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인력거 - My Barefoot Friend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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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글을 쓴다. 기본적으로 좋은 글이란, 좋은 리뷰란 글쓴이의 관점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글일 것이다. 그리고 좋지 않은 리뷰들의 공통된 특징 중의 하나는, 글쓴이의 생각이 왔다갔다하거나 백과사전적인 정보만이 가득한 리뷰일 것이다. 물론 항상 자기 눈에 눈곱은 보지 못하는 법이어서, 말은 이렇게 해도, 내 지나간 리뷰들을 보면, 뭐 이런 소리만을 잔뜩 써놨지 하는 리뷰들이 부지기수다. "지금 다시 쓰라고 하면 더 잘 쓸 수 있을텐데"라고 하면 이야기가 복잡해질테니 더 이상의 생각은 관두기로 하자. 아무튼 글을 쓰기 전에는 대체로 한 두 가지의 생각은 정리하고 쓰는 편인데, 이번에는 정말 잘 모르겠다.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인지 생각이 복잡해진다.

 

이성규 감독의 <오래된 인력거>는 영화의 시작과 끝에 비슷한 장면을 붙여두고 있다. 이 영화는 인도 캘커타의 인력거꾼 샬림을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취재한 다큐멘터리이다. 그 샬림은 영화의 처음 더 이상 자신을 찍지말라고 화를 낸다. 당신은 나의 친구도 아니고, 나는 더 이상 찍히고 싶지 않다, 당신은 그저 외국인일 뿐이며, 언젠가 돌아갈 사람일 뿐이라고. 그러나 감독은 카메라를 뿌리치는 그를 껴안으며 말한다. 다 이해한다고, 우리는 친구이지 않냐고.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서 병든 아내의 병원비를 내기 위해, 그간 삼륜차를 사기 위해 모아둔 돈을 쓰려고 결심하며 다시 한 번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 이 돈을 이렇게 써야 하다니, 어떻게 모은 이 돈을. 그리고 말한다. 눈물을 흘리고, 힘들어하는 나를 찍지 말라고. 제발 나를 좀 내버려두라고.

 

이 장면들을 보는 상당수의 관객들은 마음이 복잡했을 것이다. 그 장면들을 앞에 두고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으니까. 아마도 그러한 마음들을 감독에게 묻는 관객들이 꽤 있었던 모양이다. 그 마음의 한 가지 질문. 왜 제작진은 샬림을 위해 삼륜차를 사주지 않았는가. 감독은 말한다('오래된 인력거 블로그' 제작노트 http://blog.naver.com/report25?Redirect=Log&logNo=150127999834). 제작진은 샬림을 위해 삼륜차를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모았다. 그러나 샬림은 그 돈으로 고향에 집을 지었으며, 우리는 그 결정을 존중한다고. 그리고 덧붙였다. 다큐멘터리는 감성적으로 풀 수 있지만, 온정주의로 풀어서는 안된다. 보다 중요한 것은 샬림 개인의 인생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신분제와 착취구조인 인도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더 나아가 그것이 인도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와도 연관되는 문제라는 점을 인식하는 점이라는 것. 이와 관련하여 김영진은 <씨네 21>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835호). "<오래된 인력거>는 이 지점에서 솔직하다. 설령 그것조차 자신들의 윤리적 곤란을 드러냄으로써 정당화하려는 방편으로 삼는다고 비난한다면 할 수 없지만 나는 그렇게는 보지 않았다. (중략) 대체로 우리는 세상의 어두운 그늘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의 불행을 소비하지만 그것에 대해 별다른 도덕적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는 정면으로 그 불편함을 드러낸다."

 

글쎄. 이 영화가 그 균열을 지그시 응시하고 드러내보임으로써,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어떤 윤리적 불편함을 안겼다는 지적에는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그것(불편함)이 과연 충분했는가라는 질문에는 조금 의문이 간다. 김영진은 "이 당당함이 제3세계 사람들의 삶을 구경거리화하는 대다수 인습적인 텔레비전 카메라의 굴레를 벗어나게 해준다. (중략) 카메라로 그의 삶은 보편적 휴머니즘이라는 틀 안에, 공감과 연민과 위로의 틀로 가장한 수직적인 시선의 압제에 굴하지 않는다."라고 했지만, 그것을 소비하는 우리들은 과연 이 영화를 본 이후에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감독이 말한 '신분제와 착취구조에 대한 관심, 그것이 우리 문제임을 인식하는 것'이 어떤 식으로 가능할 것인가. 불행한 인도의 인력거꾼들을 위해 모금활동을 하는 것, 아니면 혹시라도 있을 인도여행에서 그저 낯선 관광객이 되어 인력거를 타지 않는 것(그러나 영화에 따르면 이 인력거도 보기 안좋다는 이유로 인도 정부에 의해 곧 금지될 예정이다), 인도 정부에 카스트제도의 폐지를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이는 것? 물론 이는 농담이면서, 농담이 아니다. 우리는 어쩌면 이런 영화를 도리어 그런 불편함을 사라지게 하는 진통제로서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도의 카스트제도, 그리고 그와 연관이 있는 가장 원시적인 노동이자 비인간화된 노동처럼 보이는 인력거(물론 아닐 수도 있다. 우리는 상상할 수 있는, 때로는 상상이상의 모든 것을 대상화하니까),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지독한 가난, 아무리 벗어나고 싶어도 대를 이어 대물림되는 지독한 가난. 우리는 사실 대부분 그런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즉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예상할 수 있는 어떤 장면들은 영화 속에서 빠짐없이 재생된다. 그것에는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떤 새로움의 차이는 없다. 그런 상황에서 그 영화를 소비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일종의 면죄부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 그래도 이런 영화 봤으니 되었어, 왠지 마음의 짐을 조금 덜한 것 같잖아, 이런 면죄부. (<워낭소리>가 결국 어떤 식으로 관객에게 소비되었는지를 이와 연관하여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즉 이 영화의 어떤 아이러니한 점은, 앞과 뒤에 샬림이 자신을 찍지 말라고 화를 내는 장면을 붙이면서도, 그 모든 장면들, 즉 샬림이 찍힌 모든 장면들을 결국 영화로 만들어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단순하게 말해서, 찍지 말라고 항변하는 샬림의 장면을 보고 있다는 이 사실 자체가, 도리어 역으로 그 화면을 보는 사람들의 윤리적 면죄부를 강화하는 효과를 낳고 있지 않을까. 이 영화는 거기에서 조금 더 나아갔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즉 관객을 조금 더 몰아붙였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김영진이 <하얀 정글>에 한 표현을 그대로 가져와 본다면, 이 영화는 어쩌면 "결국에는 관객을 정면으로 공격해서 항복을 받아내려는 의지와 결기는 없는 상태"가 아닐까. 그러므로 궁금해지는 것은 사실 영화의 마지막 이후이다. 자신을 찍지말라고 카메라를 뿌리치는 샬림을 어떻게 설득하여 이 영화는 탄생되었는가, 그리고 그 이후 샬림의 삶은 어떻게 되었는가. 영화는 그러나 어떤 설명 없이 약간은 급한 봉합을 한다는 인상이 짙다. 샬림은 그 이후로도 가족 때문에 길을 잃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나레이션을 끝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한편으로는 이 영화에 있어서 나레이션의 역효과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외수의 나레이션은 지나치게 설명적이고, 친절하다. 그래서 때로 관객의 감정을 미리 예단한다는 느낌을 준다. 즉 내가 판단하기 전에 나레이션이 판단을 내려준다. 이것은 TV 다큐멘터리를 오래해온 감독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의 미덕은 여러 군데에 있다. 김영진의 말대로 이 영화의 카메라는 단순히 구경거리로 그들을 비추려고 하지 않으며, 단순히 수직적이고 타자적인 관점의 카메라로 기능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을 보면서 예를 들어, 외국인을 속여서 물건을 파는 장면을 보면서 도리어 통쾌함을 느끼게 되고, 인력거가 단순히 운송 수단이나 가난의 문제에만 연관된 것이 아니라, 인도 사회의 계층 문제와 착취구조의 문제와도 연관된 것임을 이해하게 되며, 샬림의 영화 속 낙관적인 태도들이(감독은 샬림이 인도에서 만난 사람 중 가장 친절했다고 이야기한다), 자신의 어려운 상황을 넘어서려는 결기의 다른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게 된다. 그리고 가장 마법같은 순간이 있다. 영화 속 샬림의 동료이자, 샬림보다 더한 영화적 인물인, 영화의 또다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마노즈를 잡은 한 장면. (샬림이 밝음으로 결기를 보여준다면, 마노즈는 반대로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침묵으로서 결기를 보여준다. 제작노트에 보면 이 장면은 마노즈가 술에 취한 상태에서 찍었다고 한다.) 마노즈는 어렸을 때 고향에서 천민이었던 아버지가 카스트 전쟁 때 지주에게 맞아 죽은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 그 지주들을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샬림의 질문에 대답한다. 도망칠 것이라고. 그리고 그러면서 카메라를 지그시 응시하는데, 카메라에 잡힌 그 눈은 공포에 질린, 그리고 동시에 이해할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힌 눈이다. 이어지는 컷은 10년 전 당시의 마노즈를 우연히 촬영한 컷. 감독은 10년 전 카스트 전쟁을 촬영하면서 어린 마노즈를 우연히 촬영했었고, 오랜 후에 마노즈의 이야기를 듣고 이 컷을 찾아낸 것. 마노즈의 그 눈은 온연히 바로 그 어린아이의 눈이다.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어도 그 속에 자리잡고 있는 공포와 분노를 오롯이 잡아낸 이 영화라는 마법. 오로지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 대상만을 오랫동안 응시하고 기다릴 수 있는 영화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그 마법.

 

그래서 2시간도 채 안되는 영화는 때로 그 천배, 만배의 시간을 우리에게 경험하도록 한다. 물론 그 시간을 만들어내는 것은 감독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우리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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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1-03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이거 종편에서 해주지 않았어요? 종편출범할 때 다큐가 좋은 게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그린란드(?) 하여튼 그쪽이었구요! 제가 관심있게 콘텐츠들을 봤었는데ㅋㅋ 찜해놓고 기다렸는데 결국 종편채널 네 개에 눈붙이고 앉아있기가 어쩐지 죄(?)스러워서 못봤어요.(실제로는 시간을 놓친 거ㅋ) 드라마는 봤는데(빠담빠담 같은 정우성 나오는 거) 그래도 배우들은 외주제작한 경우에는 본인 작품이 어느 방송사에서 방영할지 알지 못하잖아요. 그래서 죄책감을 덜었달까. 하하.

영화로 나와서 좋네요. 그때 맨발로 달리는 걸 보고 이것도 건방진 얘기겠지만 참 서글펐거든요. 하지만 그 할아버지는 열심히 살고 계신 거잖아요. 저보다도 훨씬. 그래서 짐을 제맘대로 덜어냈어요. 인도처럼 양면적인 국가가 또 있을까 싶어요. 영화를 보면 정말 눈부실 정도로 색감이 좋아서 정말 순수하고 아름다운 나라 같은데, 이젠 인도에 가보고 싶다는 말조차 사치인 것 같아요. 가고 싶지 않아요. 10년동안.. 황홀한 집념이네요. 무려 무산에서도 하네요! 우리집 근처 동네에 있는 극장인데 처음 들어보는 데서요.ㅜㅜ

새해 복 많이 받고 계세요, 맥거핀님?ㅎㅎㅎ

맥거핀 2012-01-03 19:14   좋아요 0 | URL
종편에서 했었나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극장에서 봐서. 종편도 이런 컨텐츠를 많이 한다면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요즘에 사실 종편을 본 적이 없어서 뭐가 하는지도 전혀 몰라요. (아..하나 아네요. 소녀시대하고 남자애들 나오는거..;;) 빠담빠담도 노희경씨 극본이라 그래서 보고싶기는 한데, 왠지 양심에 찔려서..(그럼 소시는?-_-)

저는 영화를 보면서 인도에 대한 인상이 딱 하나 남았는데, 아..사람 진짜 많다, 정말 많다 이 생각만 했어요. 땅덩이에 비해 사람이 너무 많은 거 아닐까. 그래도 놀라운 것은 살림을 비롯하여 거기에 나온 상당수의 사람들이 뭐가 좋은지 싱글싱글 웃고 있는 것..예를 들어 영화 중반부에 폭우가 퍼부어 완전 물바다가 된 장면이 있는데, 거기 사람들은 뭐 이정도 가지고..이런 표정으로 여유있게 웃더라구요. (이런거야 말로 타자적인 시선일지도 모르지만..)

새해에는 아직까지 일복만..하하.

2012-01-04 0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05 0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딧불이 2012-01-04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도 영화였군요..다큐멘터리인가요? 작년에 본 영화 한편(아고.. 제목이 생각이 안나네요.. ㅠㅠ) 보고 거의 탈진상태가 되어버렸는데 이 영화도 왠지 그럴 것 같은..

맥거핀 2012-01-05 00:53   좋아요 0 | URL
다큐멘터리구요. 인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감독도 한국 분이고, 한국 제작진들이 주로 만든 영화라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근데 생각보다 그렇게 힘든 영화는 아니구요. 감독이 TV 다큐 쪽에서 오래 경력이 있으시다고 하던데, 한편으로 그래서 약간 TV 다큐 느낌도 있어요. 즉 그렇게 극단적으로 몰아붙이는 영화는 아닙니다. 결코 가볍다고는 할 수 없지만...여력이 되시다면 한번쯤 볼만한 영화라고 생각되네요.^^

네오 2012-01-30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지는 않았지만 종편방송에 방영한다고 시끄러운 작품인걸로 기억해요~

맥거핀 2012-01-30 18:19   좋아요 0 | URL
근데 한편으로는 종편에서 이걸 한다고 하니 뭔가 살짝 의심을 하게 되는게, 저도 마음이 역시나 너무 편협한가 봅니다.
 
하얀 정글 - White Jungl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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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의사는 너무 늦었다고 했다. 특별한 방법이 없다고 했다. 나는 뭐라고 말을 좀 더 듣고 싶은 눈길을 의사에게 애타게 보냈지만, 그는 이제 어쩔 수 없다는 듯, 이제 그만 나가달라는 투로 문을 힐끗 바라보았을 뿐이다. 불과 몇 주 전의 일이다.

 

그 몇 주 전의 경험. 기침이 너무 심해 밤에 잠을 잘 수 없을 정도였고, 목은 부어 올랐다. 어지간하면 피하고 싶었지만, 버티다 못해 종합병원에 갔다. 이비인후과 진료를 신청했더니, 진료가 가능한 의사가 특진의사뿐이라며, 그래도 괜찮으면 진료를 받으라고 했다. 특진이라는 게 그 이름이 보여주는 만큼의 그런 '스페샬'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의사는 내 목구멍을 아주 잠깐 들여다보더니 감기는 이미 다 나았는데 병원에는 뭐하러 오셨냐는 투로 이야기하고는, 처방전을 적어주었다. 1분 남짓 되는 짧은 시간이었다. 아마도 내가 입을 잘 벌리라는 의사의 지시에 조금 더 효과적으로 따랐더라면 그 시간은 훨씬 단축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특별한 시간을 입 하나 제대로 벌리지 못해 몇 십초나 잡아먹다니, 아주 죄송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튼 나는 아주 효과적이고, 게다가 효율적으로 병원 진료를 받을 수 있었고, 기본진료비에 거의 준하는 특진비가 추가된 처방전과 진료권을 손에 쥔 채 병원을 나왔다. 정말 스페샬한 것은 이제 막 만들어져 반짝반짝 빛나는 마그네틱 진료권뿐이었다.

 

의사이기도 한 송윤희 감독의 다큐멘터리 <하얀 정글>은 그 짧은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의 중반부, 감독은 대형종합병원의 진료실에 들어가는 각각 환자의 진료 시간을 카운트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이러한 대형병원의 형식적이고도 짧은 진료를 비판하는 인터뷰를 그 위에 작게 붙인다. 위의 인터뷰어가 몇 마디 채 끝내기도 전에 들어갔던 환자가 나오는 것이 보인다. 30초도 안되는 시간. 연이은 환자들의 진료 시간은 모두 1분에 미치지 못했고, 이 5명의 환자의 평균 진료 시간이 계산되어 자막에 뜬다. 평균 31초. 물론 이것은 이 영화의 여러 이야기들 중 그나마 가장 애교있는 편에 속한다. 당연히 위에 적었던 내 짧은 경험은 그런 애교축에도 못 들어간다. <하얀 정글>은 간단히 말해서 '의료판 도가니'이다. 여기에는 현재 병원들이 저지르고 있는 여러 다양한 행태들이 그야말로 적나라하게 소개된다. 나쁜 짓의 향연, 스페샬한 퍼레이드. 그것은 일일이 적기에도 지치는데, 병원 광고가 허용된 이후, 광고 회사에 의뢰해 만들어지는 각종 후기 식의 광고들, 돈을 더 벌기 위해 행해지는 과잉검진과 과잉시술, 그에 비례해서 줄어드는 환자당 진료시간들, 부당한 과다 의료비 청구, 일반실을 줄이고 특실을 늘리는 병원의 새로운 재테크, 제약회사와 의료기기회사와의 커넥션으로 이루어지는 특정약품과 특정기구들에 대한 거의 반강제적 강요... 급기야는 부당 의료비 청구를 제소하였다는 이유로, 다행히 병이 다 나아 돌아간 환자에게 "나중에 재발하였을 때 보자"는 식의 폭언, 또는 부당한 진료에 대해 항의하면 "아니 다른 가족분들도 다 우리 병원 다니시는데, 나중에 어쩌실려고 그러세요"는 식의 멘트를 날리는 경우를 보고 있으면, '아 이게 병원일까, 아니면 조폭집단일까'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런 이야기를 본 분들은 '그런 이야기는 요즘 점점 여러 다양한 논의들이 나오는 의료 민영화가 되었을 때 이야기가 아닌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현재 우리의 병원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이다. 영화 전반부에 이런 다양한 이야기를 한 후, 영화 후반부에 앞으로 우리 현실로 다가오게 될지도 모를 의료 민영화나 건강보험 민영화에 대한 이야기들이 자세하게 소개되는데, 그러므로 그것을 본 내 느낌은 의료 민영화란 "지금까지 뒷구멍으로 해오던 나쁜 일을, 이제는 대놓고 떳떳하게 하겠다"라는 소리로 들린다. 영화 속에서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국회답변에서 말한다. 의료서비스 질이 떨어질 것을 우려하는데, 서비스가 나쁘면 안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자연히 도태되지 않겠습니까. 아이고, 정남아, 정남아, 아니 증현아, 증현아, 이거 마 궁둥이를 확 주차삐까. 당신이 이해를 잘 못하는 듯 하니, 예를 하나 들어주겠다. 당신이 지금 엄청난 설사로 집을 향해가는 매시매초마다 예수님과 부처님을 번갈아 영접하는 중이다. 그 때 가까이에 상당히 더러워보이는 화장실이 보인다. 당신은 더럽다며 그걸 멀리하고 꼭 집에 가서 일을 치르겠는가. 괄약근의 기능이 좋은 증현 씨는 가능할지 몰라도, 나라면 불가능하다. 의료 서비스는 산업이 아니다, 그러니 당연히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을 마이클 무어는 <식코>에서 간단하고도 효과적으로 이야기했다. 당신이 지금 막 강도를 당했는데, 운좋게 바로 앞에 경관을 만났다. 그런데 그 경관이 "이봐요, 특별근무수당을 지금 내셔야, 저 범인 쫓아드릴 수 있는데요."라고 한다면? 아니면 지금 막 집에 불이 붙어 소방서에 전화를 했다. 그런데 소방서에서 "일단 출동비부터 결제하세요. 그럼 출동합니다."라고 한다면? 그러나 현재 병원이 하는 행동은 어떤가. 사람이 죽어가도, 일단 원무과가서 '정산'부터 하라고 한다. 아니면, 나가세요. 이게 병원의 행태라는 것이다. 병원이라는 것이 소방서나 경찰과 같은 공공서비스와 같음을 보여주는 즉, 소방서나 경찰서나 병원이나 사람의 목숨, 생활과 직결되어 있다는 효과적인 비유.

 

 

한편으로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이것을 단순히 선과 악의 대비로만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부당하게 당하기만 하는 환자가 선이고, 의사들이 무조건적인 악은 아니라는 점(실제로 영화 중 좋은 의사를 만난 경험을 들려주는 환자 부모의 이야기도 있다). 의사들을 무조건적인 악이라고 보기 어려운 이유는 그들 역시 압박과 유혹에 시달리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자세하게 이야기되는 부분은 아니지만, 의료수가(酬價) 역시 상대적으로 낮으며, 의사들은 끊임없이 더 많은 환자를 상대하고 더 많은 수익을 올릴 것에 대한 압박을 받는다. 현재시각 병원에 내원한 환자수가 일정한 간격으로 의사들에게 문자메시지로 통보되며, 연속되는 회의에서는 각 과별로 수익이 비교되어 1등부터 꼴찌까지 등수가 매겨진다. 그리고 동시에 MRI를 한 번 촬영할 때마다 월급이 만원씩 올라간다고 노골적으로 의사들을 회유하기도 한다. 의료수가는 낮고 환자들을 많이 상대해야 수익이 올라가니 각 환자별 진료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과잉검사와 시술이 늘어날밖에(과잉검사는 한편으로 의료사고와 관련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의사들만이 악일까. 문제는 시스템이다. 그들을 둘러싼 거대한 시스템. 그리고 그것을 만들어내고 운영하는 정부. 영화는 영리하게 그 시스템의 기원을 밟아 그것의 문제점을 파고 들어간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에 의해 탄생한, 태어나기는 태어났으나 아무도 신경쓰지 않은 건강보험제도. 그것이 노태우, 김영삼을 거쳐 진보정권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이제 '그분'에 의해 어떠한 운명에 처했는지.

 

다큐멘터리라는 관점으로만 보았을 때, 이 영화 <하얀 정글>은 아주 좋은 다큐멘터리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내러티브는 산만하고, 이야기는 때로 중심축을 조금 잃고 있는 것처럼도 보이고, <식코>를 의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식코>만큼 재기발랄하지는 않다. 어떤 부분은 더 설명이 필요할 듯 싶은데, 그냥 넘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도 있고, 어떤 부분은 조금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손바닥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컷들이 몇 번 삽입되는 것은 의료에 있어서 낙수효과(落水效果, trickle down effect : 쉽게 표현하면 ‘번짐’ 을 의미한다. 물이 번짐처럼, 어떤 기업이 돈을 많이 벌면 투자와 고용이 늘어나고, 그로 인해 개인의 소득이 증가하여 행복해 질 수 있다는 것)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인듯 한데, 그 의미를 설명하지 않으니, 조금 쌩뚱맞은 컷으로 보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다큐의 문제라고 보이는 것은, 문제의 제시와 강조에만 그칠 뿐 그 다음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모든 다큐가 해결책을 제시하여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결국 제시하는 결론은 '민영화 반대'인데, 그렇다면 민영화만 안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나.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미 병원들은 각종 나쁜 짓을 하고 있다. 중간에 그 대안으로 스치듯이 제시된 것이 '주치의 제도'인데, 그것도 설명이 상당히 빈약한 감이 있다. 아마도 이러한 것은 이 영화의 모호한 지향점과도 관련이 있다. 이 영화에서 결국 관객에게 요구하는 것은 분노와 행동이다. 그러나 분노와 행동 이전, 관객을 사로잡는 것은 '공포'가 될 수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영화의 감독은 의사이고, 동시에 그 남편도 의사이다. 그런데 이들 역시도 앞으로 닥쳐올 미래에 대해 일종의 두려움을 보여준다. 부부 의사도 이럴진대, 그렇다면 일반 우리들은? 일반인들은 의료에 있어서는 영원한 약자이며, 병원에서 우리의 생각을 마비시키고, 의사의 지시에 거의 무조건적으로 따르게 만드는 근원에 있는 것은 결국 공포감이다. 분노를 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그 공포감부터 제거해야 한다. 단순한 감정적인 분노가 아닌 필요한 행동을 하게 만드는 분노는 결국 이성의 힘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 <하얀 정글>은 우리의 의료 현실이 하얀 정글임을 보여준다. 우리들은 그 정글에 놓여진, 놓여질 수밖에 없는 어린아이다. 중요한 것은 그 정글의 묘사에 치중해,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정글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할 말은 이것밖에 없다. 보아라, 무조건 보아라. 내부 고발자들의 통렬한 내부 고발이 줄줄이 이어지는 이런 이야기를 아마도 브라운관에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찾아서 볼 수 밖에. 누군가는 이것은 이미 다 아는, 많이 알려진 이야기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크린으로 다큐멘터리를 볼 때, 관객이 미리 지녀야 할 오로지 한 가지의 마음가짐이 있다면, 불꺼진 극장에서 넓은 스크린으로 한 시간 이상을 집중해서 보는 것은, 거의 대부분 상상 이상의 체험이 되며, 동시에 당신에게 새로운 관점의 가능성을 던져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섣불리 재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올 한 해, 여러 영화들에 대해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잘도 떠들어댔지만, 그 영화들 모두 안 봐도 좋고, 지금 쓰는 이 리뷰도 엉망진창의 거지 같은 리뷰라고 생각해도 좋으니, 보아라.

 

어디든 안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피할 수도 있다. 우리는 자유가 있으니까. 우리는 영광스럽게도 '새로운 자유주의'라고 이름붙여진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 그러나 아마도 우리가 끝끝내 피하지 못할 것은 병원일 것이다. 우리는 살아남아야 한다. 하얀 정글에서.

 

 

덧.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0923.html

http://goo.gl/XRKV5

 

링크한 글은 <한겨레 21>과 <라포르시안>에 실린 송윤희 감독과 의사이자 영화평론가인 황진미 씨의 '자칭' 설전. 그러나 어차피 황진미 씨에게 비판을 기대한 것도 아니고, 뭔가 다른 비판적인 관점에서 이 영화를 본 글도 봤으면 좋겠다. 이왕이면 현직 의사의 글도 좋고. 그런데 의사 분들은 30초 진료로 워~낙 바쁘셔서 이런 영화는 안보시는 듯 하다. 찾아보기는 하는데 영 눈에 안 띄네.

 

 

추가 덧(2012.1.3.).

글쓴분의 허락을 얻어, 블로그 글을 하나 링크해둔다. 의사분의 글인 것 같은데, 아마도 현직임상의이신듯한 글쓴이의 이야기가 영화의 이해에 있어 또다른 관점을 줄 수 있을 듯. (확실히 의사분들 입장에서 보는 것과 일반 관점에서 보는 것은 온도차가 있는 듯.)
http://ayako.egloos.com/4653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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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ing 2011-12-30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다양한 영화를 보시는군요. 저는 영화관에서 다큐멘터리 본지가 언제인지;
이런 세상에선, 아프지 않는게 최선인 것 같구나 싶기도 하네요.. 이제 감기는 다 나으신거죠? 아프지 마세요ㅠ

맥거핀 2012-01-01 15:28   좋아요 0 | URL
제가 원래 좀 골골대는 편이라 감기를 겨울에는 늘 달고 살아요. 그래도 이번 겨울에는 초반에 크게 넘겼으니 좀 낫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걱정해주셔서 고마워요.

아..그리고 이 영화는 꼭 챙겨서라도 보셔요. 영화가 좋으니 보라 이런 것 보다도, 요즘 세상에 어떻게든 버틸려면 알고 있어야 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는 영화라고 생각이 됩니다. 나중에 상영이 끝나더라도 다운받으셔서라도(아마 인디플러그 같은데에서 다운로드 가능할 겁니다) 보세요.

마녀고양이 2011-12-30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식코를 보고 싶었는데, 아직 하나도 못 봤네요. ^^

얼마 전 동네 약사께서 막 화를 내고 계시더라구요. 아마 약을 편의점에서 파는 것과, 그리고 약의 의료보험 수가 때문인거 같았어요. 그리고 저도 입을 잘 못 벌려서 이비인후과 의사가 엄청 짜증을 내던, 비슷한 경험을...... ^^

절대 산업화가 되면 안 되는 것이 몇가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의료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을 치다니요. 거기다
의사들 역시 버는 사람은 벌고 뺑이치는 사람은 치고... 엄청난 성형외과들 보셨죠!

맥거핀님, 오늘도 좋은 영화 리뷰 읽고 갑니다.
새해에 즐거운 일 가득하시고, 건강하세요.

맥거핀 2012-01-01 15:32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새해가 오기 전에 잊지 않고 들러주셨네요(저는 이렇게 새해가 온 후에 댓글을 달고 있지만..). 희망찬 새해 맞으시고, 늘 서재에서 자주 뵐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물론 건강도 잘 챙기셔야하구요.

이 영화를 보고 난 이후에 건강에 대한 걱정을 조금은 더 하게 되었어요. 본문에도 썼지만, 현재와 같은 한국 사회에서 아프게된다는 것은 단순히 본인의 건강 문제 이상이 되어가는 것 같아요. 다른 건 신뢰할 수 없어도, 법관이나 의사, 교육계 등등은 신뢰할 수 있어야 하는데, 법조계도, 의료계도, 한편으로는 교육계도 점점 균열이 드러나는 것 같아서 참 걱정이 됩니다. 2012년 첫날에 희망찬 얘기를 하고 싶은데, 올해에는 또 어떤 일들을 보게 될지 걱정부터 되네요.

맥거핀 2012-01-03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덧글 추가.
 
드라이브 - Driv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결말부 내용이 '약간' 있음)

 

 

 

아무래도 이 영화는 극장의 큰 스크린으로 봐야지 싶어서, 영화가 거의 씨가 마르려는 시점에 극장에 다녀왔다.

 

개봉 이후 이 영화 <드라이브>에 대한 평은 대체로 두 개로 나뉘는 것 같다. 하나는 수많은 걸작 영화들을 떠올리게 하는 멋진 장면들과 환상적인 씬들이 가득한 영화광을 위한 영화라고 말하는 평과 다른 하나는 관습적이고 뻔한 스토리의 할리우드 액션 영화를 유럽 영화의 소스와 멋진 음악을 살짝 얹어 그럴듯하게 포장한 영화라는 평(이러한 것은 영화 속 '버니'가 자신이 예전에 만들었던 영화들에 대해 자조적으로 냉소하면서 말하는 것과 정확하게 겹친다)이다. 물론 이 두 가지 평들이 공유하는 지점도 역시 두 가지 정도 있는데, 그 하나는 그야말로 멋지고 환상적인 음악들이 영화 전체를 뒤덮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영화는 유독 '폼'을 잡는 영화라는 점이다. 그것을 <씨네 21>의 김도훈은 다음과 같이 재미있게 표현했다(<씨네21> 829호). "<드라이브>는 그저 개폼의 영화인가, 아니면 그 이상의 뭔가가 존재하는 영화인가. 물론이다. 니콜라스 윈딩 레픈의 <드라이브>는 처음부터 끝까지 개폼으로 달려가는 영화다. 다만 우리는 좋은 개폼과 나쁜 개폼을 구분해야만 한다." 과연 '좋은 개폼'이란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쳐두고라도, 이 말은 적어도 한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은 이 영화 <드라이브>가 그 '폼'을 영화 내내 전혀 숨길 생각이 없다는 점, 도리어 그 폼을 영화 내내 과시하면서 뻔뻔하게 (거의 일부러) 내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많은 액션 영화, 누아르 영화에서 그 폼을 일부러 내보이던 것은 거의 일종의 장르적 관습과도 같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의 과도한 '폼' 즉 허세 또는 '젠체'는 영화 전체를 너무 뒤덮고 있어, 약간은 기이해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 영화를 영화 <아저씨>와 비교하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는 설정상의 여러 부분을 <아저씨>와 공유하고 있다. 정체가 전혀 설명되지 않은 한 남자가 이웃집의 여자와 어린 아이를 위해 전모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사건에 끼어든다는 것. 그러나 내 생각에는 그것은 설정상의 부분일 뿐이고, 영화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아저씨>와는 조금은 다른 측면들이 있다는 생각이다. 예를 들어 <아저씨>는 거대한 조직과 일인의 대결 양상이다. 사건은 처음에 커다란 무게로 몰아닥치고, 주인공은 하나 하나의 미션을 클리어해가며 적의 심장부로 잠입해 들어간다. 반면, <드라이브>는 처음에는 아주 작아 보였던 사건이 점점 혼란스럽게 꼬여간다는 인상이 짙다. 예전 숀 펜이 나왔던 영화 <유 턴>처럼, 주인공의 사건은 조금씩 비틀어지며, 점점 걷잡을 수 없이 상황이 악화되고, 처음의 작은 사건은 나중에는 그야말로 주인공의 모든 것을 걸어야하는 커다란 사건이 되어 버린다. 보다 근본적인 차이는 이 영화를 도대체 어떤 영화로 보아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아저씨>의 경우 전형적인 액션물이다. 즉 관객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원빈의 머리깎기나 몸매이기도 하겠으나) 주인공의 액션이다. 그러나 사실 이 영화 <드라이브>를 액션물로 보기에는 조금은 무리가 따른다. 결정적이고 무자비한 액션이 몇 군데 나오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액션 장면은 몇 장면 되지도 않을 뿐더러, 거의 눈깜박할 새 지나가 버린다. 도리어 '액션 그 자체'보다 영화가 중시하는 것은 액션의 전후이다. 예를 들어 그 액션이 막 시작되기 이전의 숨막히는 긴장감, 액션이 시작되기 이전 그가 뒤집어 쓰는 가면, 적을 만나러 가면서 꺼내드는 장도리를 클로즈업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즉 다른 말로 하자면,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액션 그 자체가 아니라, 액션을 둘러싼 아우라, 다시 말해서, 액션의 '폼'이다.

 

이것을 이렇게 비유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저씨>는 대전 액션 게임, 혹은 슈팅 게임이다. 스테이지를 거쳐갈수록 적은 강해지며, 최종전에는 그 적의 보스를 무너뜨리고 '클리어'를 쟁취해야 한다. 물론 대전 액션 게임에도 스토리는 있다. 그러나 그 스토리는 사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그저 뒷 배경에 불과하다. 보다 중요한 것은 각 스테이지에서 적과 싸우는 것을 만끽하는 것, 그 자체이다. 그에 반해서 이 영화 <드라이브>는 전략 시뮬 게임이다. 전략 시뮬 게임 같은 것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전략적인 사고, 빠른 판단력, 민첩한 행동 모두 중요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폼'이다. 즉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의 시뮬성, 현실감이다. 예를 들어 전장(戰場)을 배경으로 한 전략 시뮬 게임에서 헤드셋을 쓰고, 분대장의 지휘를 받고, 서로 무선교환을 하며 진지하게 게임에 임하는 것. 그런 게임을 전혀 좋아하지 않거나, 겉에서 단순하게 볼 때는 그것은 그저 바보 같아 보이는 개폼일 뿐이다. 그러나 그 게임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은 적을 잘 조준해 총을 쏘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하다. 그 실제의 전장에 있는 것 같은 시뮬성, 아우라, 폼을 느껴보는 것. (예를 들어 바로 그런 것을 위해서, 스타크래프트 중계를 하는 사람들이 마치 실제의 전쟁인 것처럼 그렇게 피를 토하고, 게임에 임하는 게이머들에게 우주복처럼 생긴 옷을 입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단순히 '게임을 잘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그 옷은 도리어 불편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뮬, 아우라, 신화화를 덧붙이는 것은, 그것에 사람들을 빠져들게 하려면, 다른 말로 해서 고도로 '상품화'하려면 필수적이다.) <드라이브>도 비슷한 전략을 쓴다. 그 폼을 지속적으로 관객들에게 주입시켜, 영화 속 어떤 것들을 거의 체험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것. 영화의 첫 장면, 카메라는 드라이버(라이언 고슬링)의 시점에 맞추어져 있다. (이것은 예를 들어 영화 <아저씨>에서 원빈이 "내일만 사는...' 하는 유명한 대사를 하는 장면과 비교된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운전하는 원빈을 정면으로 잡는다. 이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그 멋있는 대사를 내뱉는 원빈의 얼굴을 잡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운전하는 라이언 고슬링을 정면으로 잡는 시점은 제한적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그 차에 타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라이언 고슬링의 얼굴을 정면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수정 주: 2-3개의 정면샷은 거의 라이언 고슬링의 얼굴을 반쯤 가리고 눈깜빡할 사이 지나가버린다. 반면 원빈의 정면샷은 조명의 도움을 받고, 길게 지속된다.)) 경찰 무선과 농구 중계를 동시에 틀어놓고, 드라이버는 운전대를 잡고 5분의 시간 안에 '일'을 마치고 의뢰인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5분이 거의 다 되어, 그들이 나오고 경찰의 추격을 받기 시작하는 순간, 영화의 모든 관객들은 드라이버와 같이 경찰의 추격을 따돌려야 하는 입장이 된다. 도로에서의 경찰의 추격을 따돌리는 전략 시뮬 게임. 자 이제 어떤 전략으로 추격을 따돌릴 것인가. 물론 드라이버는 멋지게 미션을 클리어하고, 곧이어 환상적인 음악과 함께 제목이 스크린에 떠오른다. (아마도 상당수의 관객은 여기에서부터 입이 떡 벌어졌을 것이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영화적인 체험', 말 그대로 영화로 느낄 수 있는 것의 극대로구나!)

 

 

 

 

그러나 영화가 흥미로워지는 것은 한편으로 이 이후이다. 대부분의 시뮬이 그 시뮬성을 자연스럽게 중화시켜 그 시뮬을 현실에서 체험하는 데에서 느끼는 모순을 최대한 덜 인식도록 하는 데에 비해, 이 영화는 그 시뮬성을 거의 의도적으로 드러내보이기 때문이다. 즉 이것은 시뮬을 이야기하는 시뮬레이션, 일종의 메타 시뮬이 된다. 그것은 영화 속에서 지속적으로 드러나는데, 예를 들어 라디오 속 농구 중계가 현실의 농구 경기장으로 이어지는 아까 말한 처음의 장면도 그러하거니와, 주인공의 직업을 스턴트맨이라고 하면서 그에게 가면을 쓰도록 하거나, 버니와 같은 영화제작자를 등장시키는 것이 그러하다. 영화 속에서 스턴트맨으로서 가면을 쓰고 (주인공 대역으로서) 가상 영화의 스턴트를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시뮬 속의 시뮬이며, 동시에 영화라는 것이야말로 그 시뮬을 지속적으로 되풀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주인공의 최후의 액션이 그의 그림자로 보여지는 것이 이것의 일종의 상징은 아닐까. 그림자야말로 우리 가까이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시뮬이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당신이 손으로 '그림자 개'를 만든 경험을 떠올려 본다면 말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다른 것을 연상하게끔 하도록 한다. 이 주인공의 기이한 무표정들과 대사를 처리하는 방식들이 불러오는 이상한 SF의 뉘앙스들 말이다. 마치 우리가 시뮬로 만들어진 가상의 캐릭터를 볼 때에 오는 이상한 착각. 예를 들어 마지막 주인공이 그러한 공격을 받고도, 별 충격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것은 이상하게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으며, 도리어 일종의 해피엔딩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마치 게임의 가상 캐릭터가 죽어도 다시 돈을 넣으면, 다음 게임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따라서 이 영화를 누아르로 보기에도 뭔가 꺼림칙한 부분이 있다. 누아르라면 주인공의 비극적인 파멸이 뒤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영화 전체적으로의 보여지는 '시뮬임을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시뮬레이션'은 단순히 몇 장면만으로 이야기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니콜라스 윈딩 레픈은 기이한 모순의 화법을 쓴다. 시뮬레이션은 결국 모순적인 성격을 지닌 것, 즉 최대한 현실에 가깝게 만들어져야만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현실이 아님을 그 시뮬을 행하는 자들에게 최후에는 인식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시뮬레이션 속의 시뮬성을 드러내는 방법은 그것이 가진 기이한 모순성을 자꾸 끄집어내어 관객들에게 인식시키는 방법이다. 위의 김도훈의 말을 다시 가져와 본다면, 이 영화는 분명 개폼의 영화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개폼임을 지극히 잘 알고 있는, "나 개폼 맞아. 그러니 이 개폼을 더 잘 보도록 해"라고 하며, 자꾸만 드러내는 개폼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좋은 개폼이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또 다른 문제라고 하겠다.) 그것은 장병원이 리뷰에서 말한(<씨네 21> 830호 전영객잔) 신화적 세계의 히어로가 가질 수 밖에 없는 경계의 모순, 즉 인간에 가까운 내면과 초인에 가까운 외면이 보여주는 모순이 이 주인공 캐릭터에 투영되어 있다는 사실로도 나타나고, 로맨스와 극도의 폭력이 결합된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뇌리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 엘리베이터 씬에서도 나타나지만, 한편으로는 영화 속에서 시종일관 깔리는 아름답고 환상적인 80년대 레트로 풍의 음악과 이 긴장감을 자아내는 폭력적인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는 화면들과의 불균질한 매치로서 보여지기도 한다.

 

그 음악들 중 처음 주인공 드라이버와 아이린(캐리 멀리건)과 아이가 차로 드라이브를 하는 장면과 나중에 영화 후반부에 다시 한 번 흐르던 'A Real Hero'라는 아름다운 음악이 있다. 그 반복되는 후렴구 "Real human being and a real hero". 가사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리얼의 인간과 리얼의 영웅. 진정한 인간만이 진정한 영웅이 될 수 있다. 시뮬레이션 속 가상의 드라이버는 리얼한 'Human Being'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그는 리얼한 'Human Being'은 아닐지라도 리얼한 'Hero'였다. 캐릭터는 떠나갔지만, 나는 다시 동전을 집어 넣고 스타트 버튼을 누른다. 게임 속 캐릭터는 결코 죽지 않으니까. 이게 바로 게임이라고. 아니, 이게 바로 영화라고.

 

 

덧.

 

누군가가 올해의 가장 멋진 영화가 <드라이브>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뭐 그럴 수도...라고 하겠지만, 누군가가 올해의 가장 멋진 캐릭터가 이 영화 속 '드라이버'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화가 날 것 같다. 라이언 고슬링은 새로운 형태의 마초맨을 만들어냈다. 캐리 멀리건도 그 덕분에 아주 아름답게 나온다(상대역이 멋있어야 역할이 빛이 나는 법이니까). 라이언 고슬링에게 '올해의 캐릭터'를, 라이언 고슬링과 캐리 멀리건에게 '올해의 커플'을 내맘대로 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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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1-12-22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거 그냥 달리는 영화로 보이는데, 저는 스릴러를 가장 좋아하고 그담이 범죄나 공포고, 사실 액션도 고만고만/멜로나 드라마는 거의 안봤어요, 지금까진. 올해의 가장 멋진 영화가 될 수도 있을까요, 이 영화. 드라이버는, 제가 운전 자체를 못해서 논할만한 것도 못되고.. 아하! 영화음악은 맥거핀님을 떠올리며 볼 수도 있겠어요!^^

맥거핀 2011-12-23 12:05   좋아요 0 | URL
매우 추운 날, 잘 지내고 계신가요? 아..서울이 아니라서 좀 덜 추우실 수도 있겠네요. 서울은 이번 겨울들어 간만에 매우 추운 날씨. 아무 대비없이 밖에 나갔다가 귀가 떨어져나갈뻔..ㅎㅎ

사실 이 영화는 제목이 드라이브지만, 드라이브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은 아니구요. 뭐..개인적으로 멜로물로 볼 수도 있지 않나..생각됩니다. 저는 초반에 이 영화처럼 쭉 빨려들어가는 느낌은 간만이었어요. 거의 영화관에서 몸을 앞으로 빼고, 어...거리면서 봤지요. 나중에 기회가 되신다면 꼭 한 번쯤 보시는 게 어떨까 생각이 됩니다. 물론 영화음악도 좋구요.^^

Shining 2011-12-23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글 읽지 않았습니다!(당당히 말하기) 왜냐하면 저는 이 영화 언제라도 꼭 보고 말거니까요ㅠ 그러니까 이 글은 영화 본 후에 읽을래요, 그래도 되죠?^^ 얼핏 듣기만 해선 모르지만, 이 영화 왠지 완전 제 스트라이크존 같거든요. 보고말테야..라고 타오릅니다ㅋ

맥거핀 2011-12-23 12:08   좋아요 0 | URL
이 영화 카피가 `당신의 심장에 드라이브를 건다..` 뭐 그런거였던 거 같은데요. 네..드라이브 겁니다. 강력 회전 스핀 드라이버 뭐 그런거. 저 같은 경우는 영화 후반부보다 전반부가 훨씬 좋았던 것 같아요. 그 불안하고, 두근두근한 뭐 그런거. 영화 초반 30분까지는 거의 올해 영화 중 넘버원급이네요.

뭐 리뷰야 영화본 이후에 읽어주시는 게 저로서는 좋죠. 할 얘깃거리도 있구요. 영화를 안 본 분에게 아무리 얘기해봤자, 그거 뭐 결국 아저씨랑 똑같네..이런 소리밖에 못 듣죠. 대신 나중에 꼭 읽기로 합의합시다.-_-;

Shining 2011-12-24 14:12   좋아요 0 | URL
네, 합의할게요ㅋㅋ 영화 보고나서 꼭 읽겠습니다-_-*

2011-12-27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도무지 언제쯤 이 영화를 보게 될지 몰라서, 일단 읽었습니다.
대놓고, 끝까지, 개폼 잡는 영화. 그런 영화 좋아해요. 게다가 음악과 장면이 모두 아름다운 영화라면 더 좋아해요.
시뮬을 얘기하는 시뮬이라.. 어떤 영화일지 궁금해집니다. 관심 가졌으니, 언젠가 기회가 오겠지욧.^^

맥거핀 2011-12-28 12:50   좋아요 0 | URL
음..좋은 크리스마스를 보내셨는지, 괜찮은 연말을 보내고 계신지 궁금하네요. 언제쯤이 될지 모르지만 이 영화 꼭 한 번쯤 보셨으면 좋겠네요. 특히 더구나 개폼을 좋아하신다면 말입니다.^^ 이 영화는 뭐 개폼을 빼면 영화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정도니까요. 음악도 정말 좋구요.

ICE-9 2011-12-28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에게도 정말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멜빌의 `사무라이`를 강하게 연상시키기도 하더군요^ ^ 아무튼 올해의 발견이라 할 만한 영화에요.

맥거핀 2011-12-28 12:59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헤르메스님.^^ 평론가들이나 리뷰어들 사이에 멜빌의 그 작품을 비교하여 이야기하시는 분들이 조금 있더라구요. (저는 사실 그 영화를 보지 못해 할 말이 없지만요. 고전영화 잘 몰라요.;) 저도 올해의 베스트에 뒤늦게 넣어 봅니다. 초반부 몰입감이 상당했어요.

Shining 2012-02-20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약속대로 <드라이브> 보고 맥거핀님의 리뷰 읽었습니다-_-*
예상대로 제 스트라이크 존이었어요. 라이언 고슬링의 연기도, 캐리 멀리건의 샤방한 얼굴도 영화에 적합했다는 것에 동의하구요. 오오, 헤르메스 님의 댓글을 보니 멜빌의 <사무라이>를 떠올린 것이 엉뚱한 예측은 아니었군요.

그나저나, 저는 언제나 맥거핀님처럼 일관성있고 조리있게 글을 쓸까요(휴).

맥거핀 2012-02-21 00:02   좋아요 0 | URL
네..모두들 이렇게 Shining님처럼 약속을 잘 지킨다면, 우리 사회가 정말 따듯하고 아름다운 사회가 될텐데, 라는 국정홍보처스러운 뻘생각을 뜬금없이 해봅니다.

그쵸..이 영화 상당히 괜찮습니다. 처음에 음악이 깔리고, 제목이 화면에 떠오를 때 두근두근하지 않았나요? 여러 분들이 멜빌 영화를 이야기하시니 한번쯤 봐서, 저도 나중에 다른 영화 얘기할 때 써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Shining 2012-02-21 10:13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저 아이리시스님한테도 의지짱이란 소리 들었는데ㅋ
저는 공정하고 깨끗한 사회를 응원합니다-_-(이러기ㅋ)

맞아요, 두근두근하면서 뭔가 빠져드는 느낌. 엘리베이터신도 좋지만,
그래도 역시 이 영화의 백미는 오프닝+_+

맥거핀 2012-02-22 01:25   좋아요 0 | URL
요새도 오프닝에 깔렸던 음악을 가끔 듣고 있어요. 들을 때마다 뭔가 내가 그 영화의 주인공이 된 듯 기분이 묘해집니다. 이런 말은 오바인듯도 싶지만, 영화가 뭔가 아름다워요.
 
아멘 - Ame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영화의 내용이 글에 전반적으로 들어있습니다.)

 

 

 

나는 이제 김기덕의 새영화 <아멘>에 대해 악의적인 리뷰를 쓸 참이다. 물론 이 첫문장을 보고 당신이 머금었을 희미한 웃음을 짐작한다. 대체로 '악의적인 무엇인가를 하겠다'라고 말을 하는 자들일수록 그 악의라는 것과 가장 거리가 먼 자들이니까. 그렇다면 이것은 리뷰쓰기의 새로운 전략인가, 아마도 당신은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튼 나는 이 리뷰가 결국 악의적인 리뷰가 될 것임을 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이다. 먼저 첫 번째 이유는 나는 이 영화의 이야기들을 결국 '해석'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애정의 대상이지, 해석의 대상이 아니다. 해석이라는 것은 결국 잘게 나누어, 각각의 것을 본 다음, 그것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재조립하겠다는 것이다. 그 틈바구니에서 영화는 종종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되고, 누군가가 겨우 얻게된 마음의 안식이나 감동을 때로는 고스란히, 그리고 폭력적으로 앗아가버린다. 어떠한 경우에서든 해석이 애정의 우위를 점할 수는 없다. 두 번째 이유는 해석인데다가, 그것이 감독의 현재 주위를 둘러싼 어떤 일들에 기초한 해석이기 때문이다. 즉 이 해석은, 감독 김기덕에 대해 여러 매체를 통해 알게된 부정확한 사실들에 기초한 해석이다. 영화가 그 의도한 바와 다르게 스크린 외부의 어떤 것들에 의해 지배되며, 그 자장 안에서만 해석될 때, 영화는 때로 저열한 프로파간다가 되거나, 누군가의 이익을 위한 도구만이 된다. 물론 나는 이제와서, 지금 이런 시대에, 영화의 순수성 같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단지 한 영화가 그 영화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과 분리된 채, 그것을 보는 이에게 영화 외부의 어떤 것들만 끊임없이 환기시킨다면, 그것은 또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것이 슬픈 이유는 그것은 그 영화 자체의 내적인 존재목적을 묻게 하기 때문이다. 결국 다른 어떤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이 영화의 목적이었다면, 그 영화는 그런 형태의, 그런 내용일 이유가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 이 두 가지 이유를 들은 누군가는 그럼 이렇게 물을지도 모르겠다. 아, 그렇다면, 리뷰가 결국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면, 리뷰 자체를 아예 안쓰면 되지 않나. 그러나 나는 이런 식의 말도 안되는, 악의적인 리뷰라도 이 영화에게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뒤에서도 잠깐 이야기하겠지만, 결국 가장 잔인한 것은 무관심이며, 가장 잔악한 행동 중의 하나는 그 무관심을 무기로 휘두르려고 할 때일 것이므로. 그리고 한편으로 이 영화야말로 어떤 의미에서는 그 무관심의 무기에 맞고 비틀거리는 사람의 간곡한 호소일 것이므로.

 

감독 김기덕을 둘러싼 여러 소문들이 있었다. 폐인설도 있었고, 후배감독과의 불화설도 있었고, 계약이나 영화의 진행과도 관련한 여러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영화 <아리랑>이 세상에 나왔고, 그 영화의 특이한 형식과 내용을 둘러싸고도 여러 이야기들이 오갔다. (자세한 내용은 <씨네21> 832호에) 그리고 그 <아리랑>과 짝을 이룬다고 할 수 있는, <아리랑>이 병적 질문들로 가득한 영화라면, 그에 대한 종교적 치유물일 <아멘>이 연이어 공개되었다. <아멘>은 프랑스로 날아가고 있는 여자(김예나)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별로 이야기라 할만한 것은 없다. 이 여자는 파리에서부터 시작하여 베니스, 아비뇽 등 여러 곳곳에서 '이명수'라는 남자를 찾아다니는데, 이 '이명수'는 여자가 찾아가는 곳마다, 이미 어디론가로 떠나버린 후다. 이 영화는 그런 여자를 그저 건조하게 쫓아다닐 뿐인데, 사건이라 할 만한 것은 그 여자를 몰래 관찰하고 따라다니는 방독면을 쓰고, 군복을 입은 남자가 있다는 것이다(이 남자는 김기덕 자신이 연기하고 있다. 물론 계속 방독면을 쓰고 있기 때문에 얼굴을 확인할 길은 없지만, 뒷모습만으로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이 남자는 야간열차 안에서 이 여자가 자는 틈을 타서 이 여자를 강간하는데(이 장면은 직접적으로 제시되지는 않는다), 여자는 후에 선명한 두 줄의 임신선을 통해 자신의 임신 - 당신은 이제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라는 - 것을 알게 되고, 이 방독면을 쓴 남자는 여자에게 자신의 아이를 고향(한국)에 돌아가 낳아달라고, 자신은 자수를 하고 죗값을 치르겠다는 쪽지(아기신발과 군복에 쓴)를 보낸다. 그리고 낙태를 할 것 같아 보이던 여자는 결국 아이를 낳으려고 결심하는 것처럼 보이며 영화가 마무리된다.

 

물론 이러한 줄거리만 본 분들은 또 그런 (변태적인) 이야기인가..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김기덕의 영화세계에서 그렇게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고, 그간 해왔던 이야기에 비하면 그렇게 발전한 것도 없는 이야기처럼도 보인다. (초중반까지는 <나쁜 남자>의 프랑스 버전 같아 보이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현재 김기덕을 둘러싼 여러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 이야기가 조금은 다르게 읽히는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아리랑>의 연장선상에서, 이 여자와 방독면을 쓴 남자를 김기덕의 여러 다른 분신들로 보는 견해들이 있다. (사실 <아리랑>을 아직 보지는 않았지만) <아리랑>은 인간 김기덕과 감독 김기덕의 여러 분신들이 출몰(충돌)하는 영화라고 하니까. 그러나 <아리랑>을 건너뛴 입장에서 보면, 조금 더 단순하게 읽히는 측면도 있다. 군복을 입고, 방독면을 쓴 남자를 쓴 김기덕 자신이 연기하는 것으로 볼 때, 그가 김기덕을 상징하고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군복은 그간 김기덕 영화세계에서 주요한 클리셰들 중에 하나였고, 방독면은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간단하게 외부세계와의 차폐적 의미로, 현재 외부와 차단된 그의 자폐적 심리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의 영화세계에 대한 보호적인 측면으로는 보는 것이다. 방독면이라는 것은 결국 외부의 오염을 막기 위해 필요한 장비이기 때문이다. 즉 이미 오염된 것은 외부세계이고, 보호되어야 할 순수한 것은 그 방독면 안에 있는 것, 즉 김기덕의 영화세계이다.

 

이것을 기초로 하여 이 여성을 생각해 보면, 이 여성(김예나)은 한국의 영화인들, 평론가들, 관객들이다. 남자가 주위를 맴돌고 있으나, 결코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다가갈 때마다 거부반응을 보이는 이 여자는 왠지 한국의 관객들에 대한 김기덕의 비유로 읽힌다. 상징적으로 볼 때도, 후반부에 이 여자의 대한민국 여권을 클로즈업하는 불필요해 보이는 장면은 그런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이 여자에게 이 방독면을 쓴 남자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아이(작품)를 낳아주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작품이란 결국 감독 혼자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영화는 결국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남자는 기괴하게, 그리고 한편으로는 간곡하게 고향에 돌아가 아이를 낳아줄 것을, 즉 한국의 스크린들에 자신의 영화가 성황리에 받아들여지기를 고대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이것이 결국 잠든 여자에 대한 강간의 형식, 즉 여자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이 여자에게 조심스레 다가가려 애쓰면서, 자신의 물건 - 겉옷, 군복, 아기신발 - 들을 여자에게 전해주려 애쓴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이 여자가 찾아다니는 것은 오로지 '이명수'라는 실체를 알 수 없는 남자라는 것. 파리에도, 베니스에도, 아비뇽에도, 즉 유럽 어느 곳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남자. 여자는 돈이 떨어져 동냥을 하면서까지 이 실체없는 실체를 찾아다니고, 때로는 바보같아 보일 정도로, '이명수~!'라는 공허해보이는 외침을 내지른다. 이것이 바보같아 보이는 이유는 그 행동도 행동이지만, 이 때만큼은 유독 더 바보같은(즉 아주 단순해보이는) 컷들과 편집을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인데, 중간에 남자의 이름을 외치는 여자의 모습과 그녀의 외침이 가닿는 모습을 형상화하는 듯한 줌인컷을 번갈아 넣는 장면이 대표적이라 해야할 것이다. 즉 이 행동들은 바보같은 행동이라는 것이 결국 김기덕의 말인 셈인데, 그것은 두 가지 이유인 것처럼도 보인다. 즉 그것은 이 여자가 결국 한국의 관객들을 상징한다는 연장선상에서, 아직도 한국의 관객들은, 동냥을 하면서까지 프랑스의 실체 없는 실체만을 찾아다니는 여자가 상징하듯이 외부(국)의 영화적 권위와 영화적 자본에 길들여져 있다는 의미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화 후반부에 말해주는 것처럼 결국 이 '이명수'가 누구인지를 알아보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그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사실 기차로 지속되는 지금까지의 이 여행은 방독면을 쓴 남자가 준 돈으로 지탱되었다. 명확히 제시되지는 않지만, 동냥으로는 거의 돈이 모이지 않았고, 그 때마다 거금을 전해준 사람은 방독면을 쓴 남자였다. 이를 조금 더 악의적으로 말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우리의 영화계는 지금껏 베니스에서, 그리고 칸에서 통할 수 있는 '이명수'를 찾고, 지지를 모으기 위해 애썼지만, 역설적으로 해외에서 가장 인정받고, 지지를 받고, 우리 관객들을 조금이나마 그 베니스와 칸에 가깝게 데리고 간 것은 여자(관객)에게 그토록 외면받는 방독면을 쓴 남자 - 김기덕 감독인 것.)

 

영화 후반부, 여자가 애타게 찾아다니던 '이명수'가 결국 방독면을 쓴 남자일지 모른다는 암시가 제시된다. 그리고 여자는 (낙태를 위해) 병원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리고, 방독면을 쓴 남자는 경찰서로 향한다. 그리고 여자는 열차 안에서 남자의 방독면을 쓰고, 군복을 입고, 한참 후 그것을 홀연히 벗더니 카메라를 향해 스크린을 만들어 보인다. 결국 김기덕 감독이 바라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을까. 여자가 남자가 입었던 군복과 방독면을 쓰고 그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처럼, 한국의 관객들이 자신(김기덕 감독)의 영화세계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고. 자신이 이제 앞으로 만들어낼 새로운 스크린 앞으로 조금이라도 더 나와 주는 것. 여러 연이은 사건들로 인해 폐쇄된 자신을 조금이라도 끌어당겨줄 수 있는 사람은 결국 한국의 관객들밖에 없다는 그런 의미.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자신도 반성하고 새롭게 자신의 영화세계를 만들어 나가겠다는 것(경찰서로 걸어들어간 남자)은 아닐까.

 

그래서 나는 애타게 그의 새로운 영화가 보고 싶다. 인간 김기덕과 현재 그를 둘러싼 여러가지를 연상케 하는 영화, 그래서 악의적인 리뷰를 쓸 수 밖에 없게 하는 그런 영화보다도, 그가 만들어낼 새로운 세계, 현재의 모든 것을 넘어서 관객에게 충격을 안길 수 있는 새로운 세계의 영화를 보고 싶다. (마치 그의 첫 영화가 세상에 나왔을 때처럼 말이다. 그의 첫 영화는 충격적이었고, 많은 관객들을 기꺼이 그의 안티로 만들거나, 그의 추종자로 만들었다. 이 <아멘>에서 우려되는 점 중의 하나는 이 영화가 아직도 어떤 성(聖)으로서 간단한 봉합을 하려 든다는 점이다. 변성찬 평론가가 지적한 바대로 이 영화의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이 영화의 성당 씬과 관련된 부분들이다.)

 

 

 

덧.

 

<씨네21> 832호 김영진 평론가는 이 영화에 대한 반대평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들을 썼다. "예술의 살인적인 또는 자기 파괴적인 속성의 비유라는 것 외에 김기덕의 영화팬이 아니라면 이 영화를 볼 필요가 있을까(그런 면에서 이 영화를 정식 개봉하지 않은 것은 김기덕의 양심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평론가이기 전에 한 명의 관객으로서, 나는 <아리랑>과 <아멘>에서 김기덕이라는 예술가가 에고를 과시하고 투정부리는 것을 왜 봐야 하는지 모르겠다."

 

<평론가 매혈기>나 다른 여러 매체들에서 보여준, 김영진 평론가의 평소 영화에 대한 견해들을 즐겨 읽고 때로 공감을 느끼기도 했던 독자이나, 이러한 문장들에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영화로 밥을 벌어먹고 산다는 평론가의, 한 영화에 대한 무관심의 선동을 나는 받아들일 수도 없고, 이해하기도 힘들다. 영화의 세계에서, 누군가의 영화에 대한 무관심을 표할 것을 이렇게 언론매체에 대놓고 주장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휘둘러져서는 안될 무기이다. 그가 말했듯 한사람의 관객이기도 하지만, 그가 단순히 한 사람의 관객으로 읽는 이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그러니 이렇게 <씨네21>에도 '기고'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단순히 '관객의 입장에서' 여기에 기고를 한 것인가). 물론 '반대'는 당연히 가능하다. 그러나 '반대'와 '선동'은, 특히 '무관심에의 선동'은 단호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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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2 1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12 2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1-12-12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굉장히 좋은데요, 다른 분들은 어찌 말씀하실지 모르나 저는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제일 처음 제시한 두가지 기준이라면, 인간은 그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짜피 주관적 경험에 주관적 해석 아닙니까. 아무리 정확하고 객관적인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정확하고 객관적인지는 의문스럽습니다.

김기덕 감독을 좋아합니다만, 그를 보면 이번에 임재범 씨의 인터뷰가 생각납니다.
흔히 천재, 또는 재능있는 분들이 그렇습니다만.. 애정을 갈구하고 인정을 갈구하지만
자신이 있는 그대로, 무엇을 하든 사랑받기를 원하지 않나 싶습니다. 하지만 가끔 그것은 타인에 대한 터무니없는 오만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렇기에 훌륭한 작품이 나오는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영화인지 궁금하네요.. 일산에서는 이런 영화들 개봉 자체를 하지 않아요. ㅎ

맥거핀 2011-12-12 21:40   좋아요 0 | URL
아..감사합니다.^^ 물론 말씀하신 바대로 해석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해석이 객관적이라고 말해지는 순간 그 해석이야말로 가장 주의해야할 해석이겠지요. 다만, 저는 요즘의 어떤 해석들이 두려울 따름입니다. 수잔 손택의 말대로 해석이 지식인이 가하는 복수가 되어, 누군가의 감성, 예술적 감수성을 잡아먹을 때의 두려움이요. (김기덕의 영화도 그간 많은 해석가 - 특히 심리적 해석가 - 들에 의해 난도질되어, 거의 사이코들의 영화가 되어버린 측면도 있구요.) "비평의 기능은 예술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예술작품이 어떻게 예술작품이 됐는지, 더 나아가서는 예술작품은 예술작품일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여사의 말을 다시 되새겨봅니다.

예술가들이 종종 에고가 지나쳐 주위를 망가뜨리고, 더 나아가 자신마저 망가뜨리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의 경우 여러가지 벌어진 일들과 겹쳐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 같구요. 그의 이 영화가 그런 지나친 에고가 가득한 측면이 분명 있습니다만, <아리랑>이나 <아멘>은 조금 특수한 상황으로 보아야 할 듯 싶구요, 그의 다음 영화가 정말 눈이 번쩍 뜨일 좋은 작품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일산에도 좋은 영화들이 많이 상영하길 바라며..)

2011-12-13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진짜 김기덕 영화는 너무 드러내 놓거나 너무 절제하거나 였던 거 같아요. 근데 제가 좋아한 영화는 주로 절제한 쪽... (파란 대문이야말로 내가 젤 좋아할 듯도 한데, 안 봤으니까 패스~) 제가 좋아했던 것은 <빈 집>, <사마리아>,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사실 마지막 영화는 봤을 당시엔 앞의 것과 다름없이 좋았지만, 그 뒤에 기억에 남기론 앞의 두 영화가 더 좋아요.) <나쁜 영화>은 좀 힘든 설정들만 빼면 좋았고. <비몽>과 <파란대문>은 안 봐서 후회했고, <수취인불명>과 <섬>은 절대 못 볼 것 같고... <활>은 잘 모르겠고. <아멘>과 <아리랑>은 볼래야 볼 수가 없네요. 여튼 그가 맥거핀님 말씀대로 상처받기보단 좀 더 펼쳐나갔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김기덕 감독은 여러 모로 굉장히 연구대상, 흥미로운 분입니다.
그나저나 영화광인 맥거핀님께 자랑 하나 지르자면, 저 18일 (일)에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클로즈 업> + 관객과의 대화, 간답니다...으하하하ㅎ 맥거핀님이 젤 부러워해주실 듯 하여, 여기에다 자랑질...ㅋㅋㅋ

맥거핀 2011-12-13 22:12   좋아요 0 | URL
음..맞아요. 김기덕 감독에게 한국 최고의 감독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약간 주저되지만, 항상 최고의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감독임에는 틀림이 없지요(절대 빈정대는 말이 아니구요). 그만큼 스타성도 있는 감독이구요.
섬님의 댓글을 보고, 네이버가서 김기덕의 필모를 보면서 예전에 본 영화들을 생각해봤어요. 저는 <야생동물보호구역>이나 <실제상황>, <수취인불명> 같은 초기작이 좋았고 (나름)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이미지들도 그러했지만(진짜 몇 장면은 큰 스크린으로 보며 다리가 후들후들했던 기억이..), 그보다는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나, 될대로되라 식의 주인공 설정 등이 그랬었지요(그래서 아직도 조재현 씨 보면 지금 이미지들에 몰입되지가 않아요). 그 후에 <시간>이나 <빈 집> 같은 중간의 작품들을 봐도 처음만큼 새롭지는 않더라구요. 아무튼 김기덕 감독의 경우 보여줄 것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는 생각인데, 뭔가 괴물같은 충격적인 영화가 나왔으면 좋겠어요.

오..압바 감독이 한국에 왔군요. 몰랐어요. 하이...섬님께 미션 하나드리지요. 이란어로(한국어나 영어 안됨) 정곡을 찌르는 질문 하나 하시고 그 결과를 블로그에 알려주세요. 심통나서 드리는 말씀임!

2011-12-14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야생동물보호구역, 씨네21에서 20자평이나 리뷰를 보며, 진짜 설정 독특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네요. (아, 제목 격 안난 영화가 <실제상황>이군요. 이 영화는 좀 보고 싶어요..ㅎ)
전, 선점하는 스타일은 아닌가 봐요. 그니까 예를 들어 드라마도, 소문난 뒤에 5,6회부터 보는 스타일?! 그렇군요. 맥거핀님이 말한 초기작이 더 좋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모든 경험은 당대에 해야, 특히 영화는 개봉관에서 봐야 제 맛이니 이미 놓친 거지요.^^

여튼 한국의 다른 먹물 감독들과 비교할 수 없는 말그대로의 독특함이 있는 감독 맞아요. 다만 그것을 낳은 그의 `비범한` 인생이 그에게 남긴 상처도 있는 듯 합니다. 여배우들에 대한 소문(좀 비하인드로 들은 거라 믿을 만한 소식통이라 생각되는 소문..)도 그렇고, 그 외에도 관객이나 평론가, 아니 한국 사람들 전체에 대한 그의 거칠고도 솔직한 + 양가적인 모습에서도 그렇구요. 어쨌든, 다른 무엇보다 `볼 가치가 있는 영화`로 말을 하는 사람이니 한국영화계의 소중한 사람은 맞지요...
(그는 진짜 `궁금해지는` 인물인지라, 정성일이 엮은 <김기덕, 야생 혹은 속죄양>이란 책을 읽게 되더군요. 읽은 결과는, 역시나 대단히 흥미로운 사람이구나.였지요.)

맥거핀 님의 미션에서 힌트 하나 얻었네요. 이란어 인사 하나 공부하고 + 뇌리를 파고드는 예리한 질문 하나 던져서, 압바 감독님께 잊지 못할 추억 하나 남겨드릴까요? 결과 인증은 압바감독님과 제가 함께 있는 사진으로 대신하고용. 으흐흐흐흐흐 (사실 적극성 결핍증이 있어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만. 둘 다.)

맥거핀 2011-12-14 23:24   좋아요 0 | URL
저는 키노였던가, 씨네21이었던가에서 계속 문제적 감독이니 어쩌니 논쟁들이 붙어서, 도대체 영화가 어떻길래..하고 처음에 김기덕을 접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실제상황>의 경우 옛 여친님이 주진모 씨 광팬이어서, 어쩔 수 없이..^^;) <수취인불명> 같은 경우는 정말 극장도 황량했는데, 영화는 그보다 훨씬 황량했었구요.

사실 김기덕에 대한 가십들은 별로 들은 바가 없습니다. 항간에는 엄청 순수한 사람이라고도 하고, 뭔가 이상하다는 얘기도 있는 걸로 아는데, 글쎄요. 사람을 가까이서 접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지요. 뭐 아무튼 감독은 작품으로 말하면 되니까요. 아주 큰 흠결이 있기 전에는 대체로 그의 작품이 좋으면 그를 지지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밑에 제가 글을 쓴 로버트 알트만 감독 같은 경우에도, 사생활 측면에 있어서는 많은 소문을 가지고 다녔지만, 뭐 영화가 저렇게나 좋다면야...)

그리고, 뭐 그럼 이젠 압바 님과 섬 님의 인증을 기다리면 되는 건가요? 뭐 인증은 안하시더라도, 압바 님이 해주신 좋은 얘기 있으면 전해주세요.^^
 
르 아브르 - Le Havre
영화
평점 :
현재상영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동화적인 기적, 혹은 (이 세상에 나올 수 없는) 기적적인 동화. 그러나 그 동화에 마음이 움직이질 않으니..기적은 스크린 위에만 있다고 (나는) 믿고싶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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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12-09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씨네큐브 1관과 2관의 분위기는 흡사 천국과 지옥이었다. 2관에서는 유머가 가득한 기적의 동화가 상영중이었고, 1관에서는 음울하고 세기말적이고 분열적인 수난극(혹은 수태고지극)이 상영중이었다. 한쪽은 사람들로 가득했고(맨 앞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을 정도로), 끊임없이 웃음이 넘쳐흘렀으며, 영화를 보고서는 훈훈한 정담이 쏟아져나왔고, 무엇보다도 따뜻했다. 그보다 훨씬 넓은 다른 한쪽에서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표정들은 굳어있었으며, 어떤 아저씨는 영화가 마친 후 이상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이거 돌아이 아니냐는(유 헤드 빙빙) 포즈를 지어보였고, 무엇보다도 너무나 추웠다. 지독스럽게 추웠다. 그러나 참 이상하게도, 나는 도리어 따듯한 천국을 지나고 나와, 그 추운 지옥에서 이상한 마음의 평안을 얻었으니............................................변태인가.

아이리시스 2011-12-09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저라면 1관에..^^ 따뜻이고 뭐고 방 구들장에서 군고구마랑 찐빵, 오뎅탕 같은 거 먹으면서 영화 보는게 제일 기적스럽다니까요, 히히.

그럼 저도 변태인가.. 그러니까 맥거핀님은 2관에 갔다가 실망하신 거 맞죠?

맥거핀 2011-12-10 00:41   좋아요 0 | URL
괜히 꼬아서 썼네요.(이렇게 문장을 써서 안된다는 전형적인 문장되시겠습니다.;;)
영화를 보기전에 생각했어요. 예정은 2관의 <르아브르> 이후에 1관의 <아멘>이었는데, 이걸 순서를 바꿔야 하는 거 아닐까. <아멘>으로 뭔가 시험에 든 다음, <르아브르>로 깨끗하게 치유, 뭐 이런 식으로요. 그런데 그렇게 하기에는 여러가지 고려했을 때 도저히 시간을 맞출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일종의 "각오"를 하고, 두 편의 영화를 봤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2관의 따스한 관객들 사이에서 외톨이가 되어 "아..나만 이 영화가 썩 와닿지 않는걸까"하고 생각하다가, 1관에서 예상치 못하게 "그래도 영화라는 게 있어서 다행이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네, 단지 그런 이야기일 뿐이죠.^^

2011-12-09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맥거핀 님같은 관객이 있어서, 1관 수태고지극의 감독이 위안과 희망을 얻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빨리 `수태고지극` 리뷰를 올려 주세요! ^^

맥거핀 2011-12-10 00:45   좋아요 0 | URL
네..가능하면 열심히, 별거는 없겠지만, 리뷰를 남겨보겠습니다. 영화를 보고나니, 1관의 감독(김기덕 감독)이 얼마나 "자신의 영화를 보아줄 누군가"를 열망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은 알겠어요. 그러니 섬님도 여력이 되신다면 언젠가 관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