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 여행
다나베 세이코 지음, 신유희 옮김 / 북스토리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청춘이란 돈과 같은 거야.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되면 마구 쓰고 싶어지는 법이지."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 직장보다 출퇴근길에 마주치는 사람들의 무감동한 얼굴, 까닭 없는 악의에 찬 표정들에서 피로를 느꼈다.

루리 세대의 여자들은 20대 초반만 해도 기모노를 입고 다녔다. 전쟁이 끝난 행복을 곱씹기 위해...

즐거운 모임일수록 길게 가져가면 안된다. 잔치는 끝이 나기 때문에 잔치인 것이다.

"내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인간의 행복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점을 규명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침대의 목적
다나베 세이코 지음, 조찬희 옮김 / 단숨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점점 옛날 느낌이 돌아오기 시작한다. 냄새가 밴 손수건을 서랍장 깊숙이 넣어두면 냄새가 안 나지만, 꺼내서 흔들거나 문지르거나 털거나 하면 냄새가 다시 나기 시작하는 것과 비슷하다.

가게에서 서너 건물 더 가면 나오는 `따끈따끈 도시락`집에서 메뉴판을 보면서 메뉴를 고르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야마무라, 집에 그런 거 가져가서 먹을 거면 내가 밥 사줄게. 갈래?"
라고 말했더니 또 입술이 오자 모양으로 벌어지며
"정말요...?"
라고 말하며 눈이 휘둥그레진다. 내가 알고 지내는 올드미스들은 젊은 남자를 꼬일 때는 무조건 먹는 거야, 라고 말햇다. 젊은 스님을 애인으로 둔 애는 기쓰네 우동 여섯 그릇이면 됐다고 말했고, 자위대 대원을 애인으로 둔 애는 처음에 "햄버거 드실래요?"로 낚았다고 했다. 그들에 비하면 나는 계절 요리니까 나름 고상한 편이다.

어차피 나는 그 정도로 말발이 좋지도 않았고, 게다가 솔직히 말해서 지식도 부족했다. 경험이 많은 것도 아니고 횟수가 많지도 않았다. 나는 남자가 먼저 "옳지, 옳지. 살결 참 곱다. 몸매도 유연하고...그럼 이렇게 한 번 해볼까" 라며 리드해주는게 좋지, 내가 먼저 "너 몸이 아주 탄탄하네. 그래, 그래. 잘한다. 옳지"라고 말하긴 싫다. 그럴 수 있을 정도로 경험이 많지 않아서라기 보다는, 나에겐 아직 그 정도의 `기량이 없다`라고 보는 편이 맞을 거다. `기량`이란 단어는 고승의 담력이나 깨달음, 정권 장악을 목표로 한 정치가에게만 쓰는 것이 아니다. 침대 위에서 상대를 리드할 때에도 그에 못지 않은 기량이 필요하다.

"자네들, 미모랑 건강도 마찬가지야."
전무는 우리에게 말한다.
"없는 미모에, 없는 건강이겠지만..."
"없는미모라니요. 너무해요."
우리가 항의하면 전무는 당황해서
"아, 그게 아니라 미모도 한도가 있다고 할까. 이건 어쩔 수 없이 신에게 받은 것으로만 승부를 봐야 해. 그걸 차례차례 잘 변통해서 쓰는 수밖에 없어. 적은 자본으로 큰걸 얻는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거든. 건강도 마찬가지. 1년 건강했다면 그 다음 1년도 버틸 수 있어. 그 건강함으로 어떻게든 1년 더 버틸 수 있고, 이런 식으로 어찌어찌 살아가는 거라고."

우메모토는 참 칭찬도 잘한다. 정말 감동했다는 듯 말한다. 나도 서른한 살이다. 나이를 겉으로만 먹은 게 아니라고. 남자가 진심으로 감동한 건지 그냥 하는 말인지 후각으로 구별해낼 수 있는 연륜 있는 여자란 말이야.

나는 우메모토가 바지런하게 요리하는 모습을 보고 `어머, 쓸모있는 남자네`라며 이런 남자가 내 남편이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시자키 규타처럼 물건 만드는 취미가 있는 사람을 보니 `참 쓸모 있는 존재야`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요즘에는 남자도 돈을 잘 번다는 것, 한 가지만으로는 세일즈 포인트가 될 수 없다. 보금자리를 꾸릴 능력 외에도 뭔가 한 두 가지 장점이 더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신랑감으로서 메리트가 없을 것이다. 신부 수업이란 것이 있듯이, 신랑 수업이란 것도 있으면 좋지 않을까? 남자도 요리, 수공예, 뜨개질, 육아 등 각자 특기를 가진다면 더 빨리 결혼할 수 있을지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른 넘어 함박눈
다나베 세이코 지음, 서혜영 옮김 / 포레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읽으며 나의 일본 작가 베스트 3인은 나쓰메 소세키/무라카미 하루키/다나베 세이코라고 정리하였다. 나쓰메 소세키의 글은 아름답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은 신비롭다. 다나베 세이코의 글은 멋지다. 


다나베 세이코가 일반적인 일본의 사소설 여류작가 쯤으로 치부될 수 없다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여성의 30대를 테마로 묶은 이 단편집을 보니 그녀의 저력이 더욱더 명료하고 깨끗하게 드러난다. 다나베 세이코가 주인공으로 삼는 여자들은 딱히 진취적이거나 멋진 여자들은 아니다. 오히려 통속적인 기준을 좇는, 약간은 속물적이고 약간은 이기적이고 약간은 멍청한 여자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런 여자 캐릭터들을 가지고 다나베 세이코가 그려내는 이야기는 전혀 통속적이지 않으며(오히려 모던하다고 할 만 하다) 적당한 유머를 담고 있되 절대 코미디로 흐르지는 않고(코미디로 흘러간 작가로 오쿠다 히데오가 있다) 한 편의 단편이 마무리 지어지는 순간엔 정말 뭐랄까 모든 음식을 다 하고 마지막 참기름 한 방울 딱 떨어뜨려 넣는 그런 명료함이 있달까. 삶의 진실이 더도말고 덜도말고 딱 한 방울 들어가 있어서 독자들이 가볍게 공감하고 위안받을 수 있는 그런 면이 있다. 그리고 여성의 30대라는 그 진부한 토픽을 가지고서도 가지각색으로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별별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건 가히 감동적인 수준이다. 똑똑한 여자부터 멍청한 여자까지 모두 살아있는 듯 그릴 수 있는 건 작가의 에고가 너무 강하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부드러운 에고를 가지고서도 분명히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또 그것을 전달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대단하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이 세상이 30대 여성을 대상으로 삼아 만들어 낸 별 시덥잖은 컨텐츠가 얼마나 많은가. 남자주인공을 미남으로 캐스팅하여 진부한 캐릭터와 스토리를 얼버무리기라도 하면 다행일텐데 그렇지도 못한 망작이 난무하는 이 현실에 분노하며, 1970년대에 이런 작품을 써낸 다나베 세이코 할머니에게 깊은 감사를 드릴 뿐이다. 사랑합니다 다나베 세이코 여사님.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네꼬 2016-05-02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읽어볼래요. 모르고 있던 작가인데! (LAYLA님 소개가 더 멋진 걸 수도 있지만 그건 책을 읽고 확인하겠어요.)

LAYLA 2016-05-02 22:11   좋아요 0 | URL
네꼬님 제가 밑줄긋기 해 놨으니 먼저 보셔요. 네꼬님의 시간은 소중하니까요...!
 
서른 넘어 함박눈
다나베 세이코 지음, 서혜영 옮김 / 포레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미카코는 미혼의 아가씨들이 대체로 그러듯이 남자를 연인이나 약혼자 같은 대상으로밖에 보지 않았다. 이런 남자가 애인이라면 혹은 남편이라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는 것이 미카코 같은 아가씨들이 남자를 판단하는 기준이었다. 그러므로 거기에서 벗어나는 유부남이나 나이가 많은 사람이나 동성 등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벌레나 마찬가지로 생각되는 것이다. 우연히 그냥 인간일 뿐인 것이다.

남자 동료인 다카하타 씨와 나는 비교적 자주 대화를 나누는데 그는 젊어 보인다든가 미인이라든가 하는 건 관계 없다고 말한다.

"즉 둘 다 척하면 통하는, 머리가 재빨리 돌아가는 데가 있잖아요? 그런 건 남자로서는 감당이 안 되는 거거든."
"흐음"
"그런 걸 남자들은 할망구라고 불러요. 지나치게 똑똑한 여자는 모두 할망구. 그렇기 때문에 젊고 미인인 할망구도 있는 거예요."
"알 거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네요."
"똑똑한 건 젊은 축에 들지 않는다고 남자들은 생각하죠. 즉 남자들은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여자를 젊다고 생각 안 해요. `아가씨`니 `할망구`니 하는 건 물리적 나이하고는 상관없다는 거예요."

나는 데쓰카 선배가 어린 남자를 데리고 이리저리 홍차 티백을 뒤흔들듯이 즐긴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다가 향이나 색이 더이상 우러나오지 않게 되면 가차 없이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는 것도 알고 있다. ...내 의견을 묻는다면, 열여덟이나 아홉, 스물도 채 안 된 어린 남자를 만나는 것은 데쓰카 선배가 로맨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도움이 되지 않는 것에 열을 올리는 건 몽상가나 하는 일이다. 내가 보기에 그 나이의 아이는 붕붕 떠 있는 것이 솜사탕 같아 보인다.

데쓰카 선배는 핸드백을 열고 종잇조각을 꺼냈다. 데쓰카 선배의 핸드백은 맞물림쇠가 고장 났다. 그런데도 새것을 사지 않고 벌써 몇 년째 들고 다닌다. 나는 데쓰카 선배 이상으로 그 핸드백에 익숙해서 데쓰카 선배 이상으로 그 핸드백에 친근감을 갖고 있다. 노처녀란, 그녀가 갖고 있는 물건이나 몸짓, 말투에 오래 익숙해지다보면 그런 것들로도 그녀의 독신생활이 얼마나 됐는지를 헤아리게 되는, 그런 데가 있다.

하나얏코는 기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마음이었다. 일의 재미라고 하는, 금단의 나무에서 딴 열매 맛을 이 아이는 알아버렸다. 결국 알아버렸다. 그건 여자의 행복에 반하는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결국 모르고 지나치는 것보다는 알고 사는 것이 더 행복한 거라고 하나얏코는 생각을 정리한다.

나는 로맨티스트라서 결혼이라는 건 `그래, 가는 거야!`하고 점프하는 것 같은 맛이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남녀 사이란 어느 쪽이 됐든 한 쪽이 억지로라도 끈을 꽉 묶어놓고 있지 않으면 자연히 풀려버리는 허망한 면이 있다.

"자네들은 세상물정을 너무 모르니 난처하군. 사람은, 남자와 여자는, 나이가 중요한 게 아니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이라는 게 있어. 그런 좋은 사이가 되면 나이도 주름도 어디론가 날아가버린다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올리버 색스 지음, 조석현 옮김 / 알마 / 201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올리버 색스의 자서전을 먼저 읽고서 그의 커리어에 호기심이 생겨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순서로 따지자면 거꾸로 된 셈인데 사실 나에겐 그의 자서전이 훨씬 더 재미있고 흥미로웠던거 같다. 많은 독자들이 이 책에 표하는 찬사에 일정부분 동의하지만-환자를 바라보는 색스의 시선은 온화하고 따뜻하며 그것이 글로도 잘 느껴진다- 마치 신경증 환자의 사례집 같은 이 책은, 그 동안 조명되지 않았던 신경증 환자들을 세상의 양지로 끌어내어 세상에 알렸다는 의미를 빼고 나면 읽는 재미 자체는 그리 크지 않다. 내가 본디 의학이란 것에 큰 흥미가 없는 인간이기도 하고, 환자의 사례라는 게 기승전결 서사가 있는 것도 아니다 보니. 알게 모르게 세상엔 내가 모르던 세상이 있다는 걸 아는 재미는 있었지만 -이런 병도 있다니!- 역시나, 그 사례를 장장 400페이지 넘게 수십개 읽어나간다는 건 좀 지루한 일이었다. 넘 기대가 컸던 탓이 아닐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