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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조선일보 기사를 잠깐 봤다. 평소같으면 지나칠 신문이지만, 책에 관계된 기사라 잠깐 눈길이 갔다. '한국인의 모순... "책도 안 읽으면서 노벨 문학상 원해"' (제목부터가 조선일보스럽다.) 지하철에서 인쇄매체를 들고 있는 사람이 (토익책, 전공서적, 신문 등등 합쳐서) 수백명 중에 12명 뿐이라는 이야기(왜곡과 과장이 심한 조선일보지만, 내 경험상 딱히 부인하기도 힘들다), 그리고 성인의 연간독서율은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이야기. 

 

뭐 멀리 갈 것도 없이, 나만 해도 독서율이 점점 떨어지는 것 같다. 특히 요즘에 들어서는 책이 잘 읽히지가 않는다. 어디를 이동해야 할 일이 있을 때는 책 한 권이라도 가방에 들어있어야 안심이 되는 편이지만, 요즘에 들어서는 그 안심을 직접 꺼내 확인해보는 일이 드물다. 대신 반쯤 홀린 듯한 눈으로 멍하게 스마트폰을 꺼내, 새로나온 기사가 없는지 뒤적거리고 있다. 스마트폰에서는 계속 놀랄만한 이야기들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니까. 예를 들어 2월 17일자 중앙일보 뉴스 '박 대통령 "모두 물에 빠뜨려놓고 꼭 살려내야할 규제만 살리도록 전면 재검토"' (오마이갓. 만약 9.11후 미대통령이 "건물을 무너뜨려" 어쩌구 하는 발언을 했으면 미국에서는 어땠을까. 아무래도 그분은 생각보다 교묘한 것 같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얘긴데, 이 정부의 기본 전략은 아무래도 '쓰레기에다 더 큰 쓰레기를 끼얹어 예전 쓰레기를 잊게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어쩌면 나는 거기 낚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몰아닥치는 쓰레기들에 정신이 팔려 가방 속의 안심을, 혹은 의식을 잃어가는 중은 아닐까.

 

 

책이 잘 읽히지가 않는다. 그런 와중에서도 책에 대한 욕심은 줄지 않아서, 쌓아놓은 책들의 탑은 점점 높아만가고, 도무지 낮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서평단 도서를 두 권 또 추가하는 것이 잘하는 짓일까.) 다만, 가까운 세계에 조금 더 발을 디디고 있는 이야기들을 보고 싶다. 어딘가 붕 떠 있는 듯한 이야기들은 거기에 미끄러져 들어가는 데, 혹은 다시 빠져나오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카인>과 <그들>이 그랬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또 너무 가까운 세계에 깊숙이 들어가 있는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쪽의 책들은 영 당기지가 않으니...나는 또 여전히 그 사이에서 어중간하게 미적미적거리고 있나보다. 의식을 잃어가면서, 현실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신을 차려야지, 정신을!)

 

 

 

피에로들의 집, 윤대녕, 문학동네

 

아무래도 윤대녕의 소설을 첫등에 꼽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윤대녕의 소설이라고 하면, 아주 오래전 어느 지방 소도시에 있을 때 윤대녕의 신작을 사러 돌아다니던 일이 떠오르는데(인터넷서점의 당일배송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고릿적 시절 얘기다), 온 시내를 다 돌았음에도 결국 책을 구하지 못하고, 대신 윤대녕 소설에서 막 튀어나온 것 같은 쓸쓸한 모양의 도서관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그 곳에 갇혀있었던 것 같은 사서에게 윤대녕의 예전 소설을 빌려 거기에 만족해야 했던 어느 날이 떠오른다. 윤대녕의 이 책을 읽으면 그 때의 책을 구하러 다니던 열정이 되살아날까.

 

 

지극히 내성적인, 최정화, 창비

 

처음 들어보는 작가인데, 책 소개를 보니 흥미가 생겨서 골랐다. (책 소개로 미루어보건대) 윤대녕의 키워드가 '쓸쓸함'이라면 아마도 이 작가의 키워드는 '예민함'인 것 같다. 하긴, 지극히 내성적인,이라는 말은 지극히 예민한,이라는 말로 바꿀 수도 있을 것이고, 예민함이란 소설가에게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덕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단길, 김원일, 문학과지성사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흘러도, 어떠한 것은 계속 남아있다. 이제 칠순을 훌쩍 넘긴 노작가가 소구하는 아직 끝나지 않는, 끝날 수 없는 풍경. 그 풍경 속에 조용히 들어가봐도 괜찮을 것 같다.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되는 법, 모신 하미드, 문학수첩

 

이 책은 전적으로 작가의 전작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를 읽고 받았던 강렬한 인상에서 고르게 되었다. 책 소개를 보니 이야기를 펴나가는 방식에 있어서 언뜻 <주저하는 근본주의자>가 연상되기도 하는데, 확실한 것은 책을 읽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나눔의 세계 : 알베르 카뮈의 여정, 카트린 카뮈, 문학동네

 

휘성이 부릅니다. '안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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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6-03-04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나눔의 세계를 넣었다가.. 소설인지 아닌지 조금 헷갈려요. 그리고 떠오르는 과 윤대녕 두 권이 저랑 겹치네요. 화이팅 ~~

맥거핀 2016-03-04 16:10   좋아요 0 | URL
네..저도 guiness님 페이퍼봤어요. 떠오르는...은 사실 guiness님 페이퍼에서 처음보고 고르게 된 책입니다.^^ 나눔의 세계는 책분류를 보니 가능할 것 같아서 넣었어요. 물론 안될 것 같지만.

달걀부인 2016-03-04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서재에서 놀다보면, 나란 인간은 더럽게 책일끼에 게으르군, 생각하다 한발만 그 바깥 세상으로 나가면 상상불가능한 상태들을 보게 되곤해요. ㅜ ㅜ 일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않는 사람들..그러니까 인문학서적 아니라도 계발서든, 레이디경향이든 아무런 읽는 행위를 하지않는 사람들이 많아요. 하지만 자영스레 주어지는 정보들은 또 너무많아 그런 정보들이 지식이겠거니 해서 뭘 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오히려 그 아집과 독선이 책을 통해 깊이 삶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되는 존재로 낙인찍히는 경우...암튼 알래딘서재안과밖이 때때론 천국과 지옥(소통의 문제에 있어서는)으로 느껴지네요. 글 잘 읽었어요.

맥거핀 2016-03-04 16:2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달걀부인님. 저도요. 작년말에 알라딘에서 통계 같은 것 보여준적 있잖아요. 거기에 뭐 지역에서 상위 몇 %, 뭐 이런 거 나오던데, 제가 너무 높은 순위라 깜짝 놀랐습니다. 예전 수능에서 이런 % 정도로 나왔으면 참 좋았을텐데..이런 생각을 조금 했어요.^^ 사람들이랑 얘기하다보면 좋아하는 작가 같은 거 말할 때(사실 말할 때도 별로 없지만) 적당히 조절(?)해서 말해야하는거, 여기 알라딘에서 자주 왔다갔다하시는 분들은 아마 누구나가 느끼실겁니다.

그런데 솔직히 한편으로는 그런 점을 느끼기도 해됴. 그런 알라딘 서재 안과밖의 소통이 나눠지기도 하지만, 알라딘 내부에서도 여전히 소통의 지점은 멀구나, 아니 어떤 면에서는 도리어 더 매끄럽지가 못하구나 하는 생각을 (여러 지나가는 일들을 보며) 느끼기도 합니다. 달걀부인님 말씀 들으니 우리가 책에서 얻을 수 있어야 하는 게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고맙습니다.^^

2016-03-04 16: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04 16: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6-03-04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래서 책을 사는 일을 멈출 수가 없어요. 여기 들어오지 말걸. 몰랐는데 모신 하미드의 신간을 알게 되네요. 제목이 저래서 제발 소설이 아니기를...바랐는데 소설이네요. 세상에 읽을 책이 많아서 설레이고 좋기도 하지만, 확실히 읽는 속도가 책 구매 속도를 못따라가고 있으니 답답합니다.

그리고 위의 댓글을 읽고) 저는 여태껏 학교 성적으로 그렇게 높은 순위를 차지해본 적이 없었어요. 수능 성적이 상위 0.2%였다면 지금쯤 제 인생은 완전히 달라져있을텐데..라는 생각을 잠깐 해보았었습니다. 아하하하하.

맥거핀 2016-03-04 16:48   좋아요 0 | URL
저도 제목만 보고 저게 뭔가 싶었는데, 소설이더군요. 제목부터가 아주 재미있을 것 같은 느낌입니다. 모신 하미드의 저번 소설은 처음 한 두장부터 우와..이랬는데, 이 소설은 어떨지..

그런데 다락방님이 0.2%밖에(?) 안되나요..그럼 그 위에 있는 분들은 뉴규? 궁금하네요. 저도 이게 성적표였으면..하는 꿈을 잠깐..꾼 다음..현실에서 쓸쓸히 모니터를 보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응?)

기억의집 2016-03-04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대녕의 책을 사러 돌아다니는... 저는 그 대상이 배수아였는데, 지금은 아예 한국문학을 안 읽고 관심도 없어지니, 책을 사러 돌아다니며 흥분되었던, 다음 서점에서 책을 샀으면 좋겠다는 기대감의 발걸음을 아직도 기억하는데... 휴, 지금은 페북에 배수아 보여도 친구신청 안 하게 되더라구요. 배수아씨가 친구요청 받아주시지 않겠지만서도...페북에 많은 문학종사자들, 출판인들이 많지만, 참 이상하죠. 막상 페북 들여다 보는 것으로 만족하니.... 친추 요청은 안하고 싶더라구요.

전 스마트폼 없애고 와이파이 전용 타블렛으로 사용하니 어디 다녀도 책을 읽게 돼요~

맥거핀 2016-03-05 00:20   좋아요 0 | URL
아..배수아 작가님 좋아하셨다니 저도 더 반갑습니다. 저도 예전에 한 배수아 했거든요.^^ 최근에 나온 유목민...그 에세이도 사놓기는 했는데 여전히 책탑 어딘가에 있답니다. Axt에서 요새 자주 보니 그것도 반갑더군요. 배수아 작가 페북도 있었군요. 저는 몰랐어요 뭐 그런데 저도 친추는 안할 것 같습니다. 아니, 아마도 무시당할 것 같다는 생각에 못할 것 같군요. 저는 소심하니까요.; 저는 그런데 맨날 출판사 페북 같은데만 돌아다녀서 그런지 맨날 `알 것 같은 친구`에 전혀 모르는 출판사 사람들만 뜨더군요.

아..그런 좋은 방법이..저도 스마트폰 그냥 피처폰으로 바꾸고, 이북 기기나 하나 살까요...라고 하지만, 사실 그렇게 못할 거 뻔히 아는 스마트폰 중독자..

비의딸 2016-03-04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히지 않는데도 쌓아놓은 책탑은 자꾸만 높아간다거나 하는 고민은 저만 하는게 아니였군요, 멍하게 스마트 폰을 뒤적이는 것도 그렇고. 이래서 이웃이 필요한 건데 라는 생각이 들어요. 자책이 줄어드는 듯 하거든요.. ^^ 추천하신 책, 다 좋지만 모신 하미드의 책은 꼭 선정되면 좋겠어요.

맥거핀 2016-03-05 00:23   좋아요 0 | URL
네..저도 선정이 되면 즐거운 마음으로 읽을 것 같습니다. 책탑 치워야하는데...한번 책탑에서 치워져 책꽂이로 들어가게 되면 한동안 잊어버릴 걸 잘 알기에, 일부러 압박감을 느끼려고 쌓아두기는 하는데 볼 때마다 저도 제가 한심스러워요. 그래도 자기 전에 어떻게든 한 권씩 집어들기는 하는데, 그 속도보다 항상 새책을 사는 속도가 더 빨라요.

cyrus 2016-03-04 20: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상한 게 언론에서는 도서정가제 시행 이후로 책 구매비용, 독서 인구 수가 점점 감소된다는 내용을 많이 보도하는데 정부는 꿈쩍을 안 합니다. 독자와 출판사는 법 하나 때문에 점점 힘들어져 갈 뿐입니다.

맥거핀 2016-03-05 00:25   좋아요 1 | URL
매출 자체는 줄었지만, 대형서점들, 인터넷서점들의 영업이익 자체는 늘었다는 뉴스는 봤습니다. 저는 예전에는 도서정가제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는데, 현재의 도서정가제는 뭔지 모르겠어요. (그렇다고 `정가`로 파는 것 같지도 않은데..) 보완이 시급해 보입니다.

2016-03-05 0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07 1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이바 2016-03-05 13: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들 너무 읽기 힘들지 않나요.ㅜㅜ 읽고 한달 정도 지나니 다시 읽어볼까? 하는 마음도 조금 들긴 하는데 엄두를 못 내겠어요. 윤대녕 작가와 관련된 맥거핀님의 추억이 좋아요. 저는 한국 소설을 많이 읽지 않아서 잘 몰랐는데 기다리던 분이 많으셨나 봐요. 막연한 호감이 싹트고 있어요. 나눔의 세계는 분류는 맞는데 소설이라 보기가 애매해서... 근데 진짜 요즘 카뮈 관련 책 자주 나오는 것 같아요. 몇 달 격차로.

맥거핀 2016-03-07 13:48   좋아요 0 | URL
저도 사실 윤대녕의 소설은 읽은지가 몇 년은 된 것 같아요. 헤르메스님이 서평단 추천글에 윤대녕에게 최근에 많이 실망하셨다,고 쓰셨던데 저도 별로이면 어떡하나하고 살짝 걱정이 되기는 합니다. 영화든 소설이든 예전에 좋아했던 작가(감독)가 많이 나빠진 것을 보면 마음에 좋지가 않죠.

그들은 확실히 읽기가 어려워요. 심리묘사도 치밀하고, 평범한 삶을 사는 우리네들 입장에서는 어떤 공감을 느끼기가 쉽지 않은 부분들도 많구요. 아무튼 소설에 문체나 묘사나 독특한 부분이 있어요. 제가 리뷰가 늦어지고 있는 것은 꼭 그 때문만은 아니지만요.^^

프레이야 2016-03-05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탑이 여기저기 쌓여가고
집중력은 덜해지고‥난감합니다. 확실히 예전보다 뭔가 떨어지고 둔해지는 느낌이예요. 아무래도 스맛폰탓도 좀 해야겠어요. ㅎㅎ

맥거핀 2016-03-07 13:50   좋아요 0 | URL
사실 스마트폰은 죄가 없죠. 그것을 보는 제가 죄가 있죠.^^ 그런데 사실 영화든, TV든, 스마트폰이든 요새는 읽을거리, 볼거리가 넘쳐나는 시대라 책이 그만큼 저한테있어서도 등한시된느 부분은 있는 것 같습니다.

잘 지내시죠? 여행기 잘 읽고 있습니다. 늘 부러움을 마음 한 켠에 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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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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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카인>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연결시켜 보면 재미있다. "하나님이라고도 알려진 여호와는 아담과 하와가 겉모습은 모든 면에서 완벽하지만 말을 한 마디도 못하고 심지어 아주 원시적인 소리도 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자신에게 짜증이 났을 것이다.(p.9)" "우리가 한 가지 확실히 아는 것은 그들(하나님과 카인)이 계속 논쟁을 했고, 여전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이제 끝이 났고, 더 할 말은 없을 것이다.(p.207)"

      

그러니까 이 이야기대로라면(다시 한 번 강조해두건대 '소설 <카인>의 이야기대로라면'), 하나님은 본인이 행한 이전의 일로 인해 마지막에 카인과 논쟁을 벌여야만 하는 셈이다. '하나님이라고 알려진 여호와'는 아담과 하와가 말을 못한다는 사실에 짜증이 났고, "다른 임시변통을 찾지도 않고, 다짜고짜 자신의 혀를 아담의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고, 그 결과 아담과 하와는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다. 그리고 그로 인해 아담의 아들 카인은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었고, 그 결과 마지막에 이르러 하나님에게 따박따박 말대꾸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떤 말을? 하나님의 혀가 할 수 있는 말을, 그러니까 하나님과 같은 말들을. 다시 말해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것은 명백한 본인의 실수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겉모습이 완벽하게 보이도록 창조한 이후에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로 만족했어야 했다. 굳이 그 겉모습에 말까지 부여해 화를 자초할 이유가 있었을까. 인간이 저지르는 모든 죄악의 90% 이상이 입에서 나온다는 자명한 사실을, 모든 것을 다 아는 하나님이 몰랐을 리는 없지 않은가? 그랬다면 카인에게 되지도 않은 대꾸를 따박따박 들어야 했을 이유도, 바벨탑을 쌓은 이들의 말들을 모두 뒤바꾸어야 할 이유도, 죄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을 내려야 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어떤 잘못된 일이라도 한 가지 소득 정도는 얻을 수 있는 법이니, 그로 인해 하나님이 얻게 된 소득은 있다. 그것은 그의 분신과도 같은 자, 그러니까 창조주 아비를 꼭 닮은 자식 카인을 얻게 되었다는 점인데(모든 아버지들의 소망이야말로, 자신과 꼭 닮은 자식을 얻는 게 아니겠는가), 책을 읽다보니 어떤 의미에서는 카인이 곧 하나님이요, 하나님이 곧 카인이 아닌가 하는 되먹지 않은 의심마저 품게 되었다. 몇 가지 증거들이 있다. 첫째, 하나님과 카인이 벌이는 논쟁의 양상을 보면, 이 논쟁은 너무나도 합이 잘 맞는다. 무릇 어떤 논쟁이든, 논쟁이 이어지려면 논쟁을 벌이는 이들 사이에 수준이 맞아야 하는 법, 하나님과 카인 사이의 논쟁은 잘짜인 연극 대본처럼 손발이 딱딱 들어맞는다. 그래서 위에 인용한 바와 같이 "그들이 계속 논쟁을 했고, 여전히 하고 있"는 것일 테다. 어쩌면 하나님은 그 위에서 혼자서 너무나도 심심한 나머지 논쟁을 벌일 말 상대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혀를 밀어넣어, 자신의 말을 할 수 있는 대상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아담은 과묵한 편이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잘못만은 아닐 것이다. 어떤 것이든 처음 만들어진 작품은 어딘지모르게 허술한 법이고, 종자는 개량되는 법이니. 둘째, 소설 속에서 하나 신기한 점은 카인이 하나님이 벌이는 중요한 일들을 모두 빼놓지 않고 관람한다는 점인데, 카인은 모세와 여호수아, 아브라함과 이삭, 욥, 노아 등등의 구약성서의 주요 인물들을 뒤죽박죽으로 만난다. 소설 속에서 카인이 이들을 만나게 되는 이유는 상당히 모호하게, 또는 의도적으로 허술하게 서술되어 있는데(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카인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나귀가 자신을 데리고 과거의 많은 길들 가운데 한 곳을 따라가는지, 아니면 미래의 어떤 좁은 길을 따라가는지, 아니면 그저, 아주 단순하게, 아직 드러나지 않은 어떤 새로운 현재를 통과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p.146)"), 이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물론 가장 간단한 해답은 하나님이 그를 그곳에 데려다놓았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곧 카인 자신으로서 이 모든 일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다고 말하지 않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셋째, 이와 관련해서 책을 읽다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구약성서의 이야기들이 뒤죽박죽 얽혀 있는 이 이야기에서 서사적으로 기능하는 듯이 보이는, 그래서 조금 따로 외따로 떨어져있는 듯한 대목이 있는데, 그것은 카인이 릴리스에게 되돌아오는 부분이다. 창세기의 세계를 신나게 돌아다니던 카인은 나귀에게 이끌려 릴리스에게 돌아오게 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 대목에서 카인은 릴리스에게 어떤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된 이야기를 몇 가지 하는데, 그것에는 카인의 흥미로운 고백이 들어있다.

      

나는 카인이에요, 기억하죠, 동생을 죽이고 그 죄 때문에 벌을 받은 사람입니다. (중략) 하지만 하나님, 우리가 여호와라고 부르는 하나님이 먼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중략) 아우를 죽이고 이 침대에서 당신과 잔 것은 모두 같은 원인에서 나온 결과들이에요. 어떤 원인.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것, 운명의 손안에 있다는 것, 하나님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자면 말입니다. (중략) 글쎄요, 내가 다시 나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면, 이렇게 내 의지와 전혀 관계없이 한 과거에서 다른 과거로 뛰어다니는 일이 멈춘다면, 나는 흔히들 정상 생활이라고 부르는 삶을 살 겁니다, (p.155~156)

      

즉 카인은 안다. 자신이 하나님의 운명의 손안에 있다는 것, 혹은 자신이 자신의 삶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마리오네뜨라는 것. 또한 카인은 여기서 다른 고백도 한다. "아니요, 내가 거기에 가 있었어요. 아무도 미래에 가 있을 수는 없어. 그럼 그걸 미래라고 부르지 않기로 하죠, 다른 현재, 아니면 여러 다른 현재라고 부르죠 뭐. (중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미래는 이미 적혀 있어요, 우리가 그것이 적힌 페이지를 읽는 법을 모를 뿐입니다, (p.153~154)" 미래를 미리 보는 이, 혹은 다른 현재, 여러 다른 현재에 동시에 가 있을 수 있는 이, 그가 하나님이 아니면 도대체 누구겠는가? 물론 가장 흥미롭고도, 기이하고도, 명백한 사실은 하나님이 카인에게 표식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이 대목을 읽고 나면 누구나가 의아해지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은 카인이 아벨을 죽인 것을 알고 있고, 그에게 얼마든지 벌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왜 그에게 표식을 주고, 그를 죽음에서 면하게 해주는 것일까. 카인이 그 자신이 아니라면, 혹은 조금 덜 불경하게 말해서, 그가 그 자신의 분신이 아니라면 그럴 이유가 있을까.

      

다시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해 제 정신으로 조금 돌아오자. 이야기의 주인공은 카인이고, 이야기의 주된 얼개는 카인이 하나님의 이중성, 또는 악행, 모순들을 드러내는 구조이지만, 사실 엄밀하게 말해서 카인이 그렇다고 해서 의롭거나 선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가 아우 아벨을 죽인 것은 사실이며, 아벨이 죽을 죄를 저질렀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그 뿐인가. 그는 이후에 노아의 가족을 몰살시키기도 한다. 그의 영혼은 비었다.("네, 당신은 내 영혼을 삼킨 적이 있지요.(p.207)") 그는 하나님의 이중성과 악행과 모순을 고발하지만, 그 역시 악행으로 점철된 자라고 말할 수도 있다. 소설 속에서, 그들은 묘한 데칼코마니이다. 악행과 모순으로 얼룩진 이들. 카인은 하나님을 죽이기 위해 이 모든 일들을 저질렀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의 논리대로라면, 가장 먼저 죽어야 하는 것은 그 하나님을 꼭 닮은 자, 바로 자신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표식을 받았기 때문에 그 누구에게도 죽임을 당할 수 없다. 심지어는 표식을 내린 하나님 자신에게마저도. 여기에 이 소설의 어떤 아이러니가 있다.

      

<카인>의 이야기대로라면(참 무지하게 강조한다), 결국 모든 인간은 살인자, 아니 연쇄살인마, 혹은 실은 자신을 가장 죽이고 싶어했던, 자신을 죽였어야했던 자, 그러나 죽일 수 없는 자, 카인의 후손이다. 어쩌면 주제 사라마구가 보는 인간이란 그런 존재가 아닐지 모르겠다. 자신과 꼭 닯은 하나님을 죽이고 싶어하면서도, 결코 죽일 수 없는 자들, 심각한 모순 속에 빠진 자들, 그래서 그에게 어쩔 수 없이 영혼을 내어맡긴 나약한 자들.

    

 

덧.

그렇게 유쾌한 독서는 아니었다. 사실 <카인>의 이야기는 어떤 종교적인 것과 분리하여, 이야기 그 자체로 읽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개인적으로는 이야기 자체로만 보아도, 조금 이야기들의 얼개가 많이 헐거운 것이 아닌가, 그 비판이나 풍자도 익히 예상할 수 있는 지점에 머무르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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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25 0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26 1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29 2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29 2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6-03-02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맥거핀님이 언제 리뷰 썼지? :)

맥거핀 2016-03-02 15:37   좋아요 0 | URL
쓰기 싫은데, 어쩔 수 없이 쓴 리뷰라, 내용이 지금봐도 참 부실하군요..<그들>도 리뷰 써야 하는데..

아이리시스 2016-03-02 15:48   좋아요 0 | URL
재미없었죠? <그들>도 그렇고 둘다 리뷰를 부르는 스탈은 아닌거 같아요. 맥거핀님 리뷰는 역시 조목조목 참 좋아요^^

맥거핀 2016-03-03 12:22   좋아요 0 | URL
재미가 없다기 보다는 아이리시스님 말대로, 리뷰를 부르는 스탈이 아닌 것 같아요. 그건 그렇고, 요새 책 진짜 잘 안 읽히네요..읽을 것 많은데..

아이리시스 2016-03-03 12:26   좋아요 0 | URL
저는 맘이 어수선해서 그래요. 저는 안그래도 대표님?이물러나서 맨날 마음이 무거웠는데.. 맥거핀님은 왜그래요? 저도 일주일째 읽은책이 거의 없어요..

맥거핀 2016-03-04 16:01   좋아요 0 | URL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 보다는...위의 글로 대신합니다. :)

2016-03-04 0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04 16: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최근에 어떤 분께서 왜 요즘에 글이 뜸한지 물어봐주셨다. 글쎄,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일단은 여러 일신상의 변화가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던 일이 달라졌고, 정해진 루틴이 깨졌으며, 그와 다른 이유로 인해 일상의 리듬도 불규칙해졌다. 예전에는 어떤 정해진 시간이 있어서 어떤 시간을 어떻게 유용할지 미리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면, 요즘에는 그런 계획이 어려워졌달까. 아무튼 예전에는 남는 시간들을 보고, 읽고, 쓰는 것에 비슷하게 배분했다면, 요즘에는 그 남는 시간들이 불규칙하게 산재되다 보니, 그 시간들을 보거나 읽는 쪽에 주로 쓰는 것 같다. 다른 분들은 어떨지 몰라도, 내 경우에는 이상하게도 주위가 시끄럽거나 집중이 안되면 뭔가를 쓰기가 힘들다. 그래서 책을 읽을 때에는 음악을 듣거나, TV를 틀어놓고 (가끔 화면에 눈길을 줘가며) 읽는 경우도 많지만, 쓸 때는 어떤 빈 공백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빈 공백들은 여러 자질구레한 이유로 잘 만들어지지 않고, 나는 그럴 때마다 늘 쓰기를 희생시키는 것 같다.  

 

물론 알라딘에 글쓰기가 뜸해진 것에는 다른 이유도 있을지 모르겠다. 글쎄..(이 얘기를 하면 쓸데없이 길어질 것 같아서, 최대한 짧게 이야기하면) 늘 찾아가던 단골 식당에서 주방장이 바뀐 느낌이랄까, 혹은 인테리어가 갑자기 너무 모던하게 바뀌어서 나같은 올드 스쿨 패션은 더이상 출입하면 이 미적감각을 심하게 저해시킬 것 같은 느낌이랄까. 아무래도 나와 맞지 않는 도구인 북플의 영향도 있을 것이고, 예전에 내가 알던 여러 분들이 알라딘에 잘 보이시지 않게 된 것에도 이유가 있을 터고, 어쩌면 그 외에 다른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무엇인가가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최근에 들어서) 종종 했다.

 

안해도 될 얘기를 여기 하나 더 첨부하자면 그래서 사실 얼마 전에 블로그를 옮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반디앤루니스에서 한달 적립금 10만원이라는 달콤한 미끼를 내걸고 '펜벗'인가 하는 서평단 비슷한 것을 모집하기에 지원했었다. 여기 되면 이 참에 여기로 터전을 옮길까 하는 생각도 하면서 말이다. 결과는 뭐, 보시다시피...아무튼 사람이란 참 간사한 것이 그렇게 다른 곳에서 물먹고 나면 내가 있는 곳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그리고 돌이켜보면 알라딘에서 여러 혜택을 많이 받은 것도 사실이니까. 이달의 당선작으로 적립금도 많이 받았고, 서평단으로도 계속 운이 좋게 뽑히고 있다. (말이 나왔으니 몇 마디 더 첨부하자면 얼마전 '이달의 당선작' 문제가 서재에서 화제에 오른 적이 있는데, 내 생각에는 무엇이 어떻게 바뀌든 간에 결국은 여러 말들이 나오리라고 본다. 누가 선정하든, 다시 말해서 알라딘 MD가 하든, 어떤 위원회가 하든 간에 기본적인 전제, 즉 누구나가 자신의 글이 선정되기를 바라고, 글을 보는 관점에는 서로 간에 차이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어떤 글들은 내 떨어지는 감식안으로 보기에도 부족해 보이기는 한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이상문학상도 아니고^^ 그렇게 정밀한 잣대를 들이대야만 할까.(하긴 뭐, 이상문학상도 꼭 잘 써서 뽑히는 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아, 이번 김경욱 작가 말하는 것은 아니고요, 저는 김경욱 작가 좋아해요. 예전에 싸인도 받았는데...) 조금 부족한 글에 격려의 의미로 줬다고 하면 안될 이유가 있을까. 그 글을 쓰신 분들이 격려를 받아 앞으로 더 좋은 글을 쓰게 되리라고 믿으면 안될 이유가 있을까. 돌이켜보면 나도 마찬가지였고, 지금도 마찬가지니까.)

 

아무튼 그래서 결국 얻은 깨달음은 지금 하고 있는 이거(서평단)라도 잘 해야 되겠다는 것이고, 잊지 말고 책 추천도 해야되겠다는 것이다. 아니, 뭐 뜬금없이 글의 전개가 이래요,라고 욕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지만....  

 

 

 

러브 레플리카, 윤이형, 문학동네

 

윤이형 작가의 단편집이다. 저번에 단편 '쿤의 여행'을 읽었을 때는 그리 강한 인상을 받지는 못했는데, 이번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실린 단편 '이웃의 선한 사람'은 상당히 독특하고 신선했다. (개인적으로는 대상 수상작보다 나은 느낌? 아니 자꾸 김경욱 작가를 디스하는 것처럼 보일까 우려되는데, 그건 아니고..싸인도 받았다니까.) 작가의 다른 소설들은 어떨지 궁금해졌다.

 

 

다마세누 몬테이루의 잃어버린 머리, 안토니오 타부키, 문학동네

 

<페레이라가 주장하다>의 맥을 잇는 작품이라고 하는데, 아직 그 책을 사놓고 읽지를 못하고 있으니 이번에 같이 읽고 연작 리뷰를 쓰겠다. (물론 선정이 안 될 것을 알고 지르는 말)

 

 

작가의 책, 패멀라 폴, 문학동네

 

이 책과 테리 이글턴의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이 소설과 인문 쪽에 애매하게 걸쳐져 있는데, 인문 쪽에서는 이 책들에 대한 추천을 해주신 분들이 있는데, 우리도 질 수는 없죠. 분발해서 한 권 가져 옵시다!

 

 

 

캐나다, 리처드 포드, 학고재

오에 겐자부로 단편집, 현대문학

 

에이바님과의 내멋대로 약조를 지키기 위해 추천....하는 것만은 아니고, <캐나다>는 소설의 서두("나는 우선 우리 부모가 저지른 강도 사건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다음에는 나중에 일어난 살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가 흥미로워서, <오에 겐자부로>는 가지고 있는 현대문학 단편선 시리즈 컬렉션에 추가하려고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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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6-02-04 15: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달 적립금 10만원이라면, 뭐 조건이 어떻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대거 빠져나갈만한 대형 미끼인데요? 전 좀 아꼈다가, 나중에 옮겨야할 상황에 처하면 처들어가봐야 겠네요. 깨깽하고 물러설 때 물러서더라도 말이죠ㅎㅎ 안그래도 어제 비댓으로 에이바님과 당선작 선정 문제로 시끄러운 요즘 일들을 이야기 많이 했는데.. 비슷한 생각이십니다.... 길게 썼다가 그냥 지웁니다. 이 곳 커뮤니티는 참으로 조심스럽습니다. ^.^

맥거핀 2016-02-04 17:25   좋아요 1 | URL
네..알라딘도 뭔가 더 파격적인 조건이 있었으면 좋겠...아니, 그럼 더 말들이 나오려나요?^^; 아무래도 반디가 조금 블로그 쪽에서는 약한 감이 있으니 더 사람을 모으려고 그러겠지요. 알라딘도 처음에는 이달의 당선작 적립금 같은 것도 이보다 훨씬 쎘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무튼 아무 말 없이 너무 썰렁한 것보다는 그래도 말들이 있는 게 낫긴 한데, 가끔 민감한 주제는 여기저기 불똥이 튀는 경우가 있어서 조심스럽죠. 친구 추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당선작 같은 재미없는 얘기 말고 책에 대한 얘기 많이 나눠요.^^

다락방 2016-02-04 15: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에 대한 맥거핀님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어떤 기준을 세우든 또 그 기준에 대해 밝히든(명확히 밝혀라!) 안밝히든(이런 기준이라면서 왜 이런 글 뽑아?) 말은 나올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그 당선작 선정기준이 문제다, 라고 하지만 `그런 엉망인 글들을 뽑아놓다니` 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그런 생각을 하는 본인들의 기준이니까요. 다른 사람의 글을 보고 `잘썼다`라고 생각하는 건 `못썼다` 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지극히 주관적이니까요. 공개적으로 `못쓴 글들 뽑아놨다`라는 당선작들중엔 제 글도 있어서 참 뭔가 좋지 않은 기분이었지만, 어쨌든 공개되는 글을 쓰는 이상 잘썼다는 평가나 못썼다는 평가나 다 감당해야겠지요. 중심을 잡는 건 글 쓰는 자의 몫인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익숙한 닉네임을 보는 건 여전히 반갑고 따뜻합니다. 맥거핀님의 닉네임은 제게 익숙하고요.
:)

맥거핀 2016-02-04 17:34   좋아요 1 | URL
네..뭐 누구나 사실 선호하는 글이 완전히 일치할 수는 없는 법이니..그럴리야 없겠지만, 알라딘에서 유명 작가나 평론가 몇 분을 모셔서 당선작을 뽑는다 해도 말들이 안나오겠습니까? 모두들 조금 더 유연한 기준을 가지는 것도 제 생각에는 나쁘지 않지 않나 생각합니다.

암튼 너무 높은 기준을 세워도 고인 물이 될테고, 그렇다고 아무 기준도 없다면 있던 물들도 다 새나가겠지요. 신선한 물들이 계속 흐르게 하는 게 중요할 텐데 그건 쉬운 일이 아니겠죠. 다락방님 말씀이 옳다고 봅니다. 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자신의 기준과 주관을 명확히 세워나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겠죠.

저도 다락방님 익숙하죠, 물론. 아니, 안 계시면 이상하다 생각하겠죠.^^

cyrus 2016-02-04 21: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상품, 적립금 받는 걸 좋아하는데 반디에 블로그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요. 더 받고 싶은 욕심에 거기도 노릴 법한데,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알라딘 당선작으로 뽑힌 제 글이 반디 당선작으로 뽑힌다는 보장이 없거든요. 알라딘에서처럼 반디에 가서 평소대로 글을 써도 좋은 결과를 얻기 어렵다고 생각해요.

한 번 이런 생각을 해봤어요. 알라딘이 완전히 파산되서 이 웹사이트 자체가 폐쇄된다거나 당선작 제도가 폐지되면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요. 알라딘이 사라지면 다른 인터넷 서점으로 옮길려고요. 제로베이스로 다시 시작해야죠. 당선작 제도가 없어져도 계속 알라딘에 남아 있을 겁니다. 제가 여러 곳에 동시에 활동하는 것을 안 좋아해요. 하나하나 보는 게 귀찮거든요. 욕심을 자제하는 중입니다. ^^

맥거핀 2016-02-05 00:40   좋아요 1 | URL
알라딘이 없어지면 또 어디론가로 가기야 하겠죠.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어디가서 무엇인가를 쓰고 있겠죠. 저도 마찬가지예요. 동시에 여러 곳에 글 올리고 하는 것을 귀찮아서라도 못해요.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좋아보이지는 않구요. 뭐 그렇다고 그렇게 하는 분들을 비판하고 싶은 생각은 없고, 다만 제가 좋게 보지 않으니, 제가 그런 식으로 하면 우스운 거겠죠.

뭐 글쎄요. 아무튼 어디간다 하는 것도 사실은 조용히 가야죠.^^ 이렇게 공개적으로 글 쓰는 건 안가겠다는 거죠. 어디가서 제로베이스부터 시작하는 것도 쉬운 일도 아니고, 또 여기서 알게 된 좋은 분들도 참 많으니.. 아무튼 저는 마음이 약해서 알라딘이 늘 조금 더 부드러웠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냥 소심해서 그래요.

에이바 2016-02-04 20: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감사합니다. 캐나다와 오에 겐자부로를 올려주셔서... 내심 어떤 책을 밀어주실까 기대하고 있는데 발가락까지 합쳐 포따봉 슬쩍 올립니다.ㅎㅎㅎ

기네스님 말씀대로 의견이 비슷합니다. 제 생각도 올려볼까 했는데 음... 좀 고민되네요. 한잔 하기 전에 후딱 써보겠습니다.

다락방 2016-02-04 21:32   좋아요 1 | URL
(살짝 발을 걸치며) 저 지금 와인중입니다. 에이바님, 건배요!

맥거핀 2016-02-05 00:40   좋아요 1 | URL
아니 근데 책 내용을 보다보니 정말 흥미로워보이더군요. 저도 최소한 그 둘 중에 한 권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작가의 말> 같은 책은 사실 되도 좀 골치....그러나저러나 두 분의 댓글을 보니 저도 이 야밤에 갑자기 한 잔이 땡기는 것이..근데 그러면 안되겠죠.ㅎ

넙치 2016-02-05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알라딘이 책 후기보다는 책 전기에 치중하는게 싫어, 알라디더들하고 소통을 원래도 안 했지만 더욱 안 하게 되는 거 같아요. 읽고 싶은 책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는 책을 읽은 후의 느낌을 더 소중히 생각해요.. 읽고 싶은 책이 있어 책 후기를 읽기 위해 검색하면 읽었다는 말은 없고 죄다 로쟈처럼 책소개..-.-;

맥거핀 2016-02-11 16:02   좋아요 0 | URL
책 전기라는 말씀 재밌네요. 저도 비슷합니다. 읽고 싶은 책에 대해 말하는 글은 많지만, 정작 읽은 후의 감상을 자세히 풀어놓는 글은 적은 것 같습니다. 좋다면 왜 좋은지, 안 좋다면 왜 안 좋은지를 열심히 생각하려는 자세가 중요할 듯 싶어요. 남 얘기 할 것 없이, 저도 사실 가장 난감할 때가 이렇게 책 추천 글 쓸 때예요. 이건 어쩔 수 없이 써야하지만, 늘 `읽고 싶다`는 말 외에 무슨 말이 필요할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아무튼 댓글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제가 설에 장기간 자리를 비우다 보니..넙치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16-02-05 2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B.B 2016-02-14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트위터에 뜬 오에 겐자부로 단편선을 클릭해서 알라딘으로 들어왔는데 서평난엧맥거핀 님 아이콘이 보이 더라구요. 이런 경로로 들어와 글을 읽었네요! 겐자부로 책 담아두고 갑니다.

맥거핀 2016-02-15 01:01   좋아요 0 | URL
알라딘에서 또 뵈니 더 반갑습니다.^^ 아마 B.B님과 제가 북플에서 친구로 맺어져 있어서 그런게 아닌가 싶군요. 네..이번에는 오에 겐자부로 책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현재로서는 가능성이 높아보이기는 하지만, 어떨지 모르겠네요. 아무튼 그건 그거고, 일주일의 시작인데, 좋은 한 주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불안한 낙원]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불안한 낙원
헤닝 만켈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5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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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그녀는 오랫동안 침대에 누워 세뇨르 바즈의 눈빛에서 발견한 두려움에 관해 생각했다. 어머니, 아버지에게서는 그런 두려움을 보지 못했었다. 스웨덴에도 물론 상류층이 있었지만 그들과 함께한다는 것은 두려워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는 달랐다. 여기는 모두가 두려워했다. 다만 백인들은 침착과 자기절제, 또는 사전 계획된 분노의 폭발 같은 가면 뒤에 두려움을 감출 뿐이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 왜 두렵지가 않지? 두려워할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일까? 완전히 혼자여서?  

 - p.160~161

       

"세상에는 세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죽은 사람들, 살아 있는 사람들,

그리고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들이다." (플라톤)

- 책 머리에서

      

헤닝 만켈의 <불안한 낙원>은 여러 결로 읽을 수 있는 이야기같다. 한 여성 자아의 성장, 혹은 진정한 사랑찾기에 대한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고, 제국주의 식민지 시대의 아프리카의 현실을 드러내주는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며, 보다 더 여성적인 관점을 포함한, 다시 말해서 주인공 한나와 그의 어머니 엘린, 그리고 베르타, 백인 남성과 결혼한 흑인 여성 이사벨, 펠리시아를 비롯한 매음굴 여성들, 테레사 등등의 수많은 여성들의 목소리에서 나타나는 '여성'이라는 존재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혹시 더 나아가면 이 '불안한 낙원'이라는 명칭이 말해주는 어떤 비유와 은유에 대해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읽으면서 계속 느낀 것은 이 이야기들이 어떤 실체를 가진 무엇이라기보다는 단지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한 어떤 신화처럼 느껴지기도 했는데, 그것은 소설 속의 이야기들이 비현실적이어서가 아니라 - 해닝 만켈은 책 뒤의 후기에서 이 이야기가 실제의 기록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 어쩌면 내가 전혀 알 수 없는 세계, 즉 20세기 초반의 스웨덴과 아프리카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즉 그만큼 나의 지식과 상상력이 협소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것을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로 읽고 싶은데, 위의 인용문에 나오듯, 한나가 어쩌다 머물게 된 아프리카의 포르투갈령 로우렌소 마르케스(현재의 모잠비크)에서는 흑인과 백인 모두가 서로를 두려워한다. 흑인들은 백인이 가진 공권력과 폭력을 두려워하며, 백인들은 흑인들 내부에 오랜 억압으로 응축되어 있는 분노를 두려워한다. (그것을 한나의 표현대로 '그들의 숫자'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숫자가 많을수록 그 안에 응축된 분노의 수도 많아지는 법이니까) 다만 (위의 인용문에도 있듯이) 백인들은 그것을 가면과 위선 속에 숨기고 있을 따름이다. (예를 들어 백인들이 '흑인들이 모두 거짓말쟁이'라고 치부하는 것이나, 그들 나름의 전통적인 사고방식, 의술, 주술 등을 미개한 것이라고 꺼려하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일 것이다. 우리의 어떤 것에 대한 꺼림 속에는 사실 은밀한 두려움이 늘 내재해 있는 법이니 말이다.) 백인들은 백인들만이 출입할 수 있는 소위 문명화된 공간이 있으며, 흑인들은 또 백인이 더럽고 위험하다며 가까이 오려하지 않는 자신들만의 나름의 공간이 있다. 심지어 같은 공간에 있어도 백인들과 흑인들은 같은 벤치에 앉지 못한다. 백인들이 앉아있을 때는 흑인들은 서 있어야 한다. (한나가 아프리카에서 가장 먼저 이상하게 생각했던 점도 이것이었다.) 그것이 그곳의 법칙이다.

 

그런 법칙이 예외가 되는 공간이 있다. 한나가 머물고 있는, 그리고 어느 틈에 한나의 것이 된 세뇨르 바즈의 매음굴. 그곳에서는 흑인과 백인이 같이 한 공간에 머물며, 같이 잠자리에 든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백인 남성이 흑인 여성에게 돈을 주고 그 댓가로 성적 서비스를 제공받는다. 물론 사실 이것은 '법칙의 예외'라고 보기 힘들며, 일종의 역설이다. 아프리카에서 흑인과 백인이 (물리적으로) 가장 가까이 있을 수 있는 공간이 매음굴이라는 어떤 아이러니. 그래서 어쩌면 한나는 그곳이 매음굴임을 알면서도 그 곳에서 떠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나가 처음 이곳에 투숙하게 된 것은 그곳이 단순한 호텔이라고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한나는 그 사실을 알게 된 이후에도 이 곳을 쉽게 떠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 곳이 흑인 여성들과 가장 가까이에서, 혹은 위선적인 백인사회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한나는 서로가 서로를 두려워하는 외부의 공간을 불편하게 생각하며, 매음굴에 가득한 흑인 여성들 사이에서 묘한 동질감과 안도감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한나는 그곳을 그렇게 명명했는지도 모른다. 불안한 낙원. 여자들이 자카란다 나무 아래 앉아있고, 제가 피아노로 돌아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조율을 계속하며, 침팬지 카를루스가 붉은 소파에 앉아 입술을 요란하게 두드려가며 오렌지를 먹는 곳. 그러나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그곳은 낙원은 낙원이되, '불안한' 낙원이라는 점. 그 곳이 '불안한 낙원'이라는 것은 그 뒤에 붙여진 이야기들이 말해준다. 매음굴 가운데에 있는 자카란다 나무 밑이 사실은 수많은 아기들의 공동묘지였다는 사실. 매음굴에서 태어난 불행한 아이들, 그리고 당연하게도 모두 흑백혼혈일 수밖에 없는 그 수많은 아이들이 그곳에 아무도 모르게 묻혔다. 아이들은 추악하지 않지만, 그 아이들을 그렇게 잉태시킨 수많은 백인들은 추악하다. 그들이 만들어낸 수많은 위선과 기만과 폭력의 산물들이 그렇게 감히 '낙원'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 매음굴 아래에 묻혔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 이 매음굴로 한정되지 않는다. 제국주의 시절 백인들은 수많은 식민지에 온갖 거짓과 폭력과 위선을 행했으며, 그 결과물로 만들어진, 그들이 잉태한 추악한 부분들을 기꺼이 그 땅 속에 깊숙이 묻었다. 열대야자수가 늘어서 있는, 그들이 처음에 '낙원'이라고 불렀던 그 땅에 말이다.

 

그러니까 이 매음굴은 일종의 식민지 아프리카라는 공간의 상징이며, 동시에 어떤 경계선이다. 많은 것들이 그 내부에 깊숙이 들어가 있을 때는 보이지 않는다. 어떤 것들은 경계에 섰을 때만이 볼 수 있다. 한나가 처음 아프리카에 도착했을 때 백인 사회로 깊숙이 들어가 버렸다면 그녀는 아마도 다른 것을 보고,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녀는 대신에 불안한 낙원, 흑백 혼혈아기들이 묻힌 이곳에 있는 유일한 백인 여성으로서 다른 어떤 것들을 보았고, 그 결과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것을 단지 우연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아버지와 어머니가 물려주신 이름, 한나 렌스트룀에서 선상요리사 한나 룬드마르크로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매음굴을 운영하는 세뇨라 바즈에서 이제 다시 스스로 선택한 이름, 아나 브랑카로. 이 이름들의 변화는 누군가의 보호 속에서 존재하는 여성에서 이제 스스로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주체로서의 여성이라는 주인공의 변화를 말해주면서, 동시에 이 여성이 계속 서 있던 위치에 대해서, 그리고 그 위치의 공통점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한다.

 

타인에 의해서든,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서든, 혹은 어떤 우연의 결과물이든 간에 그녀는 항상 경계에 서 있었다. 강력한 추위가 지배하던 땅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 있던 그녀는 이제 죽은 사람도 아니고, 살아 있는 사람들도 아닌,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들(위의 플라톤의 말)이라는 또다른 의미에서의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 있는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흑과 백의 경계선에 서 있는 매음굴의 여주인에서 다시 더 나아가 흑인 사회와 백인 사회의 경계선에 스스로를 위치시킨다. 그녀는 기만과 위선이 존재하는 백인 사회에서 매음굴의 백인 여주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떨어져 나와있지만, 본인 스스로, 남편을 죽인 흑인여자를 구명하려 함으로써 그 사회와 더욱 확실하게 경계선을 긋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흑인 여성들 사이로 완전히 들어갈 수는 없다. 그녀와 매음굴의 흑인 여성들 사이에는 여전히 (침묵이라는) 경계가 남아있으며, 그녀는 그 경계선 위에 위태롭게, 혹은 불안하게 서 있다. 침팬지 원숭이 카를루스처럼. 어쩌면 그녀가 침팬지 카를루스에게 애착을 느끼는 것은 그것도 어떤 경계선 위에 서 있다고 생각해서 일지도 모른다. 동물과 인간의 경계에 있는 침팬지. 숲에서 태어났지만 인간사회에 너무 깊숙이 동화되어 숲으로 돌아갈 수 없는 침팬지. 그리고 하늘에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땅에 있을 수도 없는, 땅 위의 나무에 있거나 천장에 매달려 있는 침팬지. 

 

하지만 땅에 닿는 순간 카를루스는 마치 발을 데기나 한 것처럼 움찔했다. 그리고 코를 킁킁대더니 잽싸게 문밖으로 나갔다.  

한나는 놀라 카를루스를 바라보았다. 왜 나무 아래 땅바닥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전혀 짐작되지 않았다. 카를루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 옆에 앉아 차창 밖의 해풍이 얼굴을 어루만질 때마다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 p.216

 

그러므로 이 책의 결말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경계 근처에 온 사람, 혹은 경계에 서 있는 사람만이 경계 너머를 들여다보고 그 경계를 넘어 탈주할 것을 소망할 수 있으니. 사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녀는 추운 겨울 나무벽 사이로 꿈틀거리던 냉기가 느껴졌던 그 때부터 그 경계 너머의 삶을 꿈꾸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그녀가 행복했기를 빈다. 경계 너머의 삶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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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21 0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22 0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6-01-21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불안한 낙원이다^^

맥거핀 2016-01-22 00:28   좋아요 0 | URL
썼습니다. 그런데 막상 다 읽고 나니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잘 정리가 안되는 소설이었습니다. 느낌이 독특했어요. 그런데 아무튼 좋았습니다.^^

2016-01-27 0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27 2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댓글 부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댓글부대 - 2015년 제3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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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장강명 작가의 책을 많이 읽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읽은 책들(<한국이 싫어서>,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댓글부대>)에서는 뭔가 통하는 지점이 있다. 그것을 작가가 구사하는 일종의 전략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인데, 그것은 형식적인 면에서는 대화체나 구어체를 적극 활용하는 것, 그리고 그에 더 나아가 소설 전체를 누군가가 말하는 구어체의 진술로 구성하는 것(<한국이 싫어서>는 한국을 떠난 계나라는 인물의 편지형식이며,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에서도 여자의 구어체 진술이 소설의 뼈대를 이루며, <댓글부대>의 한 축은 찻탓캇과 기자의 인터뷰 녹취록을 그대로 수록하는 형식을 취한다.), 혹은 되도록 내용을 짤막히 분절시키면서 동시에 전체 내용을 줄이는 것(<한국이 싫어서> 204쪽,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188쪽, <댓글부대> 247쪽) 등이다. 다시 말해서, 결국 이 전략들은 한 가지 목표에 부합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목표란 (작가 본인도 인터뷰 등에서 밝히고 있듯이) 어떻게든 읽게 만든다,는 것이고 그 전략은 실제로 어느 정도 먹혀들어가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아니, 나는 ('전략'이라는 냉소적인 표현을 쓰기는 했지만) 단지 비판을 하기 위해서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바꿔 말하면 (사실 다른 작가들이 번번이 실패하고 있는) '일종의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한 단지 이런 형식적인 면 때문에 장강명의 소설이 많이 읽히고 있다고 말하는 것 또한 부당한 말이 될 것이다. 

 

<댓글부대>는 (적어도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재미있었다. 그 재미는 소설의 한 축, 그러니까 팀-알렙의 멤버들이 '합포회'라는 어떤 비밀조직의 지시를 받고 벌이는 온라인 교란 작전들(이렇게 뭉뚱그려서 표현하기에는 그보다 더 복잡하지만, 편의상)의 생생함에서 나온다. 그들이 벌이는 교란 작전들은 실제 우리가 온라인에서 보고 있는 여러 행태들과 시종일관 교차하기 때문에 실제로 우리가 보고 있는 것 이면에는 이런 것들이 있으리라는, 그 배후에는 권력과 결탁된(혹은 권력 그 자체인) 어떤 거대한 조직이 꾸미는 음모가 있으리라는 상상을 익히 하게 만든다. 그것이 실제이건 아니건, 소설의 핵심 중에 하나는 우리 상상력의 지표를 확장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온라인 교란 작전이 벌이는 상상력의 교란이 즐겁지 않을 이유는 없다. 다만 나는 그것이 소설의 나머지 한축과 결합되었을 때 그 결과물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그 결합이 작가의 미숙이건, 혹은 고의이건, 나는 그 결과물에 대해서는 어떤 이상함을 느꼈고, 그것을 여기에 짧게 이야기해보려 한다. 

 

앞에서 이야기한 팀-알렙의 멤버인 찻탓캇과 기자가 벌이는 인터뷰 녹취록이 보여주는, 온라인 교란 작전들의 전말이 소설의 한 축이라면, 나머지 한 축은 그런 팀-알렙과 '합포회'라는 비밀 조직과의 오프라인 커넥션이다. 그리고 이 내용의 상당수는 그들이 각종 유흥업소에서 벌이는 향락에 대한 세밀한 묘사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예를 들어 움베르트 에코의 <프라하의 묘지>와 비슷한 전략을 취한다. 에코의 <프라하의 묘지>가 19세기 유럽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위조 문서를 만들며 살아가는 시모니니(어쩌면 이것을 그 당시의 '온라인 교란 작전'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의 행위를 묘사하는 것과 동시에 그의 탐욕스러운 행동이나 그의 식탐에 대한 묘사를 병행하며 그에 대한 독자의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면, 이 소설 <댓글부대>는 온라인 교란 작전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세밀하게 묘사하면서, 동시에 그 교란 작전을 벌이는 주체들이 벌이는 향락을 묘사하며 그들에 대한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식이다. (물론 이 묘사가 적절한가, 즉 그 목적에 적절히 부합하고 있는지는 조금 더 생각해 볼 여지는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소설들은 시모니니나 팀-알렙이 구사하는 바로 그 전략을 역이용한다. 시모니니는 소설의 서두에서 위조문서를 만들 때 가장 좋은 전략 중의 하나는 그 문서를 읽게 되는 사람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혐오감을 적절히 이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에코는 교묘하게 바로 그렇게 말하는 시모니니에 대한 혐오감을 읽는 이들이 가지도록 유도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댓글부대>에서 팀-알렙이 구사하는 주요한 전략 중의 하나는 온라인에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혐오와 분노들을 적절히 활용하는 것이다. (이 책 3장의 제목은 (작가가 괴벨스의 어록이라고 떠돌아 다니는 문서에서 따왔다는) "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이다.) 

 

나는 사실 이것이 조금 미심쩍다. 바로 소설에서 비판하고 있는 그 전략을 다시 자신의 소설에서 비슷하게 구사하는 것 말이다. 에코의 소설과 이 소설이 다른 것은, 에코의 소설은 그것이 단지 독자의 혐오감을 북돋우는 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소설 전체를 일종의 위조 문서처럼 보이게 한다는 목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에코는 시모니니가 만들어내는 역사를 기술하며, 동시에 그것을 거짓으로 보이게 하여, 독자들 스스로 그럼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동시에 (에코의 많은 소설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것을 에코가 소설로 구사하는 일종의 게임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강명 작가의 이 소설은 다르다. 그들이 벌이는 향락이라는 나머지 한 축에는 그런 장치가 없으며, 이 축에는 결국 읽는 이의 어떤 혐오,(혹은 그것이 잘못 작동했다면 어떤 동경)만이 남는다. 이런 모순화법은 사실 조금 이상하다. (거칠게 말한다면) 혐오가 잘못된 것이라 말하면서, 은연중에 누군가를 혐오하게 만드는 것 말이다. (비슷한 것으로 누군가의 독설을 비판하면서 독설적으로 말하는 것, 또는 누군가의 거짓을 비판하면서 그에 대한 거짓정보를 흘리는 것 등등이 있을 수 있다.)

 

(영화 <내부자들>을 보지 않으신 분들은 여기에서 건너 뛰시는 것이 좋겠다. 큰 스포가 들어있으니.) 다른 경우를 여기에서 같이 이야기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쩌다보니 영화 <내부자들>을 일반판과 감독판 모두 극장에서 보게 되었는데, 일반판이든 극장판이든 동일하게 구성된 이 영화의 구조가 있다. 그것은 영화에서 안상구(이병헌)의 기자회견 장면을 영화의 시작부분에 배치하고, 다시 플래시백되어 이야기가 시작한다는 점인데, 사실 이것은 조금 이상하다. 왜냐하면 굳이 이 장면이 앞에 나온 후 다시 과거로 돌아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굳이 이렇게 한 이유가 있을까? 여러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간단하게 말해서 나는 그것이 결국 이 장면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하는데, 다시 말해서 그것을 뒤의 우장훈 검사(조승우)의 기자회견과 대비시켜 그 장면의 함의를 생각해 보게 하는 것이다.

 

이 장면의 대비는 결국 말하는 이의 차이에 있다. 기자회견이 벌어지는 풍경도 같고, 말하는 이가 주장하는 내용도 같지만, 여론은 전혀 다르게 형성된다. 다시 말해서 대중은 어떤 것은 믿고, 어떤 것은 믿지 않는다. 그것은 영화 속에서 나온 거대신문사 이강희 주간의 말대로 "누가 깡패새끼 말을 믿겠나"는 것과 일맥상통하며, 동시에 "대중은 개돼지입니다."라고 말하는 그의 대사, 혹은 그가 우장훈 검사 앞에서 벌이는 이상한 논리의 언변과도 통한다. 즉 같은 사건이고, 같은 팩트라도 어떻게 말하는가에 따라서 "어떠어떠하다고 보기 힘들다"라고 말할 수도 있고, "어떠어떠하다고 보여진다" 혹은 "매우 보여진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그의 말은 대중이라는 존재가 매우 휘두르기 쉬운 존재라고, 혹은 개돼지라고 믿고 있는 그의 생각과 통한다. (감독판에서는 이것으로 모자랐는지 뒤에 이강희의 이런 논리를 다시 에필로그 식으로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영화 <내부자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보는 대중, 그러니까 바로 우리들에게 계속 반복하여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들은 바보라고. 그러니 저런 인물들이 거대신문사 논설주간이 되어 여론을 조작하고, 바로 저런 인물이 대통령후보가 되거나 대통령이 되는 거라고 말이다. 안상구의 기자회견을 앞으로 빼서 우장훈 검사의 기자회견과 대비시키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물론 누군가는 여기에서 반박을 할지도 모른다. 우장훈 검사의 기자회견은 별장 성접대 동영상이라는 확실한 물증이 있지 않는가,하고 말이다. 그런데 사실 나는 그것이 조금 이상해보인다. 그렇게 성접대 동영상을 무차별적으로 대중들에게 뿌려 이 상황을 타개하는 것 말이다. 그것은 사실 대중을 바보로 보는 것과 그렇게 멀리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 동영상 하나만으로 지금까지의 거짓이 사실처럼 받아들여지는 것, 그것은 거대언론의 어떤 여론몰이와 그렇게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나는 그 내용의 진실여부와 별개로 그 즉각적인 반응과 태세전환이 한편으로는 여전히 의심스럽다. (여기에 더 나간다면 그 영상에서 접대여성들의 얼굴도 모자이크하지 않는 무신경함과 조상무를 처리하는 방식, 그리고 이 영화가 가진 결말의 어떤 미심쩍음 같은 것도 말할 수 있겠지만, 뭐 이 글은 <내부자들> 리뷰가 아니니까.)

 

지금까지의 어떤 의심들을 이런 질문으로 바꿔보자. <내부자들>은 바로 당신들, 그러니까 영화를 보는 대중들이 바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른 방식이 아닌, 바로 그 바보를 다시 역이용하는 방식으로 상황을 타개한다. 과연 이 때 영화를 보는 우리들의 사고는 이렇게, 그러니까 나는 바보니까 앞으로는 여론에 휘둘리지 말아야겠다,는 식으로 작동하게 될까. 그보다는 어쩌면 조금 다른 식으로, 그러니까 똑똑한 나는 그렇지 않지만, 바보 대중들 때문에 이 나라가 이 모양이 되어가고 있다는 어떤 분노에 가닿아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어쩌면 이 영화는 당신들이 바로 그 대중이라고 말하고 싶었을지 모르지만, 영화를 보는 똑똑한 대중들은 그들과 자신을 선을 긋는다. 아니, 나는 아냐, 그런 바보가 아니야. 그리고 어쩌면 영화를 만드는 그들도 사실은 우리들이 선을 긋기를 바랐던 것은 아닐까. (네가 바보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너는 아니지만 바보는 어딘가에 있다고 말하는 편이 당연히 더 쉽게 먹힌다.)

 

나는 장강명 작가의 <댓글부대>에서도 비슷한 것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온라인 상에 존재하는 혐오를 증폭시키는 이들에게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장강명의 이 책은 책 말미의 '제주4.3평화문학상 심사평'대로 "폭력을 드러냄으로써 궁극적으로 평화를 소망하게"할 수 있을까. 아니면 혹시 어쩌면 다른 방식의 다른 혐오들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 않을까.  

 

  

덧.  

정의를 말하는 영화들, 혹은 정의를 말하는 문학들이 득세하는 것은 그리 반갑지만은 않다. 그것은 현실이 그만큼 정의롭지 않다는 것의 반증일테니 말이다. 예를 들어 작년에 나온 영화만 해도, 정의를 이야기하는 영화들은 수없이 많았다. 영화에 나온 수없이 많은 괴물들. 그 괴물들은 차례로 영화 속에서 최후를 맞이했지만, 여전히 현실의 괴물들은 점점 늘어간다.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괴물이 쓰러지는 것을 통쾌하게 바라보는 우리들은 어쩌면 괴물에 맞서기 위해서 점점 괴물에 가까이 가고 있지는 않을까. 괴물이 되기를 은연 중에 소망하면서.

 

혐오와 동경은 늘 가까이에 있으며, 그 대상은 종종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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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미 2016-01-10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괴물이 되기를 은연중에 소망하면서... ㅠㅠ
그러니 내가 괴물이 되고 있는건 아닌지 늘 잘 살펴야겠어요. 정확한 지적 감사합니다.

맥거핀 2016-01-11 17:59   좋아요 0 | URL
괴물이 되기를 처음부터 소망하던 이들도 있겠지만, 많은 이들이 어느 틈엔가 괴물이 되었겠죠. 저 역시도 가끔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그들의 삶을 동경하는 것 같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 자신있게 얘기하기 힘들어요.

2016-01-10 2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11 18: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11 0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1-11 18:1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