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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인간의 신비를 재발견하다 - 진화론에 가로막힌 과학
제임스 르 파누 지음, 안종희 옮김 / 시그마북스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부제로 '진화론에 가로막힌 과학'을 달고 있는 이 책은 350여 쪽의 볼륨을 통해 지금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진화론이 사실 그닥 믿을만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하나하나 설명하고 있다. 과학에 무지하고 생물은 고등학교 내신 수준에서 기초만 배운 나 같은 사람에게 진화론은 하나의 이론이라기 보다 '진리'의 위치로 자리잡고 있기에 진화론을 '거짓'으로 끌어내리는 이 책은 참 용감해보였다. 책의 앞부분 절반 정도는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며 진화론을 반박한다. 기억나는 것만 예를 들자면, 첫째, 만약 진화론이 진실이라면 생물은 점진적 진화를 거듭해야 하는데 화석이나 지층대를 보면 새로운 생물의 등장이나 멸종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둘째, 침팬치가 더 진화한 형태가 인간이라고 하는데, 직립보행은 인간이 침팬지보다 더 우월한 영장류로 만들어주긴 하지만 침팬지가 직립보행을 하는 과정에서 몸의 균형이 맞지 않아 적의 공격에 무척 취약한 상태가 된다. 적자생존의 원칙에서 봤을 때 침팬치가 직립보행을 시도했다면 약자로서 '자연선택'에 의해 사라졌을 것이다. 셋째, 아무리 자연이 수많은 변화를 선택한다 할지라도 조만간 그 변화는 한 종과 다른 종의 상호교배를 방지하는 '이종 간 생식불능'의 장벽에 부딪힐 것이다. 넷째, 인간은 진화론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존재이다. 그럼, 이런 문제점을 가진 진화론이 어떻게 인간의 탄생을 설명하는 지배적 학설로 인정받게 된 것일까? 저자는 두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첫째,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증거를 사실 그 자체보다 훨씬 더 부풀리는 방식으로 자신의 주장을 제시했다. 둘째, 시기가 완벽했다. '종의 기원은 자연의 역사를 유물론적 입장으로만 설명하려는 많은 과학자들의 희망을 정확하게 표현했다. 그리하여 자연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이 '설계자'의 직접적인 증거라고 추론하는 성가신 신학의 손아귀로부터 자연을 해방시켰던 것이다.(128p)  

책의 후반부에서는 인간이 어떻게???!!! 진화라는 무식하리만치 단순한 과정의 결과로 치부될 수 있는지에 대한 저자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과학'이라는 틀에서 볼 땐 감히 볼 수 없었던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의 진화론에 대한 신랄한 비판들-

   
 

 다윈의 진화론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것이기 때문에 인간을 객관적 대상으로만 볼 수 있으며, 따라서 필연적으로 '영적인 자아를 두뇌의 물리적 구조의 작용으로 축소한다'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인간 경험의 '내부'를 부인하고 인간을 단지 객체로만 보는 것은 인간의 본질을 제거하고 다른 어떤 것, 즉 비인격적인 존재로 바꾸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의 '대상화'는 철학자 로저 스크루턴이 지적하듯이, 유물론적, 전체주의적 사회 제도의 일반적인 특징이다. (227p)

 
   

 진화론에 따르자면 인간은 냉혹한 자연 법칙의 우연한 결과에 지나지 않으며 인간이 가진 도덕심, 이성, 이타심, 신념등의 가치는 모두 생존과 유전자의 전달을 유리하게 만드는 하나의 '특성'으로 간주될 뿐이다.   

   
  높은 도덕성이 개인에게는 약간의 유익을 주거나 전혀 유익을 주지 않는 반면, 도덕 수준의 진보는 분명히 한 종족이 다른 종족을 이기는 데 엄청난 장점을 제공할 것이다. 높은 수준의 애국심, 충성심, 복종심, 용기, 동정심을 갖고 있고, 항상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공동 선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된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종족은 대부분의 다른 종족들을 이길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자연선택이다. -다윈  (218p)  
   

과연 이것이 우리가 믿어야 할 '진화론'인가? 저자는 진화론이 과학적으로 말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화론적 시각이 그 자체로 물질주의적 시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듬을 비판한다. 진화론을 부정한다는 것이 창조론을 인정한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설명하지만 행간을 보자면 저자는 종교의 힘을 전혀 무시할수는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나는 저자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교양의 측면에서 진화론이 가지고 있는 약점을 배울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과학 이론 역시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분석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줬다는 점에서 만족한다.  

* 마지막 페이지에서-

   
 

 물질주의적 과학의 발판에 대한 다윈의 기여만은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얼마나 더 지속될 것인가? 과거를 회고해 볼 때, 명백한 오류를 내포한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이론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설득력이 있었던 것은 확실히 놀라운 것이었다. 이제는 다윈의 차례이다. 다윈의 평판은 아마도 20세기의 연구 결과가 보여준 결정적인 증거를 극복하지 못하고 쇠퇴할 것이다. 조만간 그가 마르크스, 프로이트와 나란히 하늘의 빈의자를 채우게 되면 마침내 3인방은 완전히 종말을 맞을 것이다. (359p)

 
   

 내 참 ㅋㅋ 왜 다윈만 까면 되지 맑스를 까는가???? 아직도 맑스 믿는 사람 많거든여??? ㅋㅋㅋ 종교스멜을 풍겨도 그려려니 넘어갔지만 결국 조금 찌질스멜을 남긴 마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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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HIN 2010-03-19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음, 과학은 언제나 '가설'의 연속선상에 있죠.
뭐든지 '확설'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늘, 바꿔치기 당할 수 밖에 없죠.
'새로운 발견은 새로운 문제점을 낳는다'
그러면서 자꾸 발전해가는 것이니까요. 과학을 바라보는 가장 바람직한 행동은,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한 주제에 대해 다양한 각도의 책들과 지식을 접해야 하는 것이죠.

고마워요, 덕분에 나도 좋은 책 알게 되었습니다.(웃음)

LAYLA 2010-03-20 20:48   좋아요 0 | URL
언제나 과학 관련 서적은 어려워요 ^^;; 하하하

마법천자문 2010-03-20 0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창조잡설이 더이상 안 먹히니까 기독교계에서 새롭게 고안해낸 지적설계잡설로 횡설수설을 늘어놓은 쓰레기가 한 권 더 나왔군요. 이 책에서 진화론의 헛점이랍시고 늘어놓은 근거들은 이미 과학계에서 오래전에 완벽하게 반박돼서 더이상 거론하는 것조차 귀찮은 사안들입니다.

진화론은 현존하는 과학이론들 중에서 과학자들 사이에 그 기본 토대에 대해 가장 완벽하게 합의가 이루어진 이론입니다. 진화의 구체적인 매커니즘과 종합 원리에 대한 부분은 물론 많은 이견이 있고 아직도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는 부분이지만, 진화론의 뼈대를 이루는 기본 원리에 대해서는 단 0.00000000001%의 의심의 여지도 없습니다.

진화론의 기본 원리를 의심하는 것보다 차라리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게 사실인가를 의심하는 게 더 현실적일 겁니다.

LAYLA 2010-03-20 20:50   좋아요 0 | URL
저는 그 쪽에 관심도 없고 제가 진화의 산물인지 창조의 산물인지도 상관없어요. 왜 이렇게 과학에 관해서만큼은 될대로 되라, 너 하고싶은 대로 사세요- 인지 ㅋㅋㅋㅋㅋㅋㅋㅋ 어쨌든 진화론의 헛점에 대한 반박이 있다는 걸 또 새롭게 알게 되었네요 ^^ 감사합니다
 
<리영희프리즘>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리영희 프리즘 - 우리 시대의 교양
고병권.천정환.김동춘.이찬수.오길영.이대근.안수찬.은수미.한윤형.김현진 지음 / 사계절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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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리영희를 한번도 읽어본 적이 없다. 이 책의 누구 말 마따나 리영희는 알지도 못하고 진중권과 홍세화를 통해 의식화된 21세기의 대학생이 바로 나이다. 그의 글은 쪽글 하나 읽어본 적 없으면서 그의 팔순을 기념하는 책부터 읽는다는 것이 웃기긴 하지만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숨겨진 의도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리영희를 모르는 이 시대의 누군가에게 그의 정신을 일러주는 것. 이렇게 그를 모르는 것이 당연한 현실이 영구해지기 전에 정신차리라고 볼때기를 때려주는 역할 말이다. 이 책을 읽고나서 보니 요즘 세대 지식인과 다른 리영희만의 특징은 그는 외로운 시대를 외롭게 살았다는 점이다. 할 말 하는 댓가로 키보드워리어들과 전투를 치뤄내고 무식한 대중들과 맞짱을 떠야 하는 요즘 지식인들과 달리 그는 무엇이 진실이고 정의인지 겨룰 상대도 없던 적막의 시대를 살았다. 요즘 지식인들이 '디-워는 돈내고 봐주는게 한국인의 도리'라고 우기는 개념없는 애들 상대해주기 피곤하긴 하지만 그래도 혼자였던 리영희보단 덜 외롭지 않을까. 먹고 살기는 커녕 목숨 부지하기도 힘들고 반공 이데올로기는 두꺼운 장막처럼 이 사회를 뒤덮고 있었다. 그 숨막히던 시대에 리영희는 배운자의 사명으로 끝없이 공부하고 탐구하는데 그 외로움은 외로움의 경지를 넘어 숭고하다는 감상마저 자아낸다.  

책은 전쟁, 사회과학, 영어공부, 책 읽기, 청년세대 등 다양한 소주제를 리영희와 연결지어 다루고 있다. 한 저자가 한 주제를 맡아 글을 쓰고 있으니 그 다양함이 장점이요 글의 분위기와 농도가 제 각각인 것은 나름의 단점이라 말 할수 있겠다. 개인적으로 무척 감탄하며 읽었던 글은 역시 김동춘 교수의 글이었고 한윤형씨의 글 또한 무척 좋았다. 김현진씨의 글은 이 책에서 유일하게 리영희선생님의 인터뷰가 담긴 글이니 좋을 수 밖에 없었다. 다 고르고 골라 선정된 필진일 테니 리영희를 알지도 못했던 일개 무식한 대학생인 내가 글을 품평한다는 것이 웃기긴 하다만 오길영 교수가 쓴 '영어라는 우상'이라는 글에 대해서는 뭥미?심정이 되었음을 리뷰에서 짚고 넘어가야겠다. 오길영 교수는 온 국민이 영어에 목을 매는 현 한국세태에 대해 '언어를 정보 전달과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격하시켜 혹은 생계를 버는 수단으로 격하시켜 창조적 사유와 분리하는 문제를 가져온다.'(113p)고 비판하며 '500단어 영어'를 이야기한다. 요즘 젊은애들이 외국나가고 영어학원에서 목매는 영어회화란게 결국 500단어 가지고 하는 대화란 말이다. 그 500단어 가지고 무슨 깊이 있는 대화가 되겠냐, 그런 발음 굴리기나 하니 미국대학가서 따라가지 못하고 중도탈락하는 것이다-라는 것이 그의 요지이다. 영어는 의사소통의 수단일 뿐인데 내가 그걸 무슨 학문처럼 파고들었단 자괴감에 슬펐던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이었다. 영어가 단순히 최강대국의 언어라는 위치를 넘어 전세계공용어로 자리잡은 현실에서 우리가 커뮤니케이션 하는 대상은 네이티브 스피커인 경우보다 영어를 제 2외국어로 삼고 있는 사람인 경우가 더 많다. 독일인을 만나도 케냐인을 만나도 중국인을 만나도 영어로 대화하는 세상이다. 미국으로 석박사 따러가는게 아닌 이상 제일 중요한건 제2외국어로 소통하는 상황에서 기본 500단어로 어떻게 자신의 의사를 효율적이고 분명하게 드러내느냐가 영어회화의 핵심인데(고급단어써서 유식하게 보이고 싶은 욕망은 이해한다만 토플에 나오는 고급단어도 일상회화에선 거의 쓰이지 않는다)이걸 가지고서 문제라고 하니 나로선 전혀 공감하지 못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500단어 회화로는 비판적 사고력의 부족을 커버할 수 없고 그래서 발음만 현란한 한국애들이 안되는 거라 이야기 하는데 그렇게 애초에 알맹이가 없는 애는 500단어 회화가 아니가 22000단어 회화로도 커버될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는 또 지젝의 강연을 들었던 예를 들며, '그의 발음은 알아듣기 힘들었고 표현도 어색했지만 그의 당당했던 태도는 좌중을 압도했다' 말하는데 그건 지젝이니까 그런거고 남들에게 내 이야기를 쏙쏙 이해되게 갖다 바쳐야 하는 일반 한국인들로서는 발음도 무척 중요한 부분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나 비지니스 영역에서 유려한 말솜씨의 중요성을 무엇에 빗댈수 있으랴? 리영희는 마지막에 가서야 이 영어교육론과 연결된다.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는 왜 배우는가? 어떻게 영어를 배우고 누구를 위하여 영어를 쓰는가? 리영희에게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는 진실을 추구하려는 지식인으로서 글을 쓰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다. 다양한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은 세계를 조망하는 창을 더 많이 확보한다는 뜻이다. 리영희가 누구보다 날카롭게 당대의 문제를 파악하고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세계를 향해 열린 외국어의 창을 많이 확보했고 그 창을 통해 무엇을 봐야 할지를 명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124p) 말은 참 근사하다만 초반부에 영어를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격하시킨다 분개하더니 뒤에 와선 리영희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잘 사용했다 칭송하니 좀 뭥미?싶었다. 결국 어떤 목적은 숭고하고 어떤 목적은 천박하다는 것인가. 물론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지는 알겠다. 고전을 원서로 읽어라, 더 많은 단어를 배우고(개념을 배우고) 사고의 지평을 넓혀라 그런 이야기겠지.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에 나쁜 뜻이 있었으리라곤 생각치 않는다. 그런데 요즘 현실에선 에덴의 동쪽을 원서로 읽는 것은 사치인 사람들이 많다. 비지니스 영어회화 100개 외워서 면세점 취업해야 하는 아가씨들이 가장 좋은 예일 것이다. 그런 삶의 문제.현실의 문제가 결코 격하될 수 없는 부분이란 것이 나의 생각이기에 영어가 수단으로 사용될 때에도 급이 있다는 식의 오길영 교수의 글은 불편했다. 영어로 인한 사대주의, 식민주의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영어가 필요한 사람만 배우면 된다'고 말한다. 현재 한국의 영어 열풍이 정상의 범주를 넘어서 과도한 사회적 수준의 낭비를 가져오고 있는 것에 나 역시 분명히 동감하는 바이다. 하지만 '배울 사람만 배우면 된다'는 논리는 무척 위험하다고 본다. 에덴의 동쪽을 원서로 읽을 시간적 여유가 되며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교수. 기자 등등)만 영어를 배우겠다는 소리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요즘 시대에 영어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 위키피디아 사전 한번 들춰보려고 해도 영어는 필요하다. 그래. 내가 불편했던건 이런 이야기들이다. 리영희 선생이 영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전혀 아는바가 없다. 이 책은 리영희 선생이 쓴 책이 아니니까.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오교수의 인용에 리영희 선생은 전혀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리영희 선생의 이름을 빌려 자신의 생각을 강하게 펼친것 아닌지 하는 찝찝함이 남았다.  

이 기나긴 불평글을 다 읽고 내려오신 분이라면 분명히 아시겠지만 이 책은 마지막 챕터의 인터뷰 약간을 제외하고는 리영희의 목소리나 글이 직접적으로 담겨있지 않다. 그에게 사상적으로 은혜를 입었다는 이들이 그를 떠올리며 쓴 글이 묶여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 같이 그와의 시대적 갭이 무척 큰 대학생이나 젊은 사람은 그를 본격적으로 읽기 이전에 우리 이전 세대에 그가 가졌던 의미가 무엇인가 잠시 배우고 건너갈 수 있는 징검다리가 되어줄 수 있는 책이다. 간접적으로나마 리영희의 생애나 경력이 토막토막 언급되기에 그에 대한 기본지식도 제공해준다. 나는 이제 리영희의 진짜 글을 읽어보려고 한다. 마지막 챕터의 인터뷰가 주는 감동이 너무 커서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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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6 1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LAYLA 2010-03-16 22:47   좋아요 0 | URL
이런 좋은 댓글은 공개로 달아주시지... :)
발음의 중요성은 외국에 나가기 전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본토 땅 한번 못 밟아본 저로선 발음에 쏟을 시간을 문법이나 독해에 쏟는게 훨씬 효율적이었고 어차피 스무살 넘어서 회화해봐야 소용없다는 시니컬한 소리도 들었지요. 그런데 나가서 아프리카 애들이나 싱가포르애들 영어 알아듣느라 고생하며 발음이나 악센트도 의사소통의 한 부분이며 결코 격하될 수 없는 부분이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나이에 발음 공부하는게 참 스스로 답답하지만 ㅋㅋㅋㅋㅋ 뭐 이 부분도 이 부분이지만 제일 본질적인 부분은 21세기 사회에서 앞으로 영어없이 할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다는 제 생각이겠지요. 영어를 하느냐 안하느냐에 따라 접하는 정보의 양에서 너무 큰 차이가 생겨버리니까요. 그런데 영어를 쓸 일 없는 사람은 배우지 말자-라고 해버리면. 영어를 공부함으로써 생길 수 있는 가능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기분이랄까요. 그런 소리가 정말로 일상생활에 영어가 필요없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압력에 의해 영어를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배우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면 충분히 의미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영어로 배운 지식으로 먹고살고 영어를 발판삼아 잘 나가는 사람들이 해버리면 좀 당황스럽습니다. 나는 영어로 창조적 사유를 할 수 있는데, 그거 하지도 않을거면서 기초회화에 돈 쏟지 말아라-처럼 오만하게 들리기도 하거든요.
뭐 이건 제 좁은 생각들이구요 님의 댓글, 오 교수의 주장 모두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요. 저도 교환학생 나가서 영어로 고생하기 전까진 그렇게 생각했었거든요. 제가 좋아하는 진보쪽 지식인들도 다 영어로 인한 사회적 손실을 줄여야 한다고 목소리 높이고 있고...다정한 댓글 감사합니다 :)
 
리영희 프리즘 - 우리 시대의 교양
고병권.천정환.김동춘.이찬수.오길영.이대근.안수찬.은수미.한윤형.김현진 지음 / 사계절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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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인간의 반대물은 동물도 식물도 무생물도 아니다. 그는 인간의 부정을 노예라고 불렀다. 그리고 자유야말로 인간 존재의 전부라고 했다.-30쪽

그러나, 그 시대가 다시는 오기 힘들지도 모를, 독특하고 위대한 '세미나의 시대' 즉 자발적.공동체적 책 읽기의 시대라는 점은 움직일 수 없다. 소위 '명문대생'부터 '3류 대학생'까지, 남한 땅 동북 끝 강릉에서 서남단의 제주도까지, 대학뿐 아니라 공장.야학.교회.사찰에 다니던 셀 수 없이 많은 청춘들이 '세미나'에서 같이 읽었다. 심지어 재수학원 종합반 동기들의 독서 모임도 있었고, 고교 동문회에서 학습팀을 운영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 중에는 그 시대가 아니라면 만들어지지 않았을 숭고한 영성을 가진 이들도 있었고, 또는 그 시대의 기운이 아니라면 '변혁'과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살(결국 그렇게 된) 소심하고 비루한 영혼을 가진 자들도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가히 '공부의 시대'이자 '책과 혁명'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랬으니 '사회과학의 시대'나 '문학의 시대'는 저절로 따라 이뤄진 것이 아니겠다. 저 '같이 읽기'야말로 80년대식 책 읽기가 지닌 정치성의 핵심이며, '자유'의 다른 이름이다. -52쪽

대학생들에게 자신의 책 읽기를 그르치거나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이 무엇인지를 물어보면 '집중할 수가 없다', '안정적인 시간을 마련할 수가 없다' 외에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답이 많이 돌아온다. 비단 청년.대학생뿐 아니라 대부분의 젊은 직장인에게 해당하는 일이지만, 자발적으로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알아서 수행해야 하는 순간, 그들은 모른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기를 계발하기 위해 뭔가 끝없이 읽고 공부하고 있다. 경쟁에서 져서 루저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그렇게 한다. 경쟁에서 패배할 가능성이 높은 대다수는 스스로 자기 정신의 키를 낮추고 자본의 도구가 되는 종속을 택한다. 그것이 당장 안전해 보이기 때문이지만 이는 결국 자유로부터 도피하여 루저로서의 삶을 완성하는 것이다. 반대로 위너의 자리에 갈 가능성이 있는 소수의 인간들은 자본의 운동 원리에 자기 삶을 합체시킨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지배의 하수인이 되고 비인간으로서 행동한다. 그러나 그들도 스스로에게 부과되는 불안을 결코 극복할 수 없다. 위너 혹은 위너라고 착각하는 삶의 공허는 온갖 거짓된 장식물(경쟁에서 승리했다는 몇 가지 징표들)로 분장된-54쪽

그중 가장 초-물질적인 것이, 학연 따위의 '위너'끼리의 계약(우정으로서의 연대가 아니라 돈과 권력을 위한 가식적인 계약일 뿐인)이나 소망교회 신도증(한국적이며 현대적인 면죄부 발급 시스템)같은 것일 터이다. 신자유주의적인 세속 (반)윤리의 틀, 즉 '루저'대 '위너'의 이분법과 그 명명의 굴레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면 모두가 패배한다. 필요한 일은 경쟁 바깥으로 탈주하는 것이다.-55쪽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다가오지만 질병은 그렇지 않듯이, 전쟁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닥치지만 직접 전쟁에서 죽을 확률은 사람마다 다르다. 미국은 20세기의 거의 모든 전쟁에 관여했지만, 한 세기 동안의 모든 크고 작은 전쟁에서 죽은 미군 병사의 총수는 3년 동안의 한국전쟁 당시 죽은 한국인의 4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전쟁은 장교나 병사 모두에게 죽음의 가능성을 극도로 높이지만, 철통같은 경비를 받는 CP깊숙이 근무하는 대대장급 이상의 지휘관이 목숨을 잃을 가능성은 매일 몇 시간씩 순찰해야 하는 말단 병사들이 죽을 확률의 1%에도 미치지 않는다. 그래서 시장이 돈 많은 사람과 돈 없는 사람 간의 계급적 차별의 원칙이 적나라하게 작동하는 현장이듯이, 전장도 이러한 계급 원칙이 매우적나라하게 관철되는 현장이다. 죽을 확률이 0.1%에도 미치지 않는 군인과 죽을 확률이 10%가 넘는 사람을 같은 군인으로 취급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으며, 이들 모두를 전쟁의 피해자라 말하는 것도 모순이다. 전쟁, 비상계엄 선포로 작전 지역 내의 민간인과 병사들에 대한 권한이 거의 군주의 반열까지 오르는 현장 지휘관의 처지가 보급품을 제대로 -65쪽

공급받지 못해 민간인의 쌀독과 가축에까지 손을 대야 하는 병사들과 같은 정도로 비인간화된 상태에 있다고 말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인간 세상에 전시만큼 불평등한 세상, 권력과 민중의 격차가 극대화되는 시기도 찾아보기 어렵다.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한다는 말은 전쟁으로 사람이 죽고 다치는 일이 일어나기 때문만이 아니라, 전쟁은 인간을 총체적으로 타락시키고 부패를 극대화하고 사회의 안정된 질서와 규범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기 때문이다. -66쪽

1990년대 이후 국제사회에서 한반도 문제의 가장 중요한 의제로 등장한 북한의 핵개발 관련 의제는 한반도에서 여전히 전쟁이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실례다. 또 2006년 용산의 미군기지 평택 이전을 둘러싸고 한국인들 내부에서 벌어진 사실상의 전쟁 상태는 외적인 전쟁 상태가 내부에서 진행된 것일 따름이었다. 각종 시민단체 집회에 나타나서 힘을 행사해 판을 깨는 열혈 노인들의 행태나, 신문의 하단을 장식하는 우익단체 광고에서 나타나는 험악하고 전투적인 언사는 아직도 한국 사회에 충만 들지 않았지 사실상 적을 없애야 내가 산다는 논리, 여차하면 동족을 살해할 수 있는 전쟁이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실례다.-73쪽

지구적인 무한 경쟁은 국가라는 보호막 속에 안주하던 기업을 완전경쟁에 노출시켰으며, 최소한의 양심과 공정거래의 규범을 벗어던지고서라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논리를 정착시켰다. 따라서 전쟁터와 마찬가지로 경쟁의 원리, 약육강식의 원리, 탐욕의 원리가 작동하는 신자유주의하의 무한 경쟁 시장에서도 법과 규범은 사치가 된다. -75쪽

리영희는 사르트르를 인용해 자유의 의미를 절절하게 전했다. 사르트르는 독일 정렴하에 있을 때처럼 자유로웠던 예가 없었다고했다. 일체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매일 정면으로 모욕을 당할 때 올바른 사고를 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자유라고 했다. 막다른 골목에 쫓겨 있었던 까닭에 거동 하나하나가 앙가주망의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고 했다. 억압자에 저항함으로써 자유를 느꼈던 그에게는 저항만이 진정한 민주주의였다. -144쪽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문화 영역은 소위 오타쿠라고 불리는 이들이 향유하는 서브컬쳐의 영역이다. 이 영역은 논리 필연적인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의 젊은이들의 코드가 된 잉여 정서와 관련이 있다. 잉여라는 말은 이 시대 젊은이들이 자조적으로 자신을 칭하는 말이 되었는데, 의미심장하다. 이전 시대의 루저 정서는 주로 학벌 질서에 편입되지 못한 이들의, 혹은 반발하는 이들의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잉여 정서는 학벌 사회에 순응한 이들의 것이다. 부모님들이 시키는 대로 꿈도 갖지 못하고 하루하루 성적을 올리는 것을 목표로 살았고, 그 결과 대학에 입학하고 졸업했지만 어느 곳에도 취업할 전망이 없는 이들의 정서인 것이다. 오늘날의 세대는 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세대가 되었다. 그런 이들이 공유하는 잉여정서는 자기 학대와 정치적 각성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 문화적 감수성이다.-203쪽

지금의 청년들이 살고 있는 후기 자본주의 시대는 모든 노동자들에게 자본가의 삶을 강요하는 사회다. 우리 사회에 그러한 조류는 IMF라는 특정한 역사적 사건 이후에 닥쳐왔다. IMF를 '극복'해 내는 동안 우리는 자본가의 사유를 내면화하게 되었다. IMF이전의 한국 사회는 기업들은 빚을 졌지만 개인들은 저축을 하는 사회였다. IMF이후의 한국 사회는 기업들은 돈을 쌓아두지만 개인들은 빚을 내어 돈을 굴리는 사회로 변모했다. 개인은 안정된 직장에서 받는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알콩달콩 삶을 꾸리는 소소한 행복의 권리를 박탈당했고, 기업가적 마인드를 장착하고 담대한 마음올 투자하여 인생 역전을 노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205쪽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에게 자신의 삶을 객관화할 시간과 여유를 주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런 곳에서 반성적 고찰만큼 치열한 저항의 방식이 있을까? 우상은 어느 곳에나 있다. 그러므로 당신은 어디서든 저항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이성은 과거 학생운동권들에게 요구되었던 것과 같은 윤리 의식은 아닐 것이다. 자신을 특권을 가진 주체로 인식하고 사회에 대한 책임을 지려고 했던 과거의 대학생들과는 달리, 대학 진학률 86%시대의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파악하는 이성이다. 그리고 우상과 이성이 구별되지 않는 시대에 필요한 것은 섣부른 근본주의나 간편한 냉소주의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객관화하려는 성찰 그 자체다. 이전의 세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는 그런 성찰 속에서만이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208쪽

...지금 우리사회 분위기가 도로 보수적인 분위기로 역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아주 당연한 거예요. '반동'이지요. 옛날 옛적부터 잘 먹고 잘산 놈들이 제 권리를 잠시 빼앗겼는데 도로 찾으려고 일어나는 게, 반동이 일어나는 게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것에 대해 항거를 시작하는 겁니다. 그렇게 깨우쳐 나가면서 '아, 이것이 다만 우리들만의 생존 문제가 아니구나'하고, 모두의 문제라는 것을 인식할 때 이러한 사상에 따라서 일어나는 운동이 바로 변혁이라는 겁니다. 너무나 커다란 것들만이 변혁이 아니에요 -221쪽

한 명의 천재가 1만 명을 먹여 살리다니, 그거야말로 자본가의 극단적인 자기정당화의 이론화요. ...삼성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논리도 비슷하지. 외화를 획득해 오지 않느냐. 그러니까 삼성 재벌에게 좋은 것이 모두에게 좋다는 이야기인데, 집단의 각기 다른 이해관계를 전혀 무시해 버리는 발언이야. 아주 위험한 사상이에요. 좀 비약해서 말하자면, 내 회사에 좋은 건 1만 명에게 좋다, 그렇다면 반대로 내 회사의 이익을 위해서는 무엇을 희생해도 좋다, 이런 생각으로 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가치판단을 지배잗르에게만 맡겨서는 안 되는 겁니다. 한 명의 천재가 1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것도,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가치판단이죠. 지배자들에게만 가치판단을 맡길 때 길들여진 인간이 만들어져 버리는 겁니다. 비인간화, 소외된 인간, 인간 소외 현상이 일어나는 거지요. 그런데 오히려 요즈음에는 사람들이 그 무감각, 무의식을 자처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어요. 편하게 살기 위해 자발적 동조, 굴종을 하는 거지요. 그런데 이것이 돼지가 인간에 의해 길들여지는 것과 다른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224쪽

생활은 어떻게 꾸려 나가냐고 물으시길래 그냥 돈 안 드는 짓이 그것밖에 없어서 숨만 쉬고 있다 했더니 웃으신다.

네가 실업자인 건 자유의 대가니까 혜택이야. 야생마 같은 아이잖니?

스스로 항상 잉여인간에 청년 백수라고만 생각했는데 야생마가 되니 어쩐지 신이 난다. 똑같은 청년 실업에 잉여인간이라는 기분으로 괴로워할 젊은이들에게 뭔가 충고해 주실 말씀이 없냐고 여쭙자 계속 사양하시다가, 괴테 이야기를 꺼내셨다.

괴테도 말이야, 그런 요청을 받고 계속 거절을 했다지. 하지만 계속 부탁을 받으니까 거절하고 또 거절하다가 이렇게 말했지. 그래 알겠다. 충고를 하겠다. 단, 내 충고를 따르지 않겠다는 조건하에서만 충고를 하겠다. 나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Simple life, high thinking'즉 생활은 간소히 하지만 생각은 포게 가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군

하지만 부자되세요의 주문이 여전한데 생활을 간소히 하는 것이 가능할까-234쪽

자기 생활의 주인이 되어야지. 물질은 중요하지 않아. 설령 모자 500개, 넥타이 300개를 가진다고 해서 그 물질의 주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나?오히려 물질이 주인이 되고, 물질의 예속물이 되는 거야. 정신의 혁명이 필요해. 자기의식의 전환을 이루어야지. 물질을 최우선으로 하는 약육강식의 자본주의는 착취와 강압과 사치와 타락이라는 부작용을 낳게 되는데, 이 타락이 중대한 병이야. 이 타락을 스스로 거부하는 만큼 인간적.윤리적으로 성장하고 정신적 기품이 높아지게 되지. 악덕한 제도, 정치.사상에 굴종하지 않는다는 저항적 인간을 목표로 해야겠지. 풍요 속에 매몰되지 말고, 시시한 물건 따위에 만족하지 말고 스스로의 사상과 행동과 결정의 주인이 되는 거야. 자기를 상실하고 의식 없이 생활하면 물질의 노예가 되어 버리고 말지. 물론 자발적으로 이런 노예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많아. 자본주의에서는 그저 소비에서 낙을 찾으려고 하는 풍습이 많으니까. 이런 기준에서 본다면 나의 인생은 그저 낙오자일 수밖에. 계속 낙오자의 길로만 걸어왔고.-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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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5 2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16 04: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16 08: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야나이 다다시, 유니클로 이야기
가와시마 고타로 지음, 양영철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유니클로가 한국에 건너온지 꽤 되었고 영국에서도 샵을 보기도 했지만 뭔가 촌스럽단 이미지 때문에 엄청난 기업이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낚시성 다분한 '2009년 손정의를 제치고 일본 부자 1위'란 문구에 혹하고 말았다. 금융계나 전자.전기 등 첨단 업종이 아닌, 일반적으로 사양산업으로 이야기 되는 의류업으로 일본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니 뭐가 있는건가. 싶어진 것이다.  

성공의 비결을 의류업이란 틀 안에서 보자면 유니클로는 기존 SPA(의류 기획과 제작에서 유통까지 한 기업이 총괄함으로써 상품단가를 낮추고 회전기간은 줄이는 방식)의류 브랜드들과 달리 상품의 퀄리티를 높였다는 점에서 특화된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SPA브랜드인 h&m, ZARA, topshop등의 경우 퀄리티는 떨어지지만 낮은 가격과 화려한 디자인, 1주일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상품회전 기간으로 고객을 끌여들였는데 이런 스타일의 브랜드는 아시아를 거점으로 해서는 성장하기 힘들다는 것을 옷 좀 사 본 여성 소비자라면 알 것이다. 아시아 고객들의 경우 첫째로 서구인과 달리 파티문화가 존재하지 않기에 드레스 류라던지 화려한 의상에 대한 수요 자체가 서구에 비해 적다. 둘째, 같은 아이템을 구매하더라도 동양인은 의상의 퀄리티에 큰 관심을 쏟는다. 옷이 단순히 개성을 표현하는 수단이 아닌 나의 신분과 지위를 드러내는 도구로서 기능하는 동양사회의 특수성이 고객의 물품 구매 행위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이런 큰 차이점을 베이스로 깔고 있을 때 아시아에서 탄생할 수 있는 SPA 패션 브랜드의 가장 적합한 형태가 바로 유니클로였다. 베이직하고 심플한 아이템들, 하지만 특수소재를 사용하는 등 상품의 퀄리티는 우수하게 유지시켰고 대량생산으로 가격은 다운시킨 지극히 합리적인 브랜드.

두번째 성공의 비결은 이 책의 제목에도 들어가 있는 회사의 주인, 야나이 다다시라는 사람이다. 원래 지방에서 작은 옷 소매상을 하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사업에 뛰어든 야나이 다다시는 사업초장부터 원래 일하던 사람을 다 짜르고 자기가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독한 모습을 보이며 사업을 키워나간다. 이 책은 야나이 다다시의 리더쉽이 유니클로를 성장시킨 가장 큰 힘이었다고 말한다. 소매의 바닥에서부터 시작해 SPA방식으로 전환하며 전세계적 규모의 기업을 일구어낸 야나이 다다시의 능력에 이의를 제기한다는 것은 물론 힘든 일이다. 하지만 이제 60을 넘긴 그에게 닥친 문제는 바로 후계자가 없다는 것. 일 하는 애들 맘에 안 든다고 다 잘라버리니 회사를 맡길만한 사람이 남아 있을리가 없다. 일인에게 기대는 경영방식의 한계가 가장 잘 드러나는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성장 동력이었음과 동시에 앞으로의 지속적 성장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 되어버린 야나이 다다시. 그가 앞으로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갈지는 앞으로 두고 볼 일이다. 25-35세의 싹수좋은 사원들 200명을 뽑아 특별 훈련을 시킨다는데 유니클로의 미래는 과연........? 

이 책은 아시아 베이스 SPA브랜드로서 거의 유일하게 전세계로 발을 넓히는 패션브랜드의 성장기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무척 흥미롭다. 저가와 기능성의류의 조합은 장기불황의 늪에 허덕이던 일본에서만 탄생할 수 있었던 조합인데 이것이 전세계로 시장을 확장시켜 나가는 과정을 지켜보게 되었으니 과연 그 결말이 어떨지! 야나이 다다시의 목표는 갭을 뛰어넘는 것이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야나이 다다시 리더십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심도있는 분석은 부족하다는 점. 연대기별로 그가 내린 선택, 그의 인터뷰 인용 정도가 전부이기에 야나이 다다시라는 경영인에 대해 깊이 있게 알기에는 부족하다. 유니클로란 브랜드 성장기를 개략적으로 보기엔 백점만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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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 우리 시에 비친 현대 철학의 풍경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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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그리는 민주주의를 위해 주권을 파괴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주권이란 글자 그대로 주인의 권리라는 의미입니다. 선거를 통해서 우리는 자신의 정치적 권력을 하나 혹은 다수의 대표자들에게 양도합니다. 너무나 잘 길들여져서 그런지 우리는 자신의 정치권력을 남에게 양도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지를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만약 정치적 권력을 양도할 수 있다고 여긴다면, 엄격히 말하면 우리는 대표자의 임기 동안 어떠한 정치적 행위도 해서는 안됩니다. 주어직 기간 동안 우리는 그 대표자를 주인으로 받아들여야만 하기 때문이지요. 결국 기존의 정치권력은 말도 되지 않는 논리를 민주주의의 핵심이라도 되는듯이 위리 내면에 각인시켜 왔던 셈입니다. 하지만 '사랑의 연대', 즉 '다중'을 통해 우리는 정치권력을 어느 때라도 결코 양도할 수 없다는 것과, 아울러 모든 주권의 노리가 사실은 억압의 논리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38쪽

자본주의적 욕망이 역사적인 구성의 결과물이라는 것은, 그러한 욕망이 결국 특정힌 시대의 훈육의 결과이지 인간의 선천적 본성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말해줍니다.-135쪽

가라타니 고진 <트랜스크리틱>
"타인을 수단만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는 칸트의 가르침이 구체화 될 수 있는 것이 마르크스가 꿈꾸었던 코뮤니즘이라고 논증하는 부분이 이 책의 압권이다. -215쪽

육체의 모든 성적 드러냄은 사랑이 아닌 한에서는 엄밀한 의미의 자위행위이다. 한 입장 내부에만 관계하기 때문이다. -<조건들>, 바디우-3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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