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고 싶어서 떠난 핀란드 여행』은 여행을 가지 못하는 지금 나와서 더 의미 있는 책인 것 같다.
2017년부터 2019년까지 작가가 매년마다 핀란드 헬싱키에 다녀온 여행기를 모아서 낸 책인데 맨 앞쪽에 사진도 실렸지만 색연필로 스케치한 일러스트가 실려 있어서 따스함이 느껴진다.
마치며에서 마스다 미리는 ‘2020년 가을, 코로나 한복판, 도쿄’라는 말을 썼다. 2020년의 작가는 핀란드로 떠나지 못한 것이다.
2021년 올해의 가을도 우리는 코로나 한복판에 서 있다. 언젠가 다시 어디든 훌쩍 여행을 떠날 날이 부디 우릴 찾아오기를.

십 대나 이십 대의 해외여행과 중년 이후의 해외여행. 확실히 다르다고 느낀다. 여행에서 체험한 일을 토대로 미래를 설계하거나, 여행이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고 기대하는 일은 갈수록 드물어진다. - P36

내가 만났던 사람들 속에도 나의 파편이 남아 미미하나마 이 세계와 계속 교감하면서, 비록 원래 모습은 아닐지라도 사라지지 않고 전달된다.
(중략)
나는, 나 하나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나의 파편은 계속해서 잘게 쪼개지면서 동시에 어딘가 남지 않을까. - P49

굉장해, 혼자 해냈잖아.
잘했어, 애썼어,라고 조용히 자신을 칭찬한다. 내가 나를 다독이는 이런 소소한 행위가 의외로 일상의 스트레스를 줄여준다. - P78

여행을 떠나면 왠지 평소보다 자주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지금, 여기서 마주 앉아 웃는 사람들도 언젠가 죽는다. 다들, 언젠가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이 순간을 즐긴다.
이를테면 내가 오래오래 살다가, 천천히 죽음을 맞는 순간이 온다면, 침대 위에서 오늘을 떠올릴까. 헬싱키 거리를 거닐던 무렵 나는 씽씽했지, 하면서 창밖을 바라볼까.
나는 아직 여기 있는데. 씽씽하게 여기 있는데. 어째서인지 미래에서 현재를 그리워한다.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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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단독주택에 살고 있습니다 : 마당과 다락방이 있는 단독주택에 살며 쓴 그림 에세이 - 마당과 다락방이 있는 단독주택에 살며 쓴 그림 에세이
센레 비지 지음 / 애플북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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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에세이라서 몇 시간 만에 읽었다.
어릴 때 단독주택에 세들어 살아 본 적이 있어서 환상 같은 건 없어도 다시 살아 보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여름날이면 마당에서 수도를 틀고 물을 뿌려 달궈진 시멘트 바닥을 시원하게 식히고 커다란 고무 대야에 물을 가득 받아 물놀이도 하고 평상 위에 작은 상을 펴고 숙제도 하고 그랬다.
어렸을 때 일이니 재밌고 좋았던 추억만 기억하는 걸 테고 저자들의 현실적인 고민들을 읽고 나니 단독주택 관리를 나처럼 게으른 인간이 할 수 있을 것인지 제일 먼저 나를 의심하게 된다.
예를 들어서 1년에 한 번씩 정화조 청소차 부르기 미션 같은 걸 까먹으면 어떡하지. 세를 들어 사는 게 주택 관리 고민에서 자유롭게 할 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층간 소음에서 완벽하게 벗어나는 건 정말 큰 이점이고 단독주택 생활의 매력이다. 노래를 불러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하고(물론 방음이 잘 되는 샷시를 달 경우지만) 아무 시간에나 발을 구르면서 운동을 해도 누구에게 피해 주지 않는다는 건 정말 단독주택에 살고 싶게 만든다.
아파트, 빌라, 다세대주택 등에 살면서 우리는 공간을 공유하는 데에 익숙해진 나머지 집에서마저 남의 눈치를 보며 걷거나 하고 있지 않은가. 분명 내 집인데 남이랑 같이 사는 것 같고, 실제 위 아래 옆 다 사람이 산다.
잊고 지내던 오롯한 사적인 공간이 주는 삶의 안정감을 떠올리게 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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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원을 위한 저승길 여정 문화와 역사를 담다 29
임승범 지음 / 민속원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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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자의 저승길을 경을 외워 닦아주고 배웅하는 내용이라 애도하고 싶을 때 읽어 보면 깊은 위로가 될 책. 딱딱한 학술서 느낌이 아니라 약간 옛날 옛적에 전래동화 같기도(동화책으로 각색해 내도 좋을 듯). 쉬운 풀이와 그림을 실어 누구나 어렵지 않게 접근 가능함. 올컬러에 종이도 매끄럽고 글자도 뚜렷해 눈이 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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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원은 ‘원통한 마음을 푼다’는 뜻이며, 망자가 저승길 가는 노정기는 『황천해원경』에만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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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쪽 읽다가... 망자가 강가에서 통곡하고 있는데 수사 목사 태사관이 나타나서 열씨와 솔씨를 주면서 심고 길러서 다리 놓고 강을 건너라고 함. 망자가 기가 막혀서 어느 세월에 기르냐 또 슬피 통곡함. 아 웃으면 안 되는데 수사 목사 태사관 너무 망자 멕이는 거 아닌가. 도와주려고 하는 거 맞음?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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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렁할미가 와서 땅을 갈아 씨를 뿌려줬지만 시간이 촉박한 것이다... 진짜 어느 세월에 길러서 다리를 놔;; 다행히도 이때 청의동자라고 남해용왕의 셋째 아들이 배 타고 와서 건너게 해줌. 근데 청의동자는 매번 이랬을지도 모름. ㄹㄷ월드 신밧드의 모험처럼 저승도 코스가 짜여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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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천해원경』 속의 저승은 우리가 아는 저승 분위기랑은 조금 다른데 죄를 묻는 게 아닌 얼마나 착하게 살았느냐에 중점을 두는 게 특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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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왕은 망자에게 너는 무슨 선행을 했느냐고 묻는다. 나중에는 너 여행은 좀 다니고 한양도 가 봤니? 물어보는데 되게 인정 넘치는 느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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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왕이 하는 두 가지 질문은 각각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174쪽)와 “사람으로 세상에 태어나 한평생 세상재미를 충분히 즐겼느냐?”(176쪽)를 묻는 것으로 망자와 모든 이에게 던지는 질문과 교훈이라고. 개인적인 감상은 이 구간이 산 사람들을 토닥여주는 느낌이었다. 잘들 살아, 하는.



이승에서의 고단한 삶을 살지 않은 이는 없다. 『황천해원경』은 그 삶을 마치고 사랑하는 사람들, 정든 이웃의 곁을 떠나는 망자를 위한 마지막 이별의 말이며, 배웅의 노래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사람들을 위한 위로이기도 하다. - P5

해원은 ‘원통한 마음을 푼다’는 뜻이다. 그러나 『황천해원경』의 해원은 ‘어떤 비극적 삶과 죽음이 지닌 분함과 억울함’을 푼다는 뜻보다는, ‘인간 실존의 유한성과 허무성이 갖는 원통함’을 의미한다. ‘특정한 원한’이 아니라 ‘보편적 원한’이다. - P14

여기에서 주목할 사안의 하나는 제목이 『황천해원경』’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 그 내용에 있어서 해원에 관한 직접적인 이야기는 없다.

#아니, 『황천해원경』인데 해원에 관한 이야기가 없다고요???? - P15

망자가 저승으로 갔다는 것은 이승에 회한과 미련을 남기지 않고 이승을 완전히 떠났음을 의미한다. 이승에 대한 어떤 마음이나 생각도 끊어버린 것이다. 이승으로부터 해탈한 망자만이 저승으로 갈 수 있다. 실제로는 망자가 저승으로 간 것이 아니라, 후손이 그러한 삶과 죽음의 조건을 갖춘 망자를 저승으로 보낸 것이다.

#아 이런 해석 재밌다. 관점을 이렇게도 바꿀 수가 있구나. 하지만 제사가 저승의 조상과 이승의 후손의 상봉식이라니;; 맞말인데 제사에 극렬한 거부감이 느껴졋 ㅋㅋㅋㅋㅋㅋ - P17

『황천해원경』에 나타나는 저승은 수평적 공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저승은 천상 또는 지하에 있지 않고, 이승에서 멀리 떨어진 수평적 공간 그 어딘가에 있다고 관념된다. 저승길이란 낱말 자체가 그러한 수평적 공간관을 전제하고 있다. - P31

사자상에는 밥과 간장을 각각 세 그릇 차린다. 상 아래에는 짚신도 세 켤레 놓는다. 저승사자들이 3명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노잣돈 명목으로 동전도 조금 놓는다. 이들 사자를 먹이는 밥은 사자밥이라 부른다. 메라고 명명하지 않는다. 사자는 조상이나 신령이 아니기에 그러하다.

#사자에게 차려주는 밥을 사자밥이라고 하는구나. 사자들이 일가친척이 있느냐고 물을 때마다 망자가 없다고 딱 잡아떼니까 쩝 하고 아쉬워하던데 떨어질 국물이 없어서 그러는 거였어; 상 차려줄 사람들은 좀 있냐를 돌려 말한 거였구나. - P48

죽은 자에 대한 용서와 이해는 산 사람에게도 해원이 된다.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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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5 14: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1-05 14: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요네자와 호노부와 고전부』에 나온 추천 도서 『하늘을 나는 말』. 일본에서는 1989년에 나온 책인데 한국에는 2017년에 출간됐다. 헐 시대가 아예 다르잖아... 일상 미스터리의 고전이라고 해서 빌려와 봤다. 국문과 대학생과 라쿠고가 둘이서 콤비를 이루어 일상의 수수께끼를 푸는데 탐정 역할은 주로 후자가 한다. 주인공이 여자 대학생이라서 자꾸만 ‘여자답게’ 어쩌고를 강조하는 부분만 슬렁슬렁 넘기면 조금도 옛날 책 같지 않아서 살짝 놀랐다. 아무 양념하지 않은 가래떡을 참 좋아하는데 가래떡 같은 소소한 재미가 있는 책이다.

교수님은 겨울날 속눈썹에 내려앉은 눈송이만큼이나 희미한 망설임을 보이면서 말했다. - P27

비유나 추상은 현실에 접근하는 수단인 동시에, 또 가장 멀어지는 길이다. 현실의 고통을 직시할 때 그런 미사여구가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 절감하게 된다. - P174

기억 속에는 대양만큼의 희미한 부분과 작은 섬만큼의 선명한 부분이 있다. -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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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도 한번 해 본 적이 없는데, 이제 나는 별들로 가는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우주에서도 나는 허드렛일에서 벗어날 수 없구나.

초콜릿은 맛있었다. 우리 셋은 침묵 속에서 걸신들린 듯이 초콜릿을 먹었지만, 그건 다정한 침묵이었다.

대기권은 땅에서 멀어질수록 계속 얇아지는 담요처럼 점차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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