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 - The Yellow Sea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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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추격자>, <부당거래>에 대한 스포가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영화를 본 이후에 질문이 넘쳐나는 경향들이 있는 것 같다. 물론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게 하는 영화보다 질문이 많아지는 영화는 좋은 영화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질문이 "누가 누구를 왜 죽였어요?"와 같은 류의 질문들이라면, 그것에 대해 조금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질문이 가지는 무시무시함은 차치해 두고라도, 그것은 한편으로는 관객을 충분히 이해시키고 있지 못하다는, 즉 어떤 의미에서는 이야기로서 어떤 허점을 담고 있다는 의미도 되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이 이상해보이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것은 사실 이런 류의 상당수 이야기들이 '꼭 그래야만 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이런 류의 이야기들은 한편으로는 상당히 단순한 이야기의 기본축을 가지고 있다. 그 단순한 이야기 축의 빈틈을 이 영화들은 이상한 방식으로 메운다. 즉 이야기의 중간에 특정한 정보를 의도적으로 누락시키거나, 앞 뒤의 이야기들을 필요 이상으로 혼재시키는 방법을 택함으로서, 짐짓 복잡한 척 한다. 인물들은 평면적이 되고, 그 반면에 인물들간의 관계는 감추어진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이 영화들은 전혀 필요하지 않지만, 빈 틈들을 감추기 위한 목적으로 관객과 두뇌 게임을 벌인다.

이것은 분명 최근의 경향들이다. 그런데 이 경향에는 한편으로는 관객과 이 영화들의 어떤 '결탁'이 엿보이는 것 같다. 요즘의 관객들은, 참으로 이상하게도, 본인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야기들을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본인이 전체적으로 숨 고르며 잘 이해할 수 있는 영화는 '식상하다' 여기고, 짐짓 복잡한 체 하는 영화들을, 사실은 거의 잘 이해하지도 못했으면서, 좋은 스토리텔링이라고 말한다. 글쎄.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앞 뒤를 툭 잘라 버리고, 이야기의 결락들을 일부러 내비치는 영화들이 좋은 이야기들일까. 관객과 필요하지 않은 두뇌 게임을 벌이고, 결국에는 어리둥절해 하며 영화관을 나선 후 인터넷에 질문을 올리게 하는 영화들이 좋은 영화들일까. 맥락은 좀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정성일 씨도 트위터에 이러한 경향들에 대해서 짧은 멘션을 남겼다. "지난 일년 동안 본 한국영화의 특징은 장르 불문하고 <본> 시리즈의 아류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방법이 눈을 홀리기는 한다. 특징은 보고나면 뭐가 뭔지 알수가 없다는 점이다."

<황해>를 본 후 그 리뷰들이 궁금해서, 인터넷에 '황해'라고 검색어를 넣으니, 친절하게도 '황해 결말', '황해 줄거리'를 찾아볼 것을 권한다. 그만큼 <황해>의 황량한 결말의 의미나, 줄거리의 의문점들을 찾아보려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뜻일게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어쩌면 요즘 시나리오 작가들은 그런 식으로 시나리오 쓰는 방법들을 열심히 배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관객의 머리 속을 최대한 복잡하게 만들어서 관객에게 그 영화의 정보를 열심히 찾아보게 하고, 다시 그것을 확대 재생산 하게 만드는 것이 영화의 홍보에는 결정적인 힘이 될 테니까. 그러나 <황해>에 대해서 그런 질문을 하게 하고, 정답을 알게 하는 것은, 다른 결에서 참 딱한 일이다. 왜냐하면 <황해>의 이야기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되면 될수록, 그 결말에 대해서 더욱 생각해보게 되면 될 수록 그 영화를 보고나온 관객은 더 황량해지기 때문이다. (당신이 영화를 보고 나온 후 바로 모든 것의 의미를 깨달았건, 혹은 영화를 보고 나온 후 인터넷에서 확인해보고 알았건 간에) 이제 우리는 알고 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어떤 치정극임을, 아주 작은 것들이 확대되어 결국 이 같은 결말을 낳았음을, 구남(하정우)의 사투는 아무 것도 다시 황해를 넘어 가져오지 못했음을 말이다. 2시간 30분이 넘는 사투 끝에 얻은 이 황량한 결말들.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이 빈 껍데기들. 흘러넘치는 피와 사라져버린 육체들.

특히 아내의 귀환이 이루어지는 이 결말은 조금은 이상해보인다. 구남의 환상일 수도 있지만, 그것을 실제라고 생각하지 않고서는 영화 속 몇몇 장면들의 잉여를 설명할 방도가 없다. 그러나 이것을 실제라고 생각한다면, 이 결말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씨네 21>의 안시환의 평(no. 786 전영객잔)에서는 이를 구남에 대한 감독 나홍진의 최대한의 배려라 했지만, 동의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이 마지막은 구남이 절대 알 수 없는, 즉 구남과 완전히 유리된 사건이며, 구남이 혹시 그것을 바랬다고 해도, 그것은 구남에게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연결은 조금 수상쩍은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그 아내의 귀환은 구남이 죽어 황해로 던져진 이후에 바로 연결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 아내의 유골함과 같이 말이다. 이 씁쓸한 결말은 무엇을 노린 것인가.

사실 이 장면은 명백하게도 관객에게만 보여지기 위한 장면이다. 죽을 때까지 구남은 몰랐지만, 관객은 한 가지 사실을 더 알게 된 채로 영화관을 나선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 결말은 이야기의 흐름으로 봐서는 거의 다른 장면들과 분리된 이질적인 장면이다. 즉 이야기의 흐름으로는 여기에 존재하고 있을 이유가 없다. 그것이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관객에게 보여지기 위함이다. 구남에게는 혹시 위로일 수도 있겠지만 관객에게는 그것은 가혹한 결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관객을 참으로 안타깝게 만들기 때문이다. 구남이 애당초 면가(김윤석)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아무 것도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이 죽음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죽음이란 말인가. 그 아이러니와 가혹함 속으로 이 결말은 관객을 몰아넣는다. 즉 이 결말이 필요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관객을 당혹함의 늪으로, 가혹함의 늪으로 빠뜨리는 것이다. (그래서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 <부당거래>에서 살인범 이동석이 진짜 살인범이라고 밝혀지던 장면과도 유사해 보인다. 왜냐하면 이 장면 역시도, 전체 이야기의 흐름에서는 상당히 이질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당혹함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가혹함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를 일종의 관객에 대한 가학(苛虐)이라고 부르고 싶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마지막 장면들은 구남에게 이어져 있던 관객의 심리적 정서를 마지막으로 확실하게 끊어버리는 기능을 한다. 즉 관객은 결론적으로는 아무 것에도 동의하지 못한채로 황량한 마음을 안고 영화관을 나서게 된다. 영화가 중반을 넘어서며, 점점 구남의 처절한 사투를 보는 것은 관객들에게도 힘겨운 일이 된다. 그래도 버틸 수 있는 것은, 그것에는 구남의 사투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남이 목숨이나마 부지해 살아돌아가는 것이며, 아내의 유골이라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구남을 황해에 수장시키고, 아내를 살려 돌아오게 함으로써, 구남의 사투는 의미가 없어진다(즉 구남의 사투와 별개로 아내의 귀환은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 결말은 확실히 관객에게 가학적이다. 이 가학적인 결말은 몇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하나는 이 영화의 물리적인 의미에서의 가학성이다. 이 영화가 조금은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영화의 초중반에 쌓은 정서를 후반부에 가서는 스스로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정서가 무너진다기 보다는 아예 사라져 버린다. 초중반부에 쌓은 그 정서란 역동적이고, 이질적인 것이며, 동시에 한 남자의 비극적인 드라마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를 한 줄로 요약하라면 영화의 4개의 챕터 제목을 연결하면 된다. '조선족' '택시운전수'는 '황해'를 건너 '살인자'가 된다(그러나 사실 이 제목의 기능은 관객의 이질감을 높여주는 기능만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제목 밑의 그 중국어 간체자 말이다). 이것이 이 영화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그리고 이 핵심적인 이야기를 한 후부터 영화는 표정을 바꾸어 모든 것을 깡그리 없애고, 텅 비게 만든다. 그리고 동시에 모든 정서를 없애고, 피와 뼈의 세계로 달려간다. 이후부터 이야기는 오로지 살인 장면들을 어떻게 하면 많이 보여줄 수 있는가라는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이 장면들이 가학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이동진의 말대로 장르적 제스처가 제거되어 있는 데에 한 가지 이유가 있다. 그러나 다른 이유는, 한편으로는 그런 장면들이 너무 많기도 하거니와(예를 들어 구남이 김승현을 죽이는 시뮬레이션을 실제의 장면처럼 만들어 관객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을까), 동시에 거의 숨돌림 틈이 없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무래도 감독의 전작 <추격자>와 비교를 하게 만든다. <추격자>에도 몇몇 가학적인 장면들이 있지만, <황해>보다 심리적 타격이 적은 것은, 호흡을 위한 장면들이 있기 때문이다. <추격자>에서 그런 기능을 맡고 있는 것은 김윤석과 여자아이가 만들어내는 장면들인데, 이 <황해>에는 그런 기능을 맡고 있는 장면들이 거의 없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나홍진 감독이 가지는 특유의 어떤 세련함이다. <황해> 및 <추격자>의 액션 장면들은 에너지가 넘친다기 보다는, 잘 세공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며, 뜨겁다기 보다는 차가운 인상을 준다. 즉 이 장면들은 면밀하게 계산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며, 어딘가모르게 매끈하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이런 표현을 써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심지어 어떤 예술가의 활동처럼 보이게 하는 측면까지 있으며 그 자체로서 아주 잘 꾸며져 있다. 즉 역으로 말해서 이 장면들을 위해 나머지 이야기들이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것은 예를 들어 그 유명한 <추격자>의 '개미슈퍼' 씬을 떠올리게 한다. 그 씬은 사실 그렇게까지 표현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나홍진은 기꺼이 그 장면을 스토리의 결함이 생겨나는 데도 집어넣었고, 그런 방식으로(냉소하는 지영민의 얼굴에 예술적으로 느리게 뿌려지는 피들) 찍었다. 그 장면에 대한 허문영의 글을 조금 길긴 하지만 인용한다. 이 글에는 한 가지 힌트가 있다.

   
  이 시퀀스는 그냥 지나치기 힘든 우연과 작위들이 갑자기 출몰해, 그 시점까지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던 서사의 물줄기가 갑자기 탁한 웅덩이에 갇혀버린듯한 느낌을 준다. 여기에 명백한 몇 가지 우연이 있다. 왜 하필이면 그때 지영민은 담배가 떨어졌을까, 또 왜 하필이면 그때 출동 명령을 받은 형사들은 차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을까. 물론 미진은 하필이면 그 직전에 밧줄을 풀어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이 가게에 도착해 있다. 게다가 그녀는 상처투성이의 몸인데도 왜 가게 여주인에게 경찰 신고만 부탁하고 119를 부르지 않았을까. (중략)

문제는 그다음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이상한 장면이 이어진다. 지영민은 가게 여주인과 미진을 죽인 뒤 집으로 간다. 그런데 그냥 가지 않았다. 몇 장면 뒤에 드러나지만 그는 미진의 시체를 들고 갔다. (중략)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이 대목을 납득하기 힘들다. 지영민은 미행 사실을 느끼고 있으며, 심지어 가게 여주인으로부터 "경찰에 연락한 지 한참 됐다."는 말을 들었다. 경찰이 언제 도착할지, 그리고 미행하던 형사가 어떻게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두 여인을 죽인 뒤에, 피범벅이 된 채로 피가 줄줄 흐르는 한 여인의 시체와 함께 창문을 넘었고, 그 시체를 들고 주택가 골목을 걸어갔다. 그가 개미슈퍼에서 미진의 머리와 손을 잘랐다면 그건 더 위험천만한 일이 될 것이다.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중략)

이 시퀀스의 결과는 미진의 불운한 죽음이다. 미진은 피투성이가 되어 천신만고 끝에 탈출하지만 여러 '하필이면'이 중첩된 그 시공간에 살인귀를 다시 만나, 다섯 번의 망치질 끝에 비참하게 죽었고 그녀의 잘려나간 시신은 '화려하게' 전시된다. 꼭 그래야 했을까? (중략)

실제로 <씨네 21>이 개최한 한 시사회에서 한 관객이 그렇게 물었다. 나홍진 감독의 대답은 놀랍게도 "그렇다"였다. 그는 "밝은 대낮에 평화로운 주택가에서 한 여자가 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 영화의 시작이었다"고 대답했다. 물론 그가 말하는 '시작'은 이야기상의 시작이 아니라 구상의 시작이며, 이야기 상으로는 결말부에 해당된다. 그러니까 결말은 정해져 있었고, 우리는 헛된 기대에 이끌려 중호와 함께 밤거리를 헐떡거리며 달려온 것이다. 하지만 혹시 우리의 기대와 달리 그녀가 죽은 게 아니라, 오히려 그녀의 죽음이 우리가 말하지 않은 마음속 기대를 충족시키는 건 아닐까?

- 허문영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 p.34-36. 부분발췌.
 
   


가학에 대응하는 방법은 무감(無感)해지는 것이다. 즉 감각의 자극이 계속되면, 대부분의 인간은 그것에 대한 일종의 방어기제로 그 감각을 없애는 방법을 택한다. 예를 들어 그 하나의 전조. <황해>에서 구남이 어리숙한 조선족들에게 습격을 받는 장면이 있는데, 그 중 한 조선족 사내가 구남의 기에 눌려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다가 떨어져 죽는 씬이 있다. 그 남자가 떨어질 때의 관객의 짧은 웃음과 떨어진 그 남자를 보여줄 때 관객에게서 흘러나오는 '어'하는 소리. 그 '어'하는 소리는 왠지 TV예능 프로그램의 방청객들이 안좋은 장면이 나올 때 내는 즉각적이고도, 만들어진 놀람과 닮았다. 그 짧은 웃음과 짧고도 기계적인 놀람. 우리들은 그렇게 연이은 죽음들에 눈살을 찌푸리고, 탄성을 보내고, 웃기도 하고,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기도 하다가, 종내에는 무감해진다. 그 무감은 어쩌면, 우리의 기대가 이미 충분히 충족되었다는 신호의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2시간 30분 동안 감독의 가학에 시달리게 하고, 종내에는 가학에 무감하게 만드는 이 영화를 좋은 영화라 불러야 할까. 글의 처음에 말한, 영화관을 나온 관객들이 "누가 누구를 왜 죽였어요?"와 같은 질문을 하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그 질문 참, 무시무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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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의 시작 부분에 구남의 나레이션이 있다. 그 대강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개병이 돌아 개들이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물어 죽여, 결국 사람들이 개들을 땅에 묻었는데, 나중에 사람들이 그 시체를 땅에서 다시 꺼내 먹었다.' 그것은 <황해>의 내용을 줄여서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은 미친 개들의 먹이가 되고(이 영화 <황해>에도 개의 먹이가 되는 인간이 있다), 개는 다시 (개에 물려서, 혹은 굶주림에) 미쳐버린 인간들의 먹이가 된다. 미쳐버린 인간들이란, 곧 괴물이다. 그러니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인간은 개의 먹이가 되고, 개는 괴물의 먹이가 되고, 괴물은 무엇의 먹이가 되는가.

그러나 이 나레이션은 이 <황해>의 내용만을 설명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왠지 요즘의 한국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요즘의 한국영화들은 이야기의 다른 무엇보다도 '무엇으로 인간을 죽일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 같다. 그것은 칼(<아저씨>)이기도 하고, 총(<무적자>)이기도 하며, 초능력(<초능력자>)이기도 하고, 된장(<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이기도 하고, 그로테스크한 장치(<악마를 보았다>)이기도 하며, 소뼈다귀(<황해>)이기도 하다. 그리고 인간을 죽이는 장치가 기발하게 진화하는 것의 반대편에 인간은 점점 괴물이 되어간다. 그러니 이제 아까의 질문에 지금의 한국영화들이 내놓는 답을 보자. 아까의 질문. 인간은 개의 먹이가 되고, 개는 괴물의 먹이가 되고, 괴물은 무엇의 먹이가 되는가. 정답: '다른 괴물'의 먹이가 된다. 그러니 그 먹이사슬의 가장 꼭대기에 올라가려면 인간이 괴물이 되는 수밖에 없다. 오늘의 한국영화들이 내놓는 무시무시한 대답.

2010년의 많은 한국영화들이 그런 대답을 해왔다. 괴물에 맞서기 위해 기꺼이 괴물이 되는 자들. <악마를 보았다>, <아저씨>, <부당거래>, <파괴된 사나이>, <무적자>, <초능력자>,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황해>.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수동적으로)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능동적으로) 괴물이 된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반영하는 것일까. 지금의 어떤 징후들일까. 2010년 풍경들은 이미 괴물이 된 자들과,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괴물이 되려는 자들로 넘쳐난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메시지들이 들려온다. 괴물이 되어라. 괴물이 되어서 다른 괴물들을 짓밟아라. 그 밑의 인간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건 이미 영화가 아니다. 우리 곁의 현실이다. 이것은 2010년의 징후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님을 기억할 필요도 있다. 누군가는 괴물이 되지 않으려 좋은 생각만 하자고 하였으며(<하하하>), 괴물 같은 세상에 맞서기 위해 필사적으로 기꺼이 자신의 몸에 불을 질렀으며(<하녀>), 또 괴물을 만들지 않기 위해, 스스로 괴물로 추락하지 않기 위해 눈물을 흘려가며 시를 썼다(<시>). 당신은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덧.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밑의 이야기를 길게 써보고 싶다. 2010년을 덮은 어떤 한국영화의 징후들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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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2011-01-04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포일러 주의라는 말에 본문은 읽지는 않았으니만 선추천여~~

맥거핀 2011-01-04 22:15   좋아요 0 | URL
추천 감사합니다. 영화를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안 읽으시는 것이 나을 겁니다.^^

2011-01-05 0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06 0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투어리스트 - The Tou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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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잇앤데이]의 남녀 바꿈 버전. 그래도 귀여운 구석은 좀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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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0-12-22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가 안 써지는지..?
 
더 콘서트 - The Conc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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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이하고 예상가능하지만, 마지막 차이코프스키의 선율 속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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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시크레토 : 비밀의 눈동자 - The Secret in Their Ey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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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보다도 인상적인 구도와 색감과 카메라 워킹. 특히 경기장 씬은 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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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네트워크 - The Social 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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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참 데이비드 핀처는 별 것도 아닌 이야기를 잘도 이렇게 흥미진진한 2시간의 이야기로 만드는구나, 라고 말이다. 사실 이 전체 이야기를 하나의 기업물로 보자면 흥미로운 구석은 있으나, 상당히 밋밋한 쪽에 가깝다. 어떤 하버드 천재가 소셜 네트워크 사이트를 만들어서 성공하나, 2개의 소송을 당한다, 라고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를 정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 간단한 한 줄로도 흥미롭기는 하다. 소셜 네트워크를 만들었으나, 실제의 소셜 네트워크는 실패하는 것이니까.) 그러나 감독 데이비드 핀처는 거의 신기에 가까운 솜씨로, 이야기를 버무려내며, 흥미를 지속적으로 유발시킴은 물론, 관객을 어떤 드라마틱한 깨달음의 경지에까지 이끌고 들어간다. 예를 들어 <부당거래>의 류승완이 아주 복잡한 이야기를 간단하고, 직선적으로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마법을 부린다면, <소셜 네트워크>의 데이비드 핀처는 아주 간단한 이야기를 복잡하고 풍성하고 철학적으로 만든달까.

그러나 사실 개인적으로 흥미를 느꼈던 부분은 어떤 기업의 성장과 위기를 보여주는 그런 부분들이 아니라,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세계, 그것의 어떤 관계들을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은 때로 매우 이질적인 것으로 비쳐지지만, 사실 그것은 매우 비슷하게 닮아 있다. '페이스북(Facebook)'이라는 것을 사용해 본 적이 없어서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영화 속에 있는 사실들만 놓고 보면 페이스북은 크게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배타성이다. 페이스북은 처음에 하버드 아이디를 가지고 있어야만 접속이 가능하도록 구성되었으며, 다른 대학들로 그 세력을 넓힌 후에도 이러한 성격은 비슷하게 유지된다(지금은 다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페이스북은 온라인 상에서 친구를 맺기 위해서는, 그리고 상대방의 일정 정도의 정보를 보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수락이 또한 있어야 한다. 이것은 한편으로 보면 우리나라의 '싸이월드'와도 조금은 닮은 점이 있다. 싸이월드 역시 일촌 관계는 상대방의 수락이 있어야 가능하며, 특정 정보를 가까운 사람에게만 공개하도록 설정할 수 있다. 즉 페이스북이나 싸이는 기본적으로 개방적이라기 보다는 폐쇄적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의 특징은 이러한 페이스북이나 싸이는 현실의 관계와도 거의 그대로 연결된다는 점이다. 싸이는 실명으로만 가입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고, 페이스북 역시 가명으로도 가입이 가능하지만 대체로 실명으로 가입할 것을 권유하고 있으며, 대체로 많은 사람들이 실명으로 가입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페이스북은 현실의 관계를 대체로 반영한다. 즉 많은 경우 현실에서의 인기인이 페이스북에서도 인기인이 된다. 즉 페이스북의 세계는 현실의 세계를 적극적으로 반영한 세계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하나의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것은 온라인은 오프라인의 권력 관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오프라인에서의 어떤 권력 관계는 흥미롭게 보여진다. 하버드대에 다니는 마크 주커버그(제시 아이젠버그)는 보스턴대에 다니는 여자친구를 의식적으로 무시한다. 그러나 또한 한편으로 마크는 하버드 내 엘리트 클럽에 들어가려고 하는 친구 왈도(앤드류 가필드)에게 신경질적인 심사를 은연중에 드러내기도 한다. 이는 한편으로 윈클보스 쌍둥이 형제와 마크와의 대비에서도 드러난다. 윈클보스 형제는 적어도 마크보다는 상당히 상류층으로 보이며, 잘생긴 외모에 스포츠맨으로서 교내에서 상당히 인기가 있어 보인다. 그런 반면 마크는 평소 컴퓨터만 가까이 하는, 거의 외톨이에 가깝다. 이것은 어떤 계급의 세계이고, 권력의 세계이다. 마크는 윈클보스 형제와 태생적으로 다르며, 왈도와 같이 상류층 클럽에 들어가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므로 마크가 다른 방식으로의 역전을 바라는 것은 필연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마크가 이를 역전하는 방식은 분명히 온라인을 이용하는 방식이지만, 그것은 온라인으로 평등한 세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온라인으로 또 하나의 권력 구조를 만들고 그가 이를 소유하는 방식, 혹은 그 권력 구조의 맨 꼭대기에 올라가는 방식이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페이스북의 세계 역시 오프라인의 권력을 거의 그대로 승계하고 있으며, 마크는 이를 창조한 일종의 신으로서 그 세계에 군림하며 이것은 다시 역으로 오프라인에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여자들은 마크가 그 온라인 세계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자, 거의 그에게 맹목적인 호감을 표현한다.

사실 이 여자들과 관련한 부분은 이 영화에서 조금은 이상하게 일그러져 있기도 하다. 그것은 명백하게 이러한 페이스북 자체가 어떤 또하나의 권력임을 보여주려는 의도인 것처럼 느껴진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이 재미있는 표현을 썼는데, 이 영화에서 여자들은 거의 일종의 '전리품처럼' 다루어지고 있다. 옛날 전쟁에서 승리한 장수들이 여자를 차지하는 것처럼, <소셜 네트워크> 속 여자들은 남자들의 권력 관계 속에서 아주 수동적인 위치에만 머무른다.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몇 가지 장면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열심히 헤드셋을 끼고 사이트를 관리하는 남자들 곁에서 여자들은 대형 스크린으로 게임에 몰두하는 장면들도 그러하거니와, 마크가 주위에 선 모든 남자들에게 여러 역할들을 지시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를 보여준다. 남자들과 같이 있는 여자들이 이 '미션'에서 자신의 역할을 묻자, 마크는 잘라 말한다. "없어!"



그러므로 여기에서 어떤 질문이 요구되는 것 같다. '페이스북'이라는 소셜 네트워크는 말 그대로 '새로운 사회적 관계망'을 탄생시키는가. 누구나 자유로운 상태에서 동등한 친구가 될 수 있는가. 데이비드 핀처의 대답은 아니오에 가까운 것 같다. 미안하게도 현실에서의 외톨이는 '페이스북'이라는 소셜 네트워크에서도 외톨이가 될 확률이 높다. 그것은 트위터 등의 개방형 소셜 네트워크나 블로그 등의 1인 미디어와 다른 페이스북만의 독특한 성격에도 기인하기도 하지만, 왠지 영화는 다른 것을 살짝 암시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은 이 온라인이라는 것의 근본적인 한계이다. 즉 현재로서는 가상 온라인에서의 체험은 실제의 체험을 결코 따라가지 못한다. 예를 들어 가상 세계에서 펼치는 게임이 아무리 발전한다고 해도 현실에서의 실제 체험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우리가 가상의 축구 게임에서 아무리 골을 집어넣는다고 해도, 그것이 실제의 축구 게임에서 골을 넣는 쾌감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우리가 아무리 온라인 세게에서 총격전 장면을 보고(하고) 일종의 스릴을 느낀다고 해도, 실제의 총격전을 보는(하는) 충격에 이를 비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가상의 세계에서 누군가와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고 해도, 오프라인에서 그 누군가와 만나서 하는 모든 것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우리는 이 모든 질문에 '아니오'라고 답할 수 밖에 없다.

즉 온라인이라는 것은 결국 하나의 대체제이다. 우리가 실제의 관계가 충분히 가능하다면, 굳이 온라인에서 관계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온라인에서의 관계는 실제의 관계에 종속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대체물이 살아남는 방법은 실제를 충실하게 모방하여 최대한 그 실제에 가까워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그를 벗어나고 싶어해도 온라인에서의 관계는 실제의 권력 관계를 충실하게 반영한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보자. 마크가 온라인에서의 관계망을 꿈꾸는 것은 여자친구와의 오프라인 관계가 실패로 돌아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였다. 만약 오프라인에서의 여자친구와의 관계가 잘 이루어졌고, 마크가 거의 외톨이에 가깝지 않았다면, 이 '페이스북'은 탄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것이 실패했기 때문에 일종의 대체물로서(처음의 '페이스매쉬'가 여자들을 '실제로 놓고' 비교해 보고 싶은 남자들의 권력에의 욕망을 '모방'했던 것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온라인망이 탄생했고, 이 온라인망은 현실의 권력 관계를 다시 반영하게 된 것이다.

온라인은 현실을 모방하려 하나, 그것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는 것, 그것은 여전히 오프라인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 이를 데이비드 핀처는 사실 몇 가지 흥미로운 장면으로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페이스북'이 퍼져나가고, 마크가 유명인사가 되는 것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페이스북 그 자신이기도 하지만, 여기에 교내 신문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교내신문에 페이스북이 보도되고, 마크가 그것의 창시자임이 알려지면서 마크는 단숨의 인기인의 경지에 오른다. 즉 이는 어떤 온라인보다 강력한 미디어 권력의 힘을 보여준다. 또한 데이비드 핀처는 재미있는 장면을 넣기도 한다. 윈클보스 형제의 조정 경기 장면. 이 장면들은 이상하게도 슬로우 화면으로 처리되고 있으며, 약동하는 근육의 꿈틀거림과 게임에서의 극적인 승리와 패배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는 내게는 마치 이것의 현실감을 의도적으로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다른 말로 하자면, 온라인에서의 조정 경기는 이와 비슷할 수는 있으나, 극적인 승리에의 쾌감은 만들어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온라인 조정 게임은 영원히 현실의 훌륭한 근육을 만들어낼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현실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마크는 처음부터 이를 의도했던 것일까. 즉 새로운 권력관계를 만들고, 그것에서 왕이 되고자 했던 것일까. 글쎄. 꼭 그랬던 것 같지는 않다. 마크는 처음에는 그저 순수한 호기심으로서, 그저 재미있는 것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의문으로부터 출발한 것에 가깝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그것이 그를 일종의 온라인 상의 권력자로 만들어 준 후부터 그는 조금씩 변모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이 바로 냅스터(Napster)를 만든 숀 파커(저스틴 팀버레이크)였다. 숀 파커는 온라인이 만들어낸 현실의 권력자로서 마크에게 일종의 역할모델이 되었다. 숀 파커와 가까워진 후부터 그는 새로운 세계의 왕이 되어 결국 5억 명의 온라인 친구를 만들어냈지만, 덕분에 가장 가까이에 있던 왈도를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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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제목인 <소셜 네트워크>는 그러므로 이제 조금은 다르게 보인다. 그것은 단순히 온라인의 '페이스북'을 의미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조금 더 넓은 오프라인까지 포괄한 사회적 관계망, 조금 더 좁게는 사회적 권력 관계를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마지막에는 나는 묻고 싶어진다. 온라인은 그렇다면 언제가 되어서야 이 사회적 권력을 극복할 수 있는가. 평등한 관계란, 모두가 친구되는 온라인 세계란 여전히 환상인가. 온라인은 결국 오프라인을 영원히 불완전하게 대체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인가. 데이비드 핀처는 이 영화 전체를 두 개의 거대한 소송으로 만드는 것으로 대답을 하고 있거니와 마지막에 살짝 양념을 뿌리고 있기도 하다. 여자 변호사의 충고를 받고(거의 유일하게 이 영화에 등장하는 수동적이지 않은 여성 캐릭터이다), 뭔가 깨달음을 얻은 마크는 예전의 여자친구 에리카에게 친구 신청을 하고는 반복적으로 새로고침을 한다.

이것은 희망적인 결말인가. 글쎄. 나는 별로 동의하지는 못하겠다. 이것이 조금은 희망적인 결말이 되려면 마크는 적어도 '페이스북'에서가 아니라 에리카에게 편지를 보내거나, 하다못해 전화를 하던가 했어야 했다. 권력자로서의 마크의 '페이스북'에서의 위치는 여전하기 때문이다. 조금은 희망적인 결론이 되려면 마크는 적어도 '페이스북'에서의 권력은 벗어나야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는 다음과 같은 맥락이 다른 질문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많은 온라인 소셜 네트워크들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고, 그들과 친구가 되게 만들지만, 과연 과거의 사람, 혹은 꼭 만나고 싶던 그 사람을 만나게 해줄 수 있을까. 지금은 어디론가로 사라져버린 그들은 무엇으로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그들과 다시 새로운 관계를 맺을 것인가. ('아이러브스쿨'이 망한 것은 알고 있다.....)

이 영화의 포스터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다. "5억명의 온라인 친구, 전세계 최연소 백만장자, 하버드 천재가 창조한 소셜 네트워크 혁명!" 그러나 나는 그저 묻고 싶다. 그것은 혁명입니까, 아니면 새로운 방식의 타락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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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0-12-10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11월달에 본 영화들인데, 왠지 밀린 숙제하는 기분으로 쓰고 있음...;;;

네오 2010-12-20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혁명과 타락, 아직 현재진행중이지 않을까여? 소셜네트워크를 좋아하는 핀쳐팬도 많지만, 저는 파이트 클럽의 핀처팬이라서 그냥 이 영화 밍밍하게 봤는데여^^;; 완전 아론 소킨의 영화였어여!!

맥거핀 2010-12-21 18:00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영화 상당히 괜찮게 봤어요. 개인적으로 올해 본 영화 중 베스트3를 꼽으라면, 이 영화도 한자리에 넣고 싶네요. 말씀하신대로 아론 소킨의 입김도 많이 들어간 것 같지만, 이런 스토리의 이런 내용의 영화를 이정도 퀄리티로 뽑을 수 있는 것은 핀처 감독이라서 가능한 것 같아요.

네오 2010-12-22 18:00   좋아요 0 | URL
아~다시 한번 봐야겠네여,,제가 놓친게 있을 겁니다..베스트3가 몹시도 궁금한,,저는 그냥 마구잡이로 넣어봤을 때 옥희의 영화, 엉클분미, 시리어스 맨인데여^^

맥거핀 2010-12-22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베스트3는 <소셜 네트워크>, <하하하>, <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