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 네트워크 - The Social Network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결말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참 데이비드 핀처는 별 것도 아닌 이야기를 잘도 이렇게 흥미진진한 2시간의 이야기로 만드는구나, 라고 말이다. 사실 이 전체 이야기를 하나의 기업물로 보자면 흥미로운 구석은 있으나, 상당히 밋밋한 쪽에 가깝다. 어떤 하버드 천재가 소셜 네트워크 사이트를 만들어서 성공하나, 2개의 소송을 당한다, 라고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를 정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 간단한 한 줄로도 흥미롭기는 하다. 소셜 네트워크를 만들었으나, 실제의 소셜 네트워크는 실패하는 것이니까.) 그러나 감독 데이비드 핀처는 거의 신기에 가까운 솜씨로, 이야기를 버무려내며, 흥미를 지속적으로 유발시킴은 물론, 관객을 어떤 드라마틱한 깨달음의 경지에까지 이끌고 들어간다. 예를 들어 <부당거래>의 류승완이 아주 복잡한 이야기를 간단하고, 직선적으로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마법을 부린다면, <소셜 네트워크>의 데이비드 핀처는 아주 간단한 이야기를 복잡하고 풍성하고 철학적으로 만든달까.

그러나 사실 개인적으로 흥미를 느꼈던 부분은 어떤 기업의 성장과 위기를 보여주는 그런 부분들이 아니라,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세계, 그것의 어떤 관계들을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은 때로 매우 이질적인 것으로 비쳐지지만, 사실 그것은 매우 비슷하게 닮아 있다. '페이스북(Facebook)'이라는 것을 사용해 본 적이 없어서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영화 속에 있는 사실들만 놓고 보면 페이스북은 크게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배타성이다. 페이스북은 처음에 하버드 아이디를 가지고 있어야만 접속이 가능하도록 구성되었으며, 다른 대학들로 그 세력을 넓힌 후에도 이러한 성격은 비슷하게 유지된다(지금은 다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페이스북은 온라인 상에서 친구를 맺기 위해서는, 그리고 상대방의 일정 정도의 정보를 보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수락이 또한 있어야 한다. 이것은 한편으로 보면 우리나라의 '싸이월드'와도 조금은 닮은 점이 있다. 싸이월드 역시 일촌 관계는 상대방의 수락이 있어야 가능하며, 특정 정보를 가까운 사람에게만 공개하도록 설정할 수 있다. 즉 페이스북이나 싸이는 기본적으로 개방적이라기 보다는 폐쇄적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의 특징은 이러한 페이스북이나 싸이는 현실의 관계와도 거의 그대로 연결된다는 점이다. 싸이는 실명으로만 가입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고, 페이스북 역시 가명으로도 가입이 가능하지만 대체로 실명으로 가입할 것을 권유하고 있으며, 대체로 많은 사람들이 실명으로 가입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페이스북은 현실의 관계를 대체로 반영한다. 즉 많은 경우 현실에서의 인기인이 페이스북에서도 인기인이 된다. 즉 페이스북의 세계는 현실의 세계를 적극적으로 반영한 세계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하나의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것은 온라인은 오프라인의 권력 관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오프라인에서의 어떤 권력 관계는 흥미롭게 보여진다. 하버드대에 다니는 마크 주커버그(제시 아이젠버그)는 보스턴대에 다니는 여자친구를 의식적으로 무시한다. 그러나 또한 한편으로 마크는 하버드 내 엘리트 클럽에 들어가려고 하는 친구 왈도(앤드류 가필드)에게 신경질적인 심사를 은연중에 드러내기도 한다. 이는 한편으로 윈클보스 쌍둥이 형제와 마크와의 대비에서도 드러난다. 윈클보스 형제는 적어도 마크보다는 상당히 상류층으로 보이며, 잘생긴 외모에 스포츠맨으로서 교내에서 상당히 인기가 있어 보인다. 그런 반면 마크는 평소 컴퓨터만 가까이 하는, 거의 외톨이에 가깝다. 이것은 어떤 계급의 세계이고, 권력의 세계이다. 마크는 윈클보스 형제와 태생적으로 다르며, 왈도와 같이 상류층 클럽에 들어가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므로 마크가 다른 방식으로의 역전을 바라는 것은 필연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마크가 이를 역전하는 방식은 분명히 온라인을 이용하는 방식이지만, 그것은 온라인으로 평등한 세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온라인으로 또 하나의 권력 구조를 만들고 그가 이를 소유하는 방식, 혹은 그 권력 구조의 맨 꼭대기에 올라가는 방식이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페이스북의 세계 역시 오프라인의 권력을 거의 그대로 승계하고 있으며, 마크는 이를 창조한 일종의 신으로서 그 세계에 군림하며 이것은 다시 역으로 오프라인에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여자들은 마크가 그 온라인 세계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자, 거의 그에게 맹목적인 호감을 표현한다.

사실 이 여자들과 관련한 부분은 이 영화에서 조금은 이상하게 일그러져 있기도 하다. 그것은 명백하게 이러한 페이스북 자체가 어떤 또하나의 권력임을 보여주려는 의도인 것처럼 느껴진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이 재미있는 표현을 썼는데, 이 영화에서 여자들은 거의 일종의 '전리품처럼' 다루어지고 있다. 옛날 전쟁에서 승리한 장수들이 여자를 차지하는 것처럼, <소셜 네트워크> 속 여자들은 남자들의 권력 관계 속에서 아주 수동적인 위치에만 머무른다.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몇 가지 장면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열심히 헤드셋을 끼고 사이트를 관리하는 남자들 곁에서 여자들은 대형 스크린으로 게임에 몰두하는 장면들도 그러하거니와, 마크가 주위에 선 모든 남자들에게 여러 역할들을 지시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를 보여준다. 남자들과 같이 있는 여자들이 이 '미션'에서 자신의 역할을 묻자, 마크는 잘라 말한다. "없어!"



그러므로 여기에서 어떤 질문이 요구되는 것 같다. '페이스북'이라는 소셜 네트워크는 말 그대로 '새로운 사회적 관계망'을 탄생시키는가. 누구나 자유로운 상태에서 동등한 친구가 될 수 있는가. 데이비드 핀처의 대답은 아니오에 가까운 것 같다. 미안하게도 현실에서의 외톨이는 '페이스북'이라는 소셜 네트워크에서도 외톨이가 될 확률이 높다. 그것은 트위터 등의 개방형 소셜 네트워크나 블로그 등의 1인 미디어와 다른 페이스북만의 독특한 성격에도 기인하기도 하지만, 왠지 영화는 다른 것을 살짝 암시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은 이 온라인이라는 것의 근본적인 한계이다. 즉 현재로서는 가상 온라인에서의 체험은 실제의 체험을 결코 따라가지 못한다. 예를 들어 가상 세계에서 펼치는 게임이 아무리 발전한다고 해도 현실에서의 실제 체험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우리가 가상의 축구 게임에서 아무리 골을 집어넣는다고 해도, 그것이 실제의 축구 게임에서 골을 넣는 쾌감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우리가 아무리 온라인 세게에서 총격전 장면을 보고(하고) 일종의 스릴을 느낀다고 해도, 실제의 총격전을 보는(하는) 충격에 이를 비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가상의 세계에서 누군가와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고 해도, 오프라인에서 그 누군가와 만나서 하는 모든 것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우리는 이 모든 질문에 '아니오'라고 답할 수 밖에 없다.

즉 온라인이라는 것은 결국 하나의 대체제이다. 우리가 실제의 관계가 충분히 가능하다면, 굳이 온라인에서 관계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온라인에서의 관계는 실제의 관계에 종속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대체물이 살아남는 방법은 실제를 충실하게 모방하여 최대한 그 실제에 가까워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그를 벗어나고 싶어해도 온라인에서의 관계는 실제의 권력 관계를 충실하게 반영한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보자. 마크가 온라인에서의 관계망을 꿈꾸는 것은 여자친구와의 오프라인 관계가 실패로 돌아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였다. 만약 오프라인에서의 여자친구와의 관계가 잘 이루어졌고, 마크가 거의 외톨이에 가깝지 않았다면, 이 '페이스북'은 탄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것이 실패했기 때문에 일종의 대체물로서(처음의 '페이스매쉬'가 여자들을 '실제로 놓고' 비교해 보고 싶은 남자들의 권력에의 욕망을 '모방'했던 것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온라인망이 탄생했고, 이 온라인망은 현실의 권력 관계를 다시 반영하게 된 것이다.

온라인은 현실을 모방하려 하나, 그것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는 것, 그것은 여전히 오프라인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 이를 데이비드 핀처는 사실 몇 가지 흥미로운 장면으로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페이스북'이 퍼져나가고, 마크가 유명인사가 되는 것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페이스북 그 자신이기도 하지만, 여기에 교내 신문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교내신문에 페이스북이 보도되고, 마크가 그것의 창시자임이 알려지면서 마크는 단숨의 인기인의 경지에 오른다. 즉 이는 어떤 온라인보다 강력한 미디어 권력의 힘을 보여준다. 또한 데이비드 핀처는 재미있는 장면을 넣기도 한다. 윈클보스 형제의 조정 경기 장면. 이 장면들은 이상하게도 슬로우 화면으로 처리되고 있으며, 약동하는 근육의 꿈틀거림과 게임에서의 극적인 승리와 패배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는 내게는 마치 이것의 현실감을 의도적으로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다른 말로 하자면, 온라인에서의 조정 경기는 이와 비슷할 수는 있으나, 극적인 승리에의 쾌감은 만들어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온라인 조정 게임은 영원히 현실의 훌륭한 근육을 만들어낼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현실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마크는 처음부터 이를 의도했던 것일까. 즉 새로운 권력관계를 만들고, 그것에서 왕이 되고자 했던 것일까. 글쎄. 꼭 그랬던 것 같지는 않다. 마크는 처음에는 그저 순수한 호기심으로서, 그저 재미있는 것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의문으로부터 출발한 것에 가깝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그것이 그를 일종의 온라인 상의 권력자로 만들어 준 후부터 그는 조금씩 변모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이 바로 냅스터(Napster)를 만든 숀 파커(저스틴 팀버레이크)였다. 숀 파커는 온라인이 만들어낸 현실의 권력자로서 마크에게 일종의 역할모델이 되었다. 숀 파커와 가까워진 후부터 그는 새로운 세계의 왕이 되어 결국 5억 명의 온라인 친구를 만들어냈지만, 덕분에 가장 가까이에 있던 왈도를 잃어버렸다.
............................................

이 영화의 제목인 <소셜 네트워크>는 그러므로 이제 조금은 다르게 보인다. 그것은 단순히 온라인의 '페이스북'을 의미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조금 더 넓은 오프라인까지 포괄한 사회적 관계망, 조금 더 좁게는 사회적 권력 관계를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마지막에는 나는 묻고 싶어진다. 온라인은 그렇다면 언제가 되어서야 이 사회적 권력을 극복할 수 있는가. 평등한 관계란, 모두가 친구되는 온라인 세계란 여전히 환상인가. 온라인은 결국 오프라인을 영원히 불완전하게 대체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인가. 데이비드 핀처는 이 영화 전체를 두 개의 거대한 소송으로 만드는 것으로 대답을 하고 있거니와 마지막에 살짝 양념을 뿌리고 있기도 하다. 여자 변호사의 충고를 받고(거의 유일하게 이 영화에 등장하는 수동적이지 않은 여성 캐릭터이다), 뭔가 깨달음을 얻은 마크는 예전의 여자친구 에리카에게 친구 신청을 하고는 반복적으로 새로고침을 한다.

이것은 희망적인 결말인가. 글쎄. 나는 별로 동의하지는 못하겠다. 이것이 조금은 희망적인 결말이 되려면 마크는 적어도 '페이스북'에서가 아니라 에리카에게 편지를 보내거나, 하다못해 전화를 하던가 했어야 했다. 권력자로서의 마크의 '페이스북'에서의 위치는 여전하기 때문이다. 조금은 희망적인 결론이 되려면 마크는 적어도 '페이스북'에서의 권력은 벗어나야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는 다음과 같은 맥락이 다른 질문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많은 온라인 소셜 네트워크들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고, 그들과 친구가 되게 만들지만, 과연 과거의 사람, 혹은 꼭 만나고 싶던 그 사람을 만나게 해줄 수 있을까. 지금은 어디론가로 사라져버린 그들은 무엇으로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그들과 다시 새로운 관계를 맺을 것인가. ('아이러브스쿨'이 망한 것은 알고 있다.....)

이 영화의 포스터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다. "5억명의 온라인 친구, 전세계 최연소 백만장자, 하버드 천재가 창조한 소셜 네트워크 혁명!" 그러나 나는 그저 묻고 싶다. 그것은 혁명입니까, 아니면 새로운 방식의 타락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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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0-12-10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11월달에 본 영화들인데, 왠지 밀린 숙제하는 기분으로 쓰고 있음...;;;

네오 2010-12-20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혁명과 타락, 아직 현재진행중이지 않을까여? 소셜네트워크를 좋아하는 핀쳐팬도 많지만, 저는 파이트 클럽의 핀처팬이라서 그냥 이 영화 밍밍하게 봤는데여^^;; 완전 아론 소킨의 영화였어여!!

맥거핀 2010-12-21 18:00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영화 상당히 괜찮게 봤어요. 개인적으로 올해 본 영화 중 베스트3를 꼽으라면, 이 영화도 한자리에 넣고 싶네요. 말씀하신대로 아론 소킨의 입김도 많이 들어간 것 같지만, 이런 스토리의 이런 내용의 영화를 이정도 퀄리티로 뽑을 수 있는 것은 핀처 감독이라서 가능한 것 같아요.

네오 2010-12-22 18:00   좋아요 0 | URL
아~다시 한번 봐야겠네여,,제가 놓친게 있을 겁니다..베스트3가 몹시도 궁금한,,저는 그냥 마구잡이로 넣어봤을 때 옥희의 영화, 엉클분미, 시리어스 맨인데여^^

맥거핀 2010-12-22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베스트3는 <소셜 네트워크>, <하하하>, <시>입니다.^^
 

 


정성일은 언뜻 보기에도 십여 장이 넘어 보이는 일반노트 크기의 메모들을 들고 있었다. 멀리서 넘겨다본 그 메모들에는 뭔가가 손글씨로 적혀져 있는 듯 했다. 그는 그러나 그 종이들을 거의 들여다보지 않고 이야기를 해나갔다.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그 종이를 하나하나 탁자에 내려 놓는 것을 보니, 분명히 이 이야기들의 진행과 관련된 메모들일 것이다. 오래전 정성일의 음성해설이 들어간 DVD를 보며, 정성일은 도대체 이 많은 이야기들을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것일까, 뭔가 적어놓고 대본을 읽는 것일까, 궁금해 했던 적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 둘 중의 어느 것도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아마도 몇 개의 메모들을 들고 있었을 것이고, 그러나 그 메모를 거의 보지 않은 채로, 영화를 보며 이야기를 해나갔을 것이다. 그는 조금은 이상한 문장들을 썼다. 구어체라고 보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고, 그렇다고 문어체로 보기에도 적절치 않은 그런 문장들. 그가 쓴 비평들을 그대로 읽어주는 듯한 느낌. 그러나 아무튼 확실한 것은 그는 엄청나게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어했다. 이렇게 무엇인가를 애써 말하고 싶어하는 화자가 있던가. 1시간이 예정되어 있는 시네마톡이었지만, 그는 1시간을 조금 넘겼고, 몇 장의 종이들은 끝내 내려놓지 못하고, 여전히 손에 쥔 채로 이야기를 끝냈다. 정성일의 <엉클분미>에 대한 영화적 간증과 그것에 압도되어 버린 신도들. 내 머리 속에 남은 것은 그런 이미지였다.

<엉클 분미> 상영과 정성일 평론가의 시네마톡. 그 때 들었던 이야기 몇 개를 지금 뒤늦게 옮겨 본다. 다만 한 가지 첨언해 두어야 할 것은 이 시네마톡은 11월 중순에 있었고, 이것은 여차저차첫차막차한 이유로 12월도 한참 지난 지금에야 몇 개의 단어들에 의지해 이야기를 옮기는 무리한 시도라는 것이다. (영화를 본 이후에, 나중에 시간이 있을 때 뭔가를 끄적거리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몇 개의 단어들만 휴대폰 '그림메모'를 이용하여 남겨두곤 하는데, 이 글도 온전히 그 단어들의 덕이다.) 그러므로 이야기들은 분명히 처음에 들었을 때와는 조금은 달라져 있으리라는 점이다. 그래도 기억을 더듬어 최대한 비슷하게 옮기려고 노력해 본다. 그러므로 당연히, 밑에 있는 모든 내용들은 모두 정성일 평론가가 그날 했던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밑에 이어지는 글들에서 '그'는 당연히 정성일이다.)

1.
그는 이 영화 <엉클분미>가 끝나고 났을 때의 대부분의 관객들이 경험하는 '멍~'해지는 느낌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이것이 영화의 내용 뿐만 아니라, 감독 아핏차퐁 위타세라쿤의 형식적인 시도와도 관련이 있음을 시사했다. 많은 다른 매체들에서 이야기한 바대로, 이 영화는 아핏차퐁 위타세라쿤의 설치미술 작업과 크게 연관이 있다. 아핏차퐁 감독은 설치미술에서 멀티스크린을 사용하여 여러가지의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동시에 체험하게끔 하는 작업들을 하고 있는데, 이를 그대로 영화에 가져왔기 때문에 관객들은 이전의 영화들과 다른 체험을 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가 있는데, 영화의 스크린이 여러 개의 스크린을 쓸 수 있는 설치미술과 다르게, 하나라는 점이다. 그러나 아핏차퐁 감독은 개의치 않고 두 가지의 이야기를 하나의 스크린에서 동시에 해버린다. 예를 들어 영화의 중간에 분미의 아들이자, 오래전 집을 나가 원숭이 인간이 된 분쏭과 오래전 죽은 분미의 아내가 유령이 되어 나타나, 분미 및 통, 젠과 함께 식탁에 마주 앉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분명히 이상한 점이 있다. 그러나 정말 이상한 점은 원숭이 인간 분쏭과 죽은 아내가 유령이 되어 나타난다는 그 사실이 아니라, 이들이 오랫만에 만나고서도, 분쏭과 죽은 아내는 서로를 전혀 반가워하지 않는다는 부분이다. 그것은 이 두 가지가 별개의 이야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즉 원숭이 인간 분쏭이 나타나는 것과 죽은 아내가 나타나는 것은 두 가지의 다른 이야기이다. 실제로 영화 내내 이들 두 사람이 말을 섞는 장면은 단 한 장면도 없다. 아핏차퐁 감독은 이 두 가지의 이야기를 하나의 스크린 위에 그냥 풀어놓는 마법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2.
그러나 관객이 멍해지는 것은 단지 두 개 이상의 스크린을 동시에 하나의 스크린에 투사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여기에는 아핏차퐁의 형식상의 일종의 실험이 있다. 그 실험이란 영화의 고정선(線)을 해체해 버리는 것이다. 대부분의 영화들은 영화의 중심에 어떤 고정선이 있고, 대부분의 관객들은 그 고정선을 따라가며 영화를 즐긴다. 물론 이 고정선은 반드시 하나여야 한다는 법은 없다. 일부러 고정선을 여러개 두는 경우도 있고, 그 중 고정선 하나를 갑자기 잘라내 버리는 경우도 있고, 그 고정선을 비틀어버리는 경우도 있다(예를 들어 우리가 흔히 반전(反轉)이라 부르는 것). 그러나 이 영화의 특이한 점은 관객이 어떤 고정선을 따라가다가 그것이 아닌 것 같아 그 고정선을 버리면, 영화가 한참 진행되다가 어느샌가 그 고정선이 다시 나타나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변태와 환생(전생)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환생(전생)이 A가 A'가 되는 것이라면 변태는 A가 B가 되는 것이다. 즉 영화 속에서 분미의 경우가 환생(전생)이라면, 통이 스님이 되는 것은 변태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아핏차퐁의 영화도 변태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즉 이 <엉클분미>라는 영화는 A로 시작했다가, 그것이 B가 되었다가, 그것이 다시 C가 되기도 하고 다시 A로 문득 돌아오기도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멍해지는 것이다.

3.
이 밖에도 이 영화에는 내용상의 대구(對句)가 있다. 공주가 물(수분)로 들어가는 꿈(혹은 전생)의 내용과 분미와 젠, 통이 아내 유령을 따라 건조한 동굴로 들어가는 장면은 내용상으로 대구를 이룬다. 그리고 분미는 건조한 동굴에서 수분이 빠져나온 채로 죽음에 이른다. 이 장면들은 왜 대구를 이루는가.

4.
영화의 중간에 갑자기 메기와 공주의 이야기가 삽입된다. 이를 누구의 꿈 혹은 전생으로 보아야 할까. 분미의 전생일까, 통의 전생일까, 아니면 젠의 전생일까. 아핏차퐁 감독은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다. 그는 이 메기와 공주 에피소드 다음에 바로 이어지는 장면이 분미가 모기를 전자모기채로 잡는 장면임을 상기시키며(이 장면은 또한 이것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죽은 모기들과 죽은 공산주의자들), 왜 모기의 전생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말을 전제로 하여 생각해 보면, 이 장면은 분명 이상하게 찍혔다. 즉 대부분 모기를 잡는 장면이 있다면 그것을 잡는 사람이 중심이 되는 반면에, 이 장면은 특이하게도 잡히는 모기들이 화면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5.
그가 무엇보다도 강조한 것은 이 영화의 래디컬한 정치성에 대해서다. 이 영화가 처음 공개되었을 때 영화를 본 평론가 및 기자들은 이 영화의 급진적인 정치적 메시지에 대해 놀랐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사석에서 아핏차퐁 감독 역시 자신이 죽을 때까지 태국은 국왕 및 군부 독재에 둘러싸여, 민주화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고 토로하기도 했다고 한다. 몇 가지 장면들이 있다. 분미가 젊은 날 공산주의자를 너무 많이 죽인 자신의 업보에 대해 말하기도 하고, 미래 이야기라고 하면서 보여지는 사진들도 있다. 이 사진들에서 원숭이 인간 분쏭과 총을 든 사람들(공산주의자들?)이 나란히 찍은 사진들도 있고, 이들이 해맑게 웃고 있는 사진들도 있다. 마치 이 사진들은 이 영화 촬영 현장을 스케치한 사진들 같기도 하다. 즉, 이 영화 속에서 '미래'라고 소개된 사진들은 현재에 가깝다. 이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는 이 <엉클분미>라는 전체 영화의 내용이 공주와 메기의 에피소드라는 대과거 및 이 미래 사진 사이에 있는 전과거임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 미래 사진 속의 현재는 희망적인가. (나는 그렇다고 보기가 힘들다고 생각한다. 사진 속 사람들은 웃고 있지만, 사진 속에는 쓸쓸한 공기가 감돈다. 그가 이 영화는 우리나라로 치면 80년 광주가 아니라, 한국전쟁 뒤 지리산에서 찍힌 것으로 봐야한다고 했던 것으로도 미루어 볼 때, 이 사진들에는 절망 속에서의 한 때의 휴식과도 같은 것들이 비춰진다.)

6.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영화의 마지막이다. 마지막에서 스님이 된 통은 사원이 무섭다면서 잠을 잘 수 없다고, 젠의 숙소로 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 입고 젠과 함깨 TV를 보다가 일어선다. 그리고 이 때, 익히 알려졌듯이 두 가지 행동으로 그들은 분리된다. 이 장면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왜 통은 스님이 되었으면서도 사원이 무서운가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이 장면을 아핏차퐁이 매우 공들여 찍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총 4가지 구도로만 찍혔고, 그 중 2가지 각도만을 마지막에 번갈아 보여주며, 그들을 두 가지로 분리시킨다. 하나는 TV를 계속 바라보고 있는 젠과 통이고, 다른 하나는 TV 앞을 떠나 세븐 일레븐으로 무엇인가를 먹으러간 젠과 통이다. 아핏차퐁은 여기에서 관객들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TV를 그대로 볼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외면하고 떠날 것인가.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TV에는 태국 시민들의 시위와 그것을 제압하는 정치가와 군부들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외면할 것인가, 그것을 바라볼 것인가. 그러므로 그는 강조해서 말한다. 일부의 사람들은 아핏차퐁 감독의 전작들에 비추어 볼 때 이 영화가 쉬워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무엇이 쉬워진 것인가. 외면할 것인가, 바라볼 것인가의 정치적인 단호한 질문을 하는 이 영화를 단지 형식적인 문법이 조금 쉬워졌다고 해서 쉬워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덧.
그는 이 밖에도 많은 이야기를 했다. 설치미술가로서의 아핏차퐁 감독의 면모에 대해 이야기했고(그러면서 한국에서 그 당시 전시되고 있던 아핏차퐁의 설치미술들을 꼭 관람하기를 권했다), <엉클 분미>가 가진 불교적 세계관에 대해 이야기했고, 아핏차퐁 감독의 정글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정글이 가지는 원시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또, 홍상수 감독과 아핏차퐁 감독이 시카고 예술대학에서 동문수학했던 인연과 더불어 지난 CINDI에서 이들 두 감독 사이에 짧게 이어졌던 기이한 대화에 대해 전했다. 그러나 그것을 다 세세하게 전하기에는 내 기억력이 모자르다. 나는 그리고 멍해졌던 것이다. <엉클분미>로 멍해졌고, 그리고 이어지는 정성일의 이야기들로 다시 한 번 멍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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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9 22: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10 0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네오 2010-12-11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글 정말 저의 온 정신이 홀리도록 잘 쓰시는군여^^; 글을 읽다보니 모기의 전생이라니여, 전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습니다. 새로운 사유의 방식의 등장이군여, 대부분이 엉클분미를 보고 난 다음 멍해졌다는 느낌을 생생하게 말하더라구여,,올해의 해외영화라면 이 영화와 코엔의 '시리어스 맨'이라고 조심스럽게 이야기 해봅니다..뭐 이유가 여러가지 겠죠^^; 추천 꾸우욱 누르고 갑니다~~

맥거핀 2010-12-12 14:11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글 좋게 보셔서 감사합니다. 물론 전적으로 정성일 님이 애기를 잘 해주신 덕분이지요. 모기의 전생 같은 것은 저도 영화를 볼 때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아핏차퐁이 정말 그런 의도로 만들었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동진 평론가도 본인 블로그에서 올해의 해외영화 1위로 <시리어스 맨>을 꼽았던데..이 영화 꼭 한 번 봐야겠네요.
 
골든 슬럼버 - Golden Slumber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이 영화의 유일한 장점은 "원작도 이래?"라며, 원작을 찾아보게 만든다는 것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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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0-12-15 0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평이 엇갈리네요 ^^ 얼마전에 박중훈이 이 영화평을 주인장처럼 트위터에

소개해서 나름 곤욕(?)을 치른거 같은데 말이죠...

얼마나 엉망인지 궁금해지네요 ㅋ

맥거핀 2010-12-15 14:35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까..박중훈 씨가 어떤 평을 했는지 궁금해지는데요. 뭐 그렇다고 곤욕을 치르실 것까지야..;; (요즘에는 심지어는!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조심스러워지더라구요.)
나중에 관련된 평들을 좀 찾아보니, 이 영화는 원작소설을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들도 어느정도 평들이 갈리는 것 같더라구요. 아무래도 제가 소설을 읽지 않아서 그런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다이조부 2010-12-15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중훈도 주인장과 비슷한 평을 했던걸로 기억합니다 ㅎ
 
인문/사회 분야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아직 11월에 온 <바다>나 <왜 도덕인가?>도 하나도 읽지 못했는데, 벌써 새로운 책들을 추천해야 하나 보다. 이렇게 별로 책도 읽지 않고, 뻔뻔스럽게도 이 책이 어떻고, 저 책이 어떻고 하는 글을 써야하니 민망한 노릇이다. 어쩌면 이렇게 중언부언 설명을 붙이지 않고, 그저 책들만 죽 나열하는 다른 글들이 더 솔직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그래도 민망해서 오그라든 손가락을 펴는 차원에서라도 몇 마디 흰소리를 덧붙여 본다.  

머리 속에 지식은 점점 얇아져만 가고, 보관함에 든 책들은 점점 늘어만 간다.....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 앨버트 O. 허시먼 / 웅진지식하우스

레토릭(rhetoric, 수사학)은 때로 다른 것들과 결합해 부정적인 것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보수 신문들의 레토릭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그 레토릭 이면에 숨어 있는 다른 것을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또 역으로 생각해보면 보수 신문들이 어찌 되었건 우리나라 매스미디어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고, 그것에는 그들의 현란한 레토릭이 한몫을 한다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지만, 지난 대선에도 먼저 경제에 대한 주제를 선점하고, 그로 인한 보수의 레토릭들이 보수정권에 승리를 안긴 것 또한 사실이지 않은가. 지배하기 위해서는 레토릭이 필요하다. 우리는 흔히 수사학하면 소피스트들을 연상하고, 소피스트하면 소크라테스의 독배를 연상하는데, 독배를 마시지 않기 위해서는 그 독배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추상적 사유의 위대한 힘- 튜링 & 괴델 / 박정일 / 김영사

현대는 인공지능의 시대이고, 우리는 싫든 좋든 인공지능에 둘러싸여 있다. 인간 이외에 또다른 생각하는 기계들의 출현. 이 출현에 획기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튜링과 괴델이다. 괴델은 '불완전성의 정리'를 내세워 논리적 사고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고, 튜링은 '튜링 기계'를 고안하여 현대 컴퓨터의 시초를 만들었다. 그 튜링과 괴델의 시작들이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지, 또 앞으로의 인공지능에 대한 논의에 놓여있는 암초들은 무엇인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줄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재미있을 것 같다! 



엥겔스 평전 / 트리스트럼 헌트 / 글항아리

엥겔스는 마르크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것이 사실이고, 그의 생애 역시 총체적으로 조망되어 국내에 소개된 적은 드물다. 이 책에는 '프록코트를 입은 공산주의자'라는 부제가 달려있는데, 이 부제가 그의 고민과 그가 처했던 위치를 잘 말해주는 것 같다. 그리고 이 고민들은 왠지 현재 사회와도 조금은 연관이 되는 듯 하다. 예를 들어 만약 우리 사회에도 공산주의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된다면(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그것의 주축은 노동자들이 아닌, 아마도 중상류층 이상의 지식인 층이 될 것이다. 왜 그런걸까. 이 책이 조금은 힌트가 될 수도 있을 듯.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 / 아브람 노엄 촘스키, 미셸 푸코 / 시대의 창

촘스키와 푸코라. 언뜻 생각하면 두 사람을 연관지을 수 있는 끈은 '구조주의' 외에는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러나 또 다르게 생각하면 두 사람의 공통점의 실마리가 드러나는 것 같기도 하다. 촘스키는 자신의 주전공인 언어학 외에 미국의 제국주의적 정책에 대해, 미국 및 강대국들의 권력에 대해 끊임없이 딴죽을 걸었던 학자이고, 푸코 역시 권력의 메커니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에서 꾸준히 논의를 전개해 왔다. 일단 그 두 사람의 만남이니 흥미가 가고, 그 두사람의 TV 토론을 책으로 만들었다니, 쉽게 이야기를 들려줄 것 같다. 



공자 평전 / 안핑 친 / 돌베개

중국에서 최근 공자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는 것 같다. 물론 중국에서 공자에 대한 숭상은 계속 이어져 왔으나, 최근 들어 그것이 더욱 강력해진 감이 있다. 예를 들어 최근 주윤발 주연의 <공자>라는 영화가 개봉한 것도 그 맥락 중의 하나이지 않을까. 그런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공자는 이미 박제된 지 오래고, 오래된 낡은 관념으로만 남아 있다. 그것은 물론 나도 마찬가지인데, 우리의 고정관념 속의 박제된 공자나 영화로 만들어진 스펙터클한 공자가 아니라, '인간 공자'는 진정으로 어떠한 사람이었는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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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0-12-06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감벤의 <세속화 예찬>이나, 네그리의 <네그리의 제국 강의>를 추천하고도 싶었으나, 일단 쉬운 책들부터라도 좀 읽자. 아감벤이나 네그리는 상태가 좋을 때에....
어째 올리다 보니 평전이 두 권. 지난 번에 산 <박헌영 평전>도 아직 읽지 못했는데!!

cyrus 2010-12-06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에는 평전이 꽤 많이 나오는가 봅니다. 故 리영희 씨의 평전도 그렇고,
오늘 확인해봤는데 비스마르크 평전도 나왔더군요. 갑자기 평전에도 급 땡기네요.

맥거핀 2010-12-07 00:55   좋아요 0 | URL
한 사람의 삶을 다각도로 조명하는 평전들이 교양을 쌓고 싶어하는 독자들의 취향에도 맞고, 무엇보다도 아무래도 재미있게 잘 읽히는 측면이 있어서 그런가 아닌가 조심스럽게 추측해봅니다. 그런데 확실히 평전은 누가 썼느냐가 중요한 문제인데, 위의 책들의 저자들이 어떤 분들인지는 잘 모르겠네요...(제가 책소개를 잘 믿지 못해서..;;)

꽃도둑 2010-12-10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 님 부산 지하철 역에서 봤어요...피리부는 소년 맞죠?...^^
얼마 전 배병삼 교수님의 논어 강의를 들었는데 공자를 보는 새로운 눈을 갖게 되었죠..
공자 급 땡깁니다..^^

맥거핀 2010-12-10 20:29   좋아요 0 | URL
저를 보셨다는 이야기인줄 알고 순간 멈칫 했습니다.^^; 피리부는 소년을 보셨다는 이야기시겠지요. 네..마네의 피리부는 소년 맞습니다.
저는 누군가 예전에 선물해주셔서 <논어>를 가지고 있고, 가끔 들여다보곤 하는데요. 볼 때마다 묘한 깨달음을 얻습니다. 도대체 공자님은 왜 이렇게 맞는 말씀만 하실까요..(절대 빈정대는 것 아닙니다.;) 그렇게 행하는 것이 어려워서 그렇지, 이 <논어>의 이야기들은 현재의 시대에도 거의 들어맞는 듯 싶습니다.
반갑습니다.^^
 
초능력자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영화의 결말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초능력자>가 며칠 전 200만을 돌파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생각보다는 그렇게 탄력있게 앞으로 나아가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개봉일에 최다관객수 신기록을 세웠다는 뉴스도 본 것 같은데, 아무래도 용두사미가 되어버린 것 같다. 곧 크리스마스도 다가오는데, 그 때까지 극장에 남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런데 이 영화 <초능력자>는 그대로 묻히기에는 사실 의외로 진중한 물음들을 던지고 있기도 하다. 강동원, 고수라는 꽃미남 배우들을 앞세운 그저그런 슈퍼히어로 영화로만 보기에는 그 질문들이 던지고 있는 깊이가 아쉽고, 그렇다고 좋은 영화로 보기에는 질문들에 대해 내놓은 해답들이 아쉽다. 그저 이래저래 아쉬운 영화이다.

그리고 이 영화 <초능력자>는 상당히 도식적인 영화이기도 하다. 초인(강동원)의 세계와 그에 맞서는 규남(고수)의 세계는 정확히 갈라져 있다. 초인이 사는 호텔방의 샤프한 세계와 규남이 사는 공간인 뒷골목의 허름한 세계는 그 자체로 대립적이다. 그리고 초인은 혼자서 사람들을 조종하는 것으로 대항하지만, 규남은 외국인 친구들과의 연대를 통해 초인에게 맞선다. 이를 한편으로는 초인은 자꾸 사회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규남은 자꾸 사회속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영화 초반의 이야기가 보여주듯이 초인은 사회에서 격리되어야 할 괴물과 같은 존재다. 그리고 동시에 초인 자신도 다른 사람들과의 연대를 그다지 원하지 않는 것처럼도 보인다. 반면 규남은 "나 유토피아 임 대리야!"라고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여 설명한다. 즉 규남이 원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유토피아의 임 대리로서, 즉 이 사회 안의 관계망의 일원으로서 보이는 것이다. 

이는 왠지 우리사회의 일면을 자꾸만 들여다보게 만든다. 예를 들어 초인의 초능력은 자꾸만 무엇인가를 연상하게 만든다. 타인의 생각을 조종하여 자신의 뜻대로 하게 만드는 것. 그것은 단순히 초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인가. 굳이 초능력을 쓰지 않더라도, 우리는 알게 모르게 많은 것들에 조종당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 대부분 아무것도 자각하지 못한다. 혹은 자각한다고 할지라도 그 감도는 아주 어렴풋하다. 그러므로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장면들도 있다. 초인과 규남의 지하철 대결 장면에서 초인의 초능력이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고, 규남은 쓰러진 후 겨우 기어서 지하철 벤치까지 오는데, 아무도 그를 돕는 사람은 없다. 모든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의 길을 바쁘게 갈 뿐이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작은 화면을 바라보며. 왠지 이 장면은 초인의 초능력이 사라진 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무엇인가에 조종당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초인에게 대항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CCTV가 자꾸 활용되고 있는 것도 재미있는 설정으로 보인다. '유토피아'에 설치된 CCTV는 물론, 규남과 친구들은 CCTV를 찾아 초인의 자취를 살펴보려 한다. 또한 규남과 초인의 경찰서 씬에서도 CCTV는 다시 한 번 등장한다. 조종하는 권력에 대한 대항물로서의 감시의 눈으로 CCTV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물론 규남이 CCTV에 의해 범인으로 지목되는 것처럼, CCTV는 기본적으로 권력 가까이에 있다.) 

한편으로는 규남의 친구들이 외국인들로 설정된 것이 흥미롭다. 이는 어떤 우연의 산물로만 보여지지는 않는데, 예를 들어 유토피아의 사장인 정식(변희봉)의 부인 역시 외국인으로 설정되어 있고 그들의 (혼혈인) 딸 영숙과 규남을 굳이 영화에서 묶는 것이 그 하나의 증거이며, 굳이 그 이름이 '유토피아'인 것이 또다른 증거이다. 즉 초인의 초능력에 맞서는 일종의 글로벌한 긍정적인 연대가 있는 셈이다. 이것 역시 우리사회의 어떤 일면을 말해주는 것일까. 아무도 그를 돕지 않는 규남 곁에 끝까지 남는 규남의 외국인 친구들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일까. 한편으로 이 장면들은 <괴물>에서 송강호와 외국인이 같이 괴물에 맞서던 초반 장면들을 생각나게 만들기도 하는데, 그와는 묘하게 다른 점들이 있다. 그것은 이 장면들에 흐르는 특유의 어떤 정서들이 한 몫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이들은 이어지는 몇 개의 코믹적인 에피소드를 통해 유대를 공고히 하고, 끝내는 그 공감을 관객에게까지 넓힌다. 즉 규남과 그 외국인 친구들이 만드는 연대는 물질적인 관계나 필요에 의해 이루어지는 관계가 아닌, 그저 우리네 보통 동네친구들이 보여주는 연대이고, 이들이 만드는 정서는 영화의 전체톤을 지배한다.

이런 대결의 장 속에 또다른 질문들이 있다. 그것은 일종의 변형된 슈퍼히어로물이라는 이 영화의 다른 부분들에 있다. 이 영화를 보고 <다크 나이트>를 떠올렸다는 분들이 있는데, 왜냐하면 이 영화가 <다크 나이트>와 비슷한 질문을 다른 방식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 초인은 계속하여 같은 논리로 규남을 밀어붙인다. 그것은 규남이 자꾸 문제를 크게 만들고 있다는 논리이다. (그리고 이 논리는 우리사회에서 보수신문들이 잘 쓰는 방식이기도 하다. 왜 시위(점거)를 해서 문제를 크게 만드는가? 그러니까 정부가(혹은 회사가) 강경대응을 할 수 밖에 없지 않는가?...) 어쩌면 초인의 말대로 규남이 굳이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연이은 사람들의 죽음은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크다. 초인은 그저 돈이나 훔쳐가는 데에 만족했을 것이고, 굳이 사람들을 죽여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즉 대응하는 선이 커지면 커질수록 악은 계속해서 커진다. 이것은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가 계속 배트맨을 압박하는 논리와 닮아 있고, 배트맨이 계속 고민하던 딜레마이기도 하다. 즉 자신의 존재가 도리어 조커를 계속 자극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자신이 이 사회에 존재하여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

그런 관점에서 보면 조커가 사회의 괴물이고, 도려내야 할 존재인 것처럼, 배트맨 역시 사회의 (다른 이름으로서의) 괴물이고, 언젠가 사라져야할 존재이다. <초능력자>에서 초인의 일종의 자포자기적인 삶도 궁극적으로는 여기에 이유가 있다. 그가 아무리 사회에서 조용히 살아가고자 해도, 그가 사회 속으로 스며든 순간 그의 괴물성은 필연적으로 드러날 것이고, 그는 사회에서 괴물로 축출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에 스스로 격리되어 지금처럼 살아가는 것, 아마도 그것이 초인이 할 수 있는 몇 가지 안되는 선택 중의 하나인 것이다. <초능력자>가 흥미로워 보였던 이유는 여기에 다른 대답을 던지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규남이 초인에게 이름을 묻는 것은, 그를 사회 속의 다른 개체들로, 즉 받아들일 수 있는 어떤 존재로서 본다는 것처럼 보였고, 초인이 머뭇거리는 순간 <다크 나이트>와는 다른 출구를 제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영화는 안전한 선택을 한다. 규남은 어느덧 배트맨이 되어버린 자신을 발견했다. 그건 좋지만, 아마도 그 순간부터 그도 배트맨처럼 자신의 운명에 대하여, 그 딜레마에 대하여 진지하게 숙고해야 될 것이다. 

지금은, 우리는 어떻게 괴물이 될 것인가를 물을 때보다는, 우리는 어떻게 인간이 될 것인가를 물을 때이다. 물론 후자의 질문이 훨씬 답하기가 어렵다. 후자의 질문을 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끝내 전자의 질문을 답하고만 영화의 선택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덧. 3주 전에 본 영화에 대해 뭔가를 끄적거리기란 상당히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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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0-12-15 0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를 전후반으로 나누면 초반에는 집중력있게 볼만한데

점점 시간이 갈수록 지루해진던데 말이죠~ 음....

맥거핀 2010-12-15 14:32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영화를 상당히 괜찮게 봤습니다. 뭐 굳이 이야기하자면 올해의 발견작(?)이라고나 할까요.
막판에 너무 단선적인 대결 구조가 되고, 대결의 부분만 반복되다보니, 없잖아 후반부에 가서 힘이 상당히 떨어지는 감은 있었습니다.

다이조부 2010-12-15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에 공감해요. 대결 부분이 반복될수록 집에 가고 싶더라구요

주연 배우보다도 고수 친구들이 더 끌리더군요 ㅋ

맥거핀 2010-12-16 12:57   좋아요 0 | URL
매력적인 캐릭터들이었습니다. 그간 한국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든 캐릭터들이기도 했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