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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계곡
스콧 알렉산더 하워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월
평점 :
시간의 계곡은 과거와 미래가 서로 맞물리는 듯한 장소를 배경으로, 인상적이면서도 깊은 여운을 남기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작품입니다. 타임머신처럼 사용할 수도 있을 것 같은 그 신기한 장소는 결국 죽은 사람을 애도하기 위해서만 시간 여행이 허용되는 공간으로 결정되고, 이 소설은 철저하게 그 전제를 따라갑니다. 그 신기한 공간에서의 애도 여행이란 애도를 위한 다른 목적으로는 절대 시간 여행을 하면 안 된다는 말과 사실상 동의처럼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주인공은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이 죽게 될 것이고, 그 곳에서 시간 여행을 하면 그 사람을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황이 됩니다.
이 소설의 독특하면서도 인상적인 점은 저 상황에서 주인공이 소중한 사람을 살리는 데 성공하는 활약을 하는 것도 아니고, 개인이 함부로 시간에 간섭하면 안 된다는 운명론적인 교훈 내지 무절제함을 경계하는 교훈 같은 이야기를 가져오는 것도 아니고, 철저하게 소중한 사람을 위한 애도 여행이라는 점이 쭉 강조된다는 것입니다. 시간의 계곡이라 불리는 그 곳을 거슬러 과거로 가면서, 이미 죽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애도 여행. 오로지 그것만이 허락되는 과거로의 시간 여행.
그리고 이 책에서 그 애도 여행은 더없이 아름다우면서도 슬프고 감동적인 여러 감정이 인상적으로 뒤섞이면서도 어우러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소중한 사람이 이미 죽었다면 기억 속의 모습으로 계속 되살리려고 할 수밖에 없고, 사진이나 영상이나 녹음 목소리 등으로 아무리 시도해도 이미 죽은 사람의 모습은 결국에는 희미해지게 되고, 남은 사람은 갈수록 희미해지는 그 기억 속의 모습을 붙잡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시간의 계곡 속 애도 여행은 희미해지고 흩어지는 잔상 같은 기억에서가 아니라, 그토록 소중했지만 죽은 사람들을 눈앞에서 만날 수 있는 꿈같은 상황을 가능하게 만들어줍니다.
그 순간 시간의 계곡의 이야기는 시간 여행으로 과거로 가면서 수많은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도 있고, 부정적인 가능성을 막을 수도 있지만, 그런 것에는 일절 건드리지 않는 것을 수동적이고 극도로 조심스러운 태도가 아니라, 그 무엇보다도 사람들을 위한 결정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가장 소중한 사람의 더없이 소중한 순간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 시간이 흐르는 이상 잃을 수밖에 없는 것을 일시적이나마 다시 되찾을 수 있는 기회, 그리고 그 기회로 죽어간 사람들을 그리워하며 슬퍼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여러 가지 면에서 구원할 수 있는 기회. 그리고 그 지점에서 이 책은 그저 애도하는 사람들을 위한 소중한 애도 여행이라는 개인적인 위로의 차원을 넘어서, 시간을 넘나들며 애도 여행을 하는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층적이면서도 총체적으로 아우르는 이야기로 도약하게 됩니다.
이 책은 읽고 난 뒤 정리해보면 처음에는 개인이 개인적으로 그리워하는 망자를 다시 만나기 위한 애도 여행이라는 개인적은 스케일이다가 나중에는 그 공간 전체, 나아가 시간의 계곡 같은 신비한 장소가 존재하는 것이 가능한 세계의 숨겨진 비밀 같은 이야기까지 나오면서 스케일이 커지는 이야기가 됩니다. 하지만 이 책은 갑자기 스케일이 커진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데,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는 애도라는 보편적이면서도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이야기에서 출발해서, 애도 여행이 그 사람들에게 얼마나 처절할 정도로 희망적인 위로가 되는지 등 누구라도 공감할 수밖에 없을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조금씩 스케일이 차근차근 커지다가, 전체 이야기와 맞물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꽉 짜인 듯한 치밀하면서도 점진적인 구성은 이 책의 이야기와 맞물려서, 누구나 공감하게 될 이야기가 어느새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될 이야기가 되면서, 깊은 여운과 함께 강렬한 인상을 남기게 됩니다.
시간의 계곡 같은 공간이 있다면, 애도 여행 이외의 목적으로 그 신비한 공간에서 시간 여행을 시도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애도 여행처럼 그저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며 그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을 때에만 시간여행을 하는 것이 무한한 가능성을 제한한다고 여기면서, 과거와 미래를 바꾸려고 하고, 부정적인 가능성은 없애면서 긍정적인 가능성만 확장시키며 궁극적으로 세계와 역사를 더욱 의미 있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도 가능할지 모르며, 그 반대의 길을 막는 것도 가능할지 모릅니다. 미래를 미리 알면 과거와 현재를 얼마나 많이 바꿀 수 있을지, 얼마나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을지는 워낙 많은 이야기가 나와서 굳이 언급하기도 힘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 책을 덮는 순간 생각하게 됩니다.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면 이 책 속 애도 여행 같은 것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나오게 될 것이며, 그런 사람들에게 과거 여행에서 망자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시간 여행에 대한 그 수많은 가능성을 기꺼이 포기할 정도로 아주 중요하고 절실한 희망 같은 이야기가 될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또한 그런 점만을 강조했는데도, 소중한 사람들이 아직 죽지 않아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기쁜 일인지도 어느새 절절하게 느끼게 되는 등, 다른 다양한 감정도 절묘하게 담아낸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시간 여행을 단 한 번 할 수 있다면 기꺼이 애도 여행을 택할 사람들의 이야기이자, 그 심정에 공감하는 독자들이 감동받으며 인상적인 여운과 함께 남게 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