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이 너를 붙잡지 못해도
서영은 지음 / 해냄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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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우연히 이 책을 발견했다. 대충 훑어보니 알라딘에서 서영은에 대한 기사를 본 기억이 났다. 30살도 더 많은 남자의 뭐가 그리 좋았냐고 물었더니 "우린 몸이 잘 맞았다" 라고 답했다던 그녀. 그냥 쌍년 라이프만으론 내 소중한 독서시간을 할애할 이유가 없지만 글이 확실히 요즘의 수필과는 다른 맛이 있어서 읽게 되었다. 소설가가 쓴 글이라서, 그리고 30년대 생이 쓴 글이라서 요즘 사람들과는 쓰는 단어도 다르고 자신의 생각을 형상화하는 방식도 다르다. 김동리가 서영은의 소설을 평할 때 수필적이라는 말을 했다는 데 거꾸로 그녀의 소설엔 어느정도 소설적인 면이 있다. 수필의 소재인 그녀의 삶 자체가 드라마틱하고, 또 소설가가 쓰는 수필이다 보니...


책은 여러장을 나눠 삶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녀의 일상은 아무리 글을 잘 쓴다고 해봐야 그닥 끌릴 것 없는 내용들이었다. 할머니가 고양이를 예뻐하는 일상 같은 이야기 말이다. 결국 볼만한 건 그녀와 김동리의 이야기들. 그녀에게도 그런 듯, 김동리와의 일은 수십년도 더 전의 일인데 그녀가 느낀 감정이 생생하게 글로 전해진다. 남들이 보기엔 말도 안되고 기형적인 관계인데 그녀의 기술을 따르자면 그녀는 애초에 그런 삶을 살기 위해 준비된 사람이었다.


이 다음에 커서 바람둥이 깡패한테 시집가면 좋겠다. 
좀 더 일찍 태어나 기생이 되었더라면 좋을 텐데.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사랑에 대해서 나는 참으로 위험한 환상을 품고 있었다. 

나는...나밖에 모르는 남자에겐 관심이 없다. 사랑을 나눈 대상들이 열 명쯤, 또는 그보다 더 많아도 좋다. 그런 남자에게 마지막으로 선택된 여자이고 싶다. 나의 사랑을 얻으려는 남자는 그런 모험을 해야 한다. 가정을 가졌든, 수도승이든, 아편에 미쳤든, 노름에 미쳤든, 사랑을 얻기 위해 그가 치르는 대가가 크면 클수록 좋은 것이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내 동년배 청년들이 보여주는 관심이 내 마음을 전혀 움직이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들에겐 사랑을 위해 무릅써야 할 위험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펼쳐져 있는 가슴속으로 뛰어드는 연인을 끌어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사랑이 그렇게 쉬운 것일 리가...? 타넘을 담도 없고, 피해야 할 눈도 없고, 버려야 할 값진 것도 없고, 대적해야 할 적들도 없이, 어떻게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단지 가로막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내 나이의 꽃다움을 스스로 져버렸고, 동년배 남자들의 눈부신 젊음을 하찮게 여겼다. 


결국 나는 어린시절부터 자기 내면의 이 신비로운 넘침을 이미 감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기생이 되고 싶다든가, 깡패한테 시집가겠든가 하는 철부지한 생각 속에 이미 파란 많은 운명의 불씨가 묻히어 있었던 것이다.


김동리에게 헤어지자고 했다가 얻어터진 이야기를 보면 정말 코피가 왈칵 내 입으로 흘러드는 것 같은 비릿함이 느껴진다. 그녀는 그 필력으로 얼마나 그를 절절히 사랑했는가를 말한다. 얻어 맞으면서도 그가 나를 이렇게나 사랑하는구나 느끼고 새삼 그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는 그녀. 이 정도쯤 되면 마누라 있는 남자를 탐하고 심지어 불륜사실을 속인 채 마누라 앞에서 태연히 조수로서 일을 거드는 삶도 운명적 쌍년질이란 이름으로 어느정도는 이해받을 수 있는 것일까. 부인과는 결혼생활을 지키고 자신과는 사랑을 지키는 김동리의 방식을 진심으로 존경한다는 그녀의 글은 진짜라서 읽는 내 가치관이 혼란스러울 지경이다.


뭐 자기팔자 자기가 산다는데 어쩌겠는가. 그런데 그 지난한 역사를 거쳐 결국은 김동리 사후 김동리 자식들과 재산분쟁에 휘말리고 혼자 낡은 아파트에서 고양이를 키우며 살게 된 그녀를 보면. 뭐 물론 그녀는 살고 싶은대로 살아 여한이 없겠지만 결국 최후의 승자는 김동리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스스로 첫째부인에게선 자식을 얻고, 둘째 부인에게선 재산을 얻고, 셋째 부인에게선 사랑을 받았다고 말했다는 그. 그 셋째부인이 바로 서영은이고 그녀는 수십년의 정부생활 끝에 70대의 김동리와 결혼하지만 겨우 3년을 살고 나머지 8년여는 병상의 김동리 병수발을 하며 지냈다 한다. 정말 징글징글한 소설보다 더한 인생사... 그냥 이 간략한 설명만으로도 넌덜머리가 난다. 그 이해가 하나도 안되는 누군가의 삶을 이 책을 통해 아주 아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이 수확이다. 예술가로 태어났단 이유로 많은 이들이 자신의 삶을 단지 예술 하나를 위해 던진다. 곤궁함을 참고 비굴함까지 참아내며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해 분투하는 예술가들처럼 그녀에게는 이 사랑이 하나의 예술이 아니었을까 싶다. 예술이고 종교이고 삶의 이유인 그런 사랑. 그래 그런 삶도 있겠지. 하지만 이 이후의 어떤 여자도 이런 삶을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나의 솔직한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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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5-08-05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저 신문기사보고 조금 놀랬습니다. 머리 희끗한 여류소설가가 ˝우리는 몸이 잘 맞았어요˝라고 하는데는 인터뷰한 기자도 좀 당황한 듯 했구요...

그분의 삶에 대해 뭐라 가부를 왈왈거릴 수는 없지만, 엄연히 `본처`와 가정이 있는 남자의 말하자면 `첩`으로 20여년을 살고...때때로 주어터지고,,,,나중에는 병수발 몇년이나하고...김동리 사후에는 본처의 자식들과 재산 소송하고.... 님 말씀대로 징글징글합니다....

결론은 김동리가 나쁜 놈이에요...깔끔하지가 못했습니다.

LAYLA 2015-08-05 13:20   좋아요 0 | URL
어느 기자는 그걸 `에너지가 강했어요`란 말로 써놨더군요. 자체 순화를 한 거 같은데 그게 또 자체 순화를 할 말이 아니다 싶구요 ㅎㅎㅎ 둘 다 특이하고 세상의 사고방식으론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기에 잘 맞았나 싶습니다. 또 잘 드러나진 않지만 둘의 관계를 인정(?)했다는 두번째 부인의 존재도 대단하구요.

글샘 2015-08-06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 왜 북플에 읽기싫어요는 없을까요
막장인 넘들이 정력만 쎄가지고 여러여자 울리죠
현모 양처는 이해가 가지만 깡패 기생 운운에는 참 나...
잘 읽고 갑니다
 
내 사랑이 너를 붙잡지 못해도
서영은 지음 / 해냄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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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음에 커서 바람둥이 깡패한테 시집가면 좋겠다.
좀 더 일찍 태어나 기생이 되었더라면 좋을 텐데.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사랑에 대해서 나는 참으로 위험한 환상을 품고 있었다.

나는...나밖에 모르는 남자에겐 관심이 없다. 사랑을 나눈 대상들이 열 명쯤, 또는 그보다 더 많아도 좋다. 그런 남자에게 마지막으로 선택된 여자이고 싶다. 나의 사랑을 얻으려는 남자는 그런 모험을 해야 한다. 가정을 가졌든, 수도승이든, 아편에 미쳤든, 노름에 미쳤든, 사랑을 얻기 위해 그가 치르는 대가가 크면 클수록 좋은 것이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내 동년배 청년들이 보여주는 관심이 내 마음을 전혀 움직이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들에겐 사랑을 위해 무릅써야 할 위험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펼쳐져 있는 가슴속으로 뛰어드는 연인을 끌어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사랑이 그렇게 쉬운 것일 리가...? 타넘을 담도 없고, 피해야 할 눈도 없고, 버려야 할 값진 것도 없고, 대적해야 할 적들도 없이, 어떻게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단지 가로막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내 나이의 꽃다움을 스스로 져버렸고, 동년배 남자들의 눈부신 젊음을 하찮게 여겼다.

그분은 아무렇게나 뚤뚤 말아논 침구에 비스듬히 기댄 채 나를 맞이했다. 허름하고 우중충한 바지에 윗도리는 속내의 바람인, 다소 우스꽝스런 차림인데도, 군주와 같은 당당한 위엄은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다. 그 위엄은 단순히 가부장적인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실제로 큰 영지를 지니고, 휘하에 많은 사람들을 거느린 듯한 힘으로 느껴졌다.

결국 나는 어린시절부터 자기 내면의 이 신비로운 넘침을 이미 감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기생이 되고 싶다든가, 깡패한테 시집가겠든가 하는 철부지한 생각 속에 이미 파란 많은 운명의 불씨가 묻히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나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이라는 소설을 접하게 되었다. 열여섯 살 소녀가 삼십대 중반의 중국인 남자를 사랑하는 이야기인데, 그 책의 화보에는 작가 자신의 열여섯 살 때 사진이 곁들여져 있었다. 그 사진의 소녀야말로 순결하고 청순한 용모이면서도 인생에 대한 선험적 감성을 타고난 듯, 성숙한 여인의 우아하고도 요염한 자태가 흘러, 백만장자인 중국인 남자의 영혼을 한순간에 뒤흔들어놓을 만했다.

나는 방금 내 품으로 넘어온 고양이가 얼마나 깊은 사랑을 받고 있었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사랑받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마음의 강보를 여러 겹 느끼게 한다.

결혼을 했다고 해서 모든 여자들이 아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해로를 했어도 끝내 아내로서 거듭나지 못하는 여자들도 있을 수 있다.

오, 저주받은 종족, 여성들, 너무 깊이 사는 자들에게 안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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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은 딸이다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2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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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완전히 무의미한 것 같아요. 모든 게 다 그래요. 제 앞에 세월이 펼쳐져 있는데 채워넣을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전 그저 어리석고 쓸모없는 여자일 뿐이에요.

내적인 불꽃이 없는 행동은 해봤자 좋을 게 없어. 내키지도 않는 일을 해놓고 자신을 칭찬하는 짓은 하지 마!

제임스는 좋은-정말 친절한-사람이지만 너무 따분하기도 했다. 불쌍한 남자! 끝없는 이야기들! 정말이지 남자들은 마흔다섯 살쯤 되면 자기 경험담은 말하지 않겠다고 맹세해야 한다.

- 사람들 대부분은 자기 자신에 대해 꽤 잘 알지 않습니까?
- 난 전혀 안 그렇다고 생각해요. 요즘 사람들은 자신의 괜ㅊ낳은 일면만 알지 다른 면에 대해선 생각할 시간조차 갖지 않죠.

아무도 남의 인생을 정말로 망칠 수는 없어. 멜로드라마 시늉 말고 감정에 빠지지도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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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제단 - 제6회 무명문학상 수상작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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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하게, 가슴은 뜨겁게, 어차피 한 번 왔다 가는 세상 쿨하게.

하지만 경쾌하고 은근한 노랫가락에 얹어서 똑같이 쿨하다고 착각해버리기에는 너무나 쿨하지 못한 우리네 인생. 아무래도 사는 건 구차하고 남루하다. 인연은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이어졌고, 생의 흔적은 먹고 내버린 파리 껍질처럼 여기저기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그 속에서 나는 한 마리 호랑거미처럼 조심조심 발 디딜 자리를 찾는다. 그런데 이건 뭐야. 내가 살아가는 이 덥고 끈적끈적한 세상을 한없이 쿨하게 냉소하는 너희는 누구야. 나는 일본인이 썼는지 한국인이 썼는지 분간되지 않는 몇몇 쿨한 소설들에서 느꼈던 불편한 감정이 일말의 모욕감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뜨겁게, 여한 없이 뜨겁게, 어차피 한 번 왔다 가는 세상 뜨겁게.

가슴의 뜨거움조차 잊어버린 쿨한 세상의 냉기에 질려버렸다. 맹렬히 불타오르고 재조차 넘지 않도록 사그라짐을 영광으로 여기는 옛날식의 정열을 다시 만나고 싶다. 그것이 요즘 유행하고는 한참 동떨어진 것이라 해도.

내가 가진 것 중 여자를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은 잘생긴 얼굴과 할아버지의 재산, 두 가지뿐이었다. 그 두 가지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었다. 음울하고 좁아터진 속아지. 나를 경멸하는 할아버지 나의 배우자에게 나 이상으로 무거운 짐을 지게 할 17대 종손의 위치. 하룻밤도 사내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천하의 바람둥이 생모와 그녀에게 몸과 정신을 모두 흡입당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버지의 기억까지.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은 사철 효계당에 드리워진 회화나무 그늘처럼 어둡고 음침한 것들뿐이었다. 그런 실상을 마주했을 때 두 뺨을 감싸쥐고 경학할 여인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연애를 향한 나의 욕망은 안채 뒤편에서 고요히 일렁이고 있는 깊은 우물처럼 차갑게 식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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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하하는 저녁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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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의를 보이는 것은 자기 마음이지만, 자기 멋대로 물 줘 놓고 화분에 물 주는 것처럼 기대하는 건 곤란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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