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제 르 브룅 - 베르사유의 화가
피에르 드 놀라크 지음, 정진국 옮김 / 미술문화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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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트 비제는 운이 좋았다. 우리 나ㅏ의 유명 화가들의 일상만 보아도 그들은 당대 유명해졌어도 가난하게 살았거나 외롭고 쓸쓸했다. 술과 여자와 인생을 불사르며 그림에 바쳤으나 그들의 생은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비제르 브룅으로 불릴 엘리자베트 비제는 운이 좋았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명성을 얻었으며 귀족과 왕족들의 러브콜을 받고 작업에 임할 수 있었고 게다가 매우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자신의 자화상과 딸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던 그녀의 작품 속 모녀의 모습은 여름날의 복숭아처럼 물오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하늘이 한 여인에게 준 달란트는 이렇듯 풍족했다. 다만 남편이 변변치 못해 약간의 마음 고생을 했을 망정 그녀는 여성의 지위가 높지 못했던 그 시기에 자신의 전문 직업을 가진 행운의 여성이었다.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들어서는 어수선한 그 시기가 오기 직전 호사스러운 프랑스 왕가의 화가로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습으 화폭에 담아냈으며 여러 공작, 자작, 후작 부인들의 아름답고 풍만한 모습들을 여성의 시각에서 그려냈다. 물론 너무 미화된 모습이라는 질탄을 받는 구석도 있겠지만 요즘 우리가 포샵처리된 사진들을 선호하듯 그 시대 여성들도 조금이라도 더 아름답게 그려주는 화가를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비제 르 브룅은 포샵전문 화가였을 것이다.

 

남자가 그린 그림이 아니라 여성이 그린 규방 여성들의 아름다운 모습. 더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여성들의 욕망과 희망이 담긴 그림. 그래서 엘리자베트는 왕녀와 귀부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화가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주로 인물화만 그렸던 그녀의 솜씨는 아버지로부터 물려진 것이었다. 비록 일찍 작고하긴 했지만 화가였던 아버지의 솜씨를 물려받아 결혼 전 이미 유명한 화가였으며 결혼 후에는 베르사유와 빈, 모스크바, 로마, 런던 등등을 경유하며 당대 유명 여성들의 모습을 담아내었다. 스물 아홉에 "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의 회원이 된 엘리자베트는 화가로서 충만한 삶을 살았다. 마리 앙트와네트의 전속 화가로 살았던 여성의 삶은 그녀 뿐만 아니라 그녀가 그려낸 여성들의 삶까지 "인물 기록화"의 모습으로 남게 만들었다.

 

이삭을 줍는다거나 봉기를 든 서민 여성의 삶이 아닌 여유롭고 화려한 삶을 살았던 사교계 여성들의 모습이 그들의 성이나 후손들에게 물려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 것도 그녀로 인한 일이었으니 이는 매우 고마운 일일 것이다. 지금은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고풍스러운 여성들의 모습을 그림 속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그들을 약간 미화시켜 그렸다는 단점을 보완하고도 남는다.

 

미술사적으로 그녀가 얼마나 뛰어난 화가로 인정받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아름다움을 구경하는 독자의 입장에서 그녀의 그림은 매우 훌륭하게 느껴졌다. 그 아름다움만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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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이 어때서 내인생의책 그림책 31
사토 신 글, 니시무라 도시오 그림, 양선하 옮김 / 내인생의책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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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두 권의 책 읽기를 끝냈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내용이었다. 하나는 고양이였고 다른 한 쪽은 사람이었을 뿐.

사토 신이 쓰고 니시무라 도시오가 그린 [빨강이 어때서]는 까만 고양이와 검은 고양이 사이에서 태어난 빨간 고양이의 일생이 짧게 담겨 있는 동화다.

 

빨간 고양이는 빨간 머리 앤처럼 자신을 뒤덮은 빨간 색을 싫어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만족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꾸만 다른 평범한 고양이가 되라고 하는 식구들이 못마땅했다.

 

다른 고양이들이랑 똑같으면 시시할 것 같았어...

 

라니. 얼마나 자존감이 강하고 예쁜 고양이인지. 이런 아이에게 하얀 엄마는 하얗게 만들려고 흰 우유를 듬뿍 마시게 하고,까만 아빠는 까맣게 만들려고 까만 생선을 잔뜩 먹이고 형제들은 밀가루나 진흙,페인트 등을 발라서 개성을 없애려고만 했지 있는 그대로의 빨간 고양이를 봐주려하지 않았다. 가족들을 사랑하지만 고양이에게 필요했던 것은 걱정이 아니라 인정이었음을 그들이 알지 못했기에 집을 나올 수 밖에 없었고 집 밖에서 파란 고양이를 만나 무지개빛 고양이들을 줄줄이 낳은 빨간 고양이는 비로소 행복해졌다.

 

안데르센의 동화나 이솝 우화를 읽은 이례로 이처럼 재미나고 유쾌하면서도 교훈적인 동화를 만난 적이 있었던가 싶다.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어 단순히 고양이가 등장하는 동화라길래 펼쳐들었다가 나는 엄청난 큰 선물을 받은 셈이였다. 모두가 왜 똑같아야하는가. 에 대한 명쾌한 답이 동화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울한 동화는 쉽게 잊혀진다. 하지만 재미나고 유쾌한 동화는 평생지기처럼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닌다. 앞으로는 내 고양이를 볼 때마다 빨간 고양이가 어른거릴 것만 같다.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빨,주,노,초,파,남,보 고양이에 대해 이야기해 줄 것만 같다. 꼭 남과 같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면서 말이다.

 

똑같으면 시시할 것 같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게 될 것만 같다. 이런 마인드만 있다면 왕따라는 단어도 세상에서 사라질 수 있지 않을까. 희망과 긍정의 아이콘을 만난 날, 나는 이번 주 내내 나를 짓누르고 있던 숙제 하나를 해결할 수 있없다. 이 동화 한 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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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꽃, 눈물밥 - 그림으로 아프고 그림으로 피어난 화가 김동유의 지독한 그리기
김동유 지음, 김선희 엮음 / 비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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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트 비제는 어린 나이에 부와 명성을 얻고 왕실화가가 되는 영예를 안고 살았다. 게다가 미모까지. 모든 화가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지만 또한 이렇게 지독하게 가난한데도 불구하고 주구장창 그림만을 그려온 화가가 있다는 것도 놀라운 사실이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싸게 팔린다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 김동유. 이전에는 그의 그림도 화가의 이름도 알지 못했지만 [그림꽃, 눈물밥]을 읽으면서 "사람이 이렇게도 미칠 수 있구나"를 깨닫게 되기도 했다. 한 마디로 그는 그림에 미친 예술가였다.

 

혹자는 그의 그림을 두고 "상업적"이니 뭐니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조차 김동유의 그리고자하는 욕구를 꺾지는 못했다. 그는 가족이 굶주리고 아내가 죽어갈 때조차도 붓을 손에서 놓질 않았다. 오해려 전재산 500만원을 톡 털어 축사에서 살면서도 그림을 그릴 수 있어 살아있던 사람이었다. 존재의 이유. 그에게 그림은 그런 것이었다.

 

그런 그의 그림을 "학연, 지연"이 결부된 대한민국이 아닌, 세계시장에서 먼저 알아본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같은 날 읽은 동화 "빨강이 어때서"에 나오는 빨간 고양이처럼 그는 아웃사이더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남들과 같아지려고 하기보다는 자신만의 색으로 세상을 살아가려 했다. 그러다보니 굴곡도 많았고 가난을 피할 수도 없었다.

 

p.330  화가는 그려야 하고, 작가는 글을 써야 한다그래야만 뭐가 되어도 된다

 

결벽증이 있는 화가의 화실은 깨끗했다. 크리스티 경매 이후, 그림값이 오르고 그의 그림을 세상이 알아주면서 축사를 벗어나게 된 그의 작업 화실은 흰 벽에 천장이 높다랬을 뿐 물감이 흩어져 있지도 않았고 그림이 쌓여 있지도 않았다. 그리던 그림이 한 점 벽에 걸려 있었을 뿐이었다. 그의 그림은 마치 매직아이를 바라볼 때처럼 들여다 보고 있으면 얼굴 속에 또 얼굴이 숨겨져 있다. 남자와 여자일 때도 있고 스캔들의 두 주인공일 때도 있지만 그는 감정을 실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그에게 얼굴은 그저 이미지일뿐.

 

"이중그림"으로 유명해진 그의 그림보다 나는 사실 여인과 꽃과 벌레가 그려진 화사한 그림이나 부처의 그림이 더 맘에 들었다.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시간을 걸어온 사람. 제프리 디버가 그의 명작들을 8번이나 탈고하여 세상에 내어놓듯이 그 역시 작품에 공을 들이는 장인임을 알 수 있었다. 팔리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왜 나쁜가. 모사도 아니고 도작도 아닌데.

 

지방에서 태어나 지방 미술대학을 나왔고 누군가의 사사를 받기 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그려온 남자는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시크릿"의 비밀을 그가 살아온 발자취로 우리에게 증명해냈다. 그래서 나는 그의 그림이 좋았고 마음에 들었다. 책으로 작품이 아닌 작가를 이해해보기는 처음이었달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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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방향 -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서울 최고古의 동네
설재우 지음 / 이덴슬리벨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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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만이 한옥촌이라고 생각했다. 드라마 속에도 나오는 북촌은 양반네들이 조선시대에 살았던 공간이었다. 그런데 북촌이라는 지명을 들으면서 서촌을 떠올릴 수 없었을까. 서울에는 서촌이라는 지역도 있었는데 말이다. 서촌은 한옥의 공간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60,70년대의 향수어린 옛골목들과 점포들이 가득했다. "점빵"을 아는 세대라면 이 골목길이 무척이나 반가우리라 생각된다.

 

서촌에서 태어나 서촌에서 자랐다는 저자는 서촌을 통해 아내를 만나 서촌에서 둥지를 틀며 살고 있다. 그토록 사랑하는 서촌을 홍보하면서 말이다. 동네하나를 소재로 썰을 풀어내는 재주를 지닌 스토리텔러인 저자는 재능을 바탕삼아 출판물도 발행하고 웹툰뿐만 아니라 시나리오 기획도 하면서 서촌을 문화 예술의 공간으로 변모 시켜 나가고 있다.

 

서촌에서의 하루하루가 행복하다는 어느 가장의 이야기. 그의 이야기가 다정다감한 이유는 담긴 애정이 담뿍이기도 하거니와 사람사는 내음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곳곳에서 소개되는 곳은 깔끔하고 예쁘장한 새로만들어진 곳들이 아니었다. 인위적인 것들이 아니라 손때묻고 낡아빠진 것들을 우리 앞에 내어놓지만 함께 공감하고 추억하게 만든다. 살아온 사람들만이 아는 웃음. 그런 것들을 털어놓게 만드는 힘이 그가 소개하는 서촌 속에 담겨 있다.

 

딱히 서촌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바는 없다. 서촌이라는 동네조차 이전에는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멋진 소개를 구경하며 이곳을 거닐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생각을 치솟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낯설고 새로워서가 아니라 정겹고 낡아빠졌기 때문이다. 허름한 골목 아래에 동네 고양이가 한가로이 낮잠을 자고 있고,팔공산 돌계단만큼이나 진이 빠질 60계단을 밟아볼 수 있고, 양으로 승부하고 맛으로 승부하는 통닭집과 독특한 할머니들의 떡볶이가 있는 곳, 오래된 동네에서 여전히 개업의로 일하고 있는 할머니 의사의 다정함이 서려 있는 곳. 터를 잡고 몇십년씩이나 이 곳을 떠나지 않고 터를 내린 사람들이 오골오골 모여사는 곳. 이곳이야말로 인간시장.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아닐까 싶다.

 

경복궁의 서쪽에 있어 서촌으로 불린다는 이 곳. 경복궁 일대 혹은 효자동 일대로 묶여 불리던 이곳의 이름이 서촌이었다. 돌아온 사람들의 발목을 잡고 새로 들어온 사람들의 발목을 잡는 이곳. 떠나기만 하는 곳으로 인식되어지는 농촌 역시 서촌 같은 바람이 불면 좋을텐데......!

 

골목이 있어 정겹고 사람이 있어 도담도담한 이 곳에 여행이 아닌 삶으로 다가가면 어떤 추억이 나의 것이 되어줄까. 꼭 한 번 살아가고 싶은 동네를 만났다. 그 이름, 서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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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늑대 - 괴짜 철학자와 우아한 늑대의 11년 동거 일기
마크 롤랜즈 지음, 강수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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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을 올리는 순간에도 고양이 두 마리가 옷 속에 들어와 헤집고 다니고 있다. 꼬물이 시절에는 커다란 니트 주머니에 각각 넣어주기도 했지만 이젠 제법 커버려서 이렇듯 니트 가디건 속에 들어 앉아 옷이야 늘어나든 말든 장난치고 놀고 있는 것이다. 집사를 인간 캣타워삼아.

 

 

그래도 덩치가 상대적으로 작은 고양이이기에 망정이지 마크 롤랜즈처럼 늑대를 키우는데 그 늑대가 이런 행동들을 했다면 나는 이미 병원에 입원하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집은 집대로 남아나는 것 없이 말이다.

 

 

그래도 한번 생명에게 마음주면 쉽게 거둬들이지 못하는 것을 나 역시 알고 있기에 철학자와 늑대의 11년간의 동거는 이상한 일이 아니라 이해가 되는 일이었다. 대학을 일찍 마치고 또래들을 가르치게 된 젊은 교수 마크는 그 시기를 파티에 다니며 흥청망청 신나게 보내고 있었다. 그 와중에 늑대 한 마리를 입양했는데, 이름이 “브레닌”이었다. 개도 아니고 고양이도 아니면서 반려동물이 된 브레닌은 채식주의자인 마크의 식성에 따라 생선은 먹고 육류나 유제품은 먹지 않는 페스카테리언으로 길들여져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늑대 본성을 완전히 버린 것도 아니었다.

 

 

술취한 이웃 남자가 담을 넘었을 때 개처럼 짖어서 위협을 주기보다는 목을 물고 늘어지는 쪽을 선택했고 토끼나 쥐를 사냥하기 위해 15분 넘게 대기하고 있으면서도 지루해하지 않기도 했다. 그렇다고 착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온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가구를 죄다 뜯어놓기도 해서 브레닌만 키울때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수업에 들어가야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고 한다. 철학 수업을 같이 듣는 늑대라. 그 수업을 듣는 학생이었다면 상당히 흥미로웠으리라.

 

 

얼마전 [늑대소년]을 읽고나서인지 늑대라는 동물은 내게 기다림을 아는 정감있는 동물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철학자가 마지막순간까지 생을 함께 했던 늑대는 야생의 그것이 아니라 반려동물의 그것처럼 느껴졌고 안락사를 시킨 이후 그가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맸던 심정도 100% 공감되어졌다.

 

늑대와 함께 한 삶을 소설처럼 풀어놓지는 않았지만, 철학을 논하며 그 관점에서 이해하라고 종용하지도 않지만 적절한 선에서 타협을 본 것처럼 감성과 이성이 적절히 조화되어 그 함께 한 삶이 그려져있고 브레닌이 도덕적 행위자가 아니라 도덕적 수동자임을 이해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사고를 일으켜도 브레닌은 골치덩이가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필리아”라고 불렀던 가족애라고 불렀던 그 감정을 우리는 반려동물에게 이입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철학자가 그렇게 느꼈듯 말이다.

 

브레닌은 이제 세상에 없다. 그 딸인 테스가 남겨지긴 했지만 브레닌 자체는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다만 마크의 기억 속에서만 남아 그리움을 전할 뿐이다. 늑대와 함께했던 특별한 시간을 그는 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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