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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여신 백파선
이경희 지음 / 문이당 / 2013년 6월
평점 :
도공.
위안부 할머니들 만큼이나 치욕적이고 아픔의 역사로 기억되는 그들의 역사. 일본에 의해 끌려가 현재는 남의 나라 문화를 발전비켜놓은 그들의 지난 날이 한 여인의 인간사에서 풀리면서 우리는 "백파선'이라는 새로운 여인을 알게 된다. 대장금 이전에는 장금이를 알지 못했고, 다모 이전에는 다모라는 여인들의 삶을 알지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실존인물이건 허구의 인물이건 간에 새로운 이들의 삶을 엿볼 기회가 이렇게 주어지는 것이다.
백파선은 보기 드물게 여성 도공이었다. 그녀의 남편을 따라 도공들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가 사무라이 정치 시대에 그 그늘에서 가마터를 잡아야했지만 남편 사후에도 강한 조선 여인의 면모를 보이며 남자가 아닌 여자 도공이 이끄는 사기장으로 우뚝섰다. 그릇을 빚어내는 일. 흙으로 빚어내는 가장 찬란한 예술 중 하나인 그 일을 파선은 즐기면서 해냈다. 지독한 가난과 칼의 위협 앞에서도 그 예술혼을 불사지르면서 특유의 그릇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한 여인의 고백으로부터 시작된다. 게이오기주쿠대학을 졸업한 그녀는 나오키라는 가난한 연인을 버리고 프로포즈 해 온 부잣집 아들과 결혼한다. 유학생활로 겪은 가난이 지긋지긋해서 선택했으나 곧 밝혀진 남편의 여자로 인해 결혼 생활은 무너지고 애인과 함께 사고사한 남편탓에 아이와 함께 초라하게 시가에서 내쳐질 위기에 봉착했으나 시아버지는 그녀를 구할 단 하나의 동앗줄을 내려주며 딜을 제안했다.
남자친구를 버리고 선택한 남편의 죽음. 위자료 한푼 없이 아이와 내처질 운명 앞에 선 여인에게 주어진 편지 하나. 아주 오래된 그 편지의 주인공은 임진왜란때 규슈의 아리타로 끌려간 조선 최초의 여자 사기장 백파선이 친정 어미에게 홍기, 홍주 두 아이와 안나라는 여인을 부탁하며 두 개의 잔을 보낸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시아버지 손에 있을 그 두개의 잔이 그녀의 미션이 아니었음은 두말 할 것도 없었고 후미에 쓰여진 세 개 중 두개는 보내고 하나는 연인에게 남긴다고 쓰여져 있어 그 일로 인해 일본 여행길에 올랐음을 짐작하게 만든다. 그리고 액자구성속으로 들어가 시작되는 백파선의 일본 생활.
가난이 지긋지긋해 터를 옮긴 조선의 도공들에게 펼쳐진 삶은 조선의 것보다 더 궁핍한 삶이었고 그로 인해 희망이 없는 그들에게 손재주는 밥벌이가 되고 희망의 씨가 되어 주었다. 그들이 만들어낸 최고 가치의 자기들은 금새 소문이 나 여기저기서 그들의 이주를 주선해 오고 백파선은 생명을 걸고 도공들을 이사시킬 계획에 착수하지만 그들을 착취해온 시게마사 영주는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로 인해 영주의 무사 다다오와의 사랑도 비극으로 끝나버리고 그들의 사랑의 징표인 칼과 잔을 지난 날의 연인 나오키의 사당에서 발견한 여인은 이 모든 것이 운명이었음을 깨달으며 소설은 끝을 맺는다.
처음부터 준비된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 그 연결은 희미하지만 소설은 이를 떠올리게 만든다. 백파선의 후손인 그녀와 다다오의 칼과 백파선의 잔을 모셔온 후손 나오키. 지난날 사랑을 잇지 못한 그들의 사랑을 후세에서 잇게 만드는 듯한 운명적 만남은 그렇게 여운을 남기고 조용히 마지막 장을 덮게 만드는 것이다.
북의 여신 백파선. 소설을 통해 그녀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재조명 된다면 분명 매력적인 또 하나의 드라마 히로인이 될 여지가 보이기에 어느날 그녀를 주인공으로 할 드라마가 편성되기를 기대해보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