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정가제와 단통법이 같다고 하는 의견들이 많아서 과연 그런가 싶어서 찾다가 나온 글. 내용이 조금 길고, 너무 낙관적이라고 여겨지는 부분도 있으나, 읽어볼 만한 글이 아닌가 싶다. 물론 판단은 자신의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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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22 23: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1-25 0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중전과 문학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총 200킬로미터 길이로 늘어선 거주지는 남김없이 파괴되었다. 도처에 끔찍하게 뒤틀린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여전히 푸르스름한 인광이 깜빡이는 시체도 있었고 거무스름하게 타버려 원래 크기의 3분의 1로 쪼그라든 시체들도 있었다. 일부는 이미 식어 굳은 자기 몸의 지방 웅덩이에 엉겨붙어 있었다. 폭격이 끝난 며칠 뒤 바로 봉쇄 구역으로 선포된 죽음의 지대 안쪽에서는, 페허지의 열기가 어느 정도 가신 8월에 접어들어 징역대와 수감자들이 식은 잔해들을 치우는 소개작업을 시작했을 때, 일산화탄소에 중독되어 여전히 책상이나 벽에 기대앉아 있는 사람들이 발견되었고, 다른 쪽에서는 난방용 보일러 폭발로 터져나온 끓는 물에 삶아져 덩이진 살과 뼈, 혹은 산처럼 쌓인 시체들이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또다른 이들은 섭씨 1,000도 이상 올라간 열기 속에서 숯이 되고 재가 되어버려서, 생존자들이 가족의 유해를 빨래바구니 하나에 다 담아갈 수 있을 정도였다. (p.44~46) 


1943년 7월 말, 영국 공군은 미국 제8공군의 지원을 받아 함부르크와 그 일대를 연속적으로 폭격했다. '고모라 작전'이라 불린 이 프로젝트는 특정의 시설물 타격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 도시를 가능한한 완전히 파괴하고 잿더미로 만드는 것이었다. 폭격은 며칠 간 계속되었고, 이 폭격으로 하루 밤 사이에, 4000파운드 이상의 폭탄이 투하되었고, 하루에만 4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외에도 이차대전 막바지에 영국 공군은 독자적인 40만 번의 출격으로 100만 톤의 폭탄을 적국 영토에 투하했으며, 한 차례 또는 수 차례 이상 공격받았던 총 131개의 독일 도시 가운데 몇몇 도시가 거의 철두철미하게 붕괴되었고, 독일 민간인 60만 명 이상이 이 공중전으로 희생되었다. 100만 톤의 폭탄, 40만 번의 출격, 60만 명의 희생자. 때로 숫자는 무서울 정도로 잔혹하다. 그러나 그 무서울 정도로 잔혹한 숫자는 여전히 많은 것들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 숫자들은 그 이후에 대해서 아무 것도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거대한 폭격 이후 모든 것이 파괴되어 버린 공간에서 이제 인간들은 무엇을 해야할지 이 숫자는 말해주지 않는다. 대신에 이제 다른 것들이 나선다. 잔해를 치우고, 죽은 자들을 묻고, 살아남은 사람들을 치료하고 보호하고 새로운 도시를 재건해야 할, 수많은 사람들, 예를 들어 의사나 간호사, 경찰관과 소방관과 군인, 정치가와 행정가, 심리학자와 상담가, 건축가와 기술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언뜻 그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도 할 일이 있다. 철학자들은 이 파괴의 의미를 물을 것이고, 사회학자들은 이 재난이 사회에 미칠 영향을 생각할 것이며, 교육학자들은 이 재난 속에서 다음의 세대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지를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혹은 문학은? 이 거대한 공습, 폭격, 재난 혹은 범죄나 인간성 말살 속에서 문학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제발트의 <공중전과 문학>은 이것을 묻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문학이 할 수 있는 것, 혹은 문학이 해야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가장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두 단어 공중전(luftkrieg)과 문학(literatur) 사이에 놓인 이 'und'의 간극을 무엇으로 연결할 것인가? 물론 이 질문은 하나의 즉각적인 다른 문제 혹은 비판을 불러올 수 있다. 그것은 혹시 이 질문이 그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연합군의 독일 공습을 무조건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아닌가, 전쟁의 가해자인 독일 입장에서 이러한 질문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라는 물음이다. 책을 읽으면 이 질문은 오해에 가까운 것처럼 느껴지는데, 제발트의 문제 제기는 전쟁의 전략적인 부분이나, 어떤 역사적인 맥락 혹은 특정 국가를 비난하려는 의도와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즉 제발트는 영국을 포함한 연합국이 전쟁을 빨리 끝내려는 전략적인 목적으로, 혹은 독일이 자행한 폭격에 대한 보복전의 성격으로 이 폭격을 실행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일들이 일어났다'는 관점으로 이 사태를 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폭격은 어떤 특정의 목표로 실행된 것이 아니라, 단지 폭탄이 그렇게 대량으로 생산될 때부터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만들어진 폭탄은 어딘가에 쏟아부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며, 이것은 독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제발트는 글의 말미에서 이를 더욱 강조하여 말하고 있기도 한데, 독일도 게르니카, 바르샤바, 베오그라드, 로테르담, 스탈린그라드 등에서 수많은 거대한 폭격을 실행했으며, 나치스의 공군 원수 괴링도 기술적 수단만 가능했으면, 런던을 초토화시켰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제발트가 이러한 오해를 불러올 가능성을 무릅쓰고 50년도 더 지난 1990년대 말에 이 질문들을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전쟁이 불러오는 비인간성, 참화, 그 무상함에 다시 경고를 하는 목적 외에도 이것에는 크게 두 가지가 관련되어 있다. 하나는 전후 독일 사회에서 시작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집단적 망각이다. 제발트가 여러 기록과 사례를 들어 논증하고 있는 바대로, 전후 독일 사회는 이 폭격이 불러온 거대한 파괴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꺼렸으며,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으려 했다. 그것은 다시 두 가지 문제와 연괸되는데, 하나는 앞서도 이야기한 바대로 가해자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피해를 이야기하는 것이 불러올 불필요한 문제를 회피하고자 함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보다 큰 문제로 이를 일종의 부끄러운 과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나치스와 관련된 부분은 수많은 독일 국민들의 기억 속에서 잊고 싶은, 터부시되는 기억이며, 따라서 그와 관련된 이들 폭격의 참상마저도 피하고 싶고, 잊고 싶은 기억의 일부분이 되었다. 따라서 전후 독일인들은 이 죽음을 애도하고 기억하기보다는 그 시체를 '빨리 몰래 묻어버리고' 그 위에 새로운 국가와 도시를 건설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다른 하나의 문제는 보다 이 책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부분으로 그 상황에서 독일문학이 보인 전반적인 태도이다. 즉 일반 국민이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빨리 잊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할지라도 '문학'마저도 그래야 하는가, 라는 물음이다. 제발트는 전후에서 현재에 이르는 독일문학이 이 부분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으로 답했으며, 일부 이 폭격이나 공습을 다루었다고 하더라도 부적절한 방식으로 다루었다고 말한다. 즉 이 연합국에 의해 이루어진 폭격을 다룬 문학의 수 자체가 많지 않으며, 일부 이 소재를 다룬 헤르만 카자크, 한스 에리히 노사크, 아르노 슈미트, 페터 드 멘델스존 등의 작품이 부적절하게 이것을 묘사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 있어서 부적절한 방식과 적절한 방식이란 무엇인가. 제발트가 말하는 부적절한 방식이란 허구화, 문학적인 수사, 통속적인 묘사, 비유의 남용 등이다. 그리고 이의 반대편에 사실에 입각한, 냉정하고 철저한 묘사와 같은 적절한 방식이 있다(예를 들어 가장 위에 인용한 묘사 같은 것이 그에 해당할 것이다). 적어도 이러한 것을 다룰 때에는 그런 방식이 필요하다고 제발트는 본 것이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면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와 역사가가 다른 것은 무엇인가. 그런 것은 역사가들의 영역이 아닌가. 제발트는 (적어도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작가와 역사가의 구별이 무의미하다고 보는 것 같다. 그가 글에서 말하는 전체적인 맥락이나 어조도 그렇고, 그가 글에 인용한 벤야민의 문구를 미뤄보아도 그렇다. 발터 벤야민이 말하는 역사의 천사. "파편에 파편을 쉼없이 쌓아올리며 그 파편을 자기 발 앞에 내던지는 단 하나의 파국을 (본다). 천사는 머물러 있고 싶어하고, 죽은 자들을 깨우고 산산이 부서진 것을 한데 모아 맞추고 싶어한다. 그러나 천국으로부터 폭풍이 닥치더니 그의 날개를 꼼짝달싹 못하게 할 정도로 강하게 불어대서, 천사는 날개를 접을 수도 없다. 이 폭풍은 그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를 향해 끊임없이 그를 떠밀고 있으며, 그러는 사이 그의 앞에는 잔해더미가 하늘까지 치솟는다. 우리가 진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러한 폭풍이다.(p.95)"

 

아무리 역사가나 작가가 애써 뒤돌아서 이들을 묘사하려 온 힘을 다한다 해도 그들(과 우리)은 끊임없이 미래로 떠밀려 나간다. 진보라는 폭풍에 의해서 말이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고 해도 누군가는 뒤돌아 서서 무엇인가를 사실 그대로 기록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모두가 앞을 보며 나아가는 사이에 잔해는 점점 하늘까지 치솟으며, 그 잔해를 그대로 둔다면 언젠가는 그 앞 길도 잔해로 뒤덮이는 날이 올 것이기 때문이며, 예를 들어 역사가들이 그런 것을 한다고 해도 수많은 역사가들이 숫자만을 기록하느라 또 많은 것을 놓친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그 짐을 나눠져야 하며, 그것이 가장 처음의 질문, 즉 공중전 속에서 문학이 할 수 있는 것, 혹은 문학이 해야만 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제발트의 답이다. 그리고 이는 한편으로 제발트의 문학에 대한, 혹은 작가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담겨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공중전의 이후에, 아니 그보다 더한 것의 이후에도 문학과 작가는 여전히 필요하다는 자부심 말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작가는 망각에 대항하는 자이며 그의 글은 망각에 대항하는 무기이다.

 


덧1.
이 책 <공중전과 문학>에는 이 글 '공중전과 문학' 외에도 독일문학의 원로로 추앙받는 작가 알프레트 안더쉬를 비판한 '알프레트 안더쉬'도 실려 있다. 여기에도 문학에 대한 제발트의 어떤 태도가 드러나는데, 그것은 문학은 어떤 작가의 생애를 교정하거나 미화하는 도구로 이용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위에서 말한 어떤 문학에 대한 자부심과도 연관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덧2.
전체적으로 번역된 문장들이 어딘가모르게 삐걱거린다. 상대적으로 뒤에 '옮긴이의 말'은 드물게 볼 정도로 훌륭하게 잘 쓰여져 있는데, 문장이 이런 걸로 봐서는 글을 못 쓰는 분이라기보다는 번역 능력이 떨어지는 분이 아닌가 싶다.

 

덧3.
맥락은 많이 다르지만, 2014년의 한국에서 이 책을 읽는 것은 자꾸 어떤 사건을 떠올리게 만든다. 예를 들어 '집단적 망각' 혹은 더 나아가 '망각의 강요'가 불러오는 어떤 심상 말이다. 어쩌면 예전 제주나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들만 보아도 이런 기억과 애도가 없는 '집단적 망각'과 망각의 강요, 더 나아가 왜곡과 희화화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닌, 계속 반복되어 온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망각에 대항하는 우리의 작가들은 누구이며, 그들의 글은 어떠해야 하는가.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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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4-11-21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말하면 ‘아니 그럴 수가 있을까’ 할지도 모르겠는데, 저는 몰랐습니다 영국이 미국 공군 도움을 받아 독일에 그렇게 많은 폭탄을 떨어뜨렸다는 거, 아는 건 미국에서 일본에 떨어뜨린 원자폭탄... 생각해보면 피해자를 보여주는 글은 가끔 봤는데, 독일에 있었던 일은 거의 본 적이 없군요 있다 해도 알고 찾아서 봤을지 잘 모르겠지만... 폭탄을 많이 만들었기 때문에 썼다 어쩐지 무서운 말이군요 지금도 만들고 있는 무기는 어떻게 될지...

다시 생각하니 폭탄을 떨어뜨리는 것을 본 적 있지만 거기가 정확하게 어딘지 몰랐군요 영화 같은 데서 본 것 같은데... 그곳이 어딘지 나왔을 텐데 제가 제대로 못 봤나봅니다 조금 창피한 이야기군요 대충 어떤 일이 있었다밖에 모릅니다 우리나라에 일어난 일도 그렇고... 다른 것보다 책으로 가끔 그런 것을 보기도 하는군요

일본과는 다르게 독일은 그때 일을 제대로 정리하려고 했다고 하는데, 그게 꼭 그렇지도 않은 듯하네요 잊고 싶어하다니... 개인이 아닌 그 나라 사람이 모두 관계가 있기도 하니, 그렇게 하고 싶어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안 좋은 것은 보이지 않게 묻어버리자, 하는 마음은 누구한테나 있을 거예요 시간도 많이 흘렀는데 아직까지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하지만 문학은 달라야 할 것 같네요

역사가는 크게 본다면 작가는 그 안에 들어가서 작은 것도 보아야 하겠군요

제가 그런 걸 잘 보는가 생각해보면 그러지 않는 것 같아서 작가한테 많은 걸 바라는 것이 미안하기도... 이런 말을 하다니... 이것은 바라고 싶네요 사실과 다르게 쓰지 않고 좋게만 말하지 않기... 책을 보는 사람은 거기에 나온 것을 모두 확인하지 않기도 하니까요 이건 저만 그런 걸지도 모르겠네요 잘 모르는 것은 찾아보기도 해야 하는데...


희선

맥거핀 2014-11-25 00:29   좋아요 0 | URL
저도 사실은 정확히 몰랐습니다. 단지 공습이 있었다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어느 정도의 규모였는지, 그리고 그것이 독일인들에게 미친 영향이 어떠했는지 이 책을 읽고 짐작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렇게 낯선 풍경만은 아닙니다. 우리 역사 속에도 뭐랄까, 아주 철저하게 규명되어야 하는 사건들이 어떤 정치적인 논리에 휩쓸려 빨리 잊어버리자 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예를 들어 세월호 사건만 보아도 그렇고요. 세월호는 분명 현재진행형이긴 합니다만, 지금의 분위기는 이제 다 끝났다 그런 분위기에 가깝죠. 사실은 밝혀진 것이나 사건을 둘러싼 문제들은 거의 밝혀진 것이 없다고 보아도 무방한데 말이죠.

그 사건에 대해 작가들이 쓴 `눈먼 자들의 국가`를 구입해서 앞에 조금은 읽었습니다만, 그런 것도 그런 거지만, 그 사건을 우리의 작가들이 자신의 문학 속에서 어떻게 다룰 것인가의 문제도 우리 작가들은 고민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지금 이순간에도 진지하게 고민하는 작가가 있겠죠. 그렇다고 믿고 싶네요.)

다만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는가의 문제에서는 조금은 더 생각해 볼 부분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제발트의 적절한 방식이 과연 적절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또 생각을 더해 봐야겠죠.

아이리시스 2014-12-04 0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좋아요. 제가 이 책을 읽긴 했는데 깊이있게는 못 읽었고 이렇게 정리할 만큼 이해도 못하고 피상적으로 읽은 거라 당시 페이퍼 썼는데도 기억이 안 나요. 읽을 때 해당 역사를 좀 살펴야겠다.. 생각했던 정도.. 역시 재기억화에는 리뷰가 짱이죠, 그것도 맥거핀님 리뷰.. 저는 위에 스티븐 킹 소설도 읽었고.. 그렇지만 기억에 없고.. 벽장(?)으로 왔다갔다 하는 것만 기억나고..하하..

맥거핀 2014-12-08 12:18   좋아요 0 | URL
저도 아이리시스님 리뷰를 재기억화라던가, 읽을 책 고를 때 많이 활용합니다. 하하. 그냥 요새는요, 저는 리뷰를 저 스스로 기억하려고 쓰는 것 같아요. 책이 너무 좋거나 잊고 싶지 않은 부분이 있거나, 혹은 너무 문제가 있어서 반면교사로 삼고 싶거나...이 책은 무엇보다도 문학을 대하는 제발트의 어떤 자세랄까, 그의 문학에 대한 자부심이랄까 같은 것을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자부심도 없으면 책을 쓰기가, 혹은 읽기가 힘든 세상이잖아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4 - 교토의 명소, 그들에겐 내력이 있고 우리에겐 사연이 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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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제본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마지막권 '교토의 명소'편을 읽었다. 처음에는 앞서 다른 편들보다도 ('교토의 명소'라는 제목에 걸맞게) 많이 알려지고 내가 가보기도 했던 곳들 - 예를 들어 금각사(긴카쿠지), 천룡사(덴류지), 용안사(료안지) 같은 곳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조금 더 읽기가 수월하겠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왜냐하면 이번 편에서는 이전의 답사기 일본편들과는 약간 핀트가 달라진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기도 했지만, 이번 편의 포인트는 일본미(美)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정원이다. 일본인들의 정원에 대한 개념은 우리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데, 일본의 정원은 빈 마당을 꾸미는 조경(造景)이 아니라, 정원을 만드는 작정(作庭)이며, 이 정원에는 당대의 어떤 역사적 배경, 지배세력 간의 관계, 정신적인 세계, 미의식 등이 총망라되어 들어간다. 즉 일본의 정원은 시대 배경을 따라 침전조 양식, 마른 산수 정원, 서원조 정원, 지천회유식 정원 등 그 형태를 달리하여 왔으며, 이 각각의 다른 양식은 당대의 여러 요소들의 집약체라고 볼 수 있으며, 동시에 그 하나하나 자체가 당대를 말해주는 역사적 상징물이다. 따라서 교토의 명원을 순례하는 이번 답사기는 그 자체가 일본 역사를 되짚는 것이며, 더 나아가 그 모두를 아우르는 '일본미의 해답'을 찾는 과정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번 편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어떤 '배경지식'들이 꽤 필요하다. 왜냐하면 각각의 정원들이 특정의 양식과 형태로 만들어진 것에는 반드시 어떤 역사적인 배경이 있기 때문이며, 역사적인 배경을 전혀 모르고 정원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단지 경치의 일부분으로만 받아들이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이번 편은 이전의 편들에 비해 조금 딱딱한 감이 있다. 이전 편에 대한 리뷰에서 유홍준 글쓰기의 장점은 과거와 현재를 적절하게 조화시키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번 편에서는 그 조화는 사실 조금 부족한 감도 없잖아 있다. 저자 본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실제 답사를 가서 "이제 공부 끝, 답사 시작!"하면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했는데, 그 '공부 끝'이 꽤 기다려지는 느낌이랄까. 물론 유홍준 교수 특유의 핵심을 짚는 설명으로 그 공부가 그렇게 지루하지만은 않지만 말이다. 물론 그 자신도 그것을 잘 알고 있으며, 글의 중간중간에 이렇게 설명이 길어지는 것에 대한 어떤 미안함을 살짝 내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이 정원이 어떻게 아름다운가라는 문제보다도 왜 아름다운가, 이 아름다움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가를 보는 것이 결국 '답사'라는 것의 핵심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이 배경인 일본의 역사에 대해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답사기 자체로 돌아와 이야기한다면, 그 일본의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은 이 정원과 건물들의 내력을 살피는 것이다. 책의 부제인 '그들에겐 내력이 있고, 우리에겐 사연이 있다'라는 말처럼, 유홍준은 사찰과 정원에 들어서기 전에 그것이 왜 그 자리에 그런 방식으로 만들어졌는지 독자에게 '썰'을 푼다. 예를 들어 에도시대에 건립된 왕가의 별궁이자, 유명한 건축가 브루노 타우트가 극찬을 한 '가쓰라 이궁'이 왜 그렇게 공을 들여 건립되었는지 그 배경의 일단을 보기 위해서는 에도 막부와 공가(천황가)와의 관계를 알아야만 한다. 막부는 천황과 공가를 견제하고자 공가가 지켜야 할 법도를 정해 공표했고, 그것의 제1조는 "공가 사람들은 밤낮으로 학문에 전념할 것"이었다. 이는 천황과 공가는 정치에 관여하지 말고 학문과 예능에만 몰두하라는 견제를 담은 뜻이었으며, 그것이 또한 한편으로 천황과 공가가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즉 공가의 별궁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은 그렇게 해서 학문과 예능에서 높은 경지에 오른 천황의 정신세계가 담겨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왕가의 재력이나 불세출의 건축가 고보리 엔슈를 모셔올 수 있는 능력에도 그 이유는 있을 것이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것 밖에 뜻을 둘 수 밖에 없었던 공가의 어떤 심정도 그것에 들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우리는 이 가쓰라 이궁이나 수학원 이궁을 따라 살피면서 자연스럽게 일본 역사의 큰 단면 중의 하나인 쇼군과 천황의 관계를 어림하여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내력을 통해 자연스럽게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답사의 기본이기도 하다.

 

또한 더 나아가 이 책은 답사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데, 이는 각각의 사찰, 정원, 건물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양식을 아울러 살피는 것이며, 전체적인 흐름을 살피는 것이다. 책은 전체적으로 가마쿠라 시대의 명찰, 무로마치 시대의 명찰, 전국시대 다도의 본가, 에도 시대의 별궁 등을 차례로 살피는 구조로 되어 있으며, 이는 역사의 흐름을 그대로 따른 것이면서 동시에 정원 발달의 흐름과 그에 내재한 어떤 역사적인 흐름을 살피는 것이기도 하다. 책의 말미에 유홍준은 이를 친절하게 정리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정원으로 보면 가마쿠라 시대에는 용안사의 석정(石庭)과 같은 마른 산수가, 그리고 무로마치 시대에는 금각사와 같은 서원조 양식이, 그리고 그 사이에는 모모야마 시대의 다도(茶道) 문화가 그리고 에도 시대에는 가쓰라 이궁과 같은 지천회유식 양식이 발전하였다. 그런데 이 양식들이 등장한 것에는 이유가 있는데, 예를 들어 가마쿠라 시대에 선종이 새로운 사상으로 등장하면서 선을 추구하는 마른 산수가 발달하고 안정된 무가사회에서는 서원조가 탄생하였으며, 모모야마 시대와 같은 혼란기에는 조촐함을 추구하는 다도 정신을 구현한 초암 다실과 노지와 같은 양식이 발전하였고, 또 다시 에도시대라는 안정기에는 왕가의 별궁과 다이묘 정원의 비교적 화려한 지천회유식 양식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이 각각의 정원 양식에는 당대의 정치 분위기와 사회상이 반영되어 있으며, 그것은 단지 한 정원의 내력만을 살펴서는 알 수 없는 것이기도 하며, 전체적인 역사의 흐름을 차례로 살펴본 이후에만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일본의 역사는 사실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낯설다. 그것은 역사적인 배경으로 인해 약간은 의도적으로 일본사의 상당부분을 소홀히 배운 측면에도 있기도 하지만, 이 일본의 역사에는 우리 역사와는 상당히 다른 이질적인 요소들, 예를 들어 우리의 왕과 상당히 개념 차이가 있는 천황, 혹은 무사라는 집단과 그들이 이야기하는 무사도(사무라이 정신), 쇼군과 다이묘, 공가(公家)와 무가(武家), 그리고 불가(佛家) 같은 것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한편으로 중요한 것은 단지 역사적인 사실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까지 어떤 일본인의 정신세계나 정치적인 부분(예를 들어 군국주의 같은 것)에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입장에서는 일본인의 사고란 한국인의 사고방식으로 절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예를 들어 이 책에서 말하는 다도의 핵심이라고 하는 '와비사비 - 꽉 짜인 완벽함이 아니라 부족한 듯 여백이 있고, 아름다움을 아직 다하지 않은 감추어진 그 무엇이 있는 것'와 같은 것)이 있다랄까.

 

그런데 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을 이 답사기는 최대한 설명하려 애쓴다. 그리고 그것은 건물의 내력을 살피기위한 불가피한 것이지만 동시에 다른 효과를 가지기도 한다. 그것은 이 답사기 일본편들의 시작과 연관되는 것으로, 우리를 일본이라는 세계 곁으로 조금 더 가깝게 이끄는 것이다. 답사기 일본편의 첫권에서 유홍준은 우리나라와 일본의 불편한 관계를 이야기하며 어떤 균형을 잡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것은 우리의 역사, 일본의 역사를 따로 분리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한일관계사로서 양국의 역사를 보는 것이며, 그것은 싫어도 옆나라인 일본과의 향후 관계 개선과 유지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답사기 일본편 1권과 2권에서의 상당부분은 우리역사와 일본역사의 관계, 예를 들어 도래인의 흔적, 일본에 끌려간 우리도공들의 발자취 같은 것에 상당부분 지면을 할애한다. 그러던 것이 3권과 특히 이번 4권에 이르러서는 우리보다는 그들에게 조금씩 무게중심이 옮아간다. 즉 그들이 가진 특수한 어떤 것, 그들이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발전시킨 독특한 문화가 무엇인지를 보는 것이다. 그러나 무게중심이 달라졌다고 해서 말하고자 하는 본연의 것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상대방에게 전해준 것이나 우리와 비슷한 상대방의 문화를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가 가진 나름의 독특한 것이 무엇인가 보고자 하는 노력도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상대방이 가진 독특한 무엇인가를 바라볼 때에 필요한 자세를 이 책은 잃지 않고 있다. 그것은 상대방이 가진 것을 인정하고 존중하되, 우리가 가진 것에 대한 자신감과 애정도 잃지 않는 것이다. 유홍준 교수는 우리 것, 특히 백제 문화의 미덕을 이야기하며 다음과 같은 (유명해진) 표현을 썼다. 儉而不陋 華而不侈(검이불루 화이불치) -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조금 변형하여 이 책의 미덕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謙而不羨 讚而不卑 (겸이불선 찬이불비)- 겸손하지만 부러워하지 않고, 칭찬하지만 우리 것을 비하하지 않는다. 그것이 상대의 것을 대하는 기본적인 자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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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4-11-05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편이 네권으로 나온 건 많을지도 모르겠는데, 마지막이라고 하니 아쉽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와 관계있는 것부터 시작해서 이번에는 많이 줄었을 듯하네요 세번째에서도 그렇게 보였는데... 일본 역사도 어느 정도 배울 수 있겠네요 다른 나라에서는 다른 나라 역사도 깊이 공부하나요 지금 생각하니 학교 다닐 때 일본 역사는 거의 못 들은 것 같아요 우리나라와 상관있을 때만 들은 듯합니다 어쩌면 조금 있었지만 제가 잊어버린 건지도 모르겠네요 중국은 또 어땠나 하는 생각이... 언젠가는 중국편도 나오겠습니다

맥거핀 님이 쓰신 마지막 말, ‘謙而不羨 讚而不卑 (겸이불선 찬이불비)- 겸손하지만 부러워하지 않고, 칭찬하지만 우리 것을 비하하지 않는다.’ 좋네요 우리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남의 것을 칭찬해주면 좋겠죠 좋은 게 있으면 나쁜 것도 있고 그것까지도 다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것은 살아가는 것도 그렇군요

이 책을 본다고 일본을 다 알 수 없더라도 이 책으로나마 조금 알면 좋겠습니다


희선

맥거핀 2014-11-12 00:53   좋아요 0 | URL
네..이번에는 약간 일본 역사서를 읽는 기분이기도 해요. 그런데 읽다보며 느끼는 것은 참 일본이라는 나라는 역사적으로 우리와 정말 많이 다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위에도 그런 얘기를 썼지만, 그래서 일본인의 어떤 기질 같은 것은 한국인이 결코 앞으로도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까 싶어요. 가까운 나라지만 참 우리와 많이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우리 바로 옆나라이고, 우리보다 여러 특징적인 면에서 앞서 있는 나라이기도 하고, 앞으로도 우리가 영향을 받고, 영향을 줄 수 밖에 없는 나라이기도 하죠. 그러니 그들이 밉고 어떤 꺼림칙한 면이 있어도 어떤 실리적인 이유에서라도 그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될 겁니다. 상대방을 이기기 위해서라도 일단 그를 이해하여야만 하겠죠.

아무튼 저도 유홍준 교수님의 취지들에 적극 동감합니다. 과거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상대방에 관해 깊숙이 알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아이리시스 2014-11-15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안녕. (우리 사이에 인사생략 할랬지만 찔려서 그냥 함)

질문1.
1편하고 4편 리뷰를 쓰셨는데 그간 1,2,3,4편 쭉 읽었지만 1,4만 리뷰를 쓰겠다 하신겁니까, 아니면 리뷰쓰신대로 1,4만 읽으신 겁니까?

질문2.
제가 여름즈음(그러니까 6월!) 서울 갔다가 지하철 몇호선이더라, 강동/송파 어딘가를 지나는 거였는데.. 그거요.. 왜 지하철이 두갈래로 갑니까, 부산에는 그런 거 없는데..(있을지도 모름) 저는 그런 거 암스테르담..파리 그런데서만 보고 첨 봐서.. 시간 없는데.. 바쁜데..잘못타서(정확히 말하면 내릴 데 못 내려서..막 우루루 다들 내리는데 왜 다 내리는지 모르고) 식겁해서..나와서..택시 탔는데..아저씨가 제가 부산앤데 길 헤맸다고 막 이야기를 시작하니까..막상 도착해서.. 제가 급해보이니 (아저씨가) 정신없어서 미터기를 안켰다고 자체 택시비를 뜯김.. 싸게 해준거라 말했는데 믿을 수 없어요..그치만 뭐.. 어쩔 수 없었죠.. 결론은..서울 지하철 이상..한데 왜 그럽니까!!!

그 여파인지 얼마전에 발견한 건데 그때 제가 집에 오느라 서울역에서 자동기기로 티켓을 끊었는데 편도 티켓인데 할부가 무려 2..1..21개월..티켓값 5만 얼마인데 21개월!! 원래는 2개월 하려고 했었겠죠? 이것도 좀 웃긴데 5만 얼마를 왜 2개월 하려고 했지? 정신이 나갔었나봐요.어어어어엏

질문3.
이 책 네 권이 다 교토 관련인 거예요? 일본 지명이 잘 감이 안오기도 하지만 유일하게 안가보고 싶은 나라예요, 진심으로. 역사적 반감 때문만은 아니고 <금각사> 읽을 땐 교토가 가보고 싶었는데, 저는 제 스타일이 일본의 문화에서는 취할 게 별로 없을 것 같아요. 산사 같은 건 좀 궁금하긴 한데..


*
질문에 답해주시면 좋겠지만 만약 모른다고 하셔도 저는 이 책들 읽을 겁니다. 도서관에 거의 세 권씩 있는데 아무도 안 빌려가요. 이상해요. 읽어야겠다는 오기가 생겨요. 그리고 진짜 결심하게 된 건 맥거핀님 두 편의 리뷰 때문이구요!

또 올거지만, 또 어딘가 댓글 달지도 모르지만 일단 즐주말!^-^

맥거핀 2014-11-18 20:47   좋아요 0 | URL
하아(여기에는 늦게 댓글 달아서 미안하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음) 안녕.

답1.
음..읽기는 다 읽었어요. 사실 원래는 1편만 리뷰를 쓰려고 했어요. 왜냐하면 그 이후에 것에 대한 리뷰를 써도 결국은 같은 얘기를 하게 될 것 같아서..그런데 4편 리뷰 써주면 사인본 준다기에 썼습니다. 뭐 사인본에 리뷰를 판 셈이지요.

답2.
아..2호선 지선 갈라지는 거 타셨나봐요. 지금은 거기 살지 않지만, 저도 예전에 그 근처 살 때 많이 당했어요. 담에는 종착역을 잘 보고 타도록 하세요.^^

조금 다른 얘기지만, 누구나 처음 가보는 동네 가면 어리버리해지고 안하던 실수도 막하고 그러는 거죠 뭐. 저도 예전에 부산에서 버스 잘못 타서 이상한 산동네도 가고 그랬어요. 거기 버스기사분들의 놀라운 곡예 운전에 감탄하면서 말이죠. 거기는 어떻게 그런 길에 버스가 막 다니는지..무슨 롤러코스턴지 알았음..

최근에 일본에 갔을 때에도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막 우르르 내리는거예요. 그래서 잘 몰라서 그냥 앉아있었는데, 어떤 친절한 아저씨가 내리라고 손짓해줬어요. 눈치를 보니 아마도 거기가 종착역인 지하철이었던 듯..그런데 웃긴 건 지하철에 그대로 남아있던 사람들은 몇 명 있었는데, 모두 외국인이었다는 거.

오..근데 철도 좋네요. 21개월 할부도 되는군요.

답3.
1, 2권에 나라, 아스카에 대한 부분이 조금 나오구요. 그 외는 교토에 대한 부분이 많습니다. 아무래도 교토가 원체 문화유산이 많은 곳이니까요. 아무튼 취향이란 건 다 다르니까요. 저는 개인적으로는 서양 쪽에는 별로 관심이 많지 않아서요. 솔직히 서양보다는 중국, 일본, 동남아 이 쪽을 더 가보고 싶습니다.
............................

오늘 날씨가 많이 추워졌어요. 밖에 일이 있어서 돌아다니다가 조금 전에 들어왔는데, 아무래도 감기 증세가 다시 도지는지 머리가 멍하네요. 열도 조금 나는 것 같고..아무튼 아이리시스님도 감기 조심하시고 찬바람은 되도록 피하세요!

아이리시스 2014-11-19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그르니까..21개월 할부가 된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죠. 이자가 원금보다 커지려고 해요ㅋ 역시 경험이 중요해요. 음하하하. 아하, 거기가 일본이었군요?! 생각해보면 (다른 데 비해) 일본이 별로라는 느낌적 느낌이지 안가고 싶은 건 또 아니고.. 우리나라도 여기저기 다니면 좋은데 하물며 일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뭐래..)

시간여유가 있었음 되돌아갔으면 되는데 당황했죠, 노선도를 계속 보고 있었는데 그게 갈라져있다고는 생각을 안해봤거든요..(흐흠)

그 노선도도 모르는 상태에서는 가끔 당해요. 제가 파리에서 공항 가는 지하철 잘못 타서(제 기준에선 그걸 타는 게 맞았거든요, 그림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 비행기 놓치고 드골 공항에서 몇 시간 대기하고, 차지 물고, 항공권 재구입하고, 터덜터덜 파리 밤거리를 헤매고 방황한..그 유명한 일화를 예전에 말한 것 같은데..(엉엉)


서양문화든 동양문화든 역사든 그 분야 책을 열심히 읽는 분들 보면 진지한 자기 세계를 구축한 것 같아서 부럽고 존경스럽기도 합니다.. 도서정가제에 대비하는 자세로 어떤 책 구입하셨어요? 뭔가 고민하다가 어쩐지 하나도 못 살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지지난주엔가는 또 당일배송 받으려고 급하게 막 주문하다가 제가 시뮬레이션 한 것만도(더 있었을수도..) 무려 9,000원인가 쿠폰사용을 깜빡해서 역시 급충동구매는 자제하는 게 여러모로 좋다는 교훈을 뼈저리게 얻었습니다. 당일배송이 10시까진데 제 주문 시간이 9시 30분에서 10시 사이였고, 아직 10시도 안됐는데 알라딘이 급출고를 해서 쿠폰 미사용을 알게 됐을 때 취소할 시간도 없었어요(엉엉), 그나마 그 책은 당일배송도 안 되고 그 다음날 왔.............................으으억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


삶이 너무 삽질 천지예요, 맥거핀님. 감기조심하세요, 진심입니다^^b

맥거핀 2014-11-20 15:28   좋아요 0 | URL
으하..도서정가제. 제가 여러 군데 서점이나 카페에 가입해둔 게 많아서 오늘이 마지막날이라고 막 문자오고 쪽지오고 난리예요. 여기 더 할인해드립니다, 저기 더 할인해드립니다. 이래도 안살래?, `어머니, 여기가 전쟁터입니다` 뭐 이런 느낌이군요. 자꾸 마지막 날, 마지막 날 그러니까 낼부터 모든 출판사들 문닫나, 이런 생각도 들구요. (이런 날 급하게 사다보면 저도 삽질할 것 같아서 자제하고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막 조건이 좋으면서도 아닌 것 같고, 이상하죠.)

생각보다 산 거는 많지 않은데, 대신 큰 게 몇 개 있어요. 세트 같은 거는 도저히 안 살 수가 없는 가격이라서 산 게 몇 개 있고(알라딘 말고 다른 데서 샀어요. 도대체 여기는 이런 가격이 어떻게 나오나 이런 느낌. -_-), 어저께 알라딘에서 알사탕 털서 산 것도 몇 개 있고요. 반값할인 같은 거는 절대 안해, 이런 느낌의 출판사들이었는데, 하더군요. 도서정가제가 무섭기는 한 모양입니다.

저는 아무튼 도서정가제 찬성하는 입장이었는데, 글쎄요. 어떻게 시행될지는 미지수입니다. 그 단통법도 처음 취지는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상하게 되버린 것을 보면 말이죠. 출판사들 가격 내린다고 하는데, 그런 말들이 지켜질지도 궁금하고..(단통법을 봐서는 그리 희망적이지는 않군요.)

아이리시스 님은 워낙 책 많이 읽고 사시는 분이라, 이번에 뭔가 많이 지르셨을 것 같은데, 마음도 많이 급하실 것 같고...자제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지르면 편해요, 이런 말도 하고 싶은 복잡한 마음이군요. 저도 지금 최대한 문자 씹고 인터넷 안보고 그러는 중인데, 또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남은 시간을 어떻게 버텨낼 수 있을지..(잘 안될 때는 카드값 고지서를 다시 한 번 보세요.)

아무튼 이제 돈 쓸 일 많은 겨울이 옵니다. 감기조심, 삽질조심!입니다.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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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은 조금 특이한 소설집이다. 특이하다는 것은 (국내 출간본에서 나중에 추가한 '사랑하는 잠자'라는 소설을 제외하면) 각각의 소설들이 모두 같은 소재(그리고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인데, 그것은 일단 간단하게 말하면 소설의 주인공들이 모두 말 그대로 '여자 없는 남자'라는 점이다. 즉 소설의 인물들에게는 모두 현재 관계를 가지는 여자가 없다. 이 '관계'라는 것은 육체 관계라고도 혹은 정신적 관계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예스터데이'에 나오는 기타루에게는 어떤 정신적인 교감을 나누는 여자친구 구리야 에리카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육체 관계가 없고, 반면 '셰에라자드'에 나오는 하바라와 셰에라자드는 육체적인 관계를 나누지만, 그들에게는 어떤 정신적인 연관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즉 그들에게는 모두 현재 관계를 가지는 여자가 없다. 한편으로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관계'라는 말이기도 하지만, '현재'라는 말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과거의 어느 순간에는 여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스터데이'에서 기타루와 구리야 에리카의 관계는 이 소설의 시점에서는 이미 과거의 일이며, '셰에라자드'에서 셰에라자드와 하바라의 관계는 현재이지만, 그것이 이제 끝에 이르렀음을 소설은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그것은 다른 소설들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는 '현재' 여자가 없으나, 그들에게는 과거 어느 순간 여자가 있었고, 그들은 그 여자와 육체적이고도 정신적인 관계를 나누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또 이 소설들의 기묘한 공통점이 드러나는데, 그러한 생각은 어쩌면 그들의 '착각'이거나 '혼자만의 생각'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소설들의 주인공 상대역들인 여자들은 과거 그 주인공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다른 남자들과 육체적인 혹은 정신적인 관계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다시 정리해서 말하자면 이 소설의 인물들은 과거에는 여자가 있었으나 현재에는 여자가 없는 남자들이며, 그 여자들은 과거에 자신을 만나면서 동시에 다른 남자들도 만났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이것은 어쩌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는데, '여자 없는 남자들'에서 '없다'라는 말은 '현재'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시점(時點)의 의미를 담은 그 물리성을 의미하는 말로도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정신적인 없음, 혹은 아예 존재한적이 없음을 동시에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과거의 어느 순간 그들 곁에 여자가 있던 순간에도 사실상 여자는 그들의 곁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여자들은 주인공과 육체 관계를 나누는 순간에도 (육체라는 물리적인 실체는 비록 그곳에 있었을지 몰라도) 정신의 어느 부분은 자신과 관계를 나누는 남자들에게 분산되어 있었거나 어쩌면 그곳에 아예 존재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을 예를 들어 소설 '세예라자드'는 극명하게 보여주는데, 하바라와 육체적인 관계를 나누는 순간에도 세예라자드의 어떤 부분들은 과거 자신이 짝사랑하던 남자에게 가있고, 급기야는 하바라의 육체를 과거의 남자로 대체하여 관계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이 때 여자와 남자, 하바라와 세예라자드는 한 공간에 있지만,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바라가 과거의 남자로 대체되어 있거나 세예라자드의 육체는 껍데기만 남고 그녀의 어딘가는 다른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질문들이 다른 소설들에서 비슷하게 반복된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가후쿠에게나 '기노'에서 기노에게나 '독립기관'에서 도카이 의사에게. 왜 그녀는 나와 자면서 다른 남자들과 잤을까. 혹은 그녀는 그 때 그곳에 정말 존재하고 있던 것일까.

 


2.
다시 말해서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은 어떤 소재를 공유했다,라고 하기보다는 같은 테마를 반복하는 여섯 개의 변주곡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하루키는 능숙한 솜씨를 내보이며 같은 테마를 지루하지 않게 반복한다. 때로는 건조하게, 때로는 단조풍으로, 때로는 미스테리하고 음산한 기운을 담아서 말이다. 나는 이것이 하루키의 일종의 자신감이라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하루키는 이것을 하나의 소설집으로 묶어서 냈기 때문이다. 즉 하나의 책에서 같은 테마를 반복한다는 것은 작가에게는 일종의 자기복제가 될 위험성이 있기도 하지만, 독자에게도 그것이 자칫 지루한 반복처럼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루키는 분위기와 시점(視點)에 미묘한 변화를 주며 책을 끝까지 읽도록 만든다. 이것은 어쩌면 그가 말 그대로 소설가로서 구사하는 테크닉이 어느 정도 경지에 올랐으며, 그에 스스로 자신감을 가졌기 때문은 아닐까. 아니, 나는 그의 소설가로서의 테크닉을 의심하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평가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 소설집은 그가 지금까지 자신의 소설들에서 보여줬던 여러 부분들이 고르게 들어있으며, 그것을 적재적소에서 능숙하게 구사한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간의 하루키 소설에 대한 오마주로서) 이것을 섹스로 비유하자면, 그의 단편소설은 어떤 체위를 실험해보는 듯한 느낌이 있었고, 그의 장편은 그 중 그가 특히 잘하는 체위로 집중 공략해서 쾌감을 증폭시킨다는 느낌이 있었다면, 이 단편들은 짧은 단편들에서도 다양한 체위를 다양한 테크닉으로 능수능란하게 구사한달까. 그저 당신은 오르가즘에 도달할 수 있도록 감각을 모으면 되는 것이다.

 

즉 이 하루키의 소설들에는 그간 그가 다른 소설들에서 보여줬던 요소들이 다양하게 들어 있다. 예를 들어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기묘한 분위기를 띄는 소설의 분위기('기노'나 '독립기관'에서 나타나는 어떤 기묘한 사건들, 혹은 하바라와 셰에라자드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기묘한 배경), 어떤 현실적인 문제에서 벗어나 있는 주인공들(예를 들어 하루키의 소설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는 주인공을 본 기억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등등의 내용적인 부분에서도 그렇지만, 소설의 어떤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그렇다. 단적으로 말해서 소설의 시점(視點)이나 화자 같은 부분도 그러한데, 하루키의 초창기 소설들에서 화자는 항상 '나'였으며 거의 1인칭 시점에서 소설이 전개되었다. 그랬던 것이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라는 소설집에서부터 본격적으로 3인칭 시점이 등장하여, 그의 대표작인 '1Q84'같은 소설도 3인칭 시점으로 전개가 되는데, 이 소설집 <여자 없는 남자들>은 이런 시점이 혼재되어 있다. 예를 들어 '드라이브 마이 카' '세예라자드' '기노' 등은 3인칭 시점으로 그리고 '예스터데이'나 '독립기관'은 '나'가 등장하는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리고 각각의 시점 내부에서도 미묘한 차이가 있는데, '드라이브 마이 카'나 '세예라자드'가 가후쿠나 하바라에 기반한 관찰자적인 시점이라면 '기노'는 보다 전지적인 시점이며, 같은 1인칭 시점이라도 '예스터데이'는 '나'가 이야기에 보다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반면에 '독립기관'에서는 이야기의 중심에서 보다 물러나 있다(그러니 예를 들어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이 소설들에서 '나'의 존재는 왜 필요한 것일까(특히 '독립기관'과 같은 내용이라면), 흥미롭게도 이 두 명의 '나'는 글을 쓰는 일을 하는 사람인데, 이 둘은 같은 나인가, 다른 나인가, 혹은 무라카미 하루키 그 자신인가).

 

이것을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이 여섯 개의 이야기들, 혹은 여섯 개의 변주들은 묘하게 연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주제가 비슷하다는 측면에서가 아니라 소설의 형식이 낳는 어떤 기묘함들인데, 예를 들어 (위에서도 썼지만) '예스터데이'의 나와 '독립기관'의 나는 둘 다 글을 쓰는 남자이면서 동시에 '다니무라'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마지막 '여자 없는 남자들'의 '나'에는 이 소설의 어떤 인물을 끼워넣어도 그렇게 크게 무리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3인칭으로 전개되는 소설들이라 할지라도 이 소설의 어떤 인물을 다른 소설의 어떤 배경에 던져넣는다 할지라도, 예를 들어서 '드라이브 마이 카'의 가후쿠가 '기노'라는 술집에 등장한다고 할지라도, 혹은 '세예라자드'가 사실은 '독립기관'에서 도카이 의사가 사랑한 여자였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즉 다시 말해서 이 단편들은 각각의 온전한 단편이면서도 연결되어 하나의 장편처럼 보이며, 혹은 (하루키의 여러 단편들이 그랬듯) 각각의 개별적인 장편의 하나의 단초들인 것처럼 보인다. (많은 분들이 그렇게 느꼈을테지만 '셰에라자드'나 '기노' 등은 이것으로 부족한, 더 많은 이야기의 일부인 것처럼 보인다.)

 


3.
즉 <여자 없는 남자들>에 실린 여러 소설들은 과거 하루키 소설의 어떤 부분들을 더 풍성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분명히 비슷한 무엇인가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예스터데이'나 '독립기관'에 등장하는 나, 그러니까 소설가 다니무라. 그 소설의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그 화자. 그는 그렇게 특출나게 잘생겼다고도, 혹은 능력이 뛰어나다고도, 혹은 매력이 있다고도, 혹은 성격적으로 특별히 좋은 면이 있다고도 말할 수 없지만, 살아가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지도 않고, 특정의 취미가 있고 어느 정도 삶을 즐길 줄 알며, 자신의 일의 분야에서는 어느 정도의 루틴에 들어간 것처럼 보이며, 합리적인 사고를 하고, 합리적으로 행동한다. 그러나 그들 주위에는 기타루나 도카이 의사처럼 어딘지 모르게 특이한 남자들이 있었으며, 그 인물들은 그(나)의 기억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그 남자들은 죽거나, 사라진다(즉 지금은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가 없다). 즉 이 나의 주변에는 죽음이 어른거린다(그러나 이들 '나'는 죽음 근처에 있지만, 이들은 대체로 죽지 않는다. 물론 그것은 그가 소설 속 화자인 '나'이기 때문에도 그렇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여자들이 있다. 그 여자들은 대체로 외모가 뛰어나거나 아름다운 편이며, 하루키가 늘 주목하는 대로 대체로 가슴크기도 적당하다. '예스터데이'의 구리야 에리카, '사진에서 본 대로 멋진 여자였지만 실물을 마주하니 얼굴보다도 온 몸에 넘치는 순수한 생명력 같은 것이 주의를 끄는' 여자. 혹은 '독립기관'의 도카이의 그녀, 그러니까 '종합적인 존재, 강력한 자석처럼 나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여자. 그러나 문제는 그들의 내부는 여전히 미궁에 놓여져 있다. '예스터데이'에서 기타루는 구리야 에리카를 안는 것을 거의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며, '독립기관'에서 도카이는 그녀의 무엇이 사실 그를 그렇게 끌어당기는 것인지 모른다. 여자들의 내부는 거의 항상 알 수 없는 무엇인가로 가득차 있으며, 남자들은 늘 그것을 독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가후쿠의 죽은 부인이나, 하바라의 셰에라자드나 기노의 전부인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더 거슬러 오르면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의 '시로'나 <1Q84>의 '후카에리'도 마찬가지다. 여자들은 겉으로 완벽해지면 완벽해질수록 내부는 알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된다. 그리고 그녀들은 그렇게 되면 될수록 더 죽음 가까이로 간다.

 

그리고 다시 그의 반대편에 위에서 말한 평범한 '나'들을 포함한 남자들이 있다. 다시 반복하지만, 이들은 죽음의 가까이에 있지만 죽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는한, 적어도 생활고 때문에 죽음 근처에 가까이 갈 이유는 없다. 그들은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고, 그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만, 그 고민은 이상하게도 그들을 극단으로 몰아가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죽기에는 너무 쿨할 뿐이다. 그런데 여기까지가 이 <여자 없는 남자들>의 전작의 남자들이라면 이 <여자 없는 남자들>에는 새로운 유형의 남자들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독립기관'의 도카이 의사나 '기노'의 기노같은 남자들. 기노에게 보내는 메시지들은 거의 그간 하루키 소설 속의 남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처럼 보인다. 그것이 하루키의 새 소설을 통해서 느끼는 미묘한 변화다.

 

나는 상처받아야 할 때 충분히 상처받지 않았다,고 기노는 인정했다. 진짜 아픔을 느껴야 할 때 나는 결정적인 감각을 억눌러버렸다. 통절함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진실과 정면으로 맞서기를 회피하고, 그 결과 이렇게 알맹이 없이 텅 빈 마음을 떠안게 되었다. 뱀들은 그 장소를 손에 넣고 차갑게 박동하는 그들의 심장을 거기에 감춰두려 하고 있다. (p.266)

 

 

4.
마지막으로 두 가지 이야기만 덧붙이고 싶다. 하나는 '사랑하는 잠자'는 넣지 않은 편이 훨씬 좋았으리라는 점이다. 테마의 미묘한 변주를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전혀 이질적인 음악이 들어가 있으면 되겠는가. 편집 과정에서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정 넣고 싶다면 차라리 맨 뒤로 돌리는 편이 나았다. (아니면 원서에는 없지만 나중에 추가한 것이라고 최소한도의 설명을 붙이기라도 하든가 말이다. 다만 '사랑하는 잠자'의 그 뒤의 이야기가 많이 궁금하긴 했다.)

 

그리고 더 한 가지. 예전에 하루키의 소설들에서 늘 어떤 강조점, 방점들이 거슬린다고 했는데, 방점이라는 그 자체가 거슬리는 것인지, 그 '형식'이 거슬리는 것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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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4-09-24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에서 옛날에 여자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없었던 거나 마찬가지였다는 말을 보니 남자들이 조금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느꼈을지 못 느꼈을지 모르겠군요 아주 모르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하네요 그런 일이 소설에만 있을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드는군요 그리고 없다고 하는 말을 볼 때는 어떤 제목이 생각났습니다 ‘지금은 없는 공주를 위하여’예요 바로 떠오른 건 아니고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생각해내고 ‘이 소설도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이네’ 했습니다 다른 건 생각 안 나고 제목만 생각났습니다 단편집입니다 그걸 봤는지 안 봤는지... 봤지만 잊어버렸겠지요

어쩐지 알 수 없는 여자를 말하는 것처럼도 보이는군요 꼭 여자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 무엇인가를 가지려고 애쓰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것은 사람 마음... 자신이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사람도 있군요 자기 마음을 다 드러내고 살기는 어렵겠죠 그런 것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가끔은 거기에 빠져보는 것도 좋을지도 모르죠 이렇게 말하는 저는 그러지 않을 테지만...

언젠가 이 가운데서 장편으로 나오는 것도 있을지 모르죠 무라카미 하루키가 건강하게 지내고 앞으로도 소설을 쓰면 좋겠군요


희선

맥거핀 2014-09-24 12:14   좋아요 0 | URL
아 `지금은 없는 공주를 위하여`는 저도 가지고 있는 단편집입니다...라고 쓰고 찾아보니 없군요. 아무래도 알라딘 중고서점에 팔았던 듯 싶습니다. 무슨 물고기에 대한 얘기가 있었던 기억이 나는데..

조금 다른 얘기겠지만, 저는 하루키 책들을 거의 학교 도서관에서 읽었습니다. 그런데 학교 도서관에는 하루키 소설들은 거의 책들이 검정색 하드커버로 다시 제본이 되어 있어요. 하도 많이들 빌려가서 책표지가 너덜너덜해진 탓이지요. 그래서 늘 그 원래 표지가 어떤건지 궁금했습니다. 나중에 그 표지를 찾아보니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더군요(솔직히 너무 촌스러웠습니다). 물론 그 표지들도 최근에 보니 또 바뀌기는 했습니다. 그리고 단편집들도 새로 출간된 것들이 많더군요.

제가 (꼭 하루키 아니더라도) 단편소설을 좋아하는 까닭도 있습니다만, 하루키 소설들은 아무래도 단편이 더 좋아요. 안 끝날 것 같은데, 툭 끝내버리는 그 심플함이 하루키 단편들의 매력입니다. 확실히 하루키 소설들은 궁상맞게 보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있어요. 왠지 재즈 음악을 틀고 맛있는 수입맥주(되도록 이름이 어려운걸로)라도 하나 들고 봐야할 것 같은 느낌입니다.

2014-09-30 0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4-11-15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제가 알기론) 하루키 팬들중 거의 유일하게(아니 드물게), 에세이,단편 다 때려치우고 하루키 장편 좋아하는 신기한(아니 독특한) 팬입니다.. 저는 그 세계에서 나오고 싶지 않아요. 단편은 제가 원래부터 장르 자체를 싫어하니 그런 듯한데 좋아할 거예요, 장르 편식 안하고, 좋아하려고 하는데, .... (툭 끝난 댓글)

맥거핀 2014-11-18 20:33   좋아요 0 | URL
하..그쵸. 하루키 좋아한다는 사람들은 대부분 단편이나 에세이를 많이 이야기하는데..드문 팬이군요. 저는 솔직히 하루키의 작가인생 초반의 장편들은 그닥, 이었는데(특히 `세계의 끝과...` 이거는 읽기가 힘들더군요.) 최근에 나온 장편들은 좋더군요.

저는 하루키 말고도 대체로 단편들을 더 좋아해요. 아무래도 읽는 끈기가 별로 없어서 그런 모양. 최근에 현대문학에서 나온 `세계문학 단편집` 세트를 샀는데, 그건 언제 읽게 될지...
 

 

 

(<명량>, <타짜 - 신의 손>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명량, 김한민, 2014

 

모르면 호로자식이제. 1700만이 넘게 든, 지금도 어딘가에서 흥행신기록을 이어가고 있는 김한민의 <명량>에서 (의도치 않게) 많이 회자되고 있는 대사이다. 왜병들에 맞서 나라를 수호하는 이들의 노력을 모르는 후세인은 호로자식이라는 영화 속의 이 말이 그 이후에 여러 글에서 많이 인용된 것은 물론 이유가 있다. 일차적으로는 그것이 다른 글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영화 속에서 영화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대화 혹은 훈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상한 인터랙티브. 그것은 영화 안의 인물이 스크린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이상한 순간이면서도, 동시에 그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을 이상한 동질감으로 묶어 주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래, 이 영화를 보러 온 우리는 적어도 호로자식은 아닌거야. 그 기이함이 내포하는 어떤 함의들은 다른 글들에서도 많이 언급되었기 때문에 길게 할 말은 없지만, 다만 나는 왜 여러 수많은 단어 중에서도 하필이면 '호로자식'이 쓰였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어쩌면 이것이 이 영화가 가지는 어떤 정체성을 설명해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졌다.

 

호로자식(혹은 후레자식)이라는 말의 어원을 살펴보면 여러 설명이 나오는데, 예를 들어 '호로'를 오랑캐를 뜻하는 호노(胡奴) 혹은 호로(胡虜)로 보는 것, 혹은 '홀의'에서 변형된 것으로 보는 것이 그것이다. 즉 호로자식이라는 말은 오랑캐 노비(포로)의 자식이거나, 혹은 '홀의 자식' 즉 아버지 없이 어머니 홀로 키운 자식이라는 해석이다(사실 이 어원설은 정확하다고는 볼 수 없을 것 같고, 다만 여러 견해들 중의 하나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다만 한 가지를 추가하여 말하자면 전자의 견해로 본다면 사실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는데, 이 어원설과 연관된 부분에 병자호란 이후 청에 포로로 잡혀있다가 돌아온 여자들('환향녀(화냥년)')이 낳은 자식이 '호로자식'이라는 해석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해석이라면 사실 이 영화 <명량>에서 이 단어가 사용되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볼 수도 있는데, 병자호란은 임진왜란 이후에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오랑캐이든 혹은 홀의 자식이든 간에 이 두 가지의 설명이 공유하고 있는 부분은 있다. 즉 이 '호로자식'이라는 말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자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결국 이 영화가 지향하는 것이 여기에 은밀하게 드러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가 결국 원했던 것은 어떤 '교육용 비디오'가 아닐까 하는 물음이다.

 

교육공학적으로 볼 때 교육용 비디오가 가져야 할 지향점은 명백하다(여기에 전공을 써먹게 될 줄은 몰랐다). 예를 들어 몇 가지 언급되는 지침들이 있다. 초기의 흥미유발과 긴장감 유발이 되어야 하며, 극적 효과를 가져야 한다. 적절한 장면에서 무엇을 다룰 것인지를 미리 알려야 하며, 매 장면의 도입에서 특정의 사인이 필요하다. 반복, 재예시, 비교/대조 등의 기법을 적절히 활용한다. 스타일의 일관성이 필요하다. 명료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재정리, 요약, 일반화 등을 통하여 무엇을 다루었는가를 알려주도록 한다 등등. 이런 지침들은 일반 영화와도 연관되는 부분이 없다고 말하기 어렵지만, 상충하는 부분이 많다. 즉 다시 말해서 사실 많은 영화들에서 이런 지침들은 필요가 없다. 초기의 흥미나 긴장감 유발이 필요하지 않은 영화도 많고, 스타일의 일관성이나 명료함은 도리어 일반 영화들에서는 독이 되는 면도 있다. 재정리나 요약 등도 일반적인 영화에서는 불필요하거나 영화의 완성도를 망가뜨린다. 즉 '교육용 비디오'의 가장 중요한 지점은 그것이 좋은 비디오(영화)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그것이 교육적인 효과를 가질 수 있는가, 혹은 없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김한민 감독의 <명량>은 이 교육용 비디오의 지침들을 충실하게 따른다. 불가능한 싸움을 시도하는 이순신 장군(최민식)의 모습에서 긴장감이 유발되며, 분열 양상을 보여주는 왜의 진영과 우리의 진영은 이상한 대구를 이룬다(즉 분열된 인물들 속에서 이순신 장군만이 중심을 잡고 있다). 인물들은 전형적이며 대체로 그들의 성격은 고정되어 있다. 샷의 구성은 거의 관습적이며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며, 친절한 반복 설명을 피하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는 마지막 친절한 요약정리와 부연설명을 빼놓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명량>은 상업영화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속살은 거의 교육용 비디오와 동일하다. 물론 어떤 영화들(사실 거의 모든 영화들)은 특정의 메시지를 담는다. 때로는 우리는 그것을 '교훈'이라고 약간은 비꼬는 의미를 담아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로 많은 영화들에서 우리가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것은 이 메시지가 적절하게 감추어져 있거나 교묘한 메타포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한민 감독의 <명량>은 이보다 더 노골적이다. 아니 그 노골적인 메시지를 굳이 숨기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이 영화가 가지는 전략이다.

 

그것이 노골적이지만 거부감을 중화시키면서 1700만이라는 숫자를 끌어들일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즉 이순신 장군은 어떤 이념과 사상에도 벗어나 있는 말 그대로 국민적인 영웅이고,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감독은 보다 노골적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도 괜찮다, 아니 오히려 그것이 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야기의 참신함이나 구성의 독특함이 아니고 모두 아는 이야기를 최대한 멋지게 그려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이겼다는 사실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다. 우리는 누가 이겼나를 궁금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승리가 얼마나 멋진 것이었나, 그것을 눈 앞에서 보고 싶은 것이기 때문이다. 즉 여기에는 관습적인 구도와 관습적인 샷이 필요했다. 새로운 구성과 새로운 샷은 관객을 어지럽게 만들 뿐이고, 기존의 것들을 보다 크게, 보다 세게, 보다 웅장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고, 감독은 판단했을 것이다. 보다 노골적으로 말이다.

 

<명량>의 전반부는 지루하고 조금은 따분해보였지만, 후반부 해전 씬으로 넘어가면서 점차 영화는 활력을 되찾는다. 나는 그것이 처음에는 영화의 클라이막스가 결국 해전이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점차 이상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처음의 해전의 준비나 우리 진영의 대립 같은 부분은 보다 사실에 가까운 부분, 혹은 사실에 기반한 고증들이 필요한 부분이고, 나중의 해전은 보다 허구에 가까운 부분, 혹은 상상의 나래가 필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즉 해전에 대해서는 우리는 불가능한 승리를 알고, 약간의 전술에 대해 들어서 알지만, 사실 세부적인 전황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런데 이 영화 <명량>은 그 해전의 시시각각의 흐름을 마치 우리가 옆에서 보는 것처럼 묘사해준다. 다시 말해서 영화 <명량>은 고증할 수 있는 부분은 부실한 묘사를 하거나 어물쩡하게 넘어가거나, 왜곡된 묘사를 하고, 고증할 수 없는 부분은 공들여서 마치 사실을 보여주는 것처럼 묘사한다(나는 단순히 어떤 그 해전의 불가능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결과만을 놓고 봐서도 불가능한 승리였음이 사실이므로, 그 해전에는 분명히 불가능해보이는 무엇인가가 들어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정씨 여인(이정현)이 치마를 벗어서 흔드는 장면도 불가능한 것이라고 비웃음을 당하지만, 그런 것이 실제로 있었지 말란 법은 없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알 수 있는 것에는 지루해하고, 나는 결국 알 수 없는 것만을 즐겁게 보았다. 혹은 이 교육용 비디오는 교육해야 하는 것은 어물쩡 넘어가고, 교육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공을 들여 정밀하게 교육했다. 나는 무엇을 보았던가.

 

 

 

타짜 - 신의 손, 강형철, 2014

 

영화를 같이 보고 나온 분은 이런 말을 했다. 아니 뭐 도박을 벗어난다고 하더니, 결국 도박으로 복수하고, 도박으로 행복해지는구만. 나는 사실 그것이 '타짜'라는 영화, 그리고 그 영화가 가지는 어떤 딜레마를 뭉뚱그려서 이야기해준다고 생각한다. 타짜에서 계속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메시지가 있다. 도박을 끊어라, 도박을 끊어야 행복해진다. 그러나 영화 속 어떤 인물들도 이 메시지를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영화 속 인물들이 이 메시지에 따른다면 영화(혹은 만화)가 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박 끊고 성실하게 벌어서 성실하게 사는 게 도대체 무슨 영화가,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겠는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예 그 메시지를 없앨 수는 없다. 그러므로 영화 속에서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메시지는 결코 전면에 나서지 않고 은밀하게 암시될 뿐이며, 그것은 결말에서도 마찬가지다. 고니(조승우)가 나온 1편의 결말도 어딘지 모르게 어물쩡 넘어가는 느낌이 있으며, 대길(최승현)이 나온 2편의 결말도 그런 면에서는 비슷하다.

 

다만 내가 느낀 차이가 있다면 2편은 보다 노골적이라는 것이다. 1편은 흐릿하고 모호하게 처리했지만, 2편은 이것을 마치 해피엔딩처럼(혹은 눈밭의 광땡처럼) 찍었다. 글쎄, 영화를 본 분이 있다면 질문을 던지고 싶다. 이것은 해피엔딩인가, 아닌가. 아니면 질문을 이렇게 바꿀 수도 있다. 그들에게 남겨진 돈 때문에 그들은 해피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 이것은 마치 감독의 전작 <써니>를 연상케 만드는 부분이 있는데, <써니>도 이 마지막 장면을 해피엔딩처럼 보이게 찍었기 때문이다. 아니, 나는 해피엔딩이 아닌데 해피엔딩처럼 '보이게' 찍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보기에 따라 해피엔딩일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감독 강형철은 두 번 모두 그것을 행복한 무엇으로 보이게 했으며, 그 무엇에는 어쩌면 구린내 나는 무엇인가가 담겨 있을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그 구린내 나는 무엇 중의 하나는 단적으로 '돈'과 같은 것, 혹은 돈으로 이루어지는 행복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돈이 스승이고, 돈이 무엇이라도 규정한다는 영화 속 타짜들의 말은 단지 타짜들의 말일 뿐인가, 아니면 결국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함의인가.

 

이 영화의 샷들은 <명량>과 거의 대척점에 서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특히 영화의 초반부부터 중반까지 영화는 계속 화려한 잔재주들을 구사한다. 이야기의 속도감도 있지만, 샷의 어떤 속도감과 재기발랄함이 눈을 즐겁게 한다. 그런데 그것이 계속 지치지 않고 이어지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재기발랄한 잔재주들은 결국 무엇을 위함인가. 이것은 영화의 내용과도 연관되는데, 영화의 내용으로 비추어 볼 때 화투판에서 어떤 잔재주들, 예를 들어 패를 돌린다거나, 패를 화려하게 섞는다거나 하는 등의 손기술들은 다른 무엇을 숨기거나 무엇을 바꾸기 위함이다. 즉 (영화 속 이야기로 돌아가면) 여자가 팬티를 슬쩍 보여줄 때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며, 시선이 그 쪽으로 돌아간 자들은 반드시 어떤 큰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 영화는 계속 잔재주들을 끊임없이 구사한다. 그리고 그 잔재주들은 우리의 시선을 다른 무엇으로 돌리고자 함인 것 같다. 그 우리의 시선 이면에 있는 것들, 그래서 우리가 대가를 치른 것은 무엇일까.
 
즉 잔재주들을 보는 것은 즐겁지만, 그 잔재주들이 과해지면 다른 부작용을 낳는다. 그것은 그 잔재주 이면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이것은 영화의 패착일까. 혹은 도리어 영화의 노림수일까(이것은 어쩌면 대길의 전략과 비슷한 것일까. 마지막 대길의 전략은 잔재주를 일부러 내보이는 것이다. 즉 그 잔재주를 일부러 잡아내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전략이 성공하려면 전제가 있는데, 그 이면에는 다른 잔재주가 없어야 한다. 즉 그 이면은 깨끗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이 깨끗했던가. 그것을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영화의 노림수라고 해도 여전히 뭔가 꺼림칙함이 남는 것은 이 영화는 한끗이 장땡을 이길 수 있다고 말하고자 하는(혹은 그것을 말한다고 내세우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끗이 장땡을 이길 수 있는 데에는 결국 아무런 기술이 없다, 그것에는 예를 들어 대길의 진심 같은 것이 들어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사실 이 영화는 그 속에 다른 기술을 슬그머니 감추고 있다. 이 점철된 잔재주 같은 것들 말이다.

 

그래서 감독의 전작 <써니>와 마찬가지로 영화는 즐겁게 보았지만, 이 즐거움 속에 어딘지 모르게 개운하지 않은 뒷맛이 남는다. 무엇인가가 빠져나간 것 같은 느낌. 어쩌면 영화 속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지금까지 수술당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그 화려한 손기술들, 혹은 화려한 샷들에 취해 있는 사이에 말이다. 당신의 셔츠를 슬그머니 올려보라. 어쩌면 무엇인가 수술 자국이 남아 있지 않은지.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

 

아무튼 두 영화는 흥행했거나, 흥행하고 있다. 스크린 독점에 대해서, 혹은 영웅을 갈망하는 사회에 대해서, 심지어는 박근혜 지지자들에 대해서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잘 모르는 것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나는 박근혜 지지자가 아닌데도 그 영화 <명량>을 보았다는 사실이다). 다만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두 영화 모두 노골적이라는 사실이며 그 노골적인 전략이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노골적인 교육용 영화, 그렇기 때문에 또한 노골적으로 상업적인 영화. 아니면 그 반대. 노골적인 상업적 영화, 그렇기 때문에 또한 노골적으로 교육적인 영화(이 시대에 돈을 벌기 위해서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최근에 한국영화들을 보면서 우려되는 것 중의 하나는 위의 영화들 외에도 점점 노골적인 영화들이 늘어간다는 것이다. 점점 노골적으로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것은 그 노골성이 성공을 거둘수록 더욱 심화될 것이다. 영화는 점점 프로파간다와 경계가 흐려지고, 그것은 단지 영화만이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그럴수록 점점 그들을 구별해 내지 못하며, 그 어딘가에서 "나를 가르치려 들지마라!"고 외치며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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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4-09-18 0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때문에 사람들이 이순신한테 관심을 많이 갖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그것과 함께 우리나라 역사에도 관심을 갖겠죠 이 영화 교육용으로 좋을지도 모르겠군요 옛날에 우리나라에 이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줄 때... 어물쩡 넘어간 것은 영화 밖에서 제대로 배우기를 바란 건지도 모르죠 관심이 죽 이어지면 좋을 텐데... 이렇게 말하지만 저도 잘 모르는군요 오래전에 조금 배운 것만 알고 있어요 역사를 이야기할 때 영화는 그것을 어떻게 나타내는 게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군요

도박을 끊으면 좋겠죠 하지만 영화에서 그러면 재미없죠 저는 이런 생각을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소설(그런 소설만은 아니군요 다른 소설도 다 그렇게 생각해요)을 보면서 합니다 소설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겠지 하고... 잔재주에 마음을 쓰고 있을 때 무엇인가를 잃을 수도 있다니, 조금 무섭기도 하네요 정신을 차리고 봐야 할지, 그것을 즐기면서 봐야 할지...

영화에 감독 자신이 넣고 싶은 것을 넣기도 하겠지만, 자기도 모르게 무엇인가를 넣는 일도 있지 않을까요


희선

맥거핀 2014-09-18 11:36   좋아요 0 | URL
제가 더 '명량'이라는 영화에 실망한 이유는 아마도 감독의 전작을 좋게 본 탓일 겁니다. 표절이라는 얘기도 있었지만, 뭐 저는 나름대로 괜찮게 봤었거든요. 원래 잘 못하는 사람이 그러면 그러려니 하지만,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하면 실망이 더 큰 법이죠.

아무튼 노골적으로 한다는 것은 그 분야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죠. 위에 두 감독들이 몰라서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근데 그거는 결국 제 살 깎아먹기라고 봐요. 거기에 관객이 길들여지면, 그 이후에는 더 노골적이 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겠죠.

저도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는 전혀 불만 없고요. 이순신 장군에 대해 아직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점들을 더 이야기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영화가 생각보다도 좋지 않아서 실망했을 뿐입니다. 교육용 비디오 이상의 예술품을 기대했던 것은 제 기대감이 너무 큰 탓이겠지요.

희선님은 도박 같은 것은 전혀 안 하실 것 같기에...저는 뭐 도박까지는 아니고 맞고 정도는 가끔 칠 때도 있는데.

2014-09-22 0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9-24 1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립간 2014-09-18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라는 장르는 기수(이성)를 움직이기보다 코끼리(감성)를 움직이므로,

교육용 비디오는 교육해야 하는 것은 어물쩡 넘어가고, 교육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공을 들여 정밀하게 교육했다- 는 것이 가능하고

재기발랄한 잔재주들은 결국 무엇을 위함인가-라는 질문이 필요없지 않을까요.

맥거핀 2014-09-18 11:56   좋아요 0 | URL
솔직히 말해서 제가 댓글을 잘 이해를 못했습니다.^^

영화는 감성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위 질문들은 필요가 없다...? 이런 의미인 것 같은데..그 두 부분이 어떻게 연결을 시키면 될까요?

마립간 2014-09-20 11:39   좋아요 0 | URL
반론이기보다는 ... `명량` 영화를 보지 않았지만, 제 주위 평은 대부분 부정적입니다. `타자, 신의 손`는 줄거리만으로도 맥거핀 님의 의견에 동감합니다.

제 댓글은,
영화가 감성만을 다루는 것보다 감성을 주로 다룬다. 질문이 필요 없다기보다 `몸`이 먼저 알아야 한다. - 이런 의미입니다.

맥거핀 2014-09-19 15:38   좋아요 0 | URL
댓글이 늦었습니다.

네..물론 맞는 말씀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영화의 감상, 혹은 해석에 있어서 감성의 문제가 당연히 우선이 되겠죠.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여전히 감성은 다루기 어려운 미지의 영역이므로) 비평 같은 부분에서는 잘 이야기되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죠.

아..그리고 태클은 아니고요. `신의 한수`가 아니라 `타짜-신의 손`입니다. `신의 한수`라는 영화는 따로 있기에..혹시 댓글을 읽으시는 다른 분이 오해를 하실까봐.^^

마립간 2014-09-20 11:39   좋아요 0 | URL
오타 수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