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 슬럼버 - Golden Slum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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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유일한 장점은 "원작도 이래?"라며, 원작을 찾아보게 만든다는 것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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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0-12-15 0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평이 엇갈리네요 ^^ 얼마전에 박중훈이 이 영화평을 주인장처럼 트위터에

소개해서 나름 곤욕(?)을 치른거 같은데 말이죠...

얼마나 엉망인지 궁금해지네요 ㅋ

맥거핀 2010-12-15 14:35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까..박중훈 씨가 어떤 평을 했는지 궁금해지는데요. 뭐 그렇다고 곤욕을 치르실 것까지야..;; (요즘에는 심지어는!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조심스러워지더라구요.)
나중에 관련된 평들을 좀 찾아보니, 이 영화는 원작소설을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들도 어느정도 평들이 갈리는 것 같더라구요. 아무래도 제가 소설을 읽지 않아서 그런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다이조부 2010-12-15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중훈도 주인장과 비슷한 평을 했던걸로 기억합니다 ㅎ
 
초능력자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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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결말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초능력자>가 며칠 전 200만을 돌파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생각보다는 그렇게 탄력있게 앞으로 나아가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개봉일에 최다관객수 신기록을 세웠다는 뉴스도 본 것 같은데, 아무래도 용두사미가 되어버린 것 같다. 곧 크리스마스도 다가오는데, 그 때까지 극장에 남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런데 이 영화 <초능력자>는 그대로 묻히기에는 사실 의외로 진중한 물음들을 던지고 있기도 하다. 강동원, 고수라는 꽃미남 배우들을 앞세운 그저그런 슈퍼히어로 영화로만 보기에는 그 질문들이 던지고 있는 깊이가 아쉽고, 그렇다고 좋은 영화로 보기에는 질문들에 대해 내놓은 해답들이 아쉽다. 그저 이래저래 아쉬운 영화이다.

그리고 이 영화 <초능력자>는 상당히 도식적인 영화이기도 하다. 초인(강동원)의 세계와 그에 맞서는 규남(고수)의 세계는 정확히 갈라져 있다. 초인이 사는 호텔방의 샤프한 세계와 규남이 사는 공간인 뒷골목의 허름한 세계는 그 자체로 대립적이다. 그리고 초인은 혼자서 사람들을 조종하는 것으로 대항하지만, 규남은 외국인 친구들과의 연대를 통해 초인에게 맞선다. 이를 한편으로는 초인은 자꾸 사회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규남은 자꾸 사회속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영화 초반의 이야기가 보여주듯이 초인은 사회에서 격리되어야 할 괴물과 같은 존재다. 그리고 동시에 초인 자신도 다른 사람들과의 연대를 그다지 원하지 않는 것처럼도 보인다. 반면 규남은 "나 유토피아 임 대리야!"라고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여 설명한다. 즉 규남이 원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유토피아의 임 대리로서, 즉 이 사회 안의 관계망의 일원으로서 보이는 것이다. 

이는 왠지 우리사회의 일면을 자꾸만 들여다보게 만든다. 예를 들어 초인의 초능력은 자꾸만 무엇인가를 연상하게 만든다. 타인의 생각을 조종하여 자신의 뜻대로 하게 만드는 것. 그것은 단순히 초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인가. 굳이 초능력을 쓰지 않더라도, 우리는 알게 모르게 많은 것들에 조종당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 대부분 아무것도 자각하지 못한다. 혹은 자각한다고 할지라도 그 감도는 아주 어렴풋하다. 그러므로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장면들도 있다. 초인과 규남의 지하철 대결 장면에서 초인의 초능력이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고, 규남은 쓰러진 후 겨우 기어서 지하철 벤치까지 오는데, 아무도 그를 돕는 사람은 없다. 모든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의 길을 바쁘게 갈 뿐이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작은 화면을 바라보며. 왠지 이 장면은 초인의 초능력이 사라진 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무엇인가에 조종당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초인에게 대항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CCTV가 자꾸 활용되고 있는 것도 재미있는 설정으로 보인다. '유토피아'에 설치된 CCTV는 물론, 규남과 친구들은 CCTV를 찾아 초인의 자취를 살펴보려 한다. 또한 규남과 초인의 경찰서 씬에서도 CCTV는 다시 한 번 등장한다. 조종하는 권력에 대한 대항물로서의 감시의 눈으로 CCTV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물론 규남이 CCTV에 의해 범인으로 지목되는 것처럼, CCTV는 기본적으로 권력 가까이에 있다.) 

한편으로는 규남의 친구들이 외국인들로 설정된 것이 흥미롭다. 이는 어떤 우연의 산물로만 보여지지는 않는데, 예를 들어 유토피아의 사장인 정식(변희봉)의 부인 역시 외국인으로 설정되어 있고 그들의 (혼혈인) 딸 영숙과 규남을 굳이 영화에서 묶는 것이 그 하나의 증거이며, 굳이 그 이름이 '유토피아'인 것이 또다른 증거이다. 즉 초인의 초능력에 맞서는 일종의 글로벌한 긍정적인 연대가 있는 셈이다. 이것 역시 우리사회의 어떤 일면을 말해주는 것일까. 아무도 그를 돕지 않는 규남 곁에 끝까지 남는 규남의 외국인 친구들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일까. 한편으로 이 장면들은 <괴물>에서 송강호와 외국인이 같이 괴물에 맞서던 초반 장면들을 생각나게 만들기도 하는데, 그와는 묘하게 다른 점들이 있다. 그것은 이 장면들에 흐르는 특유의 어떤 정서들이 한 몫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이들은 이어지는 몇 개의 코믹적인 에피소드를 통해 유대를 공고히 하고, 끝내는 그 공감을 관객에게까지 넓힌다. 즉 규남과 그 외국인 친구들이 만드는 연대는 물질적인 관계나 필요에 의해 이루어지는 관계가 아닌, 그저 우리네 보통 동네친구들이 보여주는 연대이고, 이들이 만드는 정서는 영화의 전체톤을 지배한다.

이런 대결의 장 속에 또다른 질문들이 있다. 그것은 일종의 변형된 슈퍼히어로물이라는 이 영화의 다른 부분들에 있다. 이 영화를 보고 <다크 나이트>를 떠올렸다는 분들이 있는데, 왜냐하면 이 영화가 <다크 나이트>와 비슷한 질문을 다른 방식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 초인은 계속하여 같은 논리로 규남을 밀어붙인다. 그것은 규남이 자꾸 문제를 크게 만들고 있다는 논리이다. (그리고 이 논리는 우리사회에서 보수신문들이 잘 쓰는 방식이기도 하다. 왜 시위(점거)를 해서 문제를 크게 만드는가? 그러니까 정부가(혹은 회사가) 강경대응을 할 수 밖에 없지 않는가?...) 어쩌면 초인의 말대로 규남이 굳이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연이은 사람들의 죽음은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크다. 초인은 그저 돈이나 훔쳐가는 데에 만족했을 것이고, 굳이 사람들을 죽여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즉 대응하는 선이 커지면 커질수록 악은 계속해서 커진다. 이것은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가 계속 배트맨을 압박하는 논리와 닮아 있고, 배트맨이 계속 고민하던 딜레마이기도 하다. 즉 자신의 존재가 도리어 조커를 계속 자극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자신이 이 사회에 존재하여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

그런 관점에서 보면 조커가 사회의 괴물이고, 도려내야 할 존재인 것처럼, 배트맨 역시 사회의 (다른 이름으로서의) 괴물이고, 언젠가 사라져야할 존재이다. <초능력자>에서 초인의 일종의 자포자기적인 삶도 궁극적으로는 여기에 이유가 있다. 그가 아무리 사회에서 조용히 살아가고자 해도, 그가 사회 속으로 스며든 순간 그의 괴물성은 필연적으로 드러날 것이고, 그는 사회에서 괴물로 축출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에 스스로 격리되어 지금처럼 살아가는 것, 아마도 그것이 초인이 할 수 있는 몇 가지 안되는 선택 중의 하나인 것이다. <초능력자>가 흥미로워 보였던 이유는 여기에 다른 대답을 던지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규남이 초인에게 이름을 묻는 것은, 그를 사회 속의 다른 개체들로, 즉 받아들일 수 있는 어떤 존재로서 본다는 것처럼 보였고, 초인이 머뭇거리는 순간 <다크 나이트>와는 다른 출구를 제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영화는 안전한 선택을 한다. 규남은 어느덧 배트맨이 되어버린 자신을 발견했다. 그건 좋지만, 아마도 그 순간부터 그도 배트맨처럼 자신의 운명에 대하여, 그 딜레마에 대하여 진지하게 숙고해야 될 것이다. 

지금은, 우리는 어떻게 괴물이 될 것인가를 물을 때보다는, 우리는 어떻게 인간이 될 것인가를 물을 때이다. 물론 후자의 질문이 훨씬 답하기가 어렵다. 후자의 질문을 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끝내 전자의 질문을 답하고만 영화의 선택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덧. 3주 전에 본 영화에 대해 뭔가를 끄적거리기란 상당히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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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0-12-15 0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를 전후반으로 나누면 초반에는 집중력있게 볼만한데

점점 시간이 갈수록 지루해진던데 말이죠~ 음....

맥거핀 2010-12-15 14:32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영화를 상당히 괜찮게 봤습니다. 뭐 굳이 이야기하자면 올해의 발견작(?)이라고나 할까요.
막판에 너무 단선적인 대결 구조가 되고, 대결의 부분만 반복되다보니, 없잖아 후반부에 가서 힘이 상당히 떨어지는 감은 있었습니다.

다이조부 2010-12-15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에 공감해요. 대결 부분이 반복될수록 집에 가고 싶더라구요

주연 배우보다도 고수 친구들이 더 끌리더군요 ㅋ

맥거핀 2010-12-16 12:57   좋아요 0 | URL
매력적인 캐릭터들이었습니다. 그간 한국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든 캐릭터들이기도 했구요.
 
부당거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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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는 '스포'가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 제목에서 말하는 '부당거래'란 결국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의 어떤 거래도 그렇게 보이지 않아서? 문제는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다. 이 영화의 거의 모든 '커넥션'들은 불법과 범죄와 폭력과 비리로 점철되어 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을 아울러야만 그 거대한 부당거래의 끄트머리라도 조금이라도 끄집어낼 수 있을는지 모른다. 즉 이것을 '위에서 내려다보아야만' 이것이 부당거래라는 것을 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스크린 밖으로 나와서 차가운 관객이 되어 이들을 들여다보아야만 이것이 부당거래라는 것을 안다. 부당거래를 하는 자들은, 이것이 부당거래라는 사실을 잘 모른다. 건설회사 사장의 손에서 검사의 손에서 넘어간 시계가, 다시 기자의 손으로 넘어가는 것의 역방향으로 검사는 사장을 위해 적당히 누군가를 '손봐주고', 기자는 검사를 위해 기사를 써준다. 그들은 그저 어떤 것을 주고받는 '정당한' 거래를 한다. 단, 여기서의 정당함이란 그로 인해 쓰러지게 되는 스크린에서 밀려나 있는 다른 이들을 생각하지 않았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스크린 외곽에 존재하는 사람들, 그리고 스크린에서 밀려난 자들(아마도 상당수의 관객들)이 '위에서 들여다보았을 때' 이것은 부당거래가 된다.

아니, 여기서 다시 복잡한 스토리를 반복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런 복잡한 이야기들보다는 그저 다른 얘기 몇 가지를 하고 싶다. 먼저 이 영화의 뚜렷한 장점들. 스토리를 죽 써내려가는 것으로 200자 원고지를 몇 장이나 채울 수 있을 정도로, 이 영화의 스토리는 꽤나 복잡한 구석이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스토리의 복잡함이 잘 느껴지지 않는 묘한 마법을 부린다. 그 마법은 몇 가지로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먼저 한 가지는 캐릭터들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스토리를 캐릭터들의 관계 중심으로 구축함으로써 스토리를 최대한 캐릭터에 밀착시켜 버린다는 점이다. 영화의 시작부분에서 각 캐릭터를 정지 화면으로 잡고, 간단한 캐릭터 설명을 자막으로 붙이는 것은 이 영화를 캐릭터 중심으로 보라는 감독의 친절한 부연설명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그 캐릭터들의 특징을 잡는 것이나, 각 캐릭터들의 관계를 한 가지의 아주 인상적인 숏이나, 대사로 처리해버린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이 영화의 팜플렛에 나온 다음의 대사들. 주양 검사(류승범)의 "한번 까드려야 내가 뭐하는 놈인지 아시겄어?!!" 나, 장석구(유해진)의 "절대 나 혼자 못 죽는거 알죠?"같은 것들을 보면, 그 캐릭터의 어떤 특징이나, 관계 같은 것들이 오롯이 드러난다. 즉 인물들의 복잡한 관계도나 사건들의 관계를 설명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직관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도록 만든다. 이건 절대 쉽게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로 인해 영화는 초반에 상당한 리듬감도 덤으로 얻게 된다. 많은 사건들이 연이어 지나가고, 여러 새로운 인물들이 계속 등장함에도 관객이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따라갈 수 있는 것은 초반에 만들어놓은 캐릭터들의 힘이고, 처음에 구축한 리듬의 덕이다. 즉 이 영화는 에너지가 넘쳐나고, 그 에너지들이 영화에 지속적으로 힘을 부여하지만, 그것이 너절하게 이어져있다거나, 혹은 뭔가 불안하게 엮어져 있다거나 하는 인상을 주지는 않는다. 도리어 상당히 '웰메이드'하다는 느낌을 준다. 류승완 감독의 영화들은 지금껏 어떤 불균질하게 넘쳐나는 에너지로 승부하는 것들이었지, 이 영화처럼 매끄러움으로 승부하는 것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예를 들어 최동훈 감독이 <타짜>나 <범죄의 재구성>에서 보여준 매끄러운 세공술사 같은 느낌이 있다.

어쩌면 이것은 류승완 감독의 공이라기 보다는 시나리오를 쓴 박훈정 작가의 공인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종내에는 관객이 어느 캐릭터도 좋아할 수 없도록, 혹은 조금이라도 의지할 수 없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관객들은 영화를 보면서 몇몇 캐릭터에 '의지하기' 마련이다. 즉 대부분의 대중영화들은 관객이 조금이라도 마음을 줄 수 있는 캐릭터를 의도적으로 끼워넣는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관객이 온전하게 마음을 줄 수 있는 캐릭터는 없다. 아마도 그래서 에필로그와 같은 영화의 마지막 씬들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류승완 감독이 <무비위크>와 한 인터뷰를 보면 봉준호 감독이 대호 형사(마동석)가 죽는 장면에서 영화를 끝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마도 봉준호 감독의 충고를 따랐더라면, 분명히 관객들에게는 덜 환영받았을 것이다. 더구나 이 영화와 같은 캐릭터들의 집합이라면, 마지막의 친절하게 정리하는 장면들은 대중영화에서는 어느 정도 불가피한 것이 아니었겠는가 라는 생각이 든다. 즉 마지막의 몇몇 씬들은 대중적인 결점에 발라주는 일종의 호랑이 연고 같은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조금은 과잉으로 보이는 부분도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조금은 류승완 감독의 전작들과도 관계된 것처럼 느껴진다. 류승완 감독이 전작들에 보여줬던 어떤 여러 단점 중의 하나는 작위적인 구성이 자꾸 엿보인다는 점이었다. 물론 영화란 (어느 정도는) 작위적인 예술이다. 그러나 작위성의 구렁텅이에서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기어나와보려고 버둥대는 것이 영화의 숙명이고, 이것을 어떤 핍진성이라고 부른다면 류승완 감독의 영화에서는 그런 핍진성이 조금은 의도적으로 결여되었다고 보이는 부분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렇게 불평하는 자들에게 에라 엿먹어라 라는 심정으로 밀어붙인 것이 한편으로는 <다찌마와 리 -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아니었겠는가.) 이번에는 그러한 것들이 최대한 자제된 것으로 보이지만, 여전히 나에게는 몇몇 마음에 걸리는 장면들이 있다. 다음과 같은 몇 개의 질문들. 살인범 이동석의 아내는 왜 그런 캐릭터로 설정되었는가(물론 이 질문은 다음의 질문과 연관된다 - 최철기(황정민)는 왜 그런 이동석을 '찜'하는가), 대호 형사의 장례식 장에서 다운 증후군 아이는 왜 스치고 지나가야 하는가, 황정민이 마지막에 울부짖는 씬에서 굳이 그런 음악을 깔아야만 했을까....등등. 이 첨가물들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까.

그러나 아무튼 이것은 <PD수첩>도 아니고, <시사매거진 2580>도 아니고, <뉴스 후>도 아니다. 그저 잘짜인 대중영화이다. 아니, 그저 이 모든 내용이 단지 영화에 불과하다는 닭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대중영화에는 대중영화에 맞는 문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과잉이 가져다주는 효과도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래서 그럴까. 그러한 과잉은 다른 어떤 것을 약간은 덮으려는 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한편으로 이 영화의 어떤 묘한 패배의식이나 냉소주의 같은 것들과 연관된 부분이다. 결국 영화가 마지막에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결말은 사실 친절한 듯 보이면서도 사실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지극히 냉소적이다. 요즘말로 하자면, 깃털들만 다 부러지고, 몸통은 여전히 건재하다. (물론 누군가는 이 말에 이렇게 반박하고 싶을 것이다. 현실이 그렇잖아요! 나의 대답은 그저 위의 말을 다시 반복하는 것이다. 이것은 <PD수첩>이 아니다.) 어쩌면 그저 우리 모두는 공범들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고개가 갸우뚱 거려지는 몇몇 선택들이 있다. 처음 장면의 지하철 역과 쏟아지는 뉴스와 신문들의 조합. 살인범 이동석을 다시 비틀어버리기. 주양 검사와 장인과의 마지막 대화 같은 것들.  

꼭 이것들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사실 나는 류승완 감독의 능력이 여전히 의심스럽다. 사실 박훈정 작가라는 시나리오 블루칩에(이 매끄러움은 분명히 류승완의 공이라기 보다는 박훈정의 공이다), 주연배우들로 한 연기하기로 소문난 황정민, 류승범, 유해진의 쓰리 콤보 조합에, 요즘 충무로에 연기 좀 한다 싶은 명품 조연들은 거의 모아놓은(한국영화들을 좀 보아온 분들이라면 얼굴들 찾기가 재미가 쏠쏠할 거다. 심지어 안길강은 대사 한 마디 없다) 이 영화이고 보면, 거의 실패하기가 더 어렵지 않을까. 오랜만에 평론가도 관객도 만족할 수 있는 영화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류승완 감독의 최고작이라는 데에는 동의하기가 힘들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절대 이 영화가 구리다는 얘기는 아니라는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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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0-12-15 0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는 작년 이랑 2년전에 비해 좋은 영화(?)가 상대적으로 조금 모자라지 않았나

싶어요. 방화에만 한정지어서 말이죠~

어쩌면 올해의 한국영화로 꼽아도 무리는 없을것 같아요. 아직 황해를 안봐서 장담은 ㅎ

맥거핀 2010-12-15 14:31   좋아요 0 | URL
<황해>가 올해 안에 개봉된다해도, 관례상(?) <황해>는 2011년도 후보작으로 올려야할 듯..^^;
꼭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영화입니다. 연기의 앙상블이 이보다 더 맞아떨어지는 영화는 찾기 힘들죠.

다이조부 2010-12-15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극장에서 다시 볼까 생각이 들 정도로 재미있더군요~ 이 영화에 관하여

반론성격의 글 그러니까 금태섭변호사 가 전직검사 출신인데, 영화의 리얼리티에
관한 문제제기를 한 글을 읽어봤는데 재미있더군요.

맥거핀 2010-12-16 12:57   좋아요 0 | URL
아..그런 글이 있었나요. 재미있겠네요. 찾아서 읽어봐야겠습니다. 뭐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조금 리얼리티가 떨어진다고 해도, 이 영화의 가치가 그로 인해 훼손되는 부분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흐 이전의 침묵 - The Silence Before Bach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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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로서 적을 수 없는 영화들이 있다. 글쎄. 이 영화의 몇몇 장면들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아니, 몇몇 이미지나 짧은 이야기들은 내뱉을 수 있어도, 영화 내내 흐르던 바흐의 음악들은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영화는 왠지 '영화'라는 것의 처음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영화란 보고, 듣는 것이라는 것. 즉 이야기를 이해하거나, 줄거리를 따라잡거나 해서 없는 무언가를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영화는 보고, 들어야 하는 영화이다. 그것을 애써 이해하려고 아등바등 노력해서는 안되는 영화이다. (그러므로 긴 말은 하지 않겠다.)

2.
<바흐 이전의 침묵>. 어쩌면 그 이전을 완벽한 침묵의 세계라고 부르는 것은 오만한 말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나면 바흐 이전의 소위 '음악 이전의 세계'가 어떤 형태였는지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어진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형태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 이전의 세계의 존재 여부를 믿을 수가 없어진다. 왜냐하면 바흐의 음악들은, 그리고 그로 인해 영향을 받은 후기의 음악들은 이 세계의 어느 곳에나 완벽하게 스며들어가 세계와 조응하고 있음을 영화는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첼로 연주자의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팔의 움직임에도 있으며,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에도 있으며, 아이들의 합창 속에 나란히 움직이는 입에도 있으며, 조율사의 떨리는 세심한 손길에도 있으며, 고속도로 위의 달리는 트레일러에도 있다. 그것은 기쁨 속에도 있으며, 그리고 영화 속 2차대전 중 유대인들의 사례에서 보듯이 지극한 고통 속에도 있다. (개인적인 궁금증. 바흐와 헨델 중 왜 바흐는 음악의 '아버지'이고 헨델은 음악의 '어머니'인지? 찾아보니 몇몇 흥미로운 대답들이 있기는 한데, 딱 이거다 싶은 거는 없던데.)

3.
우리가 이전에 체험해 본 적이 없는 음악 영화이다. 이 영화는 음악 외부를 도는 기존의 방식을 거의 따르지 않는다. 즉 기존의 클래식 음악 영화들은 작곡가를 둘러싼 어떤 드라마틱한 내용을 재현하거나, 음악 그 자체가 가진 어떤 이야기를 형상화해내는 것으로 음악을 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 어떤 위험이란, 우리가 받는 감동이 그 음악 자체의 감동인지, 아니면 그것의 외부가 우리의 상상과 결합하여 만들어낸 어떤 유사한 감동인지 구분해지기 모호해진다는 점이다. 이 영화에도 '마태 수난곡'의 발견을 둘러싼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일부 나오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거의 비디오 아트나 설치 미술에 가깝다. 그저 그것을 듣고 받아들여라! 영화는 말한다. (일부의 지적대로 이러한 것들이 지루함만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있어보이려는 시도'에 불과한가 라는 항변은 그저 카피와 예고편이 불러일으키는 오해라고만 해두자.)

4.
한 가지는 흥미롭다. 그것은 바흐의 음악은 음악 그 자체로만이 아니라 그 음악을 다른 것으로 치환하여도 여전히 일종의 예술품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바흐의 음악을 나타낸 악보들. 그 악보들만 바라보아도 어떤 일정한 규칙이 엿보이며, 그 악보를 전혀 읽을 줄 모르는 나같은 사람에게도 그것에는 일종의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그것은 일종의 대칭의 미학이며, 신이 숨겨놓은 균형미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질문들. 왜 어떤 멜로디의 조합은 음악이 되며, 어떤 멜로디의 조합은 불협화음이 되는가. 왜 어떤 특정한 화음만이 우리 귀에 듣기 좋은가. 왜 어떤 균형만이 우리에게 듣기 좋고, 보기가 좋은가. 아마도 영화에 난데없이 누드가 등장하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바흐 음악의 예술성은 심지어, 그 음악을 연주하는 자동 피아노에 사용되는 일종의 전자 악보에도 여전히 드러난다. 그 천공(穿孔)들의 오묘한 흐름이라니.
 
5.
아무튼 이 영화를 보고 나온 당신에게 평균율 클라비어니, 대위법이니 하는 것들은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아마도 바흐의 음악을 듣고 싶어질 것이다. 영화에 아무런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없어서 그 감동이 전혀 없었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그 감동을 다시 어떤 방식으로든 찾아내고 싶어서. 그리고 그 반대의 사람들은 반대의 이유 때문에. 바흐 이후의 음악의 세계는 그렇게 당신 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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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0-25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런 바흐의 음악과 관련된 영화가 있었다니,, 처음 알았습니다.
바흐와 그의 음악은 위대한 음악가로 평가는 받고 있기는 하나,
그의 작품은 제대로 듣는 사람이 잘 없을 겁니다. 그나마 대중적으로
알려진 미누에트나 G선상의 아리아를 듣기는 하겠지만,,
이 음악만 듣는다고 바흐의 음악을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사실은 저도 바흐의 음악이라곤 이 두 곡이랑 토카타와 푸가 뿐이랍니다.^^;;
바흐의 음악이 위대한 것은 일정한 규칙으로 흐르는 멜로디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맥거핀님의 글을 읽고 나니 바흐의 음악을 듣고 싶은데 , , ,
스피커가 먹통이네요-_- 그래도 멋진 글 덕분에 잊혀지고 있었던 바흐를
떠올릴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맥거핀 2010-10-25 23:26   좋아요 0 | URL
몇군데 안하는 영화예요. 안 그래도 곧 내려갈 것 같기도 하고, 생각보다는 평들이 많이 갈리더라구요. 상당수의 분들이 <아마데우스> 같은 어떤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기대하셨던 것 같은데, 그런 류의 영화는 아닙니다.^^
저도 바흐 음악은 잘 모르구요. 몇 개 들어본 음악들이 있지만, 아직도 음악과 제목들을 헷갈리고 있습니다. 바흐하면 저도 왠지 엄정한 이미지가 연상되기도 하는데, 이 영화를 보고서는 바흐의 핵심은 '균형과 대칭'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위의 이미지 처럼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월 스트리트 : 머니 네버 슬립스 - Wall Street: Money Never Sleeps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약간의 스포 있음)

 

돈은 돌고 돌아, 절대 잠들지 않고, 20여년 전의 영화 <월 스트리트>는 <월 스트리트:머니 네버 슬립스>가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예전의 악당 고든 게코(마이클 더글라스) 역시 돌아왔다. 그는 달라져 있을까. 일견 보아서는 조금은 달라진 것 같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담은 강연을 하며, 탐욕에 대해 경고하고, 앞으로 탐욕이 낳은 버블 경제가 무너질 것을 예견한다. 그리고 곧 이어 최대의 투자은행은 무너지고, 올리버 스톤 감독은 조금은 유치하게 아이들의 비누방울과 극적으로 떨어지는 주가 그래프를 오버랩시킨다. 그렇다면 그들의 앞날에는 투자은행의 대표 루이스 제이블이 그랬던 것처럼, 지하철에서 자신의 몸을 던지는 길 밖에는 남지 않은 것일까. 아니, 그것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역으로 고든 게코 속에 그 답이 있다.

무너지는 투자 은행과 그로 인한 세계 경제의 침체. 그것은 우리 모두가 겪었던 일들이다. 리만 브러더스 사의 파산으로 촉발된 미국발 경제 광풍은 곧 전세계를 집어 삼켰고, 그것은 이 작은 땅까지 지독한 칼바람이 되어 몰아닥쳤다. 위기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고, 많이 회복되었다고는 하지만, 일말의 불안감은 조용히 모두를 감싸고 있다. 이 영화는 그런 일련의 과정들을 몇 가지의 익숙한 컷으로 보여준다. 급격히 떨어지는 꺾은선 그래프와 소리를 지르는 증권맨들의 모습과 심각하게 머리를 부여 잡은 투자자들의 모습을 통해서 말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 영화는 다른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묻는다. 실제로 그 위기는 어떤 방식으로 전가되는가. 그 경제 위기 속에서 진짜로 고통받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하고 말이다.

위기가 닥치자 월 스트리트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은 한 자리에 모인다. 그들은 모두들 심각한 표정으로 위기를 타개할 해결책을 모색하지만, 사실 이것은 진지한 위기 타개를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게임에 가깝다. 왜냐하면 그들은 보호받고 있기 때문이다. '공적자금'이라는 전가의 보도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그것이 자신의 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회사의 직원들과 투자한 선량한 수많은 시민들이 길거리에 나앉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 라는 진지한 위선을 얼굴에 깔 수 있는 이유는, 최종적으로 엄청난 타격을 받는 것은 자신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임을 하는 사람들은 캐릭터가 죽으면 순간 실망하기는 하지만, 근본적인 충격은 받지 않는다. 실망스럽지만, 그저 다시 새 캐릭터를 만들면 그 뿐이다. 올리버 스톤은 그것을 마지막 인상적인 숏으로 보여준다. 세계 경제가 위기에 빠지고, 그 때마다 회의장에서 심각하게 대책을 논의하는 것처럼 보였던 월 스트리트의 원로는 콧노래를 부르며 마지막에 고든 게코와 손을 잡는다. 그는 지금껏 수차례 그러한 자신만의 방식으로 위기를 '타개'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타개책 덕분에 수많은 개미투자자들은 이중의 고통을 부여받았을 것이다.

영화의 중간, 한 아주머니가 게코에게 '모랄 해저드'의 뜻을 묻자, 게코는 '그것은 누가 아주머니의 돈을 가져가서 쓴 다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것에 가까운 진실이 있다. '모랄 해저드'는 영화 속에 나온대로, 무너진 투자은행에 공적자금을 무리하게 투입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것' 그 자체에 있다. 그러므로 월 스트리트의 그들은 모두들 고통에 신음하는 그 순간에도 최고급 양복을 차려입고, 최고급 자가용을 타고, 자선파티에 가서 최고급 와인을 마시며, 비싼 바이크를 타는 취미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문제가 아니다. 최악의 경우라도, 그저 게코처럼 몇 년 살짝 살다가 나오면 된다. 그리고는 게코처럼 비싼 저택을 '비록 전세나마' 살면서, 자신의 경험을 책으로 써내면 그뿐이다. 그리고는 강연회를 돌면서 다음의 세 마디를 선전하면 된다. "내, 책을, 사세요!" 그리고 그와 동시에 수많은 개미 투자자들은 무너져 내린다. 뜻조차 모르는 '모랄 해저드' 때문에. 그러므로 '머니 네버 슬립스'라는 이 제목은 왠지 중의적으로 읽히는 부분이 있다. 돈은 돌고 돌아 절대 잠들지 않지만, 절대 잠들지 않는 것은 돈 뿐만이 아니다. 그들 역시 절대 잠들지 않는다. 월 스트리트 불패 신화! 여의도 불패 신화! 그것은 영원히 이어진다. 잠드는 것은 그들에게 돈을 맡긴 다른 사람들이다.

이 영화의 결말은 온건하나, 너무 급작스럽기 때문에 도리어 냉소적으로 보이는 측면도 있다. 올리버 스톤은 아예 그곳에서 벗어나는 것이 '모랄 해저드'에 빠지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부동산 투기로 먹고 사는 제이콥(샤이어 라보프)의 어머니(수잔 서랜든의 깜짝 등장)마저 굳이 병원으로 돌려보낸 것을 보면, '모랄 해저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욕망의 구렁텅이에서 걸어나와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찌되었던 간에, 모든 이의 욕망이 이 월 스트리트를 혹은 여의도를 만들어내는 것임은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론 미국의 월 스트리트 뿐만이 아니라, 모든 곳의 비슷한 월 스트리트들이 공통적이다. 그리고 그 곳들은 또한 비슷한 한 가지의 속성을 공유한다. 그것은 그것 자신들이 어떤 모호한 베일 속에 싸여 있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 역시 그 모호한 베일을 살짝 들추어보려고 나름 애쓰지만, 그것은 여전히 흐릿하다. 악성 채권이니, 공매도니 하는 말들을 완전히 이해하여 우리가 그 외부의 곁껍질을 살짝 까고 들어가도, 그 내부 깊숙한 곳은 회의실의 검은 벽들로 여전히 둘러쌓여 있다. 우리는 그 내부의 회의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영원히 알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그 곳에서 의미있는 눈짓을 주고받고는 자선 파티 장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파산의 구렁텅이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끌려들어간다. 그러므로 그 게임에 참여한 모든 이들에게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게이머들에게 자신의 게임칩을 맡긴 너희들은 그렇게 당해도 할 말이 없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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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자체만 놓고 보아서는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 것 같다. 주식 시장에 일시에 퍼지는 괴소문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가 등등을 보여주는 몇 개의 장면들은 흥미로운 구석이 있지만, 몇 개의 장면들은 우리가 수많은 뉴스 클립에서 보아왔던 익숙한 클리셰들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전체 내용 역시 그동안 경제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두어왔던 사람들이라면 익히 아는 내용들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와 반대로 경제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라면 영화가 딱딱하고 어렵게 느껴질 것 같기도 하다. 설명이 필요한 부분들이 보이는데, 아예 아무런 설명이 없거나, 전체 이야기에서 조금은 동떨어진 맥락으로 보이는 부분들이 있다. 사건의 흐름을 너무 설명식으로 나열하는 것 보다는 조금은 영화적인 구성들이 필요다고 느껴지는 부분들도 있다. 어찌되었거나 이것은 대중 영화이기 때문이다. 경제 위기의 흐름을 설명조로 보여주는 다큐물이 아니라 말이다. 돈은 절대 잠들지 않을지 몰라도, 관객은 잠들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결말에는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이 결말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 다시 온건하지만 지겨운 할리우드 식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결말이 영화의 무엇을 해결해주는가.) <7월 4일생>이나 <플래툰>, 혹은 <유 턴>에서 보여줬던 그 반항기나 똘끼는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올리버 스톤 감독도 나이가 드니 달라진 것일까. 기껏 마지막에 던진 승부수를 감독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그저그런 대중영화에 스스로 머물고 마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 마지막을 예전의 올리버 스톤 식대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언젠가 그 아이도 자라서 경제 주체가 되고, 다시 비슷하게 모든 것들은 반복될 것이다. 세계 경제가 늘 그래왔듯이 말이다. 돈은 잠들지 않고, 비슷한 게코들은 다시 돌아온다. 게코의 강의를 들으며 공감을 표시하는 학생들과 게코의 책에 싸인을 받는 사람들은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을 또한 마지막의 버블들은 말하고 있다. 버블은 부풀어오르다가 언젠가는 터질 것이고, 터질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버블에 바람을 불어넣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욕망을 제어할 수 없음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전편의 버드 폭스(찰리 쉰)와 찰리 쉰의 아버지 마틴 쉰 등이 깜짝 출연하는 것은 나름의 볼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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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0-10-20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쓰면서 별 세 개는 안 주기로 결심했더니 별 줄 때마다 아주 애매하네..별점 척도를 10개로 늘려주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