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사람들이 좋았다. 남들이 보기엔 저게 대체 뭘까 싶은 것에 즐겁게 몰두하는 사람들.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정치적 싸움을 만들어내지도 않을, 대단한 명예나 부가 따라오는 것도 아니요, 텔레비전이나 휴대전화처럼 보편적인 삶의 방식을 바꿔놓을 영향력을 지닌 것도 아닌 그런 일에 열정을 바치는 사람들. 신호가 도달하는 데만 수백 년 걸릴 곳에 하염없이 전파를 흘려보내며 온 우주에 과연 ‘우리뿐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무해한 사람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동경한다. 그리고 그들이 동경하는 하늘을, 자연을, 우주를 함께 동경한다.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도중에 그만두지 못했던 것은 떠날 용기가 없어서였다. 그러나 남은 채 버텨내는 데도 역시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사회적’인 나이가 든다는 것은, 다양한 것을 보고 듣고 접하면서 감정의 어떤 주파수는 진폭이 줄어들고 어떤 주파수는 증폭되는 구조를 갖게 되는 게 아닐까?

내가 어린 왕자라면 의자에 앉아 있지는 않을 것이다. 나의 소행성이 자전하는 속도에 발을 맞추어, 지평선 위에 살짝 걸려 있는 해를 향해 하염없이 걸어갈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또 흐른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 노을 속으로. 더이상 슬프지 않을 때까지.

걷거나 의자를 옮기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해 지는 광경을 오래도록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수성이다. 그곳의 하루는 아주 길어서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88일이나 걸린다. 해가 지고 나면 다시 88일간의 긴 밤이 시작된다. … 지구에서는 해 지는 시간이 불과 2분 남짓인 것을 생각해보면, 수성은 일몰을 사랑하는 게으름뱅이에게는 최고의 행성일지 모른다.

별에서 태어나 우주 먼지로 떠돌던 우리가 이 지구를 만난 건 그야말로 우주적으로 멋진 랑데부였으니까.

우리가 보는 세상은 우리가 규정한 것이다. 하늘의 달도 우리가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다르게 보이지 않는가.

이봐요, 이 상태로 지구에서 달까지 간다고요? 저 여기서 좀 내릴게요. 그래요, 지금 당장요. 약은 약사에게, 과학은 과학자에게, 그리고 탐험은 탐험가에게 맡깁시다. 저의 지구력은 지구에서만 발휘할 수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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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에서 소개하는 책 리스트

https://blog.aladin.co.kr/721103187/13051605

읽을 때도 쓸 때도 한결같이 기댈 수 있는 이야기들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이제 막 하나를 알게 된 사람, 혹은 남들보다 하나를 더 안다고 믿는 사람의 확신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무지하다는 겸손을 상실한 인간의 오만이란 얼마나 폭력적인가.

그럼에도 나를 어딘가로 움직이게 하고, 다시 설 수 있도록 일으켜 주었던 말들은 언제나 나를 잡아끄는 말이 아니라 나를 안아주는 말이었다.

아이의 꿈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어른들에게는 그러지 좀 말라고 얘기하고 싶다.

온통 불확실한 가운데 확실한 것은, 확신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뿐이다.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경험, 결과를 담보하지 않는 순수한 몰입, 외부의 반응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 이것이 삽질의 조건이다.

쉽게 방전되는 저용량 배터리를 가진 사람에게 외출은 늘 크게 마음먹어야 하는 일이다. 옷을 갈아입고 현관으로 나가 신발을 신고 나면 이미 배터리가 한 칸 소모된 것 같은 이 기분을 어떤 사람들은 끝끝내 모를 것이다.

세상 끝은 어딜까. 지도상의 가장 먼 곳은 아닐 것이다. 세상 끝에는 타인들이 있다. 타인의 마음에 닿는 일이야말로 어쩌면 세상 가장 먼 곳까지 가보는 일이다.

다른 것을 배척하지 않고,
낯선 것을 포용하고,
보이지 않는 것들 속에 어떤 소중하고 아름다운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는 마음이 좋다.

그는 모험가인 것이다. 쉽게 이해받기보다는 오해받아도 좋다는 쪽을 선택하는 종류의 모험가. 나는 그런 사람의 이야기가 좋다.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한 번 더 살아볼 수 있다. 혹은 누군가를 한 번 더 살아보게 하거나.

가장 좋은 상태가 되도록 애쓰는 것보다 어쩌면 지금 여기에 잘 어울리는 상태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은 아닐까. 한계를 인정하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삶의 지혜는 아닐까.

내가 골몰하는 가난은 부자가 될 수 없어 서글픈 가난이 아니라, 가난해도 괜찮아서 가난하기로 마음먹은 그런 가난이다. 후쿠오카 켄세이가 말했던 덜 벌고 덜 쓰는 자급자족적 삶이고, 헬렌 니어링이 살았던 단순하고 풍요로운 자발적 가난이다.

한 사람이 참으로 보기 드문 인격을 갖고 있는가를 발견해 내기 위해서는 여러 해 동안 그의 행동을 관찰할 수 있는 행운을 가져야만 한다. 그의 행동이 온갖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있고 그 행동을 이끌어 나가는 생각이 더없이 고결하며,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그런데도 이 세상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것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한 잊을 수 없는 인격과 마주하는 셈이 된다.

아끼는 마음이 자신을 초과하는 사람. 그래서 타인과 타자에 대해 애정과 연민을 느끼며 마음을 나누는 사람.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어린아이의 마음속에 또렷한 흔적을 남기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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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고 싶어서 떠난 핀란드 여행』은 여행을 가지 못하는 지금 나와서 더 의미 있는 책인 것 같다.
2017년부터 2019년까지 작가가 매년마다 핀란드 헬싱키에 다녀온 여행기를 모아서 낸 책인데 맨 앞쪽에 사진도 실렸지만 색연필로 스케치한 일러스트가 실려 있어서 따스함이 느껴진다.
마치며에서 마스다 미리는 ‘2020년 가을, 코로나 한복판, 도쿄’라는 말을 썼다. 2020년의 작가는 핀란드로 떠나지 못한 것이다.
2021년 올해의 가을도 우리는 코로나 한복판에 서 있다. 언젠가 다시 어디든 훌쩍 여행을 떠날 날이 부디 우릴 찾아오기를.

십 대나 이십 대의 해외여행과 중년 이후의 해외여행. 확실히 다르다고 느낀다. 여행에서 체험한 일을 토대로 미래를 설계하거나, 여행이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고 기대하는 일은 갈수록 드물어진다. - P36

내가 만났던 사람들 속에도 나의 파편이 남아 미미하나마 이 세계와 계속 교감하면서, 비록 원래 모습은 아닐지라도 사라지지 않고 전달된다.
(중략)
나는, 나 하나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나의 파편은 계속해서 잘게 쪼개지면서 동시에 어딘가 남지 않을까. - P49

굉장해, 혼자 해냈잖아.
잘했어, 애썼어,라고 조용히 자신을 칭찬한다. 내가 나를 다독이는 이런 소소한 행위가 의외로 일상의 스트레스를 줄여준다. - P78

여행을 떠나면 왠지 평소보다 자주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지금, 여기서 마주 앉아 웃는 사람들도 언젠가 죽는다. 다들, 언젠가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이 순간을 즐긴다.
이를테면 내가 오래오래 살다가, 천천히 죽음을 맞는 순간이 온다면, 침대 위에서 오늘을 떠올릴까. 헬싱키 거리를 거닐던 무렵 나는 씽씽했지, 하면서 창밖을 바라볼까.
나는 아직 여기 있는데. 씽씽하게 여기 있는데. 어째서인지 미래에서 현재를 그리워한다.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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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단독주택에 살고 있습니다 : 마당과 다락방이 있는 단독주택에 살며 쓴 그림 에세이 - 마당과 다락방이 있는 단독주택에 살며 쓴 그림 에세이
센레 비지 지음 / 애플북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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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에세이라서 몇 시간 만에 읽었다.
어릴 때 단독주택에 세들어 살아 본 적이 있어서 환상 같은 건 없어도 다시 살아 보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여름날이면 마당에서 수도를 틀고 물을 뿌려 달궈진 시멘트 바닥을 시원하게 식히고 커다란 고무 대야에 물을 가득 받아 물놀이도 하고 평상 위에 작은 상을 펴고 숙제도 하고 그랬다.
어렸을 때 일이니 재밌고 좋았던 추억만 기억하는 걸 테고 저자들의 현실적인 고민들을 읽고 나니 단독주택 관리를 나처럼 게으른 인간이 할 수 있을 것인지 제일 먼저 나를 의심하게 된다.
예를 들어서 1년에 한 번씩 정화조 청소차 부르기 미션 같은 걸 까먹으면 어떡하지. 세를 들어 사는 게 주택 관리 고민에서 자유롭게 할 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층간 소음에서 완벽하게 벗어나는 건 정말 큰 이점이고 단독주택 생활의 매력이다. 노래를 불러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하고(물론 방음이 잘 되는 샷시를 달 경우지만) 아무 시간에나 발을 구르면서 운동을 해도 누구에게 피해 주지 않는다는 건 정말 단독주택에 살고 싶게 만든다.
아파트, 빌라, 다세대주택 등에 살면서 우리는 공간을 공유하는 데에 익숙해진 나머지 집에서마저 남의 눈치를 보며 걷거나 하고 있지 않은가. 분명 내 집인데 남이랑 같이 사는 것 같고, 실제 위 아래 옆 다 사람이 산다.
잊고 지내던 오롯한 사적인 공간이 주는 삶의 안정감을 떠올리게 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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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원을 위한 저승길 여정 문화와 역사를 담다 29
임승범 지음 / 민속원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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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자의 저승길을 경을 외워 닦아주고 배웅하는 내용이라 애도하고 싶을 때 읽어 보면 깊은 위로가 될 책. 딱딱한 학술서 느낌이 아니라 약간 옛날 옛적에 전래동화 같기도(동화책으로 각색해 내도 좋을 듯). 쉬운 풀이와 그림을 실어 누구나 어렵지 않게 접근 가능함. 올컬러에 종이도 매끄럽고 글자도 뚜렷해 눈이 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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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원은 ‘원통한 마음을 푼다’는 뜻이며, 망자가 저승길 가는 노정기는 『황천해원경』에만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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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쪽 읽다가... 망자가 강가에서 통곡하고 있는데 수사 목사 태사관이 나타나서 열씨와 솔씨를 주면서 심고 길러서 다리 놓고 강을 건너라고 함. 망자가 기가 막혀서 어느 세월에 기르냐 또 슬피 통곡함. 아 웃으면 안 되는데 수사 목사 태사관 너무 망자 멕이는 거 아닌가. 도와주려고 하는 거 맞음?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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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렁할미가 와서 땅을 갈아 씨를 뿌려줬지만 시간이 촉박한 것이다... 진짜 어느 세월에 길러서 다리를 놔;; 다행히도 이때 청의동자라고 남해용왕의 셋째 아들이 배 타고 와서 건너게 해줌. 근데 청의동자는 매번 이랬을지도 모름. ㄹㄷ월드 신밧드의 모험처럼 저승도 코스가 짜여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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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천해원경』 속의 저승은 우리가 아는 저승 분위기랑은 조금 다른데 죄를 묻는 게 아닌 얼마나 착하게 살았느냐에 중점을 두는 게 특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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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왕은 망자에게 너는 무슨 선행을 했느냐고 묻는다. 나중에는 너 여행은 좀 다니고 한양도 가 봤니? 물어보는데 되게 인정 넘치는 느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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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왕이 하는 두 가지 질문은 각각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174쪽)와 “사람으로 세상에 태어나 한평생 세상재미를 충분히 즐겼느냐?”(176쪽)를 묻는 것으로 망자와 모든 이에게 던지는 질문과 교훈이라고. 개인적인 감상은 이 구간이 산 사람들을 토닥여주는 느낌이었다. 잘들 살아, 하는.



이승에서의 고단한 삶을 살지 않은 이는 없다. 『황천해원경』은 그 삶을 마치고 사랑하는 사람들, 정든 이웃의 곁을 떠나는 망자를 위한 마지막 이별의 말이며, 배웅의 노래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사람들을 위한 위로이기도 하다. - P5

해원은 ‘원통한 마음을 푼다’는 뜻이다. 그러나 『황천해원경』의 해원은 ‘어떤 비극적 삶과 죽음이 지닌 분함과 억울함’을 푼다는 뜻보다는, ‘인간 실존의 유한성과 허무성이 갖는 원통함’을 의미한다. ‘특정한 원한’이 아니라 ‘보편적 원한’이다. - P14

여기에서 주목할 사안의 하나는 제목이 『황천해원경』’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 그 내용에 있어서 해원에 관한 직접적인 이야기는 없다.

#아니, 『황천해원경』인데 해원에 관한 이야기가 없다고요???? - P15

망자가 저승으로 갔다는 것은 이승에 회한과 미련을 남기지 않고 이승을 완전히 떠났음을 의미한다. 이승에 대한 어떤 마음이나 생각도 끊어버린 것이다. 이승으로부터 해탈한 망자만이 저승으로 갈 수 있다. 실제로는 망자가 저승으로 간 것이 아니라, 후손이 그러한 삶과 죽음의 조건을 갖춘 망자를 저승으로 보낸 것이다.

#아 이런 해석 재밌다. 관점을 이렇게도 바꿀 수가 있구나. 하지만 제사가 저승의 조상과 이승의 후손의 상봉식이라니;; 맞말인데 제사에 극렬한 거부감이 느껴졋 ㅋㅋㅋㅋㅋㅋ - P17

『황천해원경』에 나타나는 저승은 수평적 공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저승은 천상 또는 지하에 있지 않고, 이승에서 멀리 떨어진 수평적 공간 그 어딘가에 있다고 관념된다. 저승길이란 낱말 자체가 그러한 수평적 공간관을 전제하고 있다. - P31

사자상에는 밥과 간장을 각각 세 그릇 차린다. 상 아래에는 짚신도 세 켤레 놓는다. 저승사자들이 3명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노잣돈 명목으로 동전도 조금 놓는다. 이들 사자를 먹이는 밥은 사자밥이라 부른다. 메라고 명명하지 않는다. 사자는 조상이나 신령이 아니기에 그러하다.

#사자에게 차려주는 밥을 사자밥이라고 하는구나. 사자들이 일가친척이 있느냐고 물을 때마다 망자가 없다고 딱 잡아떼니까 쩝 하고 아쉬워하던데 떨어질 국물이 없어서 그러는 거였어; 상 차려줄 사람들은 좀 있냐를 돌려 말한 거였구나. - P48

죽은 자에 대한 용서와 이해는 산 사람에게도 해원이 된다.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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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5 14: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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