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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날들 - 대서양 외딴섬 감옥에서 보낸 756일간의 기록
장미정 지음 / 한권의책 / 2013년 12월
평점 :
기억이란 기능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 나는 그녀의 기록을 읽으며 다시금 되새김질 한다.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찾지 못해 허둥댈때는 이 기억이라는 장치가 얼마나 깜빡깜빡 잘하는지, 고장이라도 난 것인가 싶다가, 정말 잊고 싶고 지우고 싶은 기억들은 바로 오늘 겪은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려주니 청개구리 심보를 삶아먹었나 싶을 정도다.
사람의 시간으로 팔 년.
그 긴세월동안 잊혀지지 않는 과거의 기억으로 여전히 아픈 그녀를 책으로 만났다. 좋아하는 배우 전도연이 주연했으나 영화는 볼 엄두가 아직 나질 않아 망설이고 있는 중인데, 책은 생각보다 담담하고 편안하게 읽혀졌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불행해요~","끔찍하고 잔인한 경험을 나는 하고 왔어요"라는 사실적 기록이 아니라 아프고, 후회하고, 감사한 마음들이 담겨 나온 참 착한 아줌마의 고백이이어져서 슬픔이 아닌 담담함으로 읽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인디언 같다. 절대 잊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복수를 위해 영화 속 여전사들처럼 누군가를 찾아내어 죽인 궁리를 하지는 않는다. 그저 다시 찾은 삶을 행복하게 꾸려나가는 일. 그 일만을 하며 마음을 삭히는 중이다. 하지만 여전히 아프다. 그 마음이 느껴졌다. 대한민국의 틀 안에서 살면서도 가끔 이 나라가, 이 정부가 소시민을 위한 나라인지 의문이 들 때가 있는데, 말 한마디 안통하는 외국에서 내 나라에 내팽겨진 배신을 당했던 그녀의 마음 속에 아직 애국심이 한 자락이라도 남아 있을지 궁금해졌다. 국민의 권리를 박탈당했던 이런 사람에게 국민의 의무를 강요한다면 대한민국은 '부끄러움'을 잃은 나라일 것이다.
평범하게 사는 것이 가장 어려운 가운데, 성실하고 착한 남편을 만나 알콩달콩 내집마련의 꿈을 꾸던 주부 장미정의 첫번째 고비는 '보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남편이 아끼던 후배 재훈에게 서 준 보증이 잘못되었고 부부의 보금자리는 산산조각이 났다. 그러고도 모자라 재훈의 빚을 떠안으면서 빚갚기에 급급하던 중 재훈은 부부에게 모든 짐을 맞긴 채 그만 세상을 등졌다. 첫번째 배신이었다.
옥탑방에서 첫 아이까지 낳아 쫓겨날 날을 오늘,내일 하고 있던 부부에게 두번째 고비가 찾아든 것 역시 '사람의 이름'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남편 주위엔 무슨 이런 나쁜 사람들만 포진하고 있는 것인지, 남편 아는 사람이라는 주진철이 어려운 살림의 그들에게 '악마의 유혹'을 펼쳤던 것이다. 자신의 여자친구와 함께 외국에서 원석 운반책이 되어주면 400만원을 주겠다는 거였다. 손 안에 품은 아이를 보살필 방 한칸 없었던 부부에게 그 유혹은 차마 뿌리치기 어려운 것이었을 터였다. 그리고 그 사건이 벌어졌다. 자신의 여친에 앞서 "형수님"을 시험대에 올린 주진철은 운석 대신 마약으로 바꿔치기한 가방을 그녀에게 들려줬고 아무것도 모르던 그녀는 오를리 공항에서 체포되었다. 그리고 버려졌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국민은 보호해야할 대사관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며 시간을 끄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2004년 체결된 법에 의해 한국으로 환송될 수 있다는데도 자국민을 말도 안통하는 마르티니크 섬에 유배시켜놓은 것도 모자라 프랑스 법정의 독촉에도 불구하고 서류를 보내주지 않았고, 주진철 일당이 검거된 후에도 그녀를 프랑스 땅에 철저히 고립시켜두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당장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게 된 그녀의 사정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송금을 돕지 않아 두 달 후에나 돈을 받도록 방치해 두었던 것이다. 대사관을 통하면 당장 하루나 이틀이면 되는데.......! 통역관으로 나온 사람 역시 사람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자국민의 호소를 듣지 않으면서 어떻게 그녀를 위한 길을 모색한다는 말인가. 그들의 모든 월급은 국민의 세금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망각한 아주 막되먹은 처사였다.
TV를 보면서 외교문제를 잘못 풀어낼때마다 우리나라의 '외교관'시험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싶어질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성적으로만 뽑힌 그들은 '국민은 위해' 일할 자세는 커녕 외교관이라는 신분을 높은 벼슬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타국인 프랑스조차 자국민을 석방을 꺼려하는 대한민국의 처사가 이해가 안된다고 했을 정도이니......!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그녀는 정부의 희생양이었던 것이다.
여러 차례 죽음을 시도했던 그녀에게 한 줄기 빛은 "KBS추적60분"을 통해서 흘러들어왔다. 그리고 카페가 생기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이야기를 알게 되고 안타까워하면서 티끌이 태산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부가 내다버린 한 사람의 국민은 삼삼오오 국민들이 힘을 합쳐 돕기 시작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 민족은 서민들이 뭉치면 큰 힘을 이룬다. '붉은 악마'의 함성처럼.
타국에서 그녀를 보살펴주는 이가 나타나고 법정에서 바르게 통역을 해주고 힘을 실어줄 이가 나타났으며 함께 슬퍼하고 울분을 토해낼 동지들이 나타났다. 그들 모두 자신의 일처럼 발벗고 나섰고 가족의 일처럼 마음써주었다. 대한민국은 언제나 그랬듯이 정부보다 시민들의 가슴이 더 따뜻했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과 상관없이 그녀의 악몽이 끝났다. 돌아왔고 삶이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P 239 언젠가 용서할 수 있을까
영화로 개봉되어 이제 더 많은 이들이 그녀의 사연을 알게 되었다. 소설을 읽으며 눈시울을 붉힐 지도 모른다. 이미 이전과는 똑같은 삶을 살기는 어렵다. 하지만 대신 "감사"의 마음이 "소중함"이라는 마음이 곁에 와 있으니 그녀는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 이야기는 비단 그녀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정부의 자세가 변하지 않고 외교부나 각국의 대사관의 행정패턴이 변하지 않는 한 제 2의 정미정, 제 3의 정미정은 또 나올 것이 뻔했다.
그 어느 곳보다 이 영화를 외교관련 업무를 보고 있는 이들이 많이 보았으면 한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 속에 '국민을 이해하는 일꾼"이라는 마음가짐이 한층 더 두껍게 얹혀졌으면 좋겠다 싶다. 아울러 이제 그녀가 '용서'라는 단어조차 잊고 살기를 희망해본다. 아픔은 잊혀지지 않겠지만 아픔의 시간에서 점점 더 먼 내일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