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 - Late Autum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약간의 스포 있음)




<만추>라는 제목은 즉각적으로 그 시간과 시간에 배인 정서를 떠올리게 한다. 만추. 늦가을. 모든 것의 수확이 끝나버린 때. 새롭게 무엇을 시작하기에는 이미 늦은 시간. 겨울을 최대한 미루고 싶은 시간. 어떻게든 유예하여야 하는 시간. 죽어가는 시간. 이제 잠들어야 하는 시간. 그리고 훈(현빈)의 시간. 애나(탕웨이)의 시간. 그리고 그 둘이 만나는 시간.

영화 속 애나의 시간과 훈의 시간은 다르다. 애나의 시간은 그녀 자신 안에서 최대한 늦춰지면서 천천히 흘러간다. 7년간의 수감 이후, 어머니의 죽음으로 단 72시간만의 귀향을 허락받은 애나에게 그 시간들은 일분 일초가 소중한 것이다. 그녀는 어떻게든 그 시간을 잡아두어 천천히 흐르게 하려고 한다. 어떻게든 잡아두고 싶은 시간들. 어떻게든 유예시키고 싶은 72시간 후의 막내림. 반면 훈에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 훈에게 흐르는 시간은 그에게는 그렇게 큰 의미가 없다. 그에게 오늘은 이 여자를 만나, 이 여자에게 빠르게 맞추는 시간이고, 내일은 또 다른 여자를 만나, 다른 여자에게 빠르게 맞추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처음 애나에게 돈을 빌렸을 때, 훈은 그 대신 기꺼이 시계를 내민다. 그에게 시간을 확인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처음 이 두 사람은 본인들에게 가장 의미가 없는 것을 서로 교환한다. 그것은 훈에게는 시계이며, 애나에게는 돈이다.

그러나 영화가 흥미로워지는 것은 여기서부터다. 영화는 이 두 사람의 다른 시간을 공명시키기 위해 영화적 판타지를 은밀하게 작동시킨다. 서사적 단절을 감수하면서도, 두 사람은 우연의 힘을 빌어 다시 만나고, 또 다시 헤어지고는, 다시 만난다. 물론 그런 영화적인 판타지가 가장 강력하게 드러나는 것은, 두 사람이 놀이공원에서 한 남녀를 만나고, 그 남녀의 환상을 보는 장면이다. 이 환상은 언뜻 이 두 사람의 시간을 비유하여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는데, 한 공간 안에서 두 남녀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간다. 그리고 그 시간은 다시 앞으로 당겨지고, 다시 시작되고, 다시 반복된다는 것이 형상화되어 차례로 보여진다. 이 장면의 아름다움은 말로써 표현하기 어려운데, 그 아름다움이 더해지는 것은 그 장면을 다음으로 연결시키는 방식에 있기도 하다. 그 장면은 자연스럽게 훈과 애나에게 반복되며, 그 환상이 깨어짐과 동시에, 그 두 사람의 시간을 다시 드러내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두 사람의 시간의 차이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도리어 시간의 공명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판타지적 장치이다. 그러므로 두 사람의 만남에 따른 이 시간은 영화 속에서 그 안개만큼이나 흐릿해진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만날 때, 그 두 사람을 보고 깜짝 놀라는 '유령 투어'를 하는 사람들. 이 때의 시간은 도대체 언제일까. 이 시간들이 환기되는 것(물론 흐릿하게 만드는 것 만큼이나, 환기시키는 것 역시 중요하다)은 오로지 두 사람에게 걸려온 전화를 통해서이다. 애나에게는 그녀의 예정된 귀환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그리고 훈에게는 그에게 이 시간들을 빨리 써야 한다는 것(빠른 시간 안에 그는 어디론가 도망쳐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말이다. 

영화가 더 할 수 없이 흥미로워지는 것, 혹은 더 할 데 없이 아름다워지는 것은 물론 그 마지막에 있다. 안개 때문에 버스는 정차하고, 훈에게는 애써 무시했던 전화 속의 유령이 환기되어 돌아온다. 그리고 여기에서 훈과 애나의 시간은 역전된다. 무한정 남은 것처럼 보였던 훈의 시간은 급속도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이 때부터 남은 아주 짧은 시간은 훈에게는 더없이 소중해진다. 즉 다른 말로 하자면, 훈의 시간 흐름은 지금까지의 애나의 시간 흐름이 된다. 그리고 훈은 그제서야 애나가 가진 시간의 의미를 진정으로 깨닫는다. 그 어떻게든 유예시켜야 하는 시간의 의미. 그 일분 일초가 소중한 시간의 의미. 그래서 그는 그제서야 애나에게 진심을 담은 키스를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다시 애나에게 이번에는 훈의 시간이 전이된다. 애나에게 이제 남은 시간은 빠르게 흐르게 되었다. 다시 훈을 만나야 하는 시간이 기다리고 있으므로, 이제 그녀에게 남은 시간들은 빠르게 흘러보내야 하는, 아니 빠르게 흐를 수밖에 없는 시간이 되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듯이 애나는 허둥대며, 훈을 찾아나선다. 그러나 훈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남겨져 있는 것은 잠든 애나에게 훈이 둘러주고간 시계 뿐이다. 물론 같은 행동이지만, 이 때의 시계의 의미는 처음과 다르다. 처음의 시계가 훈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면, 이 시계는 '당신의 시간을 이해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영화의 마지막에 애나가 훈에게 '오랜만이에요'라고 말하는 것은 이제 그의 시간을 이해한다는 의미이다. 그가 견뎌야할 그 많은 시간들을 이해하고 이제 나를 그 시간들에 공명한다는 것. 영화의 그 마지막은 판타지를 소중히 간직한 채 아름답게 말한다. 사랑의 다른 이름은, 상대방의 시간을 이해하고 공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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넙치 2011-03-02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에요에 대한 통찰력있는 해석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맥거핀 2011-03-03 17:1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이렇게 생각할수도 있지 않을까..싶어서 한 번 써본 짤막한 글입니다. 마지막 '오랜만이에요'가 참 좋았는데, 그 무엇이 날 흔들었을까..하고 생각하면서요.^^

2011-03-03 0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03 17: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네오 2011-03-03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훈에게는 애써 무시했던 전화 속의 유령이 환기되어 돌아온다"는 애나에게 걸려오는 확인 전화를 말씀하는 건가요? 시간의 역전이라는 흐름과 애나의 시계라는 장치, 너무 와닸네여~

사랑의 다른이름은 상대방의 시간을 이해하고 공명하는 것이다라는 구절이 마음을 흔드네여

맥거핀 2011-03-03 17:22   좋아요 0 | URL
훈에게 걸려오던 전화 말입니다. 훈은 경고하던 친구가 말한 그 전화의 내용을 거의 믿지 않는 것처럼도 보였거든요. 일종의 특유의 허세일수도 있구요. 근데 사실 나중에 그 옥자 누님의 남편이 나타나는 장면은 좀 이상해보이기도 했어요. 그 남자가 일종의 유령처럼 보였다고 할까요. 뭔가 이상한 분위기를 풍기기도 했고, 뭔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어요. 제 느낌에는.
 
<리영희평전>을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리영희 평전 - 시대를 밝힌 '사상의 은사'
김삼웅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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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리영희 선생의 평전을 읽는 것은, 우리의 현대사를 읽는 것과 같다. 리영희 선생의 삶은 분단과 한국전쟁, 4.19 혁명, 5.16 군사쿠데타, 유신독재, 신군부와 광주, 6월 항쟁과 문민정부, 진보 정권, 그리고 이명박 정부까지 한국의 현대사와 오롯이 굴곡을 같이 한다. 리영희 선생은 그 숱한 현대사 굴곡의 최전선에서 가장 필요한 말들을, 그것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해왔다. 그러나 이 평전을 읽으면서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 것이 있다면, 리영희 선생의 말들은 대부분 우리를 향한 것이었지만, 그의 눈은 항상 밖을 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사상은 분단과 독재로 점철된 갇힌 사고에 의해 끊임없는 제약을 받았지만, 그는 그 사고의 틀에 갇히지 않고, 세계사의 넓은 흐름 속에서 사고하려고 애썼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리영희 선생을 '의식화의 원흉'이라고 부르거나, '진보적 지식인, 언론인' 혹은 더 나아가 '사회주의자'로 부르는 것은 오해와 이분법으로 점철된 우리의 현대사를 그대로 평가에 투영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가 지향하는 바를 왜곡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리영희 선생이 원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상을 부수는 것이었다. 그의 저작의 제목 <우상과 이성>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선생은 이성의 힘으로 우상을 부수고자 하였다. 당시의 우리를 둘러싼 많은 우상들, 예를 들어 박정희 독재체제, 반공, 북한이라는 악마, 미국이라는 선, 중국에 대한 편협한 시각, 베트남전쟁의 당위성, 지역주의 등이 그가 원하는 파괴의 대상들 중 일부였다. 그것들이 이성의 힘에 의해 파괴되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그러한 우상들 때문에 우리들 대부분이 올바른 사고를 하지 못하여, 가치관이 왜곡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올바르게 사고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생존을 위험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주 단순하게 말해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미국에 대한 의존과 중국을 하찮게 보는 태도는 우리의 외교정책에 영향을 미쳐서 우리의 생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따라서 리영희 선생을 사회주의에 경도 되었다거나, 혹은 너무 진보적 관점에서만 세상을 바라보았다고 말하는 것은 한편으로 그간의 진보 보수의 이분법적 프레임에, 즉 다른 말로 하면 이분법의 우상에 사로잡혀 그를 평가하는 것의 다름 아니다. 그의 발언이 그간 진보적 관점에 너무 치우쳤다는 것은 그저 우리 사회에서 그동안 그런 우상들의 힘이 너무 강력했다는 것을 반증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 우상들이 얼마나 강력함을 이 짧은 리뷰에 길게 적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자주 드나드는 인터넷 게시판에 가서 더도말고 딱 1시간만 '눈팅'을 한다면, (리영희 선생의 많은 노력에도) 그 강력한 힘들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머리 속을 얼마나 휘어잡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관점에서 이 평전의 이러한 진술을 이해할 수 있다.

   
  리영희가 유럽 중세에 태어났으면 이단심문소에 끌려가 화형을 당했을지 모르고, 나치시대에 독일이나 프랑스에서 살았으면 레지스탕스가 되었을 것이다. 제정러시아나 스탈린 시대 소련의 지식인이었다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을 터이고, 문화혁명기 중국에 살았다면 하방下放의 표적이 되었을 것이다. 해방정국에서 북한에 머물렀다면 아오지 탄광에 일생을 묻었을 터이고, 조선시대의 선비였다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출척을 당한 끝에 역모의 누명을 뒤집어 쓰고 사약을 받았을 것이다. (p.29)
 
   

그래서 아마도 리영희 선생에 가장 가까이 있는 말로는 휴머니스트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휴머니스트를 여러 결로 정의해 볼 수 있겠지만, 가장 간단하게는 인간의 생존과 삶을 제1의 가치에 두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의 정확한 이론적 탐구와 정세분석의 가장 밑바닥에는 우리 민중들의 삶과 생존에 대한 분노와 걱정이 깔려 있다. 안과 밖에서 이중으로 속박당하는 민중의 삶과 생존에 조금이나마 숨통을 틔워주는 것이 그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하고, 리영희 선생은 글을 쓰고 행동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그가 가장 존경한 인물 중의 하나였던 루쉰의 삶과도 맥이 닿아 있다. 루쉰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는 너무 오른쪽이라고, 그리고 오른쪽에 있는 자들에게는 너무 왼쪽이라고 공격을 받았지만, 그가 가장 걱정한 것은 이중의 속박에서 고통당하는 중국 민중의 삶과 생존이었다. 그가 존경한 루쉰을 보면, 그의 삶 속에서 결국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것은 휴머니즘이 아니었겠는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휴머니즘은 인간을 그저 생존시키는 것에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을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다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다운 사고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외세에 의한 분단이라는 아픔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이, 그 외세에 동참하여 타인에게 같은 아픔을 안겨준 베트남전쟁에 대하여 진정으로 참회하고 반성하는 것, 그것은 리영희 선생이 말하는 인간다운 사고이며, 삶이며, 리영희 선생의 태도이기도 하다.

이 책 <리영희 평전>이 평전으로서의 균형감각을 잃고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나는 그 문제를 지적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균형감각이라는 것을 말하려면, 적어도 그 평균대가 놓여진 평평한 대지를 우리는 상정하여야 할 것이다. 하워드 진의 유명한 말을 다시 한 번 가져와본다면,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달리는 기차 위에서 억지로 균형을 유지하려고 했다가는, 기필코 넘어지고야 만다. 그리고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까, 넘어질 때는 힘을 더 가진 쪽으로 넘어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우리의 기차는 보통의 기차가 아니다. 이상한 방향으로 달리는, 아주 고르지 못한 땅을 달리는 고속의 기차이다. 그 고속의 기차 위에서 리영희 선생은 어떻게든 모든 핍박받는 자들을 안전하게 기차에 앉히려고 애썼다. 그것은 그 사상적 어린아이들을 어떻게든 부여잡아 다독이는 억센 손이다. 그 억센 손을 세밀하게 묘사할 때도, 균형감각이라는 것을 상정해야 할까. 그러한 무서운 고속의 기차 위의 균형이란 무엇을 위한 균형일까.

그런 리영희 선생은 2010년 12월 5일 타계하셨다. 우리는 최근 연이어 사상의 은사를 잃고 있다. 그러나 꽃은 졌지만 향기는 남는다. 아직도 수많은 우상은 우리곁을 맴돌지만, 선생이 남겨준 우상을 없애는 이성의 무기, 사상의 무기는 여전히 벼려진 채 우리에게 남아있다. 그러므로 그를 추도하고 기억하는 또다른 방법은 그가 남겨준 힘을 이용하여 우리 삶에 아직 남아있는 우상들을 조금씩 밀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우리가 조금씩 더 인간다운 사고를 하게 될 때 우리는 조금씩, 리영희 선생에게 진 빚을 갚아나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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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02-28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제목은 예전에 읽었던 김서령 님이 김춘수 선생을 추모한 글의 제목을 조금 가져다 썼습니다.

네오 2011-02-28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상을 부수는 것이었다,,엄청나게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아~ 반자본 발전사전을 서점에 가서 조금 읽어봤습니다..(아직은 사지는 않구여ㅠㅠ)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이네여,,좋은 책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맥거핀 2011-02-28 23:16   좋아요 0 | URL
조금 비싼 책이기는 하지만, 비싼 만큼의 값어치를 하는 책이라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합니다. <리영희 평전>도 물론이구요.

2011-03-02 2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03 17: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딧불이 2011-03-05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영희 선생의 말들은 대부분 우리를 향한 것이었지만, 그의 눈은 항상 밖을 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무릎을 치게 하는 말씀이세요.

맥거핀 2011-03-06 17:39   좋아요 0 | URL
리영희 선생님은 항상 전체적인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우리나라를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어쩌면 동시대의 분들 중에서 그런 흐름의 파악이 가장 빨랐던 분이 아닐까?..하고 생각도 해봅니다. 제가 생각했던 리영희 선생님의 모습보다 훨씬 큰 모습이 담겨 있어서 책이 참 좋았어요. 다음 책도 기대해봅니다.^^
 
<반자본발전사전>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반자본 발전사전 - 자본주의의 세계화 흐름을 뒤집는 19가지 개념
볼프강 작스 외 지음, 이희재 옮김 / 아카이브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발전'이라는 것은 어느 논쟁에도 비껴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발전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이며, 이뤄내야 할 것이다. '김예슬 선언'에서 비슷한 표현을 가져와 본다면, 보수가 발전을 원한다면, 진보는 의식있는 발전을 원한다. 자본주의자가 자본주의식 발전을 원한다면, 사회주의자는 사회주의식 발전을 원한다. 부자가 더 많은 부를 얻기 위해 발전을 원한다면, 빈자는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전을 원한다. 북반구의 여러 나라들이 초일류대국을 위해 발전을 원한다면, 남반구의 여러 나라들은 북반구의 나라들의 대열에 올라서기 위해 발전을 원한다. 그러나 이 책 <反 자본발전사전>은 그러한 발전의 레이스에서 벗어날 것을, 이제 발전에 대한 헛된 희망을 버릴 것을 우리에게 권한다. 아니, 권한다기 보다는 강력하게 경고한다.

책임 집필자인 볼프강 작스를 비롯한 이 책의 저자들이 이러한 발전 본위 사회에 경고하는 것은 크게 세 가지 문제이다. 하나는, 문화적인 식민화, 상상력의 식민화의 문제이다. 정치적 의미의 탈식민화는 상당수의 국가들에서 이루어졌고, 경제적 의미의 탈식민화 역시 일부 국가들에서 이루어졌지만, 발전 담론이 세계를 휩쓸면서 문화적인 식민화, 상상력의 식민화는 오히려 강력해졌다. 발전 담론을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인 세계 어느 곳의 사람들이나 공통적으로, 서구 유럽인, 혹은 미국인처럼 사는 것을 꿈꾼다. 그 여파로 세계 곳곳의 고유한 생활 양식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 즉, 문화적인 다양함은 사라지고, 오로지 소비 중심인 서구인들의 생활 양식이 하나의 규준이 되어버린 것이다. 다른 하나는 생태학적인 문제이다. 이러한 소비 중심의 북반구식(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생활 방식은 지구의 자연을 절대적으로 소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모두들 잘 알고 있듯이, 지구의 자원들은 한정되어 있고, 동시에 이러한 생활 방식은 지구 전체의 기후에도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즉 이러한 발전 중심 모델은 지구와는 양립하기 어려운 것이다. 마지막 하나는, 경제 중심 세계관이 강화되는 문제이다. 이러한 발전 중심의 세계관은 오로지 경제만을 중심에 놓고, 전 세계의 모든 국가를 1등에서 꼴찌까지 줄을 세운다. 그래서 아무도 원치 않았고, 아무도 의식하지 않았는데,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1949년 1월 20일의 취임 연설로, 세계의 일부 지역은 '저발전 지역'이 되었으며,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 방식은 '낙후되고, 좋지 않은 것'으로 규정되어 버렸다. 이는 한 나라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오로지 경제력만이 규준이 될 때 나라안의 일부 지역은 경제적으로 낙후된 곳이 되어버리며, 그 곳 사람들의 인간적인, 문화적인 가치는 완전히 무시된 채, 그저 '가난한 사람들'로 인식되어 버린다. 동시에 이러한 경제 중심 세계관이 가지는 또 하나의 문제점은 경제력만이 중심이 되다보니 경제력이 낮은 사람들의 기본권은 여러 가지 이유로 무시되고, 경제력을 갖춘 사람들에 의해 왜곡된다는 것이다.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예를 들어 지난 용산 철거 문제에서 오로지 경제적인 문제로, 그 사람들의 기본적인 권리가 어떻게 파괴되었는지를 돌이켜보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탈발전 운동을 끌어올릴 것을 궁극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러한 탈발전 운동은 크게 두 가지 주제를 포괄하는데, 첫째는 화석 연료 자원에 기반을 둔 경제에서 생물다양성에 기반을 둔 경제로 탈바꿈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지구의 자원을 소모하는 경제 체제가 아니라, 지역 생태계의 에너지 흐름을 중시하는 미국와 유렵의 '녹색 경제', 타이의 '자급 경제', 인도의 '지구 민주주의' 요청, 페루의 '안데스 세계관' 같은 것들이다. 또한 동시에 이러한 경제 체제는 현지의 특수한 사정을 고려하여 운영된다는 강점도 있다. 둘째는, 위에서도 말한 경제 위주의 세계관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를 의미한다. 이는 발전 위주의 경제 체제에 매몰된, 공동체의 고유한 생활방식과 문화, 민주주의, 정의의 가치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복구함으로써, 물질에 덜 기반한 번영을 모색하면서, 인간의 정신적인 차원에서의 복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즉 다른 말로 하자면, 인간의 행복이란 경제에 달려 있지 않다는 믿음에 기반을 둔 시도이다.

이 책 <反 자본발전사전>은 이러한 주제를 조금은 특이한 방식으로 구성하고 있다. 그것은 발전의 여러 키워드들을 하나하나 끄집어올려 논파해 가는 방식이다. 즉 발전에 뒤따르는, 혹은 발전이라는 전체를 구성하는 여러 키워드들을 각 장에서 한 가지씩 제시하며, 그 키워드들의 역사적인 기원과 현재적 의미, 그리고 그 이면에 담겨 있는 뜻들을 새롭게 살펴보며, 그 키워드들을 다시 재정의하는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이 책에서는 총 19개의 키워드를 17명의 저자가 각각 논파하고 있는데, 이 키워드에는 우리가 예상 가능한 '시장'이나 '생산', '자원', '국가' 등만 포함되어 있지는 않다. 여기에는 의외의 키워드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평등'이나 '사회주의', 혹은 '도움'과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평등'은 범세계적인 평등이라는 줄세우기적 사고에 기반한 것으로, 실현 불가능하며, 동시에 실현되어도 (지구적인 관점으로 볼 때는) 재앙에 가까운 것이며, 결국은 현실의 불평등을 합리화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일 뿐이라는 이유로 '발전이 약속하는 먼 미래'라는 새로운 이름표를 받는다. '사회주의'도 마찬가지다. 사회주의도 결국 사회주의식 발전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발전의 자장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레닌과 스탈린의 러시아는 결국 무엇을 만들었는가. 그것은 어쩌면 '국가 자본주의' 혹은 그것이 너무 앞서나간 표현이라면, '권위주의 국가' 혹은 '관료주의적 집단주의'가 아니었는지를 이 책은 묻는다. 그리고 결국 '사회주의'란 '오해와 오류의 역사'의 다른 이름이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누군가는 이러한 이 책의 논의들에 의문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이러한 물음. 이 책에서는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지구 자원의 한계를 말하며, 지금의 소비적인 생활 양식을 버리자고 말한다. 그러나 전지구적으로 볼 때 이러한 주장은 어떤 불평등을 내포한 것이 아닌가. 즉 발전이 이미 상당수 이루어진 서구 사회가 발전 과정에 놓인 국가들을 '저발전' 상태에 묶어두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물음이다. 이 책에 나온 표현을 빌리자면, 중국인도 얼음처럼 차가운 콜라를 바로 냉장고에서 꺼내 마실 권리가 있지 않은가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그런 물음에 대한 답을 이미 가지고 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타당하지 못한데, 하나는 그 질문은 이미 전체적인 발전 레이스에 기반한 질문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즉 '전지구 수탈'이라는 발전 레이스에 뛰어들어서 끝이 뻔히 보이는 파멸로 같이 달려가는 선수가 될 필요는 절대 없다는 점. 다른 하나는, 이미 그러한 생활 방식은 인간의 삶의 질과는 거의 관련이 없는 것으로 증명되었다는 점이다. 즉 다른 말로 하면, 그 콜라 꺼내 먹어 본다고 해서, 우리 삶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또다른 예상되는 질문은 조금 더 생각해볼 만한 질문이기는 하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제시하는 대안은 무엇인가. 우리가 발전의 패러다임을 벗어나서는, 어떤 삶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책을 읽다보면 그런 의문이 들기는 한다. 그렇다면, 이 책의 저자들이 원하는 것은 어떤 농업 위주의 경제체제, 혹은 예전의 삶으로 회귀하는 것인가. 지금보다 평균 수명도 훨씬 낮고, 지금의 관점으로 보자면, 우리가 쾌적하게 누리는 많은 것들을 거의 포기해야 하는 삶으로 돌아가는 것인가. 물론 이러한 질문 자체가 지금의 발전 위주의 체제에 매몰된 시각임은 확실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책에서 말하는 공유지에 대한 강조, 생물과 밀착된 경제 체제, 특수한 개별의 공동체적 가치를 되살리는 삶이 어렴풋하고 흐리게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어쩌면 이미 우리 모두가 발전에 너무 길들여져 있다는 뜻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즉 이러한 생활 양식 이외의 다른 삶을 우리가 상상해 본 적이 없는 탓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상상해야 한다. 새로운 삶을. 그 대안이 미심쩍더라도 거의 가까이에 다가온 파국을 우리 모두는 알기 때문이다. 지구가 몇 백만년 동안에 차곡차곡 쌓은 자원을 우리는 거의 수십년 만에 다 썼다. 이 책에서 말하듯이 '지속 가능한 발전'이란 거짓말에 가깝다. 지속 가능한 발전은 없다. 오로지 '지속 불가능한 수탈'만이 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읽으면서 무릎을 쳤던 구절(이 책에는 이밖에도 새롭게 깨닫게 되는 써먹고 싶은 구절들이 많다).


   
  경제학자들의 경제는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규칙을 모아놓은 것에 불과하다. 사람과 사회는 경제적 본성을 가진 제도와 접촉 형식을 만들어낸 다음에도, 경제를 들여앉힌 다음에도 경제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 경제 규칙은 현대 사회에서 만성이 된 희소성에서 비롯된다. 희소성은 모든 인간 사회를 관류하는 철의 법칙이기는커녕 역사적 우연일 뿐이다. 그것은 시작이 있었기에 끝도 있을 수 있다. 희소성이 막을 내릴 때가 왔다. 지금은 주변부와 보통 사람이 나설 때다. (p.68)

 
   

 

그리고 이것은, 다른 책에서 본, 우리 대통령 혹은 우리 시장님에게 들려주고 싶은 구절. 
 

 
라틴아메리카의 한 대통령이 "우리는 제1세계로 진입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은 거짓말입니다. 우리가 제1세계로 진입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우리가 제1세계가 되자면 범죄를 유도해야 하기 때문에 그 대통령은 투옥시켜야 마땅합니다. 요컨대 당신이 "나는 몬테비데오가 로스엔젤레스가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한다면 몬테비데오가 파괴되기를 바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말, <시대의 양심 20인 세상의 진실을 말하다> 중에서,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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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1-02-25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보다 훨씬 폭넓게, 이해하기 쉽게 정리하셧네요. 꼼꼼이 새겨 읽으면 재미가 쏠쏠할텐데 주말에 지방을 가야해서 마감에 마구쫓겨 읽었습니다. 모자란 점을 맥거핀님의 리뷰로 보충합니다. 고맙습니다.

맥거핀 2011-02-26 13:43   좋아요 0 | URL
저도 항상 다른 분들의 리뷰를 보면서 많이 배웁니다. 내용 면에서도 그렇고, 글을 쓰는 방식에 있어서도요. 간만에 왠지 도전정신(?)을 자극하는 책이었는데, 아무튼 다 읽으니 괜스레 뿌듯하네요.

꽃도둑 2011-02-26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를 결국 로긴하게 만드는군요..
글 참 좋아요, 진지하고 깊이가 있어요. 일목요연하게 한 줄에 꿴 것을 보니 맥거핀님이 책을 지대로! 소화했다고 생각돼요. 이런 리뷰들은 미처 몰랐던, 또 놓쳤던 부분들을 보충해주고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끔 안내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아서 참 좋아요. 건필~~ ^^

맥거핀 2011-02-26 18:17   좋아요 0 | URL
아이고..민망스럽습니다. 이번 책은 어렵기는 했는데, 중간중간에 참 좋은 이야기들, 많이 곱씹어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 계속 나와서, 책이 줄어드는 것이 아까운 책이었습니다. 읽으면서, 제가 특정의 시각에 얼마나 길들여졌는지를 곱씹어 볼 수 있는 기회도 되었구요. 꽃도둑 님의 리뷰도 기다리고 있을께요.^^

네오 2011-03-02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개념들이 차곡차곡 책에 나열되어있다는 생각이 드네여..탈발전, 생태계보전(?), 녹색 성장(?), 평등, 사회주의, 도움, 공유지(2009년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중 오스트롬의 학문적 내용도 공유지의 비극을 어떻게하면 잘 해결할까였는데)의 강조등등, 지속 가능한 발전은 없다. 오로지 '지속 불가능한 수탈'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구절, 이 문구는 거의 산업화된 나라로부터 식민지를 경험한 제3세계 국가에서 사용하던 개념이 아니던가여? 아~ 잘은 모르지만 윌리스틴의 세계근대체계(?)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서 본 기억도~ 수탈이라고 하면 그냥 즉각적으로 남미가 떠올라서요,, 이 책은 겉표지만 봐는데, 상당히 중요한 책이군여..그냥 전 제목만보고 패스할려고 했어요,,반자본 발전사전..이미 뭔가 백과사전같은 뉘앙스가 풍기잖아여^^ 그래서 그냥 단어설명만 하는 줄 알았어여,,경제학자와 정치가를 예를 들어서 그러는데..이미 우리나라 경제학자들은 미성장주의자들에게 학문적 근원의 영혼을 내비친것 같아여..지금 서울대를 비롯해서 각대학교의 칼리큘럼을 뒤져보면 미국의 아이비리그에서 철저하게 트레이닝을 배운 분들이신데 그런 분들이 좌파적 상상력의 교육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겠어여..국회의원들도 그렀구여,,약력보면 미국대학나온분들만 수두룩 하시니..으흠~ 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맥거핀 2011-02-28 21:11   좋아요 0 | URL
이 책에서 말하는 수탈이란 북반부가 남반구에 행하는 수탈이라기 보다는(물론 그것도 포함되기는 하지만), 전지구에 대한 전체적인 수탈에 가깝습니다. 이 책이 백과사전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고 하셨는데, 한편으로는 틀린 말은 아닙니다. 백과사전이라고 보아도 괜찮은 면도 있구요. 제가 리뷰에 적지는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책을 보고 나서 단어의 사용, 용어의 사용이란 얼마나 신중을 기해야 하는 문제인가 다시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모든 용어에는 역사적인 의미가 담겨 있기 마련인데, 그것을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고 막 썼다가는 무식을 넘어서, 심각한 왜곡을 저도 모르게 할 수가 있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물론 그러한 역사적인 의미를 체득하려면 더욱 많은 다른 글들을 읽는 수밖에는 없겠지만요.
우리나라 경제학의 미국 종속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어디 경제학 뿐이겠습니까. 거의 모든 학문분야가 미국의 종속이라고 보아도 크게 틀림은 없겠지요. 그것이 또 미국의 무서운 점일테구요. 아무튼 저도 이 책을 읽고 미국적 생활, 미국적 사고방식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네오 2011-02-28 22:25   좋아요 0 | URL
단어의 사용과 용어의 사용을 흐음, 저도 남발하는 경향이 엄청나게 있는데여~ 오~ 단어사용의 신중해야 겠네여,,미국적 생활과 사고방식 으음,,어떠한 것을 가리키는지 (귀찮으시겠지만) 소개좀 부탁합니다. 꾸벅(사실 많이 궁금해여~~)

맥거핀 2011-02-28 23:18   좋아요 0 | URL
미국적 사고나 미국적 생활방식은 뭐 다른 거창한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구요. 그저 우리 삶이 지금 미국적인 것을 추종하고 있다는 뭐 그런 얘기죠. 소비, 소비, 소비하는 삶 말이예요. 단어의 사용에 대해서는 정말 제 스스로도 경계하여야 합니다..;
 

 

사실 이 '127시간'이라는 제목은 결말을 어느 정도 담지하고 있다. (물론, 그 결말의 설명을 원치 않으시는 분도 계실 것이기 때문에, 그런 분은 미리 읽지 않으실 것을 부탁드린다.) 그 제목은 어찌되었건 127시간 후에 그가 살아서 다시 귀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도 그를 찾을 수 없는 곳에서 극히 제한된 자원들만을 가지고, 그는 어떻게 살아돌아올 것인가. 그는 물론 요행으로 살아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이를 영화로 만들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자신의 처절한 노력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노력이란 그렇게 예상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이런 영화이고 보면, 화면 구성이 상당히 중요한 변수가 된다. 이야기의 흐름이 직선적이고, 결말이 거의 예상가능한 영화라면, 그 안의 이야기들을,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배치할 것인가가 상당히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리고 대니 보일은 그런 부분에서 그의 장기를 적절히 구사한다. 그가 다른 영화에서도 많이 사용하곤 했던 화면분할이나 급속한 줌인, 줌아웃, 플래시백으로 연결 등의 잔재주들이 영화에서 적절히 스피디있게 구사됨으로써 영화의 이런 약점들을 적절히 커버한다. 다만, 나는 대니 보일의 이런 감각이 필요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조금은 독이 되지 않았나는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이 영화에서 아론(제임스 프랭코)의 고통이 더욱 처절히 묘사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기 때문이다. 감각적인 잔재주들이 너무 많이 구사되기 때문에 때때로 아론에게 연결된 감정의 선들을 끊어버리기도 한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 상상을 해본다. 잔재주에도 능하지만, 의도적으로 그런 것을 배제하고, 조금 더 정공법을 택하는 감독 - 예를 들어, 대런 아로노프스키 - 이 이 영화의 연출을 맡았다면 어땠을까. 그가 연출을 맡았더라면, 관객을 조금 더 미치게 만들었겠지만, 감정은 극한으로 끌어올려졌을 것이다. 예전에 나를 거의 미치게 만들었던 <레퀴엠>의 어떤 장면들을 돌이켜보면, 몸의 고통을 표현하는 데에 일가견이 있는 그가 이 영화를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만든다.

영화에서 아론의 변화는 흥미롭다. 영화의 초반부, 아론은 오로지 자신만을 믿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만만하게 외친다. 나만을 믿고 따라오라고. 그리고 그는 계속 자신만을 찍는다. 그가 캠코더로 촬영하는 것은 주위의 풍경이 아니다. 그 풍경 안에 있는 '자신'이다. 그러나 그는 그 틈바구니에 갇혀서는 어쩔 수 없이 조금씩 주위를 돌아보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을 두 개로 나뉘어 모의 방송을 연출하며 찍고(물론 이 때까지도 그는 자신을 완전히는 버리지 못하고 있다), 결국은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을 끔찍하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이 때부터 캠코더 안의 다른 사람들만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며, 다른 이들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헤어진 여자친구(그는 여자친구가 농구장에서 자신을 버리고 갈 때 결코 그녀를 돌아보지 않는다), 피아노를 치는 동생, 가족, 여행에서 만났던 사람들. 그리고 그 절정은 그가 거의 환각상태에서 결단하며 일을 실행할 때, 그를 계속 바라보는 어린 시절의 자신이다. 오로지 주위의 도움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존재, 어린아이. 그는 그 어린아이가 되어 그 자신을 본다. 그래서 그는 아마도 깨달았을 것이다. 그가 사랑하는 캠코더 식으로 말하자면, 그 캠코더에 담겨 있는 화면에 가치가 부여되는 것은 누군가가 그것을 볼 때 뿐이라는 것. '찍는 것'으로만은 어떠한 의미도 담기지 못한다는 것.

이를 보여주는 대니 보일의 시작과 끝은 그래서 흥미롭다. 이 영화의 시작과 끝은 거의 비슷해 보인다. 시작 부분에 도시의 많은 사람들, 어딘가에 운집한 사람들, 길거리를 가득 메운 차들을 보여주는 것은 처음의 아론에게는, 그리고 동시에 관객들에게도 짜증나고, 거추장스러운 것이며, 지겨운 것이며 피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대니 보일은 아론에게, 그리고 관객들에게 127시간의 무간지옥을 압축하여 선사한 후에, 처음의 장면들을 거의 비슷하게 다시 마지막에 갖다 붙인다. 그러나 그 때의 그 장면이란 이제는 다른 것이다. 사람들의 물결, 경기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 그것은 처음과는 아주 다른 느낌을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축복이다. 나 혼자만이 아닌,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 누군가와 무엇을 함께 한다는 것.

누군가의 평대로 이것은 확실히 미국적인, 서양적인 인간관일 수 있다. 사실 나는 영화의 마지막에서 이제 그가 더 이상 위험한 모험은 즐기지 않기를 바랬다. 행선지를 남기건, 남기지 않건 말이다. 아니, 그런 일을 겪고 난 후에도, 자연에 대해 경외감을 가지지 않고, 계속 자연을 정복하러, 혹은 괴롭히러 갈 이유가 있는가. 이 모든 일은 아마도 자연이 그에게 어떤 교훈을 주기 위해 계획한 것일텐데 말이다. 나는 철저히 동양적인 인간이기 때문에, 영화를 본 후 다른 교훈을 얻었다. 위험한 데는 가지 말자, 자연은 멀리서 볼 때가 가장 아름답다. 無爲自然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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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02-14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이 영화는 알라딘에 없는지? 어쩔 수 없이 페이퍼로.

네오 2011-02-19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이 필요없는 영화져 쵝오~ :) 정말 좋았습니다

맥거핀 2011-02-20 14:04   좋아요 0 | URL
저는 엔딩의 감동이 오기는 하는데, 그 엔딩의 감동이란 것이 약간 의심스럽기도 한 영화였어요. 그래도 전체적으로 잘 짜여진 영화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다만, 대니 보일은 예술가라기 보다는 장인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네오 2011-02-25 19:04   좋아요 0 | URL
약간 의심스럽다라는 말씀 흐음~ 그러고 보면 그런거같기도 하네여,,장인이라는 말씀도,,이렇게 의심이 들때는 영화를 한번더 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영화좋아하는 친구들이랑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 내기를 했는데 만장일치로 데이핀쳐와 소셜네트워크를 뽑더군여,,저도 그 둘의 수상작의 한편던져습니다..머 그다지 실질적으로는 영향력은 없지만요ㅠㅠ 맥거핀님의 선택이 돋보이는 순간이군여~ ㅎㅎ

맥거핀 2011-02-25 17:48   좋아요 0 | URL
아..저는 아직 아카데미상 후보도 모르고 있었네요. 생각난김에 좀 찾아봐야 겠어요. 누가 상탈지 점치는 것도 참 재미있는데요. 한편으로는 그런 시상식을 보면, 못 본 영화들이 너무 많아서 아쉽기도 해요. 그리고 이 영화 <127시간> 아직 안 보셨으면, 한 번 보세요. 충분히 추천할만 합니다.

네오 2011-02-27 21:03   좋아요 0 | URL
영화 봤습니다..얼릉 챙겨봤져~

herenow 2011-02-20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영화를 못보는 대신에 맥거핀님의 영화이야기로 위안을 삼고 있답니다. ^ ^

맥거핀 2011-02-20 14:06   좋아요 0 | URL
요즘 관심이 생기는 영화들이 몇 편 개봉했네요. <블랙스완>, <아이들...>, <만추>. 혹시 영화를 보실 계획이 있다면 이 중에 한편은 어떠실런지요? 추천해봅니다.^^
 
몬티 파이튼의 성배 - Monty Python and the Holy Grail
영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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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더왕의 성배를 향한 숭고한 여정, 감동! - 이 40자평을 쓴 아이디는 차단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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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02-11 0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지만 이러한 풍자의 아이러니는,그 풍자를 즐길 수 있는 자들은 동시에 그 풍자의 대상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풍자의 한계가 여기에서 발생한다. 풍자는 기본적으로 그 대상에 대한 애정이 없이는 성립될 수 없다는 한계.

네오 2011-02-11 08:20   좋아요 0 | URL
아트시네마에서의 이준익 감독님 추천작이져?? 테리 길리엄작품이죠?? 풍자에 대한 애증에 대한 현상학인가요?? 재미있겠다^^

맥거핀 2011-02-11 17:30   좋아요 0 | URL
풍자의 애정에 대한 현상학이라고 말하면 이 영화에 대한 조금 더 고차원적인 농담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제 취향은 솔직히 아니었어요. 저도 그냥 즐기고 싶었는데, 왜 나는 즐기지 못하고, 다른 생각만 하고 있을까라는 절대적으로 쓸데없는 생각만 하다가 왔네요.

2011-02-12 1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12 2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