상하게 한다. 코로나19 이후 확산된 혼합 교육과 학습 네트워크 같은 흐름도 단순한 기술 낙관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학교의 보수성을 넘어설 실마리를 찾으려는 시도로 읽힌다. 결국 그는 교육의 목표를 다시 묻는다. 기업과 조직에 잘 순응하는 인재를 길러내는 것이 교육의 목표여야 하는가. 아니면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창의성과 상상력을 발휘하며,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해 변화와 정의를 이끌 시민을 길러내는 것이어야 하는가. 혹은 우리는 이미 해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현실에 발이 묶여 이도 저도 못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이 책을 좋게 본 것은, 교육을 둘러싼 논쟁을 누가 옳다로 단순화하지 않고 우리가 교육이라고 부르는 것이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끝까지 묻게 만들기 때문이다. 다만 얇은 책의 숙명처럼 결론이 더 단단하게 정리되어 닫히지못하고 다소 급히 멈춘 듯한 느낌이 남을 수도 있다. 더 광범위한 사회학적 논의를 기대한 독자라면 갈증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책은 한국의 교육 현실을 생각하는 교사와 학생, 그리고 부모에게 유효한 질문을 건넨다. 점수와 줄 세우기가 너무 자연스러워져 교육의 목적을 말하는 순간조차 어색해진 지금, 이 책은 우리를 다시 질문의 자리로 돌려놓는다. 교실은 매일 답을 요구하지만, 교육은 매일 질문을 되찾는 일이라는 걸 이 얇은 책이 조용히 그러나 야무지게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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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는 왜 친구를 원하는가 - 우리 삶에 사랑과 연결 그리고 관계가 필요한 뇌과학적 이유
벤 라인 지음, 고현석 옮김 / 더퀘스트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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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중심 문제의식은 외로움/고립이 개인의 감정 문제를 넘어 뇌와 몸의 건강을 좌우하는 공중보건적 위험 요인이라는 데 있다. 많은 사람이 이미 외로움을 체감하고 있고 그 여파가 사회 전반의 분열과 공격성, 신뢰 붕괴로 드러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저자는 현대를 외로움과 고립의 시대로 규정하면서, 수면·운동·식단으로 대표되던 건강의 3대 축에 사회적 관계를 네 번째 축으로 추가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외로움(loneliness)과 고립(isolation)을 구분한다. 외로움은 충분히 연결돼 있지 않다고 느끼는 주관적 상태”, 고립은 실제로 혼자 있는 객관적 상태로 정의되며, 두 상태는 사람들로 가득한 콘서트장 한가운데서도 외로울 수 있는 경험과, 가족여행 뒤 잠시 혼자 있고 싶을 때의 편안한 고립감처럼 전혀 다른 현상임을 강조한다. 문제는 현대의 고립이 휴식으로서의 혼자 있음이 아니라, 관계의 결핍과 단절이 누적되는 방식으로 증가한다는 데 있다.

 

저자가 제시하는 첫 번째 핵심 논지는 인간의 뇌가 본래 연결을 위해 설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진화적 환경에서 인간은 식량 부족, 포식자, 질병 등 위험 속에서 혼자 생존하기 어려웠고, 협력적 집단에 속한 사람이 더 잘 살아남았다. 그 결과 뇌에는 사회적 보상 시스템이 자리 잡았고, 타인과의 연결감을 느낄 때 도파민·세로토닌·옥시토신 같은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되어 즐거움·안정감·신뢰를 높이며 이들과 더 있고 싶다는 동기와 유대를 강화한다. 사회적 관계는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생존과 적응의 산물이며, 지금도 우리 뇌는 서로 곁에 있을 때보상을 주도록 작동한다는 것이다. “왜 고립이 흡연보다 더 해롭다는 말이 나오는가라는 질문을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사회적 연결이 건강의 핵심 변수로 작동할 수 있다는 문제 제기로 끌어올린다.

 

두 번째 논지는 이런 생물학적 설계가 오늘날 분열된(divided) 사회라는 환경 변화와 충돌한다는 주장이다. 사람들이 타인과 함께 보내는 시간, 가까운 친구의 수, 주관적 외로움 등 여러 지표가 전반적으로 악화되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개인이 체감하는 고립과 소외가 커지고 있다고 진단한다. 특히 문제의 핵심을 단순한 외롭다가 아니라 분열로 표현하는데, 정치적 양극화와 집단 정체성의 경직, 온라인 공간의 비공감적 공격성, 타자를 같은 공동체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겹치며 고립이 증폭된다는 시각이다. 혼자 있음자체보다 서로를 적대적 타자로 대하는 사회적 정서가 고립을 구조화하고 관계 맺기 자체를 어렵게 만든다.

 

세 번째 논지는 고립이 스트레스로서 몸에 작동한다는 점이다. 과거 무리에서 낙오 또는 배척은 생존 위험을 뜻했기 때문에 고립을 감지한 뇌는 경보를 울리고 스트레스 반응 체계(HPA )를 가동한다. 이 과정에서 코르티솔 같은 호르몬이 관여하며 단기적으로는 에너지를 동원하고 집중·학습에 이득이 있을 수 있지만 고립이 길어지면 경보가 상시화되어 몸이 늘 비상 상태에 머무르게 된다. 이 만성 스트레스가 코르티솔 둔감(조절 실패)과 만성 염증의 경로로 이어질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대규모 역학 연구와 동물 실험을 근거로 고립이 사망률, 치매 진행 속도, 심혈관 예후 등과 연관된다는 결과들이 반복적으로 보고된다고 소개한다. 결론은 명확하다. 고립은 마음이 불편한 정도를 넘어 뇌·면역·심혈관 시스템에 부담을 주는 생물학적 위험 요인이다.

 

네 번째 논지는 디지털 상호작용이 대면 상호작용을 완전히 대체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대면 상황에서 뇌는 목소리 톤, 표정, 시선, 말의 간격, 몸의 방향과 자세 같은 복합적 사회 단서를 동시에 읽어 상대의 감정을 추론하고 자신의 반응을 미세하게 조율한다. 동시 처리가 공감과 신뢰 형성의 핵심인데, 문자·SNS·화상통화 등 온라인 소통은 단서를 축소 또는 지연시키며 문맥을 좁힌다. 그 결과 오해가 늘고 공감은 약화되며 불필요한 적대감과 공격성이 더 쉽게 표출될 수 있다. 저자는 이를 가상 탈 참여 가설로 묶어 설명하며, 텍스트 중심 상호작용이 공감 관련 뇌 영역(전전두엽, 대상피질, 섬엽 등)의 작동 방식에 다른 조건을 만든다고 논의한다. ‘소셜 미디어라는 이름과 달리 그것이 제공하는 사회성은 대면 만남의 전부를 재현하지 못한다는 결론이다.

 

다섯 번째 논지는 인간의 뇌 자체에 사회적 함정이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사회적 만남을 실제보다 덜 즐거울 것으로 예측하는 경향이 있고 타인이 자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자신의 사회적 기술이 어느 정도인지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 편향 때문에 실제로는 친구를 만나고 대화하는 편이 뇌에 더 유익함에도 집에 머무르기를 선택하고 결국 연결의 기회를 스스로 줄여 고립을 강화한다. 저자는 이 함정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행동이 달라질 수 있다고 보며, ‘나가서 만나보니 생각보다 좋았다는 경험을 반복적으로 축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여기에 더해 긍정적 상호작용이 주는 보호 효과를 강조한다. 다른 사람과의 교류가 옥시토신·세로토닌·도파민 분비를 증가시켜 기분 개선과 동기 상승, 유대 강화로 이어진다는 설명은 익숙하지만, 저자는 이를 더 선명하게 만들기 위해 MDMA(엑스터시) 연구를 끌어와 사회적 상호작용이 저강도 MDMA와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다는 도발적 비유를 소개한다(비유의 요지는 쾌감이 아니라 유대·신뢰 회로의 활성에 있다). 또한 옥시토신이 사랑 호르몬이라는 통념을 넘어 항염·신경 보호·면역 기능 등과도 연관될 수 있다는 연구를 언급하며, 소속감과 친밀감이 실제로는 몸을 보호하도록 진화한 생물학적 장치일 가능성을 제시한다. 즉 연결은 마음만 따뜻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몸의 항상성 유지와도 맞물린다.

 

이 논지들을 바탕으로 저자는 사회적 식단(social diet)’이라는 실천 개념을 제안한다. 사회적 관계를 영양 섭취처럼 관리해야 한다는 비유로, 사람마다 필요한 사회적 칼로리가 다르되(내향형/외향형의 차이를 가치판단이 아닌 필요량의 차이로 설명) ‘0’은 위험하다는 메시지를 준다.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성향 점검(외향성 척도 등)과 함께 만남 이후의 피로·만족·기분 변화를 기록하는 사회적 저널링을 권한다. 누구를 만나 어떤 대화를 했을 때 에너지가 오르는지/소모되는지를 관찰함으로써 자신에게 맞는 관계의 빈도·형태·상대를 찾아가라는 처방이다. 큰 모임이 부담스러운 사람은 소규모 만남이나 반복적 일상 접촉(짧은 대화, 친절, 동네 커뮤니티)을 통해도 사회적 영양분을 확보할 수 있다는 취지로 읽힌다.

 

책의 후반부는 고립이 특히 치명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노년기를 다룬다. 저자는 고립된 노인의 치매·심혈관 질환 예후가 더 나쁘다는 연구를 소개한 뒤 자기 할머니의 사례를 조심스럽게 제시한다. 식단·운동·수면을 철저히 관리했음에도 사회적 연결의 중요성을 배우지 못한 채 오랜 시간을 혼자 보내면서 언어 기능과 의사소통 능력이 크게 퇴보한 모습이 그려진다. 통계와 개인적 서사가 맞물리는 지점에서 사회적 연결을 건강 습관으로 교육해야 한다는 메시지는 연구 요약 이상의 무게를 얻는다.

 

장점과 한계도 함께 정리해본다. 장점은 사회 진단을 뇌과학적 메커니즘과 촘촘히 연결해 외로움/고립을 명확한 생물학적·역학적 위험 요인으로 재정의했다는 점이다. 또한 대면 상호작용의 가치작은 친절·반복되는 만남의 효과를 연구 근거로 뒷받침하며 독자가 생활 수준에서 실천을 상상하게 만든다. 반면 논의가 미국 사회를 전제로 한 부분이 많아 한국의 가족 구조·노동 문화·복지 제도와 결합할 때는 조정이 필요하며, 개인의 습관 변화에 초점이 강해 정책·도시 구조·노동 환경 같은 구조적 요인이 고립을 강제하는 문제는 상대적으로 덜 다뤄진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또한 저자의 기본 시선이 외향적 화자에 가깝게 느껴질 수 있으나, 내향형에게도 사회적 영양분의 최소치는 필요하다는 점을 반복하며 완전 차단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결론부에서 저자는 이 논의가 단순한 경고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뇌가 연결을 보상하도록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거꾸로 말하면 연결을 회복시키는 작은 개입이 생각보다 큰 건강상의 이득을 낼 수 있음을 뜻한다. 그래서 그는 카톡 한 줄로 처리할 일도 가능하면 얼굴을 보고 이야기해 보라는 식의 생활 속 방향 전환을 제안한다. 동시에 온라인 공간의 설계(익명성, 추천 알고리즘, 갈등을 키우는 보상 구조)가 공감의 단서를 더 줄이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음을 암시하며, 기술·정책·공동체 차원의 분열 완화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남긴다. 즉 개인은 자신의 사회적 필요량을 점검하고(사회적 저널링), 최소치의 대면 접촉을 꾸준히 확보하며, 사회는 사람들이 서로를 같은 집단의 구성원으로 다시 인식할 수 있는 안전한 만남의 장(학교, 동네, 직장 문화, 돌봄 체계)을 넓혀야 한다. 외로움은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라 연결의 인프라가 무너질 때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사회적 증상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는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상투적 문장을 최신 뇌과학과 구체적 사례로 실감 나게 복원하는 데 있다. 편리함 때문에 비대면으로 줄여 온 만남과 대화가 사실은 뇌와 몸이 버티는 데 필요한 최소치였을 수 있음을 상기시키며 독자에게 묻는다. ‘오늘 내 뇌에게 얼마나 건강한 사회적 식단을 먹였는가?’ 그 질문이 불편하게 다가온다면 그 불편함 자체가 관계를 다시 점검하라는 신호일 수 있다. 결국 핵심은 더 많이가 아니라 더 건강하게 연결되는 방식을 찾는 데 있다.

 

#뇌는왜친구를원하는가 #더퀘스트 #뇌과학 #고립 #외로움 #책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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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에 바라본 삶 - 시대의 지성 찰스 핸디가 말하는 후회 없는 삶에 대하여
찰스 핸디 지음, 정미화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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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은퇴가 점점 가까워지니 생각보다 많은 질문이 마음속에 떠오른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던 교직이라는 긴 여정을 정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막상 정년이 눈앞으로 다가오니 그동안 익숙했던 일상이 서서히 형태가 바뀌기 시작하는 것 같다. 교무실 책상 위 달력을 넘기다가 아 이제 정말 몇 년 남지 않았구나싶은 생각이 들 때면 괜히 미묘한 정적이 마음 안쪽에 자리 잡곤 했다. 이런 시기에 읽게 된 이 책은 예상보다 훨씬 더 현실적으로 와닿는 조언을 건넨다. 아흔이라는 나이는 멀리 있는 숫자 같지만, 그가 던지는 질문과 통찰은 오히려 지금의 내 고민을 깊이 건드린다.

 

저자 찰스 핸디는 조직··커리어의 변화를 철학적 언어로 풀어낸 아일랜드 출신 경영사상가로 알려졌다. 대기업 중심의 평생직장 모델이 흔들릴 것을 일찍부터 짚으며, 오늘날의 프리랜서/프로젝트형 노동, 유연한 조직, 의미·목적 중심의 일 같은 흐름을 설명하는 개념들을 널리 퍼뜨렸다. Shell에서의 기업 경험을 거쳐 런던 비즈니스 스쿨에서 활동했고 이후 작가·강연가로 대중적인 영향력을 넓혔다.


저자의 열아홉 번째이자 마지막인 이 책은 분명 그의 저서 중 가장 두꺼운책은 아니지만 중요한 의미에서는 오히려 가장 묵직한책일지도 모른다. 그는 202412, 92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온 사람들에게는 큰 상실이었겠지만 동시에 삶과 일, 비즈니스에 대해 인간적이고도 선견지명 있는 통찰을 평생 남긴 데 대한 고마움도 컸을 것이다. 그는 조직이 지닌 답답하고 우울한 현재를 어떻게 더 나은 미래로 바꿀 수 있는지를 꾸준히 보여주었다고 평가된다.

 

그는 이 책의 끝에서 자신을 지나치게 낮춰 말한다. “나에 관해 남는 것이라고는 어딘가에 실린 추모 기사와 몇 장의 사진, 그리고 몇몇 사람들의 추억뿐일 것이라 하는데, 사실 그렇지 않다. 비이성의 시대(The Age of Unreason, 1989), 텅 빈 우비(The Empty Raincoat)(미국에서는 역설의 시대, 1994), 굶주린 영혼(The Hungry Spirit, 1998)같은 책들이 남아 있다. 여기에 그의 강연까지 더해지며 그는 경영 구루로 알려졌고, 본인은 사회철학자라는 표현을 더 좋아했다.

 

이 책은 자연스럽게 철학 쪽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간다. 특히 스토아 철학이 많이 등장하고 영성도 다룬다. 아일랜드에서 대주교 보좌 성직자의 아들로 자란 성장 배경이 말년에 다시 울림을 만든 듯하다. “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서 그는 신에 대한 의심을 솔직히 털어놓다가 결국 이렇게 말한다. 세상을 혼자 떠나게 될 것 같지만 그래도 도와줄 수 있다면 정말 고맙겠다고.

 

그가 말하는 좋은 경영과 통솔력은 결국 한 가지로 압축된다. 사람 안에 있는 재능을 발견하고 그것을 실제로 쓰게 만드는 것이다. 현대 비즈니스의 경직된 관행을 겨냥한 비판도 여전하다. 많은 리더가 보이는 자기중심성, 사익 추구에 대해 날카롭게 꼬집는데 그 대상은 도널드 트럼프까지 포함된다. 그는 조직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운영하라고 말한다. 또 직원들에게는 긍정적으로 기여할 자유를 줘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렇지 않으면 더 쉬운 길인 부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좋은 경영과 통솔력이란 사람 안에 있는 선물을 찾아내 그걸 쓰게 만드는 일이다.

 

저자는 가족에 대한 사랑을 자주 언급하는데, 특히 아내 엘리자베스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엘리자베스는 오랫동안 그의 비공식 에이전트이자 홍보 담당자였고, 대화로 부딪치며 생각을 다듬어 준 토론 상대이기도 했다. 아내는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전반적으로 그는 삶의 끝을 받아들이며 자신이 꽤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냈다는 사실에 오히려 담담하게 놀라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자신이 가장 잘하는 일을, 다른 사람들의 선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에 맞춰 살려고 했고, 독자에게도 그 기회를 허비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저자가 나이를 바라보는 방식은 특히 흥미롭다. 그는 신체가 늙어가는 속도와 마음이 움직이는 속도는 다르다고 말한다. 몸은 예전 같지 않아도 마음은 여전히 새로운 것을 향해 미세하게 움직일 때가 있다는 것이다. 내 경험과 정확히 겹치는 말이었다. 학생들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 만큼 기술 변화가 빠르게 지나가는 순간도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글을 쓰고 외국어를 배우고 무언가를 시도해보고 싶은 마음은 남아 있다. 저자는 이런 모순을 부자연스럽다거나 민망한 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경험하는 현상이라고 말한다. 나이 듦을 괜히 감춰야 할 변화처럼 여겼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그가 던지는 중요한 메시지 중 하나는 성취 중심의 삶에서 벗어나 존재 중심의 삶으로 전환하라는 것이다. 교직에서 살아온 시간 동안 나는 수많은 숫자에 둘러싸여 있었다. 성적표, 평균, 수행평가, 입시 결과, 등급. 학생들에게는 점수가 전부가 아니다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나 자신은 계속해서 수치로 평가받는 삶에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오래 남는 것은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만들어진 순간들이라는 저자의 지적은 다시 한번 교사로서의 시간을 돌아보게 했다. 학생과 나눴던 짧은 대화, 동료가 건넨 한마디, 뜻밖의 감사 인사. 이런 장면들이야말로 시간이 지나도 흐려지지 않는 기억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가 을 바라보는 시각도 은퇴를 앞둔 사람에게 꽤 큰 울림을 준다. 그는 일이라는 것을 직책이나 급여의 문제로 한정하지 않는다. 자기 능력을 의미 있는 방향으로 쓰는 모든 활동이 일일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은퇴 이후의 삶을 공백으로만 바라보던 내 생각을 바꿔 놓았다. 학교를 떠나도 여전히 누군가와 지식을 나누거나, 작은 모임을 만들거나, 배움의 자리를 이어갈 수 있다. 글을 쓰는 일, 지역 사회에서 봉사하는 일, 새로운 취미를 깊이 있게 탐구하는 일 등 일의 형태는 달라질 뿐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그의 설명은 매우 설득력이 있었다. 은퇴 후의 시간이 잃어버릴 시간이 아니라 다르게 채울 수 있는 시간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저자는 관계의 재구성에 대해서도 중요한 조언을 남긴다. 교사로 지내는 동안 내 관계의 대부분은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형성되었다. 퇴직을 앞두고 그 관계들이 자연스럽게 변화할 것이라는 사실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일이었다. 하지만 저자는 은퇴가 관계의 축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의 지도를 다시 그릴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미뤄 두었던 가족과의 시간, 오래 연락하지 못한 친구들, 취미 모임에서 만날 사람들, 새로운 배움의 공동체 등이 앞으로의 관계를 채울 수 있다는 그의 관점은 현실적이면서도 긍정적이었다.

 

마지막으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남은 시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그의 태도였다.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세며 불안해하기보다는 그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우선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 역시 은퇴를 앞두고 앞으로의 시간을 계산하듯 바라본 적이 많았는데, 그의 조언을 읽으며 관점이 조금 바뀌었다. 시간의 양보다 쓰임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은퇴 후의 삶을 스스로 설계하는 데 힘을 얻을 것 같다.

 

결국 이 책은 은퇴를 앞둔 교사인 나에게 삶의 다음 단계를 준비하는 데 필요한 시야를 넓혀준다. 은퇴는 단절이 아니라 재구성의 과정이며 그 과정 안에서 일도, 관계도, 시간도 새로운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앞으로의 시간이 막연한 빈칸이 아니라 아직 쓰지 않은 페이지처럼 느껴졌다. 무엇이든 쓸 수 있는 인생의 새 공책이라니, 멋지지 않은가? 저자의 조언은 결국 이런 한 문장으로 정리된다.

 

이제부터는 자네가 원하는 방식으로 다음 장을 써보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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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제목처럼 나에게서도, 타인에게서도 한 걸음 물러나는 법을 이야기하는, 가볍지만 꽤 도발적인 자기계발서다. 처음에는 쉬운 구어체 영어로 쓰였다는 말만 듣고, 솔직히 말해 영어 원서를 날로 먹어볼(?) 마음으로 집어 들었다. 온라인 독서 모임에 참여해서 한 달 동안 천천히 읽어나가 보니, 일상적인 표현과 자연스러운 구어체를 익히는 데는 확실히 도움이 됐다. 내용의 깊이와는 별개로 영어 원서를 어렵게 느끼는 독자에게는 구어체 영어 교재처럼 활용해도 괜찮은 책이다.

 

내용 면에서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단순함이다. 저자는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불필요한 스트레스의 상당 부분이 타인의 생각·감정·행동을 통제하려는 마음에서 나온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이 복잡한 이야기를 “Let Them(그냥 두자)”“Let Me(나는 이렇게 하자)”라는 두 문장 구조에다 거의 다 집어넣어 버린다. 남들이 어떻게 하든 내가 바꿀 수 없는 부분은 그냥 두고, 그 대신 지금 여기에서 내가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자는 말이다. 이 단순한 원칙을 책 전체에 걸쳐 반복하다 보니, 독자는 자연스럽게 타인의 시선에서 한발 물러나 지금 이 순간, 나는 뭘 선택할 건가?”라는 질문을 자꾸 떠올리게 된다. 복잡한 이론 대신 알기 쉬운 구조를 계속 되풀이하는 방식이라, 이미 머릿속이 복잡한 젊은 독자들에게는 이해하고 실천하기 한결 수월한 편이다. 전체적인 인상은 스토아 철학을 아주 현대적인 영어와 사례들로 가볍게 요약해 놓은 입문서를 읽는 느낌이다.

 

이 단순함은 곧 마음이 좀 편해지는 느낌으로 이어진다. 가족이 내 연애를 못마땅해하든, 동료가 내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든, 책 속 화자는 계속해서 묻는다. “그건 그들의 문제고, 나는 내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타인의 판단과 기대를 바꾸려고 애쓰는 대신 내 반응과 감정을 어떻게 다룰지에 더 눈길이 가게 된다. 그 과정에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라, 익숙하지만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가 다시 또렷해진다. 저자 본인이 바로 이 “Let Them”이라는 간단한 구호 하나로 특히 미국 독자들의 관심을 끌고, 결국 경제적 성공까지 거둔 인물이라는 점도 책의 설득력에 어느 정도 힘을 보탠다.

 

하지만 인생이란 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기 때문에, 이런저런 자기계발서들이 여전히 잘 팔린다는 사실을 몸으로 겪어 온 입장에서 보면, ‘그냥 두자는 조언을 아주 새로운 통찰이라며 떠받들기는 어렵다. “남들이야 어떻게 하든, 내가 어쩔 수 없는 건 내려놓고, 내가 할 일에 집중하자는 말은 사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본 오래된 격언에 가깝다. 이 책의 핵심 메시지는 초반부에 거의 다 제시되고, 이후 장들은 그 메시지를 다양한 사례와 일화로 반복해서 변주하는 정도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이미 미움받을 용기나 대중적인 스토아 철학 입문서를 읽어 본 독자라면, 문제의식과 제안의 방향이 아주 새롭다고 느끼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이 정도 내용이 한 권의 책으로 포장되어 전 세계적인 관심을 끌고, 저자를 일약 스타 강사로 올려놓을 만큼 혁신적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여기에 최근 불거진 표절·아이디어 도용 논란도 빼놓을 수 없다. 미국 쪽 온라인 기사와 칼럼들을 보면, 멜 로빈스가 책과 강연에서 전면에 내세우는 “Let Them/Let Me” 구도가 사실은 작가이자 시인인 Cassie Phillips2019년에 쓴 시 Let Them, 그 시가 2022년 무렵 SNS에서 퍼져 나가면서 만들어낸 ‘Let Them’ 흐름과 상당 부분 겹친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이 시는 문신 문구와 각종 용품, 자기계발 글귀로 재사용되며 일종의 작은 운동처럼 확산된 바 있다. 필립스는 자신의 시와 로빈스의 책·강연 사이에 표현과 구조가 매우 비슷하다고 주장하며, 최소한 출처 표기와 크레딧은 필요하다고 말한다. 반대로 로빈스는 그 시를 알지 못했고, 자신의 아이디어는 자녀와 나눴던 대화와 개인적인 고민, 따로 해 온 조사에서 나온 것이라고 반박한다. 아직 법적 판결이 나온 것은 아니지만, 로빈스가 “Let Them”이라는 표현을 상표로 등록·보호하려 했던 점, 그리고 책과 오디오북 어디에도 필립스의 시나 선행 사용례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 때문에, 독자로서는 이 구호가 과연 얼마나 독창적인 발상인지, 혹은 이미 떠돌던 문장을 비교적 세련되게 재포장한 결과에 더 가까운지 생각해 보게 된다.


실천 단계에서도 한계는 분명하다. 책은 가족이 내 연애를 싫어하게 두자”, “친구가 나를 오해하게 두자처럼 다소 과감한 문장들을 앞세운다. 하지만 그 뒤에 따라와야 할 질문들, 이를테면 현실에서 그 관계를 어떻게 이어갈 것인지, 어디까지는 설명해 보고 어느 지점에서부터는 거리를 둬야 하는지, 정말 끊어야 할 관계와 버텨 봐야 할 관계를 어떻게 구분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안내는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래서 그냥 두자는 메시지가 어떤 독자에게는 책임 있는 자기 돌봄이라기보다, 불편한 갈등을 피하기 위한 핑계처럼 들릴 위험도 있다. 타인의 행동을 무조건 내버려 두는 태도가 정작 지켜야 할 소중한 관계에서 필요한 대화와 조율까지 포기하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짚어볼 지점은, 저자가 자신의 개념에 이론(theory)’이라는 이름을 직접 붙였다는 점이다. ‘Let Them’이 단순한 생활 조언을 넘어 학문적 의미의 이론으로 인정받으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우선 핵심 개념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해야 한다. 무엇을 그냥 둔다는 것인지, 그로 인해 마음가짐과 행동에서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를 어떻게 관찰·측정할 것인지에 대한 정의가 있어야 한다. 이어서 이렇게 하면 이런 변화가 일어난다는 식의 예측이 제시되고, 실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나 장기 관찰을 통해 그 예측이 검증되어야 한다. 다른 연구자가 다른 집단을 대상으로 같은 과정을 반복해도 비슷한 결과가 나와야 하니, 재현 가능성도 확보되어야 한다.


이론이 잘 작동하는 상황과 사람의 범위, 즉 적용 가능성과 한계도 함께 제시되어야 한다. 어느 경우에 효과가 크고, 어디서는 약한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왜 그런 효과가 나타나는지에 대한 작동 원리를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일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타인을 통제하려는 시도를 줄이면 스트레스 수준이 낮아지고, 아낀 에너지가 자기 선택과 실행으로 옮겨 간다는 흐름을 나름의 틀로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런 연구와 결과가 논문 형태로 공개되고, 동료 연구자들의 평가를 거쳐 여러 연구를 종합했을 때도 일정한 효과가 꾸준히 확인되어야 비로소 생활 꿀팁이 학문적 의미의 이론에 가까워진다.

 

이 기준으로 보면, 저자가 책 제목에 이론을 붙였다는 이유만으로 이를 곧장 학문적인 이론으로 보기는 어렵다. 대중서를 홍보할 때 이론이라는 단어를 아이디어나 원칙을 강조하는 수사적 표현으로 쓰는 일은 흔하고, 그것 자체를 문제라고 보기도 어렵다. 다만 학계에서 말하는 이론은 앞서 말한 것처럼 개념 정의, 측정 가능성, 반복 검증, 작동 원리, 적용 범위, 동료평가와 누적된 증거까지 갖춘 체계를 가리킨다. 그런 점에서 Let Them Theory라는 제목은 실제 내용에 비추어 볼 때 자기관리 요령이나 생활 조언에 더 가깝고, 엄밀한 의미의 학술 이론이라고 부르기는 힘들다. 마케팅과 대중적 소통의 관점에서 보면 이론이라는 단어는 충분히 매력적인 포장일 수 있다. 하지만 학문적 맥락에서라면 이론보다는 법칙’, ‘요령’, ‘실천법정도로 부르는 편이 더 정확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점을 미리 염두에 두고 책을 펼치면, 제목이 주는 과장된 기대와 실제 내용 사이의 간격에서 느끼는 실망은 조금 줄어들 것이다.

 

정리하자면, 이 책은 불필요한 죄책감과 타인의 기대에 짓눌려 사는 사람들에게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라, 단순하지만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정신적 도구를 제공한다. 동시에 영어 원서를 큰 부담 없이 읽어 보고 싶은 독자에게는 구어체 영어를 익히기 위한 읽기 자료로도 충분히 쓸 만하다. 반면, 인생에 대한 깊은 조언이나 학문적 엄밀성을 바라는 독자에게는 메시지가 다소 얕고 반복적일 수 있으며, 제목이 내세운 이론이라는 표현도 학술적인 이론이라기보다 잘 만든 구호에 가깝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결국 이 책은 삶을 통째로 바꾸는 혁신적인 통찰이라기보다는, 이미 알고 있던 진실을 다시 한번 또렷한 문장으로 확인시켜 주는, 잘 팔리는 자기계발 구호의 한 사례로 읽는 편이 더 공정한 평가에 가깝다.

 

#렛뎀이론 #그냥냅둬유소나멕이게 #애쓸거없슈 #영어원서 #영어공부 #LetThemThe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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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다면 잘 살고 있는 것이다 - 삶이 흔들릴 때 꺼내 읽는 문장들
부아c 지음 / 페이지2(page2)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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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최근 들어 어느 해부터인가 별일이 없는데도 신경이 곤두선다. 예전 같지 않게 몸이 쉬 피곤하고, 별말 아닌데도 짜증부터 올라오고, 밤에는 잠이 쉽게 오지 않는데 푹 자고 싶어도 새벽 5시면 저절로 눈이 떠진다. 건강 검진표의 각종 지표가 정상 범위에서 경계선 쪽으로 옮겨가는 추세라 마음은 예전보다 훨씬 더 낯설고 불안하다. 혼자 드라마를 시청하다가 울음이 터지기도 하고, 슬픈 노래의 전주만 들어도 울컥한다. 사랑스럽기만 하던 아내가 무서워진 지는 이미 제법 되었다. 흔히 남성 갱년기라 부르는 시기, 호르몬 분비의 변화는 몸뿐 아니라 마음마저 뒤흔들어 놓는다. 나만 이상해졌나 하는 생각을 누군가에게 속 시원히 말해 보기도 어렵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다. 그 외로움은 단순히 고통스러운 감정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내 영혼이 나에게 보내는 중요한 신호였다. “더 이상 마음이 닿지 않는 자리에 머물지 말라, 새로운 길로 나아가라는 조용한 메시지였다. (32)

 

부아c외롭다면 잘 살고 있는 것이다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하는 책으로 어울린다. 제목도 그렇지만 아직 더 성장할 게 남았나 싶은데 진짜 성장은 혼자일 때 시작된다는 부제 역시 도발적이다. 대부분 사람에게 외로움은 실패와 결핍의 신호다. 중년의 가장에게는 거의 돌직구다. 가정에도, 회사에도, 친구들 사이에도 어딘가 잘 섞여 있어야 정상이라는 강박 속에서 외로움은 가능한 한 빨리 지워야 할 감정으로 취급된다. 그런데 이 책은 정반대의 말을 건넨다. 외롭다면, 어쩌면 당신은 잘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누군가 당신의 삶을 평가하려 할 때, 그저 , 저는 이렇게 사는 게 좋아요라고 답하면 된다. 자신의 삶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태도, 이것이 진짜 당당함이다. (78)

 

저자는 여러 해 동안 블로그와 SNS에 매일 같이 글을 올리며 사람들과 소통해 왔다고 한다. 그 시간 속에서 건져 올린 문장들을 네 개의 장으로 엮어낸 것이 이 산문집이다. 1부는 외롭다면 잘 살고 있는 것이다라는 제목으로, 타인에게 맞추느라 잊고 있었던 라는 존재와 다시 마주하는 순간들을 이야기한다. 2진짜를 가진 사람은 조용하다에서는 조용히 버티고 꾸준히 살아내는 태도의 가치를 말하고, 3인생이 망했다고 느낄 때에서는 무너짐과 실패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마지막 4행복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에서는 삶의 무게를 온전히 없애지는 못하더라도 그 무게를 견디는 새로운 시선을 건네준다.

 

그러니 기억하자. 힘들수록, 포기하고 싶을수록, 더 오래 버텨야 한다. 기회는 늘 가장 힘든 고비를 넘긴 바로 그다음 코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운은 결국 남아 있는 사람의 몫이다. (141)

 

이 구조는 몸과 마음이 함께 요동치는 중년 남성의 심리 곡선과 묘하게 겹친다.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해 온 나이, 가족과 조직에서 책임을 지고 있는 위치. 겉으로 보기엔 자리를 잡은 어른 남자의 이미지지만, 속으로는 내가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 건가?”라는 질문이 조용히 커지는 시기다. 이때 찾아오는 공허함과 짜증, 무력감은 단순히 테스토스테론 수치 감소의 문제가 아니라 그동안 미뤄 두었던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다시 시작하라는 신호일 수 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는 이유는, 그에게 내가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마음을 주고 믿었기 때문에 실망하게 되고, 그 실망이 곧 상처가 된다. (191)

 

이 책이 좋은 점은, 그 신호를 지나치게 거창하지 않은 언어로 설명한다는 데 있다. 각 제목의 글은 길지 않고 문장도 어렵지 않다. 출퇴근 지하철에서, 점심 먹고 자투리 시간에, 밤에 불 끄고 잠들기 전 침대 위에서 한 편씩 읽기 좋다. 그래서 더 취약한 순간에, 자꾸만 핸드폰을 붙들고 의미 없는 뉴스나 영상만 넘기게 되는 손을 잠시 멈추게 한다. 눈앞의 한 페이지에 적힌 문장들을 따라가다 보면 이상한 건 나만이 아니다라는 최소한의 안도감이 생긴다. 특히 강하게 와 닿는 지점은, 이 책이 외로움을 없애야 할 부정적 감정으로 보지 않는 태도다. 중년의 남자는 늘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가장이고, 회사에서는 상사이자 팀장이다. 역할이 많을수록 속마음을 꺼내 놓을 수 있는 자리는 줄어든다. 그러다 보니 외로움은 곧 무능의 증거, 실패의 낙인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저자는 말한다. 남에게 맞추느라 미뤄 두었던 나 자신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할 때, 자연스럽게 외로움이 찾아올 수 있다고. 그건 오히려 이제라도 나 자신과 친해지려고 하는건강한 움직임일지도 모른다고.

 

주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은 주변을 행복하게 하면서 자신도 행복해진다. 주변을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은 여러모로 행복해질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 된다. (240)

 

물론 이 책은 자기계발서도, 심리 치료 교범도 아니다. 호르몬 수치나 전문적인 상담이 꼭 필요한 상황을 대신해줄 수는 없다. 하지만 바로 그래서 오히려 부담 없이 손에 들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전문가의 진단 대신 나와 비슷한 혼란을 겪은 누군가의 문장을 읽으며 나만 이상하고 힘든 게 아니었구나라고 한 번쯤 숨을 고를 수 있게 해준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이 소소한 토닥임이 상처를 덜어내는 큰 출발점이 될 수 있다. 특히 호르몬 변화로 몸이 예전 같지 않고 마음이 예민해졌다고 느끼는 중년 남성이라면, 이 책을 하루에 한두 장씩만이라도 천천히 읽어 보기를 권하고 싶다. 외로움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이렇게 말할 힘을 얻게 될지 모른다. “외로운 내가 망가진 게 아니라, 그런데도 꽤 잘 버티며 살아내는 중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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