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장률, 2013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마틴 스콜세지, 2013
(위 두 영화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같은 것들이 이어지는 영화가 있다. 예를 들어 한국에 온 이주노동자들의 꿈에 대한 인터뷰가 이어지는 장률의 <풍경>과 같은 영화. 꿈이라...꿈. 사실 생각해보면 '꿈'만큼 조금 이상한 단어도 없다. 꿈은 실현될 수 없는 것, 가상의 것, 허구의 것 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언젠가 실현될 수 있는 어떤 것, 가능성 있는 무엇인가, 희망 같은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꿈'이라는 이 말은 그 자체만 놓여져 있을 때는 완전히 상반되는 의미를 가진 양쪽의 어느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장률이 말하는 꿈은 그 중 어느 쪽인가. 일차적인 의미는 전자에 가깝다. 이주노동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그들이 잠을 자면서 꾸었던 꿈 중에 기억에 남는 꿈이다. 질문이 영화 속에 제시되지는 않지만, 아마도 질문도 그런 것이었을 것 같다. 그들은 한국에 온 첫날밤에 꾸었던 꿈이라든가, 혹은 며칠 전에 꾸었던 꿈이라던가, 혹은 며칠을 반복해서 꾸었던 꿈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꿈들은 조심스럽게 이차의 의미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꾸었던 상당수의 꿈에서 그들은 고향에 있는 누군가를 만나거나, 혹은 그리워하던 무엇인가를 하고 있고, 그것은 동시에 그들이 가진 희망, 혹은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 '꿈'이라는 말이 가진 양쪽의 의미는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섞여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꿈'이라는 말이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이 이야기들이 어떤 거리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가장 단순하게 말해서 그들의 꿈과 그들이 현재 서 있는 곳의 차이에서 만들어지는 어떤 거리. 그들이 꿈을 말하는 이 공간들의 배경은 그들의 꿈과 거리가 멀다. 그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일하는 공간에서 이 인터뷰를 한다. 목공소, 공장, 도축장, 좁은 작업공간, 혹은 작은 자취방이나 아니면 병원. 그들은 단순하고 힘든 노동이 계속 반복되는 공간에서, 고향집에서 가족들과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떠올리거나, 제주도에서 가족과 휴양을 보내고 있는 풍경을 그린다. (이런 면에서 영화의 가장 처음에 나온 노동자의 인터뷰는 이와는 조금 다르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인터뷰를 하고 있는 공간은 출국을 위해 있는 인천공항이니까. - 조금 이상하게도 이 인터뷰는 "여기는 한국의 인천공항입니다."라는 마치 기자의 리포트처럼 끝난다. 그리고 이후의 인터뷰에서 특별히 지명이 언급되는 경우는 없다. - 이 인터뷰는 이 영화의 일종의 프롤로그라고 볼 수도 있는데, 이 인터뷰 후에 이어지는 것은 먼지가 자욱한 혹은 매우 뿌연 도로의 풍경이다. 그리고 다른 꿈과 괴리된 공간에서의 인터뷰들이 이어진다. 즉 우리는 이 뿌연 공간을 거쳐 이 '거리' 혹은 '괴리'로 들어간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에필로그가 붙기전에 이 먼지가 자욱한 도로의 풍경은 반복된다.)
즉 장률이 원하는 것은 (조금 이상하게도) 이 괴리를 계속 반복하여 지켜보는 행위인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말하는 꿈을 담은 이 음성정보와 주물이나 핏물이 쏟아지는 너무 차갑거나 너무 뜨거운 공간에서, 약간은 생기를 잃어보이는 그들이 이야기하는 장면을 담은 이 시각정보의 괴리. 장률은 그것을 계속 반복해서 우리가 지켜보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하나의 장치를 건다. 그것은 이 괴리를 붙이려는 시도의 어떤 으스스함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는데, 예를 들어 한 노동자가 말하는 꿈의 경우가 있다. 이 노동자는 꿈에서 귀신을 만나 도망다니고 불에 뛰어든 꿈을 말하고 있는데, 그가 말하고 있는 이 공간은 병원이다. 그리고 그는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큰 화상을 입은 상태이다. 이 꿈과 현실의 무서운 도킹. 혹은 무엇인가가 나타나고 사라지는 꿈을 이야기하는 이주노동자의 인터뷰 후에 저절로 마당에서 움직이는 자전거의 불가사의한 숏을 붙이는 것, 아니면 제주도에 가는 꿈을 꾸었다는 노동자의 인터뷰 후에 플랫폼의 벤치에 앉아있다가 지하철이 지나간 후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이주노동자의 숏을 붙이는 것은 꿈의 실현이나 어떤 판타지라기보다는 으스스한 느낌에 가깝다. 즉 화상을 입은 이주노동자가 꿈에서 얘기한 것이 그의 예지가 만들어낸 귀신이라면, 이는 카메라가 만들어낸 귀신이다.
그러니까 장률은 여기에서 이 괴리를, 혹은 이 거리를 붙이지말고 이것을 어쨌든 계속 지켜보는 것이 이 영화에는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어쩌면 이 영화에 <풍경>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유일텐데, 왜냐하면 이 모든 꿈들이 실현되는 것을 억지로 보여준다고 해도, 극장의 객석에 앉아서 그들을 지켜보는 우리는, 혹은 현실에서 그들을 보게 되는 우리는 결국 객석과 스크린만큼의 거리를 극복하지 못하고, 영원히 그것을 계속 풍경으로 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거리나 혹은 괴리는 다른 방식으로 건드릴 수밖에 없다고 장률은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 '다른 방식'이란 어떠한 것이 있을까. 가능한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그 하나는 반복하는 것이다. 어찌되었건 그 괴리를 다시 처음부터 반복하여 보여주는 것. 계속 반복함으로써 그 반복을 아주 조금이라도 견뎌내게 만드는 것, 그리고 그 견뎌냄이 다른 것을 불러오기를 기대하는 것. (물론 이 반복만 있는 것은 아니다. 뒤에 말하겠지만 에필로그의 색다른 시도도 하나의 방편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다른 식의 반복도 있다. 마틴 스콜세지의 자본주의 포르노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나는 단지 그 반복되는 적나라한 노출 장면들 때문에 포르노라고 부르고 싶은 것은 아니다. 방점은 도리어 '적나라한 노출' 보다는 '반복되는' 쪽에 있다고 해야할 것인데, 포르노야말로 일단 그 반복이 생명이다. 포르노도 기꺼이 영화의 하나라고 부른다면, 포르노만큼 그 내용적인 측면에서 같은 것을 반복하는 영화도 없다. 매번 거의 비슷한 내용을 단지 배우만 바꿔서, 포르노는 계속 찍고 또 찍어낸다. 그리고 이 영화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는 3시간이라는 긴 러닝타임동안 계속 같은 것을 반복한다. 조던 벨포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그 친구들은 계속 멍청한 대화를 반복하고, 코로 흰가루를 흡입한 다음 이상한 짓거리를 벌이고, 여자와 그짓을 한다. 그리고 이 시퀀스는 계속 무한히 반복된다. 다만 그 규모나 상대가 조금씩 달라질 뿐이다.
물론 나는 단지 반복했다고 해서 그것을 자본주의 포르노라고 부르는 것은 아니다(물론 여기에는 비난의 의도도 없다. 나는 포르노를 옹호했으면 했지, 욕하고 싶은 입장은 아니다). (많이 이야기된 부분이기도 하지만) 포르노와 다른 야한 이야기의 차이라면 과연 무엇을 잘라내고 있는가의 차이이다. 포르노에서 그들이 어떻게 하여 한 침대에 들어갔는가를 보여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길게 보여줄 이유도 없거니와 설혹 어떤 판타지의 충족을 위해 길게 보였주었다고 해도 상당수의 사람들은 그것을 건너뛰어 버릴 것이다. 반면 보통의 야한 이야기들은 침대도 중요하지만, 그 침대 이전도 나름 중요하다(물론 침대에서 보여줄 수 있는 게 포르노보다 화끈하지 않기 때문에도 그렇다). 즉 포르노가 침대 이전을 자른다면, 다른 야한 이야기는 침대의 어떤 부분을 자른다. 그런데 이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는 그런 측면에서 조금 재미있는데, 이 영화에서 이미 잘라내 보여지지 않는 것은 침대 이전, 아니 소비 이전이기 때문이다. 즉 자본주의의 어떤 메커니즘을 보여주기 위한 영화라면 그 영화는 소비도 보여줄 수 있겠지만, 그 소비를 가능케 해준 축적이 어떻게 이루어졌나에 비슷한 중점을 둔다. 그런데 이 영화는 벨포트 패거리가 돈을 벌게 되는 과정은 상당히 축약되어 있거나, 거의 희화화하여 오그라뜨린다. 이 영화에서 계속 반복하여 보여주는 것은 그들의 소비, 소비, 소비이다. (포르노가 섹스, 섹스, 섹스인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 갈라지는 지점이다. 이 소비, 소비, 소비의 강조가 어떤 영화적인 왜곡인가, 아니면 그것이 이 포르노적인 자본주의의 속성인가. 마틴 스콜세지의 강조는 아무래도 후자쪽인 것 같다. 즉 현재의 이 자본주의에서 축적은 그저 우스꽝스럽게 이루어진다. 거의 완벽한 사기로 자본의 축적은 가속화되고(그들이 컨테이너 공장에서 거의 사기에 가까운 전화로 처음 계약을 성사시키는 장면을 떠올려보라), 일단 한번 축적된 자본은 알아서 몸집을 불려가며, 무절제한 소비만을 반복한다고 마틴 스콜세지는 보고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마틴 스콜세지가 우스꽝스러운 화면 앵글과 시각적인 화려함과 정신없는 음악으로 수를 더 놓기는 했지만, 이 구조 자체는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이 조던 벨포트가 실존 인물이며, 이 이야기가 실화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마틴 스콜세지가 하고자 하는 것은 이 자본주의의 포르노성을 극대화하여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자본주의 스스로가 거의 포르노로 변신했기 때문이라고 그는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이 극대화된 시각적 자극을 거리낌없이 3시간 동안 반복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 반복이 다른 무엇인가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고 기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나는 묻고 싶다. 당신은 3시간 동안 꼬박 앉아서 포르노를 - 그것도 기계적인 섹스와 사정만 반복하는 - 본 적이 있습니까. 혹시라도 그런 적이 있었다면 무슨 생각이 들었나요.)
물론 이는 위험한 선택이다. 그것은 영화의 결말에 제시된 대로 보는 이의 욕망을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포르노의 이야기로 돌아간다면, 우리가(미안하다. 내가) 포르노를 보는 것은 우리의 욕망과 판타지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행위라고 말할 수도 있다. 즉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에서 포르노가 사라지지 않는 것은, 그리고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 거의 분명한 것은 그것이 우리의 환상을 이용하여 우리의 일차적인 욕구를 어느정도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다. 즉 이 반복은,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라고 말한다해도 이 반복은, 동시에 그러면서도 우리의 욕구와 환상을 충족시키며, 일시적이나마 우리를 그 환상에 젖어들게 만든다. 그리고 그 환상은 때로 거대해져 실제로 그 주인공이 되고 싶은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이 영화가 혹은 이 영화에 제시된 포르노적인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조던 벨포트가 월스트리트에 출근한 첫날 선배 브로커가 그에게 알려준 월스트리트의 첫번째 법칙이 바로 그것이다. 월스트리트에서 돈을 버는 법은, 큰돈을 벌고 싶은 고객의 욕망을 더 크게 부풀리는 것이라는 그 얘기(그것은 물론 포르노가 돈을 버는 방식과 동일하다. 고객의 욕망을 이용하여 그것을 더 크게 부풀릴수록 그들은 돈을 번다. 실물을 쥐고 있는 것은 그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화내내 이어지며, 결국 영화의 마지막까지 연결된다. 조던 벨포트의 강연을 들으며 눈을 반짝이고 있는 사람들로 끝내는 이 마지막은 이 우려를 조금은 담고 있다. 그것은 이 영화를 본 당신도 혹시 잠깐이나마 눈을 반짝이지 않으셨어요,라는 질문이다. 혹은 당신도 포르노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요,라는 질문이다.
아니면 장률의 <풍경>의 에필로그에서의 카메라의 질주라는 방식도 있을 것이다. 반복을 견디다못해 질주하고는 결국 쓰러져버리는 이 카메라. 그 카메라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장률은, 그리고 마틴 스콜세지는 질문을 제시해줄 뿐 답을 주지는 않는다. 반복을 무엇으로 받아들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