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들을 위한 외국어 사전
샤오루 궈 지음, 변용란 옮김 / 민음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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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A CONCISE CHINESE-ENGLISH DICTIONARY FOR LOVERS


한국말로 번역하기 까다로운 제목임은 분명하지만 번역자에게 미안하게도 이 책의 느낌은  원래의 제목이 아니고선 담아내기 힘들 것 같다. '연인들을 위한 외국어 사전'이란 번역본의 제목은 너무 감상적이고 로맨틱하게 보이며, 출판사에서 이런 오해를 은근히 기대하기라도 한 듯 표지 디자인마저 저리 로맨틱하게 만들어 놨다. 그래서 출판사의 의도대로 약간의 문학적 당분 보충을 기대하며 이 책을 펴 든 나는 초반부가 지나기도 전에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스물 둘의 중국인 아가씨가 영어를 배우기 위해 런던으로 가고, 영어가 능숙치 못해 모든 것이 답답하고, 그러던 차에 극장에서 만난 천사같은 남자와 데이트를 하게 되는데 첫 섹스 후 그 남자에게 나이를 묻자 "44" 라고 답하는 부분에서 말이다. 부드럽고 자상하고 다정하고 천사같이 묘사되던 그 남자의 모습은 갓 이국에 떨어져 극심하게 외로운, 연애경험이 없는 마치 '우리에서 도망쳐나온 판다 같은' 동양여자의 착각이자 환상이라는 것을 그 숫자로 독자들을 알게 되고 이 책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재빠르게 수정해서 인지하게 된다. 영화로 치자면 흔한 로맨틱 코미디일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하드코어 홍상수 영화였다는. 


외국인 연인을 사귄다는 것이 영화 속에서처럼 달콤한 일만은 아님을 이 책은 보여준다. 둘은 왜 더치페이를 하지 않느냐고 싸우고 화가 난 여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 마오쩌둥 어록집을 꺼내어 읽는다. 찌질하고 구차하고 슬프고 그렇지만 진실한 연애가 바로 이 책에 담겨 있다. 마치 남의 구멍난 양말이나 때에 찌든 와이셔츠 깃을 볼 때처럼 못본척 눈 감고 싶은 그런 불편함이 있긴 했지만 마지막까지 솔직한 화자(작가)의 태도 때문에 읽어 나갈 수 있었다. 사실 실제의 연애란 이런 것일 테니까. 


극찬을 받을 대작은 아니지만 충분히 개성있는 작품인데 절판이라니 의외다. 개정판으로 다시 나올 예정인가? 작가의 근황을 찾아보니 꾸준히 책을 내고 있고 여러 언어로 번역되고 있으며 일 년치 스케줄이 국제적으로 짜여져 있다. 런던에서 리딩을 하고 로마에서 영화제에 참석을 하고 뭐 그런...작가의 솔직함에 아직 흥미가 남아 있기 때문에 아직 번역되지 않은 다른 작품들도 찾아봐야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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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2 13: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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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올리버 색스 지음, 조석현 옮김 / 알마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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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리나 눈을 잃으면 다리가 없고 눈이 없다는 사실을 의식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면 그 사실 자체를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을 깨달을 자신이라는 존재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언어상실증 환자를 접하는 사람들이 자주 느끼는 일이지만, 그들에게는 거짓말을 해도 금방 들통 나고 만다. 언어상실증 환자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말을 듣고 속는 일이 없다. 그러나 이해 할 수 있는 것은 확실하게 파악한다. 그들은 언어가 갖는 표정을 간파한다. 종합적인 표정, 언어에 당연히 수반되는 표정을 느끼는 것이다.

중국인 신경과 의사인 디주에 왕에 따르면, 쇼스타코비치의 비밀이란 그의 왼쪽 뇌실 관자뿔 부분에 금속 파편인 탄환 부스러기가 있다는 것이다. 쇼스타코비치는 그것을 제거하는 것을 몹시 꺼렸던 것 같다.

파편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이면 반드시 음악이 들려온다고 그는 말했다. 그때마다 새로운 선율이 머릿속에 가득 차 그것을 작곡에 이용한 듯하다.

뢴트겐 검사 결과 쇼스타코비치의 머리가 움직이면 파편이 움직여서 관자엽의 음악 영역을 압박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따라서 몸을 기울이면 선율이 무한한게 흘렀고, 천재 쇼스타코비치는 그것을 작곡에 이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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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들을 위한 외국어 사전
샤오루 궈 지음, 변용란 옮김 / 민음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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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녀는 또한 내가 영어로 말할 때 무질서하다고 함.
중국어는 `시간`이나 `공간` 개념부터 문장 시작함. 순서는 이런 식이다.

지난가을 만리장성에서 우리는 먹는다 바비큐를.

따라서 중국어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작은 인간보다 언제나 크다. 영어 문장에서는 순서가 달라서, 전체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 생각하여 나(I)나 제이크, 메리가 모든 것의 앞에 있음.

그에 관한 현실은 너무 연약하여 섬세한 중국 화병처럼 깨지기 쉽다.

이 나라에서 외로움은 뭔가 매우 단단하고 매우 무거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쉽사리 만질 수 있고 닿을 수 있다.

당신 친구들은 대나무 숲을 탈출한 세 마리 판다를 보듯, 우리 세 동양인을 쳐다본다.

내 서랍에서 마오쩌둥 어록을 꺼낸다. 마오의 연설에는 여성들과 동등한에 관한 기록이 몇 쪽 있다.

위대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대다수의 여성들이 일어나 생산적인 행위에 참여하는 것이 지극히 중요하다. 남성과 여성은 생산 현장에서 동등한 일에 동등한 보수를 받아야 한다.

12시 30분. 아직도 리스본으로 가기까지 한 시간이나 남았다. 나는 카페 밖에 앉아 작은 잔으로 쓴 에스프레소를 마신다. 포르투갈인들은 하루에 에스프레소를 몇 잔이나 마실까? 어떤 사람의 몸이 카페인과 설탕과 니코틴과 코카콜라로 가득 차 있다면 어떨까? 그럼 너무 많은 열정을 불러이일으킬까? 삶이 좀 더 활력에 넘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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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가분한 삶 - 그들은 어떻게 일과 생활, 집까지 정리했나?
이시카와 리에 지음, 김윤경 옮김 / 심플라이프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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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홀가분한 삶'을 살고 있는 대여섯명의 인물을 선정하여 그들이 홀가분한 삶을 살기까지의 간단한 과정과 현재 홀가분한 삶의 내용을 '홀가분한'방식으로 정리한 책이다. (너무 사생활을 꼬치꼬치 캔다거나 하지 않고 간결하게 인터뷰이가 공개하고 싶은 지점까지만 공개) 특이할 점이라면 인터뷰이들의 나이가 대부분 중년.노년이라는 점이다. 한마디로 젊을 때 날려볼 만큼 날려보고 아 이제 그만. 충분해. 라고 판단한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것. 딱히 연금이 나오는 직업들인 것도 아닌데 60 이전에 은퇴를 했다. 일을 한다고 해도 생활비 벌이 수준인데 책을 보니 그것이 가능한 건 이 중노년들이 한창 경제활동을 하던 시기가 거품경제 시기라는 거. 그러니 이런 홀가분한 삶을 연금 없이도 이어나갈 수 있으시다. 이 부분에서 한국에의 적용 가능성이 좀 떨어지긴 하지만 그래도 라이프 스타일의 측면에서, 곧 초고령 사회에 진입할 한국사회에서 충분히 참고할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아온 할머니들이 더 작은 집으로 옮기거나 도시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60이 넘어서 처음으로 악기를 배우기 시작하거나 그런 모습들이 참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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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더 무브 - 올리버 색스 자서전
올리버 색스 지음, 이민아 옮김 / 알마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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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당연하게 최고의 엘리트 의대 교육을 받은 올리버 색스는 전쟁의 혼란속에서 징집을 피하고자, 또 한편으론 고스펙 의사가 넘쳐나는 런던에서 굳이 고생하기보다는 새로운 대륙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고자 캐나다로 건너가게 된다. 이 자서전은 색스가 기억하는 어린시절부터 기록하며 자신이 어린시절에 가졌던 과학에의 지적 호기심도 꽤 열성적으로 서술하지만 부모의 둥지 아래 어린 시절이란 움직이지 못하고 묶여 있는 배 같은 그런 신세이니까, 그의 인생이 그리고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하는 건 부모를 떠나 신대륙으로 건너가고 나서부터이다. 인생이 풀린다. 나는 어른들이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며 그 표현을 쓸 때 나는 약간의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뭘 해도 인생이 풀리는 시기, 나아가는 시기, 되는 시기. 개인의 노력과 운명과 운이 모두 합이 맞아 떨어져야 하는 그런 기적같은 일. 누군가는 그런 시기를 인생에 한 번쯤 가진다고 하더라. 색스는 당대의 최강대국 중 하나에서 상류층 가정의 일원으로 그것도 백인 남성으로 태어났다. 그런 그가 60년대 황금기에 캘리포니아에서 인턴으로 일하며 경험한 이야기들은 영화보다 더 영화같으며 그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들임에도 불구하고 '시대'라는 것을 글로 체화시켜 놓았다는 느낌이 든다. 거대한 시대의 물결이 휘몰아 칠 때 잘난 개인은 그 파도 위에서 이렇게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짜릿하게 파도를 타고 있었구나 하는 그런 느낌. 


"1965년 무렵부터 교통체증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동부는 특히 더했다. 모터사이클 타고 달리던 길 위의 삶, 캘리포니아에서 누렸던 자유와 환희는 거기서 끝났다." 


교통체증이란 말이 존재하기도 이전의 세상. 색스의 자서전만큼 생생하게 그 시대를 들려준 글은 없었던 것 같다. 색스 주변의 사람들이 에이즈와 약물과 각종 사고로 계속 죽어가는 것마저 그 시대의 증거들로 보였다. 


자기 분야에서 탁월한 성과를 거둔 사람이다 보니 자서전엔 그가 어떤 고민으로 삶의 경로를 선택했고 어떻게 최고의 결과를 얻기 위해 노력했고 류의 이야기가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삶은 전반적으로 큰 고민 없이 물길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듯 보인다. 의사인 부모를 보고 자라 당연하게 의대에 진학했고, 군대에 가기 싫어 자연스레 연방국인 캐나다로 건너갔고, 또 거기서 우연히 소개를 받아 캘리포니아에서 인턴자리를 얻고... 별 다른 이유가 없이 그의 인생은 계속 흘러간다. 나이가 들어 되돌아보면 그렇게 선명하게 보이는 것일까. 


크게 걸림돌 없는 색스의 인생에 단 하나의 골칫거리라면 그의 성정체성이다. 50년대까지도 동성애는 불법이었고 섹스는 부모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불안함을 안고 살아간다. 마음에 드는 파트너를 만나는 일도 쉽지 않다. 사실 거의 완벽에 가까워 보이는 그의 일생에 하나의 빈 구멍이라면 마음에 드는 짝을 만나 해로하지 못했다는 것일텐데 색스는 그 마저도 그의 솔직함으로 유쾌하게 정리해버린다. "40살 이후로 35년간 섹스를 한 번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35년간의 금욕 굴욕마저 모두 덮어버리는 그의 황금 해피 엔딩. 일흔다섯의 나이에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보통의 부부들처럼 일상을 공유하고 한 사람이 책을 읽으면 다른 한 사람은 기대어 가만히 온기를 나누는 그런 삶을 경험하게 된다. 시대의 측면에서 거시적으로만 읽히던 그의 인생이 미시적으로 빛난다고 느껴졌던 부분이다. 그가 그렇게나 열성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낸 앞의 75년 인생과 400쪽에게 미안하게시리. 


올리버 색스의 이야기는 평전 작가가 쓴 것도 안니고 본인이 주섬주섬 쓴 이야기라 시시콜콜하기도 하고 정말 일기장 모아놓은 듯한 투박함도 가끔 눈에 띄지만 내 귀한 시간 아깝지 않은 정말 멋진 자서전이었다. 파도가 밀려올 때 아름답게 서핑을 한 사람의 인생은 이렇게 읽혀지고 후대에 남겨질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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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06 08: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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