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진짜 나일까 - 제6회 푸른문학상 수상작 미래의 고전 5
최유정 지음 / 푸른책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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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이제 막 초등학교를 벗어난 시점에서 이 책을 보니 새로운 기분이다. 그리고 한편으론 이게 과연 아이들의 생활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완전 어른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생각도 든다. 가끔 아이로부터 남자애들이 정말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처럼 싸웠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한 두 번은 선생님께 심하게 대든 친구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건주처럼 그런 아이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아이들의 생활을 일일이 파악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내 주변에서 일어난 일을 기초로 전체를 평가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건주와 같은 아이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다만 그런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아서 억지를 부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대개 동화에서 두 가지 형태의 인물이 등장한다. 건주처럼 가정에서 충분히 인정받거나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상태-즉 문제가 있는 가정-에서 학교에서 문제아로 찍히는 아이와, 은찬이처럼 학교에서 모두로부터 인정받는 그야말로 성격 좋고 공부도 잘 하지만 본 모습은 비열한 아이다. 후자의 경우 부모는 자신의 아이를 지나치게 보호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 자칫 남의 아이를 무시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도 그 두 가지 인물상이 그대로 나타난다. 다만 여기서는 은찬이가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시우라는 인물이 은찬이를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건주와 시우의 시점이 교대로 서술되다가 마지막 화해할 즈음에서는 둘을 모두 아우르는 시점으로 마무리되기 때문에 깔끔한 기분마저 든다. 아무래도 우리는 아직까지 확실하게 마무리 해주는 방식을 좋아하나 보다. 

아이들의 문제에 어른이 지나치게 끼어들지도 않고, 그렇다고 전적으로 어른은 뒤로 물러나 있는 것도 아니다. 상담 선생님이 중간 역할을 잘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선입견으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밖에 없는 학교 선생님과 달리 새로 오신 상담 선생님은-물론 직업 자체가 그렇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모든 아이들을 똑같이 생각하려고 애쓴다. 그래서 건주의 담임 선생님이 건주만 상담을 받으면 된다고 고집부리는데도 굳이 은찬이까지 상담을 받아야 한다고 우겼던 것일 게다. 문제가 발생하면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잘못이란 없는 법이니까. 그러나 담임은 끝까지 은찬이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다 마지막에 시우의 커밍아웃(?)으로 은찬이의 본 모습을 알았겠지. 그렇지만 여기서는 은찬이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는다. 주인공은 건주와 시우니까. 

초등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소위 말해서 문제아가 나오는 이야기는 많았지만 이처럼 상담 교사가 갈등을 해결하는 이야기는 거의 본 적이 없다. 어쩌면 그래서 이 책이 더 주목을 받는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말을 읽을 때부터 루이스 새커의 <못 믿겠다고?>가 생각났다. 그 책도 역시 상담 선생님이 문제아인 브래들리를 변화시키는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상담 교사가 아이에게 다가가는 방식이나 아이의 행동은 비슷하지만 아이가 변하는 계기는 차이가 있다. 그 책에서는 순전히 상담 교사와 아이의 신뢰관계가 아이를 변화시키지만, 여기서는 상담 교사의 진심을 건주가 우연히 엿듣고 난 후 변했다는 점이 다르다. 그러고 보니 이 책에서는 우연히 엿듣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 결정적인 부분에서는 모두(건주도 시우도) 우연히 엿듣게 되는데 그게 좀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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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 쫓아내기 작전 사각사각 책읽기 1단계 시리즈 6
키디 베베 지음, 김주경 옮김, 안느 빌스도르프 그림 / 주니어김영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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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며 우리집 둘째가 생각났다. 둘째에게 읽어주는데 아마 본인도 자신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제 4학년이 되는데도 툭하면 같이 자자고 하질 않나 잠이 안 들었는데 불을 끄면 무섭다고 절대 먼저 불을 못 끄게 한다. 정 안되면 강아지라도 끌어안고 잔다. 아이들이 혼자 자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무서워 하는 것이 당연하다지만 지금 몇 년이 지났는데도 똑같다.  

그럼 아이가 무섭다고 할 때 나는 어떻게 대처했더라? 좀 더 어렸을 때는 잠들때까지 함께 있어주거나 나중에 불을 꺼주었다. 생각해보니 엘로이 엄마처럼 행동한 적은 한 번도 없다. 하긴 괴물이 나타났다거나 늑대가 나타났다고 하지 않았으니 그럴 수밖에. 하지만 만약 그런 것들이 나타났다고 했다면 그때는 엘로이 엄마처럼 아이말을 믿어주고 아이에게 용기를 주는 말을 했을까. 아마도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라고 핀잔을 주지 않았을까. 그래서 사실은 읽어주면서 좀 찔렸다. 

처음에 늑대가 나타났다고 엄마에게 찾아가면 그냥 옆에서 함께 자고 다음날 또 다시 늑대가 나타났다며 엄마에게 찾아가자 이제는 함께 혼을 내주기까지 한다. 이것은 아이의 말을 전적으로 믿고 용기를 줄 뿐만 아니라 스스로 헤쳐나가는 힘을 주는 행동이다. 아이가 혼자 잠자기 시작할 때 무서워하는 것은 당연하며, 비록 처음이 아니더라도 어느 순간 갑자기 무서워할 수도 있는데 아이의 그런 마음을 아주 잘 표현했다. 뿐만 아니라 그럴 때 부모가 대처하는 방법을 아주 이상적으로 그리고 있다. 아이에게 괴물은 없다느니 용기를 가지라느니 하는 말로 설명을 했더라면 그저 그런 책 중의 하나였을 뿐이었을 게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말은 전혀 하지 않으며 아이에게 용기가 무엇인지 자란다는 게 무엇인지 아주 잘 알려주고 있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도 이야기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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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다람쥐
앤 M. 마틴 지음, 하정희 옮김, 임승현 그림 / 아롬주니어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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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성화에 못이겨 강아지를 키운 지 2년이 조금 넘었다. 우리가 키우고 나서 주위 몇 집도 영향을 받아 키우고 있다. 그런데 그 중 한 집은 유기견을 입양시켰다. 그 강아지는 아주 아기였을 때부터 키웠던 우리집 강아지보다 말을 어찌나 잘 듣던지, 우리 아이들이 샘을 낼 정도다. 가끔 그렇게 훈련도 잘 되었고 순한 녀석이 어째서 주인을 잃었을까 싶기도 하지만 이제라도 새 가족을 만났으니 다행이다. 그 강아지도 보호소에 있는 동안 마음의 상처를 받았을까. 문득 이 책을 읽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런 감정이 사람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이라지만 강아지를 키우다 보니 감정이 인간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기 때문이다. 

다람쥐라고 이름 지어진 강아지의 일대기를 강아지 본인의 서술로 들려주고 있다. 그런데 다람쥐라는 이름은 강아지의 엄마가 붙여준 이름이기 때문에 사람은 그 강아지를 다람쥐라고 부른 적이 한 번도 없다. 사람이 강아지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으니 이름이 다람쥐라는 것을 어찌 알겠나. 처음부터 누군가의 강아지가 아니라 그냥 엄마, 오빠와 함께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헛간에서 살던 다람쥐가 그곳을 떠나 떠돌아다니기도 하고 가끔은 인간의 손에 키워지기도 하다가 마침내 함께 살아갈 누군가를 만난다는 이야기는 어찌보면 뻔한 구성일 수 있지만 작가는 개가 인간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는지에 초점을 맞춘 듯하다. 특히 휴가 기간에 머무는 동안에만 키울 것이면서 입양을 해서 처음에는 정성껏 돌보다가 차츰 소홀해지고 결국 개를 키웠었다는 것조차 잊고 그냥 떠나가는 가족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무책임을 비꼰다.  

거의 대부분의 이야기가 다람쥐가 떠돌이 생활을 하는 부분을 자세하고 길게 묘사하고 있다. 요즘 우리 동화책의 추세가 상황이나 배경묘사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추세인데 이 책은 그러한 묘사가 상당히 많다. 그래서 앞부분에는 좀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게다가 로드 무비처럼 다람쥐가 끊임없이 떠돌아다니는 모습을 반복해서 묘사하니 더 그랬을 것이다. 또 힘들게 지내는 다람쥐의 모습이 안타까워서 이제 그만 좋은 주인을 만났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을 것이고(마지막에 수잔을 만나서 편안하게 생활하는 부분을 읽으면서는 그런 지루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분명하다). 태어나서부터 거의 구 년간 떠돌아다니는 개를 묘사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중간중간 다람쥐가 만나는 여러 모습의 인간을 겪으면서 다람쥐가 불평을 할 만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아마도 다람쥐가 인간의 생활이나 마음을 다 아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개의 입장에서 보아 온 모습으로만 판단하기 때문에, 즉 다람쥐에게 작가를 대입시키지 않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에 드디어 다람쥐가 에디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수잔과 함께 사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안도하게 된다. 이제 에디는 애완동물이 아니라 수잔의 반려동물이 된 것이다. 가끔 나도 혼자 있을 때 강아지에게 말을 걸곤 한다. 수잔이 에디를 만나고 나서 수다쟁이가 되었다고 하는데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 어떻게 개와 이야기를 하냐고 할지 모르지만 키우다 보면 그렇게 된다. 어쨌든 동물보호에 애쓰는 작가가 그 부분에 초점을 맞춰서 그런지 책을 읽고 나면 강아지의 입장에서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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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록달록 공화국 2 - 아이들만 사는 세상
알렉상드르 자르뎅 글, 잉그리드 몽시 그림, 정미애 옮김 / 파랑새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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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에서 다프나가 부모를 찾기 위해 떠나는 것으로 끝났다. 드디어 다프나가 어린이의 세상이 아닌 어른들의 세계로 떠나는 것이다. 과연 다프나는 그런 세상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 내지는 어떤 반응을 보이며 어떻게 변할까가 무척 궁금했다. 그런데 역시 다프나는 영리했다. 어른의 세계에서 교묘하게 적응을 하면서도 본래의 아이다운 모습은 잊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어른의 세계에서 기자 역까지 훌륭하게 소화해낸다.(현실에서는 기자 흉내를 내는 것과 기자 역할을 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동화책이니까 봐주기로 하자.)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큰 소득은 어른이지만 알록달록 공화국을 이해할 줄 아는 이폴리트를 만났다는 것이다. 그 후로 이폴리트의 활약이 크다. 이폴리트는 정형화되고 억압이 생활화된 어른이지만 내면에는 동심을 갖고 있으며 그것을 인정할 줄 아는 어른이다. 또한 무엇보다 다프나를 깊이 사랑하기 때문에 그 배경도 사랑하고 인정했던 것일 게다. 후에 알록달록 공화국의 아이들이 거기서만 자기들의 세상을 가꾸며 살 것이 아니라 프랑스의 모든 아이들을 '해방'시켜야 한다면 몰래 잠입하고 계획을 실천하는데도 이폴리트의 역할은 아주 컸다. 그렇게 알록달록 공화국 아이들은 대통령을 만나고 그들을 설득하고 그들 안에 들어있는 동심을 깨워서 완전히 새로 태어나게 만든다. 즉 해피엔딩이다. 유일하게 어른으로 남아있길 원했고 그러려고 발악했던 카시미르만 빼고. 

2권에서는 아리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적다. 아마도 후반부에는 그들의 세계를 벗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아쉬운 것은 아리가 자신의 내면의 상처를 치유했다는 단서를 어디서도 읽을 수 없다는 점이다. 아리가 그토록 어른을 혐오하게 된 것은 어려서부터 사랑을 못 받았기 때문인데 그것을 보상받거나 사랑을 받고 극복하는 과정이 없다. 물론 다프나와 계속 사랑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상처가 치유되었다고 생각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이들은 책 속에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인물을 만났을 때 거기에 자신을 대입하는데 이 경우라면 치유되지 않은 상태로 그냥 남아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지나치게 해석하는 경향이 없지않아 있지만. 

여기서는 어른을 비꼬는 강도가 훨씬 세다. 하지만 모두 현실에서 진짜로 일어나는 일들이기 때문인지 통쾌하기도 하다. 현실적이거나 비현실적인 것을 떠나서 작가의 상상력이 대단한 것만은 틀림없다. 특히 여러 놀이를 이야기하면서 어쩜 그리 현실을 잘 비트는지. 얼굴에 하얀 색을 칠하면 안 보인다고 가정하는 투명인간 놀이라던가, 어떤 직책을 잠시 맡고 있다고 여기는 역할극 놀이는 정말 그럴 듯하다. 그래, 내가 놀이의 역을 맡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훨씬 재미있게 일할 수도 있지 않을까. 작가는 어른들에게 맺힌 것이 많았던 것은 아닐까. 하긴 작가의 이야기를 읽으며 통쾌함을 느끼는 것을 보니 나도 그런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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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록달록 공화국 1 - 아이들만 사는 세상
알렉상드르 자르뎅 글, 잉그리드 몽시 그림, 정미애 옮김 / 파랑새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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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가끔 그런 이야기를 한다. 며칠만 친구들과 보내고 싶다고. 어른들의 간섭없이 자기들끼리 살고 싶단다. 그래서 먹을 것은 어떻게 할 것이냐고 했더니 미리 준비를 다 해놓으면 되다나. 문득 이 책 제목을 보자 그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러니까 아이들끼리 일정 기간 동안 생활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웬걸. 읽어보니 '세상'이라는 단어가 왜 있는지 알겠다. 잠시만 그들끼리 지내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들의 세상이었던 것이다. 

델리브랑스라는 어느 섬나라가 있다. 아니 진짜 하나의 독립된 나라는 아니고 프랑스에 속하는 섬일 뿐이다. 섬나라이기 때문에 어차피 약간의 단절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어른들이 있을 때는 그렇게 고립되거나 단절된 세상은 아니었다. 본토와 정기적으로 물건을 실은 배가 드나들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이웃 섬에 폭풍우가 휩쓸고 지나가자 도우러 어른들이 떠나면서 섬에는 아이들을 보호해줄 어른이 딱 한 명만 남게 된다. 그러나 그 어른은 가장 지독하고 못된 어른의 표상이다. 

이야기는 시작부터 상당히 비관적이다. 주인공 아리는 부모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하고, 아니 환영받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학대를 받는다. 학교 선생님으로부터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어른에 대해 좋은 감정일 리 없다. 그런데 마침 어른들이 한 명 밖에 남지 않았으니 아리에게는 아주 좋은 기회가 찾아온 셈이다. 그렇다고 아리가 처음부터 유일하게 남은 어른인 따귀 선생을 해칠 생각은 없었다. 워낙 악독하게 하니까 대부분의 아이들이 선생을 피해 아리에게 간 것이다. 그러나 어린이 책에서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는 장면이라던가 머리를 공처럼 발로 찬다는 묘사는 아무리 어린이들의 마음을 이해한다해도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아이들이 책에 나오는 내용을 현실과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작가는 철저히 어린이 편에서 이야기를 서술한다. 나도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어른을 상당히 싫어하는 사람에 속하는 편인데도 불구하고 많이 불편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아리가 바라보는 어른의 세계는 상당히 비틀리고 굴절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려서부터 사랑이라는 것을 모르고 자랐으니 당연할 것이다. 그러한 아리가 섬에 어른이 없는 상태에서 실질적인 지배자가 된다. 항상 강요만 하고 아이들의 입장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만을 강조하며 어른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어른이 되는 것조차 거부한다. 따라서 신체적 조건은 어른이 될지언정 마음과 행동은 여전히 어린이다. 그러나 모든 어린이가 어른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부모를 그리워하는 아이도 있다. 그래서 다프나는 동생이 그리워하는 부모의 소식을 듣기 위해 섬을 떠나면서 1권의 이야기는 끝난다. 

글쎄. 솔직히, 읽으면서 상당히 불편했다. 현실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을 떠나서 지나치게 앞서갔다는 느낌이 들어서다. 물론 어른들의 세계를 꼬집고 그들의 위선적인 모습을 풍자한다지만 시각이 공정하지 않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리가 그토록 혐오하는 어른의 세계와 별반 다르지 않게 섬의 아이들을 지배하는 모습을 보면서 왜 그것은 가만두는지도 의문이다. 어딘가 삐걱거리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작가 특유의 상상력이 뛰어난 것은 분명하나 아직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아니면 그런 동심이 없는 내 자신을 탓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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