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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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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사키 아타루(와 그가 논거로 삼는 학자들)에 따르면, 역사 이래로 서구에는 여섯 번의 혁명이 있었다. 중세 해석자 혁명(교황 혁명), 대혁명(루터의 종교개혁), 영국혁명, 프랑스혁명, 미국혁명, 러시아혁명. (모 당의 대선후보가 혁명이라고 주장하는 사건은 애석하게도 언급되지 않는다.) 이 중에 사사키 아타루가 주목하여 보는 것은 초반의 두 혁명, 즉 중세 해석자 혁명과 대혁명인데, 이 두 혁명은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다른 혁명들과 달리 이 두 가지의 혁명은 읽기와 쓰기로서 이루어진 혁명이라는 점이다. 대혁명, 즉 흔히 말하는 루터의 종교개혁은 읽고 쓰고 번역하고 편찬하는 작업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그 일례로 이 책에서는 루터가 등장하기 전인 16세기 초까지 독일어 서적 간행 총수는 단 40종이었으나, 루터가 등장하자마자 1523년에는 498종에 이르렀고, 그 중 418종은 루터와 그의 적대자에 의해 간행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즉 루터의 종교개혁은 설교도 설교지만 또 한편으로는 읽기와 쓰기의 방법으로 행해진 것이었다. 중세 해석자 혁명은 어떤가. 이 혁명은 역사상으로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그리스도교 개혁 작업으로 일컬어지는 것으로, 이는 새로운 법문을 번역하고, 편찬하고, 제본하고, 주석을 달고, 수정하고, 색인을 만드는 방식으로 거의 100년 가까이 이어진 정보 혁명이자 읽기와 쓰기의 혁명이었다. 그래서 르장드르는 이를 "문법학자의 혁명"라고 말한다. 또 다른 하나의 공통점은 이 두 가지의 혁명 모두 새로운 법을 만드는 혁명이었다는 점이다. 대혁명은 종래의 교회법을 부정하고, 모든 법을 '십계명'에 명시적으로 준거하게 하고, '양심'을 강조하는 등의 새로운 법을 만드는 것이었으며, 중세 해석자 혁명은 그 자체가 교회법을 고쳐쓰는 혁명으로, 이 혁명으로 인해 근대국가의 원형이 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성립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물론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을 할 필요는 있다. 그러한 읽기와 쓰기의 혁명, 새로운 법을 만드는 것이 혁명이라고 불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새로운 법은 무엇 때문에 필요했던 것인가. 사사키 아타루에 따르면 이 새로운 법은 단지 교회 안의 내규만이 아니며, 형벌을 내리기 위한 법이 아니다. 이는 살기 위한 법이며, 조금 더 직접적으로는 번식을 위한 법이다. 국가의 본질은 그 국민들에게 '번식을 보증하는 것'이다. 이 말이 조금 불편하다면 이렇게 바꿔도 좋다. 국가의 본질은 그 국민들에게 편안하고 자유롭게 아이를 낳아서 기를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 두 가지의 혁명 이전의 법들은 그것을 보증하지 못했다. 그 교회법들은 국가라는 이름으로, 교회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얽어매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즉 이것은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 즉 번식을 한다는 것은 인류사에 있어서는 인류라는 존재를 지속시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 책에서 내내 이야기하는 반(反)종말론의 개념이 출현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인류라는 존재가 절멸을 피하게 해준 것, 종말에서 벗어나도록 한 것은 번식을 가능하게 해 준, 두 사건 즉, 중세 해석자 혁명과 대혁명이었다. 그러니 그 두 사건을 혁명이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가 있을 것인가.

 

종말론이라는 것은 언젠가 종말이 올 것이라는 믿음이 아니다. 사사키 아타루도 아마도 언젠가 있을 끝, 절멸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고생물학자들이 말하는대로 한 생물 종의 평균수명은 400만 년이고, 인류가 출현한지는 고작 20만 년정도이므로 380만년 정도 이후에 인류가 어떤 사건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 종말론은 그 종말 자체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종말이 곧, 그러니까 내가 있을 때 일어날 것이라는 불안이고, 믿음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사키 아타루의 말대로 엄청나게 유치한 것이다. 그러나 이 유치한 사고는 지난 인류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같이 죽자는 식의 나치나 옴진리교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인류는 역사가 기록된 지난 이천 년 동안만 해도, 곧 종말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예상을 그야말로 밥먹듯이 해왔고, 그 예상은 매번 어김없이 빗나갔다. 그러므로 사사키 아타루는 이제 그만두자는 것이고, 종말이 오도록 기도하는 그 손을 잘라버리자는 것이다. 왜? 유치하니까. 20만 년 대 400만 년. 그것은 다르게 보면, 4살 짜리 아이가, 80살 먹은 노인에게 이제 곧 같이 죽을 때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에 불과하니까.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사사키 아타루의 이 책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사사키 아타루 식의 <아라비안 나이트>이다. 자신의 죽음을 지연하기 위해 매일 밤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세헤라자드처럼 사사키 아타루는 나쁜 종말론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즉 모두의 죽음을 지연시키기 위해, 세계의 종말을 지연시키기 위해 매일 밤 우리 독자들에게 말을 건다. 그 다섯 밤 동안, 첫째 날 밤에는 문학이라는 것의 가치에 대해, 둘째 날 밤에는 루터의 대혁명에 대해, 셋째 날 밤에는 그 역시 읽기와 쓰기의 혁명이었던, 무함마드와 하디자의 혁명(이슬람 혁명)에 대해, 넷째 날 밤에는 중세 해석자 혁명에 대해, 다섯 째 날 밤에는 고작 20만 년 살고도 종말이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인간의 우스움에 대해서 말이다. 그럼 이 다섯 째 밤이 지났으므로 우리에게 종말이 올 것인가. 물론 그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아라비안 나이트>의 결말을 알고 있으니까. 그 결말은 그 이후로도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이니까. 사사키 아타루 식으로 조금 더 진지하게 말해보면 그것은 '380만 년의 영원'이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읽고 쓰는 것 뿐이다. 매번 반복되는 문학의 종말이니, 문학의 위기니 하는 소리를 할 게 아니라(아닌게 아니라 어떤 문예지들은 매 1년마다 같은 특집을 반복하는 것 같다. "매번 반복되는 것이지만, 문학이 위기에 빠져.."로 시작되는 그 특집들 말이다), '미래의 문헌학'을 하는 것. 인간의 삶을 지속시켜 줄 힘을 내재하고 있는 문학에, 그것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0.1%도 안되어도 '읽는다'라는 기회를 부여하는 것 말이다. (물론 그것은 아무 것이나 '무조건 읽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베케트나 첼란이나 헨리 밀러나 조이스나 버지니아 울프, 혹은 니체나 푸코나 르장드르나 들뢰즈를 읽는 것이다.)

 

400만 명밖에 자신의 사인을 할 수 없었다는 무리한 상황에서 <죄와 벌> 같은 작품들을 차례로 쓴 것입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단적으로 90퍼센트 이상의 사람들이 읽을 수 없었습니다. 러시아어로 문학 같은 걸 해봤자 소용없었던 것이지요. 이런 파멸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쓸 수 있었을까요?

확실히 말하겠습니다. 바야흐로 문학은 위기를 맞고 있고, 근대문학은 죽었으며, 애초에 문학 같은 건 끝이라는 치사한 말을 한 번이라도 공언한 적이 있는 사람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라는 성스러운 이름을 두 번 다시 입에 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불쾌합니다. (p. 250)

 

 

상당히 딱딱할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나름 재미있고, 흥미롭게 읽었다. 그것은 한편으로 저자의 독특한 문체나 이야기 방식에 어느정도 영향이 있을 것이다. 저자의 말투는 단호하고, 논리적이라기 보다는 선언적이다. 그러니까 한편으로 보자면 뭔가 어려운 것,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쉽게 말하는 듯한 인상을 주지만, (저자 본인이 이야기하듯이) 가끔 논리의 비약이 일어나며 그 논리의 중간과정은 믿음과 반복과 구호와 아포리즘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알 수가 없다. 즉 이것은 나름 잘 쌓아올린 성이긴 한데, 그 중간이 구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성이기 때문에 때로는 신기루처럼 보인다. 중간의 어떤 부분에 이르러서는 우리는 논증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에 들어서야 한다. 이 성의 받침대와 그 꼭대기의 첨탑이 이어져있다는 믿음에 말이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대단한 것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그 대단함은 우리가 알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아니 아마도 끊임없이 '왜'를 묻는 어린아이처럼 다시 돌아 처음으로 갈 것이다. 예를 들어 모든 문학은 '종말론에 반한다'는 주장에, 어떤 문학은 종말을 이야기하지 않는가,라고 묻는다면 그에 대한 대답은 '그것은 문학이 아니다' 혹은 '그것은 사실 알고보면 종말을 반하기 위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도 이 책은 한 가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두기는 했다. 사사키 아타루에 따르면, 어차피 다른 사람이 쓴 것이란 읽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는 이유가 있다. 우리가 그것을 완벽히 이해하게 된다면 완전히 발광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쓴 것을 읽는 것은 미쳐버리는 것, 서서히 미쳐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발광하지 않으려 발광하며, 동시에 혁명은 그만큼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읽을 수밖에, 그리고 되지도 않는 리뷰를 쓸 수밖에. 이 책은 매일 밤 거의 같은 이야기로 시작한다. 여름 날씨, 가끔 쏟아지는 비와 어디선가 들려오는 매미소리 같은 것. 이 똑같은 이야기의 반복은 이유가 있다. 아마도 이 다섯 째 밤이 지난 후에도 여름날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므로. 최소한 380만 년의 여름이 말이다. 영겁의 여름은 지속되고, 우리는 읽고, 쓰고, 혁명한다.

 

 

 

덧.

읽다보니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이나 <세계공화국으로> 같은 책이 생각나는데, 기억이 가물거린다. 다시 읽어봐야겠다. 초반에 정보를 끌어모으는 사람들, 전문가나 비평가를 비판하는 대목은 특히 흥미로운데, 그럼 전문가도 비평가도 될 수 없다면 무엇이 되야하지,라고 말한다면 아마도 또 그렇게 말할테지. "당신은 뭔가를 하고 그것이 의미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행해지는 것'이다." 그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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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개미 2012-07-24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일야화와 이 책을 비교한 문단은 참 절묘하네요. 잘 읽고 갑니다.

맥거핀 2012-07-24 23:16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일개미님. 다 쓰고 다른분들 리뷰를 읽어봤는데(물론 일개미님 글 포함해서요.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는 글들이 꽤 있었는데 코멘트를 남기지 못하겠더라구요.^^) 천일야화 얘기는 가연님이 먼저 하셨더라구요. 읽어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리시스 2012-07-25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 이거 재밌네요. 리뷰.. 좀 천천히 읽어봐야겠어요. 더우니까 눈팅도 힘들지만 일단 읽은 티를 낼려고(!) 댓글 먼저 쓰고ㅎㅎ 인문쪽 책은 왜 이렇게 다들 학자 같은 책만 되지.. 담번엔 정치얘기 쏟아져나온 정치인들책이나 사회학쪽 책이 됐음 좋겠어요. 리뷰가 버거워요ㅜㅜ

맥거핀님 <공산당 선언> 읽으셨어요? 저 그저께 멘붕 왔거든요. 저는 그게..그런 건줄 전혀 몰랐어요. 어쨌거나 어렵더라도 읽으면 이해는 가겠지 했는데..그게 아니..


근데 [제노사이드]는 진짜 재밌어요! (주말에 지옥과 천국을 오간 기분)

맥거핀 2012-07-26 02:32   좋아요 0 | URL
아..콩사탕 선언...그거 머 저도 잘 모르지만, 선배들과 토론하면서 억지로 좀 보기는 했습니다. 근데 그게 그렇게 긴 내용이 아닌데도, 그에 대해서 관련하여 공부할 부분이 너무 많아서 거의 반포기했지요. (선배들에게 이상한 뻘질문도 많이 하구요.) 특히 경제학 쪽을 상당히 공부하지 않는한 거의 피상적인 이해밖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봅니다. 근데 한편으로 보면 또 그건 '선언'이니까요. 그 내용의 세세한 부분을 이해하진 못해도, 그 대의에 동의할 수는 있죠. (뭐 우리가 언제는 자본주의에 대해 잘 이해해서, 자본주의 사회에 있는 건 아니잖아요.)

이번 책도 선정이 이미 되었는데, 많은 분들의 추천을 받은 책이 아니라, 의외의 책이 되었더군요. 하나는 상당히 사회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책이긴 한데, 하나는 의외로 뱀파이어 이야기..저는 사실 왜 뱀파이어 따위에 그렇게 열광하지,가 의문인 사람이라 책을 읽으면 뭔가 해답이 나올지도 모르겠군요.

<제노사이드>가 그렇게 재미있습니까? 일단 보관함에 담아둘께요.^^

Shining 2012-07-29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처음 본 건 지난번 다녀온 국제도서전에서였어요. 자음과모음 출판사 섹션에서 봤는데 제목이 강렬해서 기억이 나요. 훨씬 규모도 크고 인지도도 높은 어느 출판사보다 이 출판사가 훨씬 좋은, 다양한 책을 가져왔다는 생각에 이 섹션 유심히 봤습니다.

근데 전 이 책 소개 읽어도 당최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어요_- 그래서 오기 생겨서 읽고 싶어집니다ㅎㅎ

저 내일 <도둑들> 보러 갑니다!!

맥거핀 2012-07-30 22:51   좋아요 0 | URL
아..자음과 모음 출판사였군요. 어디 출판사인지도 모르고 있었네요. 요즘에 하이브리드 총서 시리즈도 그렇고, 계간지 내는 것도 그렇고, 나름 의미있는 시도를 많이 하는 것 같아요.

뭐 아무튼 무슨 내용이신지 잘 모르겠는건, 다 제 글이 번다한 탓. 저자는 명쾌한 편이니까요, 이 리뷰를 읽으시는 것 보다 책을 직접 보시는 게 훨씬 나으실 겁니다.

아..<도둑들>은 그래서 잘 보고 오셨는지 모르겠군요. 저도 이미 봤어요. 감상에 대해서는 딱히 코멘트할 게 없어서..(그 얘기는 뭐 그렇게 맘에 들지는 않았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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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기순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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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책들에서도 그랬지만, 마이클 샌델은 여러 가지 풍성한 사례들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펼쳐나간다. 그가 말하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은 여러가지다. 1장에서는 이른바 '새치기 할 수 있는 권리'다. 우선 탑승권, 진료 예약권, 무료로 배부되는 방청권들을 돈으로 구매하려는 행위 등에 대한 비판이 주로 이루어진다. 2장에서는 '인센티브'와 관련된 항목들이다. 불임시술을 장려하기 위한 현금보상, 상금으로서 어떤 좋은 행위를 하도록 유도하는 것, 벌금이 그 행위를 하도록 허가하는 일종의 요금으로 변질되는 것들이 이야기된다. 3장에서는 시장이 점차 도덕을 밀어내는 현상에 대해 말한다. 대리 사과 서비스와 결혼식 축사의 판매, 현금으로 선물을 하는 것, 핵폐기장 후보지 선정에 돈의 문제가 개입되는 것 등이다. 4장에서는 삶과 죽음과 관련된 문제가 전면에 나선다. 타인의 생명보험 증서를 거래하는 '말기환금'의 문제, 유명인사의 죽음을 놓고 벌이는 내기인 '데스풀', 시장에서 테러를 예측하고자하는 테러리즘 선물시장 등이 도마에 오른다. 마지막 5장에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명명권'이다. 예를 들어 스포츠경기장에 차별적인 자리들이 생겨나는 것, 모든 것으로 가능한, 심지어는 신체 일부를 사용하여 이루어지는 광고들, 특정의 지명이나 명명을 시장에서 거래하는 것 등이 이야기된다.

 

좋은 얘기다. 이 이야기들을 놓고 어떤 비판을 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옳음이나 좋음의 문제, 아리스토텔레스나 롤스, 칸트 등이 이야기했던 공동체와 개인의 정의의 문제, 공화주의인가 공동체주의인가의 문제를 굳이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사실 이와 같은 것들은 오랫동안 '돈으로 거래될 수 없는 것들'의 범주에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새치기의 권리, 생명보험, 명명권 등은 시장과 시장주의의 공세가 어느정도 위세를 떨치게 된 이후에 시장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물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시장 이전의 세계, 그러니까 현재에는 가장 거래해서는 안된다고 여겨지는 인간의 목숨에 대한 권리가 공공연하게 거래되는 세계(예를 들어 노예제)가 존재하였다. 그러나 이는 여기서 말하는 시장지상주의와 관련된 문제보다는 인간의 기본권리와 연관된 문제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다시 인권신장과 관련된 인류의 역사를 되짚을 필요는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물론 현재에도 노예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즉 이것들은 시장지상주의에서 새롭게 생겨난 거래항목들이다. 예전에 돈(재화)으로 거래되어서는 안된다고 여겨졌던 것들이 새롭게 거래의 대상으로 여겨졌을 때, 그것은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도덕적) 가치들과 충돌을 일으킨다. 따라서 마이클 샌델의 이 세심한 논의들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다만, 내 질문의 몇 가지는 이와는 약간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다.

 

마이클 샌델이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지금 현재이다. 바로 지금 미국 혹은 세계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돈으로 거래되어서는 안되는) 가치들의 거래. 즉 그는 과거나 미래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즉 그는 시장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되어 있는 시장지상주의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이 시장이 왜 중심에 서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이러한 타락의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물론 그것은 이 책의 주제를 넘어설 수도 있고, 그것은 샌델 외의 다른 논의자들의 몫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만, 그런 전후 맥락이 없이 이루어지는 이 이야기들은 (본의 아니게) 특정의 한계들을 이 논의를 읽는 사람들에게 덧씌우고 있다. 즉 이 시장은 우리들에게 이미 주어진 상수이고, 그것의 근본적인 한계는 이 책의 관심영역이 아니다. 즉 시장에서 '거래해서는 안되는 어떤 것을 거래하려는 행위'가 문제일 뿐, 그 시장에는 혐의를 씌우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문제가 그 시장 자체라면? 시장의 근본적인 한계가 바로 그러한 거래행위를 권장하고, 부추기고 있으며 그러한 거래행위 자체를 막는 것이, 그 시장의 근본적인 구조를 뜯어고치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면 어떨까.

 

이를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아마도 샌델은 인간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이 책에서 대놓고 자주 나오는 단어들은 시장, 재화, 가치와 같은 단어들이지만, 은근히 출현하고 있는 단어들은 회복, 훼손, 변질과 같은 단어들이다. 시장의 회복, 공공선의 훼손, 가치의 변질. 즉 좋은 시장이 있고, 좋은 공공선이 있고, 좋은 가치가 있다. 그것을 훼손하고 변질시키는 것은 일부 정신나간 경제학자들이고, 정치인이며, 시장지상주의에 물든 사람들이다. 그것은 이러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거래하는 행위에 관련되어 비판을 할 때 주로 제시되는 두 가지의 중심축과도 연관된다. 그 하나는 공정성이고, 다른 하나는 부패이다. 즉 어떤 특정의 가치가 거래되어서는 안되는 이유는 모든 이에게 그것을 구매할(혹은 판매할) 공정한 기회를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고, 그것은 동시에 그 가치를 다른 것으로 변질시키기, 부패시키기 때문에 그렇다. 즉 우리가 이러한 특정가치들의 거래를 막았을 때, 우리는 공정한 우리로, 부패되지 않은 가치를 지닌 본래의 우리로 '돌아간다'. (아마도 이것이 샌델이 그래도 여전히 시장에 어느정도의 믿음을 보이는 이유의 하나일 것이다. 시장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그 시장을 훼손하고 변질시키는 누군가가 문제지. 우리는 도덕적이고 선한 인간으로 돌아가 공공선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나 경제학자들에게는 도덕적인 인간은 없다. 오로지 경제적인 인간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긍정적인 사람은 못된다. 이렇게 시장지상주의의 늪에 깊게 빠져있는 미국과 FTA를 하며 신자유주의의 넘실대는 파고에 흥겹게 올라타고 있는 우리사회에 샌델의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 그리고 경제지 '한국경제신문'에서 '왜 도덕인가'라는 샌델의 책이 출판되고, 보수적인 신문들에서마저 샌델의 이야기들이 화두가 되며, MB가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공정사회'를 제창했다는 해프닝을 보며 가졌던 어떤 의심이 이렇게 꼬리를 드는 것을 보니 말이다. 그들에게는 마이클 샌델은 그래도 건드려서는 안되는 것은 잘 지켜주는 합리적인 사람이니까. 설혹 샌델의 주장이 실현된 세계가 되어도 그것은 그리 나쁘게 보이지는 않으니까. 시장은 여전히 굳건하고, 시장은 여전히 이 사회에 지배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건드려서는 안되는 성역을 다시한번 일깨울 것이므로 그다지 손해볼 가능성은 없다.) 실패해도, 하버드 교수의 주장을 수용했다는 이미지는 남는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그런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샌델은 2장에서 도덕적 가치들에 적용되는 인센티브의 폐해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막장인 나는, 그 폐해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오..이런 것에도 인센티브를 주네..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당연히 주어야할 다른 과업과 관련한 인센티브마저도 떼먹는 우리의 회사들을 너무 많이 본 탓이다. 그런 인센티브도 없는데 무슨 도덕적 가치에 따른 인센티브. 우리가 도덕적 가치에 대한 인센티브를 논하는 사이에, (과업에 따른) 정당한 인센티브를 주지 않는 것에 대한 비판은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버린다. 그리고 (그럴리야 당연히 없겠지만) 이때다 싶은 이 회사의 CEO들이 이 책을 읽고 "우리가 그래서 인센티브를 안주는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물론 이는 농담이다. 그러나 아무튼 우리는 주어야하는 인센티브마저도 당연한 듯이 없는 사회다. 그런 사회에서 무슨 도덕적인 행위에 주어지는 인센티브랴. 핵폐기장도 '유치'되고 당연히 주어야 하는 보상금도 떼먹는 사회에서, 무슨 '핵폐기장이라는 폭탄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도덕적인 선택에 반하는 평균 월수입을 훌쩍 넘는 보상금의 부도덕성'인가.

 

어쩌면 이 책의 비밀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What Money Can't Buy'라는 이 책의 제목에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정한다는 것은 역으로 다른 모든 것은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이야기도 되니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정하는 사회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을 정하는 사회, 어느 쪽이 더 나아보입니까. 막장인 나는 그런 것보다도, 그저 이번에 내한한 마이클 샌델의 강의의 방청권은 얼마에 거래되었을까, 그게 더 궁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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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6-18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서평단 하시는군요.... ^^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정한다는 것은 역으로 다른 모든 것은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이야기도 되니까" 라는 문장이 맘에 와닿습니다. IMF 지원받기 전에는, 일을 잘하든 못하든 회사에서 비슷하게 돈을 받던 시절도 있었지요. 물론 일년에 몇명 뽑아서 포상금을 주기는 했습니다만, 지금처럼 수시로 평가받는 시대는 아니었던거 같아요. 일을 더 잘하라고 평가받고, 그 평가는 금전적 이득으로 이어지지만..... 과연 이런 시스템에서 일을 더 잘하는지는 좀 의심스럽습니다.

기본적으로 평가, 즉 타인이 잘했다 못했다 라는 비판, 무의식 중에 판단,
이런게 좋은걸까 하는 의문으로 이어집니다. 답도 없는, 그저 의문일 뿐이지만요~ ^^

맥거핀 2012-06-19 12:57   좋아요 0 | URL
뭐 그런 것이 샌델이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학생들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는 대가로 돈을 주는 것...그게 좋은걸까? 그게 샌델의 물음이죠. 근데 결국에는 그게 별로 효과도 없을 뿐더러, 효과가 있다하더라도 공부라는 것의 가치를 변질시킨다는 겁니다. (근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질문은 있죠. 과연 그럼 공부라는 것의 가치는 무엇인가라는 점. 예를 들어 우리나라 학생들은 왜 공부를 열심히하는가. 학문적인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글쎄요. 좋은 직업을 얻기 위한 것, 그래서 돈을 많이 버는 것이라고도 공공연하게 말해지니까요.)

근데 직장에서의 인센티브를 이야기하는 것도 참 거시기한게 우리나라에서는 인센티브는 커녕 있는 임금도 떼어먹는 판이니까요. 제때 임금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도덕적 가치가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인센티브를 거부하라(없애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2012-06-20 0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21 0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20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샌델이 왜 위험하지 않은지(왜 우리 사회 전반에서 반향이 높은지) 잘 알려주는 글이네요. 셋째 문단이 크게 와닿았습니다. '과거도 미래도 얘기하지 않고, 현재만 본다면('현재'를 상수로, 전제로 치면) 그 한계는 개인의 문제가 되어버린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저는, 샌델을 읽기보단 동생이 갖다준 폴라니를 읽을까나? 싶어지네요.ㅎ

맥거핀 2012-06-21 02:47   좋아요 0 | URL
샌델 씨의 논의들 나름 의미있고 좋아요.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도 많고, 우려되는 점들도 많습니다. 근데 그 논의들을 죽 보다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 논의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게 뭐지..? 모든 일의 맥락이란 게 과거와 미래가 있는 법인데, 그렇게 된 원인이나 해결책 같은 것은 이야기하지 않으니까요. 아마도 샌델은 그것은 자기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듯도 싶은데, 그러니 논의들이 공허해지고 맙니다.

오..폴라니. 동생분이 그런 것도 주는 군요. 저희 누나는 기껏 주는 게 폴라티인데. 목도 안 들어가는 폴라티..(헉..죄송합니다. 그래도 여름은 더우니까요. 잠깐이나마 시원해지시라고..-_-)

2012-06-28 00:00   좋아요 0 | URL
헉. 폴라티.. 저도 상당히 주변을 시원하게 해 주는 편인데, 맥거핀님도 만만치 않으심.ㅋㅋㅋ
- 네 저는 동생이 그런 책 주는 여자입니다. 움하하하.. 그러나 읽지도 못하고 반납하게 생겼지요. 요즘 저는 한 달에 책 두 권 겨우 읽어요. 그것도 쉬운 걸로~.

맥거핀 2012-06-28 23:39   좋아요 0 | URL
진짜 그런 교양있는 동생분을 두셨으니.. 저도 요새 서평단 책 소화하기만도 벅찹니다. 최근에 책 두어권을 사긴 했는데, 이것도 틈틈이 보긴 해야하는데..(저번에 얘기한 그 영화책요.^^)

2012-06-29 00:27   좋아요 0 | URL
동생도 뭐 자의로 구입했다기보단 스터디하느라고.. 근데 그 스터디 그룹은 이상해요. 한길문화총서를 종류대로 다 사서 보고 있더랑게요. 뭐 그렇게 두껍고 어려운 책만 하는지?!ㅋㅋ
여튼 영화책 읽고 꼭 평 써 주세요. 궁금궁금해요.^^

맥거핀 2012-06-29 01:03   좋아요 0 | URL
아니..대단한 스터디그룹인데요. 그 한길사에서 나온 시리즈 겉에만 봐도 헉..싶던데. 암튼 열심히 읽고 가능하면 써보겠습니다.^^
 
[김수영을 위하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몇 개의 키워드가 맴돌고 있는 책이다. 시, 시인, 시대(정신), 인문(정신), 자유, 자기 힘으로 도는 팽이, 단독성, 행동, 불온함, 그리고 김수영. 처음 나열한 키워드들과 마지막 '김수영'이라는 키워드는 이 책에서 무게가 같지 않다. 아니 무게가 같지 않다기 보다는 모든 키워드는 결국 '김수영'으로 수렴된다. 그러니까 김수영은 이 시대에 시를 쓰는 사람이며, 그래서 시인이고, 엄혹한 찬바람을 맞으면서도 자기 힘으로 도는 팽이가 되고자 했으며, 일반성/특수성의 공식에 매몰되지 않고 단독성을 지키려고 했으며(그럼으로서 보편성이 되었고), 생각에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나아가려 했고, 그렇기 때문에 자유롭고 불온했으며, 그래서 자유와 불온함으로 표상되는 인문정신의 구현자가 되었다. 즉 강신주의 책 <김수영을 위하여>에 따르면, 이 모든 키워드들은 김수영이 마지막까지 지키려고 했던 가치들이자, 김수영의 다른 이름들이며, 인문정신 그 자체이기도 하다.

 

처음에 이 책을 보고서는 뭔가 강렬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것은 표지의 바탕과 글씨, 그리고 내부의 속지, 그리고 책날개에 실려 있는 '김일성만세'라는 시가 모두 붉은색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굳이 붉은색일 이유가 있을까 생각했지만, 책을 보니 그럴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가독성'이라는 문제를 고려하지 않았다면 모든 글씨를 붉은색으로 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마지막 장의 제목이 '불온함은 긍지다'로 귀결되는 것처럼, 결국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김수영을 이야기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키워드, 그것은 '불온함'이기 때문이다. 불온함은 자유와 행동으로 완성된다. 자유 하나만 놓고서는 결국 불온함에 이르지못한다. 머리 속으로만 행하는 자유, 생각에 그치는 자유는 결코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그 자유로움은 권력과 우상에 반하는 자유로운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즉 누군가가 줄로 감아서, 혹은 채찍질로 도는 팽이가 아니라 각자 스스로의 힘으로 자유로운 궤적을 그리며 도는 팽이. 그것이 불온함이며 그것이 이 책에서 말하는 인문정신이다. 김수영의 경우에는 그것이 시를 쓰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김일성만세'와 같은 시를 쓰는 것. '김일성만세'/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인정하는 데 있는데/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중략)/나는 잠이 깰 수 밖에.

 

물론 불온함이 꼭 붉은색일 이유는 없다. 불온함과 붉은색. 발음이 언뜻 비슷하기는 하지만, 이것에는 어떤 태생적인 연관성은 물론 없다. 우리가 불온함에 언뜻 붉은색을 연상하는 것(그리고 그런 이유로 이 책의 표지가 붉은색이 된 것)은 우리가 한국인이기 때문이며, 같은 역사를 거쳐왔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이런 역사와 관련된 김수영의 두 번의 전환점이 나온다. 첫 번째는 한국전쟁과 그에 이어진 거제포로수용소의 경험이다. 김수영은 북한 의용군에 징집되어 끌려갔으나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곧 그는 다시 잡혔고, 묻어두었던 인민복과 총을 다시 찾아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는 다시 남한 경찰에 체포되어 인민군 첩자로 낙인찍혀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보내졌고, 포로수용소에서 친공포로임도 반공포로임도 내세우지 않는, 회색인의 삶을 살아야만 했다. 두 번째는 1960년 4월 학생혁명이다. 그는 초기에 학생혁명을 지지하며 집회와 시위에 참가하고 여러 시들을 발표하였으나 곧 그 혁명이 어떤 식으로 마무리가 되는지를 목도하여야만 했다. 그것은 위에 이야기한 '김일성만세'라는 시에 여실히 나와있는데, 4월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장면 정부 역시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던 이승만 정부와 전혀 다를바가 없다는 점. 즉 방을 없애자고 혁명을 하였지만, 그저 단순히 방이 바뀐 것에 불과하다는 점, 자신(과 그리고 다른 모든 이들)은 친공이냐, 반공이냐의 이분법적 도식만이 있던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힌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불온함을 붉은색으로만 내세우는 이 책의 표지가 사실은 도리어 어떤 씁쓸함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도 우리는 불온함에 붉은색을 연상하여야만 하나.)

 

김수영이라는 인간에게 있었던 이 두 번의 전환점은 물론 그의 시 세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그의 시에도 두 번의 전환점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첫 번째 전환은 그가 휴전협정이 되던 1953년에 발표한, 그의 첫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했던 '달나라의 장난'이라는 시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팽이가 돈다/팽이가 돈다. 너도 나도, 그러니까 각자 스스로 도는 팽이, 공통된 무엇을 위하여가 아니라 스스로 도는 팽이. 북한이니 남한이니, 친공이니 반공이니, 정치나 이념이니 하는 것에 휘둘리지 않고 모두 각자 스스로가 혼자 힘으로 도는 팽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는 그래서 4월혁명이 스스로의 힘으로 돌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알게 된다. 시 '육법전서와 혁명'. 혁명을-/불쌍한 것은 이래저래 그대들뿐이다/그놈들이 배불리 먹고 있을 때도/고생한 것은 그대들이고/그놈들이 망하고 난 후에도 진짜 곯고 있는 것은/그대들인데/불쌍한 그대들은 천국이 온다고 바라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시를 통해 비참한 현실을 목도하는 비탄함을 이야기하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힘, 그러니까 불온한 자유의 목소리를 놓지 않았다. 불온한 자유를 허락하지 않으려는 외부의 정치적 억압과 내부의 노예적 습성에 대해서 말하며 행동할 것을 이야기하는 것. 이것이 그의 두 번째 전환이다. 시 '푸른 하늘을'. 어째서 자유에는/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혁명은/왜 고독한 것인가를/혁명은/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시 '하......그림자가 없다'. 우리들의 전선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그것이 우리들의 싸움을 이다지도 어려운 것으로 만든다/우리들의 전선은 됭케르크도 노르망디도 연희고지도 아니다/우리들의 전선은 지도책 속에는 없다/그것은 우리들의 집안 안인 경우도 있고/우리들의 직장인 경우도 있고/우리들의 동리인 경우도 있지만....../보이지는 않는다/(중략)/하늘에 그림자가 없듯이 민주주의의 싸움에도 그림자가 없다/하......그림자가 없다.

 

..................

 

뭔가 좀 묘하게 불편하게 만드는 책이라 생각했다. 일단 이 책은 정확한 형체를 알 수가 없다. 김수영의 전기나 평전도 아니고, 시작(詩作)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철학에 대해 세밀하게 파고 들어가는 책도 아니다. 김수영의 시를 읽은 개인적인 느낌에 대한 글이라고 보기에도 약간은 이상한 점이 있고, 그렇다고 김수영 시에 대한 비평문도 아니다. 더구나 전체적으로 글의 온도는 시종일관 높다. 책의 앞과 뒤에 붉게 열을 가하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저자의 김수영에 대한 사랑 혹은 찬양의 온도는 시종일관 높아 종종 딴죽을 걸고도 싶어진다. (특히 가장 압권은 에필로그로 실은 저자 자신과 김수영에 대해 이야기할때다.) 이 책을 읽은 다른 많은 분들도 약간은 느꼈겠지만, 그렇다면 김수영만이 시인인가, 다른 시인들은 모두 가짜시만 써낸 허위의 시인들에 불과한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에 따르면 순수시도 참여시도 아닌 김수영의 정신을 가지고 써낸 시, 즉 자신의 시마저도 끊임없이 새롭게 넘어서려는 시(그것도 단지 형태만이 새로운 시여서는 안된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만의 제스처로 써낸 시만이 올바른 시니까. 순수시도 아닌, 참여시도 아닌 각자 자신만의 제스처로 각자 도는 각각의 시.

 

어쩌면, 바로 그것이 묘한 불편함의 원인이 아닐까. 즉 이 책에서 결국 원하는 것은 각자 자신의 중심을 가지고 도는 팽이가 가득한 사회다. 즉 각자의 중심을 가지고 도는 팽이가 각각 토해낸 시가 자유롭게 어우러져 있는 사회다. 그런 사회에서는 시인이라는 특이한 존재가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다. 아니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전혀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두가 시인이므로. 모두가 자신만의 자유로운 시를 써내는 사회이므로. 그러므로 이 책은 김수영에 대해서만, 혹은 그의 시에 대해서만, 혹은 시쓰기나 철학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저자가 원하는 것은 김수영에 대해서 자세히 알거나, 그의 시쓰기를 모방하게 되거나, 특정의 철학사조를 전적으로 추종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 모든 것에 대해 자신만의 제스처, 자유와 행동이 결합된 불온을 우리 각자 스스로가 얻는 것이므로 말이다. 그러니 어찌 불편하지 않겠는가. 불편할 때만이 우리는 움직이므로. 편할 때의 우리는 결코 불온해질 수 없으므로.

 

시끄러운 여름밤이다. 공교롭게도 오늘은 김수영의 기일이다. 불온한 그대여. 시를 써라. 지상의 소음이 번성하도록.

 

지상의 소음이 번성하는 날은

하늘의 천둥이 번쩍인다

여름밤은 깊을수록

이래서 좋아진다

 

 

- 시 '여름 밤'(1967.7.27)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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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06-16 0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쓰느라 유로 게임 날리나 싶었는데, 이게 웬일. 아직도 전반. 쉐바 한 골 넣어줘요~.

맥거핀 2012-06-17 16:32   좋아요 0 | URL
네..결국 억지로 쓰게 되는군요. 자발적으로 좀 쓰고 그래야하는데..^^ 한사람님이 읽으시면 긴장해야겠군요.

조금 기획적으로 만들어진 느낌이 없잖아있죠. 사실 같은 얘기를 계속 반복하는 경향도 짙고...강의를 책으로 만든 것이라고는 하지만, 저는 굳이 10개의 챕터로 나눌 이유도 없지 않을까 생각을 했어요. 아무튼 강신주의 김수영에 대한 애정만큼은 생생히 알 수 있었습니다. 확실히 알아듣기 쉽게 차분히 이야기하는 능력도 돋보였구요. 저 같은 경우는 김수영에 대해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편이었기 때문에 김수영의 시세계를 이해하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반딧불이 2012-06-16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수영의 정신에 감염되고 싶습니다. 김수영에 대한 글은 하도 많아서 무얼 또 보태려하나 싶어 뜨악해하고 있었는데 저자에 대한 믿음이 생기게 글을 써주셨네요. 맥거핀님 덕분에 또 공부했습니다.

맥거핀 2012-06-17 16:36   좋아요 0 | URL
강신주의 논의대로라면 김수영처럼 사는 것은 계속된 자기반성과 자기를 초월하려는 움직임이 뒤따라야하므로 매우 고난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물론 고난한 일인만큼 기쁨도 맛볼 수 있겠지만요. 저도 김수영의 정신에 조금이라도 따라갈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2012-06-20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좀 불쾌했어요. 너무 김수영을 자기 식으로 끌어다 해설해 버리니까.. (그래서 김수영의 연애 이야기까지 읽고 책갈피 꽂아 책장에 넣고 여태 묵혀두었지요. 어쨌든 마저 읽어야겠지요..)
예전에 김수영과 자유를 주제로 '불온함=자유=시정신' 뭐 이런 도식의 강의를 할 때는 재밌고 좋았는데, 그걸 책 한 권으로 써 놓으니(온통 그렇게 자기 논리로 김수영의 삶을 재단해 놓으니) '하나의 해석'이란 걸 넘어서서 '진짜 김수영이 이럴까' 싶은 것이, 불쾌해졌어요. 그래서 맥거핀 님도 '종종 딴죽을 걸고 싶어지'신 게 아닐까 싶네요.

어쨌거나 이 글의 마지막 문단과 인용, 맘에 듭니다.

맥거핀 2012-06-21 02:51   좋아요 0 | URL
아..그랬군요. 강신주 씨의 강의도 들으셨나요? 하긴 좀 보면 너무 한가지 주제로 밀고나가며 모든 것을 다 그 틀에 맞춰서 해석하는 경향이 있지요. 아마도 김수영 시인이 아직 살아계셨으면 불벼락을 내리셨을듯도 싶은데..

그래도 저는 어느 정도는 공감할 수 있었어요. 확실히 글을 쉽게 쓰는 능력이 있고, 조금 어렵다 싶은 이야기도 쉽게 푸는 능력이 있더라구요. 그의 해석에 100% 공감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해석능력에는 어느 정도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The Ting Tings - We Started Nothing - 소니뮤직 Must Listen 시리즈
팅팅스 (Ting Tings) 노래 / 소니뮤직(SonyMusic) / 2011년 9월
평점 :
품절


두 번째 앨범이 나온지 꽤 되었지만, 여전히 끌리는 것은 이 앨범. 버릴 곡이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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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05-08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곡은 역시 어쿠스틱 버전이 제맛...
 
자전거 탄 소년 - The Kid with A Bike
영화
평점 :
현재상영


 

 

(영화의 전반적인 줄거리가 담겨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다르덴 형제의 인물들은 늘 그랬다. <로제타>의 로제타는 일자리를 얻기 위해, 자신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주었던 사람을 고발했다. <약속>의 이고르는 아프리카 불법이민자를 죽인 일에 동참하였던 것도 모자라, 이제 그의 아내를 팔아넘기는 일에도 연루될 참이다. <아들>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소년범을 만나 그를 죽이게 될지도 모르는 충동에 휩싸인다. <로나의 침묵>의 로나는 자신과 위장결혼한 마약중독자를 죽이는 음모에 동참하려고 한다. 그리고 다르덴 형제의 새 영화 <자전거를 탄 소년>에서는 소년 시릴(토마 도레)이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고, 그의 꾐에 빠져 야구방망이를 휘두르고 돈을 빼앗는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 속에서 인물들은 거의 과오를 저지른다. 과오를 저지른다는 것은, 그들이 선택의 순간을 마주한다는 의미도 된다. 그들은 영화 속에서 큰 선택의 순간을 마주하였고, 때로는 길을 잃고 잘못된 길로 들어서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잘못된 길에 들어섰음을 깨닫고 길을 거슬러 올라 다시 돌아오려고 하였으나, 돌아오는 것은 늘 쉽지 않았다. 그들은 때로 운놓게 아주 좁은 돌아오는 길을 발견하기도 하였고, 애타게 돌아올 것을 소망했으나, 너무 많이 나가 도저히 돌아올 길을 찾지 못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여러 갈림길 사이에서 주인공들을 내버려둔 채, 아니 그것을 보는 우리들을 내버려둔 채 영화들은 극장 밖으로 우리를 밀어냈다.

 

이 영화 <자전거 탄 소년>에 대한 이야기에서 다르덴 형제의 새로운 변화를 말하는 목소리는 많았다. 형식상으로 보았을 때 롱숏은 확실히 줄어들었고, 밝은 이미지의 컷들도 꽤 빈번하게 등장하고, 음악이 본격적으로 삽입되었다. 그러나 아마도 가장 확실한 변화는, 위에서 말한 전작들과 비교한 결말의 변화, 즉 다르덴 형제가 우리를 선택의 갈림길에 내버려둔 채로 영화를 끝내버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나를 놀래킨 것은 단지 그 결말의 변화가 아니다. 놀라게 한 것은 전작들보다 결말은 명확해졌지만, 다르덴 형제의 문제의식은 이 안정적인 결말 속에서도 그대로 빛을 발한다는 사실이다. 자전거를 가지고 가는 도둑을 끝까지 물고늘어지며 놓지 않았던, 그래서 '핏불'로 불렸던 소년이 병원에 같이 가자는 남자에게 괜찮다며 태연히 떠나는 이 마지막은 이상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그 감흥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무엇을 이야기해주고 있는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이 영화는 다르덴 형제의 영화들의 새로운 변화를 내비치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의 익숙한 인장들도 드러내보이고 있다. 영화의 첫장면은 왠지 익숙하다. 소년이 달리고, 카메라가 흔들거리며 그의 뒤를 쫓아간다. 흔들리는 다르덴 형제의 카메라는 주인공의 어떤 불안한 심리를 그것을 보는 우리들에게 그대로 전이시키지만, 이 효과는 그들의 정면샷을 결코 잘 보여주지 않음으로서 배가된다. 정면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그들을 몰래 관찰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 몰래 관찰하는 자, 즉 우리들은 당연히 불안해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 장면이 다르덴의 장면이기도 한 것은 이 장면은 아무런 설명이 없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년이 왜 뛰고 있는지, 필사적으로 사람들을 피해 도망치려고 하는지 모른다. 우리는 한참이 지나서야 소년이 자전거를 찾으려, 그리고 보육원에서 아버지를 찾으려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들은 영화가 시작하기 전의 어떠한 이야기들이 생략된 채 관객을 영화의 한가운데에 던져두면서 펼쳐지곤 했다. 그리고 곧 이야기의 또다른 주인공 사만다(세실 드 프랑스)가 등장한다.

 

이 사만다야 말로, 다르덴 형제의 생략의 드러나는 인물이다. 아무런 전사(前事) 없이 불쑥 등장하는 사만다는 시릴에게 호의를 베풀고, 그를 위해 아낌없이 헌신한다. 시릴과의 관계 외에 어떤 그럴듯한 이야기가 붙지 않는 사만다는 그럼으로써 영화상으로 볼 때 미스테리해 보이기까지 한다. 영화에서 그럴듯한 이야기가 없으면서도 비중있게 나오는 인물은 두 가지 중의 하나다. 아주 악인이거나, 아니면 성인(聖人)이다. 오직 보통의 인간만이, 그 인간의 복잡한 정신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복잡한 이야기가 붙는다. 그러므로 이 <자전거 탄 소년>에서의 새로운 결말에서의 변화는 이 사만다의 등장으로 가능했을 것이다. 다르덴 형제의 전작들에서 인물들은 대체로 어떠한 조력자도 없이 혼자서 모든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러나 시릴에게는 사만다라는 강력한 조력자가 있다. (물론 나는 이 부분에서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사만다와 같은 인물들은 어쩌면 '보통의 인간'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만다를 일종의 성녀로 규정하는 나의 말은 비참한 사회에 길들여져 버린, 회로가 망가진 비참한 말일지도 모른다.)

 

 

이것을 이렇게 이야기해 보자. 가장 상층의 인간이 사만다라면, 가장 하층의 인간들은 시릴의 아버지(제레미 르니에) 또는 시릴을 꾀는 불량청소년이다. (물론 이것은 도식적인 나눔이고, 시릴의 아버지의 경우와 불량청소년은 또한 같지 않다. 이 영화에서 다르덴 형제의 전작들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은 시릴이라기 보다는 해서는 안될 선택을 하는 그의 아버지이다. 이 아버지는 왜 이런 선택을 하는가,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를 다르덴 형제가 늘 묻고 있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한 마디 더 덧붙이자면 하층과 상층 중간 어딘가에 우리들, 예를 들어 영화의 마지막에서 쓰러진 소년을 놓고 중간의 애매한 선택을 하는 피해자 아버지 같은 인간들이 있을 것이다.) 이들은 각각의 지점, 즉 사만다의 미용실, 시릴 아버지의 식당, 풀숲가의 트레일러에 고정되어 있고, 자전거를 탄 소년은 이 고정점들을 자전거로 이동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약속>과 마찬가지로 소년이 달리는 순간은 그가 변화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들이 된다(착한 고정점에서 나쁜 고정점으로의 이동, 혹은 그 반대의 이동). 즉 자전거로 달리는 소년은 물리적으로는 하나의 고정점에서 하나의 고정점으로 이동하는 변화 과정을 겪고 있지만, 동시에 그의 내면에서는 더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그러므로 시릴의 내면의 가장 극적인 변화가 영화의 후반부 그가 두 번의 버림(불량청소년과 아버지에게)을 연달아 받고, 사만다의 미용실로 자전거를 탄 채 달릴 때 일어나는 것은 상징적이다. 이 컷은 짧게 생략되어 있지만, 가장 큰 변화를 보여주기에 가장 심리적으로는 길고 큰 장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제목이 '자전거 탄 소년'임은 상징적이다.)

 

그러나 생략은 여기에서만 보여지는 것은 아니다. 자전거를 타고 다시 사만다에게로 돌아온 시릴과 마지막 쓰러졌다 일어나서 태연히 걸어나가는 시릴과는 큰 차이가 있다. 마지막 시릴의 모습은 마치 사만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모든 것을 감내하면서 별다른 저항없이 돌아서는 시릴의 대응 방식은 그 전의 사만다의 대응방식들과 비슷하다. 즉 이 마지막에서 시릴은 거의 사만다化되어 있다. 두 번의 버림 후 사만다에게로 돌아왔던 시릴과 미 마지막 시릴과의 차이는 무엇으로 가능했을까. 아마도 그것은 돌아옴 후 그 마지막 장면들이 있기까지 다르덴 형제가 생략시킨 시간들, 즉 사만다와 함께 했던 좋았던 시간들로 가능했을 것이다. 아이들은 짧은 시간에도 엄청나게 변하는 법이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다르덴 형제의 영화의 미학 중 어쩌면 핵심적인 것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생략의 지점에서 존재하는 리얼리즘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소위 다르덴 형제의 고유한 형식이라고 믿어지는 것들이 있다. 흔들리는 카메라, 정면샷의 배제, 롱숏의 활용 등 흔히 말하는 '날것의 카메라'라 하는 것들. 그러나 이것으로 다르덴 형제의 특유의 리얼리즘이 만들어진다고 오인한 어떤 다르덴류 영화들은 이 형식만을 그대로 따와 인물들 뒤에 카메라를 위치시키고, 인물들이 뛸 때, 그들을 따라서 카메라를 들고 뛰면서 모든 것을 천천히 모두 보여주는 것으로 리얼리즘이 완성될 수 있다고 믿었다. 즉 현실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말 그대로 리얼리즘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보여주는 화면을 보는 인간들은 아무 것도 상상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든 것을 보여주는 화면을 그대로 볼 뿐이다. 리얼리즘은 그의 눈만 스치고 지나갈 뿐, 그들의 머리 속은 눈앞에서 보여준 (가짜로 만들어진) 화면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 (극단의 '리얼리즘'이라고 해서 그것이 현실인가? 물론 아니다. 모든 영화는 현실을 모사한- 설혹 다큐멘터리일지라도 -가짜일 뿐이다. 오직 현실과 가깝거나 멀거나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리얼리즘의 핵심은 어쩌면, 리얼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자에게 리얼을 생각(상상)하여 채워넣도록 만드는 것이 아닐까. 다르덴 형제의 이야기에서 그 이야기의 빈공간에 존재하는 상상을 가능케 하는 것은 생략의 앞과 뒤에 존재하는 윤리의 질문이 담긴 장면들이다. 하나의 윤리에서 다음의 윤리로 진화한 인간을 보여주는 것은 그 생략된 장면들에 가득 담긴 것들을 그 순간 우리의 머리 속으로 슬그머니 밀어넣는다. 그것은 이 영화에서는 아마도 사만다의 무한한 사랑이다.

 

사랑은 무엇일까. 사랑은 무엇으로 가능한가. 물론 그것의 정답은 없다. 다만, 다르덴 형제의 다음의 말들에서 유추해 볼 수는 있다. (<씨네21>837호 다르덴 형제 인터뷰에서: "우리에게 이 마지막 장면은 신적인 것의 개입과는 무관하다. 다만 우린 처음부터, 아버지가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는 이 끔찍한 사실을 시릴이 받아들이기를 바랐고 또한 그만큼이나 그가 사만다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를 바랐으며 동시에 우리 모두가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를 바랐을 뿐이다") 사랑은 신이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다. 그 사랑은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이 마지막에서 다시 그들의 처음을 돌이켜 보게 된다. 영화의 시작, 보육원 관계자들을 피해 병원에서 시릴은 우연히 사만다의 품으로 뛰어든다. 사만다와 시릴의 첫만남. 이 넓은 황량한 세상에서 시릴이 만날 수 있는 가장 소중하고도 따뜻하고 유일한 품. 이 기막힌 우연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우리는 그런 기막힌 우연들에 때로 다른 이름을 붙인다. 우리는 그 다른 이름을 '기적'이라고 부른다. 모든 사랑은 기적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기적은 오로지 인간들의 세계에서만 큰 의미가 있다. 우리 세계에서 기적이란 신의 세계에서는 그저 아이들 장난같은 시시한 것에 불과할 것이다. 기적은 오로지 인간에게만 의미가 있으며, 인간만이 만들어낼 수 있다. 그 기적 중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손쉬우면서도 가장 어려운 것이 바로 사랑이다. 리얼리스트 다르덴 형제가 말할 수 있는 이 세상에 대한 최선의 긍정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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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25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 별 다섯개일 줄 알았어요! . 그러므로 안 읽을 거예요! (주말에 보려고요.ㅎㅎ)

맥거핀 2012-01-26 00:13   좋아요 0 | URL
아니 언제 또 바람같이 댓글을 달고 가셨나요..다르덴 형제 영화는 별 5개 줘야지요..안주면 배신! 배반이야..!

꽃도둑 2012-01-26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의 전당에서 매년 여름 즈음에 영화비평 교실이 열려요.
별 일이 없다면 이번 해에 도전해볼까 해요,
접근법에 따라 달라지는 오묘한 영화의 세계로 빠져볼까 하는데
그러면 맥거핀님처럼 영화평을 쓸 수 있겠죠?,,아주 분석적이고 명석한!
가능하다면 특이하게도 쓰고 싶어요. 새로운 접근법을 개발해서리,..ㅎㅎ

잘 읽고 갑니다~

맥거핀 2012-01-27 00:44   좋아요 0 | URL
잘 배우시면 저처럼 쓰시면 안되죠~! 저는 야매라. 야매보단 정통의 방법을 배우셔용. 나중에 좋은 영화비평 많이 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정말 좋은 영화비평은 그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에게도 그 영화의 가치를 전달해줄수 있는 비평이라고 생각하고, 좋은 영화비평은 영화와 별개로 그 자체로서도 큰 가치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와 별개로 존재할 수 있는,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이나 본 사람이나 어떻게든 그 영화를 다시 찾아서 보게끔 만드는 비평, 그런 글들을 쓸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직은 갈 길이 매우 멉니다.

아이리시스 2012-01-26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이제 저는 <로나의 침묵>이랑 <약속> 봐야지!

고마워요, 맥거핀님. 그렇잖아도 뭘 하나 더 볼까 하다가 한 줄짜리 줄거리보니 두 개가 맘에 드네요ㅋㅋㅋ 맨날 훔쳐가는 거 맞죠, 저?

저는요, 결말이 미심쩍어요. 이렇게 끝나버리면 안되는 거잖아요. 달라진 게 하나도 없잖아요. 뭔가 달라지면 좋겠다고 계속 바랐었나 봐요.

맥거핀 2012-01-27 00:47   좋아요 0 | URL
결말이 미심쩍나요. 저는 그 영화의 그 이후를 계속 생각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소년은 다시 돌아가서 사만다와 계속 살테니까 점점 달라지겠죠. 그리고 아마도 언젠가 사만다와 같은(아마도 그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그 이후를 생각하게 하는 뭔가 남겨진 잔향같은 것들이 있었다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합니다.

이왕이면 <로나의 침묵>보다는 <약속>으로 시작하시는 것이 다르덴 형제를 느끼기에는 더 좋을 듯..아무래도 <로나의 침묵>은 다르덴 형제의 범작이라는 평판들이 있으니까요.

아이리시스 2012-01-27 02:09   좋아요 0 | URL
결말이 이해가 안된다거나 안좋다거나 그런 게 아니고(엄청 좋더라고요) 소년이 달라지는 걸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나 봐요. 잔향이 엄청나고 감독이 계속 고민했다는 것도 알겠고요. 영화는 기대보다 훨씬 좋았어요. 저 예전에 형제들 싫다고 했었잖아요. 근데 맥거핀님이 저 포스터 <약속> 맞죠? 계속 고수하신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알았어요, <약속> 먼저 볼게요^^

맥거핀 2012-01-29 00:38   좋아요 0 | URL
다르덴 형제의 영화가 마음에 드셨다면, <약속>은 필히 봐야할 영화죠. 영화관에서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의 그 먹먹하던(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이보다 더 마땅한 표현을 찾을 수가 없네요) 감정을 잊을 수가 없어요.

2012-01-28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는 "우와 영화 잘 만들었다." 이랬는데, 맥거핀 님은 어떻게 잘 만들었는지 조목조목 설명해 놓으셨군요. 그리고 다르덴 영화의 특징도 잘 설명해 주셨고요.
리얼리즘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맥거핀 2012-01-29 00:41   좋아요 0 | URL
뭐 그냥 제 나름의 이해(혹은 오해)를 쓴 것 뿐입니다만, 조금이라도 글이 영화의 감상을 더 풍성하게 해줄 수 있다면 좋겠네요. 주말에 영화보신다더니 빨리 보셨네요. 다르덴 영화는 사실 특유의 스타일이 있어서 영화를 보다보면 보고 싶지 않아도 스타일 같은 부분을 보게 되요. 근데 특유의 스타일이 있다는 것은 분명히 강점이기도 하지만, 위험한 부분도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2012-01-29 13:04   좋아요 0 | URL
그러네요. 특유의 스타일이 있다는 것은 강점이면서 위험한 부분도 있는 것이네요. 근데 이건 조금 다른 얘기지만, 모든 사람들의 모든 창조물이 결국 다 한 가지 스타일을 가진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는 평생 한 작품만 쓴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제가 예전에 페이퍼에 쓴 적 있는 건데, 진짜 "Tne man is the style."(문체는(스타일은) 사람이다.)이지요. 그런 게 정말 재밌어요. 그런 걸 관찰하는 것, 그런 사실 자체, 둘 다요.

맥거핀 2012-01-29 12:34   좋아요 0 | URL
그렇죠. '글'이라고 불릴 수 있으려면 특유의 문체가 있어야죠. 뭐 꼭 소설같은 것만 아니더라도, 예를 들어 알라딘 리뷰들에도 보면 각자 나름의 스타일들이 있는 글들이 있구요. 비평에도 각자의 스타일이 있고, 몇 문장을 읽어보면 아..이거 누가 썼구나 하고 알게 되죠. 근데, 그 문체와 스타일이라는 것이 거의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까..식상함을 동반하는 법이고, 어떻게 보면 발전을 못하고 있다는 얘기도 되니까, 그 스타일을 어느정도 유지하면서, 새로운 부분들을 담아낼 것인가의 문제가 중요해지겠지요.

그런 면에서, 다르덴 형제의 이번 영화는 인상적이었어요. 그 전의 <로나의 침묵>이나 <더 차일드> 등이 너무 스타일에 매몰된 범작이라는 인상을 준 반면에 이번 영화는 몇 가지 새로운 요소의 도입으로 영화가 꽤 흥미로워졌습니다.

2012-01-29 13:03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누구나 타고난 유전자에서 나온 (듯한) 고유한 스타일은 있지만, 그것을 나름대로 새롭게 바꾸는 것. 그건 할 수 있겠고, 다들 하고 있겠고, 또 하려고 하겠군요. 그리고 다르덴 형제가 이번에 그렇게 했군요.
그래서 '재미'가 중요한가 봐요. '재미있다'는 것은 그런 게 있는 것, 창작자 입장에서도, 감상자 입장에서도. (예전에 저 알던 후배가 '내가 추구하는 美는 '재미'야~' 이랬던 생각이 나고...ㅎ)
좀 더 생각이 정리되었습니다.^^

맥거핀 2012-01-30 17:21   좋아요 0 | URL
섬님 말씀대로 일단 본인부터 계속 하던대로만 하면 재미가 없겠죠. 그런 의미에서 저도 좀 새로운 형태의 리뷰를 써봐야 하는데, 매번 그냥 그렇게만 쓰고 있으니 슬슬 재미가 없어져요. 좋은 글들을 봐야 좀 자극이 되는데, 요새 시간이 없어서 영 글들을 못 읽고 있어요.ㅠㅠ

네오 2012-01-30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르덴의 영화를 엄청나게 좋죠???? (긍정의 대답을 원합니다^^V) 저도 그의 열혈빠휴먼이지만 매번 칸에서 놓치지 않는 상복에 대해선 조금은 아쉬워요~ 그러니깐 출품만 하면 오토매틱으로 황금종려 혹은 감독은 수상하져 다른 감독들은 불만일꺼 같은데요 헤헤 물론 좋은 작품에게 줘야 하는 건 당연하지만 거의 심사위원들이 그의 영화에서 무엇을 보았는지를 명쾌하게 설명이 안되서요~ 저에게요~ 이글에서 나타내듯이 인간이 펼칠수 있는 그 무언인가에 대한 대답이겠지요^^

맥거핀 2012-01-30 17:24   좋아요 0 | URL
그래도 그런게 있지 않습니까? 그 먼 벨기에에서 온 어떤 나이든 감독이 만든 영화를 보고, 전세계의 사람들(우리를 포함해서)이 삶의 무언가를 생각하게 된다는 게 참 경이롭지 않습니까?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아마도 그 심사위원들도 보셨을 것 같고, 전세계적으로 다르덴 감독의 영화가 칭송받는 것을 보면 결국 인간들의 시각이란 살아온 환경이 달라도 참 (어떤 의미에서는) 비슷한 것 같고...

좋죠..좋지요. 좋은 영화를 보는 것은 늘 좋지요.

네오 2012-01-30 17:53   좋아요 0 | URL
동감입니다^^

네오 2012-02-01 21:49   좋아요 0 | URL
아무리 생각해도 "소년이 병원에 같이 가자는 남자에게 괜찮다며 태연히 떠나는 이 마지막은 이상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그 감흥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무엇을 이야기해주고 있는가." 라는 대목이 정말로 정말로 제가 가지고 의문하고 백퍼씽크로 일치했습니다!! 다르덴의 영화가 뭘랄까 더 좋은 방향으로 가는것 같다는 확신이 드네요!! 아무런 사전정보없이 보고나서 마지막 그 마지막 소년이 살가? 죽을까?를 가지고 영화안에서 흐르는 짧은 시간안에서 한참을 고민했답니다. 설마! 설마! 하면서요~ 다행히 소년은 살아서 제가 원하는 이미지로 중심이동하던데요! 간만에 조금은 이 영화가 흥분하게 만드네요 ㅋㅋㅋㅋ 그런데 정말 맥거핀님 말씀대로 바꼈더라고요~ 제가 생각하기로는 그의 작품들중에서 거의 음악이 없었는데 베토벤의 교향곡5번 황제 2악장이 나오는 순간 깜짝 놀랐어요..거의 <블루>의 효과처럼 씌여졌다는 막연한 생각만요 ㅋㅋㅋㅋ 다르덴이 참 흥미로워졌어요^^

맥거핀 2012-02-01 23:03   좋아요 0 | URL
다르덴 형제라면 이제 거장으로 불러도 좋겠죠? 그 짧은 마지막에서 보는 사람을 애타게 만들고, 결기있게 나가는 그 뒷모습은 다르덴의 새로운 변화, 아마도 좋은 쪽으로의 변화를 믿고 싶게 만들어요. 그 뒷 이야기를 또 상상하게 만들구요. 음악도 대체로 그렇지만, 기존의 스타일에서 새롭게 변화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기존의 스타일을 좋아하던 사람들은 아무래도 우려를 많이 하게 되잖아요. 많은 뮤지션들이 그래서 수많은 팬을 잃기도 하구요. 저도 이 영화 보기 전에는 그 변화들을 우려를 했던 것 같아요. 그러나 이 영화를 보고 나서는 그 변화를 긍정하기로 했고, 또 다음의 새로운 변화를 기대하게 됩니다. 이미 다 완성된 것처럼 보이는 거장의 새로운 발전을 볼 때에 그것만큼 즐거운 것이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