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없어도 정말 괜찮나요?"에 실제 살아가는 모습으로 대답하고자 이 책을 썼다. 정말로 괜찮다고. 둘이서 담담하게, 잘 살아가고 있다고.

《엄마가 아니어도 괜찮아》를 쓰며 하고 싶은 말들이 참 많았습니다.
‘아이 없이 살아요.’
이 한마디에 쏟아지는 많은 질문에 하나하나 답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만난 분들은 ‘아이 없이 사는 사람들은 그저 편하게 살려는 사람들’이라는 편견을 전부 깨주었습니다(그리고, 편안하게 살고 싶다는 바람이 잘못된 건 아니잖아요)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마음을 정하기까지 남편과 아주 많은 대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고통스러운 순간도 있었지만, 저희 둘이 훨씬 단단해진 과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누구에게나 예상치 못했던 순간에 힘껏 넘어진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학창시절 그토록 소중했던 우정을 지키느라 했던 삽질, 땡땡이의 대가로 ‘빵꾸’ 났던 학점, 오랫동안 짝사랑했던 선배가 내 친구랑

있는 힘껏 뛰었는데, 그 힘 그대로 넘어졌다. 정말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일어나고자 하는 의지조차 생기지 않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넘어져 있었다. 고통이 사라질 때까지, 스스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모든 것을 놓아버렸다.

"사람이 살다 보면 동굴에 들어가는 순간이 올 수도 있죠. 그러나 소중한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는 방식까지는 받아들일 수 없군요. 적어도 동굴에 들어가니 찾지 말라고 하는 편이 가까운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라고 생각해요. 그것이 아니라면 제가 그 정도의 존재는 아니란 뜻이겠지요. 다음 연애는 동굴로 들어가는 걸 온전히 이해해주는 사람과 하길 바라요. 저는 아니에요. 아프다 해서 감기약을 사 왔는데, 얼굴 보니 괜찮은 것 같군요. 이건 먹든지 버리든지 알아서 하세요."

누구나 한 번쯤 자신이 목표했던 그곳 앞에서 넘어지는 순간을 맞이할 것이다. 당신도 나처럼 옆이나 뒤를 돌아볼 여유 없이 달려왔다면 비슷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까 한다.

나는 딩크보다 ‘무자녀’라는 표현을 더 선호하지만, 타인에게 내 상황을 빨리 이해시키기엔 딩크만한 단어가 없다. 여기에 ‘자발적 딩크’, ‘비자발적 딩크’, ‘싱크’, ‘딩펫’ 등 다양한 단어들이 출현했지만, 그들만의 리그에서 사용될 뿐 일반적으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무자녀를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의 글에는 늘 ‘그러다 후회한다’라는 댓글들이 수도 없이 달렸다. 딩크족이거나 딩크이길 희망하는 이들이 모인 커뮤니티에서도 후회라는 단어는 자주 등장한다.

후회 없는 선택이 있을까? 어떤 선택이든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지금 누군가 내게 아이 없는 삶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냐고 물으면, 다행히 만족하며 살고 있다고 말한다. 때로 혼자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외로워지긴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혼자가 될 수 있으니 이것이 나에게만 국한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남아 있는 앞으로의 시간을 어떻게 잘 채워나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편이 훨씬 생산적이라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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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뛰어난 사람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믿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온전히 자신을 지키는 일이 우선이다. 조용한 곳에 가서 눈을 감고 깊은숨을 쉬는 거다. 그러고 나서 당신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자. 사랑한다는 말은 비타민처럼 필수다. 누군가 말해주지 않으면 당신 스스로 들려주어야 한다.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말이다.
"이웃을 항상 자신처럼 사랑하라. 그러나 그에 앞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처칠은 ‘즉흥 연설의 대가’라는 평을 들었다. 챔버스와 처칠에게는 한 가지 놀라운 공통점이 있었다. 다이내믹하고 자연스러운 그들의 연설은 사실 ‘즉흥’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 며칠씩 몰입해서, 끝없이, 완벽할 정도로 연습한 연설이었다.

당신이 무엇을 하든 ‘떨려서 제 실력을 발휘하기 어렵다’면 아직 준비가 부족한 것이다.

‘실전을 연습처럼’ 할 수 있는 여유는 열심히 준비한 자만이 누릴 수 있다. 떨지 않고 제 실력을 발휘하고 싶다면 엄청나게 노력하고 완벽하게 준비하라.

"연습은 잘할 때 하는 것이 아니라 잘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말콤 글래드웰Malcolm Gladwell이 말한 단순한 진리를 잊은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덤블도어는 싸우고, 또 싸우고, 계속 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었다. 오직 그럴 때만이 설사 악을 뿌리째 뽑아 없애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궁지에 몰아넣을 수는 있다면서."

악은 늘 부지런하고 철저하며 끈질기다. 우리 마음속의 악을 보라. 얼마나 부지런하고 철저하게 우리를 파고드는지. 우리가 ‘해야 할 이유’ 한 가지를 꼽으면 게으름은 ‘내일 해도 되는 이유’ 수십 가지를 찾아낸다. 그런 악을 끝내 이길 수 있을까. 이기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선과 악이 과연 비등한 싸움을 할 수 있을까.

싸우고, 또 싸우고, 계속 싸우는 것이 중요하다.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 악을 없애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궁지에는 몰아넣을 수 있다고 덤블도어는 말했고, 알다시피 해리 포터는 끝내 볼드모트를 이겼다. 이제 우리 차례다.

테레사 수녀Mother Teresa는 이런 말을 남겼다.
"신은 우리가 성공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우리가 노력할 것을 요구한다."

"네가 이루고 싶은 게 있거든 체력을 먼저 길러라."

아무리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해도 그보다 힘든 상황은 항상 존재할 것이다.

우리가 지옥이라 여기는 순간도 누군가에게는 천국일 수 있다. 어쨌든 그날도 나는 목표했던 운동량을 채웠다.

물과 모래는 틈 사이사이로 스며들었다. 강사는 말했다. "여러분의 일과도 이와 같습니다. 꼼꼼하게 살피면 반드시 틈새 시간이 있습니다.

"작은 것을 넣은 후에 큰 것을 넣으면 다 들어가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사소한 일을 먼저 처리한다면 중요한 일을 할 시간은 반드시 부족하게 됩니다. 중요한 일부터 하십시오. 바로 삶을 바꾸는 방법입니다."

시간을 절약하고 싶은가. 조약돌과 모래, 물의 순서를 잊지 말자.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이렇게 말했다.
"시간을 선택하는 것은 시간을 절약하는 것이다."

"책임감Responsibility이란 당신이 어떻게 반응Response할지 선택할 수 있는 능력Ability을 말한다."

나는 글을 쓰기로 약속한 상태지만 ‘쓰기 싫다’라는 느낌이 교통사고처럼 덮쳤다. 사고는 내가 통제할 수 없기에 사고다. 느낌이 드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다음이다. ‘하기 싫다’는 느낌에 따라 하루를 건너뛸 수도 있고, 꾹 참고 약속대로 작업을 할 수도 있다. 느낌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이 순간의 ‘나라는 사람’이 결정된다. 그것이 바로 ‘책임감’이다.

혹여 당신에게 공부하기 싫다는 생각이 불쑥 올라오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저 느낌일 뿐이다. 당신이 책임감 있는 사람인지 여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상에 앉느냐’, 여기에 달려 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약속대로 글을 썼다.

빌 게이츠Bill Gates는 언젠가 모교의 후배들에게 "세상은 원래 불공평하다.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라고 조언한 적이 있다.

그렇다고 그저 불평하며 앉아 있을 것인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겨냥할 수 있는 과녁을 택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부지런히 체력을 기르고, 열심히 공부하고, 끈질기게 도전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인생을 역전시켰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날도 올 것이다.

세상이 불공평한 것은 사실이지만, 누구에게나 가능성이 있다는 것 또한 진실이다. 다만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다.

"그대가 할 수 있거나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 그것을 시작하라. 대담함에는 비범한 재능, 힘, 마력이 담겨 있다. 지금 바로 그것을 시작하라."
— 대니얼 코일, 『탤런트 코드』

Somebody가 된다는 것은 새로운 세상에서 태어남을 의미한다. 엄청난 양의 일과 리스크와 남들의 기대를 감당해야 하는 사람이 됨을 뜻하는 것이다. 당신은 그럴 자세가 되어 있는가. 답이 "예스"라면 좋다. 어제까지의 당신에게서 벗어나 지금부터 당장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살아가면 된다. 그들처럼 노력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언젠가 당신도 Somebody가 될 수 있다.

독일의 소설가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는 말했다.
"태어나기를 원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 책을 구입했을 때나 새 논문을 복사했을 때에는 즉시 첫 장을 읽어두십시오. 그러면 책과 논문이 생경하지 않게 됩니다. 다음에 읽을 때는 시작하는 기분이 적게 들어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미국의 목사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는 "의욕적인 목표가 인생을 즐겁게 한다"라고 통찰했다. 정확한 지적이다. 목표가 있어야 재미있다. 사실 우리가 즐기는 게임도 목표와 피드백이 빈틈없이 구성된 프로그램에 불과하다. 적기를 쏘아 격추하든 몬스터를 때려잡든, 명확한 목표가 제시되고 화려한 피드백이 주어지는 것이 게임의 본질이다.

재미는 목표에서 나온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공부에서 재미를 얻고 싶으면 목표를 세워보자. 오늘의 공부량을 정하고 달성하도록 노력하자. 도달할 수 있을지 없을지 최선을 다해 매달려보라는 이야기다. 당신은 목표를 향한 피드백에 재미를 느낄 것이다. 일단 공부에 재미를 붙인 사람은 공부에 대한 걱정 따위는 접어도 좋다.


일반인이 창조적인 뇌를 만들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첫째,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할 것.

둘째, 하루 중 일정한 시간을 떼어 명상을 실천할 것.

셋째, 상상하는 훈련을 할 것.

낸시가 추천한 훈련들의 핵심을 한마디로 하면 ‘매일 일정한 시간을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고 인지하는 법을 배우는 데 할애하라’는 것이다.

여유 시간이 주어졌을 때 사람들은 그저 TV를 보거나 SNS를 뒤적거리며 시간을 보내는 편을 택한다. 소파에 누워 감자칩이나 먹는 ‘카우치 포테이토’가 되어가는 것이다. ‘머리를 좋게 만드는’ 방법이 아주 가까이 있음에도 말이다. 자, 당신은 ‘카우치 포테이토’와 ‘창조적인 머리’ 중에서 무엇을 택하겠는가.

어느 합격 후기에 이런 말이 있었다. "수험생들은 어떤 교재를 택할 것이냐에 많은 시간을 쓰지만, 이는 무의미하다. 대다수가 보는 두어 권 중에서 무엇을 택해도 좋다. 중요한 것은 많이 공부하는 것이다. 즉, 남들과 같은 책으로 하되 남들보다 많이 하는 것이 핵심이다."

특별한 공부 기술을 찾지 않아도 된다. 미국의 소설가 프랭크 허버트Frank Herbert도 "평범한 사람은 특별한 것에 관심이 있고, 위대한 사람은 평범한 것에 관심이 있다"라고 짚어냈다.

사실 고수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평범한 자질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비범하게 노력했을 뿐이다.

취임하는 족족 적자 병원을 흑자로 만들어 명성을 얻은 미국의 어느 병원 대표는 "필요한 것은 접착제 한 통뿐"이라고 말했다. "접착제를 엉덩이에 바르고 나서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라고 덧붙이면서 말이다.

그저 평범한 방법으로 더 많이 더 열심히 공부하자.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위대한 사람의 공부 방법은 결코 특별하지 않다

새우는 죽을 때까지 허물을 벗는 생물이다. 새우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허물을 벗고 성장한다. 노인의 잔칫상에 새우 요리를 올리는 것은 새우처럼 평생 허물을 벗고 성장하라는 의미다.

인생은 길다. 끊임없이 노력할 각오만 되어 있다면 기회는 적지 않다. 지금 뒤처졌으면 어떤가. 앞으로 60~70년이 남아 있지 않은가.

프랑스의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는 "세월의 나이를 슬퍼하지 마라. 진정 슬퍼해야 할 것은 마음의 나이다"라고 조언했다. 새우를 떠올리자. 당장 그들처럼 허물을 벗고 공부하자.

최악의 상황을 가늠해보면 마음이 좀 가라앉는다. 죽지 않는 한 빠져나갈 구석은 언제나 있기 때문이다. 대개 그렇게까지 절망적인 일은 아닌데 걱정에 대한 ‘집착’ 때문에 멘탈이 무너졌을 뿐이다.

미국의 전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는 이렇게 말했다.
"우선 나의 확고한 신념을 하나 이야기하고자 한다.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단 한 가지는 바로 두려움 그 자체뿐이다."

바꿀 수 없다면 운명이 아니다
 

당신은 ‘운명’이 무엇인지 아는가. 운명의 운運은 움직인다는 뜻이다. 무엇이 움직이느냐, 명命이 움직인다. 명은 ‘목숨 명’ 자다. ‘하늘의 명’이다. 당신의 직업, 공부, 애정, 그리고 금전. 모든 것이 ‘어떻게 되리라고 하늘이 명령한 것’이 명命이다. 법이 개정되듯, 상사의 지시가 변동되듯, 손님이 주문을 바꾸듯 명도 움직인다. 그러므로 운명이라는 말은 본질적으로 ‘움직임’을 의미한다. 명命이 움직인다運고 해서 운명運命인 것이다.

명은 절대로 고정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시험 운이 있다, 없다’라고 단정 짓는 것 자체가 틀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누군가 "당신은 공부 운이 지독히도 없군. 그만둬"라고 하면 피식 웃고 휴지로 꼭꼭 싸서 쓰레기통에 버려라.

바꿀 수 없다면 운명이 아니다. 영국의 정치인 벤저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 역시 "운명이 있다고 줄기차게 믿는 사람은 요행을 기다리는 변덕스러운 사람이다"라고 했다. 당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기에運 운명運命이다.

운명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가.
세상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명命이 있다.
어떤 직업을 택하고 누구를 만나느냐 하는 모든 것이 명이다.
명은 움직이기에運 운명運命이다.

그렇다면 어떤 명을 끌어당길 것인가.
그것은 인연因緣에 달려 있다.
인연은 ‘원인’이다. 원인은 2가지,
인因과 연緣으로 이루어졌다.

인因은 ‘주된 원인’, 연緣은 ‘부차적인 원인’을 말한다.
주된 원인은 당신의 마음이다.
‘공부를 잘하고 싶다’는 의지다.
부차적인 원인은 당신의 주변 환경이다.
부모님의 지원, 좋은 친구, 학교 같은 것들이다.
부차적인 것은 주된 것에 따른다.

연緣이 있어도 인因이 없다면 명은 바꿀 수 없다. 의지가 없는 사람을 다그쳐봤자 소용없는 이치다. 그러나 당장은 연緣이 없더라도 인因을 품고 노력하는 사람은 언젠가는 연緣이 닿아 명을 바꿀 수 있다. 운명을 바꾸는 것은 결국 마음이다. 『법구경』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모든 일은 마음이 근본이다. 마음에서 나와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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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누군가의 영광을 보았다면 저녁이면 그의 몰락을 볼 것이니, 누구도 승리의 영광을 오랫동안 신뢰할 수 없으며, 누구도 앞날의 희망을 쉽게 포기해서도 안 된다. 클로토가 인간의 실을 잣고 멈추나니, 그녀가 쉬는 틈에 행운이 찾아오고, 운명의 물레는 쉴 새 없이 돌아가지만, 신의 호의를 오랫동안 받을 수 있는 자, 이 세상에는 없으니, 그것으로 인간은 자신의 내일을 보증한다네. 신이 우리의 삶으로 돌진해 오는 동안에도, 운명의 물레는 돌개바람처럼 돌아가나니.

세네카, 튜에스테스, 613

자네의 명성도, 돈도, 지위도 신뢰하지 말게. 오직 자네의 힘, 즉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자네의 판단력만을 신뢰하게. 이것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제한받지 않도록 하지. 이것만이 깊은 수렁으로부터 우리를 건져주고 부자와 권력자들에 맞설 수 있게 하네.

에픽테토스, 대화록, 3.26.34-35

기억하라. 당신은 연극에 출연한 배우로 극작가가 만들어낸 등장인물을 연기해야 한다. 그가 짧은 연극을 원한다면 짧을 것이요, 긴 연극을 원한다면 길 것이다. 그가 거지 역할을 바란다면 그 역할을 잘 해내야 한다. 그가 불구자, 우두머리, 혹은 평범한 사람의 역할을 맡기더라도 잘 해내야 한다. 그것이 당신의 의무다. 당신에게 할당된 역할을 수행하라. 하지만 배역 선택의 권한은 다른 이에게 있다.

에픽테토스, 엥케이리디온, 17


운명에 순응하라는 것이 거지처럼 살라는 것이 아니다. 거지와 불구자는 역경에 대한 비유일 뿐이다. 삶은 주사위 도박처럼 무작위적이다. 스토아 사상은 이렇게 무작위적인 삶에서 역경이 닥치더라도 한탄하지 말고 돌파할 것을 당부한다. 그것이 인생이라는 연극에서 우리가 명배우가 될 수 있는 길이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다

일본에서 유명한 한 사원은 23년마다 재건된다. 이러한 사이클이 60번 이상이었다고 하니 이 사원의 나이는 1400년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60번 연이어 새롭게 지어진 사원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세상에 대한 우리의 의견은 스냅사진과 유사하다. 아주 짧은 시간의 기록일 뿐이다. 우주는 지속적으로 변화한다. 우리의 손톱도 조금씩 자라고, 깎이며, 또 자란다. 새로운 피부가 죽은 피부를 대신하며 오래된 기억은 새로운 기억으로 대체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같은 사람인가? 우리 주위에 있는 다른 이들도 동일 인물인가?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우주는 변화하며 삶은 의견일 뿐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4.3.4b

외부 사건으로 고통을 겪을 때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그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우리의 판단이다. 그리고 우리는 즉시 그 판단을 없애버릴 수가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8.47

우리 또한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대통령으로서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가 합리적 선택의 힘이 미치는 것들에서만 선과 악을 판단한다면 신을 탓할 이유도 악의적인 타인을 원망할 이유도 없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우리의 삶은 자신의 합리적 선택으로 시작해, 합리적 선택으로 끝이 난다. 외부 사건은 통제할 수 없으며,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의 태도, 사건에 대한 반응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 오직 도덕적이고 강한 자만이 자신의 책임을 인정한다.

공적 생활에 대한 불평을 아무도 듣지 못하게 하라. 너 자신의 귀에 들려서도 안 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8.9

영국의 수상이었던 벤저민 디즈레일리의 좌우명이 이것이다. "불평하지도 설명하지도 말라."

아우렐리우스와 마찬가지로 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책임감이라는 짐은 막중하다. 이것저것에 대해 불평하기는 쉽다. 저질러 놓은 일을 변명하고 정당화하는 것도 쉽다. 그렇다고 무언가를 달성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부담이 가벼워지는 것도 아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다가올 모든 것들이 얼마나 빨리 나타났다 사라지는지를 생각하라. 실체는 쉼 없이 흘러가는 강물과 같다. 존재들의 활동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존재들의 원인은 무한히 변동하기에 그 자리에 굳건히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5.23

헤카토가 말했네. "희망하지 않으면 두려움 또한 종식된다."··· 이 두 질병(희망과 두려움)의 가장 큰 원인은 현재 주어진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않은 채, 생각만 너무 앞질러 갔기 때문이라네.

세네카, 윤리적 서한, 5.7b-8

희망은 일반적으로 좋은 것이라고 받아들여진다. 이에 반해 두려움은 나쁜 것이다. 하지만 로도스의 현자라고 알려진 헤카토에게 이 둘은 동일한 것이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추정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희망과 두려움은 모두 우리가 실제 살고 있는 현재의 적이다. 둘 다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을 사랑하라)’에 대항하는 삶을 의미한다.

우리의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희망과 두려움 속에는 갈망과 걱정이 위험스러울 정도로 함유돼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갈망은 걱정의 원인이 되고, 걱정은 다시 갈망을 유발한다.

철학이 오만과 아집으로 행사될 때 수많은 파멸의 원인이 된다네. 철학으로 하여금 타인의 허물에 격분하도록 두지 말고 자네의 허물을 벗겨내도록 하게.

세네카, 윤리적 서한, 103.4b-5a

철학이란 선체가 부식되지 않도록 배 밑바닥에 붙은 따개비를 벗겨내듯 자신의 실수를 걷어내는 것이다.

1. 참된 것만을 받아들여라.

2. 공익을 위해 행동하라.

3. 통제할 수 있는 것만을 갈망하라.

4. 주어진 것을 받아들여라.


다음 세 가지 생각을 항상 유지하면서 그 명령에 따라 어떤 도전이라도 받아들여라. "신과 운명이 나를 이끌어주며 오래 전 나를 위해 그 목표를 정해 두었다. 나는 그를 따를 것이며 휘청이지도 않을 것이다. 설사 내 의지가 약할지라도 나는 하던 대로 할 것이다."(클레안테스) "누구든지 필요한 것을 받아들이는 자를 현명하다고 생각하라. 나머지는 신의 문제이다."(에우리피데스) "이것이 신을 기쁘게 한다면 그대로 두라. 그들이 나를 죽일 수는 있어도 나를 다치게 할 수는 없다."(플라톤, 크리톤의 변명)

에픽테토스, 엥케이리디온, 53

만약 우리가 현재를 볼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보는 것이요, 태곳적부터 이어져 내려온 영원을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일은 동일한 종류의 현상과 관련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6.37

우리에게 유익한 것은 시간이 흘러간다고 늘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한 순간이라도 현명한 사람이 된다면 영원히 덕을 수행하는 사람만큼 행복할 수 있다(크리시포스)

(Loeb, p.682)플루타르크, 모랄리아 : ‘상식에 반하는 스토아 철학’ 1062

행복의 순간을 붙잡으려고도 유지하려고도 하지 마라. 시간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다. 즐기고, 인식하고, 기억하라. 잠깐 누리는 것은 영원히 누리는 것과 동일하다.

아름다운 유리컵을 가진 선승이 있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 "컵은 이미 깨졌다." 그는 컵을 아끼고, 즐겨 사용했으며, 방문객들에게 컵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일에도 스스럼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컵이 정말 깨졌다. 선승은 이렇게 말했다. "당연한 일이지."

에픽테토스와 램프에 관한 이야기도 이와 비슷하다. 그에겐 아주 값비싼 램프가 있었지만 문단속을 하는 법이 없었고, 어느 날 그 램프를 도난당하고 만다. 에픽테토스는 미련 없이 싼 것으로 교체를 했다. 다시 도둑맞아도 될 만큼 아주 싼 램프였다.

파괴, 손상, 분실에 따라오는 감정은 불쾌한 것이다. 하지만 겨울철에 눈이 왔다고 혹은 장마철에 비가 왔다고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는 사람은 없다. 그와 같은 사건이 일어나리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생각한다면 어떤 일이 우리를 놀라게 할 수 있겠는가? 가능성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는 사람에게 어찌 상실감이 있을 수 있겠는가?

짧게 말하겠네. 이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게. 합리적 선택의 범위를 벗어난 것을 소유하려고 한다면 자네의 선택 능력이 파괴될 것이야.

에픽테토스, 대화록, 4,4.23

에픽테토스도 같은 생각을 했다. "집착으로 인해 인간은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한 번 갖게 되면 손에서 놓지 않으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렇게 계속 유지하려다가 소유한 것의 노예가 된다.

모든 것은 변한다. 잠깐 가지거나 잠시 누리는 것만이 우리에게 허락된 전부이다. 영원한 것은 스토아가 말한 합리적 선택 능력, 오직 그것뿐이다.

상실의 고통을 경험할 때마다 신체의 일부처럼 여길 것이 아니라 깨질 수 있는 유리처럼 생각하게. 이를 기억해야 고통을 겪지 않을 것이야. 자네의 아이, 형제자매, 친구에게 입맞춤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네. 그것이 자네가 바라던 최상의 경험이었다 할지라도,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장군들도 죽음을 회피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없네. 단지 잠깐 주어지는 것일 뿐, 영원히 가질 수는 없네.

에픽테토스, 대화록, 3.24.84-86a

엘리자베스 비숍은 상실에 대해 이렇게 노래했다. "많은 것들은 언젠가는 상실될 의도로 채워진 것이니 그것을 잃는다고 재앙은 아니다··· 더 많이 잃고, 더 빨리 잃는 연습을 할 것. 그것을 잃는다고 불행한 것은 아니니."

헤비메탈 그룹 메탈리카의 <네 잎 클로버는 없다 No leaf Clover>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터널 끝에서 부드럽게 빛나던 저 불빛이 그저 우리를 향해 달려드는 화물열차였다니.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것은 회피가 아니다. 오히려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 우리는 어떤 대화가 문제해결을 위한 것인지, 갈등의 원인인지 이미 예감하고 있다. 갈등이 일어날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굳이 자발적으로 뛰어들 필요는 없다.

"무엇이 일어나든 괜찮아질 것이다."

어떤 일이든 이성의 지시를 따르는 자에게 마음의 평정과 적절한 행동이 따라온다. 그들은 쾌활하면서 동시에 침착하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10.12b


매일을 마지막처럼

삶의 마지막이 다가온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준비하세. 아무것도 미루지 않도록 하세. 그리고 하루하루 인생의 대차대조표에 균형을 맞추도록 하세··· 매일을 마지막처럼 사는 자에게는 결코 시간이 부족하지 않으니.

세네카, 윤리적 서한, 101.7b-8a

그런데 그 이유는 ‘현재’ 때문이다. 과거를 바꿀 경우 현재 또한 바뀌기 때문이다. 결국 되돌리거나 바꿀 수 있는 시간은 없다. 지나간 과거는 돌이킬 수 없고, 미래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모른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시간은 오로지 현재다.

해야 할 일을 하도록 하자. 지금이라도 바로 이승을 떠날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2.11.1

철학은 우리 인간에게 어떤 외적 권한이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네.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자신의 권한을 넘어선 것이지. 나무가 목수에게 필요하고 청동이 조각가에게 필요한 것처럼 철학은 우리가 삶의 기술을 완성하기 위한 가장 적절한 재료일 뿐이야.

에픽테토스, 대화록, 1.15.2

삶과 죽음은 분리된 것이 아니며, 삶을 알아야 죽음을 알 수 있고, 죽음을 알아야 삶을 알 수 있다. 바로 그것을 위해 철학이 존재한다.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처럼 행동하지 마라. 예정된 운명은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다. 살아가는 동안, 또 할 수 있는 한 좋은 사람이 되도록 하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4.17

끝이 난 것처럼, 이미 죽은 사람인 것처럼 자신의 삶을 생각하라. 남은 것을 여분의 은혜라 생각하고 자연의 본성에 맞추어 살라. 운명이 당신을 다루는 방식을 사랑하고 주어진 역할을 다하라. 그것 외에 무엇이 더 잘 어울리겠는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7.56-57

지금 느끼는 감정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그 감정 속에서 기대치와 불쾌감을 제거하고 긍정적인 면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그 고통은 오롯이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삶의 일부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스토아가 말한 슬픔을 정복하는 방법이다.

다짐하건대, 나는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자에게는 내게 주어진 단 하루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세네카, 마음의 평정에 대해, 1.11b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은 무한히 되풀이된다." 이것이 바로 영겁회귀다. 니체는 근대인들의 직선적인 시간관이 그릇됐다고 말한다. 직선적인 시간관은 삶의 의미를 오늘이 아니라 미래에 두기 때문이다.

현재의 삶에 대한 힘겨움과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은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니체는 삶이란 영원히 되풀이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니체의 허무주의이지만 그 허무주의에는 현재의 삶에 대한 긍정이 숨어 있다. "삶은 영원히 되풀이된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현재를 더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 니체가 말한 초인이란 바로 그런 정신적 자유를 얻은 사람을 말한다. 현재의 삶에 대한 조건 없는 긍정과 충실함이야말로 영겁회귀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당신이 정상 체중이라면 몸무게가 두 배로 불지 않았다고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수명이 길지 않다고, 더 많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불만을 품는가? 체중에 만족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에도 만족하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6.49

세네카는 "어떻게 쓰는 줄만 알면 삶은 충분히 길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우리는 주어진 삶을 낭비하면서 더 긴 삶을 원하기만 한다.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을 먹으면서 몸이 건강하길 원하고, 운동을 하지 않으면서 체력이 좋아지기를 바란다. 텔레비전만 보면서 지식이 늘어나기를 바라며, 빡빡한 스케줄의 여행만 다니면서 경험이 풍부해지길 바란다. 시간이 더 늘어난다면 삶을 낭비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지금 이 순간을 낭비하고 있는데 늘어난 수명이 무슨 소용인가? 헛되이 버려진 시간을 보상할 수 있는 방법은 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게 사는 것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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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의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라. 결국엔 이겨낼 것이라는 믿음을 잃지 마라.

누군가는 우리를 사슬로 묶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누구인지를 바꿀 수는 없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최악의 고문과 잔인함으로도 파괴되지 않는 힘이 인간에게는 있다

자네가 누구인지를 숙고하게. 무엇보다 인간으로서 자신이 가진 합리적 선택보다 위대한 힘은 없네. 그것으로 다른 모든 것들을 감독하게. 그러면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다네.

에픽테토스, 대화록, 2.10.1

운명의 여신에게 속지 않는 한, 운명에 의해 파괴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좋은 시절 거만하지 않은 사람들만이 변화 속에서도 거품이 꺼지지 않습니다. 어떤 변화에도 자신의 영혼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천하무적입니다. 왜냐하면 좋은 시절 그들이 보여준 힘이 역경에 대항하기 때문입니다.

세네카, 어머니 헬비아에게 보내는 위로, 5.4b, 5b-6

두려움에 압도를 당하도록 자신을 내버려두면 살아야 할 이유도 사라지고 비탄 또한 끝이 없게 된다.

세네카, 윤리적 서한, 13.12b

‘공포심은 단지 불행을 창조하기 때문에 두려워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두려움을 회피하려고 할수록 두려움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커진다. 시련과 고난에 처해 있을 때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은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가 두려움에 저항해야 하는 이유이고, 상황을 바꾸고 싶다면 두려움을 거절해야 하는 이유이다.

자네가 얼마나 의지가 있는지 시험해 보겠나? 일주일 동안 퍽퍽한 싸구려 음식만 먹어야 한다면, 그리고 다 낡아 해진 옷을 입어야 한다면 자신에게 물어보게. 이것이 자네가 두려워하는 최악의 상황인지를. 좋은 시절일 때 우리는 다가올 힘든 시기를 위해 대비해야 한다네. 운명은 우리 앞의 햇살이 따사로울 때 자신의 잔인한 이빨과 발톱을 갈아두는 짐승이기 때문이지. 그래서 군인들은 평화로울 때 병법을 수련하고 적이 시야에 없을 때 참호를 판다네. 자신이 지쳤을 때 공격해 오지 못하도록 그렇게 대비를 하지.

세네카, 윤리적 서한, 18.5-6

"위기가 닥쳤을 때 궁지에 몰리지 않으려면 오기 전에 준비하라."

동료 없이 식사하는 데 익숙해지도록 하자. 노예를 두지 않는 삶에도 익숙해지도록 하고, 본래의 목적으로 옷을 입는 데도 익숙해지도록 하고, 좀 더 합리적인 넓이의 공간에서 생활하는 것에도 익숙해지도록 하자.

세네카, 마음의 평정에 대해, 9.3b

어떤 사건이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네. 우리가 두려움을 지배하고 두려움을 막을 수 있는데도 어떻게 내면의 요새가 파괴되는지 아는가? 칼에 의해서도 불에 의해서도 아니야. 단지 판단 하나 때문이야··· 우리는 여기서 시작해야만 해. 이 성벽을 꽉 부여잡고 달려드는 이 폭군을 던져 버려야 해.

에픽테토스, 대화록, 4.1.85-86;87a

하지만 역사는 우리에게 가르친다. ‘내면의 성채’ 역시 파괴될 수 있다고. 그것은 안으로부터의 배신 때문이다. 성벽 안에 사는 주민들이 두려움이나 탐욕에 굴종하는 순간 성벽의 문이 열리고 적들이 몰려 들어온다. 이것은 우리가 용기를 잃고 두려움에 굴복할 때 많은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니 기억해야 한다. 요새의 성벽은 굳건하다. 요새를 배신하지 마라.

우리는 사적으로, 늘 아주 강렬한 무언가를 열망하며, 신의 힘으로 우리의 삶에 마법이 일어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바라는 것보다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있는 태도와 힘을 바란다면 어떻게 될까? 통제할 수 있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도록 하고, 우리 안에 이미 갖춰진 힘이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기도한다면 어떨까? 아마도 우리의 기도는 벌써 응답을 받았을 것이다.

생각도 익을 시간이 필요하다

첫 번째 훈련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네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야. 잠시 동안 자신을 위해 철학을 하게. 마치 농사를 짓는 듯한 태도를 가져야 해. 계절에 맞춰 묻어둔 씨앗이 조금씩 자라 완전한 과실이 되는 것처럼. 줄기가 돋기 전에 흙을 파낸다면 결코 열매가 익을 수가 없을 것이네. 자네는 그와 같이 자란 유실수이어야 하네. 빨리 결실을 보려 하면 자칫 겨울이 자네를 죽일 수도 있다네.

에픽테토스, 대화록, 4.8.35b-37

이 책을 읽은 후 이런 생각에 빠질 수 있다. "좋은 말들이야. 받아들이겠어. 이제부터 나는 스토아학파야."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철학에 동의했다고 그 뿌리가 우리 내면에 완전히 자리 잡는 것은 아니다.

어마어마한 장서 목록을 소유하고,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 책을 읽는 사람들은 이웃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앞마당을 가꾸는 사람과 같다. 철학이란, 가족을 위해 음식을 마련할 때처럼 순수하고 자족적인 행위가 되도록 해야 한다. 스토아 사상의 씨앗도 오랜 기간 묻혀 있었다. 스토아의 생각도 육성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도 그와 같이 훈련한다면 삶에 혹독한 시련이 닥치더라도 강건할 수 있을 것이다.

성공은 하찮고 볼품없는 재능을 가진 사람에게도 찾아오지만, 오직 위대한 사람만이 재앙과 불운에 대항해 업적을 남긴다.

세네카, 섭리에 대해, 4.1

특별히 운이 좋은 사람이 있다. 그들은 유전적으로 우월한 용모를 가졌거나, 상류층이라는 신분으로 태어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남들보다 손쉽게 경력을 쌓아 올라간다. 계획 같은 것이 없어도, 오히려 무모한 결정을 했는데도 실패와 마주하지 않고 상처도 상실도 없이 삶을 살아간다.

고통을 겪을 때마다 마음속으로 생각하라. 부끄러울 것이 없으며, 그로써 나의 교양이 비하되지도 않는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공공의 선을 위해 행동하라. 그리고 다음과 같은 에피쿠로스의 말을 기억하라. "고통은 참아낼 수 없는 것도 아니고 결코 끝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고통의 한계를 기억하고 상상력을 보태 실제 이상의 것으로 만들지 마라." 흔히 내는 짜증도 변형된 고통이며 불면, 흥분 그리고 식욕을 잃는 것 또한 고통의 일종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고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것에 불만을 품는 순간 고통에 굴복하고 만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7.64

"자연은 자비롭다. 자신의 영역 안에 돌보지 않는 사물이 없다. 오직 인간의 개입만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다. 삶은 위태로운 것이지만 두려움이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이 나아진다." 이겨낸 자만이 강인함과 우아함을 얻는다.

액션 스타 브루스 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일만 번의 발차기를 한 번에 훈련하는 사람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나는 한 번의 발차기라도 일만 일 동안 훈련하는 자가 두렵다." 반복의 힘을 지적한 것이다. 어떤 행동을 반복적으로 하게 되면 무의식적으로 행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고도 행동할 수 있다.

여가가 주어져도 공부하지 않는 사람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네. 살아 있으면서 이미 무덤에 묻힌 자들이지.

세네카, 윤리적 서한, 82.4

왜냐하면 평화조차 더 많은 걱정거리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야. 한때는 우리에게 든든한 확신을 불러 일으켰던 안전한 상황에도 더는 마음을 열 수 없게 되네. 한때는 든든했던 것이 맹목적인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더는 안전함을 가져다주지 못하지. 이제 위험을 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예 달아나려고 하지. 그러나 등을 돌리고 달아나면 더 큰 재앙을 만나게 된다네.

세네카, 윤리적 서한, 104.10b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힘이 있다. 어떤 역경이라도 우리의 신체에 위해를 가할 수 있을지언정 ‘내면의 성채’까지 침범하지는 못한다.

벌집에 이롭지 않은 것은 꿀벌에게도 이롭지 않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6.54

"공동체에 해롭지 않은 것은 개인에게도 해롭지 않다."

혀와 함께 여행하지 말고 발과 함께 여행하라.

제논, 디오게네스의 강의에서 인용, 탁월한 철학자들의 삶, 7.1.26

넘어지고 난 후 다시 일어나려고 할 때마다 기억하라.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이 나을 수 있다. 잔인하거나 상처를 주는 말일 때 특히 그렇다.

잘못을 저지르는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도 잘못을 저지른다. 불의한 인간은 스스로에게도 불의한 짓을 한다. 그들은 자진해서 악덕을 쌓아간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9.4

기준을 정했을 때에야 비로소 사물과 사건들을 계량할 수 있다네. 철학의 결과물도 바로 그와 같네. 면밀히 검토한 후 자신의 기준을 유지하는 것이지. 하지만 참된 인간만이 자연의 본성에서 비롯된 기준을 사용한다네.

에픽테토스, 대화록, 2.11.23-25

그렇다면 어떤 기준이어야 하는가? 나만의 기준? 아니다. 스토아는 타인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기준은 독선과 오만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이라고 했다. 타인의 기준? 아니면 사회의 기준? 아니다. 이 역시 스토아에서는 자신의 행복을 타인에게 맡기는 어리석음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가장 분주한 길이 우리를 가장 많이 속인다." 세네카의 말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솔직히 말하겠다고 해놓고 기만과 거짓을 꾸미는가? 친애하는 친구여, 자네는 어떤가? 그러나 자네의 말을 들어야 할 필요는 없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상대를 흘깃 보고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목소리의 느낌, 눈동자의 흔들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손쉽게 알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진솔하고 선량한 사람들은 냄새를 풍기는 염소와 같다. 함께 있으면 그가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는 법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11.15

복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와 같은 사람이 되지 않는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6.6

상처를 보고 복수를 꿈꾸는 것보다 치료하는 것이 훨씬 나은 일이다. 복수는 시간을 낭비할 뿐만 아니라 처음보다 더 많은 상처에 우리를 노출시킬 뿐이다. 분노는 상처보다 오래 살아남는다. 그러니 악에는 악으로 맞서지 않고 그 반대의 행동을 취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노새를 차고 개를 물어서 분풀이를 하겠다는 사람을 누가 정상이라고 생각하는가?

세네카, 분노에 대해, 3.27.2

하지만 화로서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해결은커녕 갈등과 충돌을 초래할 뿐이다. 진정으로 일을 해결하고 싶다면 둘 중의 하나다. 첫째는 이성적으로 그렇게 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통할 것 같지 않은 상대라면 화를 내기보다는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 낫다. 어느 경우든 화를 낼 필요는 없다.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면 해결책을 찾아야지 화를 찾아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이 우리의 판단에 달렸다. 그리고 그런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 성급한 판단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암초를 돌아서 먼 바다로 나아가는 배처럼 잔잔한 물결, 좋은 날씨, 그리고 안전한 항구를 찾을 수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12.22

늑대가 친절하다고 양의 친구가 될 수는 없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잘못된 우정을 피하라. 선량하고 진솔한 사람들은 눈에서부터 드러나는 것이니 놓칠 수가 없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11.15

당신은 행복을 찾지 못한 채 수없이 방황만 했다. 행복은 논리에 있지 않으며, 부에도, 명성에도,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는 것에도 있지 않다. 그렇다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자연적 본성에 맞추어 행동하는 곳에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을까? 도덕원칙을 욕망과 행동의 근원으로 삼음으로써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도덕원칙은 무엇인가? 이는 유익한 것과 해로운 것에 관한 원칙이다. 사람을 정의와 자제, 용기와 자유로 이끌어가지 않는 것들은 해로운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파괴하는 것은 예외 없이 해로운 것이다.

(5)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8.1.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왜 태어났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번쯤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한다. 하지만 방향을 제대로 찾는 사람은 드물다. 중요한 점을 놓쳤기 때문이다. 빅터 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찾아서》에서 그 질문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며 이렇게 말했다. "질문을 하고 있는 우리가 바로 그 질문이고 우리의 삶이 바로 그에 대한 답이다."

여행을 하고, 책을 읽고, 신망이 두터운 현자를 찾아가도 우리가 원하는 답을 가르쳐줄 수는 없다. 답은 우리의 행동 속에 있으며 스스로 찾아야 한다. 정의, 자제, 용기, 자유와 같이 자명한 도덕원칙을 자신의 삶에 구현하려고 할 때 답은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드러낸다.

사람들의 경탄을 불러일으킬 만한 재능이 자네에게는 없는가? 그렇다면 받아들여라. 하지만 자네에게는 태어났을 때부터 누구도 가져갈 수 없는 수많은 다른 자질들이 있다네. 정직함, 자존감, 인내, 자비, 자족, 검소함, 친절, 자유로움, 쾌락을 피하는 능력, 아량과 같은 자네만의 능력을 세상에 보이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5.5

우리는 좋은 것들만이 자신의 앞길에 펼쳐지길 희망한다. 좋은 소식, 좋은 날씨, 그리고 행운과 같은 것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변덕맞아서 우리 앞에 나타났다가도 금방 사라지곤 한다. 변하지 않고 영원히 좋은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이 있을까? 그것은 바로 우리 안에 있다. 우리 안의 선善은 상황이나 조건에 상관없이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기본적인 과제가 있다. 하나는 선량한 사람이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에너지와 잠재력을 낭비하면서 두 가지 과제 중 어느 것 하나 수행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두 가지 과제의 수행을 막는 것은 무엇일까? 스토아 사상가들은 말한다. "잡념으로 이끄는 것에, 감정을 파괴하는 것에, 그리고 외부의 압력에 굴복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의 모든 국면에서 이렇게 물어야 한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 삶의 허락된 시간 안에 무엇을 해야 나에게 최선인가?" 거대하고 위대한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사소한 것이라도 내가 잘 해낼 수 있는 일을 하라는 것이다.

작은 일이 모여 큰일이 되고, 작은 성취가 모여 큰 성취가 된다. 그 모든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지옥의 고통이 따로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듯 업의 본성도 그와 같다." 좋은 것이든 좋지 않은 것이든 모든 것은 내 안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당신을 위해 자투리 같은 것만을 남겨둔다는 것이 부끄럽지 않습니까? 지혜를 획득하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만을 남겨두는 것이 부끄럽지 않습니까?

세네카, 삶의 덧없음에 대해, 3.5b

자수성가한 부자들은 쓰고 남은 돈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저축하고 남은 돈을 쓴다고 한다. 인생에 대한 공부 또한 이러해야 한다. 하루에 단 10분이라도 먼저 자신의 삶에 대해 되돌아볼 시간을 가진 다음, 친구를 만나거나 텔레비전을 봐도 늦지 않다. 하지만 그 반대로 하면 인생은 계속해서 뒤처질 것이다.

나는 한 번도 내 의지를 방해받아 본 적이 없네. 내 의지를 강제하는 일을 겪은 적이 없었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내 선택을 신의 의지와 함께하도록 묶어놓으면 된다네. 신의 의지가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바로 나의 의지야. 신의 의지로 내가 무언가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그렇게 할 것이야. 그가 나로 하여금 무언가를 갖게 하고 나에게 무엇을 주고자 한다면 나는 그와 동일한 것을 희망할 것이야. 신이 바라지 않으면 나 또한 희망하지 않네.

에픽테토스, 대화록, 4.1.89

변화하는 것들 중에 악한 것은 없다. 그것은 마치 새로운 상황에 맞서 저항하는 것들 중에 선한 것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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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깜깜이’와 같은 용어를 포함해 무의식적으로 쓰는 차별적 용어에 대해서도 언론인들이 자정 능력을 발휘해 적극 바로잡아야 한다. 지난 7월 장혜영 정의당 의원이 ‘절름발이’라는 표현을 쓴 의원에 대해 장애를 비하하는 발언을 사용했다고 지적했을 때 ‘절름발이’라는 용어를 언론 역시 무의식적으로 쓰고 있는 건 아니었는지 점검할 계기로 삼는 게 중요하다. 장애에 차별과 편견이 있는 용어를 비유적으로 쓰는 것을 중단하자고 언론 유관기관이 특별한 ‘권고’를 내리고, 장애 비하 고정관념 용어 금지 매뉴얼을 단일하게 정리할 필요도 있다.

언론은 공익적 보도에 대한 책무를 이행했을 때 빛을 발한다. 결국 언론의 품위를 지켜야 한다는 얘기다. 최소한 부끄러운 뉴스는 내보내지 말아야 한다. 우리 언론인 스스로 말이다.

뉴욕이 아닌 서울 지하철이었다면
미디어오늘

[한겨레 프리즘] 던지지 못한 물음 / 성연철



[서울 말고] 어둠으로 우리 달려가봐요 / 서한나


[최현주의 알뜻 말뜻] 오늘의 아픔


아플 땐 어떤 느낌이세요? 뻐근하세요? 욱신욱신 쑤시세요? 콕콕 찌르는 것 같으세요? 끊어지는 것같이 아프세요?" 한동안 어깨에 통증이 있어 한의원에 다닌 적이 있는데, 침을 놓기 전 한의사는 늘 이렇게 물었다. 처음에는 빠른 사지선다형 질문에 잠시 생각을 해야 했다.

이 의사선생님은 모든 환자들에게 매번 똑같은 질문을 했다. "어깨는 뻐근하고, 목은 좀 당기는 듯?" 나는 말끝을 흐리며 대답했다. 침을 맞고 누워 있는 동안 의사의 똑같은 질문과 환자들의 저마다 다른 대답을 듣느라 나도 모르게 다른 침상 쪽으로 귀를 기울이곤 했다. 그때마다 새삼 깨닫게 된다. 아픈 느낌은 참 다양하구나.

청탁금지법만으론 공정한 사회가 될 수 없다


혜민의 ‘풀소유‘

성철 스님의 법문을 모은 책 ‘자기를 바로 봅시다‘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어떤 도적놈이 나의 가사 장삼을 빌려 입고 부처님을 팔아 자꾸 죄만 짓는가." 능엄경을 인용한 1981년 1월 20일의 이 해인총림 방장 대중법어에서 성철 스님은 "승려가 되어 가사 장삼을 입고 도를 닦아 도를 깨쳐 중생을 제도하지는 않고 부처님을 팔아먹고 사는 사람은 부처님 제자도 아니요, 승려도 아니요, 모두 다 도적놈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일갈했다.

아프면 쉴 권리, 상병수당과 병가



이러한 노동자들이 아프면 쉴 수 있도록 국가가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고, 정부는 상병수당 도입을 위한 연구와 시범사업을 시행하기로 결정하였다. 내가 아프면 또는 내가 다른 사람들을 아프게 할 수 있다면 소득의 손실을 걱정하지 않고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 상병수당의 기본취지이다. 상병수당은 인간이 일생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위기로부터의 충격을 줄여주기 위해 발전해온 국가의 사회보장체계 중 비어있던 한 고리였다

선언 말고 계획

얼마전 문재인 대통령이 국회 시정연설에서 ‘2050년 탄소중립’을 선언했다. 전국 226개 기초지자체의 ‘기후위기비상선언’과 국회의 ‘기후위기 비상대응 촉구 결의안’에 이어 나온 대통령의 탄소중립 선언은 중요한 진척이다. 하지만 선언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다. 대통령의 선언을 듣고 바로 든 생각은 ‘선언 말고 계획’이었다. 지난해 유엔 사무총장은 ‘기후행동정상회의’에 참석하는 각국 대표에게 ‘연설 말고 계획’을 가져오라고 했다. 문 대통령은 온실가스 감축 계획 대신 ‘세계 푸른 하늘의날’ 제안을 가져갔다.

독신의 이유

서울 한 중심에, 그것도 빼어난 전망을 갖춘 곳에 고가 주택을 소유한 유명 승려의 생활이 방송에 소개되면서 인터넷 공론장이 와글와글한 한 주였다. 삶의 무게에 시달리는 대중들에게 평소 무소유와 내려놓음의 가르침으로 ‘힐링’의 길을 안내한 이였기에 사람들은 더한 배신감을 느꼈나보다. 사실 사람들이 구입한 것은 미국 명문대 박사라는 상표와 젊고 수려한 그의 외모였을 텐데 말이다. 그보다 더한 종교인이 무수한데 유명세 때문에 혼자서만 과도한 비난을 받는다는 동정론도 나왔고, 본인도 사회적 활동을 모두 접고 수행자의 생활로 돌아간다고 발표함으로써 논란은 일단락되는 듯하다.


사람들의 반응 가운데 ‘처자식도 없고 취업 걱정도 안 하고 삶의 고통을 모르는 이가 대중을 교화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글에 특별히 눈길이 갔다. 늘 생각하던 바, 가톨릭 사제나 승려가 사회적 지위를 누리는 데는 독신제도 긴밀한 작용을 하지 않나 생각하던 차였기 때문이다. 결혼을 포기함으로써 보통사람의 희로애락까지 버릴 수 있는 게 그들의 특수 지위를 가능케 하는 조건인 셈이다

[금융칼럼] 달라진 ‘연말정산’ 콕! 집어 챙겨보기

코로나19 피해로 인한 경제활력 대책의 일환으로 2020년 3월에는 기존 소득공제율에 2배로 올려 신용카드 30%, 현금영수증과 체크카드는 60%, 전통시장과 대중교통은 80%로 인상했고, 4월~7월까지 사용한 신용카드·체크카드·현금영수증 등은 결제 수단과 관계없이 사용금액에 대한 소득공제율을 80%로 상향조정했다. 다만 총 급여의 25% 이상 소비해야 공제가 가능하고, 공제금액 한도는 최대 330만원(총 급여 기준으로 상이)으로 기존 공제 한도 보다 모든 구간이 30만원씩 상승됐다.

올해는 코로나 19, 태풍, 장마 등의 재해로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얼마 남지 않은 연말정산을 위해 지금부터 차근차근 준비하여 풍성한 13월의 월급을 챙기길 바란다.

[야고부] 정자 기증

방송인 사유리가 정자를 기증받아 아들을 출산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자발적 비혼모가 사회 담론으로 떠오르고 있다. 가족 공동체 구성에 대한 통념도 서서히 바뀌고 있고 저출산 문제도 심각한지라 비혼모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많이 유연해지고 있다. 결혼 생각은 없지만 자녀를 원하는 여성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관련 사회적 법규도 손질할 필요가 높아졌다


하지만 마냥 박수 칠 일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비혼모에 대한 편견과 규제는 없어져야 마땅하지만 비혼모를 둔 아이들의 행복 역시 간과할 수 없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큰 책임을 떠안는다는 말과 같다. 좋은 부모라는 전제 아래, 편부모 슬하보다 양친의 품이 더 좋은 양육 환경이라는 점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여성에게 결혼이 ‘인생의 무덤‘이 되지 않는 사회, 여성들이 비혼모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하겠다.

좋은 커뮤니케이션이란 무엇인가?

좋은 커뮤니케이션은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당사자가 같은 목표를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의 태도는 수평적이어야 한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한쪽으로만 흐르는 커뮤니케이션은 효율성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문병로의 알고리즘여행] 쉬운 일은 쉽게 하자

필자는 학생들에게 쉬운 일은 쉽게 하라고 노래를 부른다. 쉬운 일을 어려운 일 속에 집어넣어 함께 해결하려다 보면 그 쉬운 일이 어려운 일을 방해한다. 비유하자면, 기업의 CEO가 일정 관리까지 직접 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자신은 추상화 레벨이 높은 일을 하고, 단순한 일은 비서가 하도록 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첨단기법도 어울리는 수준까지만 기대하는 것이 좋다. 감당이 힘든 희소한 케이스들까지 과하게 부담 지우면 잘할 수 있는 다른 일들에 오히려 방해 거리를 만들게 된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명저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인간의 사고를 시스템 1과 시스템 2로 나누었다. 시스템 1은 직관적이고 즉각적이고, 별 노력없이 자동으로 되는 사고다. 시스템 2는 느리고 시간이 걸리는 깊은 사고다. 현재까지의 AI가 잘하는 일이 주로 시스템 1에 속하는 일이다. 이미지 인식, 자연어 처리 분야가 대표적이다. 현재 AI는 시스템 1에서 시스템 2로 진입해보려고 꿈틀거리는 단계다. 아직은 요원하다. 현재로써 시스템 2는 레벨과 관점이 다른 여러 접근법들이 결합되지 않고는 힘들다.
 

[그 영화 이 장면]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서 금붕어는 힘겹게 살아가는 당대의 여성 노동자들, 즉 자영과 보람과 유나의 분신 같은 존재다. 그들의 싸움은 람보를 지키기 위한 투쟁이며, 이것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행동이다. 거대 조직의 부품으로 살다가, 페놀 때문에 생명을 잃고 둥둥 떠다니는 물고기처럼 될 수도 있는 현실. 여기서 세 여성 노동자는 연대의 힘을 통해 금붕어를 지켜내고, 그렇게 자신들을 지켜낸다. 영화의 엔딩 시퀀스. 좁은 어항이 아니라 큰 수족관 안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는, 한 마리가 아닌 세 마리의 금붕어가 보인다. 그들에게 좋은 집이 생겨 다행이다.

[살며 사랑하며] 흙탕물이 지나가는 길

아무리 깊은 산 속 개울일지라도 때론 지나가던 산짐승의 움직임에, 때론 소낙비에 떨어진 암석 조각에 의해서건 흙탕물은 예측 없이 일어난다. 바닥이 깊은 묵직한 물이라면 웬만한 변화에도 그다지 영향을 안 받겠지만, 나 같은 얕은 개울은 개구리의 뜀박질에 흔들린 돌멩이에도 온갖 흙탕물이 다 일어 시야가 흐려지는 일이 부지기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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