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엽 감는 새 2 - 예언하는 새 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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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가 어찌되었던 누군가를 전적으로 믿을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올바른 자질 중의 하나죠

인생이라는 것은 그 와중에 있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한정되어 있소. 인생이라는 행위 속으로 빛이 들어오는 것은 한정된 아주 짧은 기간이오. 어쩌면 수십 초일지도 모르오. 그것이 지나가 버리면, 또 거기에 나타난 계시를 잡는 데 실패해 버리면, 두 번째 기회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소.

나와 구미코 사이에는 처음부터 뭔가 서로 마음이 통하는 것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만나자마자 짜릿하게 느껴지는 충동적이고 강렬한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온화하고 부드러운 종류의 것이었다. 이를테면 두 개의 작은 불빛이 막막한 어두운 공간을 나란히 전진하는 중에 어느 쪽에서라도 할 것도 없이 점점 가까이 다가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여기에 있는 나는 `새로운 나`고 두 번 다시 원래의 장소로 되돌아가는 일은 없다.

미워한다는 것은 길게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와 같은 것이에요. 그것이 어디에서부터 드리워졌는지, 많은 사람들의 경우 본인도 잘 모르죠.

시간을 들이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돼. 충분히 무언가에 시간을 들이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제일 세련된 형태의 복수란다.

오카다 씨도 아시는 바와 같이 여기는 피비린내 나는 폭력적인 세계입니다. 강해지지 않고서는 살아 남을 수가 없어요. 그러나 그것과 동시에 어떤 작은 소리도 흘려 보내지 않도록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아시겠어요? 좋은 뉴스는 대부분의 경우 작은 목소리로 말해집니다. 부디 그것을 기억해 주세요.

누군가 떠난 후, 그곳에 혼자 남아 살아간다는 것은 분명히 힘든 일이오. 그것은 잘 알고 있소. 그러나 이 세상에 구해야 할 것을 아무것도 갖지 못하는 적막함만큼 가혹한 것은 달리 없다오.

어쩌면 나는 패배할지도 모른다. 나는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어디에도 이르지 못할지도 모른다. 있는 힘을 다했지만 이미 모든 것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잃어버린 후일지도 모른다. 나는 단지 페허의 재를 허무하게 손에 쥐고 있고,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나 혼자뿐인지도 모른다. 내 편에 내기를 걸 사람은 이 주위에 아무도 없을지도 모른다. `상관없어` 하고 나는 작지만 단호한 소리로 거기에 있는 누군가를 향해 말했다. `이것만은 분명해. 적어도 나에게는 기다려야 할 것이 있고, 찾아내야 할 것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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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고재운 옮김 / 바다출판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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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노골적인 꿍꿍이는 간파할 수 있습니다만 약간 조심스럽게 유도하는 함정에는 손쉽게 빠지고 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당신이 자신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일을 하면서 현실을 경험했지만, 그 세월을 장난으로 보내 버린 어린애에 지나지 않습니다. 당신은 끝없이 도망칠 수 있는 시대에 살았습니다. 이리저리 도망쳐 온 당신에게는 어느 직장이니 직급이니 하는 것이 세상의 전부였습니다. 그런 뜨뜻미지근한 물에 있다가 밖으로 내던져지자 바로 감기에 걸리고 만 것입니다.

품격이란 어떠한 달콤함에도 어떠한 회초리에도 결코 굴하지 않고, 자신이 비록 틀렸더라도 권위나 권력에 아양을 떨지 않는 의연함 그 자체입니다. 내 생각으로 판단하고, 혼자일지라도 행동할 때에는 행동한다는 독립된 한 인간에게만 적합한 말입니다.

점점 다가오는 죽음의 시기는 당신이 최후의 최후까지 진정한 당신으로 있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하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정년퇴직하기 직전까지 당신은 일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먹고살 수 없다, 가족을 부양할 수 없다는 강박관념에 내몰려 독립된 인간이라면 갖고 있어야 할 갖가지 조건을 남김없이 잘라서 팔아 왔습니다. 긍지, 자존심, 자유, 존경 등과 같은 인간으로서 갖고 있어야 할 보물을 몽땅 다른 사람과 조직에 싼값에 팔아 온 것입니다. ...당신이 갈피를 못 잡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당신은 늘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어린아이의 정신 그대로 살아왔습니다. 자신을 단련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느닷없이 노후의 세계로 끌려 들어온 것입니다. ...당신은 강한 사람이 아닐지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이 생각하는 정도로 약한 사람도 아닙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떠넘기며 살아온 오랜 세월의 계산서를 깔끔히 정산만 하면 거기에서 본래의 진정한 당신이 분명 떠오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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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 바다출판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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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인간이란 누구의 도움에 의지하지 않고 홀로 이 멍청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세상에 휘둘려 단물만 빨린 채로 인생 허비한다는 것이다. 다 맞는 말이라 딱히 반박할 부분이 없다. 문제는 이 맞는 말대로 산다는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는 것이다. 마루야마 겐지는 짐승이 자라 부모를 떠나 홀로 사는 것엔 이유가 없다, 그것이 본능이고 섭리인데 왜 인간이 인간으로서 독립하는데 이유를 찾으려 하느냐, 그냥 홀로 서라고 말한다. 역시 맞는 말이지만...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여행을 하며 만난 남자들 중 참 매력있다 생각했던 이들이 떠올랐다. 독립적이고, 홀로 어디에 떨어뜨려놓아도 울지 않고 짜증내지 않고 화내지 않고 다음 스텝을 찾아낼 사람들. 마루야마 겐지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나 역시 그런 모습에 반하였다. 그들에겐 그런 독립심 이외에도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1. 가정환경이 불우하며 (보통 아버지가 부재) 2. 그런 환경이라 경제적으로도 궁핍한 성장기를 보내었고 3. 또 그런 환경이라 제대로 된 대학교육을 못 받은 경우가 많다는 것. 거꾸로 말하자면 이런 '의지할래야 의지할 수 없는' 환경이 그런 독립적인, 마루야마 겐지의 말을 따르자면 '인간다운 인간'을 만들어낸 것이다. 분명 그들은 멋지고 아름답고 빛나는 인간이었다. 나 역시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단 생각을 했었다. 밝고 친절하고 침착하며 어떤 일에도 당황하지 않고 담담하고 담대한 자세를 유지하는 사람. 하지만 그런 한 편, 그들은 너무나 차가웠다. 독립심이란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많은 시행착오와 상처와, 그리고 그 독립심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이 독립심과 함께 얻게 되는 것이 열정의 반대편에 있는 다소간의 냉소와 차가움이라 생각한다.그들의 밝음과 친절함은, 생득적인 것이 아니라 처절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후천적으로 득한 그런 종류의 것들이었고 나는 그런 그들을 보며 감히 연민의 감정을 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 그들이 잠시 마음 아프다고 해도, 그들이 자신의 발로 제대로 서지 못하고 평생 우물쭈물하며 세상의 거짓말에 놀아나는 사람들보다 낫다는 것엔 반박의 여지가 없다. 물론 세상은 힘들다. 세상은 더럽고, 세상은 불공평하고 부조리하다. 노예같은 직장인의 길을 피하고자 하면 더한 고난의 길이 펼쳐져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늘 자위만 하며 평생을 살다 맥아리 없이 멍청한 눈으로 죽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파도 괜찮다며 토닥거리는 책들보단 그냥 나가 죽어라는 식으로 쏘아대는 마루야마 겐지의 책이 훨씬 더 좋았다. 이 사람은 소설을 쓰는 것보다 사상가가 되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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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 바다출판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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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구체적인 인생 설계가 세워지지 않았어도, 당분간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구실을 둘러대며 단 하루일망정 집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때까지 목표를 정하지 못한 자는, 어찌되었든 집을 나선 후에 앞일을 생각한다. 가출이나 다름없어도 전혀 상관없다. 이 경우의 망설임은 목숨을 해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결심이 굳세지 않으면 평생 부모에게 묶여 살 수밖에 없다. 자신에게 잠재된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철저하게 빼앗기고, 사는 참맛을 모르고 죽는 날을 맞게 될 것이다. 부모란 울고 매달리는 데 명수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부모는 자기바껭 염두에 없다는 것도 명심해야 한다. 부모는 자식을 집에 묶어 두기 위해서라면 어떤 말이든 하고 그 어떤 수치스러운 짓도 태연하게 한다. 사회로 나가봐야 고생만 할 뿐이다, 집에서 살면 집세를 내지 않아도 되고 밥값도 들지 않고 청소나 빨래를 하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집만큼 마음 편한 곳이 어디 있느냐고 말한다.

정말 좋은 머리에 관해 운운할 때에는, 가장 먼저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를 문제 삼아야 한다. 오로지 자기 힘만으로 살아가려는 의지 여부에 따라 머리의 좋고 나쁨이 갈린다. 그러니 자립의 정도가 그것을 결정하는 셈이다. 자립에 반하는 삶의 방식은 곧 명석함이 부족하다는 것을 뜻한다. 자립이란 인간이 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충분히 곱씹은 후, 강한 인간을 지향하면서 과감하게 분투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다. 독서와 우애, 교양만으로는 그 왕도를 터득할 수 없다. 혼자 힘으로 이 가혹한 세상을 끝까지 살아 보겠다는 마음가짐이 얼마나 강하고 굳은지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 몇 번이나 말하는데,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그런 시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절대 없을 것이다.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그렇기를 바라는 소망에서 생겨난 얄팍한 환영에 불과하다. 끊임없이 긴장하고, 그 긴장감에서야말로 살아 있음과 사는 기쁨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른이 되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나는 어린애니까`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거나, `소년 같은 마음을 지닌 어른이고 싶다`는 따위의 말을 태연하게, 오히려 자랑스럽게 하는 남자들이 해마다 늘고 있다. ...그들은 여자 앞에서 거드름을 피우며 가장으로서 위엄을 과시하지만, 자신은 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동에만 종사하고 나머지는 전부 아내에게 맡기면 된다는 안이한 정신 상태로, 요령을 부려 가며 너절하게 살아간다. 그런 주제에 전진하고 순수한가 하면 절대 그렇지도 않다. 너저분하게 얽혀 있는 조직과 집단에 적극적으로 발을 들여놓아 그 세계에서 통용되는 비열한 힘을 의문 없이 흡수한다. 탐욕스러운 줄다리기와 서로를 헐뜯고 끌어내리는 일에 열을 올리고, 털끝만큼의 가치도 없는 출세와 명예와 돈 몇 푼을 위해,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자신의 혼을 미련 없이 팔아넘긴다. 소년의 마음이 들으면 혀를 찰 일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 안에서만 빛나도록 생겨 먹었다는 철칙을, 그 우선권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어떻게 살든 본인 멋대로라는, 자유와 함께하는 삶만이 존재의 기반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간도 동물의 한 족속이라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야생동물과 마찬가지로 인간 또한 같은 유의 자유 속에서 충만감과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으며, 그것 없이는 견딜 수 없는 구조를 하고 있다.

종교는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것을 방해하는 커다란 장벽 중 하나이다. ...온 마음을 다해 기도를 하면 할수록,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자립의 정신이 깎여 나간다.

불안과 주저와 고뇌야말로 살아 있다는 증거다. 살아 있는 한 그런 것들에서 헤어날 수 없고, 헤어나려 몸부림칠 필요도 없다. 살아 있으면서 절대적인 안녕을 얻으려 한다면, 살아 있되 삶을 내던진 것이나 다름없다. 산종장을 지향해서 어쩌자는 것인가. 신기루를 좇아 봐야 얻을 것은 거짓 평온뿐이다.

나르시시즘의 유전자를 짊어지고 태어난 여자 쪽은, 냉혹하리만큼 현실적인 면도 갖고 있는 탓에 연애를 흠모하는 비현실적인 시기를 일찌감치 졸업한다. 이뤄지지 않을 연애는 돌아보지도 않는 것이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눈을 뜨지 못하는 가벼운 남자를 상대하는 것이 갑자기 심드렁해지고, 이벤트와 깜짝 선물에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른바 진심으로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딱 일치하는, 연애의 핵심이며 기본 중의 기본인 것을 싹 무시하고, 자신이 혹 불이익을 당하지는 않았을까 노심초사하는 연애 놀이는 몇 번을 한들 행복이라는 종착역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게으르게 산 날이 쌓이고 쌓여 별 볼일 없어진 인생을 남녀간의 정사로 치장하면서 양념을 치고 변화를 주려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가장 저질적인 존재 방식이다. 특히 남자가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를 보여 주는 것이며 무능의 증거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삶은 여자에게 의존해 살아가는 기생충 같은 인생이다.

...그런가 하면 이리저리 부는 바람에 날려 떨어진 마른 낙엽처럼 거의 우연히 재능이 불쑥 꽃피는 일도 있다. 요컨대 자신을 스스로 단정하면 단정할수록 정답에서 멀어질 뿐, 무슨 일이든 직접 부딪쳐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는 얘기다.

자신 속에 어떤 보물이 잠들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자신도 모른다. 그 보석이 하나뿐이라고도 할 수 없다. 몇 개가 숨어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하나라도 발견할 수 있다면 대단한 것이다. 평생을 들여 그 보석의 원석을 갈고닦을 수 있느냐에 삶의 진가가 있다. 그 외는 제대로 살고 있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는 무의미한 인생이다. 그러니 이제 좋고 싫음이나 자기류의 해석은 모두 무시하고 온갖 일에 도전해 보면서 자기 안에 소리 없이 숨겨져 있는, 곤히 잠들어 있는 재능을 발굴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운명을 새로이 발견하는 생의 목적과 직결되는 위대한 행위이며, 젊었을 때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다름 아닌 그것이다. 젊음이란 그 때문에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신을 발견할 기회는 늘 변화하고 새로운 나날 속에, 온갖 곳에 무진장하게 널려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심히 안타깝게도 이 나라에는 삶의 공식이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으며, 젊은이들이 자신의 가능성을 탐색할 시간도 거의 주지 않는다. 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취직한다. 게다가 그 직장에 오래 헌신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고, 그렇게 하는 것을 불변의 이념으로 받아

들이고 말았다. 이 때문에 많은 젊은이가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는 것에 강박관념 비슷한 불안을 느끼고, 무의식중에 안정을 최고의 목표로 삼게 되었다. 결국 가장 중요한 인생의 초기 단계에 이미 다른 길은 봉쇄되고 만 것이다. 이런 사회 구조 속에서 젊은이들은, 확답을 찾을 여유 없이, 기한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가슴이 짓눌리는 답답한 조직에 헐값으로 자신을 팔아넘긴다. ...그런 행위는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불속에 내던져 버리는 것이나 다름없고, 정신의 생명이 끝났음을 뜻하기도 한다. 젊어서 이미 죽을 준비를 끝낸 보통 사람들은, 자기보다 뛰어난 자와 만날 일이 거의 없고, 오래 눌러앉아 있어 봐야 성취감은 털끝만큼도 얻을 수 없으며, 불굴의 정신 따위도 전혀 필요하지 않는 그런 잿빛 코스를 밟는다. 그리고 그 길에서 튀어나와 이탈한 자들을 고립적이고 가엾은 존재로 간주한다.

이들은 깨질 것이 뻔한 천박한 꿈을 좇고, 자신을 위한 노력도 고뇌도 필요하지 않는 어디까지나 피상적인 안정의 나날에 안주한다.

동물로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맨 마지막에는 정신을 스스로 고취할 수 있는 인간으로 떠나야 비로소 고상한 인생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죽을 몸인데, 왜 그렇게까지 겁을 내고 위축되고 주저해야 하는가. 자신의 인생을 사는 데 누구를 거리낄 필요가 있는가. 그렇게 새로운 마음가짐과 태도를 무기로 애당초 도리에 맞지 않고 모순투성이인 이 세상을 마음껏 사는 참맛을 충분히 만끽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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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엽 감는 새 1 - 도둑까치 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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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힘들지. 하지만 기다려야 할 때는 기다려야 한다구. 그동안은 죽은 셈치면 돼.

-옛날부터 용기가 없었어요?
-옛날부터도 없었고 앞으로도 아마 그렇겠지.
-호기심은 있어요?
-호기심이라면 조금 있지
-용기와 호기심은 비슷한 게 아닐까요? 용기가 있는 곳에 호기심도 있고 호기심이 있는 곳에 용기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글쎄, 분명 비슷한 점은 있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네가 말하는 것처럼 경우에 따라서는 호기심과 용기가 하나가 될 수도 있겠지.
-몰래 남의 집에 들어간다든지 할 경우에는요
-그렇지. 몰래 남의 집 정원에 들어간다든지 할 때는 호기심과 용기가 함께 행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그리고 때로 호기심은 용기를 불러일으키고 북돋워 주기도 해. 하지만 호기심이라는 것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금방 사라져 버리지. 용기 쪽이 훨씬 먼 길을 가야 한다구. 호기심이라는 것은 신용할 수 없는, 비위를 잘 맞춰 주는 친구와 똑같지. 부추길 대로 부추겨 놓고 적당한 시점에서 싹 사라져 버리는 거야. 그렇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혼자서 자신의 용기를 긁어 모아 어떻게든 해나가야 한다구.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은 지나가 버린 후에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앞질러서 보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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