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일간 데일리메일은 28일(현지시각) 사만다(Samantha)라는 여성이 미국 워싱턴주(州) 동부 스포캔(Spokane)에서 하이킹을 하다가 빅풋을 발견, 유튜브에 관련 동영상을 올렸다고 전했다.
24일 공개된 58초 길이의 짧은 이 동영상은 현재 3만7000여명의 방문객이 찾아보는 등 인기를 끌고 있다.

 

내가 사는 동네 이름이 나왔네..^^ 

근데 진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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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지었을까? 궁금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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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네.. 날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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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나의 결혼식이 있던 날이었다.  
결혼식이 다 끝나도록 친구 형주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정말 이럴 리가 없는데 식장 로비에 서서 오가는 사람들 사이로 형주를 찾았다
형주는 끝끝내 보이지 않았다 바로 그 때 형주 아내가 토막 숨을 몰아쉬며 예식장 계단을 급히 올라왔다

철환씨 어쩌죠 고속도로가 너무 막혔어요 예식이 다 끝나 버렸네!
왜 뛰어 왔어요 아기도 등에 업었으면서 이마에 땀 좀 봐요
초라한 차림으로 숨을 몰아쉬는 친구의 아내가 너무 안쓰러웠다
석민이 아빠는 오늘 못 왔어요 죄송해요 친구 아내는 말도 맺기 전에 눈물부터 글썽였다
엄마의 낡은 외투를 덮고 등 뒤의 아가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친구가 보내온 편지를 읽었다 철환아 형주다 나 대신 아내가 간다
가난한 내 아내의 눈동자에 내 모습도 함께 담아 보낸다 하루를 벌어야지 하루를 먹고 사는
리어카 사과장사가 이 좋은 날 너와 함께할 수 없음을 용서해다오 사과를 팔지 않으면 석민이가
오늘 밤 분유를 굶어야한다 철환이 너와 함께 할 수 없어 내 마음 많이 아프다
어제는 아침부터 밤 12시까지 사과를 팔았다 온 종일 추위와 싸운 돈이 만 삼 천 원이다
하지만 슬프지 않다 아지랑이 몽기몽기 피어오르던 날 흙속을 뚫고 나오는 푸른 새싹을 바라보며
너와 함께 희망을 노래했던 시절이 있었기에 나는 슬프지 않았다

개 밥그릇에 떠있는 별이 돈보다 더 아름다운 거라고 울먹이던 네 얼굴이 가슴을 파고 들었다
아내 손에 사과 한봉지를 들려 보낸다 지난밤 노란 백열등 아래서 제일로 예쁜 놈들만 골라냈다
신혼여행가서 먹어라 친구여 이 좋은 날 너와 함께 할수 없음을 마음 아파 해다오
나는 언제나 너와 함께 있다
해남에서 형주가 -

편지와 함께 들어있던 축의금 만 삼천원 만원짜리 한 장과 천 원짜리 세장
뇌성마비로 몸이 많이 불편한 형주가 거리에 서서 한 겨울 추위와 바꾼 돈이다

나는 웃으며 사과 한 개를 꺼냈다
형주 이 놈 왜 사과를 보냈대요 장사는 뭐로 하려고 씻지도 않은 사과를 나는 우적우적 씹어댔다
왜 자꾸만 눈물이 나오는 것일까 새 신랑이 눈물 흘리면 안 되는데
다 떨어진 구두를 신고 있는 친구 아내가 마음 아파 할 텐데

멀리서도 나를 보고 있을 친구 형주가 마음 아파할까봐
엄마 등 뒤에 잠든 아가가 마음 아파할까봐 나는 이를 사려 물었다
하지만 참아도 참아도 터져 나오는 울음이었다 참으면 참을수록 더 큰 소리로 터져 나오는
울음이었다 어깨를 출렁이며 울어버렸다 사람들 오가는 예식장 로비 한 가운데 서서

형주는 지금 조그만 지방 읍내에서 서점을 하고 있다
들꽃서점 열 평도 안 되는 조그만 서점이지만 가난한 집 아이들이 편히 앉아 책을 읽을 수 있는
나무 의자가 여덟 개나 있다 그 조그만 서점에서 내 책 <행복한 고물상> 저자 사인회를 하잖다
버스를 타고 남으로 남으로 여덟 시간을 달렸다 교보문고나 영풍문고에서 수 백 명의 독자들에게
사인을 해줄 때와는 다른 행복이었다 정오부터 밤 9시까지 사인회는 아홉 시간이나 계속됐다
나에게 사인을 받은 사람은 일곱 명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친구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마음으로만 이렇게 이야기 했다
형주야 나도 너처럼 감나무가 되고 싶었어 살며시 웃으며 담장 너머로 손을 내미는 사랑 많은 그런
감나무가 되고 싶었어!!!!

예전에 지하철을 타고 가다 무심코 접한 글이다

당시 쪽팔림을 무릅쓰고 남몰래 눈물을 훔치다가 하늘을 보다가

지금 읽어도 눈물이 흐르는 가슴 따뜻하고 에리는 이야기

석민의 분유값을 위해 만 삼천원을 위해

절친한 친구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하는 친구와

해남에서 어린 아이를 들쳐 업고 올라온 아내

먼 길 떨어진 구두를 신고 온 아내의 눈동자에 담긴 친구의 모습 

 

덧)감동적인 이야기... 이 글을 작성한 날짜가 2010년 2월로 되어 있더군요.  
읽다가 감동받아서 여러분들도 읽어 보시라고 퍼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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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시장길을 지날때면 시장구석진 자리에서
나물을 팔고 계시는 할머니를 보곤 한다.
예전에는 이 시장길을 지나는 것이 고통이었다.

하지만 이젠 나에게 이곳을 지날 여유도 없다.
어쩌다 가끔씩 들려보는 이곳 시장터.
난 이곳에서 장사를 하는 한분의 고귀한 사랑을 받고 자랐다.
"엄마 시장갔다 올테니, 밥 꼭 챙겨먹고 학교가거라"

난 장사를 가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도 잠을 자는 척 했다.
이 지겨운 가난. 항상 난 이 가난을 증오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벗어나고 말리라는 다짐을 굳히곤 했다.
내가 학교가는길 시장 저 귀퉁이에서
나물을 팔고 계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난 어머니가 나를 발견할까봐 얼른 도망친다.


우리 부모님은 막노동을 하셨다고 한다.
일하는 도중 철근에 깔리신 어머니를 구하시려다
아버지는 사망하고 어머니는 한쪽 다리를 잃으셨다고 한다.
일을 가시지 못하시는 어머니는 나물을 캐서 팔곤 하셨다.
난 항상 들판에 절뚝거리시며 나가시는 어머니가 싫었고
밤새 나물을 다듬으시는 모습도 싫었다.

더더군다나 시장 한귀퉁이에서 쪼그리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 비슷하게
장사를 하는 것도 맘에 들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니 퉁퉁부은 다리한쪽을 주무르시며
나물을 다듬고 계신다.

나를 보자 어머니는 기쁜 낯으로 3,000원을 주신다.
난 그돈을 보자 화가 치민다.
"난 거지 자식이 아니란 말이야 이런돈 필요없어!"
그리고는 밖으로 나와 버린다.



다음날 아침 난 어머니가 시장 간 틈을 타
집에가서 책가방을 들고 학교에 간다.
학교길 약수터에서 간단히 세수를 한 다음 물로 배를채운다.
난 비록 풍요롭게 먹고 입지는 못했지만 공부는 악착같이 했다.
그래서 부잣집 자식들보다 공부는 항상 잘했다.
하지만 그자식들에게 사는 미움도 만만치않았다.
그날 4교시가 끝날무렵 아이들이 갑자기 웅성거린다.
복도를 보니 어머니가 절뚝거리시며 교실로 들어선다.
선생님 드리려고 장사하려고 다듬은 나물을 한봉다리 들고서...
어머니는 내가 어제 들어오지 않자
걱정이 되셔서 학교에 오신거란다.

선생님과의 면담을 끝내고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이들이 한마디씩한다.
"! 이민석 너네 엄마 병신이었냐?"
그놈은 그잘난 부잣집 아들 현우였다.
현우는 어머니의 걸음걸이를 따라한다.
무엇이 우스운지 반 아이들은 웃어댄다.
난 화가 나서 그놈을 정신없이 두들겨 줬다.
그리고서는 교실을 나와 버렸다.


저녁무렵 집에 가니 집앞에
잘차려 입은 여자와 현우가 어머니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아니 애비 없는 자식은 이래도 되는거야?
못 배우고 없는 티 내는거야 뭐야. 자식 교육좀 잘시켜,
어디감히 우리집 귀한자식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 놓느냔 말이야.
. 어머니라는 작자가 병신이니 자식 정신이 온전하겠어?"
어머니는 시종일관 죄송하다는 말뿐이다.
난 그러는 어머니의 모습이 싫었다.


집에 들어가도 어머니는 아무말씀 없으시다.
난 어머니에게 한마디한다.
"다시는 학교에 오지마 알았어? 챙피해서 죽는줄 알았단 말이야."
"그래 미안하다 난 민석이가 걱정이 되어서......"
"난 차라리 엄마가 없었으면 좋겠어"
난 해서는 안될말을 해버렸다.
슬픔을 보이시는 어머니를 못본척하며 자는 척 했다.
"난 꼭 성공할꺼야."
밤새 이렇게 외쳤다.
다음날 아침 수업료라며 엄마가 돈을 쥐어 주신다.
얼마나 가지고 계셨는지 너무도 꼬깃하고 지져분한 돈이었다.
학교에 가니 선생님이 부르신다.
적어도 선생님만은 내편이셨다.
어머니께 잘 해드리라는 말로 나를 위로하신다.
선생님께서 나물 맛있게 먹었다고 어머니께 전해 달란다.

난 그러마 했다.
하교 길에 길 모퉁이 배추가게 쓰레기통에서
배추잎들을 주어모으시는 어머니를 본다.
난 모른척 얼른 집에 들어와 버렸다.
그날 저녁 배추국이 밥상에 올라온다.
"이 배추!"
난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께선 아무일도 아니라는듯 "배추가게 아저씨가
팔다 남은거라고 버리기 아까우니 가져가서
민석이 국 끓여 주라고 하더구나"
어머니의 말에 난 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정말로 난 거지자식이 되어버린것만 같았다.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하는 어머니가 너무도 싫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날이 어머니 생신이셨다고 한다.





ㅡㅡㅡ그후~17년후ㅡㅡㅡ


난 의사가 되었다.
가정도 꾸리고 병원도 장모님께서 개업해 주셨다.
난 너무도 풍요로운 생활에 어머니를 잊고 살았다.
돈은 꼬박꼬박 어머니께 보내 드렸지만 찾아가 본적은 없었다.
아니 어머니라는 존재를 잊고 살려고
노력했다는 해석이 옳을지 모르겠다.


그런 어느날.....
퇴근길에 우리집 앞에 어느 한노인과
가정부 아주머니가 싸우고 있는걸 봤다.
다가서니 그노인은 내가 가장 잊고자하는 어머니였다.
전보다 더 야윈얼굴 허름한 옷차림
그리고 여전히 절뚝거리는 다리......
어머니는 나를 보자 기뻐하신다.
"민석아 많이 좋아졌구나."
난 어이 없다는듯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난 차갑게 한마디 한다.

뭐가 모자라서 나에게 온단 말인가...
그동안 생활비로도 모자라단 말인가?
...........어머니의 떨리는 목소리.
"전 민석이가 아니라 최영호입니다."
난 이 한마디를 끝으로 집으로 들어가 버린다.
가정부가 애써 돌려 보낸후
별 노망든 할머니가 다있다고 푸념을 늘어놓는다.
그후 한달동안 난 악몽에 시달린다.


할수없이 난 다시는 되돌아 가기 싫은
시장이 있는 우리집으로 발길을 돌린다.
시장 한귀퉁이에 여전히 나물을 팔며
기침을 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난 가만히 곁에 가서 지켜본다.
나물을 사려는 한 아주머니가 묻는다.
"할머니는 자식이 없나요?"
"아니여. 우리 아들이 서울 큰 병원 의사여.
자꾸 나보고 같이 살자고 하는디 내가 싫다 혔어.
내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 자식 신세를 져.
요즘도 자꾸 올라오라는거 뿌리치느라고 혼났구만.
우리 아들같은 사람 세상에 둘도 없어. 우리 아들이 효자여 효자."
어머니는 자식자랑에 기분이 좋았는지
나물을 많이도 넣어 드린다.


그런 어머니를 뒤로하고 난 예전의 집으로 향한다.
아직도 변한게 없는 우리집
거의 쓰러져 가는데도 용케 버티고 있었다.
이런곳에서 살았다는게 생각에 없을 정도였다.
난 방틈으로 돈봉투를 넣어놓고는 돌아선다.
1년이 지난후 난 어머니의 사망소식을
고교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듣게 되었다.
그래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내 발길은
어머니의 집으로 향하게 되었다.


시장에는 어머니의 모습이 정말로 보이질 않았다.
도착한 곳에는 선생님이 혼자 집을 지키고 계셨다.
나를 알아보신 선생님 아무말씀도 없으시다.
무거운 침묵.......
"민석아 내옆에 와서 잠깐 앉아라."
선생님이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셨다.
선생님께선 낯익은 보따리를 나에게 주신다.
바로 어머니가 가지고 다니시던 나물보따리셨다.
이 보따리에다 밤새 다듬은 나물들을 싸서
시장에 팔러 가시곤하셨다.
"풀러 보거라"
선생님의 말씀대로 난 보따리를 풀렀다.
"돈 아닙니까."
"그래 돈이다. 네 어머니가 너에게 주시는 마지막 선물이다.
그동안 네가 돌아올까봐서 그리고 혹시나 네가
성공하지 못하면 다른 사업을 할수있도록 모아두신 돈이란다.
너하나 믿고 무슨 미련인지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너를 기다렸다.
너에게 잘해주지 못해 항상 미안해 하셨다.
내가 가끔 네 어머니의 말 동무가 되어드렸단다.
그래서 나에게 네 어머니의 유언을 전하도록 부탁하셨다.

그리고 네가 모르고 있었던 사실들도 함께 말이다."
선생님의 얘기들은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선생님의 얘기는 이러했다.
내가 아주 어렸을적 나를 키워주신 부모님은
퇴근길에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고 한다.
자식이 없던 터라 나를 데리고가서 키웠다고 한다.
늦게 얻은 자식이라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고 한다.


어린 나를 집에 혼자 둘수 없어
항상 나를 공사판에 데리고 다니셨다고 한다.
그런 어느날 무너지는 철근 밑에 있는 나를 보고
어머니가 뛰어드셨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도 어머니와 나를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지셨다고 한다.
그 사고로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한쪽다리를 잃으셨다고 한다.
그러니까 난 아버지의 목숨과 어머니의 다리로 살아난
운좋은 놈이라고 한다.


혼자가 되신 어머니. 다리마져 불편하신 어머니께
주위사람들은 나를 고아원에 보내라고 하셨단다.
하지만 어머닌 나를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이 여기셨기에
나를 버리시지않고 키우셨다고 한다.
그후 어머닌 아버지를 잊기위해 이곳으로 옮기셔서
나물을 팔며 나를 키워오신거란다.


내가 대학다닐때 암인걸 아신 어머니는 자신의 몸보다
내 학비를 마련하기위해 병원에도 가지 않으셨다고 한다.
암 전문의로 명성을 날리는 내가
내 어머니를 암으로 돌아가시게 하다니....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나를 한번 보고자
물어물어 서울까지 오셨다고 한다.
그런 어머니에게 난 가슴에 못을 박고 말았다.


자신이 낳은 자식도 아닌데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이 여기셨던
어머니를 버린 나 자신을 용서할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를 조용히 내려보시는
어머니의 사진이 잔잔한 미소를 보이고 있다.
이런 자식마져도 어머니는 사랑하시나 보다.
내 어머니 사랑하는 내 어머니....
그후 난 시간이 날때마다 가끔씩 이곳을 들른다.
혹시나 어머니가 나물을 파시고 계실것 같은 착각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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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1-05-30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0년꺼덴 담아왔다...
할 말이 없다..
가끔씩 부모한테 효도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 부럽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