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사 크리스티 덕끼리 난롯가에 모여 앉아 실컷 수다 떨은 기분. 왠지 이런 덕톡회가 떠올랐다. 애거사 크리스티 덕톡은 역시 눈 내리는 겨울 산장에서 하고 한 명 두 명 잠이 들어 마지막은 그리고 아무도 깨어 있는 사람이 없었다로 끝나는 것이다.
「겨울은 곧 끝납니다」 단편이 너무 재밌다. 렁수이퉁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고 싶다.



#
수사를 한참 진행하고 범인에 대한 확신이 섰을 때,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을 전부 같은 공간으로 불러놓고 탐정이 차근차근 진상을 밝히며 모두가 보는 앞에서 범인을 지목하는 설정은 ‘푸아로 피날레’라고 불린다.

22쪽

#
크리스티가 자신의 작품들 중 가장 싫어하는 책은 「블루 트레인의 수수께끼」다.

30쪽

#
애거사 크리스티는 15년 동안 메리 웨스트매콧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채 발표한 소설들 모두 호평받았다는 것에 크게 만족스러워했다.

31쪽
- P22

자신만의 해석을 구축하는 이론적 작업은 엄청난 창조력을 요구한다. 모든 창조는 망상적이다. (중략) 몽상과 망상이 사람 수만큼 존재한다면 해석 역시 그만큼 다양할 수밖에 없다. - P70

그 나무는 길가에 우뚝 서 있었어. 작은 묘목에서 커다란 나무로 커 가면서 몇십 년의 비바람을 거치고 혹서와 혹한의 갈마듦을 지나며, 아이가 어른이 되고 젊은이가 노인이 되고 노인의 세대가 새로운 세대로 바뀌는 삶의 다양한 모습과 강산의 변천을 모두 지켜봤겠지. 그런데 이제는 그저 귀한 나무가 아니라는 이유로 사람들 손에 생명의 걸음을 멈추게 된 거야. 나는 머릿속으로 저 나무가 내게 남겨준 기억을 열심히 회상해보려고 했지만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었어. 그렇게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어.

-『미스테리아』 32호 단편 「겨울은 곧 끝납니다」에서 - P189

‘좋아한다’라는 감정은 요란하고 화려하고 커다란 순간 때문이 아니라 보통은 전혀 신경 쓰이지 않을 작은 부분에서 시작된단다. 그의 생각은 내게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상냥함을 느끼게 했고, 그 시절이든 지금이든 그런 상냥함은 보기 드문 것이지. 의지하고 싶고 보호하고 싶고 마음을 기울이고 싶게 하는 것이야. 아쉽게도 어느 시대든 그런 상냥함은 지나치게 연약하단다. 시대의 운명에 농락당하면서 필사적으로 살아갈 뿐인 우리에게 그런 상냥함을 지킬 여유가 어디 있겠니.

-『미스테리아』 32호 단편 「겨울은 곧 끝납니다」에서 - P190

"좋은 사람이 오래 살면, 세상에는 좋은 사람이 더 많아질 거고, 그러면 좋은 사람에게 좋은 일이 생기지 않는 법은 없다고 생각하게 될 거야."

-『미스테리아』 32호 단편 「겨울은 곧 끝납니다」에서 - P20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선명하게 기억나요. 어릴 때 잠깐 다닌 피아노 학원에서 이 책을 처음 만났죠. 정식으로 출간된 게 아니라서 그때는 제목이 흑나비(...)였어요. 나중에는 이 책을 읽으려고 학원에 다녔던 것 같아요. 레슨이 끝나도 집에 가지 않고 몇 시간씩 읽다가 저녁때가 다 되어 마지못해 학원을 나섰어요. 앞권이 없어서 두 왕녀가 나오는 데부터 읽었으니 그걸 어떻게 중간에 끊겠습니까...? 읽은 사람들은 절절하게 알 것... 전자책 나오고 요 사흘 광기에 휩싸여 49권 전체를 정독했어요. 그리고는 너무나 놀랐던 것입니다. 사쿠라코지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있었음을. 으응...? 이런 애가 나왔었나...? 잠깐 스쳐가는 인연인가 보다 방심했더니만 뒤에 다시 나와서 또 놀라고... 시오리조차 기억하는데 어떻게 사쿠라코지는 완전히 잊어 버린 걸까. 그때 나는 알았어요. 내가 이 책 내용을 아유미 중심으로 기억하고 있음을. 아유미는 지금 봐도 너무 멋있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다이고는 안이 더없이 소중하지만 상대의 상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음을 깨닫고 안에게 말한다. 이제 달콤한 말은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널 행복하게 해주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너 자신이라고. 그러니까 힘내라고, 지지 말라고. 너는 약하지 않다고.

-「그래서 소녀들의 연애는?」에서

#
나이를 조금 더 먹어 중학생이 된 뒤 〈델마와 루이스〉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처럼 미국의 광활한 풍광을 담은 영화를 보고서야 유타주라는 만화의 배경에 담긴 정서를 이해할 수 있었다. 미국 중부 외곽에 동그마니 자리한 호텔 아프리카를 드나들던 다양한 손님들이 어떤 소수성을 대변했는지, 주인공인 엘비스가 흑인 혼혈이자 사생아로 자란 것은 어떤 의미였는지, 엘비스의 좋은 친구이자 보호자가 돼준 손님이면서 결국 아델라이드와 사랑에 빠진 지오가 아메리칸 인디언이라는 건 또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
소설가 조남주가 『호텔 아프리카』와 관련해 「채널예스」에 쓴 짧은 글은 보다 정확하고 유려하다.

"그런 삶이 있는 줄 몰랐다. 매일 같은 교복을 입고 같은 가방을 메고 같은 버스를 타던 여고생에게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가르쳐준 만화다. 어떤 삶이든 사랑이든 틀린 것은 없다는 사실도."

-「그런 삶이 있는 줄 몰랐다」에서

#
기억을 더듬으며 알게 되었다. 성실하고 충실한 독자라 믿었던 나 또한 이 세계가 나와 멀어지는 걸 아주 무심히 바라만 보았다. 그리고 또 알게 되었다. 여성 창작자들이 만든, 다양하고 반짝이는 여성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읽으며 10대 시절을 보냈다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이었는지를, 가벼운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며 그들이 만들어놓은 세계를 넘나들 수 있었던 게 얼마나 호사스러운 경험이었는지를.

#
만화잡지가 나오는 날에 맞춰 서점으로 뛰어 가던 때, 모두가 만화책을 돌려 보던 때, 격주 혹은 매월 작가들이 10대 20대 여자들을 위한 이야기를 그토록 부지런히 쏟아내던 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절 당신들이 들려준 이야기들이 여자아이에서 어른이 된 수많은 ‘나’에게 남아 있을 것이다.

-「닫혀버린 세계」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마음을 들여다볼 겨를이 없어 자신이 무언가를 상실하고 있는지조차 알아채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일상의 사람들.

-「작가의 말」에서

#
하지만 난방비는 너무 비쌌고, 그 돈을 벌려면 더 많은 모욕과 수치를 견뎌야 했다.

#
그녀는 애정을 품었던 모든 것들에게서 떨어져 나와 홀로 멀리멀리 어딘가로 떠밀려가는 것 같았다.

-「그 새벽의 온기」에서

#
"작은 일이라도 마음을 다해 반듯하게 해냈을 때 주어지는 보상은 사람을 기쁘게 하잖아"

#
칼칼한 바람이 부는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며 상준은 다른 사람의 처지에 대해 생각할 조금의 여유마저 우리에게서 박탈하는 것은 대체 무얼까 생각했다. 우리로 하여금 끝내 자신의 고통에만 골몰하게 만드는 그것은.

#
횡단보도로 진입하려던 상준은 잠시 망설이다가 발길을 돌려 포장마차로 다시 향했다. 밀떡볶이와 순대를 사기 위해서. 염통도 잊지 말아야지, 상준은 생각했다. 이 세계는 사람들을 숨 쉴 틈 없이 몰아붙이고 끊임없이 비참하게 만들며 타인에게 잔인해지도록 종용하지만, 이런 세계에 살더라도 그가 아내에게 주고 싶은 것은 오직 사랑뿐이니까.

-「누구에게나 필요한 비치 타올」에서

#
이제 영미는 세상 그 누구도 타인을 완벽히 행복하게 해줄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사실로 인해 더 이상 괴롭지 않았다.

-「비포 선라이즈」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인륜적인 죄를 지은 인간도 인권을 보장해야 하는가?
죽어 마땅한 범죄자가 사형 당하지 않고 있는 지금의 사법 제도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우리의 법은 과연 정의로운가? 나를 보호하고 대변하고 있나?
작가는 이런 질문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질문은 작가가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면서 의미가 퇴색했다.
자기 의지로 죄를 지은 인간이 뉘우치고 죗값을 치렀다면 과거는 청산되나?
범죄에도 경중이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걸까?
하고 싶은 말이 뭔지 헷갈린다.

성범죄를 불필요할 정도로 상세하게 묘사하고, 스톡홀름 증후군을 가볍게 취급하고 있는 설정, 흉한 외모로 배척 당한 경험 때문에 범죄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서사를 끌어와서 주인공을 끝까지 연민하는 방식이 독자에게 혼란을 가중한다.

돌이킬 수 없는 약속은 피해자를 온전히 보호하고 대변하지 못하는 사회적 약속인 사법 제도를 말해야 했다. 그래야 했던 게 주인공에게 준 면죄부 때문에 돌이킬 수 없이 엉뚱한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를 가리키게 되었다.

중반까지 재밌게 잘 읽다가 밀려오는 당혹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