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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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져 있을 때 이런저런 상황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사람들은 지독하게 괴로워하면서 도저히 극복하지 못할 것처럼 생각해. 하지만 바다가 얼마나 유용한지 알면 놀라게 될 걸."
"그게 무슨 뜻이에요?"
"사랑은 항해에 서투르기 때문에 바다에 나서면 약해지지. 이사벨과 래리 사이에 대서양이 놓이게 되면, 배를 타기 전에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만 같던 아픔도 실은 얼마나 보잘것 없는 것인지 깨닫게 될 거야."
"경험을 통해 아시는 거예요?"
"파란만장한 지난날의 경험에 비춰 말하는 거야. 한창 짝사랑으로 가슴앓이를 할 때 난 즉시 대양으로 나가는 정기선을 탔거든."

여자의 직감은 그 여자가 믿고 싶어 하는 것과 너무도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여자들은 정말 불행한 존재예요. 사랑에 빠지면 매력이 없어지는 경우가 많잖아요.

난 단지 자기 확신이 얼마나 강력한 열정이 될 수 있는지 알려 주고 싶었을 뿐이야. 정욕도, 굶주림도 그 옆에서는 아주 하찮은 것이 되어 버리지. 자기 확신에 사로잡히면 그것으로 자신의 성격을 완전히 단정 짓게 되고, 그로 인해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 갈 수도 있어. 그 확신의 대상은 중요하지 않아.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일 수도 있지. 어쨌든 그것은 그 어떤 술보다 중독성이 강하고, 그 어떤 사랑보다 사람을 지치게 만들고, 또 그 어떤 악덕보다도 강력하고 매혹적이야. 사람은 자신을 희생시키는 순간 하나님보다 훨씬 더 위대한 존재가 되지. 왜냐면 전지전능한 하나님도 자신을 희생시키지는 못했으니까. 기껏해야 자신의 독생자, 그러니까 예수만 희생시켰지.

어쨌든 사는 게 엿 같잖아요. 그걸 잠시나마 잊게 해 주는 무언가가 있다면, 당연히 누려야죠.

-이런 책에서 찾고자 하는 게 뭡니까?
-그걸 알았다면 지금쯤은 적어도 그것을 찾고 있겠죠.

수사들이 암송하는 주기도문을 듣고 있으면 저들은 어떻게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꾸준히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죠. 아이들이 땅에 있는 자기 아버지한테 양식을 달라고 간청하는 것 보셨습니까? 아이들은 아버지가 당연히 먹여 줄 거라고 믿잖아요. 아버지가 음식을 준다고 해서 고마워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럴 필요도 없죠. 오히려 낳아 놓고 제대로 못 먹이거나 안 먹이면 우린 그런 사람을 비난합니다. 전능하신 창조주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당신의 피조물들에게 물질적으로든 영적으로든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제공할 준비가 안 됐다면 그들을 창조하지 말았어야죠.

나를 버리는 자들은 잘못 생각하는 것이니,
그들이 나를 떠나 날아갈 때, 나는 그 날개이니라.

가네샤 씨는 이 세상에서 느끼는 만족은 덧없는 것이며, 오직 무한한 존재만이 지속적인 행복을 줄 수 있다고 대답하더군요. 하지만 끝없이 존속한다고 해서 좋은 것이 더 좋아지지는 않으며 하얀 것이 더 하얘지지는 않죠. 새벽에 아름다웠던 장미가 정오에 그 아름다움을 잃는다고 해도 그것이 새벽에 가졌던 아름다움은 실제로 존재했던 거잖아요. 이 세상에 영원한 건 없어요. 그러니 무언가에 영원한 존속을 요구한다는 건 어리석은 짓이겠죠. 하지만 그것이 존재할 때 그 안에서 기쁨을 취하지 않는 것은 훨씬 더 어리석은 거예요. 변화가 존재의 본질이라면 그것을 우리 철학의 전제로 삼는 것이 현명하죠.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순 없어요. 강물은 끊임없이 흐르니까. 하지만 다른 강물에 들어가도 그것 역시 시원하고 상쾌한건 변함없어요.

유럽 사람들은 미국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유럽인들은 우리가 많은 부를 축적하고 있으니 돈밖에 모른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우린 돈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돈을 갖고 있으면 전부 써 버리죠. 적절하게 쓰기도 하고 부적절하게 쓰기도 하지만 어쨌든 전부 써 버립니다. 우리에게 돈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성공의 상징에 불과하죠. 우리 미국인들은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더 이상주의적인 사람들입니다. 엉뚱한 것에 대해 이상을 세웠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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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18 10: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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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 -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113
존 파울즈 지음, 정영문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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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버는 것은 남자의 일로 그것은 이상화된 남자다움이었다.

부는 괴물 같은 거요. 재정적으로 그것을 관리하는 법을 배우는 데는 한 달이 걸리오. 그리고 심리적으로 그것을 관리하는 법을 배우는 데는 몇 년이 걸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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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12
존 파울즈 지음, 정영문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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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자 하나를 버리는 데서 얻는 안도감을 자유에 대한 사랑이라고 오해했다.

나는 다시 말을 붙였다. "이 책 읽어 봤어요?"
"쓸데없는 얘기는 하지 말죠. 문학 따위는 집어치우고요. 당신은 똑똑하고, 나는 아름다워요. 이제 자신이 정말로 누구인지에 대해 얘기해요."

적어도 그는 위선자는 아니었다 그에게는 자신을 맹목적으로 믿는 사람들에게서 으레 느껴지는 매력이, 균형 잡힌 사람의 매력이 있었다.

(소설에 대해)"왜 몇 가지 않되는 진실에 이르려고 수백 페이지나 되는 거짓과 씨름해야 하는 거요?"

"누구에게나 인생의 전환점 같은 시간이 찾아오는 법이오. 그런 순간이 오면 자기 자신을 받아들여야만 하오.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신이 어떤 존재이며, 늘 어떤 존재로 남을 것인가 하는 것이오. 당신은 이것을 알기에는 너무 젊소. 여전히 뭔가가 되어 가고 있으니까. 어떤 존재인 것이 아니라."
"만일 그 전환점을 인식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되는 거요. 그 순간을 인식하고, 그 것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지나지 않소."

열아홉 살에는 단순히 뭔가를 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소. 정당화하기도 해야 하는 거요.

어떤 의미에서 그는, 어쩌면 언제나 부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극도로 순진한 사람이었소. 자기 부정이라는 것은 어떤 미적 섭생의 일부를 이루지 않는 한 그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것이었소. 한번은 그와 함께 서서 순무 밭에서 일을 하는 소작인들을 바라본 적이 있소. 밀레의 그림에 나오는 것 같은 광경이었소. 그때 그가 한 말은 "저들은 저들이고, 우리는 우리라는 사실이 아름답소."가 전부였소.

"네가 마시는 것은 무엇인가? 물인가, 파도인가?"

나는 늘 남녀가 만났을 때 함께 잠을 자고 싶어 하는지 아닌지는 10분 안에 알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고 그 처음 10분 이후의 시간은 세금 같은 것으로, 약속된 계약이 정말로 즐거울 것 같으면 지불할 가치가 있을 수도 있지만 십중팔구는 금세 쓸데없는 비용이 되어 버렸다.

앨리슨은 열 척의 배를 내 안에 띄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줄리는 1천 척의 배를 띄웠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사랑을 나누었다. 그것은 섹스가 아니라 사랑이었다. 물론 섹스가 훨씬 더 현명했을 테지만.

"나는 매력적인 남자가 반드시 매력적인 영혼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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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부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6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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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들면 문득 시간이 사라진다. 그러므로 시간의 경과가 고통이 될 때는 자는 게 최고다. 죽는 것도 아마 같은 이치일 것이다. 하지만 죽는 것은 쉬운 일 같아도 그리 간단하지 않다. 우선 평범한 사람은 죽는 대신 수면으로 임시변통하는 것이 간편하다.

아무리 기분이 좋지 않아도, 번민이 있어도, 영혼이 달아날 것 같아도 배만은 어김없이 고파오는 법이다. 아니, 그보다는 영혼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밥을 바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당할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사람의 생각만큼 들락날락하는 것도 없는 것 같다. 있구나 하고 안심하고 있으면 이미 없다. 없어서 괜찮다고 생각하면 아니, 있다.

정리되지 않은 사실을 사실 그대로 기록할 뿐이다. 소설처럼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설처럼 재미있지는 않다. 그 대신 소설보다 신비하다. 모든 운명이 각색한 자연스러운 사실은 인간의 구상으로 만들어낸 소설보다 더 불규칙적이다. 그러므로 신비하다.

"당신은 날 때부터 노동자는 아닌 것 같은데..."
한바 책임자의 말을 여기까지 들었을 때 나는 갑자기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나는 그 후 이런저런 일을 겪었고 또 울고 싶어진 일이 몇 번이나 있었지만, 닳고 닳은 지금의 눈으로 보면 대체로 울 것까지는 없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그때 머릿속에 고인 눈물은, 지금도 그런 처지가 된다면 또 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힘들고 괴롭고 분하고 불안한 눈물은 경험으로 지울 수 있다. 고마움에 흘리는 눈물은 흘리지 않아도 된다. 다만 전락한 자신이 여전히 예전의 자신이라고 다른 사람에게 인식되었을 때 흘리는 기쁨의 눈물은 죽을 때까지 따라다닐 것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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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학생 다자이 오사무 컬렉션 3
다자이 오사무 지음, 전규태 옮김 / 열림원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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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상의 표지 이미지가 너무 깜찍해서 구매한 것이지만, 정말로 받아보고서 모양새가 예뻐서 요리보고 조리보고 사진도 찍어보고 한참을 즐거워했다.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최근의 소세키 전집 디자인에도 심드렁하였는데(내가 그 시리즈를 구매한 건 출판되지 않은 소세키의 작품들을 볼 수 있다는 이유 하나였다) 이 책은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 아직 출간되지도 않은 근간 목록까지 훑으며 이 시리즈를 모아 놓으면 얼마나 예쁠까 상상을 하였다. 이건 사야지 이건 말고 가늠을 해 가며...일반적으로 한국에서 출판되는 책보다 작은 판형인데 일본의 문고판 느낌을 내려 한 것인가 싶다. 양장도 아니고 겉의 띠지를 벗겨내면 마치 헐벗은 듯 빈약한 모습인데 그래도 예쁘니 다 용서된다. 이 만듦새로 13000원은 너무 비싸다 싶지만 예쁜애 앞에서 내가 뭘 할 수 있겠는가. 카드나 긁을 뿐. 흠이라면 곳곳에 눈에 띄는 오타들. '그래서 웬지 느끼하다'같은 오타를 보며 예쁜얼굴과 백치미는 진정 한 세트로 묶일 수밖에 없는 것인가 싶어 한숨이 나온다.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은 인간실격만을 읽어 보았는데 너무 깊어서 감당하기 힘들었던 자기혐오가  이책에선 무척 옅어진 모습이다. 수록된 단편들의 화자가 모두 여성이다 보니 그에 맞추어 여자들이 어떻게 자신을 돌이켜 보고 세상의 추함에 반응하는지를 그려놓았는데, 이들의 자기혐오란 인간실격에 비하자면 발을 동동거리는 귀여운 수준이다. 여자들은 자신을 파괴하는데 있어서도 남자만큼은 되지 않는다는 마초이즘일까? 김승옥의 강변부인을 읽을 적엔 아니 남자가 여자를 어찌 이리 잘 안대 싶어서 소름이 끼쳤는데 여성독자가 보기에 이 글은 그렇게 여자로서 간파당한다는 느낌보다는 다자이 오사무란 사람이 만들어 낸 여자란 이런 모습이구나 하고 읽는 재미가 있었다. 


...여자란 이런 것이다. 누구나 입 밖에 낼 수 없는 비밀이 있게 마련이다. 사실 그건 여자의 '타고난 운명' 같은 것이다. 여자란 누구나 '진흙탕'을 하나씩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확실히 그렇다. 여자에게는 하루하루가 전부니까. 남자와는 다르다. 죽은 다음의 세계는 생각지 않고 제대로 사색할 줄도 모르는 속물, 시시각각의 아름다운 완성만을 소원하고 있는 속물, 생활을, 생활의 감촉에만 탐닉하는 바보! 여자가 찻잔이나 예쁜 옷을 사랑하는 것은 그것만이 삶의 참보람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진정 찻잔이나 예쁜 옷만으로 해결될 것이라면 21세기의 여자들이 이 책을 쥐고 있지 않을테지만 저 바보!란 말이 너무 귀여워 분한 마음은 들지도 않는다. 


남은 일곱 권의 책도 예쁘게 예쁘게 만들어 주시길. 오자 한 번만 더 봐주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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