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의 섹슈얼리티
최정은 지음 / 한국학술정보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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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뒤샹 하면 곧 변기다. 그 삼각형 모양의 오브제, 즉 변기를 앞에두고 그는 [샘]이라는 제목을 붙여 1917년에 출품을 했다. 물론, 비평가와 대중들의 반응은 논란을 넘어 싸늘했다. 당시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퍼포먼스, 즉 이미 만들어진 기성품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표현의 한계를 없애버린것이야말로 그의 자랑스런 업적이다. 이와 같은 자유로운 사고는 후대의 앤디 워홀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며, 후대의 사람들은 뒤샹의 예술세계를 다다이즘이라 칭한다.

그는 이처럼 '이미 만들어져 있는 기성품(readymade)'에 자신의 사인하나만을 달랑 남기고서 서양미술사에 큰 반향을 불러왔다. 뒤샹이 레이메이드를 예술이라 칭한 것은, 기성의 모든 속박과 굴레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그 자신의 예술세계를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때문에 초현실주의와 다다이즘은 서로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으며, 당대의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정신은 다빈치의 모나리자 작품에 카이젤 수염과 거뭇한 턱수염을 그려놓고 '콧수염 달린 모나리자' 라는 명칭을 부여하게 된다. 가희 마르셀 뒤샹다운 작품이라 아니할 수 없다. 뿐만 아리나 그 작품아래에 손글씨로 알파벳을 적어놨는데....각각 L.H.O.O.Q 라고 적어놨다. 이게 무슨 뜻인가 했더니 프랑스어로 엘르.아쉬.오.오.뀌라고 발음이 되는데, 해석하자면 "그녀는 뜨거운 엉덩이를 가졌다" 라는 뜻이 된다고 한다. ㅋㅋㅋㅋ. 아뭏든 필자에게 기성품이라면 대개 공산품을 떠올리게 되는데, 예술사의 걸작인 모나리자 마저도 기성품이라는 발상은 정말 신선하기 그지 없다. 아마도 다빈치가 무덤에서 살아나왔다면 껄껄껄 하고 웃어제끼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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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 재원 아트북 28
재원 편집부 엮음 / 재원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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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프란시스코 고야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추악한 인류의 본성을 가감없이 그려내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침대에 누워있는 미녀 [마야]를 대표작으로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남긴 수천장의 스케치를 보게 되면, 정말 같은 사람이 그렸나? 하고 의심할 정도로 극과극을 달린다. 그는 '전쟁의 참화(Desastres de la Guerra' 라는 시리즈를 통해서 스페인과 프랑스의 반도전쟁을 그려내고 있다. 차마 말로 옮기기 힘들 정도로 잔혹한 장면이 많은데, 그가 이런 작품을 남긴 이유는 전쟁의 참혹함을 널리 알려, 다시는 전쟁이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 전쟁을 조금 살펴보자면, 1808년 나폴레옹이 스페인의 내정에 간섭하여 군병력을 투입한다. 그리하여 반도전쟁이 발발하게 되며 1814년까지 계속되었다. 이 와중에 양쪽에서 많은 사상자나 나왔으며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식으로 양쪽 모두 상대방에에 증오와 학살, 파괴를 가져온다. 복수심에 불타는 사람들이 하는 행동은 잔인하기 그지없다. 마치 중세시대의 고문을 보는 듯한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게 되는데......이것을 흑백의 스케치로 그려낸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다. 이 그림을 유심히 보고 있으면 일종의 트라우마 내지는 인간에 대한 환멸을 느낄 수 있으므로 주의를 요한다. 필자가 보기에는 고야가 의도적으로 그 쇼킹함을 순화해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차마 그림으로도 남지지 못할 정도로 공포스런 장면이 많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 아래에 붙은 스케치의 제목마저도 보는 이로 하여금 구토를 느끼게 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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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 서문당 컬러백과 서양의 미술 11
오광수 엮음 / 서문당 / 199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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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프랑스와 밀레의 대표작인 [만종]에는 매우 슬픈 이야기가 전해진다. 지평선선과 밭을 배경으로 한 부부가 손을 맛잡고 기도를 하고 있으며, 그 아래로 감자 바구니가 놓여있다. 평화로운 장면이다. 그런데, 이 바구니는 원래 아사한 어린아이의 관이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이 그림을 본 밀레의 친구가 너무 참혹하다하여 다른 대상으로 교체할 것을 제안하였고, 밀레가 이를 수용하여 감자가 담긴 바구니로 바꿨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가 어떻게 알려지게 되었을까? 바로 초현실주의 화가인 살바도르 달리에 의해서다. 그는 밀레에 대한 책을 펼쳐냈는데, 여기서 이러저러한 주장을 제기하면서 엑스레이 검사를 요청하였다. 조사결과 정말 네모난 도형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지고, 이에따라 달리의 주장이 신빙성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때로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경우가 있다. 으스스하다.


그런데 과연 정말 그랬을까? 혹시나 달리가 과대해석 한 것은 아닐까? 진실은 밀레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일일 것이다. 한편, 밀레의 작품은 달리 뿐만 아니라 빈센트 반 고흐의 초기 작품에도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그 증거로써 고흐가 동생 테오한테 보낸 편지에는 밀레에 대한 언급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또한, 알려진 것과는 달리 말년에 가서 그의 작품은 유명세를 타게되고 비교적 편한한 노년을 보냈다. 그리고 정부로부터 레종 도뇌를 훈장을 받게 된다.


한편, 프랑스인들의 예술에 대한 집착은 때로는 도를 넘기도 하는데, 우리나라의 국보 문화재인 외규장각도서를 비롯하여 세계 곳곳에서 많은 유산들을 약탈해가서 보관하고 있다. 과거에 한국이 고속전철을 도입할 때 프랑스와 독일이 양대 후보자로 경쟁을 하고 있었을때, 미테랑 대통령이 약탈해간 고문서를 반환하겠다고 하면서 내한했었다. 그렇게 하여 고속전철은 프랑스의 품으로 들어갔는데, 이후 그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것이 약소국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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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라 서문당 컬러백과 서양의 미술 30
오광수 엮음 / 서문당 / 199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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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개비의 날개 반쪽은 빨강색으로 칠하고 나머지 절반은 파랑색으로 칠해보자. 그리고 바람을 향해서 돌리면 보라색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원리로 과학적인 그림을 그린 이가 바로 조르주 쇠라이며, 우리에게는 점묘법으로 알려져있다. 말그대로 물감을 점처럼 수없이 많이 찍어서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가까이서 보면 형체가 약간은 불분명 하지만 조금 떨어져서 보면, 어떤 작품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 아니 이것은? 운전면허를 갱신할 때, 적성검사를 하면서 색맹 테스트를 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 아닌가? ㅎㅎ 아뭏든 이러한 기법으로 그려진 그림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그랑드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라는 작품이다.

필자는 처음 이 그림을 접했을때, 아니 왜? 여자들의 엉덩이가 저렇게 툭 튀어나왔을까? 속에다가 무슨 장식품 같은 것을 넣고 다니던 풍습이 있었나? 마치 일본의 기모노 뒤에 붙은 그 천조각과 비슷하네...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유럽인들의 둔부는 정말 그것과 똑같이 생겼음을 이제는 안다. 일종의 조금은 약한 문화적 충격이었다. 아뭏든, 조르주 쇠라가 처음부터 점묘화를 그린것은 아니었다. 초기작은 인상파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서 마네나 모네등의 작품과 스타일이 아주 유사하다. 그래서 후대의 평론가들은 쇠라를 점묘화를 탄생시킨 신인상파라고 부른다. 서양인들의 문명을 관통하는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파고들어가는 것이다. 즉 대상을 쪼개고 쪼개고 --분자수준을 넘어서 원자로 다시 쿼크 단위로-- 들어가서 나누고 해체하는 것이 주요한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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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트렉 재원 아트북 6
박서보 지음 / 재원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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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트렉 또한 달리, 피카소, 미로등등의 예술가처럼 스페인 태생이다. 어렸을 적의 사고로 150cm가 조금 넘는 단신의 앙리 툴루즈 로트렉은, 어떠한 화파에도 속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자신만의 방법으로 예술을 사랑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후기 인상파로 분류한다. 이정도의 키면 난쟁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따라서 아마도 그는 선천적인 유전질환을 앓지 않았나 하는 것이 최근의 평가다. 왜냐하면 그의 부모가 사촌지간이며 조모와 외조모가 자매지간 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체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머감각을 잃지 않았으며, 물랭루즈를 주변으로 해서 수많은 여인들의 품에 묻혀 살았다고 한다. 뭐든지 과하면 좋지 않으니, 이런 생활끝에 37세의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그는 물랭루즈라는 유명한 캬바레에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많은 유화작품을 남겼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서 그가 고흐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일이다. 두 사람은 처지가 비슷해서인지 절친한 친구로 지냈으며 같이 2인전을 열기도 했었다. 그러나 로트렉의 주된 작업은 석판화를 통해서 이루어졌는데, 물랭루즈의 광고전단지나 삽화를 제작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러한 작업이 후대의 포스터 작업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앤디 워홀의 작품도 상당부분 이에 기인한다. 한편, 로트렉은 물랭루즈의 댄서들을 포스터로 많이 남겼는데, 대부분이 검은색을 강조하여 표현했으며, 여기에 노란색과 빨간색을 가미하여 매우 간략하고 강렬한 인상을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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