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로 들여다 보는 우리의 옛 그림 - 신윤복 편 1
정유현 지음 / 범우사(이영휘)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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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 신윤복의 그림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책이다. 대개 이런 보물이나 국보급 작품들을 평범한 사람들이 진품을 볼 수 있는 기회란 거의 없다고 봐도 될 것이다. 그나마 이렇게 사진으로 볼 수 있다는 것만 해도 반가울 따름이다.

우리나라 그림의 역사에 있어서 혜원 신윤복 만큼이나 색시한 작품을 남긴 화가는 없을 것이다. 유려한 선과 강렬한 채색, 그리고 묘한 상황이 주는 그의 스타일은 정말 탄복을 금할 수 없다. 어떤 한 연구자는 그의 작품이 일본으로 건너가, 당시의 우키요에라는 풍속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림의 스타일이나 화풍에서 그런 분위를 많이 느낄 수는 있으나, 아직 논란의 여지가 있다. 아뭏든 김홍도와 더불어서 신윤복은 조선이 낳은 걸작이다. 당시의 에로티시즘이 궁금하다면 꼭 한번 읽어보시라.


필자가 개인적으로 인상깊게 감상한 그림은 '쌍검대무' 라는 작품이다. 이 걸작은 국보 135호로도 지정되어 있어서 그 가치를 알만하다 할 것이다. 넓은 마당 한 가운데에 쌍검을 들고 화려하게 차려입은 기생 두 명이 검무를 추고 있고, 그 주변으로 악사와 구경꾼들이 원형으로 늘어서 있는 장면이다. 검을 든 기생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붉은색과 샛파란색으로 화려하게 채색을 했으며, 그 움직임이 나긋나긋하면서도 율동이 느껴지는 지라 한 폭의 양반춤을 보는것 같다. 그리고 그 주변인물들은 상대적으로 색감을 옅게 만들었다.


특히나 정중앙 보다는 그림 오른쪽에 있는 기생의 동작이 매우 다이나믹한데 필자는 자꾸만 그 여인네에게로 시선이 가고 만다. 오른손에는 노리개를 매단 장검을 머리쪽으로 들고 있고, 왼손은 오른쪽 겨드랑이 아래로 넣어 또 하나의 검을 들고 있다. 그리고 모둠발을 띈 흰 버선 한 짝이 바람에 날리는 치맛살 아래로 살짝 드러나 있으며, 머리에도 화려한 관을 썼다. 이 모양이 왜 이렇게 눈에 들어오는지 모르겠다. 뭔가 필자의 내면을 건드리는 것이 있는것이 분명하다. 설명이 장황했는데 누구나 한 번 보면 감탄이 저절로 나오게 될 것이다. 아하~ 과연 혜원 신윤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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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이 되고 싶은 화가 장승업 - 한국편 3 그림으로 만난 세계의 미술가들 한국편 3
조정육 지음 / 미래엔아이세움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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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업의 그림은 호쾌하면서도 푸근하다. 그의 여러 작품에서는 조선후기 민화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어서 기쁘기 한량없다.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으로 대중에게도 친숙한 이름이 바로 오원 [장승업]이다. 필자의 기억이 가물가물하기는 한데, 어떤 유명한 조각가에게 한 기자가 질문을 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런 뛰어난 작품을 다듬어 낼 수 있습니까? 그러자 그가 답하길, 나는 조각을 하는게 아니고 그 안에 담겨진 형성이 드러나도록 불필요한 부푼을 잘라내는 것입니다. 장승업의 화풍도 이와 같다. 그는 자기 이름밖에 쓸 줄 모르는 문맹이었으나, 붓을 쥐기만 하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야말로 일필휘지로 걸작을 드러나게 만들었다. 정식으로 그림을 배운적도 없는 이가 말이다. 달래 천재가 있는 것이 아니다. 뭐라고 비유를 할까? 포토샵의 마스크 툴과 같다. 가면을 벗으면 실체가 드러나듯이, 장승업은 하얀 도화지를 걷어내어 그 안에 담겨진 진실한 모습을 드러나게 만들었다.


한편, 장승업이 화가로서 이름을 떨칠 수 있게 된 것은, 이응헌이라는 재력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었다. 그는 역관 출신으로 중국의 많은 예술작품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조실부모하고 고아로 자라난 장승업이 이때 그의 집에서 하인 비슷한 삶을 살고 있었다고 한다. 우연히 그의 재능을 알아본 이응헌이 장승업의 후원자가 되어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그의 걸작들이 후대에 남게 된다. 이후 장승업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면서 고종의 명령으로 궁궐에서 그림을 그리는 관직을 받았는데, 무엇에도 얽매이기 싫어하는 그가 이를 박차고 뛰어나가는 장면이 바로 취화선 포스터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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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암유고 청명국역총서 2
강세황 지음, 김종진.변영섭.정은진.조송식 옮김 / 지식산업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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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황,

한마디로 그는 천재였는데 시.서.화 3절에 모두 능했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조선 예술계의 거목, 총수라고 할 수 있었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가 영.정조 때였는데 그는 관직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어서 거의 반 평생을 후학을 길러내는데 힘을썼으며 주로 평론가로서 활약했다. 그러나 말년인 60대에 이르러서야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게 되었는데, 아마도 그 이유는 중국으로 가서 새로운 문물을 직접 접할 수 있다는 판단때문이 아니었나 한다. 왜냐하면, 서양화 화법의 도입에서 보듯이 그는 진취적이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결코 꺼려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예로써 그는 72세에 노구를 이끌고 북경 사행길을 다녀왔는데, 그 와중에 많은 기록과 작품을 남겼다. 평소 그는 중국 학자들을 만나서 폭넓은 교류를 하기를 소원했었다고 한다. 앞선 문명과 문화에 대한 갈증은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바이니 강세황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표암 강세황은. 단원 김홍도를 길러낸 스승인데, 우리나라 그림의 역사에서 서양의 원근감을 최초로 도입한 인물이다. 다시 말해, 새로운 시도에 거리낌이 없었으며, 열린 자세를 가졌던 선비다. 당시의 조선은 오로지 중국만이 대형이고 다른 여타의 나라는 오랑캐라고 취급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마음가짐은 정말로 본받아야 한다. 세계 정세를 등한시하다가 불행했던 근현대사를 보내고 있는 우리민족을 생각해보라. 아뭏든, 그는 당시 사람들이 가장 닮고 싶었던 인물이었다. 오늘날로 치자면 멘토였던 셈이다. 그러한 강세황의 작품과 일대기를 간략하게마나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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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벤스의 그림과 생애
야콥 부르크하르트 지음, 최승규 옮김 / 한명출판사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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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와 르네 마그리트는 벨기에가 자랑하는 화가들이다. 전자는 바로크 시대를 살다단 인물이며 후자는 20세기초 초현실주의의 대표화가이다. 필자가 아는 유명한 벨기에의 인물이라면 딱 2명이다. 바로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에 나오는 명탐정 에큐르 포와르, 그리고 플랜더스의 개를 통해서 알게된 바로크 화가 루벤스다. 그의 예술세계는 당대의 화가들이 그렇듯이 기독교 문명을 바탕으로하며, 여기에 귀족풍의 격정적인 그림을 많이 남겼다. 뭐라고 할까? 사진학으로 비유를 들어보자면, 배경과 피사체가 분리된 것과 같은 스타일이다. 여기에 글래머스런 여인의 관능미, 에너지가 느껴지는 마초적인 남자의 근육이 밝고 경쾌하게 어우러진다. 플랜더스의 개 파트라슈와, 주인공 네로가 생각난다면 루벤스의 생애와 그의 작품을 한번 감상해 보자.


개인적으로볼때 그는 특히나 군무에 탁월한 면모를 보이는 것 같다. 역동적인 포즈를 취한 캐릭터와 그의 풍만한 살집들, 그리고 배경과 어우러지면서도 화사하게 빛나는 주인공들, 이들 모두가 그리스.로마 시대의 조각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듯 싶다. 한편, 지극히 개인적으로 볼때 그의 스타일은 발에서 드러나는 것 같다. 거의 모든 작품에서 맨발의 모양이 특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오늘날로 치자면 하이힐을 오랫동안 신은 여자의 발가락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리고 글래머처럼 통통하다. 그런데 그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더 섹시해보인다는 사실이다. ㅎㅎㅎ. 이런 것을 뭐라고 하지? 여인네의 발에 매력을 느끼는 행위를 페티시라고 하는데, 그 정도는 아니고 아뭏든 루벤스의 그림에서 필자가 느끼는 감정이다. 아니 가만있어보자. 혹시나 루벤스 그 자신은 몰랐지만 그의 내부에 그러한 면이 약간이나마 내재해있어서 이렇게 표현된 것이 아닐까?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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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 서문당 컬러백과 서양의 미술 6
정문규 지음 / 서문당 / 198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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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고갱이....로 읽혀서..ㅎㅎㅎ

폴 고갱과 고흐는 한때 절친한 친구 사이였는데 어쩌다보니 그냥 왕래가 끊기고 말았다. 예술가의 어떤 자존심 때문일까? 하긴 보통사람들도 흔히 절교를 하고 만나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 예술가라고 해서 다를바는 없을 것이다. 하여간, 선이 굵은 인상파 화가 중 한명인 폴 고갱, 그가 타히티 여인들을 그린 작품은 뭐라고 할까? 소박하면서도 매우 친근하게 다가온다. 그의 작품세계는 프랑스와 타히티 시절로 구분이 되는데, 전자가 인상파의 분위기를 많이 담고 있다면 후자는 자신의 작품세계를 특징지운 시기다. 특히나 사랑하는 딸 알린의 죽음은 그가 자살을 시도할 만큼, 그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당연히 이 사건 이후에 그의 작품세계에는 --심미안이 부족한 사람일지라도 확연하게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우울하고 어두운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고갱에 대해 좀더 알고 싶다면 한번 들춰보는것도 좋겠다.

그의 풀 네임은 외젠 앙리 폴 고갱Eugène Henri Paul Gauguin 인데, 편의상 줄여서 뒤의 3글자만 쓴다. 한편, 그는 특이하게도 한동안 본업을 유지하면서 예술을 한 사람이었다. 원래 그의 직업은 주식중개인이었으며, 26세라는 늦은 나이에 미술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의 작품을 고흐의 동생인 테오가 화랑을 운영하면서 판매했다고 한다. 그러한 인연으로 반 고흐와 폴 고갱은 친한 친구사이였었다. 그런데, 어느날 고갱이 고흐에게 하나의 그림을 선사하는데, 거기에는 해바라기를 그리고 있는 고흐가 볼품없이 표현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그림을 보고 고흐는 고갱에게 화를 내게 되는데, 그 일로 그 두사람의 인연이 끝나버리고만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 모두 불행한 최후를 맞게 되는데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는 매우 유명한 예술작품으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물론 폴 고갱의 작품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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