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마의 성을 습격하라 즐거운 동화 여행 12
장 클로드 무를르바 글, 클레망 우브르리 그림, 김유진 옮김 / 가문비(어린이가문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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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클로드 무를르바의 책인 <바다 아이>를 읽으며 어쩜 이런 식의 구성을 썼을까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대개 어린이책에서는 일직선의 구조를 사용하는 것이 대부분인데 그 책은 정말 일반 소설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독특했기 때문이다. 요즘은 개성있는 구성의 책이 많이 나와서 다소 신선한 느낌을 덜 받을 수도 있겠지만 당시 비슷한 구성의 책을 주로 보던 나에게 그 책은 작가의 이름을 발음이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기억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염소나라에서 노래도 잘 부르고 언제나 즐겁게 사는 우리의 주인공 큰뿔비크가 우연히 다람쥐 비슷한 설치류의 동물을 맡게 되면서 큰뿔비크의 험난한 여정이 시작된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큰뿔비크가 시련을 당하고 염소나라를 떠날 작정을 할 때 이미 그의 시련은 예상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가장 친한 친구와 자신이 사랑하는 염소를 축하해 주어야 하는 상황을 마지막으로 하고 길을 떠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황새가 큰뿔비크에게 보따리를 하나 떨어뜨려 준다. 거기엔 아주 작은 동물이 겨울잠을 자고 있었으며 잘 보살펴 달라는 편지도 함께 들어 있다. 그것을 보고 어떻게 그냥 모른체 할 수가 있겠는가. 당연히 큰뿔비크는 그 작은 동물을 잘 보살피기로 했지. 특히 피애가 겨울잠에서 깨어나면 둘의 여행은 즐거움 그 자체다.

그렇게 여러 마을을 떠돌아 다니지만 둘은 사실 하이애나를 피해 도망다니는 중이다. 하지만 마음이 넓은 큰뿔비크는 피애에게는 그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다 결국 피애를 잃어버리고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큰뿔비크는 그 사실을 회피한다. 피애를 지금까지 돌봐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자기합리화를 시키면서. 하지만 독특한 램 박사를 만나서 자신의 마음을 들키고 또 자기의 속마음을 인정한다. 결국 둘은 피애를 찾아나서기로 의기투합한 것이다. 여기서 큰뿔비크의 모습은 어쩌면 그렇게 인간들의 내면을 잘 대변하고 있을까 내심 놀랐다. 사실 나도 요즘 많은 부분에서 힘들거나 어려운 일이 될 것 같으면 회피하고 애써 모른체 하려고 했었다. 그렇게 모른체 하고 있는 내내 마음은 결코 편하지 않다. 아마 큰뿔비크도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램이 피애를 찾으러 가자고 했을 때 그 말을 대신해 준 것을 감사했던 것이겠지.

큰뿔비크와 램의 활약상은 한편으론 재미있으면서도 한편으론 참 어이없어서 헛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어쨌든 둘의 활약 덕분에 피애와 피애의 여자 친구까지 무사히 구해낼 수 있었다. 기억이 왔다갔다 하는 램이라는 캐릭터 때문에 읽으며 한참을 웃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책을 읽는 동안 속도가 나질 않아 고생했다. 오히려 아이는 금방 읽던데... 내가 너무 이 작가에 대한 기대가 컸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정확한 것은 모르겠다. 아마도 딱딱한 문체에 익숙해져서 이런 식의 문체가 낯설게 느껴저서 그런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 뿐이다. 하지만 그런 이유에도 불구하고 이 작가가 참 글을 잘 쓴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게다가 중간중간 들어있는 재치와 유머는 웃음짓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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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청이 무슨 효녀야? 돌개바람 14
이경혜 글, 양경희 그림 / 바람의아이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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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거는 거 이거 내가 참 좋아하는 분야다. 대한민국에서 자칭타칭 효녀가 바로 심청이 아닐까. 그런 심청이에게 딴지를 걸겠단다. 심청 이야기를 처음에는 무조건 착하다고 받아들이다가 어느 순간부터 꼭 눈이 먼 아버지를 혼자 두고 갔어야만 했느냐는 딴지를 거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흥부 놀부도 다시 보는 등 많은 옛이야기들을 재해석하는 시도가 있었다. 물론 그 옛이야기를 바꾼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으로'도' 보자는 취지였다. 그러더니 급기야 이렇게 책으로까지 나왔다.

옛이야기라는 것은 구전되는 특성상 이야기가 변형되기도 하고 시대와 가치관에 따라 다르게 이야기되기도 한다. 또한 대부분 어린 아이들에게 들려주기 때문에 권선징악적 요소가 강하게 들어가 있다. 딴지 거는 걸 좋아하는 성격 때문에 처음엔 그런 뻔한 이야기가 마음에 안 들었었다. 그러다가 옛이야기의 순기능에 대해 알고 난 후부터는 전적으로 옛이야기 팬이 되었다. 근데 이제 다시 이런 이야기에 눈길이 간다. 지금 6학년인 딸 아이가 읽고 나더니 이건 옛이야기를 아는 사람만이 읽어야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나름의 분석을 내놓는다.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총 다섯 편의 이야기가 들어있는데 모두 지금까지 알고 있던 옛이야기만을 생각하면 안된다. 특히 첫 번째 이야기인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에서는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았던 아이들에게 초점을 맞춤으로써 모르긴 몰라도 읽는 아이들 마음을 후련하게 해주었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오로지 어른들 이야기만 있고 아이 셋이 있는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잖은가. 때로는 아무리 선녀라지만 어떻게 아이를 남겨 두고 혼자만 하늘로 올라갈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남겨진 아이들의 마음은 어떤지 등도 후련하게 이야기해 준다. 그러다보니 원래 이런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어쨌든 모든 이야기들을 한 편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시각 내지는 주인공의 이면에 숨겨진 마음 등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어서 생각꺼리를 많이 던져준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진행 때문에 당혹스러울 수도 있겠으나 이건 어디까지나 이랬다면 어땠을까라는 전제를 두고 있는 것이므로 너무 세심하게 딴지 걸지 않아도 될 것이다.(내가 왜 작가의 입장에서 변명을 하고 있지?) 우리 큰 아이 말대로 이 책은 옛이야기를 충분히 접한 아이들이 읽어야 혼란스럽지 않을 것이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큰 아이가 이 책을 읽더니 책을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작가가 결코 쉬운 게 아니라는 걸 느낀단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하고. 그렇다면 그만큼 이 책이 신선했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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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롤리팝, 말괄량이 길들이기 보림어린이문고
딕 킹 스미스 글, 질 바튼 그림, 김영선 옮김 / 보림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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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많이 본 제목이다. 그런데 저자가 아니다. 뭘까. 알고 봤더니 제목에 '레이디 롤리팝'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그러니까 셰익스피어의 그 책과는 전혀 다른 책이라는 얘기다. 저자는 직접 동물을 길렀기 때문인지 동물과 관련한 이야기를 많이 썼다고 한다. 또 동물을 좋아하기도 하고. 하긴 무엇이든 작가가 경험한 일이 소재로 가장 많이 등장하곤 한다. 작가가 동물을 기르고 좋아하니 당연한 것일 게다.

옛날 옛날 먼 먼 나라라는 부정확한 시간과 장소로 시작을 함으로써 후에 있게 될 많은 사실들에 딴지를 못 걸게 만든다. 대개 옛이야기 형식을 빌려 쓰는 것들은 어떻게 그런 말도 안되는 것이 있느냐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한다. 그냥 옛날에는 그랬단다라고 하면 되니까. 어쩌면 그래서 현대에 읽는, 현대의 상황을 빗댄 것 같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다가도 그저 옛날에 있었던 어느 공주에 대한 유쾌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아주 말괄량이다 못해 버릇없고 제멋대로인 공주 페넬로페. 아무도 못 말리는 응석꾸러기라고 할 정도로 막무가내다. 공주를 그렇게 만든 건 다름아닌 그들의 부모다. 하지만 공주이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용서가 된다. 남에 대해 생각하는 법이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었기에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한다. 그러나 그런 공주에게 뜻밖의 일이 생긴다. 여덟 살 생일 선물로 돼지를 키우게 됐는데 그 돼지의 원래 주인인 조니를 통해 남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보통의 어린이책에서라면 공주가 버릇 없는 것을 탓하거나 아니면 최악의 경우 그들의 부모가 그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아서 사태를 걷잡을 수 없이 만들곤 하는데 여기 나오는 왕과 왕비는 그 어떤 것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왕은 왕대로 공주를 어떻게 변화시킬까 고민하고 조니는 조니대로 공주의 비위를 맞추면서 서서히 자신의 의도대로 만드니까. 그렇다고 옳은 말도 못 하는 비겁한 인물은 아니다. 할 말은 다 하면서도 상대에게 고개를 숙일 때와 강하게 나갈 때를 아는 현명한 소년이다.

이야기 전개가 때론 터무니 없게 전개되기도 하지만(돼지가 장미밭을 일구자 그렇게도 집안에서 돼지 키우는 것을 반대했던 왕비가 완전히 돌아서는 모습 등) 그런 모든 것들을 옛날에 있었던 일이니까라는 말로 넘길 수 있게 미리 장치해 놓았기 때문에 그냥 넘길 수 있다. 공주는 아직도 자기가 원하는 것이면 어떻게든 해야 직성이 풀리지만 그것을 관철시키는 방법이 많이 바뀌었다. 무조건 떼 쓰고 소리지르는 것에서 남을 설득하는 것으로 말이다. 페넬로페의 표정 그림도 확실히 변했다. 이전에는 심술궂은 표정이었다면 이젠 사랑스러운 표정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요즘의 버릇없고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아이들을 겨냥해서 쓴 책일지 모르지만 그런 숨은 의도보다는 그냥 가족의 사랑과 아이들의 유쾌한 행동이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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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바라 괴물의 날
장자화 지음, 전수정 옮김, 나오미양 그림 / 사계절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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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모임에서 우리 환상동화책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마침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할아버지의 뒤주>를 읽고 한 토론이었는데 처음엔 우리의 판타지도 이만큼 수준이 되었구나라고 감탄했다가 외국의 다른 작가의 책을 읽고는 '아직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외국의 분위기에 비해 우리의 판타지는 아직 걸음마 단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외국이라 함은 은연중에 서구를 의미하는 것으로 되어 버렸다. 그러니 동양권에서는 아직 그 정도로 성숙한 판타지가 나오기는 힘들지 않을까라는 선입견을 나도 모르게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으니 바로 이 책을 읽으면서였다. 물론 일본의 판타지도 발전했지만 그들의 판타지는 완전한 상상의 세계라기 보다 현실 도피처로서의 판타지 성격이 짙었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작가의 책을 많이 읽지는 않았기에 지금까지 읽었던 몇 편의 판타지 소설을 생각하며 한 말이니 틀릴 수도 있겠지만...

표제작인 [하라바라 괴물의 날]이 책의 절반을 차지하고 나머지는 짤막한 네 편이 있는 단편집이다. 그런데 처음 이야기를 읽을 때부터 신선한 충격에 휩싸였다. 아이들이 진짜 원하는 판타지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에... 처음 작가 이름을 보고 그냥 신인인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타이완 사람이란다. 그렇기에 위에서 동양 운운한 것이다. 그 나라에도 이렇게 좋은 판타지가 있단 말인가하고. 인간이 사는 세상과 똑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전혀 다르지도 않은 세계를 그리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그 둘을 충족시키고 있다. 처음 이야기에서 제이가 지친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기한 나무 빌딩으로 휴가를 간다는 이야기에서부터 뭔가 좀 다르다는 생각이 들긴 했으나 거기에 대해 많이 신경쓰진 않았다. 그런데 제이가 우연히 내렸다가 기차를 놓치게 된 마을에서는 정말 환상적인 일들을 겪는다. 그러나 가만히 제이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가 사는 세상도 현재 우리가 사는 기준으로 생각해 본다면 환상적인 나라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하마인형이 사람의 명령에 따라 웃기도 하고 입을 벌리기도 하니 말이다.

이렇듯 제이가 잘못 들른 마을이 환상적인 것인지 아니면 원래 제이가 살고 있는 곳이 전부 환상적인 것인지 헷갈리는 상황에서 독자는 점점 그 상황에 빠져들게 된다. 게다가 제이가 자신이 속한 세상이 이상하다는 생각은 전혀 안 하고 오히려 하라바라 괴물의 날 축제가 열리는 마을을 이상하게 생각하니 독자로서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내가 보기엔 전부 이상한데... 그래도 전혀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행동해서 간신히 빠져나왔고, 제이의 세상에서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 즈음이면 독자도 안심한다. 아, 하라바라 괴물의 날에 고초를 겪었던 일이 다 헛고생은 아니었구나 하면서. 그러나 마지막 문단은 독자를 다시 환상 속으로 밀어 넣는다. 그리고는 알게 된다. 아, 제이가 사는 세상은 다 이상한 것이구나. 서로 연결되어 있던 것이고...

맞다. 모든 이야기가 조금씩은 연결이 되어 있다. 다만 한 가닥 가느다란 끈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아무런 영향을 주고 받지 못할 뿐이다. 전혀 독립된 것 같으면서도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은, 전혀 있을 수 없는 나라를 그리면서도 유치하지 않고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것 같지도 않은 느낌을 주는 그런 책... 그러나 명확히 결론 내리지 못하는 이 기분... 그게 바로 이 책을 읽은 후의 종합적인 내 느낌이라고 해야겠다. 하지만 마지막 이야기의 경우 주인공 혼자서 이야기하는 부분이 너무 길어서(중간의 [눈을 감은 다음에]도 그렇다.) 환상적인 제재였음에도 몰입하는데는 약간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읽고 나면 판타지 동화란 이런 것이구나를 새삼 느끼기도 한다. 처음 이야기에서 제이가 어느 곳으로 기차여행을 떠나는 장면에서는 로베르토 인노첸티의 <마지막 휴양지>가 생각나기도 했고 개구리가 기찻길을 점령했다는 부분을 읽을 때는 나도 모르게 데이비드 위즈너의 <이상한 화요일>이 먼저 그려졌다. 아무래도 환상책을 너무 많이 봤고 너무 좋아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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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살 로즈의 아주 특별한 일 년 스콜라 모던클래식 4
루이자 메이 올콧 지음, 이승숙 옮김 / 스콜라(위즈덤하우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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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란, 아니 무엇이든지 단순히 텍스트만을 읽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 작가가 놓여 있는(그러나 뒤에 숨기고 있는) 현실을 볼 줄 알아야 하며 당시 시대가 어땠는지도 감안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쪽에서는 순수하게 책만을 가지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거야 문학을 해석하는 다양한 방법 중 하나일 것이겠지만 여하튼 나는 하나만 가지고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쪽을 지지한다. 왜냐하면 책이라는 것은 작가가 수정해 나가는 것이 아닌데 시대라는 것은 끊임없이 변하고 때론 정반대로 흘러가기도 하니 말이다. 그러니 예전에 획기적이었던 것이라도 지금은 지극히 평범한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되도록이면 책을 읽을 때 책에 서술되어 있는 당시의 상황으로 판단하려고 노력한다. 물론 항상 그렇게 되진 않는다. 때론 읽고 나서 뭐 이런 이야기가 있나 하고 한심해 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잠시 떨어져서 바라보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구나라는 여유를 갖게 된다.

이렇듯 책 내용과는 직접적인 연관도 없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는 이유는 이 책이 현재를 기준으로 보면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소녀시절 한창 재미있게 읽었던 소공녀류의 이야기와 비슷(절대 같은 종류는 아닌다.)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셔서 졸지에 고아가 되지만 워낙에 물려받은 유산이 많아서 지내는데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 어린 소녀에 대한 이야기. 그 소녀는 항상 발랄하고 총명하며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그런 존재다. 게다가 마음까지 착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안다. 바로 여기 나오는 로즈가 그렇다. 물론 로즈도 처음에는 자신의 불행을 감당하지 못해 항상 우울해 하고 병자처럼 지낸다. 주위에는 고모도 많고 할머니들도 많지만 로즈를 위로해 줄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알렉 삼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커다란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로즈가 위험이나 위기에 처하는 것도 아닌 부유한 로즈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으며 지내는 유쾌한 일 년을 그리고 있는 이야기지만 동시대의 다른 책들과는 약간 다른 면이 나타난다. 바로 주체적인 여인상에 대한 작가의 의식이 많은 부분에서 드러난다는 점이다. 

당시 시대 분위기대로라면 부유한 집 딸들은 현모양처가 되기 위한 지식 외에는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시대였으며 모름지기 여자란 사교계에서 뭇 남성들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지내는 게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했던 시대였다. 그러나 삼촌인 알렉은 그런 여자들을 한심하게 치부하며(심지어는 자신의 누이마저도) 로즈에게 주체적인 삶을 살도록 가르친다. 하녀와 한 두 가지 물건을 나눠 갖는다고 해서 진정 자매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 시대상황으로는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획기적인 일이었다는 것은 짐작할 만하다. 아마도 요즘 아이들에게는 그들의 삶이 로망처럼 비칠지도 모르겠다. 하고 싶은 것 다 할 수 있고 실컷 놀 수도 있고. 그러나 그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생활이 가능한 데에는 분명 뒤에서 그 일들을 해주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라는 점에 더 신경이 쓰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는 거기까지 의도하진 않았을 텐데도 말이다.

루이자 메이 올컷의 유명한 작품인 <작은 아씨들>을 읽었던 추억이 아련히 떠오른다. 아마도 당시는 나를 그 자매들에게 대입했을 것이다. 지금은 딸을 대입하며 읽겠지. 그녀는 당시 소로우와 한 동네에 살며 그와 함께 산으로 강으로 다니며 자연과 더불어 교감하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물론 그때 루이자는 어린 소녀였다. 항상 주체적인 여자를 작품 속에 등장시키며 시대를 벗어나고자 했던 그녀는 여성들의 참정권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기도 했단다. 작품만 읽어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책 한 권을 읽으며 <작은 아씨들>의 네 자매도 겹쳐졌고 소로우도 겹쳐졌으며 당연히 그 위엔 로즈의 생활도 겹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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