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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점 ㅣ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56
미우라 아야코 지음, 최현 옮김 / 범우사 / 2004년 2월
평점 :
"누구의 마음 속에나 빙점을 가지고 있다" -요오꼬
30대의 엄마에 대한 기억은 늘 [빙점]과 함께였다. 한글판부터 한자가 많이 섞였던 책, 세로줄로 내리적힌 일본판까지....엄마의 서가에 꽂힌 빙점의 여러모습을 보면서 좋아하는 책은 번역별/출판사별로 구매할 수도 있구나....라고 어린이 시절 생각했다.
그때의 엄마처럼 나도 좋아하는 작품은 번역이 다르거나 출판사가 다르면 무조껀 사모으는 습관이 들어 있다. 딱히 나쁘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엄마의 딸인 내겐.
엄마의 나이가 되어 읽게 된 [빙점]은 여러면에서 감동적인 작품이었다. 어린 나이에 읽게 되었다면 줄거리만 따라가거나 캐릭터 하나만을 놓고 읽었을지도 모르지만 인생의 굴곡을 알아가는 나이엔 작품의 나이테까지도 헤아려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30~40대가 소설쓰기 적정기라고 말한 어느 소설가의 충고는 적절했다고 보여진다.
세월이 흘러도 그 가치가 여전한 물건을 "명품"이라 부르듯 명작은 시간의 흐름에도 변함이 없다. 1964년 아사히 신문창간 85주년 기념 수상작인 [빙점]은 미우라 아야꼬에 의해 쓰여졌다. 730편 중 당선작으로 뽑혀 1천만엔의 주인공이 되기에 지금 보아도 부족함이 없는 작품은 말 그대로 명작이다. 폐전 후 국가의 기민적인 교육정책에 실망하고 교사를 사직한 후 폐결핵으로 인해 13년간이나 투병하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고스란히 작품으로 녹여 쓴 작가는 겉으로는 온화해보이는 한 가정을 파괴하면서 "누구의 마음속에나 가지고 있는 빙점"을 세상에 녹여보인다.
"엄마를 귀찮게 하면 아빠에게 이를거야." -루리꼬
아사히가와시의 교외 가꾸라읍, 쓰지구찌 병원장 저택에는 쓰지구찌 게이조오와 부인 나쓰에, 아들 도오루, 딸 루리코가 살고 있다. "내과의 귀신"쓰가와 교수의 귀한 딸로 태어나 아이같은 면이 있는 나쓰에에게 반해 있던 안과의사 무라이 야쓰오는 1946년 7월 21일 가미가와 신사제 날 그녀를 찾아와 마음을 전한다. 그 장면을 목격하고 뛰쳐나간 루리꼬가 교살된 채 발견되자 행복했던 집은 삽시간에 불행한 집으로 변해 버리고....
딸 루리꼬의 죽음이 아내와 무라이의 불륜으로 인해 생겼다 생각한 게이조오는 친구 다까기를 통해 범인의 딸을 입양하게 된다. 아무것도 모르고 애지중지 요오꼬를 기르던 나쓰에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남모를 학대가 시작되는데, 요오꼬는 그럴수록 더 바르게 자라나간다. 이상한 일이지만 요오꼬는 떼쟁이도 아니었고 여느 아이처럼 아이스럽기 보다는 어른스러움을 넘어서 성인스러운 사람으로 성장해버린다. 하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는 자기자신에 대한 사랑은 저버린 인물처럼...원죄가 있다한들 그녀의 것이 아닐진데 요오꼬는 너무나 타인에 맞추어가며 성장하고 이런 그녀를 곁에서 바라보던 오빠 도오루도 그녀를 사랑하게 되어버리는데....
"자신이 못되는 건 다 자기탓이야. 물론 환경이라는 것도 중요하지만 본질적으로 말하면 자기에게 책임이 있는거야." -요오꼬
비열하고 질투심이 강한 아버지와 부정한 엄마 그리고 살인범의 딸인 여동생에 대한 비밀을 알아버린 도오루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부모를 괴롭게 만드는 동안 자신이 업둥이라는 소문을 들어버린 요오꼬는 자립심 강한 아이로 커나간다. 완전해보이지만 부식하고 있는 가정의 시간도 흘러 어느새 도오루와 요오꼬의 결혼 이야기가 나올 시점에 이르러 도오루의 친구 기다하라 구니오의 등장은 삼각관계를 야기시키면서 문제를 풀어나갈 제3자의 역할을 기대하게 만든다.
부부간의 불신과 아내의 불륜에 대한 가장의 복수, 남편에 대한 증오와 어린 마음으로 자라 성인이 된 여자의 우울증 등 두 사람이 시작한 서로에 대한 미움은 네 사람이 다 상처받는 일로 번져나가고 바르게 살고자 했던 한 사람을 자살로 몰아버리게 된다.
"울기를 바라는 사람 앞에서 울면 지게 됩니다." -요오꼬
자기 딸을 죽인 범인의 자식을 사랑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일까? 를 오랜시간 생각하게 만들고, 사랑한다는 것은 대체 어떤 것일까? 역시 장시간 고민하게 만든 소설 [빙점].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마음이 비뚤어지지는 않을거야. 그만한 일로 사람을 원망하여 내 마음을 더럽히고 싶지는 않아."라고 생각하던 요오꼬의 자살시도를 계기로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모든 갈등은 눈녹듯이 사라져버렸다. 그녀가 살인범 사이시 쓰지오의 딸이 아님이 밝혀지는 순간.
인간의 마음이란 이토록 어리석은 것일까. 웃는 얼굴을 하면 마음이 진정되고 곧 마음까지도 따라 웃게 된다고 생각해서 울고 싶어지면 얼른 방긋 웃어보이는 아이를 죽음으로 몰아갈만큼 이 아이가 잘못했던 것은 없었는데........
소설 속에서 게이조오는 아들 도오루가 5세때 "적이란 가장 사이좋게 지내야 할 사람" 이라고 말해주지만 그 역시 나약한 인간일 수 밖에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결국 게이조오도 나쓰에,도오루, 다까기, 무라이까지 흔들리는 인간이며 갈등하는 인간일 수 밖에 없음을 작품은 극명히 증명해내고 있었다. 읽는내내 답답하리만치 안쓰러웠던 요오꼬. 그냥 떠나버렸으면 좋았을 것을....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그녀가 깨어나게 되는 세상은 이전과 다를 수 있을까.
진실을 알게 된 모두가 상냥해졌다해도 상처받은 그녀의 세월이 보상될 수 있을까. 마지막에 그녀가 죽어버림으로써 모두의 마음에 미안함과 죄스러움을 남기는 쪽이 더 원죄스럽진 않았을까....결말에 대한 다양한 상상들을 해보며 가장 추악한 것이 인간의 마음 속에 얼마만큼이나 자리잡아야 나쁜 사람이라 말할 수 있을까 고민되기 시작했다.
"싫다고 생각하는 쪽이 잘못일 수 있어. 사람이란 그다지 영리하지 못해서 친절한 사람이 조금만 잘못해도 곧 싫어지지" -다쓰꼬
오래된 소설이지만 [빙점] 속에서 숨겨지지 않는 가장 인간다운 추억함을 발견해냈다. 욕망과 질투, 불륜이 아닌 불신과 의심, 해하려는 마음이 합쳐진 또 다른 모습의 추악함. 헐리우드 노감독의 한탄처럼 역시 우리는 야만의 시대를 벗어나지 못한 것만 같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