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망진창 행성 조사반, 북극곰의 파업을 막아라 - 기후 붕괴 현장에서 마주친 인간과 비인간동물들
남종영 지음, 불키드 그림 / 한겨레출판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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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넘게 기후 변화 문제를 보도해 온 남종영 작가는 풀지 못한 오랜 고민이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야기에 끌려 행동하지만, '기자'라는 직업은 숫자와 정확함을 요구하기에 그 절박함을 이야기로 보여주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흔한 탈출, 경고, 종말의 서사가 아닌 새로운 시선을 택한다. 바로 'SF 논픽션'이라는 우화의 형식을 빌린 것이다. 겉은 허구의 포장지지만 그 안을 채운 내용은 논문과 보고서, 치열한 과학적 연구 결과들이다.


이 책은 기후 변화를 헐리우드 재난 영화처럼 그리지 않는다. 기후 변화는 스펙터클한 이벤트가 아니라, 우리 일상에 조금씩 스며들어 절망을 키우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사과 농사가 곤란해지고, 바다 얼음이 사라지며, 대규모 단일 경작과 공장식 축산이 일상이 된 풍경. 책은 이 익숙한 풍경을 낯설게 만듦으로써 인류 멸종의 공포와 닥쳐올 미래를 감각하게 한다. 우리는 이미 경제적 삶과 기후가 얽혀든 재난 속에 잠겨 있을 뿐이다.


책은 단순하게 "지구가 뜨거워지니 태양광을 쓰자"는 식의 납작한 해법을 거부한다. 실제로 태양광이나 풍력 발전은 기술의 발전 덕분에 화석연료보다 발전 단가가 저렴해졌고, 폐기물 처리 비용을 포함하더라도 기후 재난이 초래할 막대한 비용보다는 경제적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하지만 저자는 여기서 한 발 더 나간다. 숫자로 증명된 경제성 너머에, 숫자가 말해주지 않는 '정의'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온실가스를 내뿜지도, 산업 국가도 아니었던 섬나라가 가장 먼저 직격타를 맞고, 생존을 위해 발버둥 쳐야 하는 현실은 잔혹하다. 저자는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세계를 끝내야 하지만, 친환경 에너지 전환이 원주민의 권리를 희생하며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라고 못 박는다.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워진 친환경은 또 다른 폭력일 수 있다는 뼈아픈 지적이다.


기후 위기를 둘러싼 진실과 과장, 그 이면에 숨겨진 정치와 자본의 역학관계. 이 책은 기후 위기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쥐여주기보다는 더 많은 질문을 던진다. 지구 온도 상승의 속도는 유례가 없고, 우리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고 있다. 이것은 예측이 아니라 도래할 현실이다. 이야기라는 형식을 빌려서일까, 홈런을 맞은 듯 충격이 직관적으로 다가온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숨이 가쁠 정도로 가득 찬 이 책을 덮으며 생각한다. 숫자가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고. 기후 변화를 이야기할 때 우리가 진짜 조심해야 하는 것은, 그 숫자 뒤에 가려진 고통받는 존재들을 잊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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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과 삶 사이에서
조형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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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조금씩 어중간하다. 완벽한 투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상의 부정의에 완전히 눈을 감은 악당도 아니다. 조형근 작가는 스스로를 '소시민으로서 어중간하게 살아온 사람'이라 말한다. 그리고 더 나아지길 기대하며 보낸 그 어중간한 날들의 기록을 <앎과 삶 사이에서>에 담아냈다. 그는 소시민들이 만드는 힘을 믿는다. 하지만 그 믿음은 무조건적인 지지로 쌓아올린 것이 아니다. 힘센 소수의 잘못을 엄하게 꾸짖되 보통 사람들이 지녀야 할 책임 또한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작은 개인들의 행위가 모여 세상을 뒤집을 '힘'이 커지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괴물'이 부패한 권력자나 탐욕스러운 자본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책의 초입(6p), 저자는 정치철학자 아이리스 매리언 영의 '구조적 부정의'라는 개념을 빌려와 우리의 폐부를 찌른다. 우리가 악의를 품지 않아도 단지 각자의 이해관계를 추구하며 제도와 상호작용하는 것만으로도 거대한 불의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성찰이다. 기업은 비용 절감을 위해 합법적으로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소비자는 그 덕에 빠르고 저렴한 서비스를 누린다. 누구도 법을 어기지 않았고 악의를 품지도 않았지만 그 결과로 위험과 빈곤은 특정 집단에게 집중된다. 기후 위기, 지역 소멸, 부동산 폭등 역시 마찬가지다. 내 아이가 좋은 대학에 가길 바라고, 내 집값이 오르길 바라는 평범한 욕망들이 모여 누군가의 삶을 파괴하는 ‘조용한 불의’를 빚어낸다. 의도가 없었더라도 결과에 연루되었다면 사회구성원으로서 책임을 공유하고 구조를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앎과 삶의 간극은 바로 이 지점에서 벌어지기 시작한다.


저자는 저출생 담론을 다루면서도 '노동력 공급'이나 '복지 비용'이라는 차가운 경제 논리를 거부한다. 아이를 낳게 하기 위한 유인책을 내놓을 게 아니라, 아이를 낳을 만한 세상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참담하다. 152p에서 지적하듯, 각자도생의 무한경쟁 사회에서 연대는 붕괴했고 민주주의는 허약해졌다. 선거철만 되면 요란해지지만 정작 알맹이는 빠진 정치의 수사들. 저자는 묻는다. 피의 대가로 우리가 살게 될 세상은 어떤 곳인가? 그 세상은 어떤 정의를 약속하는가? (164p) 이 질문에 답할 수 없다면 정치는 그저 '지저분한 전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최저임금에 대한 비유(201p)는 특히 날카롭다. 물을 끓이려면 불을 지펴야지 물만 더 붓는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노동의 가치가 자본의 횡포에 노출된 나라에서 최저임금은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그러나 정치는 어떤 집단이든 잠시 '액세서리'로 쓰고 버릴 뿐 그들을 존엄한 주체로 대우하지 않는다.


가장 민감하지만 통찰력 있는 비판의 지점은 '86세대'에 대한 비판이다. 241p에서 저자는 고백한다. 양심으로 해결되지 않는 불평등이 집 밖에 가득한데, '불편한 말과 위험한 정치가 필요한 때에 집이 너무 편안하다'고.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세대는 이제 주류가 되었고 기득권이 되었다(254p). 또한, 한국 자본주의는 이미 고도로 구조화되어, 형식적인 기회의 평등이 결과의 정의를 보장하지 못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공정경쟁'이라는 이름의 게임은 오히려 불공정한 결과를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었고 그 게임에 참여조차 못한 이들에 대한 미안함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한때 희망의 사다리였던 대학은 고도화된 서열화와 등록금 고통의 현장으로 전락했다.


이 책은 위험하다. 양쪽 모두에게 공격받기 딱 좋은 '모두까기 인형'을 자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형근 작가가 지닌 용기는 바로 그 '민감함'에서 나온다. 사회는 선과 악의 이분법이 아니라 위선, 인정, 타협이라는 복잡한 무늬로 짜여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다. 작가는 우리가 그동안 불편하지 않게 여겼던 생각들을 굳이 끄집어내어 불편하게 만든다. 중도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양극단의 확성기 소리만 가득한 한국 정치의 기형적인 단면을 냉철하게 해부한다. 정치적 무관심과 지나친 집착 사이에서 갈 길을 잃은 우리에게, 삶 자체가 곧 정치의 일부임을 일깨워준다. 차가운 냉소로 끝나지 않고 아는 것과 사는 것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든 메워보려는 한 지식인의 처절한 몸부림이다. 


이 책을 덮으며 우리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어디서부터 기준을 잡아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막막함이야말로 '앎'이 '삶'으로 전이되는 첫 번째 신호일 것이다. 모두를 위한 이야기를 써내려가려 했던 저자의 고투는, 결국 어중간한 우리 모두를 향한 따뜻하면서도 따끔한 연대의 손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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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방화 TURN 8
조영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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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부터 눈길을 끈다. 노란색과 빨간색이 어우러진 독특하고 감각적인 색 조화와 중간에 그려져 있는 절취선은 어떤 이야기를 할지 궁금하게 만든다. 뜯는 곳을 따라 종이를 뜯어내면 그 속에 숨겨진 주인공의 진짜 내면이나 감춰진 사건의 진실이 드러날 것 같은 호기심을 자극한다. 또한, 노란색 인물과 그 뒤의 검은 그림자(또는 타버린 형상) 사이를 가로지르는 절취선이 정상적인 일상과 파괴적인 충동 사이의 위태로운 경계를 드러내고 있다. 독자가 직접 표지를 '뜯는' 행위를 상상하게 함으로써 소설 속 방화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 궁금하게 만든다. 옴니버스 형식의 추리소설이면서 성장 소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기묘한 조합은 각 사건의 단서를 발견했느냐면서 사건마다 조금씩 절취선을 뜯듯 주인공의 내면을 드러내는 모습에서 알 수 있었다.


소설은 미스터리 범죄 수사극으로 다채롭게 이야기를 펼쳐낸다. 한 강력계 형사의 시점으로 수사 과정을 보여주는데, 마치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그려진다. 강력계 형사 함민은 셜록 함스라고 불릴 정도로 사건을 잘 해결해 나간다. 그런 그에게도 단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사건이 해결되지 않으면 그의 충동이 걷잡을 수 없게 커지기 시작한다. 그의 충동은 '방화'였다. 어느 순간부터 그에게 불을 지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그 사건을 기점으로 자책과 자기혐오가 달라붙어 방황에 대한 충동은 거세졌다.


만약 이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면 충동은 어디로 향하게 될까. 쉽게 해결이 되는 사건도 있었지만, 정황이 너무나 명확해서 뭔가 수상한 낌새를 가지고 있는 사건도 있었다. 수사가 미궁에 빠질 때마다 끓어오르는 충동은 그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유능한 팀원들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게 한다. 범인을 잡아야 하는 형사가 스스로 파괴적인 범죄(방화)의 유혹을 느끼는 역설적인 상황은 극의 긴장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충동의 근원은 1993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함민은 중학생이 되고 나서부터 불을 지르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함민은 동급생들과 함께 대전 엑스포에 가게 되었고, 모두가 잠든 밤 담배를 피우다 성냥불을 드럼통에 던지게 된다. 불이 거세게 타오르며 숙소로 옮겨붙는 모습을 본 함민은 친구들을 구조하고 큰 화상을 입게 된다. 학교에서는 '영웅'이라 칭송했지만,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죄책감으로 남는다. 사건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30년 만에 대전에 방문하고, 그곳에서 당시 화재 사건의 수사를 맡았던 형사와 마주한다. 함민은 그곳에서 어떤 진실을 마주하게 될까.


악마 같은 본성이 있을 것 같았는데 실제는 그러지 않았다. 죄책감이나 자기혐오라는 게 얼마나 큰 그림자를 내고 자기 자신을 악마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다뤄진다. 그 검은 그림자는 악마가 아니라 죄책감이 만들어낸 비대한 그림자였다. 그 어두운 그림자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매우 어려웠지만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빠져나올 수 있는 모습도 보여준다. 도움보다 더 중요한 건 자기의 마음이다. 자기 자신을 비로소 정면으로 마주하는 순간은 매우 빛났다. 우리는 모두 마음속에 각자의 절취선을 품고 살아간다. 그 선을 뜯어냈을 때 마주할 '진짜 나'는 생각보다 그리 괴물 같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위로를 건네고 있다. 이런 따뜻한 추리소설은 처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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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테라피 - 삶이 무의미하고 고통스러울 땐
빅터 프랭클 지음, 박상미 옮김 / 특별한서재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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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시대에는 그 시대만이 앓는 고유한 신경증이 있으며, 그에 따른 심리치료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아들러의 시대가 타인과의 비교에서 오는 열등감으로 고통받았다면, 현대인은 삶의 공허함에서 오는 무력감이라는 더 큰 통증을 마주하고 있다. 소외감과 불안 속에 기계처럼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다, 문득 멈춰 서는 일요일이 되면 어찌할 바를 몰라 불안과 무기력에 빠지는 '일요 신경증'은 우리 시대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실존적 공허로 인한 고통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무의미한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방법을 터득해야만 한다.


상당수의 현대인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을 행복이라 말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은 상담자를 찾아와 더 이상 인생에 기대할 것이 없다고 토로한다. 그러나 로고테라피는 "내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묻는 행위 자체가 정신적으로 건강하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삶의 의미를 고민하는 것은 심리주의적이나 병리학적으로 왜곡될 문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직면해야 할 가장 숭고한 실존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고난도 견딜 수 있다. 간절한 마음으로 내 안에 숨겨진 순수한 동기를 찾아낼 때, 우리는 비로소 삶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를 바꿀 수 있다.


인간의 본능은 더 이상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지 않는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상태는 곧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모르는 상실로 이어진다.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타인의 방식에 순응하거나 독재와 전체주의의 요구에 굴복하는 삶이다. 특히 전통의 상실은 젊은 세대에게 더 큰 공허함을 안겨준다. 로고테라피는 이러한 실존적 좌절의 현장에서 의미를 향한 의지를 일깨운다. 마치 북풍이 부는 날 동쪽으로 가기 위해 기수를 북동쪽으로 높이 틀어야만 목표 지점에 착륙할 수 있는 경비행기처럼, 인간 역시 지금의 나보다 더 높은 이상을 품고 스스로를 가능성 있는 존재로 인식할 때 비로소 진정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진정한 행복은 목표가 아니라 결과여야 한다. 행복의 문은 바깥쪽으로 열리기에, 억지로 밀고 들어가려 하면 문은 오히려 닫혀버린다. 행복에 집착할수록 삶의 의미는 멀어지고, 그 과도한 집착은 결국 상실을 부른다. 따라서 우리는 자아실현을 넘어 자기초월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내면이 아닌 세상 속에서 구체적인 과업을 실현하고 타인과 관계 맺을 때 의미는 완성된다. 의미는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현실 속에 존재하는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며, 그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는 고유한 존재는 오직 나 자신뿐이다.


삶에 무의미한 상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고통과 죄책감, 그리고 죽음이라는 비극적 삼중주조차 올바른 태도로 마주한다면 긍정적인 성취로 바뀔 수 있다. 로고테라피는 두려워하는 대상을 오히려 정면으로 시도하게 하는 역설 의도 기법을 통해 공포의 악순환을 끊어내고, 자신의 증세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해 웃을 수 있는 여유를 가르친다. 결국 치료의 핵심은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삶의 과제에 몰입하는 것이다. 여러 관점에서 삶을 분석하고 세심하게 접근하여, 나만이 가진 고유한 가능성을 실현하는 책임감을 회복해야 한다.


이 시대의 교육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의 양심을 일깨우는 데 집중해야 한다. 삶의 매 순간 숨어있는 요구와 의미를 스스로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며,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질문을 통해 각자의 무지를 자각하게 해야 한다. 자극의 홍수 속에서 유익한 것과 유해한 것을 구별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깨닫는 것만이 타인의 삶을 존중하고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길이다. 미래는 예측할 수 없기에 오히려 희망이 있다. 나라는 존재는 생각보다 위대하며, 내 삶의 의미는 내가 상상하는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삶이 던지는 질문에 회피와 변명이 아닌, 책임 있는 행동으로 응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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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창을 넘은 새 특서 어린이문학 14
손현주 지음, 함주해 그림 / 특서주니어(특별한서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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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서서히 좁아지고, 그 자리에 고층 건물들이 하나둘 들어선다. 유리새의 둥지는 조금씩 숲의 가장자리로 밀려난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 자리에서 유리새는 살아간다. 이 동화의 시작은 인간의 일방적인 도시 확장에서 비롯되지만,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쉽게 정리되지 않는 질문 하나를 남긴다. 우리는 과연 ‘공존’이라는 말을 얼마나 가볍게 사용해 왔는가.


공존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듣기 좋은 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 앞에서는 그 말을 쉽게 꺼내기 어렵다. 여기서 공존은 함께 살아가기 위한 선택이라기보다, 누군가를 밀어낸 뒤에야 내미는 말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유리새는 숲이 사라지는 동안 끊임없이 외곽으로 밀려났고, 다른 새들이 떠나는 사이 홀로 남았다. 떠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둥지를 잃고도 그 자리에 남아야 했던 이유는 단 하나, 곧 태어날 생명 때문이었다.


유리새는 까치와 까마귀의 위협 속에서 겨우 둥지를 지켜내고 아기 새들을 키운다. 먹이를 구하러 다니는 동안 몸에 묻은 잿빛 먼지는 결국 아기 새들조차 엄마를 알아보지 못하게 만든다. 아이를 지키기 위해 감내한 도시의 때묻음은 아이를 위협하는 모습으로 되돌아온다. 보호를 위해 감수한 희생이 오해를 불러온 것이다.


까마귀와의 대화 역시 공존이라기보다는 타협에 가깝다. 살아남기 위해 까마귀 앞에 나선 용기와 그 대가로 감당해야 했던 위험은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 유리새는 끝까지 둥지를 지켜내고, 아기 새들이 하늘을 날아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아이들이 도시에서 잘 살아내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시와 공존하지 못한 존재, 끝내 타협하지 못한 유리새는 목숨을 잃는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는 비극을 과장하지 않는다. 유리새의 죽음은 숭고하게 미화되지 않고 조용히 지나간다. 그래서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이 동화를 읽다 보면 ‘유리새’라는 이름이 왜 유리새인지 알게 된다. 도시는 투명한 유리창으로 가득하지만 그 투명함은 새들에게 결코 안전하지 않다.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혀 목숨을 잃는 새들처럼, 유리새 역시 인간이 만든 구조물 앞에서 끝없이 위험에 노출된다. 인간에게는 깨끗하고 안전한 공간이지만, 다른 생명에게는 치명적인 함정이 되는 공간. 이 동화는 그 사실을 설명하지 않고 자연스레 겹쳐 보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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