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베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7
서머셋 모옴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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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젊음 자체의 아름다움 이외에는 그 어떤 아름다움도 가져 본 적이 없는 여자였다-25쪽

내가 왜 당신과 결혼했는지 알아요?
당신 동생 도리스보다 먼저 결혼하고 싶어서였지.
그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가 그것을 알고 있었다니, 그녀에게 이상한 감정의 기류가 몰려왔다. 정말 이상한 일이지만 두려움과 분노에 휩싸인 그 순간에도 그것이 그녀의 동정심을 일깨웠다. 그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가 말했다.
나는 당신에 대해 환상이 없어. 나는 당신이 어리석고 경박한 데다 머리가 텅 비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의 목적과 이상이 쓸데없고 진부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이 이류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 당신이 기뻐하지 않는 것에 나도 기뻐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내가 무지하지 않다는 걸, 천박하지 않다는 걸, 남의 험담을 일삼지 않는다는 걸, 그리고 멍청하지 않다는 걸 당신에게 숨기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생각하면 한 편의 코미디야. 당신이 지성에 얼마나 겁을 먹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당신이 아는 다른 남자들처럼 당신에게 바보처럼 보이려고 별 짓을 다했어. 당신이 나와 결혼한 건 편해지기 위해서라는 걸 아니까. 그래도 나는 당신을 너무-96쪽

사랑했기 때문에 개의치 않았어. 내가 아는 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랑에 보답받지 못하면 불만을 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어. 당신이 나를 사랑해 주길 기대하지도 않았고 당신이 그래야 할 어떤 이유도 찾지 않았어. 내 자신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으니까. 당신을 사랑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고 때때로 당신이 나로 인해 행복하거나 당신에게서 유쾌한 애정의 눈빛을 느꼈을 때 황홀했어. 나는 내 사랑으로 당신을 지루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어. 나는 그걸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당신이 내 애정에 참을성을 잃기 시작하는 징조가 보이는지 언제나 조심했어. 대부분의 남편들이 권리로 여기는 걸 나는 호의로 받아들였어.-97쪽

처음에 그녀는 그가 단지 그녀를 상대로 장난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막상 그들이 실제로 출발할 때도, 아니, 그후에 그들이 강을 벗어나 국토를 횡단하는 길을 떠나기 위해 가마에 오를 때까지도 그가 특유의 작은 웃음을 떠뜨리면서 그녀는 갈 필요가 없다고 말할 것만 같았다. 그의 속셈이 무엇인지 그녀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죽기를 바라다니 그가 그럴 리 없었다. 그는 그녀를 너무나도 절실하게 사랑했다.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고 난 지금, 그가 보여줬던 수많은 애정 표현이 그녀에게 새로새록 다가왔다. 프랑스 식 표현대로 말하자면 그의 하루 날씨가 좋고 나쁨은 전적으로 그녀의 손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그가 더 이상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잔인한 대우를 받았다고 사랑을 멈출 수 있을까?-125쪽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죠?"
"제가 도와드리죠"
"제 은밀한 슬픔에 함락되신 건가요? 제 옆얼굴을 보시고 제 코가 그리 길지 않다고 부디 말씀해 주세요"
그는 생각에 잠겨 그녀를 응시했다. 그의 파란 눈 속에 심술궂고 비꼬는 표정이 떠올랐지만 강가에 서 있는 나무가 수면에 그림자를 비추듯이 그 속에는 온정이 담겨 있었다. 그것이 키티의 눈에 눈물이 핑 돌게 했다.-155쪽

"여기 온 게 겨우 몇 주 전인데, 마치 한평생이 흐른 것 같네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고 잠시 그녀는 이런 저런 생각에 방황했다.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영혼이 불멸하다고 생각하세요?"
그녀가 물었다. 그는 그 질문에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제가 그걸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방금 전 그들이 월터를 관에 넣기 전에 씻길 때, 그를 봤어요. 그는 아주 젊어 보이더군요. 죽기엔 너무 젊은 나이죠. 당신이 나를 처음 산책에 데리고 나갔을 때 우리가 봤던 거지를 기억하세요? 내가 겁에 질렸던 건 그가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조금도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어요. 그는 그저 죽은 동물이었어요. 그리고 이번에 월터도 마찬가지로 멈춰 버린 기계와 너무나 흡사했죠. 그게 너무나 두려워요. 그것이 단지 기계일 뿐이라면 그 모든 고통과 가슴의 상처와 불행은 얼마나 부질없을까요"-264쪽

지난 몇 주 동안 그녀가 깨달은 것은 남에게 거짓말하는 것이 때론 필요하지만 스스로를 기만하는 행위는 언제나 비열한 짓이라는 점이었다. -282쪽

"그곳의 시원한 바다 소리오 드넓은 파란 하늘 아래 여자 애가 태어난다면 좋겠어요"
"성별에 대해서 벌써 마음을 정한 게냐?"
그가 살짝 웃음기를 보이며 중얼거렸다.
"난 딸이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범한 실수를 그 애가 저지르지 않도록 잘 키우고 싶기 때문이에요. 어릴 적 모습을 돌이켜 보면 제 자신이 싫어요. 하지만 제겐 기회란 게 전혀 없었어요. 내 딸은 자유롭고 자기 발로 당당히 설 수 있도록 키울 거에요. 난 그 아이를 세상에 던져 놓고는 사랑한답시고 결국 어떤 남자와 잠자리를 갖기 위하 여자로 키우기 위해 평생토록 입히고 먹일 생각은 없어요"
아버지가 경직되는 것을 그녀는 느꼈다. 그는 그런 말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런 말이 자기 딸의 입에서 나오는 걸 듣고는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이거 한 가지만은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아버지, 저는 바보였고 사악했고 가증스러웠어요. 그리고 끔찍한 형벌을 당했죠. 결단코 저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제 딸을 보호하겠어요. 나는 그 애가 거침없고 솔직하기를 바라요. 그 애가 스스로 주인으로서 독립된 인격체이길 바라고 자유로운 남자처럼 인생을 살면서 저보다 더 나은 삶을 -328쪽

살기를 바라요"-3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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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이] 2010-02-05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머셋 모옴! 이 작가가 e인가 o인가 하는 발음이 잘 안되서 그게 컴플렉스였데요. 그래서 고심 끝에, 그 발음이 나는 단어들을 쓰지 않고 대신 다른 단어를 쓰려고 어휘공부를 엄청 했다고 하네요ㅋㅋ 특이한 사람.

LAYLA 2010-02-05 16:23   좋아요 0 | URL
와- 재미있는 이야기!^^ 책보니 프랑스어도 잘하고 이탈리아어도 잘하고 라틴어도 잘하는거 같은데 그저 부러울 뿐..ㅋㅋ

비로그인 2010-02-05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인생의 베일 얼마전에 읽었어요. 발병 지역에 도착해서 옛궁성의 아름다움에 정화되는 부분도 인상적이더군요..

LAYLA 2010-02-05 23:54   좋아요 0 | URL
재미있게 읽으셨나요
하나하나의 문장이 모두 좋은데 그걸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제가 한심스럽더라구요 !!!
 
<나를 일깨우는 글쓰기>를 읽고 리뷰해주세요.
나를 일깨우는 글쓰기
로제마리 마이어 델 올리보 지음, 박여명 옮김 / 시아출판사 / 2009년 1월
평점 :
품절


제목처럼, 자신을 일깨우는 일상속의 글쓰기 방법을 친절히 안내하고 있는 책이다. 그렇기에 어떤 화려한 글쓰기 기술을 전수해준다거나, 작품을 어떻게 써야하는지 철학적으로 고찰하는 류의 내용은 아니다. 글쓰기 습관이 들지 않은 일반인들이 생활에 치여 이게 제대로 사는건가 고민될때 '그럼 글을 써보세요'하며 손을 잡아 펜을 쥐게 혹은 키보드를 치게 해주는 글쓰기 입문 선생님 같은 책이다.  

어떻게 글을 써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초보자들에게 저자는 여러가지 팁을 알려준다. 나만의 이쁜 노트를 마련할 것, 나에게 맞는 도구 찾기, 배우자와 함께하는 글쓰기 등. 하지만 이런 부분은 거의 나와는 해당없는 부분인데다가 너무 뻔해 보이는 내용이라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고 저자가 제시한 '즐겁게 글을 쓰기 위한 색다른 시도'는 나름 유용했다. 멈추지 않고 글쓰기/낱개의 조각이 모여 작품으로-콜라주/갈팡질팡한 마음을 잡아 주는 글쓰기:두 단락 기술/글로 나누는 대화:다이얼로그 등이 그 예들이다.  

   
 

 갈팡질팡한 마음을 잡아 주는 글쓰기 : 두 단락 기술 

두 단락 기술은 어떤 의문점이나 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점검해 보고 싶을 때, 이것을 택해야 할지 저것을 택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을때 사용하기에 이상적인 방법이다. 두 단락 기술은 어떤 대상에 대한 사실과 감정 혹은 객관적인 관찰과 주관적인 해석을 분리하고 싶을 때도 사용할 수 있다. 과정은 간단하다. 종이의 한가운데에 줄을 그어 두 단락을 구분하자. 주제가 무엇이든지 제목을 찬성/반대 혹은 사실/감정 혹은 관찰/해석으로 적고 그에 따라 글을 쓰면 된다.  

-97p

 

 글쓰기가 익숙치 않고, 글쓰기가 일상이 아닌 이들에게 좋은 가이드라인이 되어 줄 책이다.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을 원하는 사람들-보다 좋은 글을 향한 욕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던지-에겐 부족하다 느껴질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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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더 사랑하는 법 (해외편 + 한국편) - 우리를 특별하게 만드는 일상의 재발견
미란다 줄라이, 해럴 플레처 엮음, 김지은 옮김 / 앨리스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진부한 제목에, 글보다 사진이 더 많고, 간지럽게 착한 문구들이 책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낯선 사람과 손을 잡아본 적이 있나요?' '누군가에게 용기를 주는 일을 해본 적이 있나요?' 알라딘에서 추천 포스팅을 보지 않았더라면 먼저 집어들지 않았을 책임이 분명한데 어제 읽으면서 울었다.  

'나를 더 사랑하는 법'(Learning to love you more)은 동명의 온라인 웹사이트에 올라온 수많은 사람의 포스팅을 엮은 책이다. 그래서 저자는 따로 쓰여있지 않고 엮은이만 표시되어 있다.제목은 '나를 더 사랑하는 법'이지만 내용은 '위로하는 법' 내지는 '상처를 치유하는 법'에 더 가깝다. 우기자면- 그동안 드러낼 수 없었고 인정할 수 없었던 내밀한 상처를 치유함으로서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는 인과관계가  만들어질 수 있겠지만 어쨌든 이 책의 본질은 어떻게 하면 더더더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같은 경박한 제목으론 표현될 수 없다. (나를 사랑하는 법이라니 아 끔찍하다)  

포스팅주제목록만 봐서는 이게 뭐 사랑과 용서에 관련된 것인가 의문이 들 것이다. 사진앨범 편집해오기.누군가의 점이나 주근깨를 연결해 별자리 그리기.전쟁을 겪은 사람과 인터뷰해보기 등등(내가 방금 무작위로 책을 펼쳐서 나온 숙제 목록들이다) 이 사소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숙제의 힘은 실제 책을 펼치고 누군가의 숙제를 확인해 보면 알 수 된다. 단순한 한 점의 포스팅(숙제)이 얼마나 한 영혼을 짙게 보여줄 수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효과적이고 즉각적이고 강렬하게 외로운 영혼들을 위로해 줄 수 있는지 말이다. 삶의 본질은 커녕  단편 쪼가리 하나 보여줄똥 말똥해 보이는 '누군가의 점이나 주근깨를 연결해 별자리 그리기'를 보자. 침대에서 누워 곤히 자고 있는 여자친구의 등에 있는 점 서너개를 볼펜으로 이은 허무하리만치 단순한 10센티의 선.... 그 어수룩한 선을 타고 느껴지는 그 둘만의 친밀함이 어찌나 강렬하던지. 입맞추는 사진도 아니고 결혼하는 사진도 아니고 새벽에 주섬주섬 일어나 아무렇지 않게 여자친구의 등에 선을 긋고 플래시 터트려 사진을 찍는 그 작은 순간, 그들 사이에서만 가능한 그 일상이 감동적이다. 굳이 연인 사이가 아니래도 좋다. 친구의 팔뚝 점을 이어 만든 북두칠성은 어떤가. 그들이 살갗에 선 그으며 낄낄대고 웃었을 그 순간의 반짝임을 생각해보면 내 가슴이 따스하게 차오른다. 위로를 보내기도 한다. '항의 팻말을 들고 시위하기' 숙제의 한 포스팅을 보면 젊은이가 아스팔트 바닥에 그림을 그리며 온 몸으로 무언갈 말하고 있다. '나는 이라크 전 참전 병사입니다. 나는 나의 죄를 알고 있으며, 그러기에 고독합니다.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에게 위로를 보내는 것만으로 내가 위로받는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다.  

하나의 포스팅에 한 영혼의 진심이 담겨있는데 그 어마어마한 포스팅이 수십개나 한꺼번에 다가오니 울지않고 견딜 수 있을리가. 울고싶을 때 봐야할 책이다. 아나운서 번역이라지만 번역도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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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합창단 - 세상을 바꾸는 불만쟁이들의 유쾌한 반란
김이혜연, 곽현지 지음 / 시대의창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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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모스는 6개월마다 한 번씩 자리를 재배치한단다. 이유를 물어보니 '좋은 자리 독점 금지, 서로의 일에 관심을 두기 위해, 그리고 사무실의 청결을 위해서'라고 한다. 생활 속 민주주의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70쪽

헬싱키의 불만이 가장 머릿속에 남는다 "My dream is boring,,,but reality is more exciting" 내 꿈은 지루해 현실이 오히려 더 재미가 있다. 어떨 때는 꿈이 현실보다 제한돼 있다고 느낀다. 현실이 오히려 더 역동적이다.-1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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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합창단>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불만합창단 - 세상을 바꾸는 불만쟁이들의 유쾌한 반란
김이혜연, 곽현지 지음 / 시대의창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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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은 책인데 인문사회서적보다는 시민단체 활동자료집처럼 느껴진다. 책의 내용도 그렇거니와 진보일반의 목소리를 아우르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하나의 시민단체로서, 진보속에서도 더 세부적으로 자신들의 생각을 힘주어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진보에도 각양각색의 진보가 있을진데 희망제작소는 온건한 진보를 외치고 있고 그 온건진보를 현실화한 한 갈래가 바로 이 '불만합창단' 프로젝트 이다. 

      핀란드의 한 예술가 부부가 시작해 전세계로 확산된 '불만합창단'은 말 그대로 일상속의 불만을 노래하는 합창단을 만들고 대중앞에서 공연하는 프로젝트이다. 이 프로젝트가 의미를 가지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 일상 속 사소한 불만들을 드러내고 타인과 교환하는 과정 그 자체가 진보이자 민주주의의 실현이라고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약 150페이지 정도의 분량을 통해 국내에서 불만합창단 프로젝트가 기획되고 현실화 되기 까지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는데 프로젝트 진행자들 조차 처음에는 불만합창단의 의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프로젝트에 대해 가장 많이 돌아오는 반응이 '좋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였기 때문이다. 모여서 노래를 만들고, 가사를 붙이고, 쌓여있던 불만을 터트리고, 재미는 있다. 맺혔던 걸 푸니까 속은 시원하겠다. 근데 그래서 뭐? 소 왓? 이에 고심하던 희망제작소 연구원은 이렇게 답한다. 

   
 

 처음엔 우리도 불만합창단을 꾸려본 경험이 없던 터라 불만합창단 이후에 대해서는 충분히 생각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니 반복되는 질문에 지극히 모범적인 답안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일단 불만 합창단을 만드는 과정 자체가 목표이며, 내 이웃을 만나 서로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고 합의하는 과정을 경험해보는 것,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를 학습하고 주민참여의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었느냐, 그리고 이거으로 충분히 의미있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불만합창 페스티벌을 끝내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불만합창단은 똑 떨어지게 정의내릴 수 없는 프로젝트였다는 생각이 든다. 애초에 정의가 불가능하니 의미도 원하는 대로 붙일 수 없다. 요컨대 불만합창은 그 자체로 말랑말랑한 스펀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불만합창단을 만들어가는 과정 그 자체를 충분히 즐기는 데 의미를 둘 수도 있고, 일종의 새로운 민주주의를 실험해 본다는 것에서 만족을 구할 수도 있고, 또 이를 계기로 해서 뭔가 한 단계 진전된 형태의 '운동'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쪽이든 좋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경직된 사고와 모든 일에 의미를 부여해야만 뭔가 벌어지고 있다는 진중함에 대한 압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니까.

 
   

 

     그녀의 설명은 일견 타당하고 실제 연구원으로서 프로젝트 진행과정에서 얻은 깨달음과 고민이 잘 녹아들어가 있다.....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쏘-왓'을 외치는 나의 마음일 뿐이다. 불만합창단이 시작된 핀란드나 퍼져나간 다른 나라들-덴마크, 미국, 캐나다, 노르웨이 등-정치적 상황이 한국과 비교할 바가 아닌데 '우리는 너무 뭔가 있어보이는 것에만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작고 사소한 것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 아닐까?'하는 마음. 물론 나도 이런거 참 좋아한다. 작고 아기자기하고 일상속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부여하는 것. 그치만 그치만 희망제작소쯤 되는 여력과 능력을 가진 곳에서는 굳이 이런 안전한 프로젝트가 아닌 좀 더 있어보이는 일을 해줘도 좋지 않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모르겠다. 나는 시민단체를 잘 모른다. 조심하고 가려가며 일했기에 이나마 성장할 수 있었던 거다라고 하면 할 말은 없다.  

    책 자체는 앞서 말했듯이 희망제작소 내 프로젝트 기획에서 수행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가 잘 설명되어 있어 시민단체에 관심많은 사람들에겐 유용할 듯 하다. 전반적 내용에 하나 더 첨언하자면, 연구원들 스스로가 잘 느끼고 있듯이 한 사람의 명망에 의지하는 시민단체로서의 단계를 벗어나기 위해 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프로젝트에 필요한 자문을 얻기 위해 찾아간 유럽의 시민단체는 정말 평범한 시민 다섯이 모여서 만든 조촐한 말 그대로 '시민'단체였는데 희망제작소 내에서 불만합창단은 박원순씨의 거의 반강제적 추진(농담쪼이긴 하였다만)으로 진행되었다는게 아이러니 했다. 한국에서 어떻게 불만합창단이 가능했냐고 놀라고 놀랬다던 불만합창단 원창시자가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를 듣는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한국의 힘은 지금까지 바로 이런 비민주.반민주적 추진력이었고 우리는 지금 그것을 '느린' 민주주의로 바꾸려 노력하고 있다. 가는 길에는 여러 경로가 있겠지만 목적지는 한결같이 같으므로 희망제작소도 어느 형태로든 점진적 변화를 필요로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느림보 민주주의가 한국사회 작은 부분에서나마 존재하는 그런 날을 꿈꾼다. 그리고 작은 변화 혹은 그 변화의 시작을 위해 고생하는 연구원 분들께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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