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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한아뿐
정세랑 지음 / 네오픽션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소설에는 단순히 '인간 수컷은 필요없어'가 아니라, '인간 수컷 따윈 필요없어'란 말이 나올 정도로 멋진 외계인 남자가 등장한다. 외계인 남자의 장점은 다음과 같다.
1. 외계인과의 만남에서는 굳이 우리의 만남이 운명임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사는 동네, 출신 학교, 출근할 때 몇 호선을 타세요, 지리하게 읊어가며 너와 나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란 걸 확인하고자 하는 인간세계의 풍습에 질린 녀성이라면 외계인을 만나보도록 하자. 그는 이미 2만 광년을 달려 나를 보러 온 것이기에, 그 진정성과 운명성은 두 번 말할 것 없이 순도 100%.
2. 외계인은 연필심을 갈아서 삼킨 다음 다이아몬드로 만들어 토해 내고, 다시 그것을 반지로 만들어 프로포즈 한다. 인간 수컷 역시 노동을 하여 임금을 받고, 다시 그 돈을 상품 교환의 매개로 삼아 다이아몬드 반지를 획득하기에 간접적으로나마 자신의 몸을 던져 다이아몬드 반지를 이 세상에 존재케 한 것이라 우길 수 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외계인이 직접 몸으로 만들어 내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더 멋진거 같다. 돈으로 장작을 사주는 남자보다는 직접 뒷마당에서 장작 패주는 남자가 더 멋있는 순간이 있는것처럼…
3. 외계인은 누구에게도 빌리지 않은 자신의 언어로 사랑을 고백할 줄 안다. 책에서 밑줄긋기 한 구절이나 드라마 명대사 같은 것에 빚지지 않고 기본적인 명사와 동사만을 이어 붙여 자신의 진심을 전하는데 그 고백이 무척 달다. 인간 암컷들에겐 컬쳐숔. "가까이서 보고 싶었어. 나는 탄소 대사를 하지 않는데도 네가 내뿜는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싶었어. 촉각이 거의 퇴화했는데도 얼굴과 목을 만져보고 싶었어. 들을 수 있는 음역이 아예 다른데도 목소리가 듣고 싶었어...너를 위한, 너에게만 맞춘 감각 변환기를 마련하는 데 긴 시간이 들었어." 클리셰 몇 문장과 제한된 언어(ex) 좋아해-사귀자-사랑해-오빠믿지?)로 구애의 80-90%를 해치우는 인간 수컷들이 미개인처럼 보인다.
4. 내가 전혀 모르는 세상을 보여주고 알려준다. 결혼한 남자를 2가지로 나누자면 '아내의 눈을 가리는 남자'와 '아내와 함께 더 많은 것을 보려는 남자'가 있다고 하는데 외계인은 기본적으로 후자의 자세를 취한다는 것. 밤하늘의 별을 보며 인간 수컷이 "이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오그리토그리 할 때 외계인은 우수젖은 눈으로 이렇게 말한다. "한때 저 별에는 괴로울 때 온몸에 눈물 대신 석영이 맺히는 종족들이 살았어. 그 사람들은 석영으로 화폐를 대신했었어, 더 고통스러운 사람들에게 더 큰 대가를 주기 위해서. 꽤 인도주의적이였지. .. .." 당신이 보고 온 세상에 내가 왜 한숨이..
소설을 평가하는 일반적인 기준-문학성, 짜임새, 문장력 등-들을 생각해 보자면 별 다섯이란 평가가 지나치게 주관적이란 생각도 들지만 그녀의 글에는 독자를 설레게 하는 무엇이 있다. 할리퀸 로맨스 남주 뺨치는 외계인 남친의 캐릭터가 강력하긴 하지만, 신사의 품격을 보고도 하품하는 다 큰 처녀들이 단지 그 캐릭터에 혹했다고 할 수 있을까? 정말 독자들을 뒤흔드는 건 그녀의 갇히지 않은 상상력과 십대마냥 마르지 않은 감수성이라 생각한다. 탄탄하고 있어보이는 소설은 열심히 습작하고 훈련하다 보면 언젠가 쓸 수 있겠지만, 이런 '느낌'이 있는 살아있는 소설은 젊은 시절이 지나면 다시 쓸 수 없는 작품이기에 아낌없이 별 다섯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