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어베러월드 - In a Better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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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내용이 상당 부분 들어 있습니다.)


이 영화 <인 어 베러 월드>는 성찰을 요구하는 영화다. 그 성찰의 질문은 이 제목이 담고 있는대로 "과연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것이다. 이 질문은 매우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 영화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은 그보다는 훨씬 우리의 가까이에 있는 질문이다. 그것을 조금 더 직접적인 다른 말로 하자면 "타인에게 보복(복수)하고자 하는 우리의 본성을 어떻게 억누를 것인가?"이다. 인간은 결국 본성에 지배당하는 동물이다. 그리고 그러한 본성의 한 가지에는 타인에게 보복하려는 욕구도 포함되는 것처럼 보인다. 타인에게 어떤 공격이나 위해를 당하고, 그것에 자신이 혹은 자신의 주변이 어떤 피해를 입었을 때, 인간은 대체로 자신이 당한대로 되갚아주려고 하는 경향을 보이며, 그것은 오랜기간 정당한 것으로 여겨져왔다. 고래(古來)의 법전들은 그러한 인간의 본성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으며, 오랫동안 그것은 암묵적으로 용인되어 왔다. 그러나 곧 그러한 사적 복수에 의해 발생되는 부작용들을 우리는 인지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다른 방식의 제재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이른바 공권력에 의한 제재이다.

그러나 그러한 공권력에 의한 제재는 분명히 한계를 가지며, 그 공권력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는 우리들은 여전히 본성의 지배를 받는다. (혹은, 현재의 공권력에도 여전히 보복(복수)의 원칙이 어느정도 반영되고 있으며, 때로는 그 공권력에 의해서 거대한 보복이 자행되기도 한다.) 이 영화의 여러 케이스들이 바로 그러한 본성이 지배하는 경우이다. 안톤(엘리아스의 아버지)이 봉사활동을 벌이는 아프리카의 어느 곳은 공권력의 힘이 미치지 않는, 혹은 공권력이 해체되어, 힘의 원칙이 지배하는 곳이며, 엘리아스와 크리스티안이 작은 사투를 벌이는 학교는 공권력이 있지만, 그 공권력의 틈바구니에서 다른 방식으로의 힘이 존재하는 장소이다. 또한 안톤이 느닷없이 봉변을 당하는 사건은 공권력이 개입할 틈이 없는, 혹은 공권력으로만 해결할 수는 없는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감독이 인간사에서 그러한 공권력이 가지는 한계를 명확히 직시하고 있으며, 그러한 공권력으로의 해결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의 해결을 꾀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즉 감독은 이 영화의 여러 케이스들을 의도적으로 비슷하게 구성하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가 일종의 영화로 행하는 '정의론' 혹은 '도덕교과서'처럼 보이는 측면이 있다.) 이 사건들은 모두 공권력의 개입이 없는 곳에서, 철저하게 힘의 법칙으로 지배되는 사건들이며, 따라서 보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 또한 드러나는 사건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인간이 만들어놓은 이 문명 체계가 사라지면, 그곳에 남는 것은 힘의 법칙이며, 그것은 학교짱이 오로지 힘의 법칙으로 군림하는 아이들의 세계와 다를 바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어쩌면 이러한 엮음은 인간에 대한 연민 혹은 조롱일지도 모른다. 결국 어른들의 싸움이건, 종족간의 싸움이건, 국가간의 싸움이건 한 대 맞으면 두 대를 때려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들의 싸움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조롱말이다. 이와는 다른 맥락에서 나온 말이지만, 크리스티안의 말은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어른도 죽을 때가 가까워지면 아이처럼 보인다고, 한 번도 어른이 된 적이 없었던 것처럼. 그러나 그러한 보복에 기초한 공격은 결국 자신에게 되돌아올 뿐이다. 이 영화가 말해주는 것처럼.

앞에서도 말했듯이 결국 이 영화가 나아가는 것은 공권력에의 의지가 아닌 다른 방향의 모색이다. (영화에서 보여지듯이 공권력은 아이들에게 억지 화해악수를 시키는 교장의 태도(전혀 효과도 없는)와 같은 것이며, 안톤은 경찰에 신고하자는 아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기도 한다.) 그것의 시작은 폭력의 본질을 직시하는 것이다. 안톤이 말했듯이 안톤에게 느닷없이 폭력을 가한 라스는 그것밖에 할 줄 모르는 인간이며, 그 폭력에 의한 방법 외에는 작은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르는 인간이다. 그것은 아프리카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아프리카에서 무소불위의 폭력을 행하는 자는 그 폭력의 힘으로만 겨우 그 지배력을 유지하고 있었을 뿐, 그 폭력의 힘이라는 가치가 사라지자, 곧 부하들에게도 버려진다. 즉 이 폭력이라는 것으로 유지되는 지배력은 아주 위태로운 것이며(학교에서 '학교짱'이 가진 모든 지위와 권력은 단한번의 '맞짱'의 패배로도 바로 승리자에게 모두 넘겨진다), 일정 정도의 자장을 벗어나면, 아무 가치가 없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직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직시의 다음은 그런 폭력의 순환, 보복의 굴레에서 스스로를 벗겨내는 것이며, 그것은 한편으로 그러한 폭력에 자신이 굴복하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방법은 근본적인 의문을 낳기는 한다. 과연 그것으로 해결이 되는가. 내가 보복을 그만둔다고 해서 이러한 폭력이 근원적으로 사라질 것인가. 아마도 누군가는 이렇게 되물을지도 모르겠다. 폭력에 자신이 굴복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아큐식의 '정신 승리'와 무엇이 다른가. 그러므로 이는 영화 속의 몇몇 경우를 다시 생각해보게 만들며, 몇 가지 질문을 하게 만든다. 그것은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질문이다. 아프리카의 경우 무엇이 해결되었는가. 대장이 그렇게 죽었다고 해서, 그 폭력이 이제 사라질 것인가. 다시 누군가는 그러한 폭력을 되풀이하지 않을까. 안톤의 경우 라스 앞에서의 그러한 행동을 아이들에게 일부러 보여주었지만, 아이들은 그러한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 더 큰 사건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이를 해결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인지. 또한 라스는 과연 깨달음을 얻었는지. 또 만약 이것이 어떤 영화적인 속임수가 아닐는지. 예를 들어 자동차 정비공인 라스와 의사라는 안톤의 지위가 여기에 개입하여 이를 판단하는 관객의 눈을 흐리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즉 이 영화는 다음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는가. "공권력도 없고, 힘의 균형이 절대적으로 무너진 상황에서 반복되는 폭력에 보복하지 않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 있는가?" 혹은 "용서 혹은 관용이라는 것은 힘의 어느 정도의 균형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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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의 성찰이 가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리뷰의 서두에 말했듯이 복수는 오랫동안 용인되어 왔고,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의 사회 역시 상당 부분, 복수의 원칙, 보복의 원칙이 작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 영화의 원제는 <복수>이다.) 인류사의 상당수의 전쟁이 결국 복수에 기초한 것임을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지금 우리 사회의 몇몇 부분만 보아도 그러하다. 인터넷에는 강한 복수심의 유령들이 곳곳을 떠돌고 있고, 우리는 일상에서 발생하는 많은 분노들을 때로는 그 당사자에게, 혹은 나와 전혀 연관이 없는 다른 이에게 되돌려주는 것으로 그것을 겨우 잠재운다. 최근 화제가 된, 소위 '지하철 막말남' 사건과 그에 으레 따라붙는 신상털기와 여러 맹렬한 비난들이 그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 이것을 단지 어떤 교육의 문제, 혹은 경쟁의 원리가 지배하는 살벌한 사회 풍토, 혹은 정책의 문제에서만 찾을 수 있을까.

그러므로 그렇게 믿고 싶지는 않지만, 결국 어떠한 부분은 긍정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그렇게 나약하다는 것을. 자신의 분노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것으로 겨우 그 분노를 잠재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런 것을 영화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말해준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에서 의료봉사를 하고, 자신의 분노를 스스로 잠재울 줄 아는 안톤도 다른 여자에게 빠져 가정을 저버린 적이 있었다. 인간은 욕구에 쉽게 굴복하는 동물이다. 타인에게 보복하고 싶은 욕구이건, 혹은 다른 욕구이건. 그러나 동시에 희망적인 것은 인간은 반성할 줄 아는, 즉 돌이켜 생각할 줄 아는 동물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이 영화의 성찰이 필요한 부분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러한 것이 절대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고 해도, 지금의 이 시점은 돌이켜 생각해보아야만 하는 시점이다. 아주 작은 부분에서부터 전지구적인 문제에까지 폭력과 분노와 보복은 왜 그렇게 만연했는가.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문명 사회를 건설하고 지금에까지 이르렀지만, 그 문명 사회는 지금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문명 이전 처럼 보이는 사회(아프리카)와 문명 이후의 사회(덴마크)가 사실은 거의 같은 법칙이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제는 어떤 다른 방식의 해결을 모색해야 하지 않는가...라는 성찰 말이다.

영화 중간에도 그렇고, 영화의 마지막 화면은 인간이 없는, 너른 자연을 비추면서 끝난다. 이것은 두 가지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자연은 이다지도 평화로운데, 인간은 왜 그렇게 서로를 못잡아 먹어서 안달인가라는 점. 다른 하나는 그렇게 인간들이 아무리 악다구니를 써도, 결국 100년도 살기 어려운 종족이라는 점. (안톤의 말대로 삶과 죽음은 겨우 장막 하나로 가리워져 있는 것을...) 이러니저러니 해도, 우리보다는 그 넓은 대지가 훨씬 오래 지속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니 그 짧은 시간을 분노에 휘둘리며 살아야 할까. 우리, 이제는 다른 길을 생각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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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2011-06-29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추천~ 정성일이 추천하던 영화라서 트레일어를 봤는데 볼만한 영화같다는 생각이 들던군요~첫 줄만 읽었어요~ 성찰을 요구하는 영화다. 이 부분만요 ㅋㅋ

맥거핀 2011-06-30 01:22   좋아요 0 | URL
아...정성일 씨가 이 영화를 추천했군요. 아직 안 보셨으면 저도 추천영화에 한표 던집니다.^^

꽃도둑 2011-07-01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인간의 고귀함보다도 오만하고 하찮음에,,어쩔 수 없음에 더 마음이 쓰입니다.
어찌 인간의 탈을 쓰고...라는 말은 인간의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것을 몰라서 하는 소리라는 거죠,,,인간은 절대로 완벽해질 수가 없을 거예요. 보편적인 본성도 상황에 따라 변하기 일쑤고 인간이 왜 악에 굴복하는지 이미 많은 연구들이 있어 왔잖아요...
복수 아니면 용서 그 어느것도 충족이 되지 않을 것 같은데요...상대적일 것 같아요.
용서도 복수도 다 내안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인 것 같아요. 나의 복수가 나의 용서가 과연 상대에게 얼마나 긍정적인 파급을 줄 수 있을까요? 모든 사람이 복수한다고 해서, 용서 한다고해서 정화될까요? 그건 오로지 내안에서만 가능할 것 같아요. 참으로 어려운 문제인 것 같아요.

맥거핀 2011-07-02 01:16   좋아요 0 | URL
'인간은 무엇에서건 배운다. 그러니 문학을 통해서도 배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서 가장 결정적으로 배우고, 자신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로부터 가장 처절하게 배운다. 그때 우리는 겨우 변한다. 인간은 직접체험을 통해서만 가까스로 바뀌는 존재이므로 나를 진정으로 바꾸는 것은 내가 이미 행한 시행착오들뿐이다. 간접체험으로서의 문학은 다만 나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가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를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피 흘릴 필요가 없는 배움은, 이 배움 덕분에 내가 달라졌다고 믿게 할 뿐, 나를 실제로 바꾸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아무리 읽고 써도 피는 흐르지 않는다. - 신형철, '문학은 우리를 아름답게 할까' <한겨레 21> 865호'

이런 영화를 아무리 보아도 아마도 저도 근본적으로 바뀌지는 못할 겁니다. 분명히 나중에 언젠가는 무슨 일 때문에 누군가를 미워할 수도 있고, 뭔가 보복을 하고 싶어하는 욕구를 느끼고, 어쩌면 실행을 할 겁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믿는 수밖에는 없겠지요. 반성을 하고,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으면서. 정말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인간이 원래 그러한 것이다.'라는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 명제를 무한정 긍정한다면 결코 변하는 것은 없겠지요. 그렇게 안될 것(인간이 바뀌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노력해보는 것, 혹은 스스로의 노력을 믿어보는 것, 그것이 아마 인간으로서 가능한 것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렵네요.^^;

꽃도둑 2011-07-02 10:45   좋아요 0 | URL
안타깝게도 아무리 읽고 써도 피는 흐르지 않는다,,,
그 말이 마음에 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행위를 멈추지 않는거죠.
파악하기 위해....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맥거핀 님 말대로 알면서도 노력해보는 것, 그게 중요한거지만 노력도 하지도 않고 파악도 못하는 인간들이 있다는 게 문제인거죠.
그런 사람들이 뒤에서 칼을 꽂고 인간의 탈을 쓰고 짐승같은 짓을 하는 거겠죠?.. 인간의 하찮음은 거기서 비롯되는 거 같아요. 파악조차도 못하고 있다는 거....노력도 전혀 해볼 의사가 없다는 거.,,

맥거핀 2011-07-02 16:55   좋아요 0 | URL
제가 인용한 글에는 소설가 김연수씨가 말한 다음과 같은 문장도 있습니다. "자신을 비난하지 않고 매일 쓴다고 해서 반드시 글을 잘쓰게 된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더 나은 인간이 된다는 사실만은 장담할 수 있다. (중략)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우리의 모습은 달라진다."

도무지 노력조차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런 사람들까지 굳이 생각하면서 어렵게 살 필요는 없겠지요. 일단 나 자신을 생각하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이상한 문장이네요). 그래서 어쩌면 리뷰니 뭐니 자꾸 쓸데없는 것을 적어보는 게 아닐까도 생각합니다. 일종의 자기충족적 예언처럼요. 혹은 일종의 보호막처럼요. 나중에 언젠가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에, 그래 언젠가 리뷰에 노력해보겠다고 썼는데, 그런 선택을 하면 안되겠지..하고 느낄 때가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김연수 씨 말대로 뭔가를 계속 생각하면서 쓰다보면은 자기가 한 말들이 생각나서라도, 혹은 부끄러워져서라도 조금은 더 나은 사람이 되지 않을까요?^^

굿바이 2011-07-07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제대로 읽고 싶은데, '영화의 내용이 상당 부분 들어 있습니다.'라고 하셔서
아무래도 주말에 영화를 보고 다시 읽어야겠습니다 :)

맥거핀 2011-07-08 00:57   좋아요 0 | URL
네..영화를 보시고 꼭 다시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상당히 볼만한 괜찮은 영화거든요.
 
슈퍼 에이트 - Super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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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느끼던 영화라는 것의, 극장이라는 곳의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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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푸팬더2 - Kung Fu Panda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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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푸 팬더에게 올해의 표정연기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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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2011-06-29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올해의 지구수호상도 같이요~

맥거핀 2011-06-30 01:23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로는 사실 그런데 쿵푸팬더 보다는 타이그리스가 훨 멋있음^^
 
써니 - Sun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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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런 식의 결말은 긍정해 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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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2011-06-29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망 동의동의~

맥거핀 2011-06-30 01:26   좋아요 0 | URL
영화를 보고 리뷰를 몇 가지 읽었는데, 결말 뿐 아니라, 다른 부분의 여러 관점의 문제를 지적한 것이 있더라구요. 대체로 동의했습니다. 그 리뷰들을 읽고나니 어쩌면 이 결말은 필연적이었다는 생각도 들구요.
 

 

(<적과의 동침>, <무산일기>에 대한 약간의 내용 있습니다.)



얼마전부터 스마트폰을 쓰고 있다. 스마트폰과 관련된 광고에서 늘 등장하는 것이 스마트폰을 사용하게 되면 지금까지와 다른 생활을 할 수 있다, 새로운 것들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인데, 늘상 그렇듯이, 그로 인해 잃게 되는 것들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글쎄. 그 잃게 되는 것들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조금 더 곰곰이 생각해 봐야할 듯도 하지만, 아무튼 간에 이 작은 기계의 가장 무서운 점은 어찌되었던 간에 다른 것을 하지 못하고, 그것을 들여다보게 만든다는 점이다. 내 경우라면 그 안의 여러 복잡한 미로들 중에서 가장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역시 읽는 것과 쓰는 것에 관련된 것인데, 팟캐스트와 다양한 메모 기능이 그것이다. 먼저 팟캐스트를 생각해보면 새삼 놀랍기도 하다. 처음에 열심히 무료 어플들을 찾아 다니다가 부실한 업데이트 기능들에 실망하고, 결국 정착하게 된 것은 유료 어플인 Beyond Podcast인데, 이 작은 어플은 수많은 사람들의 소중한 동시대의 생각들을 매일 충실하게 배달해준다. 더구나 1992년 정은임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잘 때 들을 수 있게도 해준다. 잃게 되는 것들에 대한 어떤 달콤한 보상책들.

또 하나는 메모 기능이다. 지금 이 짤막한 글을 쓰려고 시도하는 것도 어지럽게 쌓여 있는 메모들을 본 이후이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집에 돌아가는 길에 끄적끄적 남겨놓았던 메모들. 몇 주 전에 남겨놓았던, 이제는 왜 남겨놓았는지 이유가 알 수 없어져 버린 메모들. 아마도 그 때 그 메모들에 조금 더 쓸만한 옷들을 입혔더라면 조금은 더 읽을만한 리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는 무엇인가를 쓸 만한 시간도 없었고, 시간이 있더라도 무엇인가를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곧 버려질 이 메모들에 대해서는 조금은 뭔가의 기록을 남겨 놓고 싶다. 물론 이것은 앙상한 기록들, 지연된 생각들에 불과하지만. 나뭇잎이 모두 떨어져버린 앙상한 나무와 같은 것들이지만.  



적과의 동침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2011년 4월)

이 영화가 기대 이하의 관심을 받고, 쉽게 사라져 버린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여러 가지 약점들을 가지고 있지만, 상당히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웰컴 투 동막골>과 사뭇 비슷해보이는 이 영화는 궁극적으로 그 영화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질문을 던지고 있다. <웰컴 투 동막골>이 결국 어떤 판타지의 세계(예를 들어 수류탄이 폭발하여 팝콘이 만들어지는 장면이 말해주듯이)로 달려갔다면, 이 영화는 그 보다는 훨씬 현실에 발을 디디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결국 결말의 처리라고 할 수 있는데, <웰컴 투 동막골>은 여전히 판타지의 세계에 머물러, 남한군과 북한군과 유엔군 몇 명이 힘을 합쳐, 어떤 제3의 거대한 적에 대항한다는 식의 결말을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의 결말은 그보다는 훨씬 비극적이며, 더욱 심각한 질문을 담고 있다. 그 질문은 결국 이들이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게 되는 것이 과연 무엇 때문인가라는 점이다. 그들을 죽게 만드는 그 '명령'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그 명령들(이들의 죽음에는 실체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상부'의 명령'들'이 있다)의 기원에는 국가가 있으며, 우리는 결국 '국가'라는 이름의 살인기계, 혹은 살인마를 마주하게 된다. 그 국가라는 이름의 살인마는 당시 우리나라 곳곳을 활보하며, 때로는 유엔군의 탈을 쓰고, 혹은 인민군의 탈을 쓰고, 혹은 국군의 탈을 쓰고, 비슷한 유형의 범죄들을 자행해왔다. (이 영화 <적과의 동침>보다 조금 더 현실에 발을 디딘 버전으로는 <작은 연못>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부의 우리나라 영화 제작자들의 '종합선물세트를 관객들에게 선물하고자 하는 욕구'는 언제쯤 사라질 수 있을 것인지. 그들은, 역사는 반복된다는, 즉 한 번은 희극으로, 또 한 번은 비극으로 반복된다는 지젝의 신봉자들도 아닐진대, 같은 이야기를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 보여주기 위해 애쓴다. 중간의 코믹적인 에피소드들의 상당 부분은 거의 배우의 개인기에 의존하고 있으며, 아무리 그 개인기가 출중하더라도 사족인 듯이 느껴진다. 어떤 상황적인 페이소스를 살리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지루하게 반복되는 유머들은 생각해 볼만한 질문들을 거의 잡아먹는다. 메시지도 들어 있고, 유머도 들어 있고,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도 들어 있는 이 종합 과자선물세트는 관객을 먹다가 지치게 만든다. 그래서 아쉬운 영화.



인사이드 잡 (CGV 대학로, 2011년 5월)

재앙은 레이건의 금융규제 완화부터였다. 이 <인사이드 잡>이라는 영화는 그 제목이 말해주듯이 '그 내부'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끄집어내 관객들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그 내부'란 지난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로부터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의 내부이다. 이 영화는 그 내부의 처음에서부터 끝까지를 지극히 건조한 어조로 미세하게 헤집어 보여주려고 한다. 그러나 어조가 건조하다고 해서, 내용마저 건조한 것은 아니다.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때로 분노하기도 하고, 어리둥절해지기도 한다. 어떻게 저런 식의 발상이 가능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저렇게 도덕적인 책임감을 스스로 없애버릴 수 있을까. 그래서 이 영화는 아주 정치적인 메시지를 마지막에 제시하고 있다. 이 같은 비극을 한 번 더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그들'이 도대체 무슨 일을 '내부'에서 벌이고 있는지 똑똑히 알아야한다는 것이다. 이 영화와 비슷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또다른 영화가 담배회사의 내부고발자를 다루었듯이, 이 영화는 그 스스로가 '내부고발자'가 되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여러 다양한 자료를 친절하게, 흥미롭게, 순차적으로 제시하면서 관객들에게 금융위기의 본질을 이해시킨다. 아마 경제에 거의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혹은 아무리 신문기사를 읽어도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도, 이 영화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내부에 들어있던 것들에 대해 그 맥락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슬러 올라가 결국 집어내는 것은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아니라, 레이건의 금융규제 완화이다. 그것에서부터 모든 비극은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이 친절한 영화를 보고 나니, 다시 다른 것들에 생각이 미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금융규제 완화의 시작에 와 있기 때문이다. MB 정부의 금산분리 완화나 은행들의 통합 정책을 볼 때에 어떤 우려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소로스가 영화에서 명쾌하게 말하였듯이 유조선에서는 기름을 여러 칸에 나눠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래야 파도에 배가 휩쓸려도 넘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칸의 벽들을 없애버리려 하고 있다. 오로지 더 많은 기름을 실으려는 욕심 때문에. 더 많은 이득을 보고자 하는 그 욕심 때문에.

영화를 보며 개인적으로 든 생각인데, 이렇게 인터뷰 중심의, 그리고 영화 자체의 영문 자막이 많은 영화의 경우 더빙을 하는 것이 훨씬 낫지 않을까. 아무리 맷 데이먼의 나레이션이라도 말이다. 영화 초반에는 너무 많은 자막으로 인해 조금은 멍해지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신차리고 볼 것. 곧 흥미진진해진다.



무산일기 (인디플러스, 2011년 5월)

탈북자의 이야기가 이 영화의 중심이지만, 이 이야기들은 현재 우리의 자화상이다. 2등민, 계급사회. 125로 시작되는 북한에서 온 사람들의 주민등록번호는 우리사회의 2등민이라는 낙인이다. 물론 2등민에는 북한에서 온 사람들만 포함되지는 않는다. 우리 사회는 이미 경제력에 따라 보이지 않는, 때로는 보이는 계급이 갖추어져 있으며, 북한에서 온 사람들은 거기 아래부분 어딘가에 들어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계급은 자꾸만 그 계급의 단계수를 증식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 힌트를 영화의 한 부분에서 찾을 수도 있다. 숙영은 탈북자 승철과 어떻게든 자신을 구별하려 한다. 그것의 이유는 숙영과 승철이 명확하게 구분되기 때문이 아니다. 왜냐하면 숙영이, 승철이 처해있는 곳으로 조금씩 떨어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승철과 경철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경철은 같은 탈북자이지만, 승철과 자신은 다르다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다. 그 가장 밑바닥에 어떤 불길한 자화상으로 승철이 있다. 그리고 그 불길한 자화상은 경철과 숙영의 몫만은 아니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관객의 몫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어쩌면 가장 미스테리한 점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영화는 리얼리즘을 표방하고 있다. 그것은 어떤 '극단의' 리얼리즘이 아니다. 리얼리즘이 가장 망가지는 순간은 아마도 그 자신이 '내가 리얼리즘이다'라고 나설 때일 것이다. 어떤 것이 리얼이라는 자의식을 드러내는 순간, 그것은 그 순간 가장 리얼이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 (아마도 <황해>의 리얼리즘이 이런 것이 아닐까.) 이 영화는 그런 것을 가장 경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극적인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마지막에도 어떤 극적인 사건도 일어나지 않고 영화는 막을 내린다. 그러나 그 순간 마음이 움직인다. 이 영화에서 가장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은 어쩌면 이 영화에서 가장 '리얼'과 거리가 멀, 어쩌면 승철의 꿈인것처럼도 생각되는 승철이 교회에 가서 마음을 조금 연 숙영과 같이 성가를 부르는 장면과 이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마지막이다. 희망을 보여줄 듯 하다가, 다시 그 어떤 희망도 내비치지 않는 이 마지막에서 마음이 움직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아무 것도 아닐 이 마지막에서 우리는 어떤 희망을(또는 절망을) 애써 찾게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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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복잡한 6월이다. 잃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여전히 알 수 없는 6월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무엇을 얻게 된다고 말할 때에 그로 인해 무엇을 잃게 되는지는 여전히 생각해보아야 한다(꼭 스마트폰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본 수많은 영화에서 얻은 교훈 두 가지가 있다면, 하나는 완벽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얻는 것이 있다면, 그로 인해 잃게 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잃어가고 있는 것들, 자꾸 말로 되뇌어지는 속에서 잃게 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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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4 08: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14 21: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네오 2011-06-29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할말이 많은 세영화죠~

맥거핀 2011-06-30 01:27   좋아요 0 | URL
영화를 보고 빨리 리뷰를 썼으면 더 여러가지를 기억에 남길 수 있었을텐데, 많은 부분을 잃어버린 것 같아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