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세요, 맞춤법 때문에 전화했습니다 - 국립국어원 상담실 연구원의 365일 노동기
이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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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sns에서는 맞춤법을 일부러 틀리며 언어유희를 향유하기도 하지만 틀린 맞춤법으로 격렬한 설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 기이한 현상은 오늘날 우리에게 맞춤법이 문법적 약속을 넘어 상대를 판단하는 검열의 도구이자 자신을 표현하는 유희의 도구라는 양면성을 보여준다. 『여보세요, 맞춤법 때문에 전화했습니다』는 국립국어원 상담실 연구원으로 일하며 언어의 최전선에서 쏟아지는 질문과 갈등을 목격해온 저자의 기록이다. 이 책은 맞춤법이 더이상 '정답과 오답'의 문제가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의 문제로 바라보게 하는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우리는 흔히 맞춤법을 어긴 상대를 보며 그 사람의 지적 수준이나 성실함을 지레짐작한다. 책에서도 언급하듯 누군가에게는 맞춤법이 사람을 평가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이 규범을 서로를 가르는 선이 아니라 이어주는 다리라고 말한다. 맞춤법을 지키려는 노력은 결국 내 생각이 오해 없이 상대에게 닿기를 바라는 정중함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맞닿을 때 완성되는 관계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글은 삶과 역사를 담고 있다. 규칙이 중요할때도 있지만 대중이 새롭게 만들고 사용하는 말들은 그 자체로 시대의 '글'이 된다. 언어는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자 우리가 지나온 시간의 또 다른 흔적이기 때문이다. 낡은 규범에 갇혀 언어의 생동감을 포기하기보다, 규범 밖에서 피어나는 '말맛'과 새로운 표현의 가치를 인정하는 유연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거듭 강조한다. 언어 규범은 명확할지라도 인간의 감정은 그 바깥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며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결국 언어란 대중이 사용하고 조합하며 만들어가는 사회적 합의의 결과물인만큼 '언어의 유연함'은 변화하는 시대를 수용하고 타인의 삶을 이해하려는 포용력과 맞닿아 있다.

정말 다양한 사람들에게서 질문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사람들이 궁금한 것을 물어볼 때, 우리는 종종 그 뒤에 사람이 있다는 생각을 잊곤 한다. 그래서인지 저자의 고백은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어떤 '답변'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든다. 언뜻 같아 보이는 질문일지라도 질문마다 표현 방식과 의도가 다르고, 그에 따라 답변의 방향도 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데이터가 오가는 곳이 아닌 사람의 마음이 교차하는 공간임을 보여준다. 물론 항상 긍정적인 교류가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국어에 진심인 사람들의 열정이나 진심을 다하는 모습은 정말 경이로웠다. 누군가에게는 사소할지 모를 단어 하나, 문장 한 줄을 붙들고 치열하게 고민하는 모습은 새삼 언어는 삶의 흔적임을 증명한다.

AI가 클릭 한 번으로 완벽한 문장을 생성하고 오타를 잡아내는 시대가 되었지만, 기계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영역이 있다. 그것은 문장 사이에 숨겨진 행간을 읽어내고, 내 말이 상대에게 상처가 되지는 않을지 '아차' 싶어 한 번 더 갈무리하는 마음의 여유다. 무엇보다 띄어쓰기 한 칸을 두고 치열하게 고민하는 과정은 단순히 문장을 교정하는 기술적 행위가 아니다. 상대의 귀에 내 진심이 닿기 전에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말의 관상'을 가꾸는 일이다. 원고지 위의 오타보다 그 너머에 숨은 사람의 진심을 먼저 헤아려보는 시간을 가져보라는 제안을 한다. 그 진심이 말의 관상을 통해 상대에게 올바르게 닿을 때 비로소 언어는 제 역할을 다하기 때문에 때론 정답보단 진심이 더 중요할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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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 육아 번역기
임현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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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는 것은 감정을 공유하는 일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이 가진 고유한 세계를 다른 언어로 번역해내는 일이라고 한다. 임현주의 <한영 육아 번역기>는 한국과 영국처럼 서로 다른 문화에서 자란 두 사람이 부모라는 공통의 배역을 맡으며 생기는 일을 담아내었다. 연애, 결혼 그리고 육아처럼 큰 굴곡속에서도 서로 다른 삶을 '번역'해 나가는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오역들마저 사랑의 일부였음을 고백한다. 완벽한 이해라는 불가능한 지향점을 향해 나아가고, 또 용기를 내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처음엔 육아에 국한된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책에서는 아이를 키우는 일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물론 부부 사이에서 중요한 것은 육아이지만 그 부피가 너무 크지는 않아야 한다는 균형감각이 드러났다. 육아라는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나’라는 섬이 통째로 잠기지 않도록 부부만의 공간을 사수하고 육아와 무관한 대화를 나누며 ‘연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려 노력한다. 아이가 진정으로 바라는 모습은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부모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가꾸어 나가는 독립적인 어른의 뒷모습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타인의 시선이나 사회가 정해둔 ‘좋은 부모’라는 도달 불가능한 이상향에 매몰되기보다, 적어도 아이에게 ‘나쁜 어른’의 본보기가 되지 않겠다는 정직한 다짐이 드러난다.(102P)

이 책에서 드러나는 지점은 한국 사회의 절대적 기준에 대한 성찰이다. 우리는 '실패하지 않고 튀지 않는' 무난함을 지향하며, 그 기준에서 벗어날 때 불안을 느낀다. 스스로에게도 버겁다고 느끼는 그 엄격한 잣대를 타인에게도 똑같이 들이대며, 서로에게 일말의 여유조차 허용하지 않는 삭막함 속에서 우리 사회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무난함'이라는 압박과 그 사이에서 '나'를 지키는 법에 대한 치열한 고민도 드러난다. 한국 사회의 절대적인 미의 기준이나 타인의 삶에 쉽게 틈입하는 오지랖 섞인 시선들 속에서 평가하지 않는 마음이야말로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배려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고 말한다.

저자는 육아를 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한다. 물론 TV 속 육아는 상당히 달콤하고 현실의 육아는 거친 핸드헬드로 찍어낸 리얼리즘 다큐멘터리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투박하고 불완전한 화면 속에는 흉내 낼 수 없는 삶의 따뜻함과 사랑의 가치가 담겨 있다. 마냥 두렵고 어려울 것 같았던 육아를 그리고 아이들을, 삶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이 인상깊다. 이처럼 육아는 아이를 개조하는 프로젝트가 아니라 부모 자신의 미성숙함과 불안을 마주하고 이를 정성껏 '번역'해내는 일이라고 했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은 영화처럼 화려한 미장센을 갖추고 오지 않으며, 때로는 어설프고 웃기기까지 한 현실의 얼굴로 우리를 찾아온다(124P). 그 불완전함을 긍정하며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 저자는 그 인내의 시간 속에서 부모와 아이가 각자의 세계를 지키며 나란히 자라날 수 있다고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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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으로 출근합니다 - 식물과 함께 쓰는 나무의사 다이어리
황금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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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꿀 특종을 만들겠다는 포부로 달려왔던 저자는 10년이 지난 지금, 수목원에서 잡초를 뽑으며 "지금 즐겁다"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 버거웠던 마음은 내가 하고 싶은 일과 나의 일이 일치하는 지점을 찾으며 사라졌다고 했다. 맞지 않는 옷을 입고 버티던 그때와는 다르게 사람보다 숲과 나무, 바다와 새가 더 자주 보이는 삶이 훨씬 짜릿하다고 말했다. <숲으로 출근합니다>는 저자 뿐만 아니라 현대인들이 놓치고 살아가는 '식물의 세계'를 소개한다. 식물에 대한 감상뿐만 아니라 계절을 지나며 변화하는 나무와 꽃들의 생태를 세밀하게 관찰하고 기록한 책이다.

저자는 계절마다 피어나는 식물들을 하나하나 불러내어 그들이 가진 고유한 특성을 설명한다. 미처 다 소개하지 못한 1만 7000여종의 식물들에 대한 아쉬움이 잔뜩 묻어나오지만 이미 책은 서른세종을 소개하는 문장으로 가득하다. 저자가 소개하는 식물들에 대한 호기심은 이 책으로 인해 더 커져만 간다. 사진으로만 볼 수 밖에 없어서 '천리포수목원'에 꼭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무엇보다 식물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그들이 어떤 속도로 자라나는지를 관심가져야 한다는 저자의 설명은 생각해보지 못한 관점이라 더욱 흥미로웠다. 전반적으로 우리의 세상이 얼마나 인간 중심적으로 흘러가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자연은 동물, 식물과 더불어 살아가는 공간임에도 말이다.

책 곳곳에는 식물의 세계가 얼마나 합리적이고 정직한지를 보여준다. 그 속에서 피어나는 식물의 이야기에서 우리의 모습이 보였다. 길을 잃은 우리에게 돌아가야 할 삶의 자리를 되찾아가는 이정표가 되어준다는 것이다. 저자는 식물을 돌보는 일이 곧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과 닮아 있다고 말한다. "네가 좋으면 된 거야"라는 대답이나, 때로는 내 인생이 상대에게 기꺼이 잡아먹히길 바라는 그 지독한 외로움과 고생을 견디는 과정이 식물을 키우는 정성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또한, 식물이 각자 자라기에 적합한 환경이 있듯 사람에게도 자신에게 맞는 '속도감'이 중요하다는 점을 짚고 넘어간다. 남들의 시선에 맞춘 내가 아닌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집요하게 관찰하며 나만의 토양을 가꾸어야 한다.

이 책은 흔히 생각하던 고정관념의 방향 또한 달라지게 만든다. 흔히 생각하기로는 겨울을 생명들이 모습을 감춘 시기 혹은 봄을 기다리며 무기력하게 버텨야 하는 계절로 여기곤 한다. 하지만 저자의 시선을 따라가 보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겨울의 나무는 앙상하고 초라한 것이 아니라 잎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나무 본연의 골격과 특징이 추울수록 선명히 드러나는 '특별한 시기'를 보내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또한 봄 역시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되는 계절이 아니라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쌓아온 모습을 세상 밖으로 드러내는 결과물이다. 성과가 보이지 않아 초조했던 계절을 지나 나만의 고유한 형체를 가다듬고 나라는 묘목을 심어 꽃을 피우는 일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의 백미는 식물이라는 생명체 그 자체에 대한 지극한 예찬이다. 4월의 수목원을 걷다 보면 마치 자연이 연주하는 환상적인 악보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하고, 가지 끝에서 새순이 돋아나는 찰나의 연둣빛은 마치 세상에 초록색 필터를 씌운 듯 눈부신 감동을 선사한다. 인간의 기준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식물들의 정교하고도 강인한 생명력, 그리고 그들이 묵묵히 지켜온 시간의 궤적을 마주하다 보면 자연스레 경외심이 피어오른다. 저자의 말처럼 내가 죽은 뒤에도 이 땅의 주인으로 남을 나무들의 의연함은 우리가 발붙인 이 지구가 얼마나 경이로운 생명의 터전인지를 새삼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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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없는 세상의 아들들
고혜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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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공지능(AI)이 인간의 지능을 추월하고 기술이 세상을 유례없는 속도로 바꿔놓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 시대에서 '가장 인간다운 본질'은 무엇일까. 기술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데, 이상하게도 남성성에 대한 탐구는 과거에 발이 묶인 채 '정지' 상태다. 가부장제의 낡은 권위가 허물어진 자리에 마땅히 들어서야 할 새로운 남성성의 부재는 우리 사회를 다소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책 <아버지 없는 세상의 아들들>은 바로 이 공백을 인식하여 그리스 신화라는 인류의 거울을 통해 시대가 요구하는 건강한 남성성의 원형을 '재건'하고자 한다.

시대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여성성과 비례하게 남성성 또한 전형적인 고정관념에 갇혀있다. 모두가 변화를 맞이하는 와중에 정해진 모델을 제시하지 않고 그 행동이 잘못되었다라고 꾸짖기만 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 소위 '나쁜 남자'에 대한 정보는 사방에 넘치지만 '좋은 어른' 혹은 '건강한 남성'이 되기 위한 구체적인 지침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좋은 아들, 좋은 남편과 같은 역할로서의 전통적인 남성성을 요구한다. 시대적 배경과 맞지 않은 요구가 남성에게도, 여성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남성성의 공백은 이 시대의 아들들을 무력감과 분노, 혹은 정체성 상실이라는 모호함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때 책은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저자는 현대 사회의 고민을 인류의 가장 오래된 서사인 그리스 신화에 비추어 본다. 현대사회에서 제시하는 교과서가 아닌 고대 그리스인들의 지혜를 통해 남성성의 원형을 다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그리스로마신화의 상징적 왕이자 아버지인 제우스다. 그는 할아버지 우라노스의 '억압'과 아버지 크로노스의 '파괴'를 끊어냈다. 제우스의 위대함은 자신의 강력함뿐 아니라, 주변의 다양한 신에게 역할을 분배하고 그들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조율의 미학'에서 나온다. 내면의 모순과 대극을 외면하지 않고 그 갈등을 온몸으로 견뎌내며 세운 질서, 그것이 바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유연하면서도 단단한 남성성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우스의 질서가 무작정 '선함'에 치우쳐져 있지는 않다. 저자는 건강한 남성성의 회복을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관문으로 '그림자의 수용'을 꼽는다. 우리는 흔히 이상적인 아버지를 결점 없는 성자로 상상하지만 신화 속 아버지는 때로 파괴적이고 잔혹한 면모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내 안의 원시적이고 공격적인 에너지를 부정하고 무의식의 심연으로 밀어넣을 때, 그것은 오히려 통제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버린다. 때로는 비겁하고, 때로는 파괴적인 본능을 가진 나 또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시작된다. 마땅히 추구해야 할 남성성은 결점 없는 영웅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함을 마주하고 그 결함마저 자신의 역사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태도에 있다. 불완전함이야말로 신의 특징이라는 말처럼, 인간인 우리가 완벽하지 않은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은 남성성을 단 하나의 정답으로 규정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제우스가 다스리는 올림포스에는 저마다의 결핍과 강점을 지닌 다양한 아들들이 존재한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상처를 창조적 예술로 승화시킨 헤파이토스, 억압된 공격성을 생명력 있는 열정으로 전환하는 아레스, 명료한 이성으로 세계를 정돈하는 아폴론, 그리고 논리를 넘어 영혼의 황홀경을 노래하는 디오니소스까지. 더해 관계의 신비와 사랑의 에너지를 품은 에로스, 경계를 허물며 위트 있게 소통하는 헤르메스, 그리고 가장 깊은 내면의 진실을 마주하기 위해 스스로 가라앉는 하데스까지 더해지면 남성성으로 향하는 영혼의 지도는 비로소 온전한 형태를 갖추게 된다.

 

그리스로마신화에 등장하는 남신들은 현대 남성이 가질 수 있는 수만 가지의 얼굴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제우스가 될 필요도, 아폴론이 될 필요도 없다. 때로는 하데스처럼 자신의 어둠 속으로 내려가 영혼을 돌보아야 하고, 때로는 헤르메스처럼 경쾌한 위트로 세상과 대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 꿈틀대는 이 다양한 신성들 중 어떤 에너지가 지금 나의 영혼을 깨우고 있을지 들여다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 결핍과 마주하는 용기야말로 이 세상을 살아갈 아들들이 가져야 할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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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시 도깨비 편의점 3 특서 어린이문학 16
김용세.김병섭 지음, 글시 그림 / 특서주니어(특별한서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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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일상에 스며든 이 판타지 소설은 어느덧 세 번째 이야기로 돌아온 <도깨비 편의점 3>. 아이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는 따뜻한 위로의 공간이 다시 문을 열었다. 이번 시리즈에는 천 년 전 길달과 도깨비 비형의 가려진 서사를 보여주며 시공간을 초월한 인연의 애틋함을 보여준다. 그뿐만 아니라 도깨비 편의점을 찾은 손님들의 이야기를 통해 '운'과 '성장'에 깊이 있는 통찰을 건넨다. 우리 일상 곳곳에 숨어있는 '진심'이라는 이름의 도깨비불을 하나둘 밝히는 책이다.

이번 3권의 백미는 단연 길달과 비형의 서사다. 아홉 개의 촛불이 모두 꺼져야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었던 길달은 어둑시니의 방해로 위기를 맞이한다. 소멸하거나 악귀가 되어야 하는 운명 앞에서 비형은 선택해야 했다. 그 비극 앞에서 "천 년의 시간이 흐르고 기인을 만나면 도깨비 시간에서 깨어나리라" 라는 말을 남긴 채,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금발 머리의 길달과 도깨비불을 쫓던 비형이 25시 편의점의 현대적 공간에서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이 저번 책에서 또 밝혀지면서 이 서사에 깊이를 더한다. 숨겨진 이들의 사연은 『삼국유사』 속 비형랑과 길달의 설화를 모티브로 삼으며 역사 속 '복종과 처단'의 관계를 '희생과 애틋한 그리움'으로 재해석하며 고전의 현대적 변주를 보여준다.

이번 작품에서도 '황금 카드'는 중요한 아이템으로 등장한다. 도깨비 편의점은 없던 것을 단번에 채워주는 마법의 공간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가지고 있지만 부족했던 '용기'나 '힘'을 주는 공간에 가깝다. 책은 '운'이 요행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행운이 아니라 나 자신의 내면과 연결되어 있음을 역설한다. 행운과 불운은 동전의 양면 같아서 그것을 정의하는 것은 외부의 평가가 아니라 나의 해석이기 때문이다. 행운을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 조각은 다름 아닌 '용기'. 그런 의미에서 '황금 카드'는 마법을 통해 소원을 이루어주는 요술 방망이가 아니라 나 자신을 믿는 마음을 시험하고 증명하는 도구다.

 

"누군가를 아끼는 마음은 흉터를 낫게 하고 용기를 준다"라는 말처럼 땅과 하늘의 경계에 놓여 있는 도깨비 편의점이라는 공간에서 아이들은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것이 잘못된 일이든, 용기가 필요한 일이든 아이들은 더 이상 도망치지 않는다. 조금씩 성장하기 시작하는 책 속의 모습을 보며 우리에게도 필요한 태도임을 강조한다. 요즘 우리에게는 잘못을 인정하는 용기와 사과하는 진정성이 부족하다. 자기 잘못을 감추기 급급한 어른들이 세상에서 이 작품 속 아이들이 보여주는 '정면 승부'는 우리에게 묵직한 울림을 안겨준다. 현실의 고단함 속에서도 타인을 아끼는 마음을 계속 가지고 살아간다면 도깨비 편의점의 문을 두드리지 않아도 책보다 더 마법 같은 변화를 맞이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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