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다감 18 - 완결
박은아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7년 8월
절판


사람들과 사람들이 만나서 겪게 되는 변화들 중, 가장 긍정적인 혜택을 본 사람은 한결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결이, 넌 정말 많이 변했어. 네가 저녁거리 사는 걸 도와달라는 나링 올 줄 누가 알았겠어?"
"그러게 말야. 예전엔 상상도 못했어. 그런데 갈수록 생각 이상으로 내가 너한테 많이 기대고 있다는 걸 알게 돼. 새엄마가 쓰러지셨을 때는 너무나 확실하게 알았어. 다시 어릴 때로 거슬러 올라가서 생각해 봐도 역시 너하고 알게 된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 지금도 이렇게 옆에 있는게 마음이 놓이고...그리고 앞으로도 네가 어떤 형태든 자연스럽게 내 일상 속에 스며들어있었으면 좋겠어"

정말 한결이는 사람을 어쩌지도 못하게 묶어두는데 선수다. 그럼에도 미워할 수가 없다. 아마도 내 주변에 가장 가까이, 오래 머물러 있을 사람은 신새륜도 아니고 학교 선배도 아니고 앞으로 직장에서 만날 다른 누구도 아닌 한결일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한결이도 누군가를 만나 가정을 꾸리겠지. 나는 한결이의 주변 어딘가에서 이 녀석이 해달라는 건 다 들어주고 있을 거다. 안 봐도 그림이 된다. 그렇게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고 다들 변해갈텐데-129쪽

나만 변하지 못한 채-
'그 시간'에 머물러 있을까봐- 그런게 너무나 무섭다.-130쪽

"여자애가 아무데서나 자냐? 머리가 다시 짧아졌네"
-네가 머리 긴 걸 싫어했으니까
"사실 긴 머리가 더 좋았어.
-괜찮아 또 기르면 돼
"넌 고등학교 때하고 똑같구나. 이래서 여기에 오는게 싫어 . 내가 변하지 못하는 건 너 때문이야. 내 말 잘들어. 이번에 널 보러 온 건 아냐. 넌 너무 그대로라서 실망스러울 지경이야. 그러니까 내 탓하지 말고 실컷 변해버려. 그렇지 않으면 다음에 보게 될 때는 못 본 척 하고 지나가 버릴 거니까..."-172쪽

"사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기분이 너무 이상했어. 뭘 입어도 나한테 어울리지 않는 것 같고 초라하게만 느껴지는 거야. 사실 내가 입고 싶었던 건 민이 같은 웨딩드레스 였는지도 몰라. 이젠 나도 뭔가..달라져야 할 때가 정말로 와버린 것 같아."
",,,예전에도 얼핏 얘기했었지만-네가 괜찮다면 내가 입게 해줄게."
"푸핫"
"이상하다구?"
"응- 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이상해."-190쪽

"기대에 못 미쳐서 미안한데 난 이렇게 살래. 억지로 뭔가 바꾸는 건 너무 힘들어"-200쪽

실컷 변해버려. 지금하고만 다르면 돼.지금의 이런 네가 지나치게 좋으니까--2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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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04 14: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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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다감 18 - 완결
박은아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 파라다이스 키스가 떠올라 초조한 심정이 되었다. 새드엔딩이라도 그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겠지만 이 만화만큼은 초기의 그 발랄함을 잊지 말고 (그냥) 해피엔딩이 되어주길 바랬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 감수성이 10대와 맞닿아 있는 시절에 보는 마지막 순정만화일지도 모르니까요. 제발. 근데, 해피엔딩인거 같은데 새드엔딩일때보다 더 아픈 내 마음은 뭘까요.

십대의 성장기와 연애담을 버무린 순정만화야 차고 넘친다. 이때까지 그런 류의 만화는 아주 많이 보아왔다. 그 중에 뛰어난 작품도 많았다. 근데 유독 다정다감만큼 슬프게 느껴지는 작품은 없었었다. 어리버리하고 외모도 평범한 여주인공이 잘생기고 돈 많은 남자 주인공 둘의 사랑을 받는다는, 이 진부하고도 비현실적인 스토리의 결말이 왜 그렇게도 내 이야기 같던지, 왜 슬프다 못해 서럽기까지 하던지.

십대에서 이십대로,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것은 변한다. 모든 것이 변하는 그 순간을 작가가 참 잘 그려내었다. 모든게 변해가는데 나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고, 알지 못하는 사이에 시간은 지나가고 언제나 함께 하던 누군가와는 멀어질수 밖에 없고 앞만 보고 달리던 날만 계속될 줄 알았는데 어느새 과거를 그리워하고 있다.

"넌, 미래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 있어? 직업 같은 건 둘째치고 앞날에 대한 풍경을 머릿속에 떠올려 본 적이 있냐구. 니 옆에 누가 있을지, 누구랑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예를 들어 5년 후의 생일날에. 일찍 결혼했을지도 모르지. 누군가와 맛있는 걸 먹고 수다를 떨고. 그렇게 보내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네가 생각하는 그 애들은 그 자리에 없는 거야. 모두 네가 앞으로 알아가야 할 사람들이라고 상상해본 적 있냐구. 그런 풍경을 구체적으로 생각하면 씁쓸해지지만-. 미래에도 어떻게든 연이란 걸 이어가겠지- 하는 생각은 들어."

성장만화에서 주인공들이 모두 각자의 꿈을 찾아 환하게 웃으며 희망을 얘기하는 바로 그 '공식'과 대조적으로 다정다감은 성장의 결과로 찾아오는 쓸쓸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젠 더 이상 하루종일 붙어었을 수 없는거야. 각자의 길을 향해 발걸음을 내 딛는다는 건 다른 한편으론 이별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과거에 아파하고, 과거의 사람을 잊지 못해 하루하루를 보내는 주인공. 변할 수 없어. 변할 수 없는 게 바로 내 모습이니까.

아이러니하게도 - 변할 수 없는 주인공이기에 변화에 슬퍼하느라 발랄하고 헤헤거리며 웃던 모습을 잃고 만다. 두 남자주인공 사이에서 조마조마해하고 눈물흘리고 애간장 태우던 그 여자아이가 이젠 어느정도 담담하고 차분한 사람이 되는구나.

하지만 해피엔딩이니까, 그 긴 방황의 끝에 행복을 만나는 주인공.

판타지일테다. 판타지래서 좋다.

 

 

이 책은 너무도 적나라하게 '우리의 십대가 얼마나 반짝거리고 아름다웠는지. 그리워서 미치겠습니다. 눈물이 나도록 그립습니다.'라고 말한다.

압니다. 알아요. 그런데 자꾸 후벼파주신다. 젠장. 친절하게 반짝이는 10대와 쓸쓸한 20대의 모습을 어쩜 그리 자연스럽게 연결해주시는지. 너무 아프잖아요.

99년부터 07년도까지 작가도 많이 변했겠지. 어색하던 펜선은 이제 간 곳이 없다.

이런 구질구질한 리뷰는 다 그냥 내 감정의 찌끄러기일 뿐이고. 혹 만약 바그너님이 이 리뷰를 보신다면 - 당신의 재능에 감사합니다. 당신의 바람대로 제 추억을 이야기 할 때 다정다감을 빼 놓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었지요. 지금처럼 열심히 좋은 작품 많이 해 주세요. 고마워요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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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리풀말미잘 2007-09-24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완결이 나왔군요. ^^ 9권까지는 열심히 읽어주셨던것 같은데 말이죠. 완결도 나왔으니 재도전한번 해 봐야겠어요. 라일라님 평점도 좋고.

LAYLA 2007-09-26 21:44   좋아요 0 | URL
저도 한꺼번에 쭈욱 보고 싶네요. 그럼 또 느낌이 다를거 같아요. 이런식으로 끝낼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은근 바그너님은 새드엔딩, 이런 쪽을 좋아하는거 같아요 ^^

marryAlice 2009-08-19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점에서 주인공이 마지막에 행복을 찾았다고 여기시는지 궁금하네요.... ㅠㅠ 전 결말을 보고 완전 가슴 아파서요..... 물론 완전 새드앤딩인건 아니지만 결코 행복을 찾았다고;; 말하진 못하겠어요 ㅠㅠ 물론 훌훌 털어버리고 열심히 살아갈거라 믿지만요 ㅠㅠㅠ 아 ㅠㅠㅠ 신새륜의 결혼을 진짜 이해할 수가 -_-; 없어요;;; 진짜 말도 안된다는 생각만 드네요..... 아무리 할아버지 때문이라지만 그게 말이 되는지;;; 그렇게 둘이 절절매면서 이혼은 왜 안하는지;;; 부인에게도 실례인데....!!! ㅠㅠ
 
여자들의 유쾌한 질주
사단법인 한국여성민우회 지음 / 민연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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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참 이쁘다. 표지도 이쁘고, 편집도 이쁘고 거기다가 읽기 편하고, 종이도 가볍고 사이즈도 딱 좋다 ^^

처음 읽어나갈 땐 '언니네 방' 시리즈와 비슷하려니 했는데 다 읽고 나선 언니네 시리즈와 확실히 구별되는 이 책만의 무게와 분위기를 느낄수 있었다.

언니네 시리즈과 음 마치 작은 언니의 이야기 였다면,  이 책은 결혼하고 직장에서 육아와 커리어의 경계에서 고군분투하는 큰 언니의 이야기 같다고 해야할까?

더 알차고 묵직하고 관대하며, 다양한 소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냥 겉으로 보기엔 '한국여성민우회'에서 엮은 이 책이 웹상의 글을 모아 엮은 언니네 방 보다 더 정치적이고 과격할 것 같지만 두 가지 다 읽어본 소감은 오히려 그 반대라는 것.

그냥 느낌이 그랬다. 언니네 방이 예민한 감수성의 소녀, 어린 여자가 상처를 받고 치유하는 과정에서 여성주의를 만나 성장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면

여자들의 유쾌한 질주는 젊음의 불안함과 혼란의 시기를 견뎌낸 든든한 큰 언니가 생활속에서 어떻게 여성주의를 실천하며 살고 있는지, 부딪힘의 고통을 통해 터득한 관대함과 여유로움이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그래서, 육아, 직장 내 성차별, 가족 등 일상적인 소재의 이야기가 책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으며..책의 원래 컨셉과 관련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성적 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다.

실제 여성이 직장에서 부닥치는 차별에 대해 사례별로 ^^; 구체적으로 알 수 있어서 좋았고 육아와 관련해서도 마냥 남의 일만은 아니기에 '과연 나라면' 이라는 맘으로 읽을 수 있었다.

직장 내 차별의 경우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차별 받고 있는지, 여성이 겪는 갈등이 어떠한 것인지 개인의 경험을 통해 생생하게 그려지므로 여성주의가 왜 필요한지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이나, 실생활에서 여성이 무슨 차별을 받는다는 건지 전 모르겠어요. 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경우 이 책을 읽음으로써 가볍게 타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볼 기회를 얻을 수 있을 듯 하다. 페미니즘에 관심은 있는데 페미니즘 이론서 읽는건 죽어도 못하겠다면 이것으로 시작해도 좋을거 같아요.

이미 여성주의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좋아할듯하고. 음..나는 나의 10년 후, 20년 후는 어떤 모습일까, 이 책을 통해 희미하게나마 그려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지금보다 훨씬 열악한 상황에서 지금을 만들어낸 큰언니. 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 나 역시 지금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더 나은 미래를 만들수 있으리라는 작은 희망을 보았다는 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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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20 11: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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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23 03: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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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04 11: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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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미래사 한국대표시인 100인선 33
윤동주 지음 / 미래사 / 2001년 11월
구판절판


병원



살구나무 그늘로 얼골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어,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어오는 이, 나비 한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어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었든 자리에 누어본다.


-1쪽

바람이 불어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꼬 부는데

내발이 반석우에 섰다.



강물이 자꼬 흐르는데

내발이 언덕우에 섰다.
-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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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부의 삶 - 옛 편지를 통해 들여다보는 남자의 뜻, 남자의 인생
임유경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7년 3월
품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아니 그칠 새
-서유규가 사촌 동생 유경에게 쓴 편지
지난 가을 가뭄이 7월부터 12월까지 이어졌지. 올해도 4월까지 계속 해서 비가 오지 않아 시내와 도랑은 다 말라 거북 등처럼 갈라졌더군. 농가에서는 근심하고 탄식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네. 장차 끝내 비가 오지 않으면 어찌하나 걱정들이 대단했지. 다행히 5월에 큰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7월까지 계속되었네. 전날 말랐던 곳에 지금은 물이 넘쳐흐르고 거북 등처럼 갈라졌던 곳에는 개구리 떼가 살고 있다네. 강촌에 물이 넉넉해지니 생활도 예전으로 돌아왔네. 어제 우연히 이웃에 사는 박생과 함께 잠을 자게 되었네.밤이 깊어 비가 쏟아지는데 시간이 갈수록 빗줄기가 거세지더군. 낙숫물 소리가 귀를 때리고, 세찬 바람이 풍경을 거세게 울리고 창문을 드세게 흔들어대는 통에 엎치락뒤치락하며 늦게까지 잠들지 못하였네. 그러던 중 문득 깨닫는 바가 있어 벌떡 일어나 박생을 흔들어 깨우고는 "자네는 오늘 이 비를 아는가? 이것은 옛사람의 문장일세"라고 크게 말했다네. 박생이 무슨 소리인지 몰라 어리둥절하기에 상세히 말해주었지.
-51쪽

"지난날 비가 오지 않은 것은 오늘을 위해 쌓아두었던 것이고, 오늘 이 비는 지난날 쌓아둔 것이 쏟아져 내리는 것이네. 오로지 오래 축적해야 지금처럼 모자람 없이 쏟아질 수 있는 법이지. 문장도 마찬가지야. 옛날 작가들은 모두 길게는 수십 년이요, 짦아도 십여 년이 되도록 학문을 쌓고 생각을 깊이 하여 콸콸 솟아 넘쳐나고 눌러도 다 없어지지 않은 연후에야 마침내 그것을 꺼내어 문장을 지었네. 그래서 그 말이 콸콸 쏟아지고 항상 촉촉하여 마르지 않았지. 그렇지 않고 없는 살림에 하루하루 쓸 거리를 맞춰 살다 보면 머지않아 부족하여 남에게 빌리고 표절하게 되니 어찌 굶주리지 않겠는가."-52쪽

참된 친구를 만나셨나요
-박지원이 홍대용에게 쓴 편지
제가 평생토록 교유한 범위가 넓지 않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인격과 처지를 살펴 거의 다 친구르 사귀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허여한 이들이 때로는 명예를 좇고 권세에 빌붙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제가 친구를 본 것이 아니라 오직 명예와 이익, 권세를 보았을 뿐임을 깨닫습니다. 이제 저는 거친 풀숲에 숨어들어 조용히 살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머리를 깎지 않은 비구요, 아내를 얻은 탁발승입니다. 산 높고 물 깊은이곳에서 명예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옛말에 "움직이면 비방은 받겠지만 그래도 명예는 따른다"고 하였으나 모두 빈말인것 같습니다. 겨우 한 줌 명예를 얻었다 싶으면 벌써 비방이 한 자만큼이나 따라와 있습니다.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늙어서야 그런 이치를 깨닫습니다. 저 또한 젊어서는 헛된 이름을 얻고자 옛사람의 줄글을 훔치고 꾸며 칭찬과 명예를 구했습니다. 그렇게 얻은 이름은 겨우 송곳 끝만 한데 비방은 산만 합니다. -75쪽

청성산 한 귀퉁이를 떼어주오
-김성일이 권호문에게 쓴 편지

우리가 헤어진 뒤로 봄기운이 일어나니, 지난해 청성산을 유람했던 것이 이미 옛일이 되었구려, 티끌 속으로 얼굴을 돌려 바라보니 그리운 마음을 이길 수가 없소. 요즈음 그대의 근황이 더욱더 좋으리라 생각하오. 나야 이 지경까지 낭패를 당하고 있으니 달리 무슨 말을 하겠소. 늦은 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오. 그대는 청성산의 한쪽 구석을 떼어나에게 주실 수 있는지요.
꽃지고 낙엽 지는 것이 그대의 달력인데, 속세의 인간들이 보는 달력을 무엇에 쓰려 합니까. 그러나 오는 길에 부탁을 받았으니 한부 보내오. 이만 줄이오. -111쪽

이런 마음이 일어날 때 명나라 사람 이탁오가 한 말을 곰곰 생각해보자. "스승이면서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스승이 아니고, 친구이면서 스승이 될 수 없다면 그 또한 진정한 친구가 아니다." -163쪽

한 끼를 배불리 먹으면 살이 찌고, 한 끼를 굶ㅇ면 마르는 것은 천한 짐승에게나 어울린다. 시야가 좁은 사람은 오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당장 눈물을 줄줄 흘리고, 다음날 일이 뜻대로 되면 금세 아이처럼 표정이 밝아진다. 근심과 즐거움, 기쁨과 슬픔, 감동과 분노, 사랑과 증오 등 온갖 감정들이 아침 저녁으로 변하니, 달관한 사람들에게는 그 모습이 얼마나 한심하게 보이겠느냐.
그러나 소동파는 "세속의 안목은 너무 비천하고, 하늘의 안목은 너무 고상하다"고 말했다. 오래 사는 것과 일찍 죽는 것이 다를 바 없고, 삶과 죽음이 하나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또 지나치게 고상한 게 아니겠느냐.
아침에 햇빛을 받는 쪽은 저녁에 그늘이 빨리 들고, 일찍 핀 꽃은 먼저 진다는 사실을 명심하여라. 운명의 수레는 재빨리 구르며 잠시도 쉬지 않는다. 그 점을 기억하고 세상에 뜻이 있다면 잠시의 재난을 이기지 못해 청운의 뜻까지 꺾이는 일은 없어야 한다. 대장부는 언제나 가을 매가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기상을 가슴에 품고 있어 천지가 좁아 보이고 우주도 내 손안에 있는 듯 가벼이 여겨야 한다.
-정약용이 아들 학유에게 쓴 편지-188쪽

하루는 저녁에 집주인 노파와 한담을 나누었습니다. 그가 물었습니다. "선생은 글을 읽으신 분이니 이런 뜻을 아시겠지요. 아버지와 어머니의 은혜는 똑같고, 오히려 어머니가 더 애쓰시는데도 성인들은 왜 아버지는 중하게 여기고 어머니는 가벼이 대하도록 가르치셨을까요? 성도 아버지를 따르고, 복을 입을 때도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한 등급 낮추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혈통으로 집안을 이루게 해놓고 어머니 집안은 도외시하였으니, 너무 한 쪽으로만 기운 게 아닌가요?"
이에 나는 "일찍이 '아버지 날 낳으셨다'고 했기 때문에 옛날 책에는 아버지가 나를 처음 태어나게 한 분으로 여긴 겁니다. 분명 어머니의 은혜도 깊지만 하늘의 으뜸인 탄생의 은혜를 더 중히 여긴 까닭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노파가"선생의 말씀이 꼭 옳지만은 않ㄹ습니다. 생각하건데, 초목에 비유한다면 아버지는 나무나 풀의 씨앗이고, 어머니는 흙입니다. 씨악이 땅에 떨어지는 것은 베푼 정도가 매우 미미하다고 할 수 있고 흙이 자양분을 주어 길러내는 공은 대단히 크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밤의 씨앗은 자라서 밤이 되고 벼의 종자는 자라서 벼가 되니 그 몸 전체를 -232쪽

이루고 있는 것은 흙의 기운이지만 결국에는 씨앗에 따라 종류가 가려지게 되어 있지요. 옛성인들이 가르침을 세워 예를 정할 때에도 이 점을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더군요. 제가 그의 말을 듣고 흠칫 놀라며 크게 깨달아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밥 파는 노파가 천지간에 지극히 정밀하고 오묘한 뜻을 헤아리고 있을 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기이하고 기이한 일입니다
-정약용이 형 약전에게 쓴 편지 -2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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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9-10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어땠어요? 저는 그냥 선비들의 '글을 모아놓은 책' 이상의 느낌은 안오던데.

LAYLA 2007-09-12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좋았어요^^ 가볍게 읽을수 있는 난이도이고 옛날 말씨를 원체 좋아해서요 ㅋ 가끔 눈물이 글썽여지는 글도 있습니다. 편지글이라 그런지 진심이 절절이 배어있거든요..^^

마늘빵 2007-09-12 09:36   좋아요 0 | URL
아 제가 너무 무덤덤하게 읽었나봐요. 크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