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호의 곧은 붓(사관의 직필)

   董狐直筆(동호직필)

 

좌전선공(宣公) 2(기원전 607), ()나라의 권신 조천(趙穿)이 포악한 영공(靈公)을 죽였다. 이에 앞서 조천의 집안 형님뻘인 조순(趙盾)은 여러 차례 영공에게 바른말을 올렸으나 듣지 않자 나라를 떠나 망명길에 올랐다. 국경을 벗어나기 전에 영공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조순은 길을 돌려 되돌아왔다. 기록을 담당하고 있던 태사 동호는 조순이 그 국군을 시해했다고 기록했다. 조순이 이를 부인하자 동호는 그대는 정경(正卿)이란 최고 자리의 신하로서 국경을 넘어 망명하지도 않고 돌아와 국군을 죽인 자를 토벌하지도 않았으니 그대가 아니면 누구란 말이오라고 응수했다. 공자는 동호에 대해 사실을 감추지 않고 직필한 훌륭한 사관이라고 평가했다. ‘동호직필은 권력이나 권세에 아부하지 않고 있는 사실을 그대로 쓰는 사관의 정신을 칭찬하는 표현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 언론들, ‘동호직필의 의미를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좌전

 

 

* 동호직필

 

 

 

 

 

 

중국사의 오늘 :

697626(당 무측천 신공 원년 6월 정묘)

무측천이 악명 높은 혹리이자 간신이었던 내준신(來俊臣)을 주살했다. 내준신이 죽자 그동안 그에게 피해를 입었던 사람들이 서로 몰려들어 그 살을 물어뜯고 눈알을 파내고 배를 갈라 심장을 들어내는 등 시체를 마구 짓밟아 진창으로 만들었다. 역대 간신들 중 그 최후가 가장 처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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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현 2013-06-27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盾을 사전에 찾아보니 '사람 이름 돈' 과 '방패 순' '벼슬이름 윤'으로 나옵니다. 좌전이나 기타 역사서에 盾을 '돈'으로 표시한 곳이 많은데 선생께서는 '순'으로 하셨습니다. 다른 근거가 있는 것인지요.

김영수 2013-06-27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별다른 근거는 없습니다.
관행에 따랐습니다.
현대 중국어에서 순은 '둔'으로 발음하니
조둔으로 해도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관심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릎 아래

   膝下(슬하)

 

자식도 슬하의 자식이니, “슬하가 쓸쓸하면 오뉴월에도 무릎이 시리다는 등의 우리 속담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슬하란 글자대로 풀자면 무릎 아래이고 좀 더 정확하게는 부모의 무릎이다. 남의 부모를 높여 말할 때도 슬하라 한다. 그래서 일쑤 슬하에 몇 남매를 두셨습니까와 같은 표현을 쓰는 것이다. 이 단어는 효경』 「성치(聖治)에 보인다. 당나라 황제 현종은 이 슬하에 대해 어릴 때를 말한다는 주를 달기도 했다. 자식이 어릴 때는 주로 부모의 무릎 위에서 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식이 없거나 멀리 떨어져 있어 보지 못하는 것을 슬하가 쓸쓸하다라고 했고, 무릎 주변에서 놀 때의 자식이 귀엽고 키우는 맛이 있기 때문에 자식도 슬하의 자식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삼년상을 지내는 것은 자식이 태어난 후 적어도 만 3년 가까이를 부모의 슬하에서 극진한 돌봄을 받아야 하므로 이때의 은혜에 보답하는 의미라는 것이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점점 변하고 있는 지금 세태에서 슬하는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슬하는 부모에 대한 친근함과 존경을 담고 있는 단어임을 기억해 두자.

 

효경(孝經)

 

 

 

 

 

중국사의 오늘 :

26625(동한 광무제 건무 25월 계미)

광무제 유수가 혼란기에 약탈 등으로 잡혀간 노비에 대한 석방령을 반포했다. 이후 건무 14(38)에 이르기까지 12년 사이 여섯 차례의 석방령을 내리는데 그중 세 차례는 전국적인 규모였다. 석방을 거부하는 노비주는 인구를 약탈 매매했다는 죄목으로 처벌했다.

 

* 광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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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미천한 사람에게 최고의 지혜가 있다.

   下下人有上上智(하하인유상상지)

 

중국화된 불교 선종(禪宗)의 총아는 누가 뭐래도 육조 혜능(慧能)이다. 그가 남긴 어록은 부처님의 말씀에 버금가는 대접을 받아 육조단경으로 높여 부른다. 민간에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혜능은 글자도 모를 정도로 배운 것이 없었지만 깨달음을 얻은 뒤 구술한 육조단경은 중국 불교사에서 가장 훌륭한 저작으로 꼽힌다. 육조단경최고의 진리를 배우려면 처음 공부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아주 미천한 사람에게 최고의 지혜가 있다라는 대목에서 나온 말이다. 혜능이 그의 스승이 되는 홍인(弘忍)을 찾아갔을 때 홍인은 혜능이 영남에서 왔다고 하자 촌놈이 무슨 부처 타령이라고 일부러 비아냥거렸다. 그러자 혜능은 못난 사람들이나 동서남북을 따지지 부처님이 동서남북을 따지냐며 되받아쳤다고 한다. 일자무식의 혜능의 입에서 나온 번득이는 지성(知性)이었다.

 

육조단경(六祖壇經) 행유품(行由品)

 

* 혜능

 

 

 

 

 

 

중국사의 오늘 :

685624(당 무측천 수공 원년 5월 임술)

무측천이 조서를 내려 장안 내외 문무관원들 중 9품 이상인 자와 백성들을 대상으로 누구든 임용될 수 있게 스스로를 추천하라고 했다. 무측천이 격식에 매이지 않고 널리 인재를 구한 조치였다.

 

 

 

* 무측천행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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兼聽則明

   두루 들으면 현명해진다.

 

북송 시대 사마광(司馬光)이 주도하여 편찬한 자치통감의 당 태종 정관 2(628) 조항에 보면 태종과 명신 위징(魏徵)의 의미심장한 대화가 나온다. 이 자리에서 태종은 어떤 군주를 현명하다 하고, 어떤 군주를 어리석은 군주라 하는 게요?”라고 물었다. 이에 위징은 두루 들으면 현명하다 하고, 한쪽 말만 믿으면 어리석다 합니다라는 대답으로 명쾌하게 정리했다.

 

태종은 명군과 혼군을 나누는 기준에 어떤 것이 있을까 궁금했고, 위징은 여론을 두루 들으려 하느냐의 여부로 명군과 혼군의 기준을 제시한 것이다. 태종은 리더가 아무리 뛰어나도 천하의 일은 혼자 다 처리할 수 없음을 너무 잘 알았다. 그래서 늘 인재 영입에 혼신을 힘을 기울였고 그 방법으로 하나로 바른말을 두루 듣는 소통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가 역대 최고의 명군으로 평가받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이 대화에서 겸청’(兼聽)편신’(偏信, 한쪽 말만 믿다)이란 단어도 파생되었다.

 

자치통감(資治通鑒)

 

 

* 당 태종

 

 

 

* 위징

 

 

 

 

 

 

중국사의 오늘 :

1987623

국가 교육위원회에서 전국 고등교육 기관의 학생들에게 전면적으로 장학금과 학생 대출 제도를 실행한다고 발표했다. 1950년대 초부터 실시되어 온 학자금 보조 제도로는 고학생이나 학생들의 적극적인 학습욕을 끌어내기 힘들다고 보고 제도를 대폭 보완 확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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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계

   磻溪(반계)

 

북위 시대의 역도원(酈道元)은 동한 시대 이래로 전해오던 수경이란 책에 상세한 주를 달아서 하천을 중심으로 한 인문 지리서인 수경주를 펴냈다. 반계는 여기에 소개되어 있는 물줄기의 하나이다. 황하(璜河)라고도 하는데 섬서성 보계시(寶鷄市) 동남쪽에 있다. 남산에서 발원하여 북으로 흐르다 위수(渭水)로 흘러든다.

 

반계 주위에 자천(玆泉)이란 맑고 차가운 물이 있는데 이곳이 저 유명한 강태공이 낚시를 하던 곳으로 전한다. 그 동남쪽의 석실은 강태공이 머물던 곳이라고 한다. 강태공은 이곳에서 바늘 없는 낚싯대를 드리운 채 자신을 낚아 줄 사람을 기다렸고, 주 문왕이 그를 보고는 모셔와 스승으로 삼기에 이른다.

 

이 고사 때문에 반계는 훗날 현인이 은거하던 곳 또는 군주와 신하가 만난다는 뜻의 전고가 되었다. 조선 시대 실학자 유형원(柳馨遠)은 일찌감치 벼슬을 포기하고 전라도 부안에 은거하여 저술에 몰두하여 반계수록(磻溪隨錄)이란 명저를 남겼는데, 그의 호가 다름 아닌 반계(磻溪)였다. 반계와 강태공에 얽힌 고사를 염두에 두고 지은 호가 아닐까 싶다.

 

수경주(水經注)

 

 

* 강태공

 

 

 

 

 

 

중국사의 오늘 :

1060622(북송 인종 가우 55월 기유)

북송의 인종이 왕안석을 불러 삼사탁지판관(三司度支判官)에 임명했다. 이렇게 해서 왕안석의 신법(新法) 개혁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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