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구판절판


스무 살의 여자 역시, 남자가 수신할 수 없는 전파와 같은 것임을 안 것도 꽤나 오랜 세월이 지나서였다. 실은 그녀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젊음은 결국 단파 라디오와 같은 것임을, 좋은 족이든 나쁜 쪽이든 모든 연애의 90%는 이해가 아닌 오해란 사실을...무렾의 우리는 알지 못했다. 어쨌거나 우리는 스무 살이었고, 좋든 싫든 연애의 대부분을 운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나이였다.-14쪽

여자에게 말이야...무정보다 더 비참한 게 뭔지 아니? 동정이야. 동정하는 거라구. -121쪽

요한은 말했었다. 세계라는 건 말이야, 결국 개인의 경험치야. 평생을 지하에서 근무한 인간에겐 지하가 곧 세계의 전부가 되는 거지. 그러니까 산다는 게 이런 거라는 둥, 다들 이렇게 살잖아... 그 따위 소릴 해선 안 되는 거라구. 너의 세계는 고작 너라는 인간의 경험일 뿐이야. 아무도 너처럼 살지 ㅇ낳고, 누구도 똑같이 살 순 없어. 그딴 소릴 지껄이는 순간부터 인생은 맛이 가는 거라구. -164쪽

아마도 그때가 마지막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야. 그 후 한번도 엄마가 드물게 예쁜 얼굴이란 생각을 한 적이 없어. 빛이 사라졌거든. 영감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다는 걸 직감으로 눈치 챈 거야. 이해가 가? 전구가 꺼지듯 어느 날 갑자기 빛이 사라져버린 거야. 유리처럼 굳은 외형은 그대로지만 도리어 무서운 얼굴이란 생각이 들 때가 더 많았어. 그때 알았지, 인간의 영혼은 저 필라멘트와 같다는 사실을. 어떤 미인도 말이야...그게 꺼지면 끝장이야. 누구에게라도 사랑을 받는 인간과 못 받는 인간의 차이는 빛과 어둠이 차이만큼이나 커.

빛을 발하는 인간은 언제나 아름다워. 빛이 강해질수록 유리의 곡선도 전구의 형태도 그 빛에 묻혀버리지. 실은 대부부느이 여자들...그러니까 그저 그렇다는 느낌이거나...좀 아닌데 싶은 여자들...아니 여자든 남자든 그런 대부분의 인간들은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전구와 같은 거야. 전기만 들어오면 누구라도 빛을 발하지, 그건 빛을 잃은 어떤 전구보다도 아름답고 눈부신 거야. 그게 사랑이지. 인간은 누구나 하나의 극을 가진 전선과 같은 거야. 만나 서로의 영혼에 불을 밝히는 거지. -184쪽

누구나 사랑을 원하면서도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까닭은, 서루가 서루의 불 꺼진 모습만을 보고 있기 때문이야. 그래서 무시하는 거야. 불을 밝혔을 때의 서로를...또 서로를 밝히는 것이 서로서로임을 모르기 때문이지. 가수니, 배우니 하는 여자들이 아름다운 건 실은 외모 때문이 아니야.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해 주기 때문이지. 너무 많은 전기가 들어오고, 때문에 터무니없이 밝은 빛을 발하게 되는 거야.-184쪽

뭐야 바보잖아 싶겠지만 그게 인간이야. 현실적으로 살고 있다 다들 생각하지만, 실은 관념 속에서 평생을 살 뿐이지. 현실은 절대 그렇지가 않아, 라는 말은 나는 그 외의 것을 상상할 수 없어-라는 말과 같은 것이야. 현실은 늘 당대의 상상력이었어. 지구를 중심으로 해가 돈다 거품을 몰던 인간도, 아내의 사타구니에 무쇄 팬티를 채우고 십자군 원정을 떠나던 인간도, 결국 아들을 낳지 못했다며 스스로 나무에 목을 맨 인간도...모두가 당대의 <현실은 절대 그렇지 않아>를 벗어나지 못했던 거야. 옛날 사람들은 대체 왜 그랬을까.다들 낄낄거리지만, 그리고 돌아서서 대학을 못갈 바엔 죽는게 나아! 다들 괴로워하는 거지. 돈이 최고야 무쇠 같은 신앙으로 무장하고, 예쁘면 그만이지 더 이상 뭐가 있어-당대의 상상력에 매몰되기 마련인 거야. 맞아, 현실은 절대 그렇지 않아. 지금의 인간은 그 외의 것을 상상하지 못하니까...하지만 그 <현실>은 언젠가 결국 아무도 입지 않는 시시한 청바지와 같은 것으로 변하게 될 거야. -226쪽

깜박이며 불을 밝히고 있던 <희망>이 생각난다. 그, 희망을 흔들며 지나가던 바람처럼 실은 그런 식으로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인생의 어떤 순간에도 인간은 머물 수 없음을, 하여 인생은 흐르는 강과 같다는 사실을 무렾의 우리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겨울이 끝나면 봄이 오고, 나는 막연히 우리의 청춘도 딸기밭과 같은 곳으로 달려가고 있다 생각했었다.-236쪽

저는 당신에게서 도망친 것이 아니라, 매일 아침 당신을 보고 싶어하는 나라는 여자에게서 도망을 친 것입니다.어느 누구도 아닌 스스로에게 결국 무릎을 끓은 것입니다.-2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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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0-08-02 0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이 책이 재미있어요???

LAYLA 2010-08-02 05:10   좋아요 0 | URL
재미.있어요. 다만 결론부분에서 좀 어그러진단 느낌이 있지만..^^ 80년대 분위기가 느껴져서 좋았어요.
 
음주가무연구소
니노미야 토모코 글, 고현진 옮김 / 애니북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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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너무나 잘 나가는 작가 니노미야 토모코. 취직 따위 뭐가 중요해! 실연 따위 뭐가 우울해! 술만 있으면 만사 오케이!라고 외치는 이 책은 그녀의 병맛어린 음주가무연구의 나날을 보여주고 있단 점에서도 흥미롭지만 소위 대박 작가로 터지기 전 그녀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단 점에서 2배로 재미있다. 그녀가 겨우 스물 여섯, 스물 일곱, 그러니가 돈 잘버는 아내의 백수 남편으로 유명한 그 남자와 결혼도 하기 전의 이야기이다. 언젠가 대박을 터트릴거야 라던지, 나도 이제 드라마화를 좀 의식하려구-라고 말하는 스물 여섯 니노미야 토모코는 어찌나 귀여운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마감 따위 뭐 어때~라고 말하며 당장 술마시러 뛰쳐나가고, 아침에 일어나면 냉장고에 맥주밖에 없어 맥주를 또 마시고, 겨우 자리에 앉으면 일이 되질 않아 또 술을 마시는 그녀!!! 단순히 젊은 여자의 술일기라 생각하면 한편의 코믹만화에 그치고 말겠지만 이제 마흔을 넘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그녀의 삶은 열심히 산다고 되는게 아니라 즐겁게 살아야 되는거란 걸 몸소 증명하고 있기에 이 만화는 왠지 좀 감동적이다. 여..역시 수...술!!!! 취한듯이 인생을 즐겨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기특한 만화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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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0-07-22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이건 작가가 성공했으니 모든걸 과거를 용서받는 이야기같은데요 ㅋㅋㅋ
성공하든 말든~ 인생은 즐기면서 살아야되욧!

LAYLA 2010-07-23 02:29   좋아요 0 | URL
이런 만화를 그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싶었는데 만화랑 똑같은 사람이더라구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재미있었어요 그리고 네 맞아요 인생은 즐기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인거 같아요 :)

2010-07-25 1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핀란드 디자인 산책 디자인 산책 시리즈 1
안애경 지음 / 나무수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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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건축이라고 하면 가릴것 없이 다 이쁘지만 그렇다 해도 정작 눈물을 쏟게 만든 건축이 프랑스의 것도 아니고 이탈리아의 것도 아니고 덴마크에서 스웨덴으로 이어지는 고속도로변에 점점이 선 물류창고와 발전소들이었단 사실은 지금 생각해도 참 의외이다. 어둠이 내리고,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적막속에 조용히 빛을 발하는 그 건물들은 실용적인 목적을 가졌단 게 무색하게 너무도 아름다워서 나는 넋을 잃고 말았다.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조명은 한치의 흠도 없이 균일한 빛을 내뿜고 있었고 건물들은 내가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세련되고 창의적이며 동시에 실용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처음엔 그렇게 그저 아름다워서 넋을 잃었고 그 다음엔 저렇게 아무도 없는 공터에서까지 최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그들의 미적 탐욕에 약간 섬칫해져서 멍해졌다. 겸손한 그들이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아름다움에의 추구가 아닐까.  

이 책은 디자인 강국으로 유명한 북유럽 국가들 중 핀란드의 디자인을 이야기하고 있다. 의류, 텍스타일, 교회, 사우나, 공예품, 공공디자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며 핀란드 디자인의 자연과 함께하는 소박함을 예찬한다. 단순히 디자인만 나열한 것이 아니라 공공디자인이 결정되는 과정이나 핀란드 사람들이 사는 이야기도 간간히 곁들여 핀란드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창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아쉬웠던 점은, 바로 그 디자인을 탄생시킨 문화적 역사적 배경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왜 그들은 자연을 우선시하게 되었고 왜 그들은 아름다움에 그토록 집착하게 되었나 하는 이야기는 없다. 저자는 핀란드의 아름다움이 집착의 결과가 아닌 자연스러움이라고 말하지만 전세계적 수준에서 엄청난 쓰레기를 배출해내고 있는 저가 가구 브랜드 이케아(스웨덴)를 생각해보면 단순히 소박함?이란 말로 모든 게 설명될 수 있을가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워낙에 척박했던 곳이라 음식문화마저 초라한 곳인데 그런 곳에 어울리지 않게 나타나는 미에 대한 수준 높은 안목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다양한 독자층을 만족시키기 위해 부러 제외한 것인지 모르나 조금 더 깊숙히 들어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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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enow 2010-07-23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이킹 민족은 원래 미적 감각이 탁월했다(?)고 우기면 할 말 없지만,
왜 그런가 깊이있게 물어보지 않았다면 아쉬울 수 밖에요.
문화 현상에 대한 설명이라는게 어쩌면 장님 코끼리 만지기랑 비슷하긴 하지만요. ^^;
이케아 때문에 쓰레기 방출이 늘어날 수 있다는건 오늘 새롭게 인식하게 된 사실.
덕분에 저가쇼핑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LAYLA 2010-07-24 03:09   좋아요 0 | URL
전 만원짜리 의자나 팔만원짜리 책장 오래오래 쓰면서 자연보호에 앞장 설 자신이 있는데 한국엔 왜 이케아가 들어온다 소문만 있고 정작 들어오지 않는걸까요!!!! -한칸방 자취녀 ^.^

herenow 2010-07-24 13:10   좋아요 0 | URL
엥? 이케아 직영점은 아직 없는 것 같지만, 여기저기서 많이 팔던데요?
온라인 매장은 꽤 많구요, 오프라인에서도 점점 많이 보이던걸요 ^^;
(심지어 예스24에서도 판매중 ㅠ.ㅠ)
이거 알고 자취녀 지름신 강림하심 안되는데...

LAYLA 2010-07-24 16:39   좋아요 0 | URL
얼른 직영점이 들어왔음 좋겠어요. 제가 15000원 주고 샀던 카펫이 75000원에 팔리고 있을 때 도저히 살 수가 없더라구요 ㅠㅡㅠ 물론 직영점이라도 한국이면 좀 더 비싸겠지만 75000원씩이나 받진 않겠죠-,.- ㅋㅋㅋㅋ

2010-07-26 1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스눕 - 상대를 꿰뚫어보는 힘
샘 고슬링 지음, 김선아 옮김, 황상민 감수 / 한국경제신문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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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나도 너를 스누핑 해보겠다! 이러면서 까불까불거리는데 사실 누군가를 스누핑한다는 것, 즉 한 사람의 스누퍼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이 책만 하더라도 초반에 스누핑의 핵심을 이야기하고 나선 내내 어떻게 잘못된 스누핑을 피해야 하는지만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고정관념을 피하라, 첫인상을 조심하라 등등. 근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지...

개인적으로 이 책은 누군가를 꿰뚫어보는 용도보단 스스로 인지하고 있지 못하고 있던. 혹은 스스로가 인정하고 싶지 않아 일부러 눈감고 있던 본인의 성격을 탐구하여보는 지침으로서 유용할듯 싶다.

내 방 벽에 걸린 (세계지도가 아닌) 유럽지도는 지난 교환학생 경험을 일상의 에너지로 이용하고 싶은 무의식의 발현일 것이고 벽에 붙여놓은 밀린 전기세 포스트잇은 게으름의 증거일테고 불평등의 경제학과 함께 책장에 꽃혀있는 소녀표 순정만화는 계급과 영원한 사랑을 동시에 믿고 싶단 욕심을 드러내고 있으며 대여섯권의 라이센스 패션지는 매달 잡지를 사진 않아도 컬렉션은 꼭 챙겨보고 있단걸 그러니까 아직도 가슴 속 깊숙한 곳에선 패션을 놓지 못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냉장고의 묵은지 3종세트와 먼지쌓인 쿠쿠밥솥은 다정한 살뜰한 음식 솜씨를 가진 다정한 엄마가 있긴 하나 제대로 밥 챙겨먹는 일이 없는 건어물 자취녀의 일상을 드러낼 테고... 

나에게 가장 유용했던 분석자료는 유럽지도.와 전기세 포스트잇이었다. 정말 아무런 생각 없이 붙여놓았던 지도인데 나만을 위한 공간에 붙여놓은 것이니-침대 바로 옆-스스로 인지하고 있지 못했지만 나름 지도를 보며 마음의 위안을 얻고 있었구나 하는 깨달음. 전기세 포스트잇은 스스로 인정하기 싫지만 게으르다는 증거. 어찌하리요.   

또 한가지 유용했던 부분은 자료의 종류에 따라 드러내는 성격의 특성이 다르다는 점인데 예를 들어 개인홈페이지는 개방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반면 페이스북은 외향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자료로서 기능한다는 점.

아쉬운 점이라면, 학자가 쓴 책임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방법론이 결여되어 있고 너무 흥미위주로 흘러가서 진정 아무런 단서도 없는 스누핑이란게 말로만 가능하지 실제로 가능할지에 의문스럽다는 점. 대중서-라고 생각하고 보면 큰 실망이 없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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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 2010-07-16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링크도 그랬어요. 몇초 안에 뭔가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 비법, 이런 것보다 이런 저런 실수를 하는구나, 이렇게 착각을 하는구나 정도를 알 수 있었거든요.

전기세 말예요. 세상엔 연체료를 내는 사람과 아닌 사람이 있다는데 어쩌면 LAYLA님은 세상이 정해놓은 가치에 저항하는걸 수도 있겠단 터무니없는 스누핑을 해봤어요. (스누핑이란 말 이럴 때 쓰는거 맞나요?) 그런 면에서 전 체제순응적인 사람이라 전기세를 잘도 내요. 세상없이 게으른데 말이죠.

LAYLA 2010-07-16 16:57   좋아요 0 | URL
아치님 덕택에 오늘밤은 어둠이 무서워요 내내 무한반복하고 있어요 비가 오니까 더 근사하네요 진짜 벌레잡아 달라 그러고 저기 뭐가 있는거 같으니까 오늘 같이 자달라고 하는 남자라면 찌질해서 정 떨어질거에요 근데 노래는 너무 귀여운거에요!!!!!!!!ㅠㅠㅠㅠㅠㅠㅠ

herenow 2010-07-16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역시 LAYLA님 ^ ^*

LAYLA 2010-07-16 16:57   좋아요 0 | URL
여..역시 전기세가 밀리는 건어물녀란 의미인가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10-07-22 0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22 0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원수들, 사랑 이야기 열린책들 세계문학 14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지음, 김진준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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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프라 푸아가 마치 성물이라도 만지듯이 경건하게 빵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한 입 물어뜯었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 속에 죄의식이 깃들어 있었다. 그토록 많은 독실한 유대인들이 굶주림으로 죽어 갔는데 나 혼자 이렇게 하느님이 주신 음식을 맛있게 먹어도 되는 것일까?           -60p 

...고맙게도 내 고통의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여전히 한창이지. 우리가 잠불에서 고생할 때도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었어. 당신은 못 믿겠지만, 헤르만, 난 이런 게 오히려 편하기도 해. 우리가 겪은 일들을 잊고 싶지 않거든. 방 안이 따뜻하면 유럽에 있는 유대인들을 배신한 기분이 든단 말이야.            -260p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사랑하기도 힘들다. 남자는 미국으로 건너와 자유의 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상황에서 나치가 쳐들어온다면 어떻게 도망칠까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기 전에는 아내에게 다정해질 수 없다. 불륜으로 만난 유부녀이지만 이 여자가 지금 이렇게 살아있다는 건 홀로코스트에서 이놈 저놈에게 몸을 주었기 때문이라는 더러운 의심은 사라지지 않고 머리 한구석에 박혀있고 죽은 줄 알았는데 멀쩡히 살아서 돌아온 옛아내와는 깨끗이 관계를 정리하기도 힘들다. 그 힘들었던 시절을 같이 견딘 사람, 나의 바닥을 보았던 그 사람을 어떻게 지울 수 있을까. 그래서 그의 연애사는 유대율법과 미국법을 모두 거스르며 세 여자와 불안한 줄타기를 한다.

저 유럽에서 보았던 시체더미들에 대한 죄책감, 같은 고통을 견뎌낸 이들에 대한 연민과 한편으론 그렇게 살아남은 자들에 대한 경멸감, 짧은 인생동안 너무 많은 걸 압축적으로 경험해버린 뒤의 무기력함, 스탈린과 히틀러를 만들어 낸 신의 창조성에 대한 냉소, 그리고 그렇게 악착같이 지켜낸 삶인데 이젠 사랑하며 즐거워지고 싶다는 단 하나의 욕망. 이 소설의 제목은 유대인의 고단한 인생역경과 거미줄처럼 엉킨 무수한 모순의 감정들 속에서의 애증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는 사랑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냥 사랑만 하기엔 이들의 삶은 너무 복잡하고 깊고 슬프다.  

너무 잘나서 관심가지고 싶지 않았던 소수자, 유대인. 그들의 구비구비 한 많은 역사를 '세 여자와 결혼한 남자'라는 희극에나 어울릴 법한 캐릭터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하는 작가의 능력이 경이롭다. 그는 노벨문학상 수상자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유대언어인 이디시어로 수상소감을 말했던 작가인데 책을 읽고나면 괜히 노벨상 수상자가 아니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는 괜히 유대인이 아닌 것이다. 돈 많고 이기적이고 철저하게 장사꾼인 유대인들의 얼굴 뒤로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마저 죄스러운 마음이 숨어있을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세계명작, 인류의 유산으로 꼽기에 모자람이 없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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